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248화 (248/254)

그나마 다행이야 (1)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또 누군가를 따라간건가 싶었는데 그런 일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전에 지철이 형의 사진전에서 이제는 삼척시의 시의원이 되신 이장님의 딸을 따라갔던 일도 있었다.

향이가 내 곁에서 멀리 벗어난다고 큰일이 벌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실제로 결혼을 한 이후부터 취침 시간 후에는 침실 근처에는 오지도 않았다.

나도 하늘을 봐야 별을 따잖아.

결혼한 다음 해에 우리 아들인 영민이가 태어날 수 있었던 이유가 거기 있었다.

하지만 그 시간대를 제외하면 언제나 향이는 내 곁에 머물렀다.

따로 연락할 방법도 없기에 무작정 향이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팝업 스토어를 철거할 때까지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껌딱지처럼 향이 곁에 머물던 검이도 안 보였다.

두 요정 모두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이렇게 오래 사라진 일은 없었다.

혹시라도 완전히 나를 떠난 게 아닐까.

그런 생각마저 조금씩 마음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언젠가 비슷한 악몽을 꾼 적이 있었다.

향이가 갑자기 사라져서 영영 내 곁으로 돌아오지 않는 내용이었는데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었던 걸로 기억난다.

혹시 지금도 꿈을 꾸는 게 아닐까.

향이 없는 인생은 생각해보지 못했다.

함께 지낸 세월만 10년이나 되어서 이제는 나의 일부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극도의 상실감과 탈력감이 몰려왔다.

이러다가 공황 장애가 오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회장님, 괜찮으십니까?”

한동안 내 곁에서 아무런 말없이 지켜만 보고 있던 비서실장 다미안은 그런 나의 변화를 빠르게 눈치채고 다가왔다.

그런 그에게 애써 웃으며 손을 저었다.

“별거 아닙니다.”

“몸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숙소로 돌아가시죠.”

“아니요. 잠시 이곳에서 더 머물 겁니다. 지금 당장 회사가 망할 것 같은 급한 일이 아니면 방해하지 말아 주세요.”

평소답지 않은 모습 때문일까.

다미안은 상당히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으나 왜 그런지 묻지는 않았다.

그저 그는 평소처럼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비서실 직원들과 함께 기다렸다.

이른 아침에 도착한 한강에서.

거의 해가 저물 때까지 머물렀다.

언제 향이가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식사도 안 하고 딱 한 번 화장실을 다녀온 것이 전부였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나의 모든 일정은 스톱됐기에 비서실은 예정된 일부 스케줄을 취소해야 했다.

하지만 나를 대신해 움직일 사람은 많았기에 그쪽은 크게 걱정되지 않았다.

“블랙 라벨은 정상적으로 모두 판매됐고 관련된 보고서는 며칠 이내에 작성해서 공유해드리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잠시 제가 없더라도 사장님이 잘 이끌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런데 정말 무슨 일인지 말씀 안 해주실 겁니까?”

황동선 사장은 답답함과 걱정스러움이 가득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여기서 내가 무슨 말을 해줄 수 있겠어.

대뜸 ‘요정을 믿습니까?’ 이렇게 물어볼 수도 없잖아.

하긴 남들이 보면 조금 이상할 거다.

갑자기 뭐에 홀린 듯이 한강에 자리 잡고 앉아서 며칠 동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심지어 벤치 위에 놓인 잔에 벽향주와 오풍주를 따라 놓고 마시지도 않았다.

일종의 정화수와 같달까.

향이가 돌아오길 기원하는 술이자,

여기서 풍기는 향이 녀석이 되돌아올 수 있는 길잡이가 되길 바랐다.

그러는 중에도 여러 사람이 찾아왔다.

작은아버지와 이제는 숙모가 되신 이옥주 F&B 이사도 오셨으나 망부석이 된 나를 꺼내지 못했다. 이걸 풀 수 있는 것은 오직 향이뿐이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크게 흔들렸다.

그건 바로 멀리서도 누군지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나의 아내인 연우였다. 그녀는 천천히 걸어와 태연하게 내 옆에 앉았다.

“여기서 도대체 뭐 하는 거야?”

“오늘 가게 안 열었어?”

“그게 중요해? 남편이 뭐에 홀린 것처럼 한강에서 노숙하고 있다는데.”

“노숙은 아니지. 잠은 호텔에서 자잖아.”

“그러면 먹을 거라도 잘 챙겨 먹든지. 요즘 맨날 라면이랑 삼각김밥으로 때운다고 비서 실장님이 걱정하더라.”

