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1권) (1/18)

1.

“저를 폐위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루시테가 내뱉은 말에 그토록 소란스럽던 홀 안이 조용해졌다.

루시테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이 모든 게 꿈 같으면서도, 또 지독하게 현실 같았다.

평소의 루시테라면 꿈속에서도 이런 말을 할 리가 없었으니까.

“저를, 폐위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루시테는 방금 뱉어낸 말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 말했다.

이 지긋지긋한 논쟁의 끝을, 논쟁의 주인공인 자신이 직접 끝내주겠다는데. 사람들은 조용하기만 했다.

루시테는 힐끗 제 이복동생들을 쳐다보았다.

저를 경멸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비올레타.

비올레타의 뒤에 숨어 겁에 질린 눈망울을 한 시드니아.

그리고 언제나처럼 싸늘한 얼굴의 이안.

문득 이안과 눈이 마주쳤을 때 루시테는 먼저 눈을 피했다.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며 인상을 찌푸릴 이안의 표정이 훤히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루시테는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 더는 미련 따위 없었으니까.

“그래요! 저런 황녀 폐위시키는 게 맞습니다! 처음부터 들이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정적이 길어질 즈음 누군가 외쳤다.

“맞습니다! 더 고민하실 게 뭐가 있습니까? 본인도 폐위시켜 달라고 하지 않습니까?”

누군가가 또 목소리를 높였다.

하나둘 외쳐대는 적대적인 목소리들을 루시테는 그저 담담하게 듣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루시테는 그저 이 모든 게 빨리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루시테는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단상 위에 황제가 있었다.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지 황제는 불쾌한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야 마음에 안 들긴 하겠지.

황제는 어떻게든 그녀를 이 메이븐에 끝까지 붙들어 두려 했던 마지막 사람이었으니까.

“루시테.”

이제까지 조용히 있던 황제가 입을 열었다.

소란스러웠던 홀 안이 황제의 다음 말을 기다리며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거라.”

황제의 목소리가 엄했다.

“다른 이들이 뭐라 한들 너는 내 딸이 아니냐?”

“폐하! 본인이 폐위를 원한다 하지 않습니까.”

이안의 어머니이자 이 나라의 국모 이시엘라 황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용히 하시오, 황후! 그대는 내 딸에게 모욕을 주려는 건가? 내 딸을 모욕하는 것은 곧 나를 모욕하는 것이오!”

황제가 큰 목소리로 화를 냈다.

이시엘라 황후는 황제의 외침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깨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루시테는 황제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내 딸? 내 딸이라고?’

루시테는 실소를 삼켰다.

황제의 말이 가식적이기 그지없었다.

이제 와 아버지 행세라니.

이 황궁 안에서 온갖 천대와 모욕을 받는 동안 자신을 단 한 번도 감싸주지 않았던 사람이다.

제가 황녀로 세워놓고도, 무슨 일을 당하든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던, 그런 사람이다, 황제는.

루시테는 황제의 말을 하나도 믿지 않았다. 그렇기에 마음이 흔들리지도 않았다.

황제는 그저 이런 공식적인 자리에서 자신이 직접 황녀로 책봉했던 딸을 폐위시키는 게 못마땅할 뿐이리라.

“다시 생각해 보아라, 루시테. 네가 이 황궁을 떠나서 갈 곳이 어디 있겠느냐?”

황제는 짐짓 부드럽게 루시테를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루시테가 할 말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저를 폐위시켜 주시기 바랍니다, 황제 폐하.”

황제를 똑바로 바라보는 루시테의 시선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어허! 다시 생각해보래도?”

황제의 언성이 높아졌다.

“저를 폐위시켜주시기 바랍니다.”

루시테는 마치 그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처럼 또 대답했다.

쾅!

황제가 주먹으로 의자를 세게 내리쳤다. 의자의 팔걸이가 부서질 것처럼 커다란 소리가 났다.

“네가 정녕 이 황궁을 떠나겠다는 말이냐? 네가 후회해서 다시 돌아온다 해도 절대 황성으로는 돌아올 수 없을 거다! 너에게 어떤 지원도 하지 않을 것이고!”

황제가 분노하여 소리쳤다.

‘지원이라.’

루시테는 또 한 번 마음속으로 실소를 머금었다.

지원 따위는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고 준다 해도 받을 생각도 없었다. 어떻게든 메이븐과 연결되는 것은 루시테 쪽에서 사절이었다.

멀리 떠나리라.

메이븐의 그 누구도 자신의 소식을 알 수 없는 아주 먼 곳으로. 멀리멀리.

“어디 한번 대답해 보아라, 루시테. 네가 황실의 지원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황제가 분노하면서도 어떻게든 그녀를 어르려 했다.

“네, 폐하. 저는 괜찮습니다.”

루시테가 평범한 인사를 하듯 담담하게 대답했다. 눈을 부릅뜬 귀족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런 태도라니요, 폐하!”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군요!”

“폐위시켜 마땅합니다! 원하는 대로 해주시죠!”

그들은 루시테의 태도를 이해할 수가 없다며, 어서 폐위시키라며 황제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더 이상은 황제가 루시테의 발언을 무시할 수 없는 상태로 사태가 치닫게 되었다.

마침내 황제의 입에서 ‘너는 이제 내 딸이 아니다’라는 말이 떨어지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당장 떠나라! 이 황실에 발 디딜 생각은 평생 하지 않는 게 좋을 거다!”

분노에 찬 황제가 루시테에게 소리쳤다.

루시테는 대답하지 않고 황제를 빤히 쳐다봤다. 그리고 자신을 노려보는 사방의 사람들도.

귀족들, 이시엘라 황후와 황비들, 그리고 이안, 베로니카, 시드니아.

루시테는 그들과 눈을 맞춘 후 마침내 몸을 돌렸다.

또각, 또각.

나지막한 발소리가 정적과 흥분이 내려앉은 거대한 홀 안에서 멀어져갔다.

발걸음을 옮기는 루시테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가벼웠다.

‘진즉에 이럴 것을.’

단출한 짐 가방 하나만 들고 초라하지만 단정한 옷을 입은 루시테는 망설임 없이 메이븐 황성을 벗어났다.

그녀는 거대하고 화려한 황성의 앞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중천에 떠오른 해가 눈이 부실 정도로 강렬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루시테는 손을 뻗어 손바닥으로 해를 가려보았다. 그러다 곧 그녀는 햇빛을 가리길 포기하고 양손을 허리에 얹었다.

스읍.

‘후우우우우.’

루시테는 허리가 뒤로 젖혀질 정도로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얼마나 크고 환하게 웃었는지. 그녀의 얼굴이 몹시 밝고 후련해 보였다.

루시테에게는 바로 지금이 그녀가 겪어왔던 수십 년의 인생 중 가장 속이 시원한 순간이었다.

* * *

메이븐은 남부에서 가장 크고 강대한 나라이다.

세계에서 가장 길고 아름다운 해안을 소유하고 있으며, 각종 아름다운 보석이 나오는 광산도 있다.

거대한 항구 도시가 열두 개, 나라에 막대한 부를 가져다주는 광산 도시가 서른세 개나 있는 대제국이었다.

강력한 황권과 부를 쥐고 있는 메이븐은 헤카레트 신전의 비호를 받는 신성 제국이기도 했다.

주신 헤카레트 아래 신성시되는 보랏빛이 메이븐 황실의 상징이었다.

대대로 메이븐 황실의 황족들은 아름다운 보랏빛 눈이나 머리칼을 가지고 태어났고, 그들 중에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존재인 성녀가 나오기도 했다.

세상에서 추앙받는 메이븐의 신성하고 강력한 황실.

3황녀 루시테 클라우디오는 그런 황실의 유일한 오점이었다.

「이러지 마세요!」

루시테는 황후가 보낸 시녀들에게서 뒷걸음질 쳤다.

「왜 이러시는 거예요?」

「황후 폐하께서 공적인 자리에 그 꼴로 나타난 벌을 내리라고 하셨습니다.」

시녀들은 뒷걸음질 치는 루시테를 붙잡았다.

이시엘라 황후는 루시테의 검은 머리칼을 싫어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치렁치렁한 긴 머리칼이 하필이면 그날따라 심기가 불편했던 황후에 눈에 거슬렸다.

시녀들의 거친 손놀림에 루시테의 검은 머리칼이 어지러이 잘려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오로지 황후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움직인 시녀들의 손속에는 일말의 다정함도 없었다.

형식상으로 루시테를 모시는 시녀들조차 아무도 루시테의 떨어진 머리칼을 치워주지 않은 것은 물론, 시녀들의 실수로 생긴 상처조차 치료해주지 않았다.

검은 머리칼은 저주의 상징이기 때문이었다.

저주받은 황녀.

루시테는 고작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스스로 치료하고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하루하루, 매 순간이 지옥 같았다.

