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데 (3)
3년 숙성한 옐로우 라벨에 이어,
5년이란 기나긴 숙성 기간을 거쳐서 벽향주 블랙 라벨이 지난해 출시됐다.
그 당시의 분위기는 단순하게 열풍이란 말만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내놓은 수량에 비해,
찾는 이들이 너무나 많았다.
하지만 그 이상의 출고는 불가능했다.
블랙 라벨의 셀링 포인트는 희소성과 최고의 청주라는 지향점에 있었다.
그 덕분에 논란도 제법 많았다.
사람들의 고정 관념은 상당했다.
고가에 판매되는 위스키와 와인은 당연하게 여기나 청주가 비싼 것은 전혀 납득하지 못했다.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작년에 삼천 병의 블랙 라벨을 내놓았을 당시에 소비자 가격이 백만 원이었다.
애초에 그 정도로 숙성한 제품 자체가 없었고 일반적으로 마실 수 있는 청주의 가격도 확실히 아니었다.
[벽향주 블랙 라벨, 선을 넘은 가격]
[100만 원이나 줘야 살 수 있는 청주는 과연 그 값어치를 할까]
[납득할 수 없는 가격의 제품을 내놓은 OGD 그룹의 노림수는?]
기자들은 하이에나 같았다.
작은 논란의 불씨를 크게 키우는 것은 그들의 본능과 같았다. 하지만 머지않아 그런 여론은 금방 잠잠해졌다.
연달아 해외에서 들려온 주류 박람회 성과 덕분이었다. 벽향주 블랙 라벨을 내놓는 곳마다 예외없이 대상을 주었다.
국내보다 먼저 해외에서 더 인정받은 것이다.
오저당에서 빚은 만큼 5년을 숙성해도 거의 수십 년간 숙성한 효과가 들어간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오해도 많이 받았다.
어지간한 이들은 블랙 라벨의 숙성 기간을 최소 30년 이상으로 유추했다.
내가 오저당을 물려받은 것이 올해 11년째가 되기에 이론상으론 말이 안 된다.
하지만 작은할아버지가 운영하던 기간을 고려하면 아예 불가능하지도 않았다.
어쨌든 유명한 테이스팅 전문가들이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 다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때부터 모든 게 바뀌었다.
오히려 K-주류라며 포장을 해줬다.
우리나라의 술이 가진 가치를 인정받은 사례라며 치켜세워주기까지 하더라.
그 무렵에 언론 매체에 광고를 많이 내보낸 것도 한몫했겠지.
“이거 정말 저 주시는 건가요?”
뫼리스는 반지를 탐하던 어느 영화의 캐릭터처럼 블랙 라벨을 품에 안았다.
여기서 그걸 빼앗으면 가만두지 않을 눈빛이었다.
“선물이라니까요.”
“이거 아까워서 못 마실 것 같아요.”
“그건 넣어두고 이걸로 마시죠.”
나는 블랙 라벨 한 병을 더 꺼냈다.
그걸 본 뫼리스는 도대체 몇 병을 가져온 거냐고 물었다.
“열 병이요. 제가 다 마실 거는 아니고 나머지는 우수 사원 선물로 주려고요.”
“보너스도 꽤 크던데 올해 포상은 엄청나네요.”
“대신 넘버링은 없는 거라 다른 곳에 파는 것은 불가능할 겁니다.”
블랙 라벨은 매년 삼천 병씩만 내놓기로 내부에서 정했고 병마다 라벨에 넘버링을 해서 판매를 하고 있는 중이다.
당연히 여분의 술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그 덕분에 이렇게 마실 수도 있는 거다.
술을 많이 내놓을 필요는 없었다.
옐로우 라벨에서 2년 더 숙성하면 훨씬 비싸게 팔 수 있다지만, 과연 그걸 자주 마실 수 있는 이들의 숫자가 얼마나 될까.
재벌이나 가능한 이야기다.
실제로 지난해 블랙 라벨의 매출은 고작 30억에 불과했다. 반면에 오저당의 국내 매출은 어느덧 조 단위를 훨씬 넘어섰다.
그러니 티도 나지 않을 수준이다.
그렇다고 의미가 없진 않다.
블랙 라벨은 오저당의 이미지 쇄신을 위한 용도라고 봐야 한다. 기존에도 저가의 소주는 취급하지 않고 있었으나 하이 퀄리티 술이란 이미지는 없었다.
그래도 신뢰는 제법 쌓인 상태다.
가격 대비 퀄리티는 오저당만큼 좋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저당 이름만 봐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수준까진 도달했다.
“작년에 우수 사원을 받은 이들은 글렌 툴릭 17년을 받았는데 올해는 차이가 너무 큰 거 아닌가요?”
“글렌 툴릭이 뭐가 어때서요.”
