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8)

3.

“루시 필드 씨?”

루시테의 머리 위로 낮고 부드러우면서도 서늘한 목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루시테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루시테는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심호흡을 했다.

루시테는 꽉 감았던 눈을 힘겹게 떴다.

그녀는 품 안에서 색색 숨을 내쉬는 도마뱀을 잠시 바닥에 내려놓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멀리 몬스터의 사체 두 구가 보였다.

한 마리는 루시테를 지켜주다 죽었고, 한 마리는 꼬마 도마뱀을 키워준 부모나 다름없는데 억울하게 죽었다.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그녀는 헛구역질을 했다. 속이 매스꺼웠다.

그러나 루시테는 몬스터들의 사체를 외면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고통이 얼룩진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루시테는 바닥을 짚고 일어나려 해봤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그녀는 겨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후들 거리고 금방이라도 힘이 풀려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그대로 몬스터의 사체가 있는 곳으로 힘겹게 다가갔다.

마법사는 무슨 생각인지 그녀를 제재하거나 뭘 하는 거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흥미로운 눈빛으로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몬스터의 사체 앞에 도착한 루시테는 맨손으로 땅을 팠다.

돌멩이가 많은 거친 땅이라 손톱이 깨지고 손에 생채기가 났다.

그녀는 열심히 땅을 팠지만 힘이 없어 땅이 제대로 파지 지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의 손이 부르틀 대로 부르트고 해가 중천에 떠올랐을 즈음.

그제야 마법사가 입을 열었다.

“몬스터의 무덤을 만들어 주려는 겁니까?”

“네.”

담담히 대답하는 루시테의 목소리가 잔뜩 쉬어 갈라졌다.

“왜입니까?”

“저를……. 지켜주려고 했어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몬스터는 흑마법사의 조종을 받고 있었습니다.”

마법사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정말 저를 지켜주려고 했어요. 두 번이나.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진짜예요!”

마법사의 눈이 이채를 띄었다.

“왜 그랬을까요? 흑마법의 지배를 받는 몬스터가.”

“모르겠어요.”

루시테는 불퉁하게 대꾸하고 계속해서 땅을 팠다.

땅은 아직도 작은 구덩이에 불과했다.

시간이 더 걸릴 것 같았지만, 루시테는 반드시 두 몬스터를 묻어줄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마법사는 그녀의 옆에 서서 무언가를 고심하더니 툭 말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루시테가 파고 있던 바로 그 땅이 갑자기 푹푹 파이기 시작했다.

보이지 않는 어떤 힘이 땅에서 흙과 돌을 퍼내고 있었다. 루시테는 깜짝 놀라 땅에서 손을 뗐다.

루시테가 힘겹게 파도 조금밖에 못 팠던 것과는 다르게, 땅이 저절로 순식간에 깊게 파였다.

거대한 몬스터를 묻을 수 있을 만한 알맞은 크기로.

루시테는 멍하니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마법사가 손짓하자 몬스터의 시체가 둥둥 들리더니 구덩이 안으로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 그 위로 팠던 흙이 다시 덮였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마법사는 도와주겠다더니 정말로 군말 없이 도와주었다.

그의 마법으로 두 몬스터가 나란히 땅에 묻혔다.

모든 정리가 끝나고 마법사가 루시테에게 다가왔다.

루시테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마법사를 올려다보았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살에 그의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루시테는 그저 그의 입술에 걸린 한 조각 미소만 확인할 수 있었다.

마법사가 손가락을 까딱하자 루시테가 내려놓았던 꼬마 도마뱀이 공중에 둥둥 들려서 가까이 왔다.

루시테는 멍하니 꼬맹이를 쳐다보았다. 이제 그녀에게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법사는 잠시 루시테를 바라보더니 무릎을 굽혔다.

높이 있던 마법사의 얼굴이 루시테와 정면에 마주했다. 가면을 쓰지 않은 그의 맨얼굴이 가까웠다.

“잠시 실례할 텐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루시테는 대답하지 않고 마법사의 은빛 눈을 마주보기만 했다.

마법사의 은빛 눈이 청명하게 반짝였다.

마법사가 루시테의 겨드랑이와 무릎 아래로 쑥 손을 집어넣었다.

그가 루시테를 안아 들었다. 그녀의 시야가 순식간에 높아졌다.

마법사는 그녀를 들어올리는 데 어떤 마법도 사용하지 않았다.

마법사의 품에 안긴 루시테가 상처 입은 작은 새처럼 바르작거렸다.

그녀의 짧은 검은 머리칼이 마법사의 드러난 쇄골 근처를 간질였다.

마법사는 그녀를 안아 든 채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느릿한 움직임에 그녀는 차츰 안정을 찾았다.

꼬마 도마뱀이 마법사의 마법으로 그들의 옆을 둥둥 떠서 따라왔다.

그녀는 문득 마법사의 어깨 너머 뒤를 돌아보았다.

저 멀리 땅바닥에 그에게서 패배한 흑마법사가 쓰러져 있었다.

“저 사람은…….”

“조금 있으면 느려 터진 기사들이 와서 수거해갈 겁니다.”

마법사는 그녀가 무엇을 물어본 지 눈치채고 대답했다.

느려 터진 기사들이라니.

그는 황실 최정예 기사단원들이 들었으면 길길이 날뛰었을 만한 발언을 서슴지 않고 했다.

그의 기준으로 순간이동을 못 하면 누구든 느려 터진 건 매한가지였으니까.

“그렇군요.”

마법사의 말뜻을 눈치채지 못한 루시테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가 천천히 걷는 동안 루시테는 시선을 멀리 두고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하나도 정리가 되지 않고 복잡했다.

고작 아침 한나절일 뿐인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다.

겪은 일들 하나하나가 집채만 한 파도처럼 루시테의 머릿속에서 철썩거렸다.

찬찬히 정리하려 해봐도 다른 일에 대한 생각이 밀려오고 또 밀려와서 전혀 정리가 되지 않았다.

머릿속이 몹시 어지러웠다.

한편 마법사 레일리 아사드는 루시테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한곳을 향해 있었다.

루시테의 눈.

눈동자의 색이 미묘하게 달라져 있었다.

분명 그가 기억하는 루시테의 눈동자는 검은색이었다.

다른 색이 조금도 섞이지 않은 순도 높은 검은색.

그런데 지금 그녀의 눈은 그때와 달랐다.

아주 약간이긴 했으나 보랏빛이 섞여 보였다.

그 빛은 아주 미약하여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알 수 없었다.

마치 보라 빛깔의 작은 불씨가 꺼질 듯 말 듯 미약하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는 루시테를 파악하기 위해 그녀를 샅샅이 살폈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마나의 어떤 형태가 변했는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변했는지.

‘없군.’

아무리 살펴봐도 루시테에게서 달라진 부분은 없었다.

미묘하게 변한 눈동자 색을 제외하면 모든 게 이전과 똑같았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마나는 여전히 혼탁했고 어지러이 뒤섞여 있었다. 엉킨 그물 같았다.

‘역시 흥미롭다.’

레일리 아사드는 입꼬리를 올렸다. 천상 마법사인 그는 늘 호기심에 지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루시테 클라우디오. 고국을 떠나 산 중턱에 자리 잡은 메이븐의 폐황녀.’

레일리의 은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이곳에서 처음 그녀를 봤을 때보다 더 강렬한 흥미가 그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저주에 담긴 비밀을 풀고 싶다는 욕구가 그를 자극했다.

* * *

루시테는 소파에 앉아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집에 도착하려면 멀었겠다 싶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있었다.

꼬맹이 도마뱀은 많이 지쳤는지 그녀의 발치 양탄자에 엎드려 곯아떨어져 있었다.

루시테는 마법사를 흘끗 쳐다봤다.

그는 테이블의 나무 의자를 끌어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턱을 괴고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하아…….’

루시테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루시테는 이 모든 게 꿈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녀와 그녀의 친구를 구해준 은빛 눈의 마법사가 지금 이 자리에 있었고, 그녀와 그녀의 꼬마 도마뱀은 살아 있었다.

마법사 덕분에.

‘그래 살아 있어.’

루시테는 작게 중얼거렸다. 한껏 복잡했던 머릿속이 조금은 차분해졌다.

어떤 사실들이 휘몰아쳤든 중요한 건 이번에 그녀는 죽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무사하길 바랐던 꼬마 도마뱀도 살아 있었고.

이제 남은 일은 살아남은 이들로서 천천히 풀어 나가면 될 일이었다.

“후우.”

루시테는 크게 심호흡했다.

어지러이 흔들렸던,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힘이 풀렸던 다리도 괜찮아진 것 같고, 무엇보다 그녀는 친구와 함께 무사히 집에 돌아와 있었다.

그게 가장 중요했다.

루시테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마법사의 앞으로 다가갔다.