그럼에도 루시테가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희망이 한 가지 있었다면, 언젠가는 가족들이 자신을 알아주리라는 기대였다.

‘사랑받고 싶어.’

단 한 번만이라도 가족들의 사랑을 받고 싶었다.

황후에게 어머니라 불러보고 싶었고, 동생들과 사이좋게 지내보고 싶었다.

평생의 소원이었다.

네 번이나 회귀하여 같은 인생을 살 동안, 단 한 번도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할 줄은 몰랐다.

“어이, 꼬마 아가씨! 어디까지 갈 거요?”

얻어 타고 가던 짐마차 주인이 외치는 소리에 루시테는 꾸벅이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까무룩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루시테는 얼굴에 붙은 지푸라기를 떼어내며 반쯤 벗겨진 모자를 푹 눌러 썼다.

예전 기억은 꿈에서까지 그녀를 따라다니며 힘들게 했다.

할 수만 있다면 기억조차 다 지워버리고 싶건만.

“어디까지 갈 거냐니까?”

“아저씨 가는 데까지 가요!”

루시테는 목청껏 외쳤다. 작은 소리로 말하기에는 마차가 덜컹거리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다.

“어딜 가는데?”

“저는 더 멀리 가요!”

짐마차 주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루시테는 치마를 탁탁 쳐 옷 주름을 펴며 뒤를 돌아보았다.

달려온 길은 산과 나무. 그리고 또 나무들뿐이었다.

이제 메이븐 황성의 찬란한 첨탑이라든가 깃발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루시테는 습관적으로 목 뒤를 매만졌다. 어릴 때 가위 때문에 난 긴 흉터가 손끝에 잡혔다.

손에 닿는 감각이 울퉁불퉁했다.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해 아무렇게나 엉겨 붙은 살이 이제는 흉측한 상처로 남아 있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황녀가 아니야.’

루시테는 작게 중얼거렸다.

세 번의 인생을 살 동안 평생을 몸담았던 메이븐의 황성, 그녀에게 희망이 되었으면서도 고통이 되었던 것들.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왔다는 게 이제야 실감이 나고 있었다.

‘후회할 거다. 금세 후회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을 거야.’

황성을 나오기 직전, 이안이 따라와 말했다.

“이해가 안 가.”

루시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토록 매몰차게 굴고 자신을 경멸했던 이안이었는데, 왜 떠나는 자신을 붙잡고 그런 말을 한 건지.

‘걱정 마, 그럴 일 없으니까.’

루시테는 자신이 이안에게 대답했던 말을 떠올렸다.

자신이 그 말을 했을 때 이안의 표정이 어찌나 묘했는지, 루시테가 이안에게서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뭐, 그런 것도 이제는 다 신경 쓸 필요 없는 일일 뿐이었다.

이제 루시테는 가족의 한 마디 한 마디에 희비를 느꼈던 저주받은 황녀가 아니니까.

‘자, 시작해볼까?’

루시테는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 * *

퍽! 퍽!

“아우! 정말!”

루시테는 도끼를 땅바닥으로 내팽개쳤다.

패 본 적도 없는 장작을 패려니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었다. 벌써 팔 안쪽이 욱신거리려고 했다.

이럴 때는 자그마한 몸이 정말 도움이 안 됐다.

‘한 오 년 체력을 기르면 장작도 쉽게 팰 수 있으려나.’

루시테는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내팽개친 도끼를 다시 주워 들었다. 할 일이 태산이었다.

장작을 대충 더 팬 후, 루시테는 장갑을 벗어들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떤 귀족이 별장으로 쓰다 팔아버렸다는 이층집은 낡아서 여기저기 칠이 벗겨진 데다 거미줄투성이였다.

나무로 된 계단은 오르내릴 때마다 끼익 소리가 났으며, 경첩이 낡은 문은 제대로 닫히지도 않았다.

손봐야 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루시테는 소파에 풀썩 주저앉았다. 먼지가 확 일어났다.

“어휴.”

루시테는 기침을 하며 손바닥으로 먼지를 날렸다.

한참 먼지를 날리던 루시테는 몸을 소파 안쪽으로 깊숙이 눕혔다.

‘편안하다.’

루시테는 눈을 지그시 감고 볼우물이 패이도록 깊이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는 그녀를 힘들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오래되고 낡은 이곳이 메이븐의 황성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이라고 해도, 루시테에게는 모든 면에서 황성보다 더 나았다.

이곳에서야 비로소 진짜 자신의 삶을 찾은 것만 같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루시테는 터나 마나 한 치마를 습관적으로 툭툭 털어내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어김없이 먼지가 날려대었다.

이러다간 이안에게 죽는 것보다 먼지 때문에 죽는 것이 먼저일 것 같으니, 일단 이 엄청난 먼지들을 어떻게든 해야 했다.

루시테는 사방을 돌아다니며 커튼을 떼어냈다.

창문을 활짝 열자 숲 내음이 한껏 콧속으로 밀려 들어오고, 저 멀리 도시의 전경이 내려다보였다.

올라오는 게 좀 힘들어서 그렇지. 꽤 좋은 집이 아니던가.

몇 가지 무시할 수 없는 단점만 뺀다면 장점이 더 큰 집이라 할 수 있었다.

그 무시할 수 없는 단점 중 하나인 이 집의 위치는 좀 살다 보면 금방 극복할 수 있을 터였다.

비록 원래 집주인은 이 집의 위치 때문에 팔아버렸다 할지라도.

루시테는 먼지를 턴 커튼을 물에 담가두고 바닥을 쓸었다.

휘날리는 먼지들이 죄다 창밖으로 나가기를 바라며 작은 몸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비록 몸은 저주를 받아 이 모양이지만 내공만은 한참 어른이 아니던가.

서른도 안 되는 짧은 생을 세 번 정도 살았으니, 다 합치면 구십 좀 넘으려나.

루시테는 제 나이를 어림잡아 보며 바닥을 열심히 쓸고 닦았다. 물을 쫙쫙 끼얹어 밀대로 박박 문질러 대었다.

몸은 힘들어도 청소를 하면 잡생각이 사라지고 머리가 깨끗이 비워져서 좋았다.

쾅쾅쾅!

한참 청소하는 중에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들겼다.

루시테는 황급히 망토를 찾아다가 얼굴을 다 가릴 정도로 두건을 푹 눌러 썼다.

몸도 보이지 않게 칭칭 감아, 그냥 보면 소년인지 소녀인지 그냥 작은 사람인지 구분도 되지 않을 실루엣이었다.

“누구세요?”

루시테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조심스럽게 방문객을 맞았다.

갑옷을 입은 병사 한 명과 그녀에게 집을 판 부동산 중개인이었다.

부동산 업자는 연신 손수건으로 제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이고……. 헉, 헉……. 잠시만 기다리쇼. 숨이 너무 차 가지고.”

부동산 업자는 거의 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얼굴이었다. 부동산 업자는 한참 만에야 호흡을 가다듬고 물었다.

“물 한잔 마실 수 있겠소?”

루시테는 병사와 부동산 업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제법 수상해 보이는 일행이었다.

“들어오세요.”

루시테는 병사와 부동산 업자에게 물을 건네준 후 먼지 많은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

병사는 주머니에서 펜과 종이를 꺼내더니 받아 적을 준비를 했다.

“루시 양이라고 했습니까?”

병사가 날카로운 표정으로 루시테를 보며 물었다.

루시테는 병사 대신 부동산 업자를 바라보았다.

이곳에서 루시테가 이름을 알려준 사람은 지금까지 부동산 업자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가명을 대충 지어 루시 필드라는 이름으로 알려주었지만.

“무슨 일인지 설명부터 해주시겠어요?”

루시테는 허리를 꼿꼿이 펴고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봤자 그들의 시선에 조그맣게 보이는 것은 똑같겠지만, 어쨌든 루시테는 작은 소녀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요즘 수도 외곽이 좀 흉흉해야지요.”

부동산 업자의 반짝이는 이마에서는 여전히 구슬 같은 땀이 흘러내렸다. 그는 땀을 닦아내며 설명했다.

요즘 이 근처에 수상한 것들이 나타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이 근처 산을 타고 수상한 흑마법사와 몬스터들이 출몰한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도 지역으로 새로 들어온 사람을 확인하는 중입니다.”

병사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이들은 한마디로 이 시기에 혼자 이 도시에 처음 나타난 루시테가 수상하다는 소리였다.

그야 아무도 살지 않으려 하는 낡아빠진 산 중턱 저택에 혼자 사는 작은 여자라니.

루시테가 생각하기에도 그들이 충분히 그녀를 수상하게 여길 만했다.

“그렇군요. 이해해요.”

루시테는 조금 전보다는 훨씬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다 해서 여전히 경계심을 푼 것은 아니었다.

