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도 궁합이 있답니다 (3)
향이의 외침을 듣고,
나는 틀린 부분을 정정해줬다.
로그로뇨는 셰리 와인이 아닌 리오하 와인의 산지다. 그걸 들은 향이는 약간 머쓱 해했으나 크게 상관하진 않았다.
로그로뇨 역시 와인의 도시다.
도시 주변에 있는 많은 와이너리가 저마다의 특색을 가진 와인을 빚어낸다.
오죽하면 스페인 와인에 대해 잘 모르면 그냥 리오하 와인을 고르면 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역사가 매우 길진 않다.
이 지역에서 와인을 빚은 것은 로마 시대부터이나 상업적인 와이너리가 처음 세워진 것은 1850년이다.
하지만 성장 속도는 엄청났다.
그 무렵에 터진 백분병 때문이다.
흰가루병이라 불리기도 하는 병이 창궐한 탓에 프랑스의 와이너리는 크게 휘청였다.
하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심지어 20년 뒤에 필록세라 진드기까지 포도나무를 갉아 먹는 상황까지 왔다.
그 탓에 보르도 같은 곳에서 많은 이들이 몰려왔고 그때 현재 리오하 와인을 대표하는 와이너리가 대거 생겼다.
“다미안이 평소 말해주던 스페인 날씨와는 조금 다른 것 같네요.”
스페인의 여름 날씨는 악명 높다.
몇 년 전부터는 폭염이 와서 심할 때는 41도까지 오르고 천여 명이 폭염으로 사망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로그로뇨는 조금 선선한 수준에 불과했다.
“리오하 지역이 북쪽이라 그렇죠.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조금 달라요.”
“말라가라고 했었죠?”
“네, 지브롤터 해협 근처의 도시입니다.”
다미안은 스페인 출신이다.
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란 탓일까.
모처럼 스페인에 돌아와서 그런지 평소보다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한국어가 많이 늘었으나 아직은 모국어인 스페인어가 더 편할 수밖에 없었다.
다미안과 호세 덕분에 나도 스페인어가 제법 늘어서 통역은 필요 없었다.
기초적인 수준에 불과했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대화를 나누는 데 문제없었다.
주류 산업 일을 하면서 느낀 건데 영어와 스페인어 그리고 프랑스어는 어느 정도 할 줄 알면 꽤 편했다.
“일정이 빨리 끝나면 잠시 말라가를 경유해서 돌아가는 걸로 하죠.”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휴가 다녀온 지도 꽤 됐잖아요.”
이번 일정은 조금 여유롭게 잡았다.
기왕에 온 김에 이 근방에 있는 와이너리 투어도 해보고 돌아갈 생각이었다.
연우와 하루라도 떨어져 있기는 싫으나 그렇다고 일에 소홀할 수는 없었다.
나 혼자만의 회사가 아니다.
같이 일하는 그룹의 직원만 천여 명이고 그들의 가족까지 합치면 내가 책임져야 하는 이들의 숫자는 셀 수 없었다.
[빌바오 도착,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해.]
그때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스마트폰을 열어서 확인해보니 성근 선배가 보낸 것이었다. 선배는 다른 직원들과 함께 빌바오로 향했다.
빌바오에 피레시아 본사가 있다.
당분간 부서 직원들을 데리고 선배가 그곳에서 해야 할 일이 꽤 많았다.
이게 적대적 인수합병이라 실사를 나간 것은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도적에게 곳간을 열어줄 사람은 없다.
그런데도 스페인에 머무는 이유는 인수합병을 위한 전략 수립과 동시에 주주들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함이었다.
“장성근 부서장과 직원들도 방금 빌바오에 도착했다네요.”
“빌바오가 여기 로그로뇨 공항이랑 거리상으로는 그리 멀진 않으니까요.”
“100km쯤 되려나요?”
“정확하진 않은데 150km는 넘지 않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차로 1시간 30분쯤 걸리려나.
숙소를 아예 그쪽에 잡아도 되지만, 서로 목표로 하는 것이 조금은 달랐다.
그래서 몬티엘 펀드의 일을 마무리하기 전까지는 합류할 필요가 없었다.
이번 미팅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20%의 지분을 가진 몬티엘을 확보하지 못하면 어떤 결과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그런 자리에 내가 가는 이유는 그쪽에서 나를 만나보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이유는 아직 알 수 없었다.
뭔가 바라는 게 있다는 의미겠지.
그걸 어떻게 충족시켜주냐에 따라 이번 만남의 성과를 바꿔놓을 것이다.
“일단 호텔로 가서 조금 쉬죠.”
우리는 곧장 택시부터 찾았다.
공항에서 시내까지 거리는 그리 멀지 않은 탓에 차를 빌릴 필요는 없었다.
에브로강을 따라 시내로 들어가자 15만 명 정도가 사는 작은 도시가 나왔다.
어느 곳은 전형적인 유럽의 소도시 느낌이 들었고 어떤 거리는 8층 아파트가 줄지어 서 있어 계획도시 같았다.
“여기도 산티아고 순례길인가요? 은근히 배낭을 메고 걷는 사람이 있네요.”
