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술 빚어 재벌 되렵니다-253화 (253/254)

전통주 박물관 (3)

오저당의 한옥집.

그곳은 항상 여러 손님이 오갔다.

대부분은 오저당에 출장을 온 계열사 직원들이 머무는 곳이라 아예 새로운 사람이 오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언제부턴가 그곳에 둥지를 튼 남자는 오저당 소속도 아니었고 심지어 오풍리 마을 전체를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전형적인 오지랖을 타고난 것 같아 보였다.

“어르신, 오셔서 시원하게 막걸리 한 사발하고 가시죠.”

“어이쿠! 이렇게 무거운 걸 혼자 어쩌려고. 집까지 제가 들어드릴게.”

“일거리 있으면 언제든 불러요.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뭐든 도울 테니.”

드라마 속의 홍반장을 꿈꿨지만,

정작 일머리를 잘 잡는 편은 아니었다.

일을 시켜도 손이 많이 가서 뭔가 꺼림칙한 스타일이랄까.

그래도 평판은 나쁘지 않았다.

살갑게 반겨주고 말동무를 해주는 사람이 생각보다 흔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오풍리 이장 부부가 그일을 도맡아서 해줬다.

하지만 부부 내외가 각각 시의원과 오저당에서 일하더니 나날이 바빠져서 예전보다는 뜸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다들 이해해주는 분위기였다.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여기까지 내려온 거래? 오저당 직원도 아니라며.”

“혹시 모르죠. 제가 오풍리에 자리잡고 차기 이장에 출마할지.”

“하이고··· 네 관상을 보면 절대 그럴 팔자는 아녀.”

“내 관상이 뭐 어때서요?”

“관운 같은 거는 팔자에 없다니까. 그러니 포기혀.”

시답지 않은 농담 따먹기에 능한 그가 유일하게 바쁜 시기가 있었다.

아예 놀고 먹는 것은 아닌지 하루에 몇 시간 정도는 마을 곳곳에 자리 잡고 뭔가를 열심히 그렸다.

그 순간만큼은 꽤 진지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을 하는 건지 다들 궁금해서 기웃거렸으나 한 달이 넘어가고 두 달째가 되니 점차 관심이 사라졌다.

더구나 일을 하고 있는 거란다.

그러니 방해하는 이들조차 없었다.

그런 그가 유독 관심을 많이 가지는 곳은 얼마 뒤에 박물관이 세워질 장소였다.

한동안 그렇게 뭔가를 끄적거리다 돌아오면 저녁부터는 술판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게 취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우리나라 전통주가 이렇게 다양한지 전혀 몰랐습니다.”

문찬구 대표는 술을 배우는 중이다.

40대의 나이에 주도를 배운다는 뜻은 아니고 자신이 지을 건물에 들어갈 술에 대해 지식을 쌓고 있다고 봐야 했다.

그는 진심으로 이 순간을 즐겼다.

오저당에 머물며 우리나라 전통주가 얼마나 깊이 있는 맛을 지녔고 무수히 많은 변주가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를 위한 투자는 아니었다.

각지에서 모은 전통주를 마시는 이들 중에는 박물관의 관장이자 큐레이터 역할을 맡고 있는 이도 포함됐다.

“이 술도 섹션으로 나눠서 설명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 굉장히 독특하네요.”

전통주 박물관장 오예린.

그녀의 이력은 조금 독특했다.

20대와 30대는 국내외 유명 박물관에서 일했으나 40대에 접어들며 전통주에 완전히 꽂혀 호기롭게 창업을 했었다.

하지만 경영에는 자질이 없었던 건지.

전통주를 빚던 양조장은 결국 접어야 했고 전통주 협회에서 일하던 그녀를 우리가 낚아채서 관장에 앉히기로 했다.

아직 공사조차 시작하지 않은 박물관장을 벌써 뽑은 이유는 설계 단계부터 조율하기 바랐기 때문이다.

다 짓고 난 뒤에 후회하는 것보다 실무자의 기획까지 포함해서 설계되는 쪽이 훨씬 합리적이란 판단했다.

그녀의 실력 하나는 인정해줘야 했다.

출근한 지 한 달도 안 돼서 이미 그녀는 대략적인 전시 기획을 거의 끝마쳤다.

어차피 국내에서 유명한 전통주는 뻔한 거라 그리 어렵진 않았다.

[제1관 : 오저당의 역사]

[제2관 : 한국의 전통주]

[제3관 : 세계의 전통주]

[제4관 : 전통주 체험 및 시음]

크게 보면 네 곳으로 나눌 예정이다.

비중으로 보자면 2관과 3관이 가장 크고 비용도 많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됐다.

하지만 핵심은 역시 1관과 4관이었다.