저들에게 자신이 메이븐의 폐위당한 황녀 출신이라는 것까지 알려야 할 필요는 결코 없었으니까.

루시테는 거짓말을 솜씨 있게 해볼 생각이었다.

“루시 양, 성함을 한 번 더 확인하겠습니다.”

병사는 다시 펜을 치켜들고는 받아 적을 준비를 했다.

“루시 필드예요.”

“루시, 필드…….”

병사가 루시의 이름을 받아 적었다.

“그런데 저기요. 죄송하지만 저를 ‘루시 필드 씨‘라고 불러 주시면 좋겠어요. 양이라 불릴 정도로 어리지 않으니까요.”

병사는 필기를 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대놓고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루시테를 훑어보았다.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지?”

병사의 목소리가 삐딱했다.

“스물셋이에요.”

“실례지만 두건을 벗어 주시겠습니까?”

병사는 루시테의 나이를 듣고도 여전히 의혹이 가시지 않는지 더한 것을 요구해왔다.

루시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실례예요! 숙녀가 애써 가리고 있는 얼굴을 보여 달라니요!”

루시테는 소파를 손바닥으로 팡 치며 할 수 있는 한 가장 크게 화를 냈다.

“하지만 보여주셔야 할 텐데요. 미성년자는 집을 살 수 없습니다.”

병사는 물러설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얼굴에 큰 흉터가 있어요! 어릴 적 크게 화상을 입었다고요! 어떻게 숙녀에게 그런 걸 보여 달라고 할 수 있죠? 네? 정말 이렇게 무례하게 하셔야겠어요?”

“아니, 그게…….”

“제 몸집이 왜 이렇게 작은지 궁금하시겠죠! 저는 전신에 화상을 입었어요! 그래서 자라지 못했다고요!”

루시테는 무척이나 크게 화를 냈다. 심장이 미친 듯이 쿵쾅거렸다. 하지만 저 병사는 그것을 알 리 없으니.

루시테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화가 난 미친 여자처럼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 그래도 아가씨가 협조를 좀 해주시면…….”

부동산 업자는 멎었던 땀을 다시금 삐질삐질 흘리며 말을 더듬었다.

“협조해드리고 있잖아요, 지금! 제가 왜 얼굴을 보일 수 없는지 다시 설명해드릴까요? 숙녀의 상처를 그렇게 보고 싶다 그 말씀이에요?”

루시테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인생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고 있었지만. 워낙 긴급한 상황이었기에 미처 깨닫지 못했다.

루시테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일단 알겠습니다.”

병사가 한숨을 크게 내쉬며 다시 펜과 종이를 들었다.

“대신 조사에 잘 협조해 주셔야 합니다.”

“그럼요. 저도 어서 제가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인정받고 싶으니까요.”

루시테는 그제야 자리에 앉았다.

“루시 필드 씨, 스물셋이라고 하셨고. 이전에는 어디에 머무르셨죠? 수도로 들어온 목적이 뭡니까?”

루시테는 바짝 긴장했지만 침착하게 대답했다.

이전에는 이크릭스의 해안가 지방에 살았으며, 돌봐주시던 조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남겨주신 유산을 가지고 일자리를 구할 겸 수도로 왔노라고.

이 집은 그 유산을 탈탈 털어 산 것이라고.

병사에게 열심히 설명했다.

병사와 부동산 업자는 그제야 안심한 얼굴이었다.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평범한 이유였기에.

“거봐요. 내가 이상한 사람 아니라고 했잖소?”

부동산 업자는 병사에게 볼멘소리를 했다.

“이 시기에 수도로 들어오는 사람이 한둘이오? 일자리 구하러 얼마나 많이들 오는데.”

부동산 업자는 루시테에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열심히 살라고 응원을 해주기까지 했다.

마침내 그들이 돌아가고 나서야 루시테는 한숨을 돌렸다.

루시테는 마저 청소할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먼지 쌓인 소파에 몸을 푹 기댔다.

루시테는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활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바람이 시원하게 들어오며 루시테의 머리칼을 간질였다.

저주받은 검은 머리칼이 두건 아래로 흔들렸다.

루시테는 문득 제 머리칼을 손으로 더듬어 보았다. 짧은 검은 머리칼이 귓가에서 찰랑였다.

기르고 싶어도 기르지 못했던 머리였다. 이시엘라 황후가 끔찍하게 싫어했으니까. 그러나 이제는 기를 수 있을 터였다.

‘이크릭스에서 검은색은 저주받은 색이 아니니까.’

루시테는 작게 중얼거렸다.

이제 당당하게 머리를 보이고 다녀도. 눈동자를 드러내고 다녀도 그녀에게 저주받았다며 손가락질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스물셋이나 먹었는데도 열댓 살 정도의 소녀처럼 보인다는 게 유일한 문제였지만.

‘뭐. 그 정도쯤이야.’

오늘처럼 잘 넘어가면 될 터였다. 루시테는 얼굴에서 손을 내리곤 기분 좋게 웃었다.

일단 자신이 자유를 찾아 떠나왔다는 사실. 아무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되는 혼자만의 공간이 생겼다는 사실.

그 자체가 소중했다.

이만큼 한 것부터 벌써 자신의 네 번째 인생은 반쯤 성공한 거나 다름없다고, 루시테는 생각했다.

* * *

“하나. 둘. 셋…….”

루시테는 침대에 앉아 심각한 표정으로 동전을 세었다.

싼값에 집을 샀다지만 그래도 남은 돈이 그렇게 여유롭지는 않았다.

있는 대로 긁어온 보석 몇 개와 팔면 돈이 될 만한 집기류.

그리고 떠나기 직전 이안이 건네준 돈주머니가 다였다.

사실 받지 않고 싶었지만, 루시테는 냉큼 받았다. 어차피 뭐 어떤가.

다시는 안 볼 사이. 황태자인 이안에게는 그 돈이 별것도 아니었을 터다.

“일을 하긴 해야 하는데…….”

루시테는 미간을 좁혔다.

루시테가 남은 돈으로 일 년 이상을 버티는 건 무리였다.

물론 황성을 떠나올 때 무작정 놀고먹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루시테가 살아온 인생이 몇 년인데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겠는가.

아니.

“바보……. 그래, 나는 바보가 맞아.”

루시테는 멍한 표정으로 바닥을 닦았다.

뭘 해야 할지 갈피가 안 잡혔다.

세 번이나 회귀하는 동안 뭘 하고 살았는지를 곰곰이 돌아봤지만 황성에서 산 게 다였다.

첫 번째 생에는 손가락질을 받고 괴롭힘을 당하는 것이 무서웠다.

그래서 방에 틀어박혀 책을 보거나, 황족들과 사용인들의 눈을 피해 도서관에 틀어박혀 있거나 했다.

두 번째 생에는 좀 다르게 살아볼까 싶어 매일같이 황후와 동생들을 찾아가 친해지려고 해봤다.

세 번째 생에서 딱 한 번 도망쳐 황성을 떠났을 때는 금세 신전에 붙잡혔다.

도통 뭘 해볼 기회가 없었다.

딱 하나 다행이라면, 그때 도망쳐본 덕분에 루시테는 자신이 진짜 예언 속 성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 정도였다.

그거 말고 인생에 도움 되는 큰 수확은 없었다.

‘아는 건 많은데 할 줄 아는 건 없다.’

딱 루시테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책으로는 하도 읽어서 잘 떠오르는데 막상 하려면 막막하기만 했다.

루시테는 걸레를 쫙 짰다. 구정물이 줄줄 흘러나왔다.

이놈의 집구석은 아무리 쓸고 닦아도 먼지가 끝이 없었다.

그래도 일주일간 좀 치웠다고 사람 사는 집처럼 보이기는 했다.

몇 번이나 밟아서 빤 이불과 커튼에서는 더 이상 먼지가 나오지 않았고 베갯잇은 보송보송했다.

햇빛과 바람이 잘 들어 드디어 케케묵은 먼지 냄새도 가시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해야 할 일 천지에 돈 들어갈 일투성이였다.

지나다닐 때마다 비명이라도 지르는 것처럼 삐걱대는 계단과 여닫을 때마다 끼익거리는 경첩은 좀 손봐야 될 것 같고.

울타리도 새로 해야 하고 페인트칠도 해야 하고. 정원도 손봐야 하고.

루시테는 손가락을 꼽아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루시테는 빤 걸레를 널어놓고 손을 탁탁 털었다.

식재료도 떨어져 가고, 일자리도 알아봐야 하니 슬슬 광장으로 내려가 봐야 할 때였다.

루시테는 모자를 눌러쓰고 집을 나섰다.

쿵. 하고 낡은 문이 루시테의 등 뒤에서 둔탁하게 닫혔다. 루시테는 먼지 쌓인 화분 아래 열쇠를 두고 종종걸음을 옮겼다.

