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8)

2.

‘아, 모르겠다.’

루시테는 생각하기를 멈췄다. 어쨌든 황성에서 확인하고 있다지 않은가.

지금까지도 무사했으니 앞으로도 괜찮겠지.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계속 불안해하고 싶지 않았다.

루시테는 집 안으로 들어가 풀어놨던 가방을 다시 챙겼다.

웬 마법사와 기사들 때문에 일정에 차질이 생겼지만, 그녀는 오늘 할 일이 있었다.

광장에 내려갔다 오지 않으면 당장 내일부터 무얼 먹을지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사뒀던 식료품이 다 떨어져 가고 있었으니까.

그래, 아직 만나보지도 못한 몬스터니 흑마법사니 하는 것들이 문제가 아니라 당장 먹을 게 더 큰 문제였다.

루시테는 최대한 큰 장바구니를 챙겨 들고, 등에는 번역한 책이 든 가방을 멘 채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

마지막으로 집을 나서기 전. 그녀는 2층으로 올라가 도마뱀을 확인했다.

은빛 비늘의 도마뱀은 그녀의 침대 위 이불 속에서 여전히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도마뱀이 새액 새액 규칙적으로 깊은 숨을 내쉬었다.

처음 다쳤을 때에 비해서는 훨씬 편안해 보이는 숨소리였다.

루시테는 안심하고 계단을 내려왔다.

쿵.

루시테는 문을 꽉 닫고 자물쇠로 잠갔다. 꼼꼼하게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도 한 번 더 했다.

아무리 기사들이 순찰을 잘한다 해도 그런 말을 듣고 나니 불안했으니까.

* * *

루시테는 이반의 서점에 들러 꽤 두둑하게 주머니를 채웠다. 부지런히 일한 덕분이었다.

꽤 두툼한 양피지 다발을 넘기자 박수까지 치며 좋아하는 이반 영감을 보니 루시테도 몹시 뿌듯했다.

이렇게 계속 일을 하면 앞으로 먹고사는 일은 걱정 없을 것 같았다.

나브레 산 때문에 불안했던 것도 잊고, 루시테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식료품 거리를 향해 걸었다.

은화 몇 닢으로 식료품을 두둑이 살 생각이었다.

‘밀가루도 잔뜩 사고, 가운데가 쩍 갈라진 딱딱한 빵도 사고, 베이컨을 잔뜩 사야지. 그리고 치즈랑, 계란이랑, 닭고기랑, 과일도.’

식료품 창고를 음식으로 채울 생각을 하니 루시테는 몹시 기분이 좋아졌다.

“이거 주시고요, 저것도 주세요. 저거랑 저것도.”

루시테는 식료품 매대 앞에서 신나게 재료들을 골랐다.

루시테가 가득 채운 장바구니를 안고 걸어가는데, 광장 한구석에 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다.

루시테는 사람들 사이에서 까치발을 하고 사람들이 쳐다보고 있는 것을 함께 보았다.

‘현상 수배?’

“나브레 산에 불법으로 침입한……. 흑마법사.”

루시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오늘 아침 찾아왔던 은빛 눈의 마법사가 한 말이 모두 사실인 모양이었다.

나브레 산은 그녀의 집이 있는 산 중턱의 뒷산이 아니던가.

루시테의 머릿속으로 번개처럼 나브레가 왜 이크릭스 제국의 신성한 산이었는지 그 이유가 떠올랐다.

드래곤의 유지.

이크릭스 제국은 황가를 타고 드래곤의 피가 계승된다.

초대 황제가 사실은 드래곤이라는 얘기도 있고, 또는 드래곤의 가호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크릭스의 성산 나브레.

한때 초대 황제의 유지가 담긴 드래곤 나브레의 둥지였다는 이야기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나브레가 수도 외곽을 막고 있을 정도로 커다란 산임에도 제국에서 이곳을 훼손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런 장소에 흑마법사가 나타나서 산 가장 깊은 곳에 있을 몬스터 둥지를 들쑤시고 다닌다니.

제국에서 현상 수배를 붙일 만한 큰 사건이 터진 것이다.

루시테는 벽보에 담긴 초상화를 자세히 살폈다.

마법사 로브를 푹 눌러 쓰고 흉흉한 눈빛을 가진 사람. 그것 말고 알 수 있는 정보는 없었다.

얼굴의 나머지 부분은 대부분 흐릿하게 그려져 있어 특정 인물을 생각하기 어려웠다.

제국에서도 흑마법사의 정보를 제대로 갖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큰일이야.’

루시테는 저도 모르게 제 검지에 끼워진 반지를 문질렀다.

그녀는 평온하고 안일한 일생을 사는 게 꿈이었다.

더 이상 사건에 휘말리는 건 질색이었다.

특히 외부의 어떤 일로 인해 그녀의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그런 일은 루시테 쪽에서 사양이었다.

‘이사를 가야 하는 걸까?’

루시테는 고심하며 집으로 향하는 산길을 올랐다.

루시테의 머리 위로 키가 큰 나무들이 음산하게 나뭇가지를 드리웠다. 오늘따라 산의 분위기가 한층 스산했다.

루시테는 집으로 돌아와 배낭과 장바구니를 내려놓았다.

너무 꽉꽉 채워 물건을 사 와서 그런지, 장바구니를 내려놓자마자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루시테는 지하에 있는 식료품 저장고에 사 온 물건들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말린 베이컨과 콩 조림, 딱딱한 빵과 치즈, 우유 등등.

이만한 양이면 한 달은 거뜬히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루시테는 창고 정리를 마치고 곧바로 2층으로 올라갔다.

어김없이 계단이 삐걱삐걱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루시테는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제 방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안에 도마뱀을 쉬게 두었기에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응?”

루시테는 눈을 비볐다.

루시테의 팔뚝만 한 은빛 도마뱀이 루시테의 침대에 앉아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너, 깨어났구나!”

루시테의 얼굴이 화색이 되었다.

“괜찮니?”

루시테는 조심스레 도마뱀에게 다가갔다.

“뇽! 삐로록! 뇽!”

루시테가 가까이 다가가자 도마뱀이 코를 킁킁거리더니 이상한 소리를 냈다.

“소리를 내네?”

루시테는 벙찐 표정으로 도마뱀을 쳐다보았다.

도마뱀이 소리도 낼 수 있는 동물이었던가?

“뇽!”

도마뱀이 갑자기 몸을 뒤집더니 옆으로 한 바퀴를 데굴데굴 굴렀다.

“뇽! 뇽!”

‘왜 저러는 거야?’

어디가 아픈 걸까?

아니면 배고픈 건가?

루시테는 안절부절못했다.

루시테는 부엌으로 내려와 손질하려고 꺼내두었던 닭고기를 그릇에 담았다.

닭고기가 든 그릇을 가지고 다시 올라오자, 도마뱀이 언제 이상한 소리를 내고 굴러다녔냐는 듯 얌전히 그녀의 침대에 앉아 있었다.

“괜찮아. 널 해치지 않을 거야.”

루시테가 조심스레 도마뱀에게로 다가갔다.

도마뱀은 그녀의 냄새를 확인하려는 듯 코를 씰룩거렸다.

“뇽! 삐로로록!”

도마뱀이 또 배를 뒤집고 한 바퀴 굴렀다.

루시테는 조심스레 침대에 앉았다.

도마뱀이 침대에 배를 보이고 누워 짧은 팔다리를 파닥 거렸다.

루시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마뱀이 하는 행동을 이해하려면 시간이 걸릴 듯했다.

“얘! 밥 먹어!”

루시테는 닭다리를 도마뱀에게 내밀었다.

