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매하지만, 어쨌든 1위 (1)
디자인은 곧장 통과했다.
당연히 선택된 것은 1안이었다.
임원 회의는 물론이고 직원 투표에서 몰표를 받았을 정도로 호응이 좋았다.
그 소식은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문찬구와 용오름 사무실에도 전해졌다.
“예상대로 1안이 됐네요.”
최윤은 메일을 확인한 뒤에 다행이란 표정을 지으며 문찬구를 바라봤다.
지난여름 동안 강원도에서 뭘 하다가 온 건지 그의 얼굴은 새카맣게 탄 상태였다.
동남아로 휴가 다녀온 거라 오해하기 딱 좋은 피부톤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도 상태가 썩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 건강미가 느껴지는 것이 오히려 더 좋아져서 돌아온 것 같았다.
불규칙한 식사와 불면증.
그리고 잦은 밤샘 작업까지.
문찬구는 지금껏 몸을 혹사하며 살았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얼굴은 항상 푸석푸석한 느낌이 들었다.
그랬던 그가 많이 달려졌다.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봐 오던 최윤뿐만 아니라 다른 설계 사무소 직원들조차 쉽게 알아챌 수 있을 정도의 변화였다.
뭐랄까··· 조금 더 여유로워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내부 설계 들어가자.”
“설마 그 작업도 삼척에 내려가서 하실 거는 아니죠?”
“글쎄, 고민 중이야. 거기서 두 달 있어 보니 이제 서울은 조금 갑갑하더라.”
“이러다가 사무소를 삼척으로 옮기자고 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문찬구는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실제로 그런 마음이 조금 있기는 했다.
하지만 직원들에게 다 같이 가자고 할 수 없기에 망설이고 있을 뿐이었다.
“와··· 아니라고 안 하네.”
“너도 가보면 내가 왜 그러는 건지 금방 알 수 있을 거야.”
“거기 계곡이 깊고 험하다던데 여우한테 홀려서 오신 거는 아니죠?”
“여우는 없고 수달은 있더라.”
몇 년 전부터 오저당 인근에 있는 계곡에 터전을 잡은 수달은 상당히 유명했다.
낮에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우나 밤에는 계곡에 앉아있으면 종종 볼 수 있었다.
수달이란 말에 최윤은 눈을 반짝였다.
귀여운 것에 약한 그녀다운 반응이었다.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오풍리로 달려갈 것 같았지만, 그보다 조금 더 빨리 이성이 되돌아왔는지 반사적으로 고개 저었다.
“어휴! 깜빡 넘어갈뻔했어요.”
“크크큭. 네 취향은 변함없네.”
“됐고요. 혼자 설계 마무리까지 다 책임질 거 아니면 이곳에서 저랑 같이 사무실 지박령이 되시죠.”
“붙잡지 않아도 그러려고 했어.”
이번에 설계에서 고려해야 할 요소가 제법 많이 있었다. 장애가 있는 이들을 위한 기본적인 배려도 강화할 예정이다.
휠체어를 타고 있어도 관람할 수 있게 해야 하기에 신경 쓸 게 많았다.
거기에 점형 블록도 들어갈 예정이다.
시각장애를 가진 이들이 어떻게 관람을 하겠냐고 하겠지만, 위치에 따라 제어 가능한 음성 가이드를 적용하면 된다.
그 부분은 최윤도 많이 공감했다.
“모두를 위한 유니버설 디자인이 들어가는 박물관은 꼭 해보고 싶었는데 이번 기회에 소원을 풀겠네요.”
“이번에 전시도 그쪽으로 신경 많이 쓰기로 했으니 제대로 만들어야 해.”
오감을 활용한 전시 기획도 여러 방법을 통해서 준비 중이다. 아직 어떻게 구현될지 명확하진 않다는 게 문제였다.
그 부분은 전시 공간 인테리어 최종 단계 전까지만 나오면 된다.
