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8)

4.

“네에. 맞아요.”

루시테는 너무도 눈이 부셔 가늘게 눈을 뜨곤 대답했다.

“네가 볼일이 있는 건 내가 맞지 않나? 저놈을 내가 붙잡고 있으니.”

“네, 네에. 맞아요.”

붉은 머리 기사는 루시테가 두 번째로 긍정의 대답을 하자 레일리를 향해 고개를 확 들었다.

“들었습니까? 아사드 공. 이 소녀는 공의 손님이 아닙니다. 저와 볼일이 있는 사이이지. 이제 이 소녀에 대한 관심은 접으시고 공이 왜 집에 있으면서 나오지 않은 건지나 설명해주겠습니까?”

붉은 머리 기사가 위협적인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그는 마법사 레일리 아사드에게 몹시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그는 어떻게든 레일리 아사드에게 황명을 전달할 생각뿐이었다.

더 이상 황제가 자신에게 이 일로 성가시게 구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기분이 더러운 건 레일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보기 드물게 구겨진 얼굴로 붉은 머리 기사, 세드릭 디에고를 응시하고 있었다.

북풍한설처럼 싸늘한 그의 눈빛이 세드릭 디에고를 벌레 보듯 바라보았다.

당장이라도 깔아뭉개버리고 싶은 벌레.

“백작, 그보다 루시 양이 볼일이 있다는 저 소년에 대해서 궁금한데.”

레일리는 한 마디 한 마디 뚝뚝 떨어지는 서리처럼 싸늘하게 내뱉었다.

레일리는 결코 세드릭 디에고가 원하는 답을 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루시테를 향하고 있었다.

“당신이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만? 공은 황제 폐하의 명에 따라 폐하를 알현하러 와야 합니다. 언제까지 제가 공을 부르러 똥개 훈련하듯 왔다 갔다 해야 하는 겁니까?”

“나는 바쁘다고 분명히 뜻을 전했다. 당분간 아무 일도 받지 못해.”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세드릭 디에고는 반말과 존댓말을 오가며 레일리의 화를 돋웠다. 둘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황제 폐하의 명입니다. 그쪽이 집에 안 계신다기에 집사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런데 못 들으신 것 같으니 당장 집사를 끌어내 처벌해야겠군요.”

세드릭이 딱딱하면서도 단호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내 집에서 감히 내 사람을 공격하겠다는 건가?”

레일리는 서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분위기가 몹시 안 좋았다.

기사는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들 기세였고.

척 봐도 심기가 불편해 보이는 레일리는 바로 기사에게 잔인한 살상 마법이라도 쏠 것 같은 분위기였다.

루시테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 건지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좀도둑을 붙잡아준 건 고마운데 왜 갑자기 레일리가 튀어나온 거란 말인가.

설마 하필이면 저 집이 레일리의 집이었던 건가.

길 옆으로 길고 흰 담벼락이 있었고 그 너머로 높다란 저택이 보였다.

저 곳이 정말 레일리의 집이라면 저 붉은 머리 기사와 레일리의 대화가 모두 이해가 되는 바였다.

보아하니 레일리가 집에서 없는 척을 하다가 하필 그녀가 와 있는 것을 보고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것 때문에 붉은 머리 기사가 저렇게 씩씩거리는 걸 테고…….

루시테는 한숨을 삼켰다.

재수 없게도, 생각지도 못한 개싸움에 낀 것만 같았다.

“저, 저기! 잠시만요!”

루시테는 확 몸을 빼 붉은 머리 기사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순간 모든 사람의 시선이 루시테에게 향했다.

“뭐지? 꼬마.”

붉은 머리 기사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루시테를 사납게 쳐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루시 양.”

레일리는 루시테를 향해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나 루시테는 레일리의 눈이 하나도 웃고 있지 않으며, 언제나처럼 온기 한 톨 없이 싸늘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둘의 기세가 사나웠다.

사나운 시선과 기세 아래에서 루시테는 주눅이 들었다.

붉은 머리 기사에게 잡혔던 양어깨는 불에 덴 듯 욱신거렸다.

그 아픔이 루시테를 더 정신이 번쩍 들게 했다.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그녀를 지배했다.

돈 주머니를 되찾는 거고 뭐고, 더 있다간 으르렁대는 기사와 마법사 사이에서 가장 먼저 그녀 자신이 피가 말라 죽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이곳을 벗어나는 것.

“제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요!”

루시테는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아마 싸움이 났다간 제일 먼저 다치는 건 자신이 되겠지.

루시테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 되기 전에 그냥 빨리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너무 급해서 당장 가봐야 할 것 같네요! 그럼 상관없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루시테는 그 말을 끝으로 뒤로 돌아 냅다 달렸다. 처음에 달려왔던 방향으로, 말 그대로 36계 줄행랑.