도마뱀이 파닥거리다 말고 루시테를 보자, 세로로 동공이 찢어진 은빛 눈동자가 루시테를 빤히 쳐다보았다.

도마뱀은 은빛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루시테에게로 다가왔다.

도마뱀이 입을 쩍 벌려 루시테가 내민 닭다리를 덥석 물었다.

‘먹네?’

루시테는 신기한 눈으로 닭고기를 먹는 도마뱀을 가만히 쳐다봤다.

그녀가 지극정성으로 돌봤던 덕분인지 들떠 있던 비늘도 거의 다 아물어 있었다.

은빛 비늘은 윤기가 좔좔 흘러 반질반질했다.

붕대를 갈아 줄 때마다 따뜻한 수건으로 조심스레 닦아줬던 보람이 있었다.

신기하게 생겼다고만 생각했는데, 그간 돌본 정이 들어서 그런지 루시테의 눈에 도마뱀은 꽤 귀여웠다.

커다란 눈과 툭 튀어나온 입이 작은 악어 같기도 했고 짧은 팔다리는 도롱뇽 같았다.

루시테는 쓱 손을 뻗어 도마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루시테의 손이 제 피부에 닿자 도마뱀이 닭다리를 먹다 말고 눈만 데굴 굴려 루시테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루시테의 손을 피하지는 않았다.

그간 자신을 돌봐준 손길을 기억이라도 하는 걸까. 도마뱀은 루시테에게 전혀 적대적이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을 돌봐준 냄새를 기억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도마뱀이 닭다리를 다 먹었는지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루시테를 쳐다보았다. 더 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루시테는 반대쪽 닭다리를 하나 더 주었다.

“뇽! 뇽! 뇽!”

도마뱀은 기뻐하며 반대쪽 닭다리도 냉큼 물었다.

‘동물을 키워볼까?’

루시테의 눈빛이 반짝였다.

도마뱀을 보고 있다 보니 적적한 일상에 동물 한 마리쯤 같이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 도마뱀은 다 나으면 숲으로 돌려보내주더라도, 계속 함께 지낼 고양이나 강아지를 데려오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뇽!”

도마뱀이 루시테의 무릎에 제 턱을 얹었다.

도마뱀의 눈이 반짝거렸다. 더 달라는 뜻인 것 같았다.

루시테는 손질된 닭고기를 또 도마뱀의 입에 물려주었다.

도마뱀은 턱을 찹찹 움직이며 열심히 닭고기를 씹었다.

목으로 고기를 넘길 때마다 눈을 꽉 감는 것도 퍽 귀여웠다.

루시테는 저도 모르게 또 도마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뇽!”

도마뱀이 기분 좋게 울었다.

* * *

도마뱀과 함께한 지 며칠이 지나고, 루시테는 새로운 작업에 몰두했다.

정원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집 앞마당의 잡초를 뽑는 일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도마뱀의 밥을 챙기고 상태를 살핀 후에 루시테도 식사를 했다.

그리고 해가 높이 뜨기 전까지 정원의 잡초를 뽑고 땅을 골랐다.

한곳에는 잔디를 깔고 집 옆쪽으로 작은 텃밭을 만들면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집을 빙 둘러 꽃씨를 심어 작은 화단도 만들 예정이었다.

계획은 원대했고 텃밭에 심을 씨앗과 꽃씨들도 사두었지만, 영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루시테 혼자 하기에는 생각보다 정원이 무척 넓었다. 널따란 들판 같아 보이기도 했다.

‘언제 다 하지.’

루시테는 한숨을 내쉬며 턱을 타고 뚝뚝 흐르는 구슬땀을 훔쳤다.

해가 완전히 뜬 것이 아닌데도 더웠다.

햇볕이 더 따가워지기 전에 루시테는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쓰던 도구를 정리했다.

여름이 오기 전에 새파란 잔디를 깔아야지.

큰 이젤과 캔버스를 두고 푸른 하늘과 숲의 전경과 나무를 그리고 싶었다.

또 뛰노는 동물들과 지저귀는 새들도.

생각만 해도 멋졌지만, 역시나 그런 장면은 아직 정원의 꼴을 보아하니 머나먼 꿈만 같았다.

루시테는 기구들을 한구석에 잘 세워두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뇽!”

루시테를 반기듯 도마뱀이 외쳤다. 어서 밥을 달라는 표정으로 도마뱀이 소파 위에서 폴짝폴짝 뛰었다.

“뇽뇽!”

“알았어, 알았어. 기다려.”

루시테는 땀을 닦을 틈도 없이 부엌으로 향했다.

어찌나 배꼽시계가 정확한지, 무슨 도마뱀이 하루 세 끼를 꼬박꼬박 달라고 성화였다.

사실 저 녀석이 소파에서 폴짝폴짝 뛴 이유도 루시테가 반가워서가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는 그녀가 밥 줄 일이 반가워서 그러는 것이 틀림없다고 루시테는 확신했다.

부엌에서 한참 루시테가 달그락거리며 무언가를 만드는 소리가 났다.

계란을 삶고 후라이도 했다. 빵과 베이컨을 바삭하게 구웠다. 잼도 준비했다.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기니 거실이 더 시끄러워졌다.

냄새를 맡은 도마뱀이 밥을 달라고 울어댔다.

“뇽뇽! 삐로로로록!! 뇽뇽뇽!!”

루시테의 손이 빨라졌다.

저 도마뱀은 식성도 이상했다.

처음에는 날고기만 먹는 줄 알았더니 나중에는 루시테의 식사도 빼앗아 먹으려 들었다.

어쩜 그리 입이 고급스러운지 좀 탄 부위는 건드리지도 않고 잘 익은 부분만 쏙쏙 골라 먹는 것이었다.

도마뱀이 어떻게 사람 먹는 음식을 다 먹는지, 스파게티, 스프, 빵, 치즈, 우유, 못 먹는 게 없었다.

그리고 나서는 원래 먹이려 했던 날고기는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다.

결국 루시테는 매번 식사를 준비할 때마다 2인분 이상의 양을 준비하는 수밖에 없었다.

덕분에 한 달은 갈 줄 알았던 식량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혼자 먹어야 한 달이지, 웬 은빛 악어 같은 게 그녀의 식량을 축내고 있으니 말이다.

루시테는 조만간 또 식료품을 사러 가야 할 판이었다.

“이리 와. 꼬마야. 밥 먹어.”

루시테가 식탁에 그릇을 내려놓으며 도마뱀을 불렀다.

도마뱀은 기다렸다는 듯 소파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쿵 하고 마룻바닥이 울렸다.

도마뱀은 날아지지도 않는 날개를 퍼덕거리며 두 발로 식탁 쪽으로 쪼르르 달려왔다.

도마뱀이 두 발로 달려왔다고 하니 어감이 몹시 이상하지만, 쟤는 정말로 평소에도 두 발로 걸어 다녔다.

계단도 어찌나 잘 오르는지 뒤뚱거리며 2층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집안도 마구 돌아다녔다.

‘쟤 도마뱀 아닌 거 아니야?’

루시테는 접시에 코를 박고 점심을 거의 들이키다시피 하는 도마뱀을 보며 고뇌에 빠졌다.

무슨 저런 도마뱀이 다 있단 말인가.

그녀가 지금까지 도마뱀은커녕 동물을 한 번도 키워 본 적이 없긴 했다.

하지만 그런 루시테가 보기에도 눈앞의 커다란 도마뱀은 많이 이상했다.

‘혹시 새끼 몬스터인가?’

루시테는 미간을 좁혔다.

그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몬스터는 보통 육식이다.

사람이 먹는 음식을 저렇게 잘 먹을 리가 없었다.