“마법사님. 저희를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루시테는 꾸벅 허리를 숙이고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표했다.

“레일리입니다. 루시 양.”

루시테는 굽혔던 허리를 펴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씩 올라가 있었다.

다리를 꼬고 그녀를 쳐다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그 모습이, 그를 무척 오만해 보이게 했다.

만약 다른 이가 그녀를 그렇게 어린아이 부르듯 불렀다면 한마디 했을 터였지만, 루시테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토록 오만해 보이는 그가 자신을 어린아이 부르듯 하는 모습이 꽤 어울렸으니까.

“레일리 아사드입니다. 레일리라고 불러주세요.”

마법사가 다시 한번 자신을 소개했다.

루시테는 그제야 자신을 레일리라 소개한 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았다.

가면을 벗은 말끔한 그의 얼굴을.

이마를 살짝 덮은 앞머리 뒤로 곧은 이마가 보였다.

이마 밑으로는 호전적으로 치켜 올라간 곧은 눈썹이 자리했다.

눈썹과는 대조적으로 눈매는 부드러웠다.

아몬드형 눈매가 끝이 부드럽게 휘어져 그를 몹시 부드러운 사람처럼 보이게 했다.

레일리의 인상은 성직자처럼 경건해 보이기도 하고 수도승처럼 금욕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신전 벽화에 있는 천사처럼 무척 성스럽고 아름다워 보이기도 했다.

신이 빚은 조각상이라 칭송받는 이안보다도 잘생긴 것 같았다.

그런데 레일리는 그런 성스러운 얼굴을 하고서는 오만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천사 같은 경건한 얼굴에 오만한 미소라니. 아이러니한 조합이었다.

하지만 그가 하니 퍽 자연스럽다고 루시테는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그는 높은 자신감과 오만함이 무척이나 어울리는 남자였다.

“레일리.”

레일리 아사드.

루시테는 그녀를 구해준 은인의 이름을 작게 중얼거렸다.

수상하고 불편하다고만 느꼈는데, 그가 이제는 그녀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흑마법사에게 죽임을 당했을 테니까.

“네. 그렇게 부르시면 됩니다.”

레일리가 입술을 올리며 부드럽게 눈을 접었다.

“쉬세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레일리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는 루시테를 뒤로 하고 문을 향해 성큼 걸음을 옮기다 우뚝 멈춰 섰다.

“아.”

레일리는 뭔가 생각난 듯 다시 몸을 돌려 루시테를 쳐다봤다.

“그 바닥에서 자고 있는 거 말입니다.”

레일리가 손가락으로 루시테의 작은 꼬마 친구를 가리켰다.

정확히 말하자면 루시테의 발치, 양탄자에 누워 잠든 통통한 은빛 도마뱀을.

“조심하세요.”

“네?”

루시테는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갑자기 꼬맹이를 조심하라니. 너무 밑도 끝도 없는 말이 아닌가.

“조심하라니 무슨…….”

“조용히 지내고 싶거든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저래 봬도 귀한 몸이시니까요.”

레일리가 입꼬리를 올렸다.

‘귀한 몸.’

레일리의 말을 알아들은 루시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도 이제 꼬맹이 도마뱀에 대해 짚이는 바가 있었다.

“그럼 다음에 또 뵙죠.”

그 말을 끝으로 루시테의 눈앞에서 레일리는 사라졌다.

루시테는 손을 뻗어 허공을 더듬어 보았다. 방금까지 있던 사람의 인기척이 이제는 온데간데없었다.

“뇽! 뇨옹!”

지쳐 자고 있던 꼬맹이가 정신을 차렸는지 목소리를 냈다.

“뇨오옹…….”

어쩐지 꼬맹이의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내 정신 좀 봐!”

루시테는 꼬맹이에게 달려가 녀석을 살폈다.

어찌나 넋이 나가 있었는지 상처를 돌볼 생각도 못 한 것이다.

다행히 꼬맹이는 나무에 부딪혔던 등 비늘이 까지고 아물었던 상처가 조금 덧난 정도였다.

크게 다치진 않은 것 같았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루시테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녀석도 안심이 되었는지 루시테의 손에 머리를 부볐다. 녀석이 혀를 내밀어 루시테의 손을 핥았다.

“앗, 따가워!”

루시테는 그제야 제 꼴을 돌아볼 수 있었다.

맨손으로 땅을 파서 손이 너덜너덜하고, 말라붙은 핏자국이 가득했다.

몸 여기저기에도 생채기가 나 있었고 옷은 넝마처럼 찢겨 있었다.

머리도 산발이었고 얼굴도 땀과 진흙 범벅에, 퉁퉁 부은 데다 여기저기 상처까지 나 있었다.

“끼잉.”

꼬맹이 도마뱀의 은빛 눈망울이 축축해졌다. 녀석의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리려 했다.

‘이 꼬맹이가 마지막 용이라고.’

루시테는 녀석을 지그시 바라봤다.

흑마법사가 던졌던 말을 토대로 한다면 꼬맹이는 마지막 용이고. 부모 없이 태어나 몬스터에게 길러졌다.

그 몬스터라면…….

루시테는 눈을 꽉 감았다.

매를 닮은 집채만한 커다란 새가 흑마법사에게 끔찍한 고문을 당하던 모습이 눈을 감아도 선연했다.

친부모는 아니지만, 그 새가 이 꼬마 도마뱀을 길러 준 부모가 되는 셈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꼬맹이의 부모는 이제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었다.

“끼잉. 끼잉.”

녀석이 루시테의 손을 핥으며 울상을 했다. 루시테는 녀석을 꼭 껴안았다.

“그만 핥아, 따갑다니까…….”

녀석을 나무라는 루시테의 목소리에 슬픔이 짙게 묻어났다.

“이 돼지 도마뱀. 도마뱀이 아니라 용이었다니…….”

루시테가 작게 중얼거렸다.

“삐록?!”

가만이 안겨 있던 녀석이 고개를 확 들었다.

울상이었던 눈망울에서 눈물이 쏙 들어갔다.

식탐만 많은 주제에 또 자기 욕하는 말은 기가 막히게 알아들었다.

“드래곤들은 엄청난 지혜를 가지고 위대한 마법을 쓰는 존재라던데. 너는 참……. 밥만 축내고 말이야. 돼지인지 용인지.”

“뇽! 뇽뇽! 뇽! 뇽!”

녀석이 항의하듯 울어댔다.

루시테는 화를 내는 꼬마 용을 꼭 안으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계속 보니 꽤 귀여웠다.

사실은 아닌 척했지만 그간 정이 많이 들었었다.

“꼬맹아.”

“뇽?”

“나랑 같이 살자. 이제부터 내가 네 가족이 되어줄게.”

“뇽!”

도마뱀이 루시테의 배에 제 머리를 부볐다. 루시테는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 * *

마법 대제국 이크릭스의 위대한 마법사 레일리 아사드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목욕물부터 받았다.

넓은 욕실이 김으로 자욱했다.

그는 허리에 수건만 한 장 두른 채 물에 발을 담갔다. 수건이 벗겨질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첨벙.

물이 튀는 소리가 났다.

“하아…….”

레일리는 목을 뒤로 젖혀 욕조의 턱에 머리를 기댔다.

호리호리하지만 단단한 몸이 물에 반쯤 잠기며 흰 나신 위로 물기가 서렸다.

그는 손가락 사이에 와인 잔을 끼워 들었다.

욕실의 한구석에 준비되어 있던 와인 병이 두둥실 날아와 잔에 와인을 쪼르륵 따르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레일리! 레일리!

-대마법사 레일리! 멋있는 레일리!

물의 정령들이 레일리의 근처를 포르르 날아다니며 말을 걸었다.

요정 같은 작은 날개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카일러스! 정령사 카일러스! 위대하신 나브레님의 후예 카일러스!

바람의 정령들이 물의 정령들에게 질세라 레일리의 귓가를 맴돌며 속삭였다.

대마법사 레일리 아사드이면서, 제국의 2황자 카일러스 미카엘 에드라이 델 이크릭스이기도 한 그가 손을 휘저어 정령들을 날려 보냈다.

그는 제 휴식 시간을 방해하는 시끄러운 정령들에게 대꾸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손을 들어 머리칼을 쓱 넘겼다. 칠흑처럼 새카맸던 검은 머리칼이 그의 손길을 따라 눈부신 은빛으로 변했다.

그가 손을 다시 물에 담갔을 때는 그의 머리가 온통 은빛으로 변해 있었다.

뜨거운 김이 자욱한 가운데 수증기 사이로 레일리의 은빛 머리칼과 청명하고도 깊은 은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은빛 눈과 은빛 머리칼은 이크릭스 황실의 상징이다.

하지만 실제로 그 특성을 계승 받아 태어난 황족은 적은 편이었다.

