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뻗으면 닿을 만한데 (5)
장수홍과 그의 동생 수혁.
두 사람은 꽤 많은 것을 준비했다.
평소 백패킹을 좋아하던 수홍의 배낭에 들어간 것들은 캠핑 장비들이다.
앉을 수 있는 의자 두 개와 비 오는 날씨를 대비한 우비 그리고 버너와 코펠 그리고 비상식량 약간도 챙겼다. 넣고 보니 조금 과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이 노숙하기로 마음 먹은 시간은 60시간이나 되었기에 어떤 변수가 오더라도 버틸 수 있어야 했다.
2박 3일이 결코 짧은 시간은 아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예전에 경험한 오픈 런 때보다 덜 쪽팔릴 것 같다는 점이었다.
백화점이나 매장 앞에서 기다릴 때는 출퇴근하는 이들의 시선도 견뎌야 한다.
하지만 오저당은 조금 달랐다.
그들은 아예 한강 부지를 활용했다.
허허벌판 같은 넓은 곳에 팝업 스토어를 세워서 팔겠다고 밝힌 덕분에 남들 눈치는 볼 필요가 없었다.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해?”
“뭐가 또 불만인데?”
“60시간은 너무 심하잖아. 그냥 내일 아침에 가도 충분할 거 같아.”
“모르는 소리 하지 마. 내 예상으로는 이것도 아슬아슬해.”
수홍도 이러고 싶진 않았다.
작년 커트 라인이 30시간이었다.
그 이후에 온 이들은 헛수고만 하고 그대로 돌아갔다고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올해는 작년보다 훨씬 더 경쟁이 심해질 것이 분명했다.
동생도 이틀 정도 노숙해서 몇백만 원을 벌 수 있다니 곧장 따라나설 정도였다.
“귀찮은 거 싫어하는 너도 이렇게 나설 정도면 다른 사람들은 더하지 않겠냐.”
“정말 그거 사서 다시 팔면 그렇게 많은 돈을 벌 수 있는 거 맞아?”
“작년에 최대 다섯 배까지 팔았다고 하더라. 하지만 올해는 일곱 배를 넘어갈 거라고 예상하고 있어.”
참고로 지난해 가장 먼저 블랙 라벨을 산 이가 No. 0001을 경매에 내놓으면 최소 천만 원 이상이란 이야기도 나왔다.
하지만 지금 당장 그걸 팔면 바보지.
몇 년 정도 잘 보관만 한다면 최초라는 프리미엄이 더 붙어서 생각보다 많은 돈을 받을 게 분명했다.
“그래봤자 술이잖아. 마시면 없어지는 건데 그렇게 비싸게 산다고?”
“동생아. 이 세상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들만의 리그가 있단다.”
재벌집 아들이었다면 오히려 우리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백만 원은 하루 용돈 수준도 안 된다.
실제로 수홍이 다니던 회사에 들어온 사장 아들만 하더라도 명품을 갑옷처럼 두르고 다니는 걸로 유명했다.
“이제 슬슬 나가자.”
수홍은 배낭을 메고 동생을 재촉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한강 공원이라 버스에서 내린 뒤에 한참 걸어야 했다.
그때부터는 동생인 수혁도 너무 이르게 출발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자신들과 비슷한 이들이 제법 보였다.
다들 생각하는 게 비슷했는지 캠핑용 배낭을 메고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
그리고 점차 그 속도가 빨라지더니 경보 수준이 되었다.
여기서 늦장을 부려서 내 앞에서 컷 당하면 2박 3일을 그냥 날리게 된다.
쉬는 것은 줄을 선 이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며 수홍은 동생을 재촉했다.
“그렇게 헉헉거릴 거면 차라리 배낭을 나한테 줘.”
수혁은 형의 배낭을 빼앗은 뒤.
자기가 메고 구보하듯 냅다 달렸다.
해병대를 다녀오더니 체력 하나는 정말 괴수가 되어서 돌아온 것 같았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보다 일찍 도착한 형제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멈췄다.
벌써부터 줄 서 있는 수많은 이들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씨벌··· 벌써 이렇게 많이 왔다고?”
“300병 판다고 했지? 간당간당해 보이는데.”
“일단 줄부터 서고 생각하자.”
둘은 곧장 줄의 끝부분을 찾았다.
어디가 마지막인지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누가 갖다가 놓은 건지 팻말 같은 것이 놓여 있었다.
[벽향주 블랙 라벨 대기 줄입니다.]
줄을 서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뒤로 팻말을 넘겼다. 여기 앞으로 끼어들면 새치기라는 의미였다.
당연히 수홍도 자리를 잡고 팻말을 동생 뒤에 놓았다.
“화장실이 근처에 있어서 다행이네. 화장실이 멀리 있으면 골치 아프거든.”