“대체 넌 누구니, 꼬맹아?”

루시테가 중얼거리자 거의 접시 안으로 들어갈 것 같던 도마뱀이 머리를 팍 쳐들었다.

“뇽?”

“아니야. 먹어라, 먹어.”

루시테가 손을 흔들자, 도마뱀은 정말 말귀를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다시 접시에 코를 박았다.

정말 희한했다.

비록 뒤뚱거리긴 하지만 두 발로 걸어 다니고, 사람도 잘 따르고, 말귀도 잘 알아먹는다니.

“모르겠다.”

루시테는 고개를 흔들었다.

생각할수록 머리 아프니 그냥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루시테는 도마뱀을 생각하는 것 말고도 할 일이 많아 바빴다.

어차피 저 도마뱀은 잠깐 머물다 갈 손님이었다.

아직 날개가 조금 덜 나았기에 루시테가 보호하고 있는 것일 뿐.

상처가 깨끗하게 아물면 숲으로 돌려보내 줄 예정이었다.

루시테는 생각하기를 마치고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입 안 가득 고소한 향이 퍼졌다. 루시테는 우물거리며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점심 식사를 마친 오후에도 루시테는 쉴 틈이 없었다.

군식구가 늘었으니 일을 더 열심히 해야 했다.

그녀가 빈 접시를 치우고 테이블 위로 일할 책과 양피지 등을 세팅하고 있으면, 도마뱀은 눈치 빠르게 의자에서 폴짝 뛰어 내려갔다.

그리고는 볕이 잘 드는 소파 아래 양탄자에 엎드려 낮잠을 청했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

정말 속 편해 보이는 도마뱀이었다.

도마뱀은 이제 아픈 지 얼마나 됐다고 배가 아주 통통했으며 윤기가 좔좔 흘렀다.

루시테는 약간 어처구니가 없는 기분이 되었다.

저 통통한 뱃속에 그녀의 몇 주치 식량이 거의 다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피곤해지려 했다.

“일을 더 열심히 해야겠어.”

루시테는 이마를 짚고 고개를 흔들었다.

저택 안은 조용했다.

볕이 잘 드는 널따란 창문으로 따스한 햇볕이 들어와 실내를 비췄다.

포근한 양탄자 위에는 팔뚝만한 통통한 도마뱀이 꼬리를 말고 색색 규칙적으로 숨을 내쉬며 낮잠을 잤다.

벽난로 앞 큰 나무 테이블에는 작은 소녀가 두꺼운 책들을 잔뜩 펼쳐놓은 채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었다.

펜촉이 양피지에 닿는 사각사각 소리가 조용한 실내를 가득 메웠다.

이따금.

“피육. 푸르르르륵.”

도마뱀이 잠꼬대를 하는지 이상한 콧바람 소리를 내었다.

“이쪽이다!”

“빨리빨리 와!”

루시테는 한창 일을 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밖이 소란스러웠다.

“또 시작이네. 저 인간들.”

루시테는 커튼을 살짝 열어 밖을 살폈다.

갑옷을 입은 제국 병사들이 또 산길을 올라오고 있었다.

역시 그 흑마법사 때문인지 병사들이 주기적으로 순찰하며 이 근처로 올 때마다 시끄럽게 했다.

루시테는 병사들 틈에서 그 남자를 찾았다. 은빛 눈의 마법사.

그러나 이번에도 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루시테의 저주에 대해 아는 척 굴었던 그 마법사.

그가 정말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걸까? 거짓말이 아니었던 걸까?

‘나를 본 적이 있다고 했는데.’

루시테는 심각한 표정이 되어 중얼거렸다.

아직도 그때 마법사를 만났던 기억을 떠올리면 루시테는 선득해졌다.

대체 그가 자신을 언제 봤단 말인가?

메이븐은 이크릭스와 사이가 좋지 않다.

가장 큰 두 제국으로서 서로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사이였으며, 역사상 그 긴장감이 옅어진 일이 별로 없었다.

신성제국 메이븐은 신전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하는 이크릭스를 무시했다.

반면 드래곤의 마법을 이어받은 이크릭스는 상대적으로 마법을 무시하는 메이븐을 무시했다.

서로 암묵적으로 무시하는 사이에 이어지는 교류는 무척 표면적인 것들뿐이었으니.

두 제국은 서로의 자존심을 앞세우느라 상대 국가의 행사에는 황족이 방문하는 일이 일절 없었다.

정말 중요한 행사 때는 지위가 높은 귀족을 방문시키는 정도로, 두 국가는 사이가 별로였다.

“아!”

루시테는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쳤다.

그 은빛 눈의 마법사는 이크릭스에서도 서열이 높은 귀족일 것이다.

그러니까 메이븐의 행사에 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하지만 루시테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사람이 메이븐의 행사에 온 일이 있다 해도 루시테는 공적인 자리에 참석한 일이 거의 없었다.

이시엘라 황후가 그녀를 몹시 싫어했으니까.

제국의 수치라며 항상 시녀들을 시켜 그녀를 방 안에서 옴싹달싹 못하게 막곤 했다.

루시테는 그 마법사가 자신을 어디서 봤다는 건지 도통 짐작이 안 갔다.

어쩌면 정말로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그녀를 떠보기 위해 한 거짓말.

루시테는 제 검지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노려봤다.

그 이후로 몇 번을 빼보려 했지만, 반지는 그녀의 손에 딱 붙은 것처럼 도통 빠질 생각을 안 했다.

잊고 지내려 해도 종종 신경이 쓰였다.

“휴.”

루시테는 커튼을 확 쳤다. 마법사가 없다면 더 이상 밖을 볼 필요가 없었다.

병사들이 하는 일이야 매번 똑같았으니.

저들은 뭔가를 찾는 듯 주위를 둘러보며 한 바퀴 돌고 다시 이동했다.

그녀에게 뭔가를 묻는 일은 그날 하루로 끝이었는 듯 더 이상 그녀를 귀찮게 하지는 않았다.

저 사람들이 시끄럽긴 했어도 그래도 순찰을 잘 해주고 있다는 뜻이니 루시테로선 나쁠 건 없었다.

그저 나브레 산에 나타났다는 무언가가 그녀의 삶에 끼어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뇽!”

도마뱀이 언제 일어났는지 양탄자에 앉아 반짝이는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도마뱀이 통통한 꼬리로 바닥을 탁탁 쳤다.

“왜,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야? 설마 또 배고픈 건 아니지? 아직 저녁 되려면 조금 남았는데……?”

도마뱀을 바라보는 루시테의 눈빛이 불안으로 흔들렸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루시테는 도마뱀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도마뱀 역시 지지 않고 ‘당연하지!’라는 표정으로 루시테를 마주 바라보았다.

도마뱀의 은빛 눈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거렸다.

꼬르르르륵.

도마뱀의 배 속에서 천둥이 쳤다.

“너! 이 꼬맹이!”

루시테는 황당함에 도마뱀을 불렀다.

“뇽!”

꼬르르륵.

도마뱀이 외침과 동시에 또 도마뱀의 통통한 배에서 큰 소리가 났다.

루시테를 바라보는 도마뱀의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가 올망거렸다.

“뇽뇽! 뇽!”

“꼬맹이. 네 뱃속에 거지가 들었구나.”

루시테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리고 하는 수 없이 방향을 틀어 부엌으로 향했다.

좀 이르긴 하지만 저녁 준비를 시작해야지 어쩌겠는가?

도마뱀이 한번 배고파하기 시작하면 계속 시끄럽게 하면서 밥을 달라고 졸라대었으니.

어차피 일을 못 하게 되는 건 매한가지였다.

