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238화 (238/254)

나날이 새로웠다 (4)

봄도 어느덧 다 지나갔지만,

내 인생의 봄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 곳인지 왜 몰랐던 걸까.

무채색이던 나의 세상은 단 한 사람에 의해서 다채로운 빛과 색으로 채워졌다.

선선한 바람만 불어도 미소를 짓는 내 모습을 본 이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면이 나한테도 있었나?

나조차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생겼다.

하지만 그게 나쁜 쪽은 아니라 주변에 있는 이들은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겨주었다.

데이트를 하느라 회사에 거의 붙어있지 않는데도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절대 나를 찾지 않았다.

너무 심해서 서운할 정도였다.

다들 내가 없어도 회사가 잘 돌아간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심지어 수호는 가능하면 출근하지 말라고 부탁까지 하더라.

“이번 기회에 오저당 그룹의 체계를 한 차례 정리하려고 합니다.”

세 명의 오저당 이사와 회의 중.

나는 며칠 동안 고민한 내용을 꺼냈다.

이번 기회에 국내도 해외 법인들처럼 사장 자리를 넘길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놀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대신 나는 성근 선배가 준비 중인 M&A 부서 쪽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더구나 분기마다 각국의 법인을 방문할 생각이라 일이 줄어들진 않을 것 같았다.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각각의 법인은 자기 일을 처리하기 바쁜 탓에 누군가는 그룹 단위에서 큰 그림을 그리고 설계할 사람이 필요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수호와 황동선 이사 그리고 조택훈 이사는 표정이 굳었다.

셋 중에 누가 새로운 사장이 될 건지 미리 언질조차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 분 중에 누가 되시더라도 다른 두 분이 잘 보좌해주실 거라 믿겠습니다.”

“물론이죠. 바뀌는 것은 없을 겁니다.”

가장 먼저 조택훈 이사가 입을 뗐다.

아마도 가장 늦게 임원이 됐고 굿밤 맥주 공장장인 자신이 그 자리에 올라가진 않을 거라 판단한 것 같았다.

그 뒤를 이어 수호와 황 이사도 조택훈 이사와 똑같은 반응을 보였다.

솔직히 생산과 사무를 책임지는 두 사람 중에 누가 되어도 문제 될 것은 없었다.

내 선택은 황동선 이사였다.

이사진 중에 가장 나이가 많았고 지금껏 사무직 관리와 경영 쪽에서 나를 지원해준 그가 가장 적당하고 여겨졌다.

“오저당은 앞으로 황동선 이사님이 맡아주세요.”

“축하드립니다. 황 이사님 아니지 이젠 황 사장님이라고 불러야겠네요.”

수호는 가장 먼저 환하게 웃으며 축하의 인사를 해줬다. 어쩌면 속이 쓰릴 만도 한데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황 이사가 미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 때문에 받은 자리라 생각됩니다. 제가 아니라 유수호 이사가 대표가 되어도 충분히 잘 해낼 겁니다.”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네요.”

“내년이 되어야 이제 서른인데 너무 어린 나이에 사장 자리에 올라가봤자 고된 일만 가득할 것 같으니 제가 거절할게요.”

수호는 손사래를 치며 오히려 다행이란 말을 꺼냈다. 녀석도 내가 사장 자리에 있으며 겪었던 일을 옆에서 봐왔다.

나이와 외모만 보고 가볍게 보는 이들이 생각보다 많이 있었다. 그런 짓들을 보고 수호가 과연 참아낼 수 있을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여겼다.

어차피 수호에게도 기회는 많았다.

너무 빠르게 사장 자리에 앉으면 더는 올라갈 곳도 없었다.

“대신 10년쯤 후에 황 사장님이 은퇴하실 때가 되면 제가 그 자리를 가져갈 테니 각오하세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수호 이사님이 원한다면 언제든지요.”

“제 순서까진 오지도 않을 것 같으니 저는 굿밤 맥주 공장장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혼자 해 먹겠습니다.”

조택훈 이사의 말에 다들 웃었다.

대충 상황 정리가 된 것 같았는지 황동선 신임 사장은 내 거취에 대해 물었다.

“그러면 이제 회장님으로 올라가시는 거 맞죠?”

“썩 마음에 드는 호칭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야 하겠죠. 그에 맞게 그룹 직속 부서를 몇 개 만들 생각입니다.”

“M&A 부서도 그곳에 포함되겠군요.”

나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이 앞으로 그룹 전체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부서가 될 것이다.

그리고 비서실을 따로 두고 다미안 밑에 몇 명의 직원을 더 채용할 생각이었다.

“당연히 다미안도 저와 함께 이동할 테니 황 사장님은 따로 비서를 뽑으세요.”