“제가 알기로는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우선은 호텔에서 조금 쉬고 저녁쯤에 트롬파스(trompas)에 가보죠.”
우리나라는 술에 취하면 개가 된다고 말을 하는데 여긴 트롬파스(코끼리 코)가 된다는 말을 사용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타파스 가게가 모인 거리에 트롬파스라는 애칭이 붙었다.
200여 개의 타파스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선 그곳에서는 에피타이저 종류 중의 하나인 타파스와 와인을 맛볼 수 있다.
가게마다 각각의 특색이 담긴 타파스를 판다니 여러 곳을 다닐 생각이었다.
“제가 장담하는데 리오하 와인은 어디 내놔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하하, 스페인 와인의 자존심이라고 하던데 기대하고 있어요.”
“여기서 재배 중인 품종이 14개인데 템프라니요와 마카베우 품종이 들어간 블랜딩 와인이 최고라고 하니 그것부터 드셔 보시죠.”
다미안도 오저당에서 일하며 술에 대한 공부를 많이 하고 있는 중이었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이젠 어디 가서 아는 척을 할 정도는 되었다.
참고로 이곳에서 내놓는 리오하 와인은 거의 모든 와인이 한 가지 품종 이상을 블랜딩해서 내놓기로 유명했다.
그만큼 각각의 양조장에서 보유한 노하우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이런 기회가 흔치 않으니 최대한 많은 술을 테이스팅해보도록 하죠.”
*
로그로뇨에서의 시간은 흥미로웠다.
다미안과 나는 시내를 돌아다니며 여러 종류의 타파스와 와인을 먹고 마셨다.
고소한 마늘과 버섯구이 타파스도 꽤 맛이 있었고 포도나무의 가지를 넣어 숯으로 구운 고기도 훌륭했다.
무엇보다 와인이 출중했다.
지금까지 여러 나라의 와인을 마셔본 경험이 있었는데 여기가 최고라 말할 수는 없어도 내 입맛에는 꽤 잘 맞았다.
그 탓에 시간 가는 줄 몰랐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몬티엘 펀드와 약속이 다가왔다.
평소와 다르게 정장을 입은 우리는 사무실이 있는 데 콜론 거리로 향했다.
“정말 이 주소가 확실한가요?”
택시에서 내린 우리는 주변을 한번 살펴봤는데 딱히 눈에 띄는 게 없었다.
거리는 번화가였고 사람들이 제법 있었으나 펀드 사무실이 있을 만한 곳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주소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유럽은 거리 이름과 번지수만 알면 한 블록 이내로 범위를 줄일 수 있다.
그렇게 찾아낸 건물 앞에 선 우리는 5층 숫자가 적힌 초인종을 눌렀다.
달칵!
초인종을 누르고 3초 뒤.
현관문이 자동으로 열렸고,
우리는 가장 꼭대기 층인 5층까지 걸어서 올라가야만 했다. 안타깝게도 엘리베이터 같은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정말 이런 곳에 펀드 회사가 있는 게 맞을까요? 여긴 누가 봐도 주택인데요.”
다미안은 이상하다는 듯이 주변을 살폈다. 피레시아의 지분 20%를 쥐고 있는 펀드의 사무실이라 보긴 어려웠다.
그들이 가진 지분의 가치가 최소 400억 원 이상이니 그렇게 생각할 만했다.
하지만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다.
성근 성배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몬티엘 펀드는 알짜 중의 알짜가 분명했다.
현재 운영하고 있는 금액만 최소 수천억 원 이상이란 예측도 있을 정도였다.
보는 눈도 꽤 정확한 편이었다.
피레시아가 창업할 당시에 투자해서 저렴하게 20%의 지분을 얻어냈다.
우리가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게 어쩌다 한 번 찾아온 행운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게 4층에 도달했을 무렵.
5층에서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 한 분이 고개를 내밀어 우리를 향해 개구쟁이처럼 웃으며 손을 흔들어줬다.
“비센테 무뇨스씨 맞으시나요?”
“먼 길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마중 나와 있던 무뇨스는 안으로 우리를 안내해줬다. 몬티엘 펀드는 가정집을 개조해 사무실처럼 사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엉성해 보이거나 그렇지는 않았고 있을 거는 다 있어 보였다.
직원은 대충 서너 명쯤 되려나.
다들 어디 갔는지 아무도 없었다.
생각보다 조촐한 규모라 놀라웠으나 펀드라는 특성을 생각하면 이해됐다.
뭔가를 끊임없이 생산하는 업종도 아니고 거액의 투자를 매달 하는 것도 아닌데 직원이 많이 있을 필요는 없다.
평소에는 투자한 회사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는지 체크만 하면 된다.
“피레시아를 인수하고 싶으신 거죠?”
무뇨스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일 이야기를 시작하자 장난기 넘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냉철한 투자자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네, OGD가 피레시아를 인수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쇼.”
“우리 펀드의 투자로 성공한 회사인데 주인을 바꾸는 일이 썩 내키진 않네요.”
“투자의 기본이 리스크를 줄이는 거 아니겠습니까.”