도마뱀이 부엌으로 향하는 그녀의 뒤를 잽싸게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토도도독.

짧은 다리로 어찌나 잘 돌아다니는지.

“뇽! 삐로로로록!”

금세 루시테의 발밑에서 도마뱀의 목소리가 났다.

“으이그.”

루시테는 닭고기를 꺼내려다 말고 허리를 숙여 도마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도마뱀이 간지러운지 얼굴을 홱홱 저었다.

“너는 도마뱀이 아니라 돼지야. 조금만 기다려, 돼지야.”

“뇽! 뇽!”

도마뱀이 짐짓 화난 얼굴을 하고 크르릉 위협적인 울음을 냈다.

돼지가 저를 욕하는 말인 줄은 어떻게 기가 막히게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으휴.”

루시테는 고개를 흔들며 팬에 버터를 녹였다.

곧 닭고기가 노릇노릇 구워지며 고소하고 향긋한 냄새가 부엌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뇽! 뇽뇽! 삐로로로로록!!”

냄새를 맡고 흥분한 도마뱀이 루시테의 발밑을 뒤뚱거리며 마구 뛰어다녔다.

도마뱀이 그녀를 정신 사납게 하는 것도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모양이다.

루시테는 용케 도마뱀의 꼬리를 밟지 않고 요리조리 피하며 요리했다.

정겨운 일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 * *

이른 새벽. 내려앉은 이슬이 루시테의 발목에 스쳤다.

“뇽! 뇽!”

“쉿. 조용히 해, 꼬마야. 널 데려다줄 거야.”

가방 밖으로 고개를 내민 도마뱀을 루시테는 다시 집어넣었다.

이제 도마뱀이 다친 곳도 다 아물었으니 루시테는 도마뱀을 집으로 돌려보내 줄 생각이었다.

어딘가에서 도마뱀 부부가 잃어버린 새끼를 애타게 찾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괜히 늦게 움직였다가 제국 기사들과 마주치면 곤란해질 것 같아 루시테는 위험을 무릅쓰고 새벽길을 나섰다.

도마뱀이 그녀의 정원에서 발견되었으니, 아마 도마뱀이 처음에 있었을 둥지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지 않을까.

그렇게 루시테는 가정했다.

도마뱀과는 이미 많이 정이 들었지만, 지금도 어딘가에서 도마뱀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이 있을지도 몰랐다.

루시테는 차마 그런 생각을 외면할 수가 없어 더 정이 들기 전에 도마뱀을 돌려보내 주기로 결심했다.

“뇽! 뇽!”

도마뱀은 집어넣으면 나오기를 반복하며 자꾸만 루시테의 배낭 속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답답해?”

“뇽!”

도마뱀은 루시테의 말귀를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바로 대답했다.

루시테는 그 모습이 볼 때마다 신통방통하다고 생각했지만, 어차피 도마뱀을 보는 것도 오늘로 마지막이었다.

“잠시만.”

루시테는 가방을 앞으로 고쳐 맸다.

그리고 가방의 윗부분을 뒤로 젖혀 도마뱀이 편히 얼굴을 내밀고 앞을 볼 수 있도록 했다.

“이제 거의 정상이야. 어때? 집 찾아갈 수 있겠어?”

“뇽!”

도마뱀이 세차게 머리를 저었다.

“여기가 아니야?”

루시테는 산등성이를 따라 조금 더 언덕을 오르기로 했다.

루시테가 사는 작은 산은 작아도 산은 산이었다.

집 위쪽으로 올라가는 중이었지만 사람들이 잘 왕래하지 않아서 길이 험했다.

루시테는 지팡이 삼은 나뭇가지로 몸을 지탱하여 이리저리 풀숲을 헤치며 산을 올랐다.

“일단 더 돌아다녀 볼게. 집이 기억나는 것 같으면 말해줘. 내가 널 꼭 돌려보내 줄 거야.”

“뇨옹.”

뭘까. 도마뱀의 대답이 왠지 시무룩하게 들렸다.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은 걸까?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실 거야. 그렇지?”

“뇨옹…….”

도마뱀의 목소리가 한층 시무룩해졌다.

“여기도 아니야? 아 힘들어.”

루시테는 작은 산의 정상에 오르자마자 힘들어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조금만 숨 좀 고르고 가자.”

루시테는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며 숨을 골랐다. 구슬땀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삐로로로록! 삐록…….”

“왜 그래?”

도마뱀이 낑낑거렸다. 그런데 루시테의 대답은 도마뱀의 입이 아닌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꼬르르르륵.

“…….”

루시테는 잠시 도마뱀을 내려다보았다.

너는 대체 도마뱀이니 돼지니. 조금 전에 아침 먹었잖아?

……라는 말이 목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루시테는 차마 돼지라고 입 밖으로 뱉지는 못했다.

도마뱀이 제 욕은 기가 막히게 알아듣고는 성질을 냈기 때문에.

대체 왜 배가 벌써 고픈 걸까?

산 좀 올랐다고?

무거운 저를 이고 여기까지 올라온 건 자신인데.

루시테는 어이가 없어 하면서도 가방 속에서 도시락을 꺼냈다. 혹시 몰라 싸 온 점심이었다.

루시테는 샌드위치를 도마뱀의 입에 물려주었다.

도마뱀은 짧고 통통한 양손으로 샌드위치를 잡고 넙죽넙죽 잘도 깨물어 넘겼다.

“다 먹었니?”

“뇽!”

배를 두드리며 풀 위를 굴러다니던 도마뱀이 냉큼 가방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네가 좀 걸어! 얼마나 무거운지 알아?”

루시테는 끄응 소리를 내며 도마뱀이 들어 있는 가방을 멨다.

도마뱀이 집 밖으로 나오자마자 안 따라가겠다고 누워서 떼를 쓰고 울어대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가방에 담아온 거였다.

저렇게 걷기를 싫어하니 정말 더 지나면 돼지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루시테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때였다.

펑!!

뭔가가 폭발하는 커다란 소리가 났다.

루시테는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산의 정상이라 사방이 탁 트이고 잘 보였다.

바로 근처 웅장한 나브레 산의 산등성이로 회색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가고 있었다.

루시테는 가방끈을 꽉 쥐었다.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오늘 도마뱀의 둥지를 찾아주는 건 여기까지 해야 할 것 같았다.

루시테가 막 내려가기 위해 걸음을 딛는데.

“삐이이이이이익!”

귀를 찢는 듯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삐이이이이이이익! 키이이이이이익!”

새소리인지 몬스터의 소리인지 알 수 없는 희한하고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가 산등성이를 타고 메아리쳤다.

“뇽?! 뇽! 뇽뇽!”

갑자기 루시테의 가방 안에 고개를 내민 채 얌전히 있던 도마뱀이 마구 다리를 굴렀다.

“삐로로로록! 삐로록!”

도마뱀이 가방 속에서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루시테는 놀라 가방을 내려놓았다.

도마뱀은 루시테가 가방에서 꺼내주자마자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어?! 얘! 어디 가!”

루시테는 놀라 생각할 틈도 없이 도마뱀의 뒤를 따라 달렸다.

도마뱀은 다리가 짧아서 그런지 자꾸만 나무뿌리와 돌멩이 따위에 발이 걸려 넘어지고 굴렀다.

그럼에도 녀석은 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계속 달렸다.

그들은 어느새 나브레 산 초입으로 들어왔고, 점점 깊숙이 산의 더 안쪽을 향해 들어가고 있었다.