어쩐지 아까부터 다미안이 내 눈을 피하더라니 자신이 해결하기 어려우니 아내를 지원군으로 부른 것 같았다.

“영민이는?”

“맨날 아빠는 언제 오냐고 칭얼거리지. 오늘 하루는 라니 언니랑 지아 엄마가 봐주기로 했어.”

“내가 여러모로 민폐를 끼치고 있네.”

“그걸 아는 사람이 이래? 잔말 말고 이거나 먹어.”

연우는 가방에서 도시락통을 꺼냈다.

뚜껑을 열어보니 평소에 내가 즐겨 먹는 음식과 김밥 같은 게 채워져 있었다.

직접 만든 것 같아 보였는데 양이 생각보다 많았다.

“나 혼자 이걸 다 먹으라고?”

“응, 비서실 사람들이 먹을 거는 따로 챙겨 왔으니 다 먹어. 당신 때문에 저 사람들만 고생하고 있잖아.”

“고마워. 잘 먹을게.”

입맛이 없었지만, 마다할 수는 없었다.

여기서 안 먹겠다고 하면 싸우자고 하는 것이나 다를 게 없었다. 김밥 몇 개를 집어 먹으며 멍하니 강을 바라보고 있자 연우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침묵이 어느 정도 이어지자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그녀는 내게 그동안 묻고 싶었던 게 있었다며 말을 꺼냈다.

나는 흔쾌히 물어보라고 했고 연우는 어렵게 입을 뗐다.

“혹시 향이라는 그 친구 때문이야?”

설마 이런 질문일 거란 상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향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건지도 의문이었다.

“···그걸 어떻게 알았어?”

“내가 당신이랑 같이 산 세월이 몇 년인데 틈만 나면 허공에 대고 혼잣말을 하고 향이를 찾는데 모를 리가 없잖아.”

심지어 다미안도 알고 있다고 했다.

둘 다 내 개인적인 시간 상당수를 함께하는 이들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아무리 조심하려고 애를 써도 향이가 계속 말을 걸면 나도 대답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모습을 본 것 같았다.

“지금껏 말한 적이 없어서 다들 모르는 줄 알았는데 나 혼자만의 착각이었네.”

“걱정하지 마. 아직은 나랑 비서실장님만 알고 있어. 상상 속의 친구 같은 거야?”

“어릴 때 요정이 나오는 동화 같은 거 보고 믿은 적 있어?”

“글쎄··· 기억나지 않네. 그래도 꽤 늦은 나이까지 산타클로스는 믿었지.”

나도 비슷했던 것 같았다.

중고등학교 때까지 작은할아버지 댁에서 도깨비불을 봤다고 믿었고 언젠가 도깨비를 찾아내겠다고 다짐했었다.

누군가는 그걸 순수하다고도 말하고 누군가는 순진하다고 말하겠지.

“향이는 일종의··· 수호 요정 같은 거야.”

“내 눈에는 안 보이는 거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하네.”

“우리 벽향주에 있는 요정이 향이야. 내가 향이를 보고 그린 그림이거든.”

“어멋! 정말이야? 너무 귀엽겠다. 요즘 우리 아들 최애 인형이 스프라이트 컬렉션 요정들인 거 당신도 알지?”

모를 수가 없었다.

영민이 방에는 우리 회사에서 만든 여러 요정 인형이 크기별로 채워져 있었다.

어느덧 컬렉션에는 7개국을 대표하는 요정이 있기에 숫자도 상당했다.

예를 들어 버뮤다의 럼 증류소는 캐리비안의 해적과 같은 모습이었다.

반면에 프랑스의 와이너리는 곱슬곱슬한 흰 가발을 쓴 요정이었다.

“영민이 눈에도 향이가 보였으면 엄청 좋아했을 텐데 아쉽네.”

“지금 당장 정신 병원에 가보라고 할 줄 알았는데 그런 이야기는 안 하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요정이란 존재가 있다는 것은 믿어지진 않지만, 내가 봤을 때 당신은 미친 것 같지도 않거든.”

이왕에 이야기가 나온 김에 나는 그동안 오저당이 간직했던 비밀을 털어놓았다.

여기서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고 시간은 넘치도록 남아돌았다.

어떻게 처음 만났는지부터 시작해서 지금껏 오저당이 요정들 덕분에 빠르게 성장해왔다는 이야기해주었다.

한동안 내 이야기를 들은 연우는 상당히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보면 향이가 오저당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들에게는 은인이네.”

“그러니까 며칠만 더 시간을 줘. 향이와 같이 보낸 시간이 있는데 너무 쉽게 포기할 수는 없잖아.”