세간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황실의 비밀이 있다. 초대 황제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크릭스 제국의 초대 황제 이크릭스는 신룡 나브레의 수호를 받아 제국을 세웠다고 세간에는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은 조금 달랐다. 이크릭스 제국의 초대 황제는 바로 그 신룡 나브레 자신이었다.

제국의 이름이자 초대 황제의 이름인 이크릭스는 신룡 나브레가 인간으로서 유희를 즐기는 동안의 이름이었다.

이크릭스를 세운 초대 황제 이크릭스이자 나브레는 제국을 몹시 사랑했다.

그는 기반을 탄탄히 하기 위해 자신이 제국의 수호룡이라고 세간에 알렸으며, 그것이 신룡의 수호를 받는 마법 제국 이크릭스의 영광의 시작이었다.

나브레는 아주 오랫동안 통치를 했다.

사람들은 황제가 죽지 않는 이유가 신룡의 수호를 받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에게는 후손들이 많이 생겼고, 나브레는 이제 자신이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 때임을 깨달았다.

생각보다도 훨씬 더 이크릭스를 사랑했던 나브레는 황제 위를 물려주기 직전 황태자에게 큰 유산을 남겼다.

드래곤의 심장.

드래곤의 정수이자 모든 것.

드래곤을 영생하게 하고 끝없는 마력을 쓸 수 있게 하는, 드래곤의 핵심 그 자체인 드래곤 하트.

신룡 나브레는 드래곤 하트를 황실에 유산으로 남겨주고 끝내 모든 생을 마감했다.

그렇게 드래곤 하트의 기이한 유전이 이크릭스 황실의 핏줄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수십 년에 한 번, 어쩌면 수백 년에 한 번 황실의 핏줄에서 실버 드래곤이었던 나브레의 심장을 유전 받은 황손이 태어났다.

그 황손은 실버 드래곤인 나브레를 그대로 닮아 은빛 머리에 은빛 머리칼을 가지고 태어났다.

적게 유전된 자는 머리칼만 은빛이기도 했고, 때로는 눈동자만 은빛이기도 했다.

그러나 적게 유전되었어도 유산은 유산.

그 황손은 언제나 마법에 천재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고 당연한 수순으로 뛰어난 마법사가 되었다.

아주 가끔, 수백 년에 한 번 은빛 눈과 은빛 머리칼을 모두 갖고 태어난 희대의 천재 마법사가 이크릭스에 태어나기도 했다.

그런 일은 아주 드문 경우였으나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기도 했다.

-카일러스! 위대하신 나브레의 후예 카일러스!

바람의 정령이 목욕을 즐기는 레일리의 어깨에 앉아 속살거렸다.

레일리는 귀찮은 듯 손을 흔들어 바람의 정령을 멀리 날려 보냈다.

“후.”

레일리는 목욕을 마치고 욕탕에서 일어났다.

촤아아악.

그의 흰 나신에서 물이 떨어져 내렸다. 은빛 머리칼이 물에 젖어 목에 달라붙어 있었다.

바람의 정령이 날아와 그의 머리를 흔들자 순식간에 물기가 사라지고 머리가 보송보송해졌다.

완벽하게 단발로 길이를 맞춘 결 좋은 은빛 머리칼이 부드럽게 찰랑였다.

머리칼에서는 윤기가 좔좔 흘렀다.

-레일리는 특별해. 레일리는 멋있어.

물의 정령이 그의 나신에서 물기를 사라지게 하며 노래했다.

레일리는 정령들을 물러나게 하고 옷을 입었다.

그는 대충 하의를 꿰어 입고 그 위에 긴 로브를 걸쳤다.

옷깃 사이로 그의 단단한 가슴과 복부가 드러났다.

그는 몸이 드러나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책상 앞에 앉았다.

책상 위에는 그 자리에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값비싼 보석들이 굴러다녔다.

어려운 수식과 마법진이 빼곡하게 적힌 양피지 따위의 서류 뭉치들이 보석들과 어지러이 섞여 책상 위에 펼쳐져 있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꼰 채 의자에 편안하게 앉았다.

“루시테 클라우디오.”

그는 이름 하나를 툭 내뱉고는 팔짱을 풀고 손가락 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정령들이 귀를 쫑긋 세우고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하나 귀를 기울였다.

언제나 서늘하고 무감정해 보이는 그의 눈빛이 반짝였다.

흥미로운 어떤 것을 찾은 짓궂은 소년의 눈빛이었다.

이크릭스 제국의 2황자 카일러스는 서자였다.

황비도 아닌 말단 하녀가 황제와의 우연한 하룻밤으로 낳은 자식이었다.

카일러스 외에도 황제의 씨는 열 손가락으로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황제 발칸트리히 2세는 유명한 호색한이었으니까.

그러나 그가 정식으로 황자의 지위에 올린 자식은 단 셋.

2황자인 카일러스를 제외한 나머지 둘은 정식 황후의 아들이었다.

카일러스가 황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타고난 머리 색과 눈 색이 다였다.

신룡 나브레의 혈통이라는 확실한 증거.

그것을 타고났기에 카일러스는 2황자가 되었고 카일러스의 어미는 황비가 되었다.

그러나 황실은 콩가루에 쓰레기 집안이었다.

암투가 끊이지 않았고 카일러스는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암살의 위협을 받아왔다.

황태자는 1황자 알렉산더였지만 은빛 유전을 타고나지 못했다.

그는 제 어미인 황후를 꼭 닮아 타오르는 붉은 머리칼에 녹색 눈을 갖고 태어났다.

은빛 유전을 물려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알렉산더에게 지독한 콤플렉스였다.

그런 그에게 카일러스의 존재는 위협이었다.

결국 카일러스의 어머니는 카일러스가 사춘기였던 시절 독살을 당했다.

그 길로 카일러스는 황실에 진저리를 치고 가출했다.

그는 레일리 아사드라는 가짜 신분을 만들어 아카데미를 졸업했고, 좋은 스승을 만나 잠재된 재능을 깨우쳤다.

카일러스의 마법적 재능은 단순한 드래곤의 후손 이상이었다.

신룡 나브레가 드래곤 하트를 직접 전해줬다는 2대 황제와 똑같은 수준의 재능이었다.

어쩌면 나브레의 환생이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한 재능일지도 몰랐다.

그는 드래곤만이 가진 고유의 지혜를 깨우쳤고 드래곤만의 특성이라는 정령 친화력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드래곤 하트를 갖고 있었다.

무한히 샘솟는 마나의 근원. 그 심장을 갖고 태어났다.

-카일러스는 황제가 되지 않을 거야?

바람의 정령이 그를 향해 종종 속삭이곤 했다.

그러나 카일러스는 황제가 되는 데 하등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이크릭스의 황실을 경멸했다.

덕분에 대마법사 레일리 아사드의 진짜 정체가 2황자 카일러스 이크릭스라는 사실을 아는 자는 극소수였다.

심지어 친부인 발칸트리히 황제조차 알지 못했다.

자신의 서출 아들이 진짜 드래곤 하트를 타고났다는 사실과 자신이 다스리는 나라의 대마법사라는 사실도.

‘황제 따위가 되는 데는 관심이 없다.’

레일리는 단호하게 바람의 정령에게 대답했다.

그는 드래곤의 지혜를 깨우친 존재로서 세상이 무료했다.

모든 게 그의 발 아래 있었고, 그가 되고 싶은 것은 뭐든 될 수 있었다.

원한다면 황제조차 쉽게 될 수 있을 터였다.

드래곤 하트의 잠재력을 모두 깨운 뒤로 그에게는 세상이 쉬웠다.

그 어떤 것도 그의 앞에 장애물이 되지 못했다.

단지 아주 가끔 느끼게 되는 호기심이 무기력증에 빠진 삶의 유일한 원동력이었다.

“루시테, 클라우디오.”

카일러스는 한 번 더 또박또박 루시테의 이름을 내뱉었다. 책상을 톡톡 두드리는 그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셔츠를 대충 걸치고 마법사 로브를 푹 눌러썼다.

은빛으로 빛나던 그의 머리칼은 순식간에 새카만 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는 그길로 집에서 나와 황성으로 향했다.

‘서고를 뒤져야겠어.’

황성으로 가는 그의 발걸음이 급해졌다.

* * *

“뇽뇽! 뇽!”

은빛 꼬마 용이 오동통한 꼬리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꼬마 용은 테이블 위에 앉아 루시테가 하는 일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루시테가 손을 뻗어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뇨옹! 삐로록!”

녀석이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냈다.

루시테는 책을 샅샅이 훑으면서 고뇌하는 중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그녀가 서점에서 빌려온 책이 높이 쌓여 있었다.

루시테는 지금 꼬맹이에게 멋진 이름을 지어주기 위해 고서를 뒤지는 중이었다.