루시테는 몹시 걱정스러워져 지금이라도 멈춰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

그러나 어떻게 알았는지 루시테가 멈칫거릴 때마다 도마뱀이 달리다 말고 뒤를 돌아보는 것이 아닌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올망올망한 눈망울로 그녀를 쳐다보며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했다.

루시테는 차마 도마뱀을 두고 저 혼자만 안전한 곳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끼이이이익! 삐이이이이익!”

끔찍한 비명이 점점 가까이서 들려왔다.

루시테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루시테는 손에 들고 있는 나무 작대기를 꽉 쥐었다.

유사시에 이곳에서 도마뱀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그녀뿐이었다.

그녀라도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발에는 물집이 잡히고 나뭇가지와 풀 따위에 스쳐 여기저기에 생채기가 났다.

그러나 루시테는 멈추지 못했다. 그녀가 소중하게 돌본 도마뱀을 외면할 수 없었으니까.

“뇨오오옹!”

얼마나 달렸을까. 루시테의 앞에서 달려가던 도마뱀이 갑자기 멈추더니 비명 같은 울음을 내질렀다.

“왜 그래!”

루시테는 황급히 도마뱀에게로 가까이 달려갔다. 그리고 주위를 살피려 하는데.

흠칫.

루시테의 목 뒤로 솜털이 곤두섰다.

어둡고 더러운 기운이었다. 무척이나 음산하고 끈적했으며 기분 나빴다.

저주를 받았어도 성녀로서의 감각이 조금은 있는 건지, 루시테는 본능적으로 놈의 기운을 읽어낼 수 있었다.

루시테와 정반대의 상성을 가진 기운.

더럽고 진득한 기운이 짙게 피어올랐다.

루시테는 다시 달려가려 준비하는 도마뱀을 황급히 붙잡았다.

그리고 도마뱀의 입을 막고 도마뱀을 품에 껴안았다.

“쉿. 조용히 해.”

루시테는 작은 목소리로 도마뱀의 귀에 속삭였다.

“너 버리고 안 갈게. 조용히 해줘.”

루시테의 속삭임에 도마뱀이 버둥거리던 팔에 힘을 뺐다.

루시테는 가방에 도마뱀을 집어넣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나오지 마, 꼬맹아.”

루시테는 간절한 바람을 담아 속삭인 후 조심스레 몸을 움직였다.

기둥이 두꺼운 나무 뒤로 몸을 숨긴 채 공터 쪽으로 조금씩 다가갔다.

마침내 어둡고 더러운 기운이 가장 짙은 곳에 도착했을 때.

“!”

루시테는 눈을 홉떴다. 믿을 수 없는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집채만 한 커다란, 아니, 거대한 새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다시 보니 허공에 떠 있는게 아니라 나무에 매달려 있었다.

새는 몹시 상처를 입은 상태였다.

깃털이 바닥에 어지러이 떨어져 있었으며 상처에서는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루시테는 비명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깨달았다.

산이 울리도록 처절하게 울던 비명소리는 저 새가 내던 것이었다.

새의 앞에는 검붉은 로브를 쓴 수상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가 손짓할 때마다 머리가 두 개 달린 커다란 기형 몬스터가 새를 공격했다.

“삐이이익!! 삐이이이이익! 삐로록. 삐록…….”

기력이 쇠한 새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

‘똑같아.’

울음소리가 도마뱀이랑 똑같아.

루시테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가방에 들어가 있는 도마뱀을 쳐다보았다.

도마뱀은 가만히 있으라던 루시테의 말을 듣고 가방 속에 얌전히 있었다.

하지만 날개를 부들부들 떨고 있었으며, 큰 눈으로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루시테는 왜 도마뱀이 그 비명을 듣고 막무가내로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저 새가 꼬맹이의…….’

루시테는 입술을 깨물었다.

“크아아아악!”

갑자기 로브를 쓴 수상한 자가 들고 있던 구슬 같은 것을 패대기치며 머리를 쳐들고 포효했다.

“이 빌어먹을 용 새끼! 어디로 도망친 거냐!”

수상한 자가 제 머리를 쥐 뜯으며 분에 겨워 소리 질렀다.

그는 한참 욕지거리를 내뱉더니 별안간 제 말을 듣고 있던 머리가 두 개 달린 몬스터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는 그대로 몬스터에게 주먹을 날렸다.

“제대로! 제대로 하란 말이야! 이 빌어먹을 멍청한 놈아! 네가 놓쳤으면! 일을! 똑바로 하란 말이야!”

“취익! 잘못! 취익! 했습! 취익!”

커다란 초록색 몬스터는 벌벌 떨며 남자에게 연신 잘못했다 빌었다.

“후우……. 후.”

남자는 그제야 진정되었는지 심호흡을 했다.

“이 미련한 몬스터야. 네놈이 얼마나 큰 실수를 한 줄 알아? 그 용 새끼의 드래곤 하트만 내가 가졌어도 나는 빌어먹을 몸뚱아리에서 벗어나 위대한 흑마법사가……. 잠깐.”

남자가 흉흉한 눈빛을 하고 고개를 돌렸다.

정확히 루시테가 숨어 있는 나무가 있는 곳으로.

“쓰레기 같은 냄새가 나는군. 여기에서 날 리가 없는 쓰레기 같은 헤카레트 사제 놈들의 냄새가 나.”

남자가 눈을 번뜩이며 루시테가 숨어 있는 나무를 노려봤다.

퍽!

큰 소리가 나며 루시테가 숨어 있던 나무가 흔들렸다.

루시테는 놀라 황급히 나무에서 튀어 나왔다.

나무가 우지끈 소리를 내며 옆으로 쿵 쓰러졌다.

“취이익! 인간! 취이익!”

머리가 두 개 달린 거대한 몬스터가 루시테를 내려다보며 위협적으로 씩씩댔다.

마법사가 부리는 몬스터가 나무를 내리쳐 무너뜨린 것이다.

“쥐새끼가 숨어 있었구나.”

루시테와 흑마법사의 눈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루시테는 너무 긴장하여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흑마법사를 쳐다보았다.

정말 흑마법사였다. 벽보에 붙어 있던 그 흑마법사.

검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고 흉흉한 눈빛을 갖고 있던 그 자.

흑마법사의 눈은 동공도 흰자위도 구분되는 것 없이 눈동자 전체가 붉은빛이었다.

붉은 눈동자에서는 형형한 기운이 흘러나왔다.

몰골은 피골이 상접한 듯 앙상했고 앙상한 피부 가죽 위로 푸른 핏줄이 터질 것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흐흐흐흐. 이제는 헤카레트의 찌꺼기까지 내 일을 방해하는구나. 말해봐라, 쥐새끼. 누가 보내서 왔느냐?”

흑마법사는 흉흉한 눈으로 비웃음을 흘리며 루시테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루시테의 손끝이 덜덜 떨리려 했다.

참기 힘든 압박감이었다.

무언가 아주 무거운 것이 그녀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흑마법사가 그녀에게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올 때마다, 소름끼치는 기분이 머리부터 발끝을 스쳐 내려갔다.

압박감에 온몸을 옴싹달싹 할 수가 없었다.

루시테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이토록 무기력한 기분은 오랜만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아무리 벗어나려 발버둥을 쳐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

그녀는 네 번이나 회귀하는 그 평생에 자신이 무기력한 존재라는 것을 매일같이 느껴왔으며, 체험해왔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 쓸모도 없는 저주받은 버러지.

이시엘라 황후가, 동생들이, 모든 귀족이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는 것만 같았다.

강력한 저주로 봉인되었으나 그럼에도 루시테에게서 새어 나오는 미약한 신성력이 마기로부터 저항하려 애썼다.

그러나 루시테의 미약한 신성력은 강력한 흑마법사 앞에서 소용이 없었다.