기존에 찾아가는 양조장 프로그램을 운영하던 오저당의 역할 중의 일부를 박물관이 나눠 갖기로 되어 있었다.

워낙 많은 이들이 오저당을 찾아오니 꼭 필요한 일이었다.

여름철이 시작된 요즘은 주말에 거의 천여 명에 달하는 이들이 찾아올 정도라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상당수는 계곡 트레킹을 하는 이였고 나머지는 오저당과 오풍리를 찾은 이들이다.

“필요하신 게 있으면 언제든 황동선 사장님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이미 충분하게 지원받고 있어요. 다음 주에는 봉화 지역에 가보려고요.”

오예린 관장의 업무는 단순하게 박물관 전시 준비에 한정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보다 더 중요하고 어려운 일이 있다.

수호가 말했던 잊혀진 전통주의 부활을 진두지휘하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다.

물론, 그녀 혼자 움직이진 않을 거다.

이미 오예린 관장 아래에는 고문서 해석 등을 맡아줄 직원 몇 명이 고용되었다.

박물관이 완성되지 않아도 전통주의 흔적을 찾는 일은 시작 가능했다.

당장 어떤 성과를 바라지 않았다.

전통주의 복원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절대 완벽할 수 없다.

주조 방식과 배합을 알아낸다고 하더라도 누룩이라는 변수가 있다.

누룩만큼은 어떻게 할 방법이 없다.

살아있는 균주를 복원한다는 것은 죽은 사람을 부활시키자는 거나 같았다.

아무리 술의 정령인 향이가 있더라도 그건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완벽하게 재현을 하려면 타임머신이 개발되어야 가능하다는 의미다.

그러니 어느 정도 수준에 도달하면 한계가 있다는 것은 감안해야만 했다.

“봉화는 갑자기 왜요?”

“닭실마을에 있는 안동 권씨 집성촌에서 빚던 소주에 관심이 가서요. 아직 실마리를 찾는 중이라 큰 기대는 마세요.”

안동 권씨 이야기가 나오자 문찬구는 곧장 하회마을과 안동 소주를 거론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그것이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오 관장이 말하는 술은 그것과는 별개의 것이었다.

“소주가 모두 같을 수 없듯이 집성촌마다 조금씩 다른 맛을 가지고 있죠.”

“회장님 말씀처럼 닭실마을의 소주는 제조 방식이 기존의 것과는 조금 달라요. 일종의 변형 버전에 가깝죠.”

“아···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한편으로 문찬구는 아쉬워했다.

만약에 닭실마을이 아니라 안동이었다면 같이 따라나섰을 것이다. 그만큼 한옥과 옛 건축물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출장 일정은 어느 정도로 잡힌 거죠?”

“일주일 정도면 될 것 같아요.”

“그럼 다음 전통주는 그때쯤 오픈하는 걸로 하죠.”

전통주 시음은 그걸로 끝났다.

어차피 취하려고 마시는 것은 아니었다.

일과를 마칠 무렵에 한두 잔 정도만 마시는 것이 전부였다. 더구나 이렇게 시음하는 게 우리만은 아니었다.

한번 사들일 때마다 박스 단위로 사도 부족한 것이 직원들에게 타사 제품의 시음을 권장하는 전통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배울 게 있다면 그 정도 투자는 전혀 아깝지 않았다.

“관장님은 출장 잘 다녀오시고 이제 슬슬 문찬구 대표님도 결과물을 보여주시죠.”

어느덧 한여름이 되었다.

지금쯤이면 대충 박물관의 기틀이 잡혀야 하는 게 아닌가. 내부 인테리어도 구성하려면 조금 서둘러야 할 것 같았다.

단번에 모두의 오케이 사인을 받으면 다행이나 그렇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내 말을 들은 문찬구는 어느 정도 준비가 된 것인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조만간 보여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뒤.

마침내 문찬구가 나를 찾아왔다.

한동안 두문불출하며 집 밖으로 나오지 않더니 디자인을 끝냈다고 했다.

그는 내게 12.9인치 태블릿을 내밀며 그동안의 작업물을 보여줬다.

“부디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네요.”

그런 말은 할 필요가 없었다.

모두 합쳐서 3안까지 만들었다고 했는데 이미 나는 1안 디자인에 꽂혀버렸다.

화면 속의 박물관은 뭐랄까··· 고궁의 모습을 빼닮은 느낌이었다.

아니, 정확히 종묘와 닮았다.

건축물 사이사이에는 목재로 기둥을 올렸고 중간에는 넓은 유리를 넣었는데 지붕이 비대칭이라 인상적이었다.

동쪽으로 뻗은 우측 편은 지붕이 높아 햇살이 잘 들어올 것 같았고 서쪽은 비교적 낮아지게 만들어 놓았다.