“역시 경험이 중요해. 문제는 그렇게 개고생해서 명품백 갖다 바쳤는데 몇 주 안 지나서 차였잖아.”
“좋은 말로 할 때 닥쳐라.”
수홍에게는 흑역사였다.
지금 생각하면 완전히 미친 짓이었지.
그래도 호구짓을 한 게 후회가 되진 않았다. 좋은 인생 경험이었다고 치면 된다.
그 뒤부터는 특별할 게 없었다.
지루한 기다림의 연속이었고 두 형제는 별다른 대화도 없이 각자의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때웠다.
“와··· 국방부 시계보다 더 느리게 흐르는 기분이네.”
참다못한 수혁은 짜증을 냈다.
그럴 만도 한 것이 해가 저문 뒤부터 은근히 밤공기가 차가워졌기 때문이다.
장소도 하필이면 한강이라 더 심한 느낌이었다.
“이제 고작 다섯 시간 지났어.”
“이럴 거면 300명 끊어서 지금 팔아도 되잖아. 굳이 2박 3일이나 기다려야 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런데 저 사람은 아까부터 왜 저렇게 돌아다니고 있는 거야?”
줄을 선 사람들 사이로 몇 명의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말을 걸고 있었는데 그들 중의 한 명이 형제에게 다가왔다.
그는 자신의 명함이라며 한 장씩 쥐여주고 간절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블랙 라벨 팔 생각이 있으면 저한테 연락해주세요. 후하게 드릴게요.”
“저희 차례까지 오겠어요?”
“제가 세봤는데 저기 뒤에 있는 사람까지 300명 안에 들어갑니다.”
“얼마쯤 생각하고 계십니까?”
아직 팔지 말지 결정을 내리진 않았으나 시세라도 물어볼 생각으로 수홍이 묻자 그 남자는 은밀하게 손가락 네 개를 폈다.
사백만 원이라는 의미였다.
“에이, 그걸로는 부족하죠.”
“저는 많이 쳐주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세 장을 제시하고 있어요.”
“더 고민해보고 연락드릴게요.”
수홍은 일단 그를 돌려보내기로 했다.
현재 그가 예상하는 금액은 최소 육백만 원이다. 돈 레오넬도 품절이 길어졌을 당시에 열 배까지 올라갔다고 한다.
심지어 벽향주 블랙 라벨은 매년 한정된 수량만 나오는 상당히 희귀한 술이다.
많게는 팔백만 원까지 올라갈 것이라 예상하는 이유가 거기 있었다.
그 뒤로도 여러 사람이 형제를 찾아왔다.
되팔렘도 있었고 돈 많은 회장님이 보낸 비서실 사람으로 보이는 이들도 뒤늦게 와서 발을 동동 굴렀다.
그렇게 받은 명함만 십여 장이다.
하지만 아직 하루가 지나지 않았고 내일부터는 훨씬 더 많은 접촉이 있을 것이라 예상되었다.
아마 조건도 더 좋아지겠지.
사람이란 게 마음이 급해질수록 스스로 정하는 한계치가 높아지기 마련이다.
운 좋게 한정판에 눈이 돌아간 회장님 하나만 찾아도 대박이었다.
“와··· 앞쪽 줄에 있는 사람들은 단체로 온 것 같아.”
화장실을 다녀온 수혁은 자신이 본 것을 형에게 설명해줬다. 그쪽은 십여 명이 함께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나.
그다지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손에 쥐고 있는 그건 뭐냐?”
“유자차. 오저당 직원들이 저기 앞쪽 줄 근처에서 마시라고 나눠주던데.”
“치사하게 네 것만 받아온 거야?”
“기다리면 뒤쪽까지 온다고 했어.”
동생의 말대로 잠시 후에 오저당의 직원이 나타나 따뜻한 음료를 나눠줬다.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틈만 나면 와서 뭐가 필요한지 물어봤고 심지어 야외용 온열기도 가져다 놨다.
오죽하면 이런 환경이면 보름도 줄을 설 수 있겠다는 말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는 사이 행사 준비도 착착 진행됐다.
판매 당일 새벽에 컨테이너 몇 개가 들어와 설치됐고 매장 내부에는 정성껏 포장한 벽향주 블랙 라벨로 채워졌다.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줄을 서서 대기하는 이들과 블랙 라벨 사이에는 경호 업체와 오저당 직원들로 인해 분리되어 있었다.
“나 결심했어.”
그걸 본 수혁은 뜬금없이 자신의 형에게 뭔가를 통보하듯 말을 걸었다.
“뭘 결심했다는 거야?”
“졸업하면 오저당에 취직할 거야.”
“그게 쉽냐. 그리고 직원들 저렇게 고생하는 거 안 보이냐?”