연우가 모든 이야기를 믿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대신 내 상황에 대해 조금은 이해해주길 바랄 뿐이었다.

다행히 연우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라고 했다.

“대신 밥은 잘 챙겨 먹어. 하루 이틀 안에 끝내고 돌아올 거는 아니잖아.”

“알았어. 약속할게.”

“대충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어? 나도 영민이가 물어보면 언제쯤이라고 대답은 해줘야 하잖아.”

잠시 고민 끝에 나는 2주를 제시했다.

지금껏 여기 있었던 시간을 합치면 대략 20 일 정도는 기다려줘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업무는 대부분 황동선 사장과 본부장들이 나눠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 일을 못 하는 것도 아니다.

인터넷만 연결되면 어디에서든 문서를 확인 가능했고 직원들이 올린 것들도 결재 시스템을 통해서 승인할 수 있다.

오저당이 책임지고 있는 직원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향이가 없어졌다고 아예 일에서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건 남은 요정들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알았어. 출장 갔다가 2주 후에 돌아올 거라고 말해놓을 테니 그때가 되면 무조건 집으로 돌아와야 해.”

“알았어.”

“향이만큼 가족도 중요해. 절대 잊지 마.”

연우는 거기까지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처럼 올라왔기에 장모님과 식사를 하고 내일 내려갈 거라고 했다.

미안한 마음에 주차장까지 배웅을 갔다가 돌아온 나는 그 자리에서 며칠을 더 머물며 향이를 기다렸다.

그렇게 일주일이 더 흘러 보름이란 시간 지나갔다.

그쯤 되자 한계가 느껴졌다.

신체적인 어려움보다 정신적인 고통이 훨씬 더 컸다. 막연하게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은 너무나 고된 일이었다.

반드시 돌아올 거란 기약만 있었어도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돌아오기만 해봐. 아주 혼구멍을 내줄 거야.’

이런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그날도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벤치에 술을 한 잔 따라놓고 나는 태블릿으로 본부장들이 보낸 보고서를 살펴봤다.

분기별 보고서가 원칙이나 대부분 특별한 일이 있으면 내게도 공유해줬다.

뭔가 지시를 바라는 것은 아니고 혹시나 의견이 있다면 말해달라는 의미였다.

내가 한강에 머물고 있는 사이에 우주와 유성은 드디어 첫 촬영을 떠났다고 한다.

이번에 섭외한 이들은 신인급 연예인 중에 고른 이들인데 이탈리아에 도착한 첫날부터 빵빵 터지고 있다고 했다.

기분 전환을 하라며 클립을 몇 개 보내줬는데 내가 봐도 꽤 재미있었다.

아마 향이도 같이 봤으면 옆에서 배꼽을 잡고 데구루루 굴렀을 것이다.

은근히 향이의 취향이 우주와 유성과 잘 맞는 탓에 두 녀석이 만드는 영상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보던 녀석이었다.

그건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기분 전환은 어느 정도 가능했다.

어느덧 해가 저물 무렵이 됐을 때.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자 나도 모르게 벤치에 앉아서 살짝 졸기 시작했다.

그 상태에서도 꿈을 꾸는 건지 어디선가 향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캬아아··· 이 맛을 어떻게 잊겠어. 이게 얼마나 그리웠는 줄 아세요?]

그런데 목소리가 조금 이상했다.

원래 향이의 목소리는 어린아이의 것처럼 미성인데 지금 들리는 목소리는 약간 변성기가 온 느낌이 들었다.

10년 넘게 매일 목소리를 들은 내가 향이의 목소리를 못 알아들을 리가 없지.

그런데도 아니라고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가 향이 특유의 발음 때문이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간신히 떠서 살짝 고개를 돌리니 벤치에 향이가 있었다.

하지만 내가 알던 예전의 향이와는 달리 모습이 상당히 바뀌어 있었다.

3등신에서 5등신으로 자랐고 키도 예전에 비해 두 배 이상은 되었다.

외모도 이제는 청소년이라 불러야 할 정도로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그것만 달라진 것은 아니다.

심지어 기존에 입고 있던 아청색의 곤룡포도 사라졌다. 이제는 붉은색의 왕들이 입는 홍룡포를 입고 있었다.

“진짜 돌아온 거 맞아?”

나와 눈이 마주친 향이는 코앞까지 날아왔는데 확실히 꿈은 아닌 것 같았다.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목소리로 묻자 녀석은 익선관 아래의 관자놀이를 긁으며 내게 살짝 고개 숙여 사과했다.

[헤헤, 죄송해요. 제가 조금 오래 걸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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