둘이 싸우면 싸웠지, 이 상황에 가만히 있던 루시테가 갑자기 도망칠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기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졌다.

마법사 레일리와 화이트 울프 기사단의 단장 세드릭 디에고, 그리고 그의 수하들과 수하에게 잡힌 좀도둑 소년.

그들은 모두 루시테가 줄행랑을 치는 뒷모습을 황망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한참 루시테의 발이 얼마나 빠른지를 멍하니 관람해야 했다.

* * *

“헉, 헉…….”

루시테는 산 중턱 하우스에 돌아와 거친 숨을 내쉬었다.

도착하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은 그녀에게서 비 오듯 땀이 쏟아졌다.

어찌나 두려웠는지 루시테는 그 긴 거리를 쉬지도 않고 달려왔다.

다리가 아프고 호흡이 가빠 달리기를 멈추고 잠깐잠깐 걸었을 때조차 루시테는 주저앉거나 호흡을 가다듬거나 하지 않았다.

조금 괜찮아지기만 하면 다시 달려 죽기 살기로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노이는 루시테가 그런 줄도 모르고 위층 루시테의 이불 속에서 태평하게 낮잠이나 자고 있었다.

“하……. 대체 뭐야? 그 사람들.”

루시테는 혼란스러움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괜한 일에 낀 것 같다는 느낌이 떨쳐지지 않았다.

가만히 길을 가다 똥을 밟았을 때의 그 더러운 기분…! 딱 그런 느낌이었다.

“레일리는 왜 갑자기 나타나서는…! 그리고 그 남자.”

이안과 닮은 남자.

루시테는 질끈 눈을 감았다.

성격은 또 어찌나 불같던지. 뭔지는 몰라도 다시는 마주치지 않는 것이 그녀의 신상에 이로울 것만 같았다.

그 붉은 머리 기사는 레일리에게 황명을 전해야 하는 임무를 맡은 것 같았고, 레일리는 그 기사의 임무를 무시하는 상황인 것 같았다.

레일리가 그 기사를 발가락의 때만큼도 안 되게 여긴다는 것은 그 상황을 잠깐 겪었을 뿐인 루시테가 봐도 알 수 있었다.

“내가 미쳤지.”

루시테는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잠깐이라도 레일리를 만나서 반가웠던 마음을 생각하면 스스로 꿀밤을 백 대라도 때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레일리가 그렇게 위험한 남자인 줄 알았으면 더 조심할 것을.

위험하기 짝이 없는 데다 다른 위험까지 덤으로 불러들이는 남자가 아니던가.

레일리 그 수상한 마법사는 폭풍을 넘어선 태풍이었다. 다른 거센 바람을 끌어들여 더 위험해지는 태풍의 눈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였다.

“상종을 말아야지.”

둘 다.

루시테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으읏!”

루시테는 배낭을 내려놓다 말고 작게 비명을 질렀다. 이안을 닮은 그 남자가 잡았던 어깨가 욱신거렸다.

루시테는 배낭을 내려놓고 비척비척 거울 앞으로 갔다. 거울 앞에 선 그녀의 꼴이 엉망이었다. 그녀는 위쪽 단추를 풀고 옷을 살짝 내려 보았다.

“세상에.”

그 남자가 잡았던 자리에 빨갛게 손자국이 나 있었다. 어찌나 세게 쥔 건지 멍이 제대로 든 것 같았다.

“으으.”

루시테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무서운 인간.

집으로 돌아온 지금도, 이안을 닮은 그 남자가 제 두건을 벗겼던 것만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다.

이크릭스에 온 이상 아무도 그녀의 눈동자나 머리칼이 검다고 차별하지 않을 텐데도 루시테는 두려웠다.

이안을 닮은 그 얼굴과 시린 눈동자를 가진 그 남자가 자신의 맨얼굴을 마주했다는 것이.

이안이 금방이라도 화를 낼 것만 같았다.

저주받은 네가 감히 거리를 돌아다닌다고.

똑바로 저를 쳐다본다고.

눈을 피해도 화를 내고, 똑바로 마주 봐도 화를 내던 이안이 이크릭스까지 따라와 그녀를 괴롭게 하려는 줄만 알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루시테는 오한이 들어 견딜 수가 없었다.

겨우 용기를 내 모든 것을 떨치고 왔다. 다시는 그 생활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이안과 닮은 그 붉은 머리 남자도.

“상종하지 않는 게 답이야.”

뭐든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건 다 불편했다.

루시테는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렇게 하면 저주로 점철된 과거의 삶들이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 * *

“하아…….”