“아까 직원들끼리 이야기하는 걸 우연히 들었는데 수당이 엄청 많이 나와서 다들 지원해서 나온 거라고 했어.”
OGD 그룹에 취직하면 성공하는 거지.
국내만 따지면 재계 순위에서 그리 높은 편은 아니나 그룹 전체를 합치면 결코 낮은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더구나 해외 연수 기회도 많이 주는 편이라 취준생치고 OGD 그룹을 염두에 두지 않는 이들은 없을 정도였다.
과거에 이력서만 넣으면 들어갈 수 있었다던 시기를 놓친 게 한이 되었다.
그 시기에 입사한 이들은 대부분 고졸인데 진급이 빠른 이들은 30대가 되기도 전에 과장으로 진급했단다.
형제가 잠시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이.
취재를 나온 기자가 오픈 런을 앞둔 이들과 인터뷰하는 게 보였다.
방송국과 신문사에서 나온 것 같았는데 한두 명이 아니었다.
[2박 3일의 오픈런, 전통주의 열풍]
[대만과 프랑스를 비롯한 전 세계에서 펼쳐지는 보기 드문 진기한 풍경]
[MZ 세대의 전통주 오픈런, 왜?]
[애주가 최 대리도 오픈런, 구하기만 하면 대박이라 불리는 ‘블랙 라벨’이 뭐길래]
*
아침 8시 30분쯤.
블랙 라벨 스토어를 찾아갔다.
그곳에는 며칠 동안 노숙까지 해가며 블랙 라벨을 사려고 하는 이들이 있었다.
사서 고생을 하는 사람들이라 안타까운 마음이 들진 않았다.
“저들 중에 되팔렘이나 전문적인 오픈 런 업자들이 1/3 이상은 되겠죠?”
내 질문을 받은 다미안은 직원들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보통 사람이 저렇게 오래 대기하는 게 쉽진 않습니다.”
“문제는 우리 직원들도 개고생을 한다는 거죠.”
오픈 런은 저들만 힘든 게 아니다.
오저당의 직원도 사고가 나지 않도록 관리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래서 유동 인구가 거의 없는 한강으로 잡은 것이다.
이걸 서울 시내에서 했다면 인근 상인과 주민에게 항의가 꽤 많았을 것이다.
오저당에서 지원 나온 직원들 십여 명도 저들과 함께 밤낮없이 자리를 지켰다.
그걸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홍보 효과를 무시할 수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진행하는 것뿐이다.
참고로 내년부터는 추첨제로 바뀌니 오픈 런은 앞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다른 곳들은 상황이 어떤지 보고 들어온 거 있나요?”
서울만 이런 것은 아니다.
대구와 부산은 물론이고 해외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중이다.
심지어 태국에서는 120시간 넘게 줄을 선 이들도 나왔다고 한다.
“유럽과 아시아 지역은 문제없이 끝났다고 연락이 왔고 미국과 멕시코는 현재 오픈 준비 중이랍니다.”
시차 때문에 생긴 일이다.
같은 시각에 매장을 오픈할 수는 없다.
그래서 가장 시간이 빠른 유럽부터 순차적으로 판매를 시작해야 했다.
다미안은 태블릿을 꺼내 조금씩 올라오기 시작한 후기를 보여줬다.
SNS에는 성공한 자들의 환호와 실패한 자들의 좌절하는 내용이 꽤 많았다.
벌써 경매에 내놓은 사람도 있었다.
넘버를 보니 프랑스에서 팔린 블랙 라벨 같았는데 몇 시간 안 지났는데도 400유로까지 올라간 상태였다.
[잠시 후에 벽향주 블랙 라벨 판매를 시작할 예정입니다. 스토어가 오픈되면 안내에 따라 입장해주시길 바랍니다.]
그때 안내 방송이 나왔다.
그러자 동시에 사람들이 일어났다.
이미 노숙에 사용했던 것은 다 정리한 상태라 그다지 어수선하진 않았다.
마침내 스토어의 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와서 80시간이나 기다렸던 올해의 No. 0001 넘버링의 주인공이 감격한 표정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파마를 한 것 같은 갈색 곱슬머리의 남자는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블랙 라벨을 받는 데 성공했다.
상당히 감격했는지 눈물을 글썽거릴 정도였다.
“XX년도의 첫 블랙 라벨 넘버링을 제가 받을 수 있다니 영광입니다.”
80시간쯤 누군가를 기다리면,
충분히 그런 반응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런데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지금쯤이면 향이가 잘난 척을 하며 내게 공치사를 해야 정상이다.
하지만 향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 사이에 있어서 안 보이는 건가 싶어서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다.
말도 없이 사라지는 일은 흔하지 않았기에 걱정되기 시작했다.
‘갑자기 어디로 사라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