언제까지 새끼 용에게 돼지라느니 도마뱀이라느니 꼬맹이라느니 하는 호칭으로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제 새끼 용이 진짜 그녀의 가족이 되었으니 루시테는 이 녀석에게 아주 멋진 이름을 지어줄 생각이었다.

루시테는 메이븐에서 보기 힘들었던 용에 관한 책 위주로 빌려왔다.

메이븐은 이크릭스 제국과 용을 경시했기 때문에 용에 관한 서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드래곤이 국가의 수호룡인 이크릭스는 공공 도서관에조차 관련 서적이 매우 많았다.

용과 관련된 설화부터 시작해서 동화, 영웅소설, 역사소설, 과학 서적, 마법 서적, 끝도 없이 많았다.

“라트리엘가, 노우나크레브리덴, 발데바르트, 아라고네스.”

루시테는 유명한 용들의 이름을 종이에 옮겨 적고 따라 읽어보았다. 이름들이 하나 같이 길었다.

“좋아. 적어도 다섯 음절은 돼야겠어!”

루시테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루시테는 하루 종일 고민했다. 밥을 차릴 때도 생각하고 청소를 하면서도 생각하고, 해야 할 필사와 번역 일도 오늘 하루만큼은 제쳐두고 고민했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때 즈음이 돼서야 루시테는 고민을 마쳤다.

루시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너무 기쁜 나머지 제자리에서 깡충깡충 뛰었다.

“꼬맹아! 꼬맹아!”

루시테는 큰 목소리로 새끼 용을 불렀다.

루시테가 부르자 근처에 엎드려 있던 새끼 용이 뒤뚱뒤뚱 빠르게 걸어왔다.

루시테는 새끼 용을 껴안아 테이블에 올려주었다. 루시테는 새끼 용과 눈을 마주치고 진지하게 말했다.

“꼬맹아, 내가 좋은 이름을 떠올렸어!”

“뇽!”

새끼 용이 알아들었다는 듯 짐짓 진지한 눈빛으로 대답했다.

“네 이름은 말야.”

“뇽!”

“노이테리온이야.”

새끼 용이 머리를 갸웃했다.

“노이테리온. 이제부터 네 이름은 노이테리온이야. 이 세상에 마지막 남은 용에게 어울리는 이름이지.”

노아와 이테리온을 합친 이름이었다.

노아는 헤카레트 성서에 나오는 최후의 인간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이테리온은 정확히 발음하면 ‘리이 테리온.’

이크릭스 제국의 옛말로 ‘축복이 함께하는 길.’이라는 뜻이었다.

합쳐서 노이테리온.

“마지막 남은 작은 용아, 네게 축복이 함께하길.”

루시테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새끼 용에게 이름의 뜻을 설명해 주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새끼용이 힘차게 대답했다.

“뇽!”

테이블 위의 작은 촛불이 깜박였다.

루시테는 손을 뻗어 용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시테는 어쩐지 새끼 용과 자신의 처지가 비슷하게 느껴졌다.

둘 다 부모도 친구도 없이 외롭고, 오갈 곳도 의지할 곳도 전혀 없는 혼자라는 점에서 말이다.

“자, 내가 널 부르면 대답해봐. 알았지?”

새끼 용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노이테리온.”

“뇽!”

“노이.”

“뇽!”

“노이!”

“뇽!”

새끼용은 루시테가 자신을 부를 때마다 힘차게 대답했다.

“잘했어!”

루시테는 환하게 웃으며 노이를 껴안았다.

* * *

흑마법사의 시신이 발견된 후 나브레 산은 한동안 시끄러웠다.

기사들이 산 전체를 수색한답시고 들쑤시고 다녔고 종종 루시테가 사는 산 중턱까지 나타났다.

그야 알 수 없는 이유로 흑마법사가 시체가 되어 있었고, 그의 목적도 사인도 알아낼 수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기사들이 이것저것 루시테에게 캐물었을 때. 루시테는 초지일관 모른다고 대답했다.

잘못했다가 노이의 존재가 드러나면 어떡한단 말인가

일전에 마법사 레일리도 새끼용에 대해 비밀로 하라는 조언을 해주긴 했다.

노이가 도마뱀이 아닌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비밀로 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세상의 마지막 용이라는 존재가 들통나면 난리가 난다는 건 바보라도 알 거라고 루시테는 생각했다.

흑마법사도 노이를 손에 넣기 위해 그 난리를 치지 않았던가.

루시테는 세상 그 누가 온다 해도 노이를 순순히 넘겨줄 생각이 없었다.

노이는 이제 그녀가 지켜야 할 소중한 가족이었다.

루시테는 스튜에 불을 올려놓고 짬을 내어 마당으로 나왔다.

새끼 용 노이는 부엌 바닥에 루시테가 놔준 쿠션 위에 앉아 있었다.

노이의 새로운 취미였다. 요리하는 루시테 관찰하기, 또 요리가 다 될 때까지 관찰하기.

노이는 침이 고인 입을 헤 벌리고 스튜 냄비를 반짝거리는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끓으면 나 불러. 알았지?”

“뇽뇽!”

노이는 고개를 마구 주억거렸다.

루시테는 마당으로 나와 장작 팰 준비를 했다.

추위가 거의 가시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장작이 필요했다.

그녀는 장갑을 끼고 통나무를 옮겼다. 통나무는 잘 건조되어 버석버석했다.

루시테는 날카롭게 벼린 도끼를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웃했다.

‘요즘 노이가 좀 똑똑해진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루시테는 장작을 퍽 내리쳤다.

아직 힘이 부족해 도끼가 나무에 그대로 박혔다.

정상적이라면 반으로 쩍 갈라져야 하는데, 또 장작을 빵 덩어리마냥 조각조각 부스러기로 만들게 생겼다.

퍽! 퍽!

루시테는 도끼가 꽂힌 나무를 발로 차기도 하고 도낏자루를 주먹으로 때리기도 하며 장작을 패려고 안간힘을 썼다.

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렸다.

“이랴앗!”

퍽!

“크힛!”

퍽!

루시테는 온갖 괴상한 소리를 내며 장작을 팼다.

“이놈의 도끼, 덜 갈렸나 보네. 왜 이렇게 안 쪼개지는 거야!”

루시테는 본인이 힘이 달려서 그런 거라는 생각은 안 하고 도구 탓을 했다.

“못된 도끼, 나쁜 도끼.”

너무 힘이 드는 나머지 열심히 일하는 도끼를 향해 뭐라고 쫑알거렸다.

도끼는 너무 갈아서 날이 번쩍번쩍한데도 말이다.

루시테가 막 다시 도끼로 장작을 내려치려 하는데.

“그건 무슨 놀이입니까?”

서늘한 음성이 파고 들어왔다.

루시테는 놀라 도끼를 팍 내리쳤고, 도끼는 장작을 비껴나가 그대로 나무 그루터기에 박혔다.

“아! 안 돼!”

루시테는 황급히 도낏자루를 잡고 나무 그루터기에서 도끼를 빼내려 했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낑낑거려도 도끼는 빠질 생각을 안 했다.

“으이이이익! 흡! 이이익!”

루시테는 안간힘을 쓰고 도낏자루를 잡아당겼다.

장작 팰 때는 제대로 내리쳐지지도 않던 도끼가 왜 지금은 콱 박혀서 빠지지도 않는지.

루시테는 울상을 지었다.

이러면 곤란했다. 도끼가 안 빠지면 앞으로 장작을 어떻게 팬단 말인가.

그때 흰 손이 루시테의 손 위를 덮어 도낏자루를 잡았다.

루시테는 고개를 들었다.

먼저 그의 귓가로 흘러내린 검은 머리칼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은빛 눈동자가 호선을 그린 채 그녀를 빤히 내려다보는 것도 보였다.

그는 오늘도 가면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의 말끔한 맨얼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아아, 네.”

루시테는 얼떨떨하게 대답했다.

그녀는 제 손을 덮고 있는 레일리의 손아귀에서 손을 빼내려 했으나. 레일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레일리가 손아귀에 힘을 주는 것이 루시테의 손 위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쑤욱. 도끼가 부드럽게 그루터기에서 빠져나왔다.

루시테는 도끼와 레일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감사…… 합니다.”

“별말씀을.”

레일리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뇽뇽! 뇽! 뇽뇽뇽!”

루시테가 무언가 채 말을 다시 하기 전에 노이가 창문으로 얼굴을 내밀고 시끄럽게 울었다.

“뇽뇽뇽! 삐로로로록!”

루시테를 재촉하는 듯 다급한 울음소리였다.

“아, 맞다!”

루시테는 도끼를 그대로 내팽개치고 집안으로 달려갔다.

스튜가 팔팔 끓고 있었다.

