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도 궁합이 있답니다 (4)
몬티엘 펀드의 무뇨스.
그와의 협상은 잘 마무리됐다.
하지만 곧장 의결권 위임장을 받아낼 수는 없었다. 그전에 서로 조건을 주고 받을 것에 대해 계약서를 만들어야 했다.
말만 믿고 일을 진행할 수는 없잖아.
그래서 변호사까지 불러서 MOU 체결을 하고 프랑스와 스페인 그리고 포르투갈에 대한 투자 협약을 걸었다.
주류 업계에 한정해서 3개국에 적대적 인수합병을 진행할 때 몬티엘 펀드에도 참여할 기회를 주는 내용이었다.
내가 거기에 사인을 하자 무뇨스는 곧장 몬티엘 펀드의 의결권을 넘겼다.
“위임장이랑 MOU 계약서 사본을 메일로 보냈다고 하는데 받으셨어요?”
나는 곧장 선배에게 전화를 했다.
거기서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면 이제 더는 내가 스페인에서 할 일은 없었다.
선배는 잠시 기다려달라고 하더니 이내 들어왔다고 대답했다.
[그런데 조금 이상한데? 위임장이 여러 장인데 이거 다 합치면 20%가 아니라 25%가 넘어갈 것 같아.]
“무뇨스씨가 다른 주주 몇 명을 설득해서 저희 쪽에 5% 지분에 대한 의결권 위임장을 가져다주셨어요.”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무뇨스가 알아서 나서준 덕분이었다. 이번에 확실하게 베르디언을 몰아낼 생각인 것 같았다.
그 이야기를 들은 선배는 좋은 소식이라며 웃었다.
[잘됐네! 5%면 적어도 100억 이상은 절감할 수 있잖아.]
물론, 당장 나갈 돈이 줄어들 뿐이다.
어차피 에드윈 베르디언이 가진 32%의 지분을 가져오는 것까지 마무리되어야 확실하게 끝나게 된다.
매집한 주식과 그가 가진 주식.
두 가지를 합쳐서 51%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최종 목표였다. 물론, 그걸 인수 과정에서 이뤄내는 거는 불가능하다.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했다.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나요?”
[충분히 매집이 끝나면 베르디언을 끌어내려야지. 다행히 이번에 조사하면서 배임 혐의도 찾아내서 문제없을 거야.]
“그건 어떻게 찾은 거예요?”
[무뇨스 씨가 보내준 재무제표랑 회계 자료 보니 구린내가 나더라. 그래서 재무 직원 몇 명을 조사해봤지.]
하지만 법원까진 가지 않을 거다.
재판에 들어가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기에 딜을 넣어볼 예정이었다.
현재 확보한 이사의 숫자가 이사회를 열 수 있을 정도는 충분히 되었다.
그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베르디언이 회사를 망치는 것을 지켜 보는 것보다 글로벌 그룹인 OGD에 합류하는 것이 누가 봐도 현명한 일이다.
“대표이사는 누구로 올릴 건가요?”
[아직 고민 중인데 새롭게 외부에서 데리고 오는 것보다 내부에서 뽑는 게 아무래도 반발이 적겠지.]
“적당한 사람은 있어요?”
아무나 대표 자리에 올릴 수는 없다.
비상 상황을 헤쳐 나갈 능력은 기본이고 거기에 베르디언과 같은 문제를 저지를 사람은 절대 쓸 수 없다.
한 번은 실수라고 하지만,
두 번째부터는 이미지가 굳어진다.
당분간 피레시아는 실추한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어떤 논란도 있으면 안 된다.
[그전에 이것 하나만 물어보자. 스페인에 오저당 현지 법인을 만들 거야?]
“그건 왜요?”
[세팅 자체가 달라지니 그렇지.]
“어차피 피레시아와 OGD 그룹은 같이 놓고 볼 수 없는 회사잖아요.”
피레시아는 조금 다르게 봐야 한다.
온전히 우리 것이 아니기에 추가 투자 과정도 복잡하다. 주주배정방식의 유상 증자를 하려면 정관부터 고쳐야 한다.
물론, 방치할 생각은 없었다.
그룹 차원에서 상생할 수 있는 방안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다.
돈 레오넬과 테크 토닉을 이용한 마케팅이 그 대표적인 예다.
해외 법인을 만드는 기준은 간단하다.
100% 지분을 가져오거나 합병이 가능한 곳이 생기면 해당 국가의 사업체를 관리할 법인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게 아니면 굳이 법인을 새로 만들어서 일을 복잡하게 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각각의 증류소를 따로 놀지 않게 그룹 차원에서 관리 정도는 해야지.
[오케이, 무슨 말인지 이해했어.]
“그리고 대표이사 후보가 나오면 몬티엘 펀드의 무뇨스 씨와 논의해보세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우리보다는 그쪽이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 어쩔 수 없죠. 아마 아니다 싶은 사람은 알아서 걸러줄 거예요.”