요즘 글렌 툴릭도 꽤 인기가 좋았다.
17년 동안 숙성해서 내놓은 스카치 위스키는 시중에서 상당히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중이다.
다만, 효율은 그리 높지 않았다.
날씨 때문인지 아니면 요정의 차이인지 알 수 없으나 한국이나 멕시코에 비해 숙성 기간의 단축이 크지 않았다.
대충 효과가 절반쯤 되려나.
1년 숙성하면 4~5년쯤 숙성한 것과 흡사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17년 숙성한 거라도 10년 이상 된 원액을 인수했다.
실제로 우리가 숙성한 것은 5년 정도에 불과했다.
“하하··· 글렌 툴릭도 좋은 술이죠. 그런데 블랙 라벨은 언제 출시되죠?”
다른 지역도 아니고 유럽을 책임지고 있는 뫼리스라 글렌 툴릭에 대해 아쉬운 소리를 하고 싶진 않은 것 같았다.
그는 곧장 블랙 라벨로 다시 주제를 바꿨다.
“지금 병입 준비 중이니 다음 달에는 시중에 풀릴 겁니다. 물론, 이 사실은 이사진만 알고 있는 대외비입니다.”
“당연히 입 조심해야죠.”
한정판 출시는 어려운 일이다.
일정을 미리 알려도 문제고 안 알려도 문제다. 실제로 지난번에는 오픈 런을 하기 위해서 줄을 서는 이들이 많았다.
추위를 막을 비닐과 우산 그리고 의자.
여러 아이템까지 동원해가며 밤을 새워 줄을 서는 열정은 정말 대단했다.
그 당시에 No. 0001을 산 사람은 무려 36시간이나 기다렸다고 한다.
집념 끝에 이룬 승리라고 할까.
희귀한 것을 구했다는 성취감 때문에 순수한 마음으로 줄을 서는 이들이다.
하지만 그런 이들만 있지는 않았다.
더 비싼 가격으로 팔기 위해 되팔렘이 나타나 조직처럼 움직이기도 했다.
이틀 정도 고생하면 수백만 원을 벌 수 있다는 계산이 나오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줄을 서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번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몰릴지 걱정될 정도네요.”
“아마 작년보다 훨씬 더 심할 겁니다. 그때는 첫 출시라 정보가 늦은 사람도 꽤 있었는데 이젠 상황이 달라졌잖아요.”
“다들 그것 때문에 우려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물량을 어떻게 배분하실 생각이신가요?”
삼천 병에 불과한 한정된 물량이다.
뫼리스는 가능하면 자신이 관리 중인 유럽에 더 많은 양이 배정되길 원했다.
적어도 아시아와 아메리카 본부장에게 밀리고 싶진 않은 눈치였다.
참고로 아시아는 파사데나 증류소를 맡았던 홍진구가 본부장으로 옮겨왔다.
그리고 북미부터 남미까지 아메리카 대륙 전체는 OGD USA를 맡고 있었던 슈미트가 본부장이 되었다.
그들의 빈자리는 그리 크지 않았다.
슈미트 아래 페레즈가 있기에 자연스레 뒤를 이어 대표 자리에 앉았고 파사데나 증류소는 케이티가 맡기로 했다.
뫼리스와 홍진구 그리고 슈미트.
세 명의 공통점은 모두 유통에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그들 나름대로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서 가장 생산력이 약한 것은 아시아 지역이다.
하지만 매출 순위는 달랐다.
중국과 일본 그리고 동남아 시장에서 우리가 빚는 술의 판매량이 상당했다.
그래서 매출만 놓고 보면 그리 큰 차이가 나진 않았다.
“매출과 순수익을 따져서 성과가 좋은 본부장에게 더 많은 양을 밀어줘야겠죠.”
블랙 라벨을 조금 더 받는다고 매출이 크게 오르는 것은 아니지만, 본부장 사이에서 자존심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이 블랙 라벨을 얼마나 받아내냐에 따라 다시 유럽 내의 국가에 배정하며 영향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쟁은 어느 정도 내가 의도했던 바였다.
각각의 지역에서 안주하는 것보다 서로 비교하며 시스템을 개선하길 원했다.
그렇다고 피 튀기는 암투 같은 것을 하고 있지는 않았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게 뭔지 본부장은 물론이고 직원들 대부분 알고 있다.
회사 내에서 라인을 세우고 정치질을 하다 분열을 일으키면 그게 누구라도 절대 봐주지 않았다.
“그러면 저희가 가장 많이 받겠군요.”
“자신 있으신가 봅니다. 하지만 뚜껑은 열어봐야 안다는 말이 있어요.”
“하긴 요즘 동남아와 중국에서 ASAP와 굿밤 맥주 판매량이 장난 아니더군요.”
뫼리스의 말처럼 두 제품의 아시아 판매량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늘었다.