흑마법사가 루시테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루시테가 막 앙상한 흑마법사의 손에 붙들리기 직전.

“뇽!”

루시테의 가방에서 은빛 도마뱀이 튀어나왔다.

“크르르르릉.”

도마뱀이 루시테의 앞에 서서 위협적으로 울었다.

흑마법사가 동공이 없는 붉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찢어지도록 크게 웃었다.

“크하하하하! 용 새끼! 용 새끼로구나!”

환희에 젖어 웃음을 터뜨리는 흑마법사의 모습은 무척이나 기괴했다.

“용 새끼가 제 발로 걸어 왔구나! 크하하하하!”

기뻐하는 흑마법사의 신형이 일렁였다.

“삐이이이이이이익!”

흑마법사의 뒤쪽에 매달린 거대한 갈색 새가 도마뱀을 보자 울기 시작했다.

새는 성치 못한 날개를 퍼덕였다.

새는 괴로운 듯 몸을 비틀면서도 결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새는 도마뱀을 바라보며 목이 쉬어가는 데도 쉴 새 없이 울었다.

“삐이이익! 삐로로로록!”

“시끄러워! 이제 너는 필요 없어!”

흑마법사가 버럭 화를 내며 손을 뒤로 뻗었다.

펑!

큰 폭발음을 내며 결계가 터졌다.

“키익!”

거대한 새는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며 고개를 힘없이 떨구었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앙!!”

도마뱀이 분노했다. 그리고 그대로 흑마법사에게 달려들었다.

마법사의 옆에 우뚝 서 있던 커다란 초록색 몬스터가 달려드는 도마뱀을 막았다.

도마뱀은 몬스터의 육중한 주먹에 맞아 그대로 날아가 땅에 처박혔다.

어찌나 세게 던져졌는지 땅이 움푹 파일 정도였다.

“아, 안 돼!”

루시테는 황급히 도마뱀에게 달려가 도마뱀을 감싸 안았다.

“크르르르르.”

도마뱀은 으르렁거렸지만, 꽤 충격이 컸는지 앞발을 축 늘어뜨리고 있었다.

“꼬, 꼬맹아. 괜찮아?”

당황한 루시테의 목소리가 떨렸다.

루시테는 고개를 홱 돌려 흑마법사를 노려보았다.

자신이 너무 무기력하게만 느껴졌다.

소중한 친구 하나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꼴이라니.

아니, 친구는커녕 제 몸 하나 지킬 수가 없는 꼴이라니.

결국 원위치인 걸까.

몇 번을 회귀해서 다시 삶을 시작하든 간에 자신은 바뀔 리가 없는 걸까.

루시테는 입술을 꽉 깨물고 흑마법사와 몬스터를 노려봤다.

죽음은 두렵지 않았다. 이미 세 번이나 죽었던 목숨이었으니까.

살해도 당해봤는데 흑마법사에게 죽는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니었다.

‘다만.’

루시테는 도마뱀을 더 꽉 껴안았다.

다만 이 아이를 지켜주지 못할 거라는 게 두려웠다.

“가서 헤카레트의 찌꺼기를 죽이고 새끼용을 가져와라.”

흑마법사가 앙상한 손가락으로 루시테를 가리켰다.

쿵.거대한 몬스터가 육중한 걸음을 내디뎠다.

“당신! 대체 이러는 목적이 뭐야!”

루시테는 도마뱀을 안은 채로 뒷걸음질하며 외쳤다.

“크하하하하하하! 버러지 같은 게 위대하신 어둠의 위저드 프레이즈님께 목적을 물어?”

흑마법사는 루시테를 마음껏 비웃었다.

“곧 죽을 목숨이니 특별히 알려주지. 헤카레트의 버러지여. 네가 들고 있는 것은 이 땅의 마지막 용이다. 자신이 용종인 줄도 모르고 몬스터에게 길러지고 있더구나! 크하하하하! 위대하신 위저드 프레이즈님께서 그 용의 심장을 취할 것이다! 그리고 위대한 몸으로 새롭게 태어나 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흑마법사는 붉은 눈동자를 번뜩이며 포효하듯 외쳤다.

‘정신이 나간 놈이로구나.’

루시테는 흑마법사가 정신 나간 소리를 지껄이는 동안 계속해서 뒷걸음질을 쳤다.

‘아, 이런!’

루시테의 등에 딱딱한 나무껍질이 닿았다.

어느새 몬스터가 쿵쿵거리며 루시테의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구부러진 송곳니가 입술 밖으로 튀어나왔으며 네 개의 노란 눈을 번뜩이는 두 개의 머리는 무척 위압적이었다.

“취익! 죽인다! 취익! 인간!”

몬스터가 루시테를 향해 손을 뻗었다.

루시테는 몸을 피하려 했으나 몬스터가 더 빨랐다. 몬스터는 루시테와 도마뱀을 통째로 잡아챘다.

“으윽!”

루시테는 엄청난 압박감을 느꼈다.

끔찍한 고통이 그녀의 몸을 옥죄어 왔다.

루시테는 주먹으로 제 몸을 잡고 있는 몬스터의 커다란 손을 퍽퍽 쳤다.

그러나 몬스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거 놔! 흐윽!”

루시테는 가쁜 숨을 삼켰다.

온몸이 몬스터의 주먹 속에서 꽉 졸려 터져버릴 것 같았다.

이 와중에 그녀와 함께 붙잡혀 있는 꼬마 도마뱀이 루시테는 몹시 걱정되었다.

몬스터가 루시테를 점점 더 높이 들어 올렸다.

루시테와 몬스터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루시테는 숨이 막혀 글썽거리는 눈으로 있는 힘껏 몬스터를 노려보았다.

“그만둬! 제발!”

루시테는 몬스터를 향해 외쳤다.

루시테는 지금 자신의 목숨보다도 품 안에서 더 괴로워하고 있을 꼬마 도마뱀이 더 중요했다.

루시테는 꼬마 도마뱀이 무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지금까지 세 번의 생애를 사는 동안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이렇게 간절히 바라본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그저 사랑이 받고 싶어 평생을 갈구해 왔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숨어 살았던 것이 전부였던 인생이다.

“제발 이러지 마!”

루시테는 온 힘을 다해 외쳤다.

“제발!”

루시테가 악에 받친 목소리를 낸 그 순간.

그녀의 칠흑같이 어두운 검은 눈동자에 일순 보랏빛 기운이 맺혔다.

루시테를 쥐어 터트릴 작정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주먹에 점점 힘을 가하던 몬스터가 순간 움찔했다.

“취이익! 취익!”

몬스터는 눈에 띄게 당황하며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그리고 루시테를 다시 쳐다보았다.

“취이익!”

이상한 일이었다. 무엇에 씌인 듯 형형했던 몬스터의 눈빛이 순해졌다.

형형하게 솟구쳐 올랐던 살기와 날카로웠던 기세가 누그러졌다.

몬스터는 조심스레 루시테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러나 이상하다고 느낄 틈도 없이, 루시테는 바닥에 몸이 닿자마자 품에 있던 도마뱀을 살폈다.

“꼬맹아! 꼬맹아. 괜찮아?”

“피유우우욱.”

도마뱀이 막혔던 숨을 길게 내뱉었다.

“하.”

다행이다.

루시테는 눈물을 글썽이며 도마뱀을 꼭 끌어안았다. 도마뱀이 죽지 않은 것이다.

“이게 무슨 짓이냐!”

그러나 안도하는 것도 잠시. 편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흑마법사가 길길이 날뛰었다.

“미련한 몬스터 따위가 감히 내 말을 거역해?!”