돌과 잡초가 무성한 작은 정원을 지나, 다 허물어져 가는 울타리를 지나 집을 나왔다.

솨아아.

루시테의 머리 위로 키가 큰 나무들이 바람에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녹음이 짙었다. 높이 뜬 해가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언뜻언뜻 빛을 비추었지만 숲 속까지 환하게 들어오지는 못했다.

‘해가 빨리 지겠어.’

루시테는 걸음을 재촉했다.

하필 집이 산 중턱에 있는 바람에 어두워지면 집을 쉬이 찾지 못할 듯했다.

만약 어두워지고 나서 돌아와야 한다면?

지금은 아름답게 들리는 나뭇잎 소리도 밤이 되면 스산하고 소름 끼치게 들릴 뿐일 터다.

어제 찾아온 병사가 했던 말이 순간 루시테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요즘 이 근처에서 수상한 마법사와 몬스터가 출몰하고 있습니다.’

“으으.”

루시테의 몸이 저도 모르게 부르르 떨렸다.

루시테는 마음속으로 이 집의 단점 목록에 한 가지를 더 추가하며, 결코 늦게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리라 다짐 또 다짐했다.

* * *

루시테가 광장에 도착했을 때는 한낮이었다.

히히히히힝!

“비키시오! 비켜!”

“오늘 들어온 싱싱한 생선이오!”

루시테는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길 사이로 마차들이 정신없이 달렸고 서로 부딪힐 뻔하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다니고 있었다.

마부들은 고삐를 당기며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대었고 말들은 마부가 급정거할 때마다 다리를 들어 올리며 울음소리를 냈다.

루시테는 사람과 마차에 치이지 않기 위해 연신 주변을 살피며 걸어야 했다.

이크릭스의 수도 아테라는 루시테가 상상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활기가 넘치는 곳이었다.

일전에 부동산 중개업자를 찾아갈 때도 한 번 경험했던 곳이었지만 언제 와도 적응이 안 됐다.

“거기 비켜요, 비켜!”

짐을 한가득 든 사람이 루시테 쪽으로 달려오며 소리쳤다.

루시테는 황급히 옆으로 피하며 숨을 삼켰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누가 코를 베어 가도 모를 것 같은 도시였다.

루시테는 작은 몸집을 잽싸게 움직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식료품을 파는 매대들이 즐비해 있는 거리에서 루시테는 사냥하듯 식량을 샀다.

하루하루 살아남으려면 전투하듯 애를 써야 하는 바쁜 도시였다.

루시테는 간신히 빵과 치즈, 베이컨 따위를 품에 한가득 안았다.

루시테의 얼굴에 닿는 종이봉투가 바스락거렸다.

먹음직스러운 바게뜨가 종이봉투 위로 길게 삐져나와 루시테의 얼굴에 닿을 듯 말 듯 했다.

루시테는 조금 전보다는 여유로워진 발걸음으로 상점들이 줄줄이 있는 길가를 따라 걸었다.

도로는 잘 포장되어 있었다.

루시테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낮은 구두굽이 돌바닥에 부딪혀 기분 좋은 또각또각 소리가 났다.

저 멀리 돌로 만든 아치형 다리 아래로 수위가 낮은 강이 느릿하게 흘러가는 것이 보였다.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는데도 인도로 내려앉은 참새들은 떨어진 먹이를 찾아 바닥을 쪼았다.

“여기는 아테라야.”

아테라의 소란스러운 거리는 다시금 루시테가 드디어 메이븐을 떠나왔다는 것을 실감 나게 해주었다.

루시테는 식료품이 든 종이봉투를 더욱 꽉 안았다.

“내가 아테라에 있는 거야.”

루시테는 새삼스레 중얼거렸다.

메이헨은 루시테가 한평생, 아니 세 번의 인생 동안이나 살았던 지긋지긋한 메이븐의 수도였다.

메이헨 역시 아테라에 뒤지지 않을 만큼 거대한 도시이지만 활기만큼은 아테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루시테는 모든 면에서 아테라가 더 났다고 생각했다.

메이븐이 신전을 등에 업고 성장한 신성 대제국이라면.

이크릭스는 마법과 과학을 등에 업은 마법 제국이다.

신성 대제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메이븐의 수도는 차분하고 절제된 분위기였다.

반면 마법과 과학을 좇는 이크릭스의 수도는 활기가 넘치고, 시끄럽지만 신선했다.

루시테는 아테라의 모든 점이 마음에 들었다.

메이헨과 하나도 비슷하지 않다는 점에서, 아주 마음에 들었다.

특히 이곳 사람들은 루시테가 체구가 작든 크든, 머리가 검은색이든 아니든 쥐뿔 관심도 없어 보였다.

모두 자기 인생을 하루하루 살아나가는 데만 바쁜 것 같았다.

딸랑.

그때 루시테의 바로 앞에서 상점의 문이 벌컥 열렸다.

“아!”

루시테는 다리가 꼬여 휘청거렸다. 구두 굽이 돌바닥에 걸렸다.

루시테는 그대로 무릎을 찧으며 넘어졌다.

그러는 통에 루시테가 손에 들고 있던 봉투도 와르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내 빵!”

루시테는 넘어지면서도 비명처럼 외쳤다.

종이봉투 위로 훌쩍 삐져나와 있던 바게뜨가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루시테는 울상이 된 얼굴로 황급히 떨어뜨린 식료품을 주워 모았다.

“아이고. 아가씨, 미안해요!”

푸근하고 나이가 지긋한 목소리가 루시테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정말 미안해요. 괜찮소?”

하얀 턱수염이 덥수룩하고 빵모자를 쓴 할아버지가 루시테 앞에 쭈그리고 앉아 열심히 굴러다니는 사과와 식료품 따위를 주웠다.

할아버지는 루시테에게 연신 사과하며 상점 안으로 들어오라고 권했다.

상점 안에서는 낡은 책 냄새가 훅 풍겨 나왔다.

루시테는 무릎을 절뚝거리면서 가게 안을 두리번거렸다.

볕이 잘 드는 큰 유리창은 커튼으로 반쯤 가려져 있었고, 한쪽 벽에는 각종 표지의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가게의 한 가운데에 진열된 책들은 최근 나온 연정 소설이나 과학 서적 따위였다.

가게에서 따스하고 포근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서점이네요.”

“그럼! 아테라에서 제일 오래된 서점일세.”

자신을 이반이라 소개한 할아버지는 루시테가 작게 중얼거린 목소리를 용하게 알아듣고 대답했다.

그는 부산스럽게 움직이며 루시테에게 무릎에 바를 연고를 주었고 차와 다과를 내어놓았다.

이반은 차를 마시는 동안 너털웃음을 지으며 서점에 대한 자랑을 줄줄이 늘어놓았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자신이 오랫동안 운영해온 서점에 대한 자부심이 깊게 배어 있었다.

“저건 뭐예요?”

루시테는 한참 이반의 수다를 듣다 말고 문득 손을 뻗어 카운터에 놓인 꾸러미들을 가리켰다.

카운터에는 가지각색의 그림이 그려진 양피지들과 두꺼운 책이 여러 권 펼쳐진 채 어지러이 놓여 있었다.

책은 내용이 중간 즈음부터 쓰다 만 채였는데, 잉크도 아직 덜 마른 것 같았다.

“아하. 저건. 흠…….”

이반 영감은 허허 웃으며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저건 내가 요즘 번역하고 있는 책이라네. 귀족들이 쓰는 말은 너무 어려워서 공용어로 옮겨 적고 있다네.”

“공용어요?”

“책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은데 글을 아는 사람이 통 있어야 말일세. 아무리 필사를 맡겨놔도 수요가 너무 많아서 일손이 부족하다네.”

이반 영감은 자신이 이제는 눈도 침침한데 이런 일을 하고 있다며 푸념을 늘어놓았다.

루시테는 일어나서 카운터 책상에 놓여 있는 책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래도 세 번 회귀할 동안 내내 황녀이자 책벌레로 살아온 루시테에게는 당연하게도 그다지 어렵지 않은 언어들이었다.

이크릭스의 상류층 언어인 카트라나를 대륙 공용어로 옮기는 것 정도야 쉬운 일이었다.

루시테는 양피지에 그려져 있는 여러 그림도 유심히 살펴보았다.

남자나 여자, 저택 따위가 고급스럽게 그려져 있었다.

“이건 어디에 쓰는 그림이에요?”

“삽화일세. 요즘에는 연정 소설에 삽화가 들어간 걸 수집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거든. 부러 삽화를 받아서 대륙 공용어로 책을 새로 엮기도 하고 있다네.”

“아아.”

루시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왜? 아가씨, 관심 있소?”

“네.”