“물론이죠. 회장님의 사람을 낚아챌 생각은 없습니다.”

“그리고 전에 말했듯이 그룹 전체를 감사할 부서도 신설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타이트하게 관리해야 할 겁니다.”

이미 이 부분은 어느 정도 교감이 있었기에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각국에 흩어져 있는 해외 법인과 국내 오저당과 F&B까지 사업체가 꽤 많았다.

분명히 크고 작은 비리가 있겠지.

지금까지는 각각의 사업체를 책임지는 이들에게 믿고 맡겼으나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이 되듯,

횡령과 비리는 사소한 것부터 시작한다.

오저당 내부에서 대형 사건은 없었으나 아직 발견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잖아.

“사무실은 서울에 얻으실 겁니까?”

“아니요. 아직 거기까지 정하진 않았습니다.”

향이 때문에 양조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생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더구나 올해 완공된 집을 두고 다른 곳에 정착하는 것도 조금 애매했다.

그런데도 곧장 대답하지 못한 이유는 연우와의 관계도 고려해야만 했다.

이제 막 사귀기 시작했는데 장거리 연애를 하자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언젠가 날을 잡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 의논을 해봐야 하는데 장래를 약속한 사이는 아니라 조금 애매하긴 했다.

만약에 원래 예정대로 서울에 레스토랑을 오픈할 생각이라면 삼척에서 오가며 생활하는 것도 고려 중이었다.

그렇게 되면 지금 집을 거의 주말용 별장쯤으로 활용하게 되겠지.

“그러면 비게 될 이사 자리는 누가 올라가게 되는 겁니까?”

“재무부서를 책임지고 있던 서준석 부장을 이사로 승진시킬 생각입니다.”

“그게 좋겠네요.”

“오늘은 시간이 별로 없으니 회의는 여기까지 하죠.”

회의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수호는 나한테 서울로 가는 것을 권했다.

뭘 원하는 건지 눈에 빤히 보였다.

아마도 비게 될 내 집을 원하는 거겠지.

“훗! 거길 공짜로 쓰려고?”

“월세 정도는 내줄 의향은 있어.”

“시끄럽고 원래 계획대로 집이나 지어.”

“빌어먹을··· 생각보다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니 그렇지.”

“RJ형이나 우리 집보다 규모가 작아서 그렇게 많이 나올 것 같진 않은데.”

“7억이 쉽게 생각할 돈이냐?”

수호가 앓는 소리를 냈지만,

걱정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다.

이 녀석이 통장을 오픈하진 않았는데 내 예상으로는 꽤 많이 모아놨을 것이다.

초창기에는 연봉이 그리 높진 않았으나 최근 2년 동안은 성과급까지 합치면 매년 1억 5천 정도는 받아가고 있는 중이다.

얼마 전까지 내가 받던 연봉과 비교해도 그렇게 큰 차이가 있진 않았다.

“공사비가 부족하면 말해. 은행 이자보다 저렴하게 빌려줄게.”

“연봉을 올리더니 여유가 넘치시나 봐.”

“아직 받지도 못한 돈이다. 빌리기 싫으면 그 대신에 너희 집 완공되면 가전제품으로 크게 쏠게.”

“그 약속 잊지 않으마.”

이번에 회장으로 올라가며 연봉을 대폭 올리기로 했다. 기존에도 억대 연봉이긴 했으나 그걸로는 조금 부족했다.

그래서 F&B와 오저당까지 합쳐서 7억쯤은 받기로 했다.

오저당 규모의 회사에서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다. 국내 업계 1위인 로하트의 CEO가 30억쯤 받고 있다.

7억이면 정말 양심껏 책정한 거다.

오저당은 다른 회사와 다르게 모든 지분이 내게 있으니 매년 백억 단위로 가져가도 어느 누가 뭐라고 하겠어.

당연히 그 문제에 대해서 이사진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부족하다고 여겼다.

내가 많이 가져갈수록 나중에 이사진의 연봉 수준도 높아지기 때문이었다.

기존까지는 나보다 더 많이 받을 수 없기에 본의 아니게 억제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었다.

황동선 사장부터 시작해서 이사진의 연봉 역시도 이번 기회에 올리기로 했다.

대기업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중소기업 중에서는 손꼽힐 정도는 되었다.

“이렇게 내 집 마련의 꿈은 등 떠밀려서 이루게 되는 건가?”

“공사는 언제 시작하는 거야?”

“다음 주부터. 공사하기 시작하면 상당히 시끄러울 텐데 괜찮겠어?”

“RJ 형도 미국 일정 잡혀서 잠시 집을 비운다니 괜찮을 거야.”