루시테는 심각한 얼굴로 동전을 셌다.

동전 주머니를 되찾지 못하고 온 바람에 다음 달 예산에서 미리 꺼내 쓸 수밖에 없었다.

어제 밖에 나가서 제대로 챙겨온 거라곤 책이 든 배낭 하나뿐이었다.

그나마 그거라도 챙겨 와서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이 많은 책을 큰돈을 주고 물어줄 뻔했다.

잃은 것들뿐이었다.

잔뜩 산 식료품 바구니를 광장에서 잃어버리고, 돈주머니를 소매치기당하고.

거기다 이안과 기분 나쁠 정도로 닮은 기사를 만나고.

“어쩌지.”

루시테는 머리를 싸맸다.

웬만하면 이번 주는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조용히 있고 싶었으나 식재료가 없었다.

노이는 뱃속에 거지가 들었는지, 밥을 안 주면 문짝이라도 뜯어먹으려 할 것이다.

루시테는 돈을 챙겨 나갈 채비를 했다. 뭐라도 사 와야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루시테는 평소보다도 더 모자를 푹 눌러쓰고 광장으로 나왔다.

설마 이 넓은 아테라에서 그 사람들을 또 마주치기야 하겠느냐만, 또 괜한 일에 얽힐까 봐 불안했으니까.

루시테는 몸을 움츠린 채로 빠르게 걸었다.

그녀의 삶의 목표는 얇고 길게 사는 것이었으므로 그런 사람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는 게 상책이었다.

이 한 목숨 보전하고 질기게 이어나가 보겠다는데 누가 참견할쏘냐.

만약 다음번에 레일리가 그녀의 집으로 찾아온다면, 루시테는 다시는 오지 말아 달라고 단호하게 부탁할 생각이었다.

루시테는 원 없이 장을 보았다.

이왕 잃어버린 김에 장바구니도 크고 튼튼한 것으로 두 개나 새로 샀다.

양손 가득 식료품 바구니를 들고 있으니 부자가 된 것만 같았다.

장을 보는 내내 어제의 그 무리 중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루시테는 집에 돌아올 때쯤 되자 꽤 나쁘지 않은 기분이 되어 있었다.

지금보다 조금만 더 조심해서 산다면 그녀의 꿈인 ‘가늘고 긴’ 인생을 살 수 있으리라.

“끙차.”

루시테는 양어깨에 매인 장바구니를 고쳐 매고서 산 중턱 하우스로 가는 길로 직진했다.

그런데 그녀가 막 산 중턱 하우스를 살 수 있도록 도와준 부동산 업소를 지나가는 길이었다.

“?!”

루시테는 놀라 걸음을 멈췄다.

빨간 머리의 남자가 때마침 부동산 업소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딸랑 문이 닫히며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설마, 설마.’

루시테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루시테는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뛰기 시작했다.

세상천지에 빨간 머리가 한둘이겠냐만, 루시테는 왠지 기분이 쎄했다.

“에이.”

‘아니겠지.’

루시테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안했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왠지 그래서는 안 될 것 같았다.

“후…….”

루시테는 산 중턱 하우스로 가는 길의 초입에 들어서서야 한숨을 돌렸다.

그녀는 더 이상 뛰지는 않았지만 산을 오르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저 멀리로 그녀의 집 앞마당이 보였다.

자갈과 잡초투성이 마당은 여전히 엉망진창이었지만 오늘따라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루시테는 가쁜 숨을 삼키며 힘차게 오르막길을 마저 올랐다.

그녀는 집 문 앞에 도착하여 열쇠를 꺼내기 위해 주머니를 뒤졌다. 그런데 바로 그때.

누군가 그녀의 바로 뒤에서 그녀의 어깨를 콱 잡았다.

“이봐.”

“꺄아아아아아악!”

루시테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새된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들고 있던 열쇠를 바닥으로 떨어뜨리며 다리가 꼬여 몸을 크게 휘청였다.

매고 있던 장바구니 안에서 과일과 채소 따위가 우르르 떨어졌고 그녀의 몸 역시 바닥으로 훅 기울어졌다.

그러나 커다란 손은 그녀가 바닥에 주저앉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녀의 어깨를 붙잡은 괴한은 재빨리 루시테의 허리를 받쳐 안았다.

“조심.”

낮고 굵은 목소리가 루시테의 귓가로 떨어져 내렸다.

루시테는 눈을 깜박였다. 허리에 닿아있는 팔의 온기가 뜨거웠다.

허리를 받치고 안긴 상태로 눈을 드니 사파이어 같은 푸른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붉은 머리 기사. 이안과 닮은 그였다.

루시테는 남자의 정체를 눈치채자마자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이, 이거 놔요!”