흑마법사가 구슬을 높이 들고 몬스터 쪽으로 손을 확 뻗었다.

검은 연기가 흑마법사에게서 나와 뱀처럼 몬스터를 휘감았다.

몬스터의 거대한 몸이 점점 땅에서 들려 올라갔다.

검은 연기에 휩싸인 몬스터가 괴로워했다.

“취익! 취익! 그만, 취익!”

몬스터는 검은 연기를 풀려고 애를 썼다.

초록색이던 몬스터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갔다.

몬스터가 고통스러워하던 것을 지켜보던 흑마법사가 마법을 거뒀다.

몬스터가 넘어질 듯 기우뚱거리며 간신히 땅에 똑바로 섰다.

“자, 네 주제를 알았으면 저것들을 다시 잡아 와라.”

흑마법사는 루시테를 가리켰다.

몬스터가 중심을 잡으며 다시 일어섰다. 그리고 루시테에게로 쿵쿵 다가왔다.

루시테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조금 전 저 몬스터가 왜 그녀를 놔줬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런 요행을 다시 바라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몬스터는 금방이라도 루시테를 공격할 것처럼 위협적으로 루시테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예상 외로 루시테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몬스터는 루시테의 바로 근처에 오자마자 그녀를 등지고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흑마법사를 노려보며 외쳤다.

“취익! 나는! 취익! 죽일 수! 취익! 없다!”

“취익! 지킨다!”

몬스터는 양 주먹을 흑마법사를 향해 들었다.

“이, 이!! 버러지 같은 것이!”

흑마법사가 분노했다.

흑마법사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몬스터를 향해 손을 뻗었다.

검은 연기가 순식간에 몬스터를 휘감았다.

몬스터는 검은 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쳤지만 강력한 흑마법을 쉬이 뿌리칠 수는 없었다.

몬스터는 열심히 싸웠지만 결국 흑마법사가 승리했다.

예정된 결말이었다.

마지막 순간 루시테를 지켜주려던 몬스터는 검은 연기 안에서 힘없이 쓰러졌다.

죽음을 앞에 두고 루시테는 덜덜 떨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갑자기 돌변한 몬스터가 그녀를 지키려다 흑마법사에게 죽은 것이다.

그녀는 피가 튀기는 싸움터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스스로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과 다른 이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또 달랐다.

속이 메스꺼웠다. 참기 힘든 괴로움이 저 발치에서부터 밀려왔다.

‘어, 어떡해. 어떡하지.’

이대로 자신과 꼬맹이도 흑마법사의 손에 죽는 걸까.

두려움에 루시테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손에 검지에 끼워져 있던 반지가 걸렸다.

“마법사, 마법사님!”

그녀는 제 검지에 끼워져 있는 루비 반지를 문질렀다.

문질러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이미 은빛 눈의 마법사가 말해주었기에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문질렀다.

루시테는 지푸라기를 붙잡는 심정으로 마지막 구원의 동아줄을 붙잡듯 반지를 문질렀다.

반지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위험할 때를 대비해 준 거라며. 왜 아무 역할도 못 해! 왜!’

루시테의 손길이 다급해졌다.

“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구나.”

흑마법사는 구슬을 쓰다듬으며 루시테를 향해 손을 뻗었다.

“너를 죽이고 드래곤 하트를 취할 것이다. 그것은 내 것이다.”

흑마법사의 손끝을 따라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루시테에게로 기어왔다.

몬스터를 죽인 그 연기였다.

루시테의 몸이 덜덜 떨렸다.

연기가 루시테에게 닿았다.

발끝을 타고, 발목을 타고. 연기가 스멀스멀 루시테의 머리를 향해 기어 올라왔다.

아주 축축하고 음습하고 더러운 기운이었다.

“시, 싫어! 저리 가!”

루시테는 발버둥쳤다.

“제발! 누가 좀!”

루시테는 도마뱀을 놓칠세라 꽉 끌어안고 온 힘을 다해 외쳤다.

“도와주세요! 제발!”

루시테는 검은 연기를 떨쳐내기 위해 미친 듯이 발버둥쳤다.

아무리 벗어나려 해봐도 검은 연기는 계속해서 그녀의 몸을 타고 올랐다.

그러나 루시테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끝까지 버둥거렸다.

그녀가 한참을 버둥거리고 있는데. 어느 순간 덮쳐오던 더럽고 축축한 기운이 씻은 듯 사라졌다.

그녀는 땀범벅이 된 얼굴로 제 몸을 살폈다. 없었다.

목을 휘감으려 하는 검은 연기가 없었다.

문득 그녀의 머리 위로 긴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루시테는 고개를 들었다.

제일 먼저 보인 것은 얇은 실내셔츠를 걸친 호리호리한 몸과 넓은 어깨였다.

그 위로 어깨 가에서 찰랑이는 검은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렸다.

자다가 나온 듯 그는 무척 가벼운 옷에 부드러운 실내용 슬리퍼 차림이었다.

그가 별안간 한쪽 무릎을 들더니 슬리퍼로 검은 연기를 발로 확 내려찍었다.

응축된 마력을 담아 뻗어가던 검은 연기가 중간에 가로막혔다.

시전하던 마법이 불발된 반작용은 그대로 시전자에게 영향을 미쳤다.

“크윽!”

흑마법사의 입에서 핏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강력하고 대가가 큰 마법을 쓸수록 그 위험부담도 컸기에 흑마법사가 감내해야 할 몸의 부담 또한 컸다.

흑마법사는 황급히 마법을 갈무리하기 위해 제 기운을 빨아들였다.

헤카레트의 찌꺼기를 공격하기 위해 쏘았던 마력이 되려 스스로에게 부작용을 일으키려 하고 있었다.

“헉! 이게 무슨?”

흑마법사가 눈을 홉떴다.

분명 그의 마력일 터인데. 검은 머리의 남자에게 밟혀 있는 그의 마력이 그에게로 돌아올 생각을 안 했다.

흑마법사가 아무리 힘을 줘 봐도 마력의 끈이 남자의 발밑에서 떨어지지를 않았다.

“이이익…!”

흑마법사가 이를 악물었다.

그들은 긴 마력의 연기를 사이에 두고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다.

마치 줄다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흑마법사는 제 마력을 끌어당기려 했고, 검은 머리의 마법사는 흑마법사의 마법을 놓아주지 않으려 했다.

“크으으윽!”

흑마법사는 신음성을 삼켰다.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오롯이 제 힘인 마력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대체 저놈이 누구이기에!

“웬 놈이냐!”

흑마법사는 참다못해 고함을 질렀다.

제 마력을 돌려받기 위해 끙끙 힘을 쓰는 그는 창백하다 못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반면 루시테를 돕기 위해 나타난 검은 머리칼의 마법사는 여유로웠다.

그는 흑마법사를 향해 입꼬리를 올려 씩 웃었다.

마나의 파동으로 인해 검은 머리칼이 크게 휘날렸다. 은빛 눈동자에서는 안광이 번뜩였다.

그는 천사 같은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흑마법사보다도 더 흑마법사 같았고, 악마보다도 더 악마 같았다.

그가 뿜어내는 마력으로 인해 루시테의 머리끝이 찌릿찌릿했다.

그가 발을 들어 흑마법사의 마력을 한 번 더 세게 쾅 밟았다.

“크아아악!”

흑마법사가 피를 울컥 토했다.

흑마법사의 마력의 끈을 타고 검은 머리 마법사의 마력이 끝도 없이 흑마법사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흑마법사의 마나가 역류하고 소용돌이쳤다.

“웬 놈이냔 말이다!!”