루시테는 이반 영감의 질문에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테는 아주 먼 옛날, 끔찍한 현실을 깨닫기 전 자신이 화가를 꿈꿨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황제와 황후, 이복동생들이 모두 사이좋게 지내고, 자신이 그들의 초상화를 그려주고 싶다는 꿈.

이제는 물거품이 되어버린 꿈이지만, 그녀가 감히 황족의 초상화를 그리겠다고 생각할 수 있을 정도로 손재주가 좋은 것은 사실이었다.

루시테는 책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한 줄을 읽어 내렸다.

“아가씨, 혹시 카트라나를 할 줄 아오?”

이반 영감이 눈을 크게 뜨고 반색하는 표정으로 루시테를 바라보았다.

* * *

루시테는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였다.

먼지 하우스라 불러도 할 말이 없던 집을 쓸고 닦는 것으로 그녀는 매일 하루를 시작했다.

이제는 먼지 하우스가 아니라 좀 봐줄 만한 집으로 이름을 바꿔도 될 만큼 집은 깨끗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창틀, 바닥, 벽난로, 화덕, 어디 하나 루시테의 손이 안 닿은 곳이 없었다.

그녀는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콧노래를 부르며 바닥을 쓸었다.

따뜻한 볕을 찾아 날아온 새들이 창틀에 앉아 지저귀었다.

오롯한 자신만의 공간을 조금씩이지만 깨끗하게 바꿔나가는 것은 꽤 소소한 행복이었다.

“흠흠흠.”

갓 구운 빵의 고소한 냄새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루시테는 앞치마를 두르고 잼을 열심히 저었다.

커다란 냄비에서는 달짝지근한 냄새가 진동했다.

익숙하지 않던 요리도 책을 사서 차근차근 따라 하니 생각보다 재미있고 할 만 했다.

루시테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차를 따르고 바삭한 빵에 잼을 발랐다.

소박한 아침 식사였다.

빵 부스러기는 창틀로 날아든 참새들에게 던져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오전의 일과가 끝나면 루시테는 거실에 앉아 책을 펼쳐놓았다.

물론 읽을 책은 아니었다. 테이블에 놓여 있는 많은 책은 전부 다 일거리였다.

루시테는 기분 좋은 얼굴을 하고 며칠 전 이반 영감의 서점에 갔던 일을 떠올렸다.

「아가씨, 혹시 카트라나를 할 줄 아오?」

이반 영감이 반색을 하고 루시테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이 기대로 초롱초롱 빛났다.

「그럼요. 읽을 줄도 알고 쓸 줄도 아는걸요.」

「세상에. 세상에.」

이반 영감은 연신 ‘세상에’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부산스럽게 종이와 펜을 찾아와서는 당장에 루시테 앞에 놔주었다.

「이 부분 한 번 써보겠소?」

영감의 주문에 루시테는 펜을 들었다.

루시테의 잉크 펜이 거침없이 움직였다.

루시테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읽는 것과 동시에 카트라나를 대륙 공용어로 옮겨 적어갔다.

「이거 내가 오늘 대단한 사람을 만났구먼!」

이반은 시종일관 눈을 크게 뜬 채로 놀람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손뼉까지 치며 몹시 기뻐했다.

「사장님. 저 그림도 좀 그려요.」

루시테는 씩 웃으며 덧붙였다.

겉으로는 덤덤하게 얘기했지만, 루시테는 마음속으로 거의 기립박수를 치고 있었다.

생각보다 쉽게 그녀가 할 수 있을 만한 일을 구할 것 같은 예감이 강렬하게 들었기에.

“히히.”

루시테는 책을 펼쳐놓고 일할 준비를 하며 조그맣게 웃었다.

이반 영감과 만나 정말 다행이었다.

생각보다 급여를 많이 쳐주었고, 또 여러 사람과 섞일 필요도 없었으며 조용히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루시테는 책도 좋아하는 편이었다.

루시테로서는 다시 구할 수 없는 최고의 직장이었다.

번역은 꾸준히 하고 삽화는 가끔 급할 때 부탁을 받기로 했다.

루시테가 그림을 안 그린 지가 꽤 된데다 재료도 없었고, 그녀도 어느 정도 연습을 해야 했기에 아직은 시간이 필요했다.

“조만간 화방에 다녀와야지.”

커다란 캔버스를 정원에 두고 그림을 그리면 행복하지 않을까.

루시테는 미소를 지으며 다시 광장에 내려갈 계획을 세웠다.

물론 책을 옮겨 적는 그녀의 손은 쉬지 않았다.

흰 페이지 안으로 새카맣고 정갈한 글씨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나갔다.

사각사각 펜촉이 종이 위에 닿는 소리가 계속해서 조용히 울렸다.

“응?”

루시테는 페이지를 넘기려다 말고 책을 다시 쳐다보았다.

이크릭스 황자들의 초상화가 삽화로 들어가 있었다.

책 제목은 ‘오 나의 황자님’으로. 평민이자 이크릭스 황궁의 하녀인 여주인공이 황자들과 엮이게 되는 평범한 연정 소설이었다.

황실의 진짜 황족들을 소재로 한 연정 소설이라니.

이런 소설이 시중에 나오는 것은 메이븐에서는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흐음. 꽤 신선하네.”

실제 황자들이 주인공인 것만도 신기한데, 황자들의 진짜 초상화까지 삽화로 들어간다.

이 소설이 대단한 건지, 이런 소설조차 탄압하지 않고 허용해주는 이크릭스의 황실이 대단한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메이븐에서 너무 오래 살아서 그런 걸까. 루시테는 살짝 문화충격이 왔다.

황자들은 본인들이 연정 소설 주인공으로 나와도 괜찮은 걸까.

루시테는 삽화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세 명의 황자들은 미묘하게 닮은 것 같으면서도, 자세히 보면 같은 핏줄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달랐다.

눈동자의 색도 제각각, 머리칼의 색도 제각각이었다.

“어, 이 사람은……. 은발이네.”

루시테는 손가락으로 한 황자의 그림을 짚었다.

그리고 습관적으로 제 검은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마치 흑과 백의 대비처럼, 루시테의 검은 머리와 비교하면 그림 속 황자의 은발은 유난히 더 눈이 부신 것 같았다.

루시테는 초상화를 손끝으로 툭 두드렸다.

아름다운 은발을 가진 2황자는 눈동자의 빛깔마저 은색이었다.

그의 모습은 꼭 누군가가 은가루를 뿌려 만든 천사처럼 아름다웠다.

“카일러스 미카엘 에드라이 델……. 이크릭스.”

이름이 왜 이렇게 길담.

황태자도 아닌데 2황자는 황태자만큼이나 이름이 길었다.

‘황족들은 지겨워.’

루시테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려해도 메이븐이나 이크릭스나 파고들면 똑같이 콩가루 집안일 게 뻔했다.

말이 위대하고 존귀한 황족이지 자기들끼리는 정쟁으로 피 터지게 싸우고 있을 터다.

루시테는 이크릭스 황실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고 책을 덮었다.

창밖으로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다. 그렇다는 건 이제 슬슬 저녁 준비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루시테는 테이블을 정리해두고 의자에서 훌쩍 내려왔다.

저녁은 베이컨과 크림을 넣은 파스타를 해야지.

하루하루. 루시테는 자신의 삶의 모든 부분에 충실할 예정이었다.

자유를 만끽하는 작은 시간 하나 하나가 모두 소중했다.

* * *

-우르릉! 쾅!

루시테는 천둥이 치는 소리에 새벽부터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침대 가의 창문이 마구 덜컹거리고 있었다.

아직 비는 내리지 않았지만 바람이 부는 게 심상치 않았다.

창밖이 어둑했고 멀리 보이는 나뭇가지가 꺾일 것처럼 바람에 휘었다.

루시테는 잠이 덜 깬 눈을 비볐다.

아무래도 더 자기는 틀린 듯하여 루시테는 침대에서 나왔다.

루시테는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제대로 닫히지 않는 창문이 있는지 확인했다.

번쩍. 창문 밖 저 어딘가로 번개가 내리꽂혔다.

‘설마 저게 이 집으로 내리치진 않겠지?’

루시테는 아무래도 불안해졌다. 집 위치가 높은 곳에 있다 보니 더 그랬다.

모자를 푹 눌러쓴 루시테가 모자의 끈을 꽉 묶었다.

바람이 어찌나 거센지 문을 여는 것 하나도 쉽지가 않았다.

루시테는 힘겹게 문을 열고 나와 집 근처를 살폈다.

비가 와서 무너질 곳은 없을 것인지. 토사가 흘러내리지는 않을 것인지.

산 중턱에 위치한 집이라 아무래도 신경 쓰이는 점이 많았다.

쾅!

“아잇, 깜짝이야!”

하늘이 찢어지기라도 하는 듯 커다란 소리에 루시테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늘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았다. 번쩍. 하고 산 저 어딘가로 번개가 또 내리꽂혔다.

