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244화 (244/254)

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데 (2)

스위스의 관광 도시 체어마트.

알프스산맥에 있는 그곳의 풍경은 일반적인 도시와는 완전히 달랐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도시 내부에 차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그게 비교적 최근 일도 아니다.

1961년에 법으로 내연 기관 차량의 진입을 막았으니 역사가 제법 길다.

이곳의 교통수단은 오로지 전기로 움직이는 버스와 카트가 전부다.

전체적인 분위기도 많이 다르다.

도시 중심지에 있는 건물은 대부분 전통적인 양식이었고 창문 앞에는 알록달록한 제라늄 화분이 놓여 있었다.

“동화 속 마을 같은 느낌이네요.”

올해 처음으로 나와 동행하는 호세는 체어마트의 풍경이 꽤 낯설었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을 보냈던 멕시코와 한국 외에 다른 나라를 다닌 경험이 적은 탓이다.

“올해 많이 즐겨. 매년 오면 감흥이 조금씩 떨어지더라.”

수호의 말을 들은 호세는 아무리 봐도 질릴 것 같지 않다며 고개 저었다.

“나중에 지아랑 가족 모두 데리고 같이 와서 여행하고 싶을 정도예요.”

“데리고 오면 되지. 이번에 이사로 승진하면서 연봉도 많이 올라갔잖아.”

“4인 가족이 여기까지 오려면 얼마나 비싼데요. 멕시코에 가는 것도 정말 큰마음 먹고 가야 할 정도로 쉽지 않아요.”

하긴 네 명이면 스위스 땅에 발만 딛고 다시 돌아가도 최소 600만 원쯤 하려나.

더 저렴한 표도 있을 수 있으나 아직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몇 번씩 경유하기도 어려우니 어쩔 수 없었다.

더구나 스위스 물가가 엄청 사악하다.

어지간한 관광객들은 외식하는 것조차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의 수준이다.

아무 생각 없이 식사를 마친 후에 받은 영수증을 보면 꽤 놀랄 거다.

“그래도 이사가 됐으니 여기로 오면 숙소와 식사까지 모두 공짜잖아.”

“맞아. 저번에 나도 아내랑 같이 왔을 때 생각보다 많이 나오지 않았어.”

황동선 이사와 조택훈 이사.

두 사람도 옆에서 한마디씩 거들었다.

숙소가 공짜라고 하는 이유는 매년 모이는 이곳 체어마트 부근에 오저당이 소유한 리조트가 있기 때문이다.

오저당이 숙박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고 필요에 의해 3년 전에 인수한 곳이다.

위치도 마을에서 벗어나 조금 한적한 곳에 있고 객실도 칠십여 개에 불과했다.

매년 스위스에 모일 때마다.

숙소를 잡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그래서 마련한 곳인데 처음에는 크다고 느껴졌으나 이제는 부족할 정도다.

작년에 몇 명이 모였더라.

대충 200명 이상은 되었던 것 같다.

각국의 법인 대표와 이사진 그리고 비서 외에도 우수 사원 표창을 받는 이들까지 같이 오니 그 정도였다.

이렇게 한번 모일 때마다 쓰이는 거마비와 숙박비만 수억 원에 달했다.

그나마 그룹에 소속된 곳들이 대부분 유럽에 퍼져있어서 가능한 행사였다.

처음에는 본사가 있는 한국에서 모이는 것으로 예산을 짜봤는데 들어가는 예상 비용을 보고 곧장 포기해야 했다.

그나마 스위스는 유럽 내에서 기차와 승용차로 올 수 있는 곳도 많고 거리가 짧아 비용이 많이 나오지 않았다.

“리조트에서 보낸 카트 왔습니다.”

잠시 이사들과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에 다미안이 다가왔다.

그의 뒤로는 OGD 로고를 홍보용으로 부착한 전기 카트 세 대가 보였다.

우리는 거기에 나눠탄 뒤.

마을에서 벗어나 리조트로 향했다.

그 길에서 보이는 풍경은 꽤 훌륭했다.

멀리 마터호른이 보였고 산등성이에는 이름 모를 노란 꽃이 듬성듬성 피었다.

하지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마터호른의 모습이 예전 같지 않았다.

향이도 그걸 느꼈는지 팔짱을 끼고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젠 만년설이 거의 보이지 않네요.]

매년 여길 올 때마다.

기후 변화가 체감되고 있었다.

처음에 왔을 때와 비교하면 마터호른의 만년설은 거의 다 사라지고 없었다.

그걸 볼 때마다 조금 섬뜩했다.

우리 아이들에게 재산은 물려줄 수 있을지 몰라도 내가 보고 겪은 자연까지 물려줄 가능성은 무척이나 희박했다.