통화는 제법 오래 이어졌다.
선배가 M&A를 처음 진행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와 함께 일하는 것은 처음이라 우리끼리 합을 맞춰야 했다.
그래도 한두 번 이렇게 일을 진행하면 크게 신경 쓸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이번에 뽑은 M&A 부서의 직원들 모두 경력이 제법 많아서 일의 진행 속도도 생각보다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띠띠띠디!
그때 스마트폰의 알람이 울렸다.
무슨 알람인지 뻔히 알기에 화면을 확인할 것도 없이 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호텔 방 밖으로 나왔다.
로비로 내려가니 이미 다미안이 내려와 있었고 그 옆에는 무뇨스 씨가 있었다.
두 사람은 뭐가 그리 즐거운 건지 스페인어로 웃으며 대화하고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아냐, 방금 왔어. 예약해 놓은 시간에 맞춰 가야 하니 바로 출발하지.”
우리는 곧장 호텔을 나와 무뇨스가 타고 온 차를 타고 도심 외곽의 포도밭이 넓게 펼쳐져 있는 지역으로 향했다.
머지않아 도착한 곳은 로그로뇨 지역을 대표하는 3대 와이너리 중의 하나였다.
[이곳에서 우리가 마셨던 리오하 와인이 만들어지는군요!]
향이는 신기한 듯 주변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여러 증류소와 양조장을 다녀봤으나 포도밭과 붙어있는 전통적인 와이너리는 처음이었다.
당연히 나도 향이와 다르지 않았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내 모습을 본 무뇨스는 설마 하는 표정으로 와이너리에 처음 와본 거냐고 물어봤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한국에는 이런 와이너리가 거의 없거든요.”
와인을 만드는 곳이 없진 않으나 와인에 적합한 포도를 재배할 환경이 안 된다.
그래서 와인이라고 이름을 붙였으나 정작 사용하는 재료는 머루나 감 그리고 다래 같은 변형된 것도 제법 많았다.
그렇다고 아예 없진 않다.
와이너리에 뜻을 품은 이들이 새로운 품종을 도입해서 꽤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했다.
역사에서 오는 차이가 크다.
유럽의 유명한 와인은 오래된 경험과 환경에 맞춘 품종으로 무장되어 있다.
이곳의 포도 역시 기후와 일조량 그리고 온도에 적합한 것을 찾아내 재배 중이다.
모든 경험은 대를 이어서 전수되고 그 역사가 곧 가치를 만들어내고 있다.
새삼스레 술을 빚는 데 사용되는 재료에 조금 더 신경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국내 양조장과는 술을 빚는 자세부터 완전히 다르구나.’
와인만큼 재료에 진심인 술이 있을까.
우리를 데리고 포도밭을 걸으며 가이드가 해주는 말에는 포도알 하나하나 아끼는 마음이 듬뿍 묻어나오고 있었다.
가치는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가격만 높게 올린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와인 업계를 통해 오저당도 배울 점이 분명히 있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직원들 연수 프로그램에 와이너리도 넣어야겠네요.”
“이쪽으로 잡으면 될까요?”
“아니요. 굳이 그럴 필요는 없죠. 그냥 후보지 정도로만 넣어두세요.”
리오하 와인이 품질은 좋지만,
와이너리가 여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아르헨티나 같은 곳도 여기 못지않게 와이너리가 밀집되어 있다.
생산량의 차이는 수치로 증명된다.
하지만 어떤 게 최고라 가릴 수는 없다.
저마다 입맛이 다르고 와인을 통해 쌓은 경험도 천차만별일 것이다.
예를 들어 우주와 유성은 첨가물과 물이 들어가서 애주가 사이에서 와인으로 치지도 않는 J사의 와인을 좋아한다.
3천 원도 안 되는 가격과 함께 다른 어떤 와인보다 단맛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걸 술알못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내 입맛에 맞으면 그게 최고의 술이다.
오저당의 술이 현재는 보편적인 인기를 끌고 있으나 누군가에게는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면 이제 와인 빚는 곳으로 가볼까요?”
와이너리가 제공한 가이드를 따라 향한 곳은 와인을 숙성하는 저장고였다.
하지만 보통의 관광객과 달리 우리는 가지고 있는 관점이 조금 달랐다.
무뇨스는 투자자 관점에서 보는 시야를 가졌고 나는 생산과 관련된 것들과 무엇보다 오크통에 관심이 많이 갔다.
일종의 직업병과 흡사한 것이었다.
와이너리 내부에는 리오하 와인을 대표하는 곳답게 많은 요정이 있었다.
심지어 초급 요정도 보였는데 그들을 본 향이는 꽤 기뻐했다.
[다들 모여봐.]
향이의 지시에 의해 모인 스페인의 요정들은 붉은색의 플라멩코 의상과 심지어 투우사 복장을 한 녀석도 보였다.
대체로 다른 나라에 비해 꽤 화려했다.