루시테가 물 밖으로 튀어나온 물고기처럼 퍼득퍼득 발버둥치자 붉은 머리 기사는 순순히 그녀를 놔주었다.

붉은 머리 기사의 시선이 루시테의 팔에 닿았다. 루시테는 애처로울 정도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안과 과거에 대한 끔찍한 기억들로 인한 반사적인 반응이었으나, 붉은 머리 기사가 그것을 알 턱이 없었다.

그는 잠시 루시테를 쳐다보더니 무릎을 쭈그려 장바구니에서 떨어진 과일과 채소 따위를 줍기 시작했다.

루시테는 휘둥그레진 눈을 쉼 없이 깜박였다.

좀 지나고 나서야 놀란 가슴이 조금 진정되면서 천천히 침착을 되찾을 수 있었다.

“여긴……. 무슨 일이에요? 어떻게 알고 온 거죠?”

루시테는 나지막이 물었다.

붉은 머리 기사는 떨어진 식재료를 줍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을 보자 루시테의 심장이 또 벌렁거렸다.

이안, 그 녀석과 닮아도 너무 닮은 얼굴이었다.

품에 한 아름 식재료를 안은 붉은 머리 기사는 루시테가 멘 장바구니를 빼앗았다.

그는 그 안에 식재료를 도로 집어넣고 루시테의 다른 쪽 어깨에 있는 장바구니도 빼앗았다.

붉은 머리 기사가 툭 말했다.

“짐 옮기는 걸 도와주지.”

루시테는 그제야 그가 제 장바구니를 다 빼앗아 간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아, 네에.”

루시테는 바보처럼 대꾸하다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집 안에는 노이가 있었다. 마지막 드래곤 노이.

황실의 기사라면 노이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알아볼지도 모르는데.

“괜찮, 괜찮아요! 제가 들 수 있어요!”

“뭐?”

붉은 머리 기사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

“돌려주세요…….”

루시테는 주눅이 들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나 루시테의 거절에도 짐을 들어다 주겠다는 기사의 의지는 확고했다.

“거절할 필요 없다. 내가 놀라게 했으니 들어다 주겠다.”

“…….”

어떡하지. 어떡하지!

루시테의 작은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잠시! 잠시만 기다리고 계세요. 집이 어질러져서!”

루시테는 뒤로 홱 돌아 문손잡이를 돌렸다.

철컥 철컥.

그런데 녹슨 문이 열릴 생각을 안 했다.

“여기 있다, 열쇠. 떨어뜨렸더군.”

루시테의 어깨 위로 붉은 머리 기사가 팔을 쭉 뻗어 루시테의 앞에 있는 문손잡이에 대신 열쇠를 꽂아 넣었다.

루시테는 자신의 머리 위로 붉은 머리 기사의 호흡을 느꼈다.

심장이 계속해서 세차게 뛰었다. 이러다간 심장이 멈춰서 죽어 버릴지도 몰랐다.

“가, 감사해요! 하지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발요!”

루시테는 버럭 외쳤다. 너무 긴장하고 입안이 말라서 그런지 쉰 목소리가 났다.

“그러지.”

붉은 머리 기사가 순순히 대답했다.

루시테는 집에 들어가자마자 부엌에서 치즈와 빵 덩어리 따위를 챙겨 위층으로 올라갔다.

쿵쿵쿵쿵!

어찌나 급하게 계단을 오르는지 루시테의 발소리가 크게 울렸다. 계단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삐걱거렸다.

노이는 낮잠을 자다 이제 막 일어난 모양이었다.

루시테의 침대 위에서 창 너머로 들어오는 노을빛을 받으며, 녀석이 짧은 팔로 눈을 비볐다.

“뇽!”

노이는 루시테를 보더니 반갑게 외쳤다. 저녁때는 기가 막히게 아는지 노이의 배에서 꼬르륵 하고 천둥이 쳤다.

“노이!”

루시테는 노이를 껴안았다.

“뇽?”

루시테는 노이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지금까지 함께 지내서 그런 걸까? 루시테는 노이가 그녀의 말을 알아듣고 그대로 해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노이, 미안해. 지금 바로 저녁을 챙겨주지는 못할 것 같아. 밖에 손님이 와 있는데, 너무너무 무서운 사람이야.”

“뇽?”

“그러니까 여기에서 기다려 줄래? 절대 아래층으로 내려오면 안 돼, 노이. 우리 둘 다 큰일 날지도 몰라.”

“뇨옹…….”

노이가 알아들었는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울었다.

“배고프지? 자. 이거 먹고 있어.”

루시테는 노이에게 차가운 치즈와 딱딱하게 굳은 빵 덩어리를 내밀었다.