오죽하면 오풍리 맥주 공장의 생산량이 감당되지 않아서 벌써 제3 공장까지 지어서 풀 가동시키고 있는 중이다.
홍천의 제2공장과 제천의 제3공장.
두 곳에서 빚어내는 양만 연간 60만 kl에 달할 정도였다. 그 덕분에 국내 맥주 시장 점유율도 어느덧 23%까지 올라갔다.
“아직 갈 길이 멀죠. 정작 국내 맥주 시장에서 정상을 찍지 못하고 있잖아요.”
“머지않았다고 봅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너무 큰 차이가 나서 오저당의 굿밤이 업계 2위만 해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 어느 정도 가시권에 들어왔다.
1위 맥주와 차이는 5% 남짓.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차이였다.
하지만 그 격차를 쉽게 좁힐 수 있을 거라 생각되진 않았다. 그만큼 충성 고객이 많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포기하진 않았다.
난공불락의 요새는 절대 아니다.
오저당은 다양한 술을 빚고 있었고 굳이 맥주에서 업계 최고가 되지 않아도 전체 매출에서 앞지를 가능성이 컸다.
이건 내 자존심과도 직결된다.
글로벌 순위에서는 TOP 5안에 들어갈 정도로 OGD 그룹은 크게 성장했다.
지난해 그룹 전체의 매출만 10조 이상을 찍었다.
그러나 정작 본사가 있는 한국에서도 1위를 차지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다른 곳은 몰라도 국내 시장은 어떻게든 오저당이 압도적인 1위가 되고 싶었다.
‘더구나 향이의 도움까지 받고 있잖아.’
요정들의 도움이 있는데도 업계 최고가 되지 못한다면 그건 무능한 것이다.
돈 레오넬도 아직 근소한 차이로 테킬라 1위인 돈 마테오를 이기지 못하고 있는 터라 점차 숫자 ‘2’가 미워지고 있다.
“그렇다면 조금 더 광고에 힘을 쓰는 게 어떠십니까?”
내가 가진 고민을 슬쩍 흘리자 뫼리스는 잠시 고민한 끝에 한 가지 조언을 해줬다.
지금도 각국에서 여러 종류의 광고를 하며 꽤 많은 비용을 지출하고 있으나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다.
그가 관리하던 다른 대형 주류 기업 같은 곳은 우리의 몇 배 이상은 쓴다고 했다.
안 그래도 최근에 황동선 사장이 종종 공격적인 마케팅을 제안하긴 했었다.
“지금보다 더 많이요?”
“네, 괜히 글로벌 기업들이 큰돈을 써가며 스포츠 구단을 후원하고 비싼 광고를 하는 게 아닙니다.”
하지만 한국에 한정지을 필요는 없을 거라고 했다. 어디에서 팔든 오저당의 매출만 올리면 되는 일이었다.
오히려 글로벌 영향력이 큰 우리는 밖으로 시선을 돌릴 필요가 있었다.
그때 문득 예전에 뫼리스가 축구 구단 유니폼에 OGD 로고를 넣어 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던 게 기억났다.
설마 그걸 바라고 하는 말인가.
거기에는 뫼리스의 사심도 없진 않았다.
내가 알기로 그는 시즌권까지 끊어가며 응원하고 있는 축구 구단이 있다.
뫼리스의 고향인 낭트 쪽의 구단이었던 걸로 기억난다.
“저번에 제안하셨던 프랑스 리그1 스폰서쉽에 아직 미련이 있으신 겁니까?”
“하하, 아닙니다. 그건 그냥 아이디어에 불과했던 거니 잊으셔도 됩니다.”
“궁금해서 그런데 스폰서쉽은 얼마 정도 예상했던 건가요?”
“제가 살펴봤던 곳은 연간 200만 유로 정도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저렴하네요.”
“작은 구단이라 그 정도지 누구나 알만한 구단은 천억 단위를 넘어갑니다.”
맨유 같은 구단을 말하는 거겠지?
그 정도의 광고는 아직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유럽 시장에서 굿밤 맥주를 본격적으로 밀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직 굿밤 맥주는 아시아 지역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유럽에서 가장 잘 먹히는 맥주 광고는 역시 축구에 관련된 것들이다.
“500만 유로 이내에 가장 효과가 좋은 구단이 어딘지 한번 알아보시죠.”
“프랑스 리그에 한정된 건가요?”
“아니요. 어떤 리그라도 상관없습니다.”
내 이야기를 들은 뫼리스는 크게 기뻐하며 곧장 알겠다며 대답을 했다.
자신이 다니는 회사의 로고를 유니폼에 넣는 게 로망이었다나. 중계 화면에 오저당 로고가 보이면 뿌듯할 것 같았다.
‘이번 기회에 슈퍼볼 광고도 통 크게 질러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