루시테의 집이 있는 산은 별로 높지 않은 언덕 수준이었지만, 이 산과 연결된 뒷산은 꽤 높고 험준한 산다운 산이었다.

몬스터가 나온다는 소리를 들은 이후 루시테는 뒷산 쪽으로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번개가 뒷산 쪽으로 내리꽂히는 것을 보며 또 불안해졌다.

번개가 잘못 쳐서 뭔가가 이쪽으로 내려오거나 하는 건 아닌지.

루시테는 불안한 눈빛으로 어두컴컴한 숲속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불안하다 해도 지금 광장으로 내려갈 용기는 없었다.

집을 놔두고 어디로 피해 있는단 말인가?

루시테의 유일한 안식처는 바로 이곳인데.

투둑, 툭.

루시테의 머리와 어깨 위로 하나 둘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루시테는 잽싸게 달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씩 떨어지던 빗방울은 루시테가 집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큰비가 되어 본격적으로 내리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빗소리가 거셌다.

비가 얼마나 세차게 떨어지는지 빗방울이 쉴 새 없이 창의 유리들을 두드려댔다.

“습해!”

루시테는 모자를 벗어 던져 놓고 벽난로로 달려갔다.

장작을 미리 패두길 잘했지.

루시테는 부지깽이로 장작을 쑤셔 넣고 부싯돌로 불을 지폈다.

따뜻한 불이 금세 주홍색으로 벽난로 안에서 타올랐다.

장작은 장작 같지도 않게 조각조각 이상한 모양이었으나 그런대로 장작 역할을 해주긴 하니 다행이었다.

“그래!”

루시테는 손뼉을 짝 쳤다.

불을 지핀 김에 빵을 구워야지.

화덕에 직접 구운 빵이라니. 루시테는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부드러운 밀가루 반죽을 할 생각에 루시테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 날씨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어떤 날씨인들 루시테가 하루를 어떻게 보내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밖에서 천둥 번개가 치는 와중에도 좋은 생각을 하니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루시테는 팔을 걷어붙이고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반죽을 재워두고 치즈와 계란을 꺼냈다.

신선한 채소들을 씻어 샐러드를 만들어 함께 먹을 생각이었다.

루시테는 테이블 위의 촛대에 촛불을 켰다.

그녀는 비오는 소리를 뒤로하고 조용한 아침 식사를 했다.

타닥. 탁.

벽난로 안에서는 샛노란 불이 타올랐고, 창밖으로는 비가 내렸으나 집 안은 보송하고 아늑했다.

식사는 언제나처럼 맛있었고 루시테는 행복했다.

성녀도 아니며, 황녀도 아니고, 저주받은 인간도 아닌 루시테.

루시테는 지금의 삶에 몹시 만족했다.

다시는 성녀도 황녀도 뭣도 되지 않을 테다.

루시테는 오롯이 자신으로 살아가겠다 그렇게 또 한 번 결심했다.

아침 식사 후 루시테는 촛불 아래에서 어제 하다 남은 일을 계속했다.

책장을 넘기며 한 자 한 자 열심히 글을 옮겼다.

“2황자 카일러스는……. 마리안느의 손목을 붙잡고……. 사람이 다니지 않는 정원 쪽으로 끌고 갔다. ‘마리안느 네가……. 좋아. 너 같은 여자는 처음이야?’”

루시테는 책에 있는 대사를 옮겨 적다 말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세상에!”

루시테의 눈빛이 초롱초롱했다. 뒷내용이 몹시 궁금해졌다.

왜 이 책이 최고의 인기 소설인지 알 것도 같았다.

삽화가 같이 들어가 있어서 그런지 상상이 훨씬 잘 됐다. 잘생긴 은발의 황자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는 듯했다.

그냥 읽었으면 느끼했을 법도 한데. 은발의 2황자가 차가운 눈빛으로.

“마리안느! 너 같은 여자는 처음이야!”

했다니.

‘꺄악!’

루시테는 소녀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루시테는 소설에 심취하여 열심히 일했다.

나중에는 필사하는 것까지 미뤄둔 채 아예 책을 들고 소파에 누워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어머 어머, 세상에나.”

루시테의 목소리에서 연신 부끄러워하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오 나의 황자님’은 정말 명작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책이었다.

루시테가 한참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그때.

“끼에에에에에엑!”

저 바깥 멀리에서 찌르는 듯 날카로운 비명이 벼락처럼 울렸다.

루시테는 깜짝 놀라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루시테의 목 뒤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뭐야? 설마……. 진짜 몬스터야?’

루시테의 귓가로 얼마 전 찾아온 병사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요즘 산에서 수상한 사람과 몬스터가 나타난다는.

쾅!!

“으앗!”

또 한 번 큰 소리가 났다.

그런데 이번에 난 큰 소리는 아주 가까운 곳이었다.

얼마나 가깝냐면 루시테의 집 앞, 정원이라고 말하기기는 약간 애매한 그 마당에서 난 것처럼 가까웠다.

루시테는 잽싸게 2층으로 달려 올라가 문을 닫고 이불 속으로 숨었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창문 밖은 새카만 어둠이었다. 그 어둠이 더더욱 루시테의 공포를 자극했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루시테는 이 말만 속으로 중얼거리기를 오천 번쯤 한 것 같았다.

차라리 잠을 자보려 했으나 쉽사리 잠이 올 턱이 없었다.

없었는데…….

* * *

루시테는 눈을 끔벅였다.

‘언제 잠든 거지?’

루시테는 입가로 흘러내린 침을 옷소매로 훔쳤다.

이불 속에 엎드린 그 자세 그대로 잠이 들어 있었다.

벌써 아침이었다.

루시테는 부스스한 머리를 손가락으로 넘기며 침대 밖으로 나왔다.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날씨는 우중충했지만 어제만큼 바람이 심하게 불지는 않았다.

루시테는 창문을 살짝 열어 손을 내밀었다. 빗방울이 손바닥 위로 투두둑 떨어졌다.

‘차가워…….’

루시테는 창틀에 턱을 괴고 비가 오는 것을 멍하니 쳐다봤다.

비바람이 선선하게 불어 루시테의 얼굴을 간질였다.

어제 있었던 일이 모두 꿈만 같았다.

어쩌면 그 끔찍한 비명은 전부 꿈속에서 들은 소리를 루시테가 착각한 것일지도 몰랐다.

“하아…….”

루시테는 한숨을 내쉬며 창 밖 저 먼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응?’

루시테는 눈을 비볐다. 비 때문에 질척해진 마당의 한 곳에서 무언가 반짝거렸다.

루시테는 한걸음에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여기 어디쯤이었는데.’

루시테는 한 손으로 우산을 들고 바닥 여기저기를 유심히 쳐다보았다.

바닥은 진흙투성이였다. 어쩌면 그 반짝이던 것이 흙에 반쯤 파묻혀 버렸을지도 몰랐다.

“어!”

루시테는 달려서 그것의 앞에 우뚝 섰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진짜 있었다!

루시테는 흙에 많이 파묻혀 끄트머리가 튀어나와 있는 그것의 앞에 쭈그리고 앉았다.

손으로 살살 파보다 안돼서 아예 우산을 내려놓고 흙을 팠다.

“이, 이게 뭐야?”

루시테는 눈을 크게 떴다.

루시테가 흙에서 파낸 무언가는 거의 그녀가 생전 처음, 네 번의 인생을 통틀어도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이었다.

“고양이인가?”

루시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양이라기에는 털이 없고, 오히려 피부 표면이 빽빽한 비늘로 덮여 있었다.

그것으로 미루어 보아 고양이나 강아지 따위는 아닌 듯했다.

“어떡해, 죽었나 봐.”

다시 묻어줘야 하나?

루시테가 잠시 고민하던 그때였다.

“피익.”

이상한 생명체가 숨을 내쉬며 앓는 소리를 냈다.

“으악!”

루시테는 깜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옷이 진흙 범벅이 되었지만 루시테의 시선은 이상한 생명체에게 닿아 있었다.

그 생명체는 루시테가 한참을 쳐다봐도 숨만 색색 내쉴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다쳤나 봐.’

루시테는 생물이 다쳤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진흙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우산은 내버려둔 채 양손으로 생물을 들었다.

“끙.”

생물은 생각보다 무거웠다.

그녀는 생물을 집 안으로 옮겨 놓고 다시 나와 우산도 가지고 들어왔다.

비를 맞은 데다 진흙이 묻어 몰골이 엉망이었다.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가 씻고 싶었지만 다친 생물을 살펴보는 게 먼저였다.

그녀는 천 위에 생물을 옮겨 두고,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셔 생물의 몸을 닦았다.

녀석은 루시테가 닦아 낼 때마다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불쌍해라…….”

루시테는 녀석의 몸에서 최대한 살살 진흙들을 닦아냈다.