노이는 배가 고팠는지 빵조각을 허겁지겁 입으로 가져갔다.

루시테는 잠시 노이를 지켜봤다. 맛있는 저녁을 챙겨주지 못해 안타까웠다.

“이제 정말 내려가 봐야 해. 내가 올 때까지 절대 내려오지 말고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알았지?”

“뇽!”

노이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루시테는 마침내 안심했다. 그녀는 방문이 꽉 닫혔는지를 몇 번이나 확인하고서야 1층으로 내려왔다.

“후우…….”

루시테는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저 문밖에 그 남자가 서 있다고 생각하니 손이 떨리려고 했다.

루시테는 이 모든 게 꿈이기를 바라며 천천히 문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꿈이긴 개뿔.’

커다란 몸집의 남자가 루시테의 장바구니 두 개를 든 채 그대로 서 있었었다.

붉은 머리 기사는 루시테를 빤히 응시했다.

루시테도 그를 올려다봤다. 이렇게 보니 그의 얼굴이 까마득하게 높아 목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는 문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루시테가 들어오라고 하기 전까지 문 앞에 서 있을 예정인 모양이었다.

성질 더러운 인간인 줄로만 알았는데 예절 교육은 제대로 받았나 보다.

“들어오세요.”

“실례하지.”

루시테는 길을 비켜주다 놀라 남자를 한 번 더 쳐다보았다. 저 인간의 입에서 실례라는 말도 나올 수 있는 거였다니.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많은 실례를 생각해보면 너무도 의외였다.

“왜 그렇게 보는 거지?”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루시테는 괜히 찔려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이 짐은 어디에 두면 되지?”

“이쪽에 놔 주세요…….”

루시테는 부엌의 작은 테이블을 가리켰다.

붉은 머리 기사는 루시테가 힘겹게 들고 왔던 장바구니 두 개를 가볍게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루시테는 붉은 머리 기사를 잔뜩 경계하며 몸을 움츠렸다. 그녀는 붉은 머리 기사가 무서웠다.

성질이 사납고 이안을 닮은 데다 커다란 검을 가지고 다니는 너무너무 불편한 사람.

그는 루시테의 집을 어떻게 알았으며, 왜 찾아온 걸까? 루시테는 좌불안석이 되어 발을 동동 굴렀다.

“우리 할 얘기가 많을 것 같군.”

조용한 루시테의 집 안에 낮고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무슨 얘기 말인가요?”

‘나는 그쪽이랑 할 말 없는데.’

루시테는 뒷말은 삼키며 불안한 눈빛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그거 불편하지 않나?”

“네?”

“두건 말이야. 벗지 그래? 이미 다 봤는데 뭐.”

“…….”

루시테는 입을 꾹 다물었다. 저 남자가 자신에 대해 뭘 알고 온 건지 찝찝하고 불안했다.

“됐어요. 저쪽으로 앉으세요.”

루시테는 마지못해 벽난로 앞의 테이블을 가리켰다. 붉은 머리 기사는 순순히 가서 의자를 꺼내 앉았다.

루시테는 붉은 머리 기사의 앞에 물컵을 내려놓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차를 끓이는 시간도 아까웠다. 어서 빨리 그가 돌아가 줬으면.

그 생각뿐이었다.

“왜 그렇게 나를 경계하지?”

붉은 머리 기사가 물컵을 들고 물을 마셨다. 그는 푸른 눈으로 모자를 푹 눌러쓴 루시테를 응시했다.

루시테는 기가 찼다. 어쩜 저렇게 당연한 걸 물어볼 수가. 그럼 경계하지 경계를 안 하게 생겼느냔 말이다.

“서로 아는 사이도 아닌데.”

루시테는 기가 찬 마음에 말을 이었다.

“이름도 모르고, 기사님께 집을 알려준 적도 없는데 갑자기 찾아오셨잖아요. 제가 경계를 안 할 수가 있나요?”

루시테의 목소리가 뾰족했다.

“난 또 찔리는 거라도 있는 줄 알았다.”

붉은 머리 기사가 픽 입꼬리를 올리며 이죽거렸다.

루시테는 얼굴을 와락 구겼다.

찔리는 게…… 많았다. 아주 많았다.

그래서 어쩌라는 건가.

루시테는 점점 이 남자와 대화를 하기가 싫어졌다. 물론 원래도 하기 싫었지만.

“세드릭 디에고다.”

“네?”

“내 이름이야. 이제 이름을 알려줬으니 경계를 푸는 건가?”

“네?”

“거참.”

세드릭이 혀를 찼다.

“네가 그랬잖나. 이름을 몰라서 경계한다고. 알려줬으니 이제 어서 경계를 풀어라. 꼬마.”