현재 추문이 이어지고 있는 에드윈 베르디언의 이름만 빼내도 피레시아는 다시 정상적인 경영이 가능한 상태다.
그걸 무뇨스가 모를 리 없었다.
아직 미련이 남아있는지 그에 대한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베르디언 이름만 들어도 인상이 구겨지는 게 보였다.
“그런데 OGD는 스페인에 아직 진출하지 않은 걸로 아는데 어쩌다가 피레시아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겁니까?”
“제품이 좋으니까요. 제가 피레시아 토닉 워터와 돈 레오넬로 만들어 마시는 테크 토닉이란 하이볼을 무척 좋아합니다.”
“테크 토닉이요? 처음 듣는 거군요.”
“직접 한번 맛을 봐보시겠습니까?”
말로만 설명을 해주는 것보다 직접 경험해보는 게 훨씬 빠를 거다.
그 이야기를 들은 무뇨스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다미안은 가방에서 텀블러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그 안에는 호텔에서 미리 제조해서 온 테크 토닉이 담겨 있었다. 얼음이 녹으며 농도를 바꿀까 봐 칠링만 마친 상태였다.
곧장 잔에 따라 맛을 본 무뇨스는 꽤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돈 레오넬이랑 조합이 좋군요.”
“최근에 OGD에서 이 하이볼을 마케팅 포인트로 잡고 밀어주고 있었는데 피레시아가 저런 상태면 꽤 난감합니다.”
“미국에서 수입하는 양이 늘어난 이유가 있었군요. 무슨 말인지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저희에게 의결권 위임장을 주실 수 있습니까?”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리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무뇨스는 곧장 대답하진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두 가지의 조건이 있다며 내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저도 OGD에 대해서 알아봤는데 걱정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OGD 멕시코를 보면 한국으로 보내는 배당금의 양이 상당한 걸로 알고 있는데 피레시아도 그렇게 되는 건가요?”
무뇨스는 스페인에서 버는 돈은 다시 스페인 내부에서 사용되길 바랐다.
그건 몬티엘 펀드의 특성 때문이었다.
그가 운영 중인 펀드는 대부분 은퇴한 고위 공직자들과 스페인 북부에 사는 지역 유지의 여유자금이라고 했다.
그런데 투자한 회사의 실적이 해외로 흘러나가면 난처해질 수 있다고 했다.
한편으로는 현재 피레시아에서 펀드가 받아 가는 배당금이 꽤 많은 편이다.
그게 줄어들 수 있다는 게 걱정되겠지.
당연히 그는 현재 배당금 비율을 그대로 유지하기 원했다.
“그렇게 하시죠. 아예 배당금을 잡지 않을 거란 약속은 못 하지만, 순수익의 30%는 넘지 않게 하겠습니다.”
내 말을 들은 무뇨스는 20%로 제안했고 협의를 거쳐 25%로 조정됐다. 한해 순수익의 1/4 이내면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멕시코는 돈 레오넬 때문에 조금 특별한 케이스였다.
미국만 하더라도 우리가 배당금으로 20% 이상 받은 적이 없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시죠. 아까 말씀하셨던 두 번째 조건은 뭔가요?”
내 예상으로는 투자를 권할 것 같았다.
현재 피레시아는 아직도 성장 중인 회사였고 이번에 내홍을 겪으며 여러 문제점이 곳곳에서 드러난 상태다.
하지만 무뇨스의 조건은 나의 예상을 벗어났다.
“혹시 OGD 그룹이 스페인에 투자하는 게 이번이 마지막일까요?”
“글쎄요. 스페인에 법인을 세울 계획은 아직 없으나 장담하긴 어렵습니다.”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포르투칼에 투자를 하게 되면 저희 펀드도 같이 들어갈 수 있게 기회를 보장해주시죠.”
물주가 되어주겠다는 뜻인가.
그런 거라면 우리 쪽의 손해는 아니다.
하지만 현지 법인을 세울 때 투자를 받겠다는 말은 아니었다. 내가 그걸 설명하자 무뇨스는 웃으며 고개 저었다.
“그건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피레시아 같이 지분 싸움을 해야만 하는 경우는 조금 다르겠죠?”
“그렇기는 하죠. 왜 하필 OGD인가요?”
“저희 펀드는 턴 어라운드로 기업 사냥을 해서 돈을 버는 곳이 아닌 지속 가능한 곳에 투자해서 배당금 수익을 내는 게 원칙이거든요.”
무엇보다 OGD의 성장세를 보면 어떤 펀드라도 탐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돈 레오넬과 벽향주만 보더라도 거의 무에서 유를 창조한 수준이긴 했다.
그런 제안이 처음은 아니었다.
예전에 헬리엇도 그랬고 여러 자리를 통해서 만난 펀드 매니저 대부분이 오저당의 투자에 함께하길 원했다.
스코틀랜드를 제외하면 현재까지 오저당이 투자해서 성과를 내지 못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스코틀랜드도 내년이면 정상화가 될 거라 예상되기에 현재 진행형에 가까웠다.
“그런 제안이라면 언제든 환영입니다. 좋은 증류소나 와이너리가 있다면 오히려 제가 부탁드리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