노이는 루시테가 시키는 대로 스튜를 보고 있다가 끓기 시작하자 와서 알린 것이었다.

루시테는 막 넘치려 하는 스튜 냄비의 불을 껐다.

뚜껑을 여니 김이 확 올라왔다.

갖은 야채와 고기를 넣고 끓인 루시테 표 스튜였다. 향긋한 국물 냄새가 집안으로 확 퍼져나갔다.

루시테는 국자를 들고 살짝 맛을 보았다.

“음!”

그녀가 끓였지만 꽤 훌륭했다. 어쩌면 스튜 전문 음식점을 차려도 될 정도가 아닐까.

루시테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식사 준비를 했다.

스튜를 그릇에 덜어 테이블에 세팅했고 스튜와 함께 먹을 딱딱한 빵을 잘랐다.

노이가 신이 나서 루시테를 졸졸 따라다니며 폴짝폴짝 뛰어 댔다.

“벌써 점심때로군요.”

이질적인 목소리에 루시테는 바삐 움직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막 샐러드에 들어갈 양배추를 뜯으려던 참이었다.

편한 옷차림을 한 레일리가 부엌과 응접실의 중간 즈음에 서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맞다. 저 사람도 있었지.’

루시테는 퍼뜩 기억을 떠올렸다.

레일리가 갑자기 나타나서 그녀가 도끼를 빼는 것을 도와 주었다는 사실을.

살림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걸까.

할 일이 하도 많아서 종종 중요한 일을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어찌나 정신없게 돌아다녔으면 사람이 온 것도 잊어버렸을까.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닌 마법사 레일리를.

“안녕하세요. 레일리.”

루시테는 그제야 레일리에게 인사를 했다. 그가 루시테를 찾아온 지 삼십 분 만이었다.

레일리는 루시테가 이제야 자신을 반기는 것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특유의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루시테를 빤히 바라보며 루시테의 늦은 인사에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다.

“안녕하세요. 루시.”

“식사하셨나요?”

“아뇨.”

“그럼 같이 드실래요? 양이 넉넉해요.”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레일리의 눈이 호선을 그렸다.

루시테는 뛰어다니는 노이를 불러 의자에 앉혀 주었다.

“끙.”

갈수록 무거워지는 노이 때문에 노이를 들 때마다 신음이 절로 나왔다.

조금만 노이가 더 무거워지면 허리에 무리가 갈지도 몰랐다.

평소에는 노이를 그녀의 자리 맞은편에 앉혀 놓고 밥을 먹였지만 오늘은 그녀의 옆자리였다.

오늘 루시테의 맞은편은 손님이 차지할 예정이었다.

루시테는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식기를 하나 더 세팅했다.

루시테는 양상추를 원래 뜯으려 했던 양보다 조금 더 많이 뜯었다.

그리고 그녀가 직접 만든 사과 소스와 버무렸다.

루시테는 샐러드를 그릇에 먹기 좋게 옮겨 담아 그릇을 들고 막 테이블이 있는 쪽으로 향하려 했다.

그러다 레일리와 눈이 빤히 마주쳤다.

그는 테이블을 다 세팅해놓았는데도 앉지 않고 부엌과 응접실의 중간에 서서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꼭 음식 하는 모습을 보는 게 취미인 노이처럼.

레일리 역시 꽤 신기하다는 눈초리였다.

루시테는 그 모습에 살짝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노이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것과 레일리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것은 느낌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왜 저 사람은 항상 나를 저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 거야?’

루시테는 입술을 달싹였다.

“얼른 가서 앉으세요. 이제 다 됐어요.”

루시테는 레일리가 그녀를 그만 바라보기를 바라며 내뱉었지만.

“그러죠.”

레일리는 느릿하게 대답하며 그녀에게서 시선을 뗄 생각을 하지 않았다.

루시테의 기분이 조금 더 어색해졌다.

루시테와 레일리 그리고 노이는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았다.

루시테는 스푼으로 스튜를 조금 떠 입으로 가져가려다 말고 다시 내려놨다.

레일리가 먹을 생각은 하지 않고 음식을 신기한 듯 쳐다보고만 있었기 때문에.

“왜 안 드세요? 저, 그…… 드… 세요.”

“그래야죠.”

레일리는 루시테가 말을 하자 그제야 식기를 들었다.

루시테는 레일리가 몹시 신경 쓰여 식사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신경을 쓰고 싶어서 쓰는 게 아니라, 그의 행동이 자꾸만 루시테의 눈에 걸렸다.

양이 적어서 그런 걸까?

아니, 양이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요즘 노이가 하도 많이 먹어대는 바람에 루시테는 한 끼를 준비할 때마다 3인분 이상을 했다.

특히나 오늘 메뉴는 스튜라서 평소보다 물도 더 많이 넣고 끓였기에 넉넉할 터였다.

그렇다면 대체 왜 저러는 걸까.

레일리는 조심스럽게 샐러드를 한 입 먹더니 한참 생각을 했다.

그러고 나서는 스튜를 한 입 먹고 또 한참을 생각하고.

“혹시 음식이 입에 안 맞나요?”

루시테는 물으면서도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눈앞의 마법사는 마법에 문외한인 그녀가 보기에도 대단한 사람이었다.

레일리처럼 마법을 쉽고 대단하게 구사할 수 있는 마법사가 세상에 얼마나 되겠는가?

그런 사람이니 지위도 높을 터였고, 지위가 높은 만큼 부유하기도 하겠고.

집도 크겠고, 아마 부리는 사용인도 많을 것이라고 루시테는 생각했다.

분명 전용 요리사도 있겠고, 전문 주방장이 해준 요리는 그녀가 해준 서툰 음식들보다 훨씬 훨씬 맛있겠지.

루시테의 눈에 갑자기 자신이 한 요리들이 초라해 보였다.

이런 솜씨로 음식점을 내긴 개뿔. 내자마자 망할 게 뻔했다.

루시테는 갑자기 자신감이 뚝 떨어지며 풀이 죽었다.

“아뇨.”

“네?”

풀이 죽었던 루시테는 고개를 확 들었다.

“먹을 만합니다.”

레일리가 미소를 지었다.

루시테는 순간 멍한 표정으로 레일리의 얼굴을 쳐다봤다.

평소처럼 눈만 웃는 웃음이나, 시니컬한 웃음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약간 기분이 좋아 보였다.

성직자, 아니 꼭 천사처럼 생긴 얼굴로 은은한 미소를 지으니 레일리는 정말 성스러워 보였다.

진짜 예언의 성녀인 자신보다도 더.

루시테는 멍하니 레일리의 얼굴을 바라보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렇다니 다행이에요.”

루시테는 큼큼 헛기침으로 얼버무렸다.

작은 벽난로가 있는 루시테의 응접실은 적막했다.

반쯤 열어놓은 창문으로는 살랑살랑 봄을 알리는 바람이 불어 들어왔으며 환한 햇살이 실내를 비추었다.

실내 곳곳은 루시테의 손길이 닿아 아늑하고 따뜻했다.

루시테와 레일리는 조용히 식사했다.

간간이 노이가 그릇까지 집어삼킬 기세로 달그락대며 음식을 먹는 소리가 적막을 깨웠다.

루시테는 문득 고개를 들어 레일리를 바라보았다. 햇빛을 등진 검은 머리칼이 새삼스러웠다.

자신의 검은 머리칼은 그토록 저주스러웠는데 저 남자의 머리칼은 성스러워 보이니 이상한 일이었다.

검은 머리.

저주받은 색의 상징이었는데 저 남자는 검은 머리를 하고도 어쩜 저렇게 당당하고, 오만하고, 또 긍지 높아 보일 수 있을까.

“제 머리에 뭐가 묻었습니까?”

식사를하던 레일리가 루시테의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은빛 눈이 선득했다. 흩날리는 검은 머리칼 아래로 다이아몬드 같은 은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루시테는 눈길을 피했다.

“그러고 보니 어쩐 일로 오셨나요, 이곳에는요?”

루시테는 화제를 돌렸다.

루시테는 말을 내뱉어 놓고 나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생각해도 참 빨리도 물어본다고.

원래는 진작에 물어봤어야 했던 얘기인데, 그가 오고 나서 한참이 지나서야 이 소리라니.

요즘 정신이 없긴 없었던 모양이었다.

“별일은 아닙니다.”

레일리가 참 빨리도 물어본다는 얼굴을 하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저번 일도 있고 해서 당신을 보러 왔습니다.”

“저를요?”

“네.”

레일리가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루시테는 레일리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괜히 고개를 돌렸다.

무슨 목적일까.

‘설마 또 나를 본 적이 있다느니 하면서 떠보려는 건 아니겠지.’

루시테는 잊고 있던 사실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리고 불안해졌다.

레일리는 아무리 봐도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도무지 감이 안 잡혔다.