루시테는 어이가 없었다. 저 남자는 루시테의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은 게 분명했다.

누가 이름만 몰라서 불편하다고 했나? 그냥 여기 찾아온 것 자체가 불편하다는 건데.

“그래서 무슨 일로 오신 건가요?”

“너 마법사랑은 무슨 사이인 거냐?”

세드릭이 대뜸 물었다.

루시테는 잠깐 표정이 굳었으나 곧 대답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녀와 레일리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라. 그 자식은 누구의 말도 안 듣는다. 그런데 내가 너를 찾아가겠다니까 황제를 알현하러 가겠다더군. 놈이 그렇게 순순히 구는 건 처음 봤다고. 진짜 무슨 사이인 거냐?”

루시테의 눈이 커졌다.

자신 때문에 레일리가 황제를 알현하러 갔다고? 그 레일리가?

루시테는 레일리가 세드릭과 살벌하게 대치했던 일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도 바보가 아니었으니, 그들이 왜 서로 화가 나 있는지는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레일리는 죽어도 세드릭의 말을 들어줄 생각은 없어 보였는데.

그런데 그런 그가 자신이 관련되니 말을 들어줬다는 게 이해가 안 갔다.

레일리가 무슨 생각인 건지. 루시테는 도통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아니, 잠깐만.

루시테는 생각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저를 왜 찾아왔어요? 레일리가 황성을 갔다면 기사님이 원하는 대로 됐잖아요.”

“그거야 너랑 나는 따로 볼 일이 있으니까. 잊었나?”

“뭘요?”

“네가 나한테 맡겨 놓고 간 게 있지 않나.”

맡겨 놓고 간 거?

루시테는 눈썹을 좁혔다.

“자.”

붉은 머리 기사가 테이블에 뭔가를 툭 던졌다.

짤그랑!

자그마한 주머니에서 동전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루시테는 그 돈주머니를 어렵지 않게 알아봤다.

“이건!”

벌떡 일어나 주머니를 집어 든 루시테는 놀라 입을 벌렸다.

‘이건 내 거잖아!’

소매치기 소년이 훔쳐 갔던 돈주머니였다.

루시테는 그제야 세드릭이 자신의 부탁으로 소매치기 소년을 붙잡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녀는 그 소년이 소매치기라고 미처 말할 새가 없었다.

그러니 세드릭은 그 사실을 몰랐을 텐데?

“어떻게 가져오신 거예요?”

“옥에 가두고 심문 몇 번 하니 금방 털어놓더군.”

심문이라고?

루시테는 그녀의 돈주머니를 훔쳐 도망갔던 지저분한 남자애를 떠올렸다.

“그 애를 어떻게 하셨나요? 풀어 주셨나요?”

“꼬마 너는 감사 인사보다 그 도둑놈이 더 궁금한가?”

“감사해요.”

루시테는 내키지 않는 감사 인사를 했다. 솔직히 그렇게 고맙지는 않았다.

그 돈은 어차피 포기한 돈이었고, 제일 중요한 건 저 붉은 머리와 엮이지 않는 거였는데.

돈주머니 때문에 결과적으로 엮이게 된 게 아닌가.

“말로만?”

세드릭이 껄렁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네?”

“너는 말로만 감사를 하냔 말이야.”

세드릭이 투덜거렸다.

“그럼 뭘 바라시는데요?”

“그건 네가 생각해봐야지.”

루시테는 기가 막혔다. 뻔뻔하기 이를 데 없는 인간이었다.

멋대로 뒷조사를 해놓고 찾아와서 하는 말이 이런 거라니.

누가 돈을 찾아달라고 부탁이라도 했느냔 말이다.

“알았으니 이제 그만 돌아,”

쿠당탕!

하필 그때 위층에서 난 큰 소리에 루시테는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찌나 큰 소리였는지 천장이 다 울리는 것 같았다.

“누가 있군.”

세드릭이 제 등에 멘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의 손잡이로 손을 가져갔다.

“너는 혼자 산다고 하던데. 아니었나?”

세드릭의 눈빛이 사나웠다. 루시테는 사색이 되어 손끝을 떨었다.

역시 저 인간은 루시테에 대한 모든 것을 알아 온 게 틀림없었다.

그 부동산에 빨간 머리가 들어가는 걸 봤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루시테는 입술을 짓씹었다.

“아무도 없어요! 누가 있기는 무슨! 쥐가 돌아다니다가 뭘 떨어뜨렸나 보죠!”

루시테는 모른 척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런 루시테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위층에서 또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며 천장이 울렸다.

쿠당탕탕!

‘대체 뭘 하는 거야 노이!’