조금 예민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룹에 와이너리도 있기에 어쩔 수 없다.

포도 작황이 어떻게 되냐에 따라 많은 것들이 바뀐다. 실제로 스페인의 와이너리는 사용하는 품종이 바뀌었다.

기존의 품종을 사용해도 당장은 어느 정도 버틸 수는 있으나 멀리 보면 언젠가 기후 변화에 맞춰 바꿔야만 했다.

그건 유럽의 와이너리 대부분이 겪고 있는 딜레마였다.

리조트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OGD 리조트의 외관은 체어마트에 있는 다른 곳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뭔가 독특하게 꾸미고 싶어도 그마저도 허가가 쉽지 않은 지역인 탓이다.

“어서 오십쇼. 회장님.”

리조트 앞에는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본격적으로 모이기 시작하는 날은 내일부터라 며칠 전에 먼저 온 한국 직원 외에는 전부 리조트의 직원들이었다.

예전 같으면 이럴 시간에 일을 하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겠지만, 이제는 이런 상황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저들을 놓고 우월감을 느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매년 고작 일주일 머무는 곳이다.

적어도 그 기간 동안 맡은 일을 착실히 진행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줘야 한다.

그것만 잘해도 리조트 매출에 살짝 마이너스가 생겨도 문제 삼지 않았다.

더구나 리조트에 다른 이들은 없었다.

워크숍이 열리는 기간에는 오로지 오저당 그룹에 소속된 이들만 여길 쓸 수 있도록 예약은 전혀 받지 않는다.

그러니 남들 눈을 의식할 필요는 없었다.

“항상 쓰시던 곳으로 준비했습니다.”

지배인이 나서서 나를 안내하자,

다른 직원들도 각자 맡은 임원이 머물 방으로 하나둘 안내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곳에서 머무는 곳은 호텔로 따지면 스위트룸에 가까웠다.

이미 여러 번 써본 곳이라 지배인은 입구까지만 안내해줬고 나는 다미안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 짐을 내려놨다.

새벽 일찍 스위스 공항에 도착한 터라 살짝 피곤함이 몰려왔다.

“주방장이 조식을 준비했다고 하니 식사부터 먼저 하고 쉬시죠.”

“다미안은 가서 식사하세요. 저는 딱히 입맛이 없네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항공 마일리지가 엄청나게 쌓일 정도로 지난 몇 년 동안 여러 나라를 다녔으나 아직도 시차는 적응하기 어려웠다.

한번 움직이기 시작하면 가능한 많은 나라를 들렀다가 오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그룹 내에 계열사도 꽤 많아져서 분기마다 한 번씩 가는 것은 포기한 지 꽤 오래됐다. 그렇게 다니다간 가족들 얼굴 보는 것도 포기해야겠지.

“그러면 저는 잠시 통화 좀 하고 오겠습니다.”

다미안은 내게 양해를 구한 뒤.

통화를 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요즘 그는 나 외에도 또 하나의 보스를 모시고 있는 중이다.

새로운 보스는 다미안의 아내다.

내가 결혼했던 해에 그 역시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는데 스페인에서 와이너리 M&A를 하다가 만난 여인이다.

나도 연우한테 전화를 할 생각으로 스마트폰을 꺼내려고 했으나 그 이전에 누군가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배인이 룸서비스로 뭔가 보낸 건가 싶어서 문을 열었다.

하지만 리조트 직원은 아니었다.

문 앞에는 뫼리스가 서 있었는데 그는 몇 년 사이에 훨씬 더 광활해진 이마의 땀을 닦으며 방긋 웃었다.

“이런! 제가 더 일찍 오려고 했는데 10분 차이로 늦었네요.”

뫼리스는 현재 오저당 소속이다.

유럽의 여러 증류소를 인수하면서 관리할 인력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를 끌루소에서 스카우트해와서 유럽 전체를 책임지는 EU 본부장에 앉혔다.

뫼리스가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전문 경영인이라 볼 수는 없으나 유통 및 거래처 관리에 경력이 상당한 사람이다.

무엇보다 믿을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었다.

어차피 경영하는 자리도 아니다.

각각의 증류소마다 저마다 경영을 책임지는 자가 있었고 뫼리스는 그들이 만들어내는 결과물을 관리하는 역할이다.

“내일 오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예정되어 있던 일정이 일찍 끝나서 그냥 하루 먼저 왔습니다. 그런데 여기 계속 서서 이야기해야 하나요?”

“하하, 일단 안으로 들어오시죠.”