루시테는 미간을 좁혔다.

‘조심해야 해.’

그녀는 바짝 긴장한 채 몸을 굳혔다. 그제야 위기감이 불쑥 솟아났다.

루시테는 스푼을 내려놓고 남긴 음식을 노이에게로 밀어 주었다.

저 남자가 그녀의 정체를 떠보려 또 온 거라 생각하니 밥맛이 뚝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노이는 루시테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냉큼 루시테의 그릇을 받아 기다렸다는 듯 달그락거리며 음식을 먹어치웠다.

“너무 조금 드신 게 아닙니까?”

“괜찮아요.”

루시테는 걱정 어린 레일리의 물음에 딱 잘라 대답했다.

갑자기 그가 불편해지려 했다.

비록 그가 루시테와 노이의 생명의 은인이긴 하지만, 루시테는 결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정체를 밝힐 생각이 없었다.

생명의 은인인 레일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레일리는 처음부터 루시테의 저주에 대해 언급하고, 본 적이 있다느니 이상한 얘기를 한 요주의 인물이다.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주의해야 할 것은 주의해야 했다.

루시테의 눈빛에 레일리를 향한 경계심이 짙게 어렸다.

“저건 이 땅의 마지막 용입니다.”

레일리는 손가락으로 노이를 가리켰다.

그는 루시테의 태도가 바뀐 것 정도는 개의치 않으며 화제를 돌렸다.

“알고 있어요. 흑마법사 프레이즈도 노이더러 마지막 용이라고 그랬는걸요.”

루시테는 긴장을 풀지 않은 채로 딱딱하게 대답했다.

“이름을 지어주신 겁니까?”

“네, 노이테리온. 마지막 용에게 축복의 길이 펼쳐지라는 뜻이에요.”

“좋은 이름이군요.”

레일리가 부드럽게 눈을 접었다. 그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둥글게 휘었다.

“제가 저 녀석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오늘은 그 말을 하러 왔습니다.”

“당신이 노이에게 도움을 주신다고요?”

루시테는 놀라 레일리를 지그시 쳐다봤다.

‘수상쩍다.’

몹시 수상쩍어.

루시테는 어떻게든 레일리의 심경을 읽어보려 그를 빤히 노려봤다.

자신의 정체를 또 떠보러 온 줄 알았더니만 갑자기 노이에 대한 얘기라니.

‘나를 방심하게 만들려는 속셈인 걸까?’

아니면 흑마법사 프레이즈처럼 이제 와 노이를 노리는 걸지도 몰라.

루시테는 심각해졌다.

노이를 노리는 거라면 그건 그것대로 큰일이었다.

당장 노이를 데리고 다른 곳으로 이사라도 가야 할지도 몰랐다.

아니, 애초에 지금 레일리처럼 강한 마법사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루시테는 배를 두드리고 있는 노이를 안아 들어 제 무릎에 놓고 꽉 끌어안았다.

“뇽?! 뇽!”

노이가 깜짝 놀라 소리를 내다 곧 루시테의 품에 머리를 부볐다. 루시테는 노이를 더욱 꼭 끌어안았다.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넘겨주지 않는다는 듯 루시테의 눈에 강한 경계심이 어렸다.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마치 루시테를 안심시키려는 듯 레일리는 차분한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나 루시테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겉과 속이 다르게 대하는 사람들을 무수히 겪어보았다.

레일리가 아무리 저렇게 부드럽게 말한다 한들, 그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몹시 차가우며 일말의 따스한 감정도 없다는 것을 루시테는 읽어낼 수 있었다.

루시테는 레일리를 절대 믿을 수 없었다.

“제가 무엇을 오해하고 있나요?”

루시테는 딱딱하게 대꾸했다.

“저는 그 용을 어떻게 할 생각이 없습니다.”

“왜죠? 당신도 마법사잖아요. 드래곤 하트를 원할 수도 있잖아요?”

“그럴 리가요.”

레일리는 대답하며 픽 웃었다. 그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그는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 서늘한 은빛 눈으로 루시테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이 몹시도 나른하고 오만했다.

“저는 헤츨링의 드래곤 하트 따위로 강해질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강하니까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드래곤 하트가 필요 없을 정도로 강하다고?

그 무서웠던 흑마법사조차 노이의 심장이 갖고 싶어서 절절맸는데.

루시테는 레일리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반박 또한 할 수 없었다.

어쩐지 저 오만한 남자가 하는 말이, 믿을 수는 없었지만 또한 거짓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 것이다.

그의 당당함, 자신감, 자신의 힘에 대한 확신.

어쩌면 드래곤 하트가 필요없을 정도로 강하다는 말이 정말일지도 몰랐다.

“만약 도와주신다면……. 어떤 도움을 주신다는 건가요?”

“제 도움을 받아들일 생각이십니까?”

루시테의 물음에 레일리는 똑같은 물음으로 응수했다.

루시테의 표정이 날카로워졌다.

대체 레일리가 무슨 꿍꿍이속인지, 그걸 알고 싶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에게서는 아무런 생각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제게…… 뭘 원하시는 거예요? 노이를 어떻게 하실 생각이 아니라면 다른 목적이 있는 거죠?”

루시테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고로 세상에 대가 없이 베푸는 도움은 없었다.

분명 저 남자는 그녀에게 무언가 목적이 있는 게 틀림없다고 루시테는 확신했다.

“글쎄요.”

레일리는 팔짱을 풀고 의자에서 스윽 일어났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네?”

이건 또 무슨 황당한 소리란 말인가.

저렇게 꿍꿍이가 많아 보이는 인간 입에서 잘 모르겠다는 소리가 다 나오다니.

루시테는 당황하여 입만 뻐끔거렸다.

“제가 뭘 원하는지는 차차 알아볼 생각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

“이제 가야겠군요. 또 오겠습니다.”

“저기, 잠깐만요. 레일리…!”

레일리가 픽 입꼬리를 올렸다.

“다음에 올 때는 제가 무슨 도움을 드릴 수 있는지 직접 보여드리겠습니다, 의심 많은 아가씨.”

레일리는 말을 마치자마자 검지와 엄지를 부딪쳐 딱 소리를 냈다.

그의 발 아래로 빛나는 원이 그려지며 그가 순식간에 루시테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무, 무슨…….”

루시테는 놀라 말을 더듬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그녀의 앞에 있던 레일리의 흔적을 이제는 찾아볼 수조차 없었다.

완전히 깨끗이 사라진 것이다.

루시테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천천히 깜박였다. 루시테의 품에서 덩달아 놀란 노이도 눈을 끔벅거렸다.

“이…… 이상한 남자야. 정말.”

루시테는 작게 중얼거렸다.

결국 그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오늘 왜 찾아온 것인지, 그의 목적이 무엇인지.

짧은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잠시 멍하니 있던 루시테는 일어나 식기를 치울 준비를 했다.

“어.”

루시테는 레일리의 그릇을 치우려다 말고 멈칫했다. 그의 접시가 깨끗했다.

“먹을 만하다더니…….”

그의 입맛에 꽤 맞았던 모양이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녀가 한 음식을 누군가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니.

루시테는 네 번의 생을 살면서 다른 사람에게 식사를 대접한 적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그녀가 직접 만든 음식으로.

물론 노이는 제외다. 사람이 아니니까.

아무튼 그런 루시테의 음식을, 언제나 진귀한 음식만 먹고 살았을 법한 대단한 능력의 마법사가 남기지 않고 다 먹어주다니.

솔직히. 루시테는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루시테는 레일리의 빈 그릇을 치우다 저도 모르게 픽 웃고 말았다. 기분이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다.

사실은 꽤 기분이 좋았으니까.

* * *

“하아…….”

루시테는 광장의 벤치에 앉아 고개를 뒤로 푹 젖혔다.

광장의 한 가운데 있는 커다란 분수에서 시원하게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발치에는 식료품이 가득 담긴 장바구니가 한 짐, 그리고 책이 여러 권 담긴 배낭이 한 짐이었다.

분수를 바라봐도 속이 뻥 뚫리지 않고 여전히 답답했다.

“일이 너무 많아…….”

루시테는 조금 전 이반의 서점에서 조금 더 많은 양의 일을 해줄 수 없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온 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서점의 일을 좀 더 하고 싶었다.

그러면 혹시 모를 미래에 대비도 하고 좀 더 여윳돈을 쌓아둘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럴 형편이 못 됐다.

계획한 건 많은데 그중 단 하나도 제대로 끝내지 못했을 정도로 루시테는 허덕이고 있었다.

바빠도 너무 바빴다.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집수리하랴, 청소하랴, 두 식구의 세 끼 밥 챙기랴, 번역하랴.

밤을 꼬박 새더라도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고용인이 한 명 있다면 좋을 텐데.”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사람을 한 명 고용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또 그런 형편이 되지 않았다.