혹여 노이가 다쳤을까 봐 걱정되면서도, 세드릭이 위로 올라가겠다고 할까 봐 걱정됐다.

“쥐가 큰가 보군. 내가 잡아주지.”

세드릭이 의자에서 일어나며 그의 손길에 따라 그의 바스타드 소드가 검집에서 조금 빠져나왔다.

스릉.

섬뜩한 소리가 났다.

“걱정 마라. 나는 쥐를 잘 잡는다.”

세드릭이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 쪽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루시테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는 세드릭에게로 달려가 그의 팔을 붙잡았다.

팔뚝이 두꺼워서 루시테가 양손으로 잡아도 다 잡히지 않았다.

“잠깐, 잠깐만요!”

손에 잡힌 세드릭의 팔뚝이 무척이나 단단하고 뜨거웠다.

“왜? 내가 쥐 잡아준다니까.”

루시테는 머리를 마구 굴렸다.

대체 뭐라고 말해야 이 막무가내에 사람 말이라고는 귓등으로도 안 듣는 남자를 설득할 수 있을까.

“저, 저녁 먹을래요? 배고프죠!”

“뭐?”

세드릭이 한쪽 눈썹을 휙 올렸다.

“이리 와서 앉아요! 같이 저녁 먹어요.”

루시테는 말을 하면서도 울고 싶었다.

‘멍청하긴!’

지금 당장 내보내도 모자란 남자한테 밥이나 먹고 가라고 하다니.

루시테는 마음속으로 자책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좋아. 그럼. 요리는 네가 하는 건가? 하녀는 없어 보이는데.”

그나마 다행히 그녀의 제안이 세드릭에게 먹혔다.

그는 흥미를 보이며 루시테가 잡아끄는 대로 순순히 따라왔다.

덩치 큰 남자가 작은 루시테에게 팔을 붙들린 채,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 테이블까지 가는 꼴은 꽤 웃겼다.

루시테는 위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힐끗 보았다.

노이가 걱정되어 당장 이 인간을 버리고 위층으로 올라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가 위층으로 가면 이 뻔뻔한 인간이 쥐를 잡아주겠다며 뒤를 따라올 게 뻔했다.

매우 걱정스러웠지만, 루시테는 차마 노이가 왜 소란을 피운 건지 확인하러 갈 수는 없었다.

“가만히 앉아 있어요. 제발.”

루시테는 세드릭의 팔뚝을 놓아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가만히 있기는 개뿔, 루시테가 저녁을 준비하기 위해 부엌으로 가니 세드릭이 졸졸 따라오는 것이 아닌가.

“아, 왜 따라와요?”

“너 같은 꼬맹이가 요리하는 게 신기하잖아.”

“하.”

루시테는 기가 막혀 장바구니에서 당근을 거칠게 꺼내 작은 탁자 위로 쾅 내려놓았다.

“살살해, 살살. 부서질라.”

세드릭은 루시테의 뒤에 선 채로 첨언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악!’

루시테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후…….”

그러나 저 인간을 테이블로 가 있으라고 쫓아낼 수는 없었다. 그러다가 쪼르르 위로 올라가면 어떡한단 말인가.

차라리 좀 열 받아도 그녀의 눈에 보이는 데 있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루시테는 냄비에 물을 받고 익숙하게 저녁을 준비했다.

닭고기를 프라이팬 위에 올려 굽고 면을 삶았다. 토마토를 으깨고 버섯을 썰었다.

루시테가 하는 모든 조리 과정을 세드릭이 뒤에서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기기 시작하더니 곧 집 안을 가득 채웠다.

“발 받침대 하나 만들어 줄까?”

“네?”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리람.

루시테는 파스타 소스를 볶다 말고 세드릭을 쳐다보았다. 세드릭이 껄렁한 표정으로 실실 웃고 있었다.

“네 꼴을 봐. 꼬마. 주방에 매달려 있는 난쟁이 같잖아.”

“네에?”

루시테는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이 인간이 지금 사람의 키로 시비를 건 건가.

입이라도 가만히 다물고 있으면 중간이라도 갈 텐데.

세드릭 디에고라고 했나. 저 인간은 정말이지 입을 열 때마다 정이 뚝뚝 떨어지게 만드는 재앙의 주둥이를 가진 인간이었다.

물론 떨어질 정도 없긴 하지만.

“꼬마라고 그만 좀 하세요.”

“뭐라고?”

“꼬마 아니라고요.”

루시테는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파스타를 볶는 루시테의 손이 빨라졌다.

저 인간을 빨리 밥을 먹여서 쫓아버려야 속이 시원할 듯했다.

루시테는 탁 소리가 나게 그릇을 내려놨다.