닦아내고 보니 생물은 진흙이 묻었을 때보다 더 신기했다.

비늘은 은색으로 반짝반짝 빛이 났으며 꼬리도 길고 작은 날개도 있었다.

‘책에서만 봤던 악어인가? 아니면 뱀?’

하지만 뱀이 날개가 달렸다는 얘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도마뱀인가?’

루시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도마뱀의 비늘 몇 개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피가 조금씩 흘러나오고 있었다.

다시 살펴보니 몸 군데군데가 다 그랬다.

오히려 온전하게 달라붙어 있는 비늘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루시테는 당장 일어나서 방으로 달려가 몇 안 되는 짐을 마구 뒤적거렸다.

붕대와 연고 따위의 비상용품과 깨끗하게 마른 수건을 가지고 다시 도마뱀에게로 왔다.

그녀는 도마뱀의 몸에서 물기를 다 닦아내고 구석구석 연고를 바른 후 붕대로 온몸을 칭칭 감았다.

루시테는 응급처치가 끝난 도마뱀을 안고 양탄자가 깔린 바닥으로 갔다.

담요를 돌돌 말아 그 위에 도마뱀을 올려놓자, 도마뱀은 아까보다는 훨씬 편해 보였다.

* * *

루시테가 도마뱀을 돌본 지 며칠이 흘렀다. 도마뱀은 죽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잠만 잤다.

가끔 저러다 아파서 죽는 게 아니라 굶어서 죽는 게 아닌가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숨은 쉬고 있었다.

루시테는 붕대를 계속 갈아주고 지극정성으로 연고를 열심히 발라주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도마뱀의 상처가 많이 아물어 가고 있었다.

루시테는 도마뱀을 제 침대로 옮겨다 놓고 창문을 몇 번이나 단단히 닫은 뒤에야 광장에 나갈 채비를 했다.

슬슬 식료품을 사러 가야 했고, 이반 영감의 서점에 필사한 책도 가져다 줘야 했다.

도마뱀이 쓸 연고와 붕대도 사와야 했다.

루시테는 나갈 채비를 마치고 문을 벌컥 열었다.

그러나 연 것도 잠시, 그녀는 문을 열자마자 놀라서 다시 닫았다.

“뭐, 뭐야?”

루시테의 심장이 벌렁거렸다. 저 멀리 내려가는 길 쪽으로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우르르 올라오고 있었다.

루시테는 문에 등을 기댄 채로 주르륵 내려앉았다.

설마 자신이 메이븐의 황녀임을 들켜서 잡으러 온 걸까. 평화로운 생활은 이제 끝인 건가.

루시테는 주먹을 꽉 쥐고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쾅쾅쾅!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들겨댔다.

꼴깍. 루시테는 침을 삼켰다.

이대로 도망가야 하는 건 아닌지. 도망갈 수나 있는 건지.

오만 가지 생각이 루시테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누구……. 누구세요!”

루시테는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루시 필드 씨? 잠시 협조 부탁드립니다!”

루시테가 잠시 대답을 하지 않자 병사가 다시 문을 두드렸다.

“루시 필드 씨? 루시 필드 씨!”

병사는 거의 강제로 문을 열 기세였다.

루시테는 눈을 꽉 감았다 떴다. 그러나 조금 전보다는 마음이 차분해졌다.

병사가 그녀를 루시테 클라우디오가 아닌 루시 필드라고 불렀기 때문에.

적어도 병사는 메이븐의 황녀에게 볼일이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후…….”

루시테는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고 문을 밀었다.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아뇨!”

루시테는 집 밖으로 나와 뒤로 문을 쾅 닫았다.

그녀는 경계심이 잔뜩 어린 눈빛으로 병사를 올려다보았다.

“여기서 말하세요.”

루시테는 주눅 들지 않으려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집 안에 환자가 있었다. 환자라기보다는 아픈 동물이지만.

어쨌든 병사들이 흙발로 제 집안을 어지럽히는 꼴을 루시테는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무슨 일이신가요?”

루시테는 곁눈질로 병사의 뒤쪽을 슬쩍 보았다.

다행히 찾아온 병사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검을 차고 뒤쪽에 선 병사들은 다섯 명 정도였다.

‘응?’

루시테는 뒤쪽에 있는 사람들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한 명은 병사가 아니라 마법사 로브를 푹 뒤집어쓴 남자였다.

왜 로브 안의 모습을 보지도 않았는데 남자라 확신했냐면.

덩치와 키가 옆에 서 있는 병사들 못지 않아서였다.

로브 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음에도, 루시테는 희한하게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가 팔짱을 낀 채 뚫어지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가지 묻는 말에만 제대로 대답해주시면 됩니다.”

병사는 위압적으로 루시테를 내려다보며 질문을 이어나갔다.

“며칠 전 폭풍우가 친 날 어디서 뭘 하고 있었습니까?”

루시테는 미간을 좁혔다.

“집에 있었어요.”

“집에서 뭘 하셨죠?”

“그냥 있었어요.”

“명확히 대답해주시죠. 당신의 대답 여하에 따라 저희와 함께 가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무례하군요! 제가 뭘 했다고 이런 질문을 받아야 하며 당신들을 따라가야 하죠?”

루시테는 화를 냈다.

그녀의 잔잔한 일상에 왜 자꾸 병사들이 끼어드는지 이해가 안 갔다.

“당신, 특이하네요.”

갑자기 루시테와 병사의 대화 사이에 낮은 미성이 툭 던져졌다.

검은 마법사 로브를 입은 남자가 언제 다가왔는지 병사의 바로 뒤에 서 있었다.

인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대체 언제 다가온 걸까.루시테는 눈을 크게 떴다.

“아사드 공!”

놀란 사람은 루시테 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루시테를 한참 추궁하던 병사가 놀라 마법사를 불렀으니까.

“아사드 공. 여긴 제게 맡기시는 게!”

“그건 무슨 저주인가요?”

마법사는 병사가 자신을 부르든 말든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저 하고 싶은 말만 했다.

마법사가 허리를 구부려 루시테 쪽으로 손을 뻗자, 루시테는 휙 몸을 피했다.

저들에게 루시테의 얼굴은 푹 눌러쓴 두건에 가려 보이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루시테는 지금 사색이 된 채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저주라니.’

루시테의 어깨가 덜덜 떨렸다.

지긋지긋한 저주.

그놈의 저주라는 소리를 아테라까지 와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루시테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마법사를 올려다보았다.

왜일까. 마법사가 로브 속에서 웃고 있는 것 같았다.

마법사가 갑자기 뒤쪽으로 몸을 휙 돌렸다.

동시에 왼손을 들어 옆에 서 있는 병사의 어깨를 툭 쳤다.

“어? 어?!”

병사의 팔과 다리가 척척 움직이더니 뒤에 서 있던 나머지 병사들에게로 걸어가는 것이 아닌가.

“아, 아사드 공!”

병사가 마법사를 돌아보며 놀라 소리쳤다.

마법사가 무언가 마법을 부린 모양이었다.

이크릭스의 마법사는 아주 특이하고 이상한 사람들뿐이라고들 했다.

그들이 쓰는 마법은 모두 제각각이며 마법사마다 그 특색이 아주 다르다는 말도 들었다.

하지만 루시테가 이크릭스에서 마법사를 마주친 건 처음이었다.

그녀는 눈을 크게 뜨고 그저 벌어지는 일을 바라보았다.

“경들은 나브레 산을 마저 수색해라. 여기는 내가 확인하지.”

마법사가 입술을 달싹였다.

신기하게도, 그는 아주 작게 말한 것처럼 보였으나 그의 말은 바로 귀에 대고 속삭이듯 들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느낀 사람은 루시테뿐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뒤에 모여 있던 기사들도 마법사의 말을 들은 듯 알겠다고 복창했다.

그들은 곧 떨떠름한 표정으로 왔던 길을 도로 내려갔다.

“둘만 남았네요.”

마법사의 목소리가 부드러우면서도 서늘했다.

“얘기가 길어질 듯한데 차 한잔 부탁해도 될까요?”

마법사는 친구에게 얘기하듯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루시테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단둘이 길게 할 이야기가 무엇이란 말인가.

루시테는 그와 대화를 하는 이 상황 자체가 가시방석이었다.

대체 무엇을 보고, 무엇을 어떻게 알고 루시테에게 저주를 받았다고 한 건지.

‘저주.’

마법사는 분명 그녀를 향해 정확하게 저주라고 이야기했다.

어느새 식은땀이 루시테의 뺨을 타고 턱 끝으로 또르륵 굴러 내려왔다.

문고리를 잡는 루시테의 손이 저도 모르게 덜덜 떨렸다.

루시테는 조금 전 닫았던 문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천천히 다시 열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의 바로 뒤에 마법사가 따라 들어오고 있다는 사실을.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존재감만은 확실했다. 루시테는 차마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저, 저쪽에 앉으세요.”