흑마법사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가래와 핏물이 들끓어 목소리가 갈라지고 쇳소리가 났다.

흑마법사는 이 정도로 실력 있는 마법사를 마주칠 거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용종의 마지막 성지인 나브레에서 최대한 조용히 용의 알만 찾아서 돌아갈 예정이었다.

일이 어디서부터 틀어진 것인지 짐작조차 안 갔다.

용의 알을 직접 부화시켜 그의 것으로 만들 계획이었는데.

그런데 용의 알이 이미 부화해 있지를 않나, 주변의 몬스터가 용을 제 새끼처럼 키우고 있질 않나.

그것들이 기를 쓰고 버티는 바람에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했다.

산의 깊은 곳에만 있던 몬스터들이 흑마법사와의 충돌로 인해 산의 초입까지 내려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하필 제국군의 눈에 걸렸고 흑마법의 흔적이 발각되어 그는 졸지에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마지막 용의 알이 남아 있다는 정보를 어렵게 얻었다.

그 용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도 자신이고, 용의 새끼를 직접 발견한 것도 자신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니. 흑마법사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으드득.

흑마법사는 이를 갈며 눈앞의 마법사를 노려보았다.

이렇게까지 마나를 잘 다루는 인간이 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었다.

자신과 호각을 다투는 마법사를 찾으려 해봐야 온 대륙을 뒤져도 손에 꼽을 것이다.

그런 대마법사들은 다 늙어빠진 영감탱이들 아니었던가.

‘저렇게 젊은 놈이 어떻게 이런 마나 운용을?’

흑마법사는 떨리는 손으로 구슬을 꽉 쥐었다. 핏물이 흑마법사의 턱을 타고 뚝뚝 떨어져 로브를 적셨다.

“웬 놈이냐 물었다!”

흑마법사는 또 외쳤다.

그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자신을 이토록 방해하는 저 젊은 마법사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대는.”

이제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흉포한 기세만을 내뿜고 있던 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흑마법사와 루시테는 동시에 그를 뚫어져라 보았다. 순수하게 그가 무어라 말을 꺼낼지 궁금했기에.

“그대는 앵무새인가?”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툭 떨어졌다.

흑마법사와 루시테는 저도 모르게 서로 마주 봤다.

둘 다 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왜 자꾸 웬 놈이냐는 말만 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별로 대답하고 싶지 않으니 그냥 웬 놈이라고 생각하든지.”

아!

루시테와 흑마법사는 동시에 그의 말을 이해했다. 곧 흑마법사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졌다.

루시테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그는 정말이지 별나고 오만한 마법사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짐작이 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런 시건방진 놈! 가만두지 않겠다!“

흑마법사가 분노에 차올라 벌게진 얼굴로 마나를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그가 들고 있는 검은 구슬에 불길한 검은 마나가 터질 듯 맴돌았다.

웅…….

땅이 진동했다.

“피유욱.”

루시테의 품속에서 도마뱀이 바르작거렸다. 도마뱀의 비늘이 푸드득 곤두섰다.

루시테는 도마뱀을 다독이며 고개를 들었다.

‘저, 저게 뭐야?’

루시테는 눈을 크게 떴다.

흑마법사가 핏물을 뚝뚝 흘리면서도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렸다.

그의 손에 있는 수정구 위로 검은 구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소용돌이쳤고 기운이 응집되어 있었으며 새카맸다.

검은 구의 소용돌이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라도 할 것처럼 점점 커졌다.

흑마법사의 로브가 크게 펄럭거렸다. 오싹한 바람이 그녀의 볼을 스치며 지나갔다.

루시테는 겁이 났다.

저런 마법이라면…….

자신이나 꼬마 도마뱀은 물론 그녀를 도와주러 나타난 검은 머리 마법사까지도 집어삼켜질 것만 같았다.

루시테는 일어나 마법사에게 다가갔다.

미안하다고. 지금이라도 도망갈 수 있다면 도망가자고.

아니, 다 같이 도망갈 수 없다면 혼자만이라도 도망가 달라고.

그렇게 말하기 위해 루시테는 마법사의 옷소매를 잡았다.

마법사가 루시테를 내려다보았다.

“!”

그와 눈이 마주치자 루시테는 마음속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여 준비했던 말을 하나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자다 깨서 정말 급하게 나온 건지, 일전에 쓰고 왔던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의 맨얼굴은 몹시 청명해 보였다.

아름다운 은빛 눈은 자신감이 넘쳤고 굵은 눈썹이 호전적으로 치켜 올라가 있었다.

게다가 무척이나 즐거운 듯 붉은 입술의 끝을 올린 채 웃고 있었다.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는 이 상황을 즐기는 듯했다.

루시테는 이리도 등허리가 쭈뼛쭈뼛하고 머리카락이 찌릿찌릿하고, 모든 솜털이 곤두서는 듯 무서운데.

그런데 그는 하나도 두려운 것 같지 않았다.

그의 머리와 옷자락 역시 마나의 파동에 펄럭거리는 건 마찬가지였음에도 마법사는 침착했다.

침착한 그의 모습에 루시테는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흑마법사의 마법이 위협적이었지만 그가 다 무찌를 수 있을 것 같다는 강한 믿음이 들었다.

“크아아아아! 다 죽여주마!”

흑마법사가 막 커다란 소용돌이를 높이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은빛 눈의 마법사는 흑마법사의 말에 손을 들어 올리더니 손가락 마디를 구부렸다.

뚜두둑, 하고 그의 손가락 마디마디에서 관절 소리가 났다.

그의 마디마디에 끼워져 있는 몇몇 개의 반지에서 시린 빛이 뿜어져 나왔다.

루시테는 눈을 깜박였다.

하얀 기운이 그의 손 위에서 안개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 하얀 기운이 스멀스멀 길어지더니 길고 거대한 창이 되었다.

그의 손가락 위로 거대하고 빛나는 하얀 창이 둥둥 떠 있었다.

창 위로 알 수 없는 빛나는 문자들이 벌레처럼 기어 다녔다.

그 창은 때를 기다리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날려버리기 위해 한참이나 힘을 모은 흑마법사와는 달랐다.

은빛 눈의 마법사가 만든 창은 그 형체를 갖추자마자 곧바로 흑마법사를 향해 날아갔다.

콰아아아아아앙!

큰 폭발음이 났다. 먼지바람이 폭풍처럼 일었다.

흙먼지와 작은 돌멩이 나뭇가지 따위가 마구 날렸다.

루시테는 두 눈을 꼭 감고 모든 상황이 어서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녀의 귓가로 윙윙대는 바람소리가 거셌다.

마법사의 백색 창은 흑마법사가 만든 거대한 소용돌이를 뚫고 소용돌이를 파훼했다.

그리고 그대로 흑마법사에게로 날아갔다.

쾅!!

또 한 번의 폭발음이 났다. 흑마법사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뒤로 쓰러졌다.

끝이었다.

때마침 실눈을 뜬 루시테는 흑마법사가 쓰러지는 것을 목격했다.

다리에 힘이 풀려 그녀의 몸이 풀썩 내려앉았다.

몸에 힘이 안 들어갔다. 무릎이 루시테의 의지와 상관없이 덜덜 떨렸다.

누군가 눈앞에서 죽는 것을 보는 일은 처음이었다.

자신이 죽는 것과 다른 이가 죽은 것을 목격하는 것은 또 달랐다.

참을 수 없는 두려움이 솟구쳐 올랐다.

그녀라고 조금 전까지 살아 있던 존재의 숨이 멈추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몬스터의 마지막 모습이 자꾸만 스쳐 지나갔다.

‘나를 지켜주려고 했는데…!’

루시테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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