무엇보다 가장 인상적인 곳은 전통주를 숙성하는 옹기를 닮은 입구의 곡선이다.

오저당에서 일하며 옹기를 하루 이틀 보는 게 아니라 한눈에 알아챌 수 있었다.

이게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여도 그로 인해 건축물 자체의 이미지가 달라졌다.

하지만 보기 좋게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여름과 겨울에 냉난방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 여러 단열 장치가 들어갔다.

거기에 폭설이 내릴 것을 대비해 지붕에 열선까지 넣을 예정이라 했다.

“꼼꼼하게 준비하셨네요.”

“강원도의 폭설이 워낙 유명하잖아요. 제가 철원에서 근무해봐서 잘 알죠.”

“하지만 일정 규모 이상의 폭설이 내리면 감당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 그 점은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강원도 라이프가 하루 이틀인가.

이미 그 정도는 다들 알고 있었다.

겨울마다 창고 지붕이 폭삭 내려앉을까 걱정되어 마련한 방법이 적지 않다.

이 동네는 평범하게 평평한 지붕을 올리면 눈의 무게를 못 이긴다.

박물관에 적용될 지붕의 열선도 이미 오저당 모든 건물에 설치되어 있었다.

[오···! 좋아요. 제 마음에 쏙 들어요.]

향이도 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태블릿 앞에 앉아 어떤 때보다 더 유심히 바라봤다. 하지만 1안만 보고 결정할 수 없기에 나머지 2안과 3안도 보기로 했다.

특히, 3안의 느낌이 사뭇 달랐다.

지금까지 문찬구가 설계한 건물과는 조금 느낌이 다르달까. 내가 그 부분을 지적하자 그는 멋쩍게 웃으며 설명했다.

“2안까지는 제가 한 게 맞지만, 3안은 용오름에 소속된 B팀이 준비한 겁니다.”

“저는 1안이 가장 좋네요. 물론, 이게 최종 결정은 아닙니다. 이사진과 다른 직원들의 의견도 물어야 하거든요.”

“당연히 그러셔야죠.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문찬구는 전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오히려 단번에 통과되면 횡재하는 거라 여기고 있었다.

지금껏 일하며 클라이언트를 만족시키는 게 쉽지 않았던 것 같았다.

하긴 아직 설계 본연의 일이라기보다는 디자인에 가까운 단계다. 지금껏 라니가 일하는 것을 보면 이게 꽤 힘든 일이다.

술은 동일한 맛을 유지하는 게 핵심이나 디자인은 매번 새로운 것을 내놔야 한다.

아주 작은 차이가 퀄리티에 직결된다.

폰트를 어떤 거를 쓰고 몇 mm 차이의 위치까지 염두에 두고 일하더라.

심지어 다 같은 색 같은데 미묘한 색감을 놓고 몇 번이나 손을 보기도 한다.

“이걸로 거의 다 끝난 건가요?”

“아니요. 아직 내부 인테리어 설계가 완성된 거는 아닙니다. 디테일한 부분까지 마치려면 겨울까지 계속 일해야죠.”

박물관은 외부에서 보이는 것보다 내부 설계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박물관장과 상의해서 전시 공간도 조절해야 하고 자연 채광과 조명을 어떻게 배치하냐에 따라 분위기가 확 달라진다.

“1안으로 진행하면 현재 예상되는 공사비가 어느 정도일까요?”

물론, 정확한 금액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은 안다. 인테리어에 어떤 것을 쓰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금액이 산출되겠지.

하지만 수백억이나 들어가는 공사다.

그만한 돈을 계좌이체 하듯 금방 인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적어도 재무 부서에서 준비할 시간은 어느 정도 줘야한다.

가뜩이나 바쁜 사람들이다.

오저당이 모기업이기 때문에 각국의 계열사에 투자한 금액도 상당했다.

그 덕분에 재무 관련 서류가 매일 산더미처럼 쌓이고 있었다.

내가 필요한 것은 어느 정도 예산을 준비해야 문제가 없을 것 같냐는 거였다.

당연히 어느 정도 내 의도를 알기에 문찬구도 그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총공사비를 러프하게 뽑았는데 400억 정도라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는군요.”

“시공사에 따라 변동이 있을 수 있겠지만, 어지간한 곳이라면 그 금액을 넘어가긴 어려울 겁니다.”

그만큼 여유 자금을 넉넉하게 잡아서 나온 수치라고 했다. 혹시 모르니 대충 450억 정도 준비하면 되려나.

자잘한 단위는 그때 가서 충당하면 될 테니 문제 될 것은 없어 보였다.

“좋네요. 이대로 이사진 회의에 올리라고 전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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