RJ는 몇 개월 동안 칩거 수준으로 집에만 머물더니 이제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다.

혼자 활동하는 것은 아니고 멤버들끼리 유닛을 짠 것 같았다. 다음 달에 잡힌 음악 페스티벌만 합쳐도 세 곳은 된다.

“너랑 연우 씨는 어쩌려고?”

“일단 상황 봐서 서울에 잠시 머물며 M&A 세팅하는 거 지켜보려고.”

“아직 인수합병 대상 기업은 안 정해진 거지?”

“응, 일단 인력 세팅하면서 살펴보고 있는데 딱히 눈에 띄는 데가 없더라.”

이게 쇼핑하듯 정할 문제는 아니다.

제대로 된 사냥을 하려면 최소한 몇 개월 정도의 사전 조사가 필요하다.

그렇게 쌓은 정보는 곧 돈이 된다.

“이번 기회에 아예 서울 쪽에 집을 한 채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집은 왜?”

“호텔에서 계속 머무는 것보다 그게 더 저렴하잖아. 회장님이라고 회사돈을 막 쓰고 그럴 거는 아니지?”

“공짜로 머물 수 있는 삼촌 집이 있잖아.”

“거길 간다고? 눈치 좀 챙겨라.”

물론, 농담이었다.

요즘 삼촌은 반쯤 동거 상태였다.

저번에 가보니 내가 쓰던 방에는 이옥주 이사의 짐이 가득했다. 참고로 조만간 청첩장이 나올 것이 확실해 보였다.

“그래도 나보다 삼촌이 먼저 결혼할 것 같아서 다행이야.”

“풉! 사귄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결혼 생각부터 하는 거야?”

그때 라니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평소답지 않게 차려입은 터라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10대와 20대를 온전히 받쳐서 사랑하던 아이돌 멤버가 결혼하는 장소에 간다니 혼신의 힘을 다해 준비한 것 같았다.

“준비는 다 끝냈어?”

“물론이지.”

“결혼식에 가서 ‘이 결혼 반대합니다!’ 라고 외치며 진상 짓을 벌일 생각은 아니지?”

아직 라니의 비밀을 모르는 수호는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했다. 그게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어서 입이 간지러웠다.

“혹시 모르지. 오늘 저녁 뉴스에 내 얼굴이 큼지막하게 나오면 참지 못하고 저지른 거라고 생각해.”

“어이구···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슬슬 가야 하는데 연우 씨는 아직이야?”

“10분 후에 오라고 했으니 슬슬 가서 픽업해야지.”

시계를 보니 움직일 때가 되긴 했다.

내가 허머의 문을 열자 라니가 눈치 빠르게 보조석이 아닌 뒷좌석에 앉았다.

곧장 차를 빼서 집에 도착하자 이미 준비를 마친 RJ와 연우가 보였다.

“어머! 연우 씨 오늘따라 너무 예쁘네요.”

“언니도 마찬가지예요.”

“자자! 이야기는 가면서 하죠. 제가 멤버 결혼식에 늦으면 대형 사고입니다.”

“늦지 않게 모셔다드릴 테니 타세요.”

RJ는 곧장 라니 옆에 앉았다.

연우도 당연하다는 듯이 보조석에 탔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연우도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

같은 집에 살고 있으니 모를 수가 없지.

그래서인지 둘은 우리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벌써 알콩달콩했다.

이거 생각보다 운전하기 꽤 힘들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원래는 다미안이 운전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저런 모습을 보여줄 수 없어서 운전대를 내가 잡을 수밖에 없었다.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는 이해됐다.

나와 연우가 매일 여러 곳을 다니며 데이트를 하는 것과 달리 두 사람은 함께 어딘가를 가는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이 많기에 눈을 피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은 탓이었다.

해외로 도피하는 것도 의미 없다.

월드 스타인 탓에 어쩌면 해외에서 더 쉽게 RJ를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탓에 결혼식에서 내가 에스코트해야 할 사람은 연우 외에도 라니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당연히 그 정도는 해줘야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사촌 오빠인 RJ를 위한 것이니 연우도 이해해줬다.

시동을 걸고 집 밖으로 나오자 향이는 평소 습관대로 대시보드 앞에 앉았다.

하지만 녀석만 혼자인 것은 아니었다.

언제나 한 세트처럼 함께 다니는 검이가 옆에 앉았다. 매번 느끼는 건데 저러고 있으면 고개를 까닥이는 인형 같았다.

향이는 옆에 앉은 검이를 향해 결연한 표정으로 주의를 줬다. 지금껏 당한 게 있으니 충분히 예상 가능한 미래였다.

[오늘은 무려 더블데이트야. 닭살 돋는 행동을 자주 할 테니 정신 바짝 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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