루시테는 마법사를 쳐다보지도 않고 테이블을 손으로 가리켰다.

루시테는 무슨 정신으로 차를 내왔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루시테가 찻잔을 테이블 위로 내려놓자 창가에 서서 도심의 전경을 내려다보던 마법사가 뒤를 돌아봤다.

그는 창밖을 다시 흘끗 쳐다보더니 몸을 돌려 테이블 쪽으로 다가왔다.

“풍경이 좋군요.”

루시테는 대답을 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그러나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루시테는 말없이 의자에 앉아 양손을 맞잡고 고개를 푹 숙였다.

마법사는 루시테를 잠시 쳐다보더니 로브를 쓱 벗어 의자에 걸쳤다.

“루시 필드 씨?”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루시테는 고개를 들었다.

“!”

루시테는 남자의 모습을 보곤 놀랐다. 그것도 몹시.

루시테는 눈을 크게 뜬 채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검은 머리.’

남자의 머리칼은 검은색이었다. 루시테와 같은.

루시테의 놀란 얼굴을 향해 남자가 눈을 휘며 씩 웃었다.

루시테는 그제야 남자의 머리에서 시선을 떼고 그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그리고 또 한 번 놀랐다.

얼굴을 반쯤 가리는 흰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그의 눈동자는 선명하게 반짝이는 은빛이었다.

“잠깐 실례.”

남자가 루시테 쪽으로 검지를 뻗어 까딱했다.

루시테가 푹 눌러쓴 두건이 잡을 새도 없이 휙 벗겨졌다.

루시테의 검은 머리칼, 검은 눈동자, 앳된 외모가 남자의 앞에 그대로 드러났다.

“이게 무슨!”

루시테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쿵 소리를 내며 뒤로 넘어졌다.

루시테가 황급히 두건을 잡아 다시 쓰려고 했으나 두건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루시테에게서 휙 도망가 창가 쪽으로 날아갔다.

“이, 이, 이게 무슨.”

루시테는 입술을 덜덜 떨었다. 모든 게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역시. 이렇게 독특한 저주가 세상에 두 개일 리는 없지요.”

마법사가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올렸다.

“당신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오래된 일이긴 하지만 그대는 여전히 그대로로군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시테의 앞으로 성큼 다가오더니 허리를 굽혀 루시테와 눈높이를 맞춘 마법사는 손을 뻗어 루시테의 작은 손을 들어 올렸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그는 눈을 휘어 웃으며 루시테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가면 뒤로 보이는 그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곱게 접혔다.

루시테는 멍하니 그에게 손등을 내어준 채 크게 당황했다.

루시테의 검은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날 본 적이 있다고? 대체 언제?’

루시테는 마법사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검은 머리에 은빛 눈동자.

가면 아래의 얼굴은 잘 모르겠으나, 이렇게 특이한 색이라면 루시테가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래, 이 남자는 분명 루시테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어쩌면 마법사는 그녀를 본 적도 없으면서 봤다고 거짓말을 하는 걸지도 몰랐다.

루시테는 심호흡을 했다.

‘침착할 수 있어. 침착할 수 있어.’

루시테는 마법사의 손에서 제 손을 확 빼냈다.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루시테는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애써 감췄다.

“무슨 목적으로 이러는 거죠? 저는 루시 필드고. 당신이 찾는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목적이라.”

마법사가 손을 뻗어 루시테의 넘어진 의자를 세워주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 제 의자에 다시 앉았다.

“그냥 호기심이라고 말해두죠. 당신의 근처에 있는 마나가 너무 뒤틀려 있거든요. 그런 저주는 마법으로도 못 겁니다.”

“마나……?”

마나가 뒤틀려 있다고?

루시테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뭐, 아무나 볼 수 없는 거긴 합니다만. 거짓은 아니니 믿어도 좋습니다.”

마법사가 머리칼을 쓱 쓸어 넘기자, 마법사의 귀 약간 아래에서 칼 같은 단발머리가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머릿결이 무척이나 좋아 보였다.

마법사는 꽤 차가운 인상이었다.

가면 아래 뚜렷한 이목구비는 알 수 없었지만 다물린 입술 위의 콧대가 날카로워 보였다.

어쩌면 메이븐에서 살아있는 조각이라 칭송받는 이안에 비해도 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일지도 몰랐다.

그는 서늘한 눈빛으로 턱을 살짝 들고 팔짱을 낀 채 루시테를 지그시 응시했다.

그는 무척 거만해 보였으나, 또 그 거만함이 마법사와 잘 어울렸다.

“정말……. 저는 아니에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 사람이 아닙니다.”

루시테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끝까지 아니라고 발뺌할 생각이었다.

눈앞의 마법사가 얼마나 대단한 실력을 가진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마나가 보인다느니 뭐니 하는 말도 다 거짓말일지 몰랐다.

“그러시다면야. 알겠습니다.”

마법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로브를 걸쳤다.

그는 두건을 쓰려다 말고 루시테를 쳐다보았다.

“참. 혹시 최근에 수상한 자가 찾아온 적은 없습니까?”

“수상한 사람이요?”

수상한 사람이라니.

루시테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빛이 이상한 마법사라던가, 괴물 같은 것을 본 적이 없느냐는 말입니다. 뭐, 이 근처에서 수상한 마력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긴 하지만 확인차 물어보는 겁니다.”

‘괴물과 마법사!’

루시테는 놀란 눈을 깜빡였다.

조금 전 기사들이 우르르 온 건 이것과 관련이 있는 건가? 나브레 산에 수상한 사람이 나타난 거야.

나브레 산은 루시테가 사는 산과 바로 연결된 훨씬 큰 산이었다.

그 산은 골짜기로 쭉 이어져 다른 산들과도 연결되어 꽤 크고 험준한 산세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 산에 최근 수상한 자와 몬스터가 출몰하고 있다는 사실은 루시테도 이미 한 번 들어서 잘 알고 있었다.

어쩌면 마법사와 기사들은 정말 그것을 조사하기 위해 온 이들일지도 몰랐다.

‘그곳에 무언가가…….’

“위험한 건가요? 제가 여기에 있으면 위험해지나요?”

루시테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글쎄요.”

마법사는 입술 끝을 슬쩍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황실에서 수색을 계속할 테니 괜찮을 겁니다만.”

마법사는 제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냈다.

그는 루시테에게 다가와 루시테의 손을 잡아 올렸다.

루시테는 그에게서 제 손을 빼내기 위해 힘을 주었으나 마법사도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그는 루시테의 손을 꽉 잡은 채 루시테의 검지에 반지를 끼워 넣었다.

피처럼 붉은 루비가 박혀 있는 반지였다.

조금 큰 듯했던 반지는 순식간에 루시테의 손가락 크기에 알맞게 줄어들었다.

아무래도 마법 반지인 모양이었다.

“이게 뭔가요? 왜 갑자기 제게 이 반지를…….”

“안전장치. 위험할 일은 없을 겁니다만 그대는 이 산의 유일한 주민이니 예방 차원으로. 라고 해두죠.”

루시테는 제 손에 끼워진 반지를 빤히 노려보았다.

어떤 마법이 걸려 있길래 안전장치라고 하는 걸까.

위험에 처하면 갑자기 이 반지에서 불이라도 쏘아져 나오는 걸까?

아니면 문지르면 저 남자가 튀어나오기라도 하는 걸까?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루시테는 혹시나 뭔가 달라질까 싶어 반지의 보석 부분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루시테의 머리 위로 남자가 피식 웃었다.

“문질러도 저는 안 나타납니다.”

“따, 딱히 그래서 문질러 본 건 아니에요!”

루시테는 얼른 반지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그건 이 사건이 끝날 때까지 잠시 맡겨 두죠. 나중에 찾으러 오겠습니다.”

볼일이 끝났는지 마법사가 문밖으로 나갔다.

루시테가 눈 깜짝할 사이 마법사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텔레포트라도 쓴 걸까.

그야말로 정말 수상하고 이상해 보였다.

그러나 그가 황실의 병사들과 온 것을 확인했기에 의심할 수는 없었다.

루시테는 한숨을 내쉬며 문을 닫으려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험준한 산세가 보였다.

이크릭스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나브레 산이었다.

울창한 나무들이 빽빽하고 안개가 자욱한 산은 햇빛이 잘 드는 루시테의 집과는 다르게 몹시 음습했다.

루시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나브레 산은 아테라의 신성한 산이라 들었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긴 걸까.

수상한 사람이라니, 이사 온 이후로 그런 사람은 털끝도 보지 못했는데도 루시테는 벌써 불안해졌다.

‘나브레. 나브레.’

그러고 보니 나브레가 왜 신성한 산이었더라.

루시테는 눈을 깜박였다. 무언가 떠오를 듯 말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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