“그런데 정말 무료로 할 거래요? 은근히 박물관 유지비가 많이 들어갈 텐데요.”
“돈 받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더라.”
입장료를 받으면 유지 및 보수에 들어가는 비용을 어느 정도 충당할 수 있으나 오저당은 무료로 하기로 했다.
최대한 많은 이들이 부담 없이 와서 즐겼다가 가길 원했기 때문이었다.
그 이야기를 해주자 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긴 여기는 홍보관 역활도 하는데 조금 애매하긴 하네요.”
*
용오름에서 설계를 시작할 무렵.
오저당도 제법 바쁜 시간을 보냈다.
올봄에 스위스에서 회의할 때 정해진 사항이 하나둘 시작되었다.
가장 핵심이 되는 슈퍼볼 광고는 아직 시기가 되지 않았다. 올해 슈퍼볼이 지난 2월에 열렸으니 반년은 기다려야 한다.
물론, 그전에 준비할 것은 무척 많았다.
슈퍼볼 휴식 시간에 내보낼 광고도 미리 찍어야 하는데 그건 현지 광고 대행사와 함께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반면에 유럽은 매우 빠르게 진행됐다.
시즌이 시작되기 전에 프로 축구 구단과 스폰서쉽을 맺어야 했는데 비어있는 메인 스폰서 자리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메인이냐 아니냐의 차이는 크다.
유니폼 중앙에 우리 오저당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들어가길 바랐는데 메인이 아니면 그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뫼리스가 참 열심히 뛰었다.
여러 구단을 놓고 조율한 결과 오저당은 무려 네 개나 되는 프로 구단과 메인 스폰서쉽을 맺을 수 있게 되었다.
리그2의 AC 아작시오
분데스리가의 FC 살케 04
세리에 A의 엠폴리 FC와 팔레르모
원래는 이렇게 많은 스폰서쉽을 맺을 생각은 없었는데 리그2나 일부 구단의 스폰서쉽이 생각보다 많이 저렴했다.
더구나 그밖에 다른 이유가 한 가지 더 있었다.
“이번에 스폰서쉽 맺은 구단에서 뛰는 우리나라 선수들 성적은 괜찮나요?”
[네, 팔레르모에서 뛰는 고유진 선수의 친선전 활약이 유독 두드러집니다. 이번 시즌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고유진이라는 선수는 조금 생소했다.
평소에 NBA는 챙겨보는 편이나 유럽 축구는 거의 보지 않은 것도 있고 무명의 중고 신인이라 더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유럽 본부장 뫼리스는 상당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두고 보십쇼. 이번 시즌 세리에 리그에서 고유진이 사고 제대로 칠 겁니다.]
“사회적 물의만 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럴만한 친구는 아닌 것 같더군요.]
“개개인의 활약보단 팀이 어떤 성적을 내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기왕에 광고하는 거니 내년에 유로파 같은 대회에 나가면 더 좋잖아. 3년 동안 모두 합쳐 600억이 넘는 스폰서쉽을 맺었는데 뭔가 작은 성과라도 내놔야지.
뫼리스도 그렇고 유럽이란 동네가 축구라면 환장하는 이들이 무척 많다.
만약 이번에 좋은 효과가 수치상으로 입증된다면 더 크고 명성 높은 팀과 계약맺을 의사도 있었다.
[그 말 잊지 않고 기억할 겁니다.]
“매년 200억의 순수익을 더 올리려면 어느 정도 파셔야 하는지 아시죠?”
[이미 다 계산해놨죠. 그래도 올 초에 인수한 벨기에 몽스에 있는 공장에서 굿밤 맥주를 현지 생산할 예정이니 충분히 가능성 있습니다.]
몽스에 있는 맥주 공장을 사들여서 우리 맥주를 만드는 이유는 유럽 진출을 위한 교두보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물류비와 운송 시간을 모두 고려해보면 한국에서 만들어 보내는 것은 무리였다.