일단 노이도 문제였고, 그녀 자신도 문제였다.

노이를 도마뱀이라고 둘러대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세상에 저렇게 뚱뚱하고 크고 날개 달린 도마뱀이 어디 있겠는가?

드래곤이라는 걸 알고 보니 노이는 그녀가 도마뱀이라고 오해했던 게 무색하게도 너무도 드래곤의 특성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노이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만약 고용인이 악용한다면?

루시테는 그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었다.

게다가 자신만 놓고 보더라도 어린 소녀의 모습인데.

집에서 계속 답답하게 두건을 둘러쓰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그녀가 15세의 외양에 집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용인이 제국에 고발이라도 한다면…….

그녀는 산 중턱 하우스의 소유권을 빼앗길지도 몰랐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하아…….”

루시테는 머리를 짚었다. 고민이 많아졌다.

위험부담이 컸지만 또 그렇다고 고용인을 들이는 것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지금이야말로 너무도 일손이 필요한 때이니까.

‘레일리.’

문득 그 오만한 남자의 검은 머리칼과 서늘한 은빛 눈동자가 떠올랐다.

‘그 남자라면 믿을 만한 사용인을 구해줄 수 있을지도…….’

“그 남자라면…….”

핫!

루시테는 레일리를 생각하다 말고 고개를 번뜩 들었다.

‘내가 왜 그 사람을 떠올리는 거야?!’

루시테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그 누구보다 믿을 수 없는 남자인데, 그에게 믿을 만한 사용인을 소개해 달라고 부탁한다니.

요즘 너무 힘든 나머지 잠시 넋이라도 놓은 모양이었다.

루시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끙.”

배낭을 짊어지려 하니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장바구니를 챙기기 전 루시테는 바구니 안에서 동전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 안에서 동전들이 짤랑거렸다. 1 실링부터 10 실버까지.

루시테가 예산일지를 꼼꼼히 작성하여 미리 빼놓은 한 달 식료품비였다.

“좋아, 이 정도면.”

루시테는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나름대로 알뜰하게 잘 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번 돈으로 생활하니 더 보람찼다.

“이봐, 비켜! 비키라고!”

갑자기 누군가 루시테의 어깨를 퍽 쳤다.

“아얏!”

루시테는 몸을 휘청거렸다.

루시테가 고개를 들자 빵모자를 쓴 까무잡잡한 꼬마가 앞으로 달려가다 말고 루시테를 쳐다보곤 혀를 내밀었다.

‘베에, 약 오르지?’

꼬마의 비웃는 눈빛이 루시테를 향해 꼭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뭐야?!”

루시테는 황당했다. 그리고는 곧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없어!”

그녀의 손에 들려 있어야 동전 주머니가 없었다.

“이런…!”

루시테의 눈썹이 휙 치켜 올라갔다. 이런 건방진 꼬맹이!

루시테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꼬마를 뒤쫓아 달리기 시작했다.

돈주머니를 되찾을 생각이 급해 식료품을 잔뜩 산 장바구니를 내버리고 가는 줄도 몰랐다.

꼬맹이의 뒤를 쫓아 미친 듯이 달리는 루시테의 뒤 저 멀리 광장에 장바구니가 덩그러니 나뒹굴었다.

“잡히면 가만 안 둬!”

루시테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렸다.

루시테도 꽤 재빠른 편이었으나 무거운 배낭 때문에 꼬마를 따라잡기가 힘들었다.

‘소매치기라니!’

그게 어떤 돈인데.

루시테는 이를 악물었다.

그 꼬마를 반드시 잡아 혼쭐을 내주고 빼앗긴 돈을 되찾아오고 말리라.

루시테는 미친 듯이 다리를 놀리며 다짐 또, 다짐했다.

루시테의 시선은 꼬마의 빵모자에 꽂혀 있었다.

그녀는 조금도 뒤처지지 않으며 빵모자 꼬마의 뒤를 따라 달렸다.

조금만 더 달리면 거의 따라잡을 수 있을 듯했다.

“치잇!”

꼬맹이가 연신 뒤를 돌아보며 혀를 찼다.

루시테가 이렇게 달리기가 빠를 거라곤 예상치 못한 모양이었다.

좀도둑 꼬마 녀석이 인파 사이로 숨어들라치면 루시테가 재빨리 따라붙어 잡을 듯 말 듯 꼬마의 뒤를 따라 달려왔다.

루시테는 지치지도 않고 눈에 불을 켜고 좀도둑 녀석을 잡기 위해 손을 뻗어왔다.

루시테는 거친 숨을 내쉬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좀 힘들긴 했지만 달리기를 멈춰야 할 정도로 힘들지는 않았다.

루시테 본인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바로 루시테의 체력이 그간 어마어마하게 단련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거의 일주일에 세네 번은 그 높은 산 중턱을 오르내렸다.

그것도 그냥 오르내렸느냐? 아니다.

등에는 그녀의 몸집만한 배낭을 메고, 양팔로는 산더미 같은 식료품을 들고 산 중턱을 올랐다.

그뿐이랴, 루시테는 집 안에서도 가만히 있는 게 아니었다.

집안 살림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을 그녀 혼자서 꾸려가야 했다.

그렇기에 온종일 가만히 앉아 있는 시간이 드물 정도로 움직였다.

이른 아침부터 장작을 패고, 정원을 가꾸기 위해 조금씩 마당을 고르고, 아침 식사 준비를 하고, 집 안 청소를 하고, 점심 식사를 준비하고, 번역과 필사를 하고, 저녁 식사를 하고. 중간중간 노이와 놀아주고.

이 모든 일을 루시테는 혼자서 다 했다.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해내지 못할 일이었다.

하지만 좀처럼 좀도둑 꼬마를 잡을 수는 없었다.

루시테도 재빨랐지만 좀도둑 꼬마 역시 잡히지 않으려 죽기 살기로 달렸기 때문에.

“크윽! 그만 좀 쫓아와! 이 찰거머리 같은 녀석아!”

좀도둑 꼬마가 지긋지긋하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며 빽 소리쳤다.

“너나 그만 좀 도망가!”

루시테도 지지 않고 빽 소리쳤다.

그때 갑자기 어디에선가 철컹 문이 열리는 큰 소리가 났다.

그리고 좀도둑 녀석이 달려서 도망가는 바로 그 근처로 여러 사람이 문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은빛 갑옷을 입은 한 무리의 기사들이었다.

좀도둑은 얼굴이 사색이 되어 급하게 방향을 틀려 했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좀도둑은 그대로 맨 앞에 있는 기사와 부딪혔고, 루시테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크게 소리쳤다.

“그 녀석! 잡아주세요! 제발요!”

기사가 루시테의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다.

“으악! 젠장! 이거 놔!”

좀도둑이 기사에게 붙잡힌 채로 버둥거렸다.

“하아… 하아…….”

루시테는 기사에게 힘겹게 다가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마에 맺힌 땀이 뚝뚝 떨어졌다. 어깨가 내려앉고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정말 감사…… 헉!”

루시테는 몸을 휘청거렸다.

책이 들어 있는 배낭의 무게 때문에 순간적으로 몸이 옆으로 기운 것이다.

“이런. 조심해야지.”

커다란 손이 루시테의 팔뚝을 확 낚아챘다.

뜨거운 체온이 루시테의 두터운 로브를 넘어 그대로 와 닿았다.

루시테는 커다란 손에 매달려 고개를 들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이었다.

그리고 사납게 치켜 올라간 눈썹과 그 아래 사파이어 같은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

“헉…!”

루시테는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몸을 휘청였다. 루시테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어갔다.

그녀는 거의 경기를 일으키듯 남자에게서 붙들린 팔을 마구 털었다.

“왜 그러지?”

남자는 의아하다는 듯 푸른 눈동자를 굴렸다. 그는 순순히 루시테의 팔을 놔주었다.

루시테는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남자를 올려다봤다.

‘이안!’

루시테의 팔이 덜덜 떨렸다.

그녀는 쉼 없이 눈을 깜박였다.

다시 보니 이안은 아니었지만, 너무나 닮은 모습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녀의 이복동생이자 메이븐의 황태자인 이안 바텐베르크 클라우디오와 눈앞의 기사가 계속 겹쳐보였다.

“이봐. 어디가 아픈 건가?”

기사가 루시테를 향해 한걸음 다가왔다.

루시테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러다 다리가 꼬여 바닥에 주저앉았다.

책이 가득 들어 있는 배낭이 땅바닥에 부딪히며 쿵 소리가 났다.

그러든 말든 붉은 머리 기사에게 고정되어 있는 루시테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야. 이놈 좀 잡고 있어 봐라.”

기사가 그의 뒤에 정렬한 다른 기사에게 소매치기 소년을 우악스럽게 떠넘겼다.