옆으로 살짝 비켜주자 그는 안으로 들어와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나는 일단 냉장고부터 열어서 음료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어디에서 출발한 건가요?”

“이탈리아요. 베네토에 있는 와이너리를 잠시 들렀다가 왔습니다.”

“거길 또 갔어요? 얼마 전에 저랑 같이 와인 박람회 다녀오면서 갔었잖아요.”

베네토 지역은 와인이 유명하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큰 와인 박람회가 열리고 꽤 유명한 와인 학교도 있다.

당연히 그곳에 있는 와이너리 중에 OGD 그룹이 인수한 곳도 하나 있었다.

“그때 와인 학교 졸업자 데리고 오기로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 문제 때문에 겸사겸사 방문하고 왔죠.”

“아··· 그걸 잊고 있었네요.”

“이번에 MOU 맺고 다음 졸업자들부터 성적 좋은 학생을 추려서 우리한테 가장 먼저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잘됐네요. 그런데 베네토면 거기서 여기까지 차 타고 오신 겁니까?”

뫼리스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베네토 지역의 중심지인 베네치아에서 여기 체어마트까지 거리는 서울에서 부산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간은 조금 더 걸린다.

중간에 밀라노를 거치고 알프스산맥을 관통하는 상당히 긴 터널을 지나와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 체어마트다.

“네, 모처럼 로드 트립을 할 기회니까요.”

“밀라노를 지날 때쯤이면 한창 출근길 정체가 시작될 때였겠네요.”

“나름 넉넉하게 출발했는데 밀라노에서 그렇게 막힐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대화의 주제는 꽤 다양하게 바뀌었다.

유럽 전체를 책임지는 뫼리스와 나누는 대화는 언제나 쉽게 끝나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은 따로 일정이 없기에 시간 여유는 꽤 많았다.

“저번에 추진하기로 했던 유럽 내의 유통망 개선은 어떻게 되고 있나요?”

“차질 없이 진행 중입니다.”

뫼리스의 장점은 역시 유통이다.

그가 본부장으로 일하며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이 바로 각국에서 생산된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유통망의 구축이다.

각각의 증류소에서 딜을 거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유리했다.

모든 제품이 벽향주 같진 않다.

돈 레오넬처럼 유명한 제품도 있고 인지도가 아직 부족한 것들도 있다.

이걸 각각 딜을 넣으면 답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제품을 모을 경우.

그룹 차원에서는 이득이 많아진다.

같은 물량이라도 더 좋은 조건을 받을 수 있고 끼워넣기와 밀어 넣기도 가능하다.

그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강제로 밀어붙이면 문제가 되는 거지 다른 회사에서도 다 쓰는 방법이다.

하지만 모든 물량을 그룹 차원에서 컨트롤하는 것은 아니다.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쓸 수는 없다.

그래서 전체 생산량의 30%는 절대 넘지 않게 가져왔고 더 넣고 싶다고 하는 곳이 있어도 뫼리스에게 받지 말라고 했다.

“30%의 룰은 지키고 있는 거죠?”

“물론이죠. 그 이상은 절대 받지 않고 있습니다.”

“혹시 물량을 더 밀어 넣으려는 곳이 있으면 곧장 저한테 보고하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호의가 권리가 되면 안 된다.

뫼리스가 진행하는 것은 그룹 차원에서 해주는 일종의 지원책에 가까운 것이다.

잘 나가는 곳들의 제품은 굳이 이런 식으로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제품을 어떻게 만들어도 다른 이들이 처리해준다는 인식이 박히면 스스로 발전하는 것을 포기하게 된다.

도태되는 곳들까지 안고 갈 생각은 없었다.

냉정하게 보여도 어쩔 수 없다.

상한 사과를 같이 담아 놓으면 멀쩡한 사과들도 순식간에 상하기 마련이다.

M&A에 성공했다고 모든 사업체가 정상으로 돌아가진 않았다.

일부 증류소는 아직도 정상화 단계를 밟아가며 PMI 전략을 사용하는 중이다.

그리고 그중의 몇 곳은 끝내 포기하고 완전히 해체해서 버린 적도 있었다.

일종의 시행착오 같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손해가 조금 발생했으나 크게 개의치 않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수업료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고 오히려 M&A로 벌어들인 돈이 더 많다.

“아! 한국에서 출발할 때 본부장님 드릴 선물을 가져왔는데 지금 드릴까요?”

“무슨 선물인지 궁금하네요.”

“저번에 부탁하신 거 잊으셨나요.”

뫼리스는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

최근에 어떤 부탁도 하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잠시 후에 내가 캐리어에서 박스를 꺼내자 그는 곧장 알아봤다.

“그건 벽향주 블랙 라벨이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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