이게 벽향주와는 완전히 달랐다.
맥주의 특성상 개당 가격은 저렴한데 부피는 크기에 아무리 열심히 팔아도 정작 남는 것은 별로 없을 수 있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현지 생산이었다.
“벨기에 생산량만으로 부족하면 추가로 더 인수하거나 새로 지으면 되니 많이만 팔아주세요.”
[적어도 아시아 지역보단 많이 팔 테니 지켜봐 주십쇼.]
“아시아 지역 굿밤 판매량이 한국의 몇 배 수준인지 아시는 거 맞죠?”
최근 몇 년간 굿밤 맥주는 중국과 아시아에서 무서운 기세로 판매량을 늘리고 있다. 오히려 국내 판매량이 그로 인해 영향을 받고 있을 정도였다.
[물론이죠. 그만큼 자신 있습니다.]
“저도 믿고 있겠습니다.”
[TV 중계로 우리 유니폼이 송출되는 거는 처음인데 오늘 저녁에 팔레르모 시즌 개막 경기 보실 거죠?]
“네, 그럴 생각입니다.”
이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오저당에는 나를 제외한 상당수가 유럽 축구를 즐겨보는 편인데 그중에는 월드 투어를 마치고 돌아온 RJ도 있었다.
이제 곧 라니가 출산할 때가 되었다.
그래서 활동을 최대한 자제하고 있는 중인데 축구가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더구나 오저당의 로고가 박혀 있는 유니폼을 입은 선수가 뛰는 경기라 다들 기대감이 상당히 큰 편이었다.
뫼리스와 전화를 마치고 마당으로 나오자 수호는 저녁에 같이 축구 중계를 보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세 집 중에 그나마 만만한 게 녀석의 집이었기 때문이다.
“유 이사님, 아직 퇴근 시간 전인데 땡땡이를 치시면 되겠습니까?”
“지랄한다. 20분 차이밖에 안 나잖아.”
“어허! 이사님이 모범을 보이셔야죠.”
“그렇게 따지면 새벽에 벽향주 체크하러 나가는 거는 왜 수당 안 쳐주냐.”
요즘도 수호는 장기 숙성 중인 벽향주와 감저가 잘 숙성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새벽부터 나가서 살펴보고 있었다.
굳이 그 시간에 나가지 않아도 되는데 그런 생활 패턴이 몸에 익은 탓이다.
그건 올해 이사가 된 호세도 다르지 않았다.
“사원도 아니고 이사가 시간 외 수당을 받으면 되게 없어 보이잖아.”
“전혀 그렇지 않거든. 심심하면 축구 보면서 먹을 치킨이나 사와.”
“오케이!”
그 정도쯤은 충분히 해줄 수 있었다.
옛날처럼 치킨 한 마리를 먹으려면 태백까지 다녀와야 할 필요는 없었다.
주류 특화 단지가 들어선 이후에 오풍리도 많이 바뀌었다.
더구나 이곳을 찾는 관광객은 민박을 하며 머무는 이들도 있기에 작은 술집과 치킨집까지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이제 마을 입구까지만 나갔다가 오면 된다.
잠시 후에 치킨을 사서 돌아오니 수호의 집은 오저당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세 집 중에 규모는 가장 작으나 그래도 40평 정도는 되는 곳인데도 좁아 보였다.
대충 이십여 명쯤 되려나.
우리 세 집과 호세 가족만 합쳐도 기본이 열두 명이었고 거기에 우주와 유성을 비롯한 몇 명의 직원도 함께했다.
“짝짝짝 짝짝! 대한민국!”
“크크큭. 이게 무슨 국가대표 경기도 아닌데 무슨 응원이 그러냐.”
“팔레르모에 우리나라 선수 있잖아. 아까 보니 경기장에 태극기도 있더라.”