기사는 소매치기 소년을 다른 기사에게 맡긴 후 주저앉아 있는 루시테에게 다가왔다.

그는 그녀의 앞에 풀썩 쭈그리고 앉아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그는 예고도 없이 그녀를 향해 손을 쭉 뻗었다.

루시테가 뭘 어찌 대응해 볼 틈도 없었다.

그녀가 땀을 흘리면서도 꿋꿋이 덮어쓰고 있던 두건이 그의 손에 훌렁 벗겨졌다.

붉은 머리 기사의 앞에 루시테의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칼과 밤하늘처럼 검은 눈동자가 그대로 드러났다.

“너…….”

기사의 사나워 보이는 눈썹 한쪽이 휙 치켜 올라갔다.

“그, 그게…….”

루시테는 말을 더듬었다.

아무리 이크릭스 제국민들이 검은 눈을 차별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이곳에서도 검은 머리칼과 눈동자는 드물긴 마찬가지였다.

특히 눈동자.

루시테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자신과 같은 검은 눈동자를 가진 사람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너.”

붉은 머리 기사가 손을 뻗어 루시테의 머리를 만졌다.

그의 손이 루시테의 머리 정수리에서부터 아래로 머리칼을 타고 떨어졌다.

루시테는 감히 기사의 손을 치우지도 못하고 덜덜 떨기만 했다.

이안과 닮은 얼굴, 이안과 같은 새파란 눈동자 앞에서 루시테는 속수무책이었다.

붉은 머리 기사가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한 줌밖에 안 되는 그녀의 조그만 얼굴이 그의 손짓에 따라 들어 올려졌다.

수많은 생각이 루시테의 머릿속에서 휘몰아쳤다.

버러지 보듯 그녀를 보던 이안의 차가운 눈빛.

단 한 순간도 비난과 경멸을 빼놓지 않았던 이안의 날카로운 말.

‘내, 내가 거기를 어떻게 벗어났는데.’

어떤 용기로 그곳을 빠져나왔는데.

여기에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이안과의 조우는 루시테를 몹시 당황하게 만들었다.

아니, 저 사람은 이안이 아니다.

이안이 아니라 그냥 닮은 사람이라 생각하는데도 루시테는 혼란의 도가니 속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루시테의 몸이 비 맞은 강아지처럼 부들부들 떨렸다.

붉은 머리 기사 세드릭 디에고는 루시테가 떨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루시테를 놓아주지 않았다.

검은 머리. 그 머리칼이 기사의 시선을 붙잡았다.

짙은 고동색 머리칼을 가졌던 그의 어머니와 이 어린 소녀가 순간적으로 겹쳐 보였던 탓이었다.

그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의 새파란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깊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너…….”

그가 무언가 루시테에게 말을 하려고 했다.

“루시 양.”

그때 목소리가 들리는 것과 동시에 흰 빛무리가 루시테의 바로 옆 발밑에 나타났다 잔상처럼 사라졌다.

뒤이어 커다랗고 서늘한 손이 나타나 떨고 있는 루시테의 팔뚝을 붙들어 세웠다.

그 손길이 이끄는 대로 일으켜 세워진 루시테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붙들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봤다.

높이 뜬 태양 아래 남자의 검은 머리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흰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루시테는 가면 아래 당당한 은빛 눈동자가 있을 거라고, 그녀가 아는 수려한 얼굴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레일리. 다시 찾아오겠다더니 이 주가 넘도록 감감무소식이던 그 남자가 갑자기 나타났다.

제 손이 강제로 떼어진 셈인 붉은 머리 기사가 벌떡 일어나더니, 레일리를 보곤 눈을 사납게 떴다.

“아사드 공! 저택에 계셨던 겁니까?”

“레일…!”

루시테가 부르려던 레일리의 이름은 붉은 머리 기사의 벼락같은 외침에 묻혔다.

그는 사나운 눈으로 레일리를 노려보았다.

“아아. 들켰군그래.”

레일리가 별것도 아니라는 투로 툭 내뱉었다.

“아사드 공! 저는 황제 폐하의 명을 받고 온 것이라고 분명 전했습니다만, 듣지 못하신 겁니까?”

“못 들었는데.”

“어째서 못 들으셨다는 겁니까? 저는 집사에게 전달했습니다!”

레일리는 붉은 머리 기사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 오히려 루시테에게 말을 걸었다.

“루시 양, 괜찮습니까?”

루시테는 불안한 눈빛으로 레일리와 붉은 머리 기사를 번갈아 보았다.

붉은 머리 기사는 몹시 화가 나 보였다.

그러나 레일리는 그를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고 루시테만 쳐다보았다.

“루시 양, 왜 여기에 계신 겁니까?”

레일리가 루시테의 두건을 들어 씌워주며 다시 물어왔다.

“아.”

루시테는 그제야 자신이 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를 떠올렸다.

부들부들 떨리던 몸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루시테는 다른 기사 한 명에게 포박당해 씩씩거리는 소매치기 소년을 한 번 보았다.

그리고 시선을 돌려 붉은 머리 기사를 쳐다보았다.

시리도록 푸른 눈과 이안을 닮은 곧은 눈썹, 수려한 외모.

그녀의 몸이 또 저도 모르게 흠칫 떨리려 했다.

‘아니야. 정신 차려, 루시테.’

이 사람은 그냥 닮은 사람이잖아.

루시테는 주문을 외듯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루시테는 눈을 몇 번이나 감았다가 뜨고, 꽉 마주 잡은 손을 주물렀다.

“안녕하세요, 레일리.”

루시테는 마침내 입을 열어 레일리를 향해 담담한 인사를 건넸다.

“꼬마, 너 마법사와 아는 사이였구나.”

레일리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붉은 머리 기사가 루시테를 향해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레일리와 루시테를 쳐다보는 그의 기세가 흉흉했다. 레일리 때문에 몹시 화가 난 것 같았다.

“루시 양은 내 손님이니 백작은 빠지는 게 좋겠군.”

레일리가 루시테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아뇨.”

붉은 머리 기사가 으르렁거리며 루시테와 레일리의 코앞까지 성큼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가 빠른 속도로 루시테의 팔을 낚아채 잡아당겼다.

“백작, 지금 뭐 하자는 건가?”

레일리가 루시테의 어깨를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꽉 잡았다.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얼떨결에 루시테는 레일리와 붉은 머리 기사 모두에게 붙들린 이상한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이 꼬마가 아사드 공과 아는 사이인지는 모르겠으나. 오늘 볼일이 있는 건 저일 겁니다.”

붉은 머리 기사가 한 자 한 자 씹어 뱉듯 말을 내뱉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레일리가 눈썹을 비뚜름하게 올렸다.

지금 그와 대치를 하고 있는 모양새가 몹시 레일리의 심기를 건드리는 듯했다.

“말 그대로입니다만. 네가 말해 봐라, 내 말이 맞는지.”

붉은 머리 기사가 루시테를 자기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붉은 머리 기사의 힘이 어찌나 센지 루시테는 레일리의 품에서 빠져나와 붉은 머리 기사에게 확 안겼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안겼다기보다는 배에 부딪혔다고 해야겠지만.

“아얏!”

루시테는 얼굴로 붉은 머리 기사의 배에 들이받고는 놀라 비명을 질렀다.

붉은 머리 기사가 배 부분까지 철제 갑옷이 아니라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갑옷에 루시테의 얼굴이 그대로 깡 소리가 나게 부딪혔을지도 몰랐다.

“아이고…….”

루시테는 앓는 소리를 했다.

아무리 기사가 배 부분까지 깡통 갑옷이 아니라 해도 아픈 건 아픈 거였다.

기사의 배는 무슨 돌덩어리라도 되는 마냥 딱딱했으니까.

그의 복부에 부딪힌 루시테는 이마에 얼얼한 통증을 느꼈다.

“꺅!”

루시테는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또 비명을 질렀다.

붉은 머리 기사가 루시테의 양어깨를 잡아 그의 앞에 똑바로 세웠기 때문에.

“네가 말해 봐라.”

“뭐, 뭘 말이에요?”

루시테는 초점을 찾기 위해 눈을 깜박였다. 루시테는 눈을 찡그렸다.

내리쬐는 햇빛에 눈이 부셨다. 높이 뜬 태양이 붉은 머리 기사 바로 위에서 뜨거운 빛을 내리쬐었다.

역광 아래 붉은 머리 기사의 얼굴이 흐릿해 보였다. 그 가운데 그의 푸른 눈동자만이 선명하게 번뜩이며 시린 빛을 뿌렸다.

“네가 내게 저놈을 잡아 달라고 소리쳤지 않나?”

저놈이 소매치기 소년을 가리키는 것임을 루시테는 어렵지 않게 인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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