그건 다른 와이너리도 비슷했다.
무뇨스의 안내를 받아 그날 우리는 리오하 와인의 삼대장이라 불리는 대표적인 와이너리를 모두 들렸다.
해 질 무렵에 다시 시내로 돌아온 무뇨스는 자신이 즐겨 가는 타파스 가게에 우리를 초대해서 소감을 물어봤다.
나는 그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해줬다.
“좋네요. 포도밭도 넓고 설비도 잘 관리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 시음했던 와인이 모두 맛있었어요.”
“좋게 봐줘서 다행이네. 여기 사는 사람들은 모두 리오하 와인에 대해 엄청난 자부심을 가지고 있거든.”
“가이드의 자세만 봐도 느껴지더군요.”
세 곳 모두 가이드의 열정이 상당했다.
리오하 와인에 대한 애정이 없다면 그런 느낌이 들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업계 종사자에게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여기서 머물며 며칠 동안 여러 타파스 가게를 돌아다녔는데 현지인은 대부분 리오하 와인 외에는 마시지도 않았다.
어느 와이너리의 것을 마시냐의 차이일 뿐이었다.
와이너리 산업이 이 도시의 핵심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삼척과 태백만 하더라도 오저당의 술을 최고로 쳐줬다.
오저당이 내놓는 제품이 어느덧 지역을 대표하는 술이 된 것이다.
“내 목표는 오늘 갔던 와이너리 전부를 인수해서 하나의 회사로 묶는 거야.”
술이 약간 올라온 탓일까.
무뇨스는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아니 정확하게는 소임이라고 여겼다.
이유를 물어보니 글로벌 규모의 와인 회사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라 했다.
“스페인이 와인 생산량만 놓고 보면 세계 3위인 걸로 알고 있는데요.”
“하나씩 따져보면 상황이 좋지 않아. 매년 나오는 통계 수치도 떨어지고 있고.”
“심각한 상황인가요?”
무뇨스는 그건 아니라며 고개 저었다.
아직은 그렇게 심각한 수준에 도달하진 않았으나 뒤늦게 후회해봤자 돌이킬 수 없을 거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미 여러 징조가 나오고 있거든. 하지만 이 망할 노인네들이 고집만 남아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는 걸 극도로 싫어해.”
“설득이 불가능한가 보군요.”
“맞아. 새로운 시스템도 들여놓고 OGD처럼 시대에 맞는 마케팅도 해야 하는데 그게 뭐가 어렵다는 건지.”
고인물은 썩기 마련이다.
안타깝게도 리오하에 있는 와이너리 대부분은 정체되어 있는 상태라고 했다.
일부 젊은 사장들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으나 규모가 작은 곳들이라 전체적인 변화의 바람이 일으키진 못했다고 했다.
업계에서 선두에 서 있는 곳이 바뀌면 저절로 후속 주자는 따라올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무뇨스의 주장이었다.
“그런데 세 곳의 와이너리 모두 생각보다 덩치가 커서 거길 다 합치려면 자금이 엄청나게 들어갈 것 같은데요.”
“우리 펀드에 있는 투자자 상당수가 내 뜻에 동의해줘서 어느 정도는 확보했어.”
“와··· 도대체 펀드 자금력이 어느 정도인 거예요?”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성근 선배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펀드의 규모가 클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내 구상이 성공해도 거길 믿고 맡길 사람이 있냐는 거지. 그 망할 놈처럼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면 다 망하는 거야.”
여기서 언급된 이는 당연히 이번에 물의를 일으킨 에드윈 베르디언이었다.
그런데 왜 이런 이야기를 나한테 하는 걸까.
“원하시는 게 있으신 것 같은데 그게 뭔가요?”
“하하! 눈치가 빨라서 대화하기 편하네. 만약에 내 계획이 성공하면 경영권을 완전히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그곳을 OGD가 맡아줬으면 해. ”
응? 이건 무슨 뜬금없는 전개지?
와이너리를 떠먹여 주겠다는 건가.
사람을 소개해달라는 부탁인 줄 알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 전환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같이 투자하자는 이야기군요. 하지만 저희는 피레시아 인수 때문에 당장 이 정도 규모는 진행하기 어렵습니다.”
어쩌면 수천억 이상이 들어갈지도 모르는 작업인데 쉽게 볼 수는 없었다.
“말했잖아. 이건 내가 세운 인생의 목표야. 내 나이가 많아도 몇 년 안에 저세상으로 떠날 것 같지는 않단 말이지.”
“대충 어느 정도 예상하고 계십니까?”
“자네와 OGD가 얼마나 진심으로 달려드냐에 따라 변수가 많지만···.”
무뇨스는 잠시 말을 끊었다.
펀드의 자금력과 오저당의 저력.
두 가지를 놓고 계산하는 것 같았다.
그는 이내 웃으며 자신의 예상을 내놓았다.
“짧으면 3년, 아무리 길어야 5년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