경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분위기는 제법 뜨거워졌는데 이렇게 모여서 축구 경기를 보는 것도 제법 오래된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여기 있는 사람들이랑 월드컵을 본 것만 합쳐도 두 번이 넘는다.
내년에 열리는 잉글랜드 월드컵이 세 번째가 되는데 그걸 생각해보면 정말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때 오저당의 로고가 가슴에 그려진 팔레르모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필드 위로 하나둘 뛰어나왔다.
“캬아아! 좋다. 어느 회사 로고인지 몰라도 기깔나네.”
“아··· 여기 라니 이사님도 계셨어야 하는데 아쉽네요.”
“그런데 라니는 혼자 있어도 괜찮아요?”
이 자리에 라니는 함께하지 못했다.
축구를 보며 술도 마시고 소리도 지를 텐데 만삭인 라니에게는 무리가 많았다.
그래서 집에서 쉬고 있기로 했다.
내가 RJ를 바라보며 묻자 그는 괜찮다며 웃었다.
“진통 오면 곧바로 전화주기로 했어.”
“예정일이 며칠 안 남았죠?”
“3일 뒤인데 혹시 몰라서 술은 안 마시고 있잖아. 전반 끝나면 잠시 갔다 올 거야.”
그러는 사이에 경기는 시작됐다.
여기 있는 오저당 직원 모두 팔레르모를 응원하고 있었으나 결과가 좋을 거라 예상하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한때는 디발라의 활약으로 세리에 A에서 중상위권이던 팀이었으나 2019년에 규정 위반으로 D까지 추락했었다.
생각보다 빠르게 A로 복귀했으나 올해 막 승격했기에 기대감은 별로 없었다.
실제로 경기 양상도 그런 편이었다.
시작과 동시에 두들겨 맞기 시작했는데 좀처럼 공격에 나서지 못할 정도였다.
당연히 윙으로 뛰는 고유진이라는 한국 선수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실점은 나오지 않고 있었다.
세리에 A에 복귀했다는 것만으로도 아드레날린이 폭발하고 있는 건지 다들 몸을 날리며 어떻게든 막아내고 있었다.
“와··· 피 터지게 싸우네.”
“저러다 누구 하나 실려 나갈 것 같아요.”
“그래도 투지 하나는 인정해줘야겠어.”
다들 그런 소감을 내뱉었을 정도였다.
슈팅 숫자만 스무여 개가 넘어간 후반 막판까지 팔레르모는 훌륭하게 버텼다.
그리고 후반 추가 시간이 주어질 무렵에 미묘하게 그 추가 기울어졌다.
[수비진에서 길게 걷어낸 공이··· 고유진 선수에게 기가 막히게 연결됐습니다.]
[치고 달려 나가는 고유진! 뒷공간이 완전히 열린 스페치아 수비진이 사력을 다해 달려갑니다.]
[아··· 너무 느려요. 발 빠른 고유진이 가뿐하게 수비를 따돌리고 골키퍼와 1:1 찬스를 맞이합니다.]
그 순간이 되자 모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기적 같은 순간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오늘 경기 중에 유일하게 나온 팔레르모의 결정적인 찬스였다.
그리고 곧 모두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고오오올! 와··· 방금 역습은 정말 쩔었다.”
“말 그대로 원샷원킬이잖아.”
“방금 저거 봤어? 우리 로고 카메라빨 쥑이네.”
고유진 선수는 오른쪽 가슴에 부착한 팔레르모의 앰블럼을 툭툭 치며 코너 플래그 근처에서 포효하며 환호했다.
심지어 향이도 그 모습을 따라 하면서 화면 앞에 붙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당연히 그 모습은 카메라에 단독으로 잡혔고 오저당의 로고가 박힌 이번 시즌 유니폼도 화면 가득 들어왔다.
그걸 본 우리 모두의 심정은 나와 같았을 것이다.
“와··· 이게 뭐라고 가슴이 웅장해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