“앉아서 먹어요. 빨리.”

루시테는 음식을 내려놓자마자 그에게서 홱 돌아서 가려 했다.

그런데 막 테이블의 반대편으로 가려 하는 그녀의 옷소매를 세드릭이 덥석 잡았다.

“잠깐 기다려.”

루시테는 대꾸도 하지 않고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두건 좀 벗지? 요리하느라 더운 거 다 아는데. 괜찮다니까? 내 앞이잖아.”

‘내 앞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루시테는 한숨을 삼켰다. 저랑 그녀랑 무슨 사이라도 된다고 저런 소릴 지껄인단 말인가.

루시테는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다.

“얼른.”

“싫어요. 빨리 식사나 하고 가세요, 기사님.”

루시테는 세드릭의 손에서 제 옷깃을 팍 빼냈다. 그리고 맞은편으로 가서 앉아 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저 눈치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재앙의 주둥아리 때문에 속이 탔다.

“네가 나이를 거짓말한 것 때문에 내가 신고할까 봐 그러는 건가?”

루시테는 눈을 크게 떴다. 저 인간이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세드릭은 루시테의 속이 타는 것도 모르고 스파게티를 한입 가득 입에 넣고 우물우물 씹어대었다.

“걱정 마. 어디 가서 네가 꼬맹이라고 별로 말하고 다닐 생각은 없으니까. 나도 네 덕분에 마법사 놈의 집에 가서 죽치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거든.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세드릭은 입안에 파스타를 한가득 우겨넣은 채 잘도 지껄였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루시테를 더더욱 기가 차게 만들었다.

루시테는 결코 벗을 생각이 없었던 두건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두건을 팍 벗어 의자에 내려놓았다.

열심히 밥을 먹던 세드릭이 눈이 커졌다.

루시테의 흰 맨얼굴과 칠흑같이 검은 머리칼과 눈동자가 그대로 드러났다.

세드릭은 잠시 멍하니 루시테를 바라보았다.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 기사님.”

루시테는 딱딱하게 말했다.

“저는 나이를 속인 적이 없어요. 진짜 스물셋이에요.”

“거짓말하지,”

“진짜라고요!”

루시테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제 모습이 이런 건 사정이 있어서예요.”

루시테는 설명을 하면서도 답답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저 인간이 이해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또 거짓말을 한다며 기분 나쁘게 말을 해대겠지.

루시테는 기대도 하지 않고 의자에 도로 앉아 맹물만 들이켰다.

“무슨 사정? 어디가 아프기라도 한 건가?”

‘어라.’

세드릭은 루시테가 생각한 것과는 다르게 또 거짓말이라고 하거나 꼬맹이라고 부르는 등의 시비를 걸지 않았다.

“맞아요, 그런 거예요. 병 같은 거.”

“무슨 병이지?”

“말하기 싫은데요.”

“그래, 그럼.”

세드릭은 무심하게 대꾸하며 파스타를 소스까지 박박 긁어먹었다.

그가 너무 잘 먹어서 루시테는 오히려 약간 민망해졌다.

“다음엔 발판을 만들어다 주지.”

세드릭은 문으로 나가기 직전까지도 미련이 남았는지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괜찮아요. 얼른 가세요. 어둡잖아요.”

루시테는 세드릭의 등짝을 꾹꾹 밀어 문밖으로 내보냈다.

“내가 어둠 따위를 두려워할 것 같나?”

“아니요. 안 두려워하시겠지요.”

루시테는 막내 남동생 어르듯 덩치 큰 곰 같은 남자를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대충 대답했다.

“또 보지.”

‘아니, 다음은 없어. 또 보긴 개뿔.’

루시테는 산뜻하게 속마음을 삼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안녕히 가세요.”

그리고 다신 보지 말자, 이 진상아.

루시테는 세드릭을 내보내고 문을 쾅 닫았다.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몇 번이나 제대로 잠겼는지 확인하고 나서야 긴장이 쭉 풀렸다.

루시테는 쉴 틈도 없이 바로 2층으로 달려갔다.

“노이! 노이!”

루시테는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 새끼용을 불렀다.

“삐로로로록.”

노이가 바닥에 앉아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방바닥은 빵조각들로 너저분하게 어질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루시테는 노이가 왜 큰 소리를 냈는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침대에서 루시테가 가져다준 간식을 먹으려다가 그릇째로 바닥에 떨어뜨리며 큰 소리가 났을 것이다.

그래서 노이가 침대에서 뛰어 내려와 그걸 잡으려다 더 큰 소리가 났겠지.

거기까지 생각하니 루시테는 노이가 불쌍해졌다.

하루 종일 혼자 집에서 외롭게 루시테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고, 거기다 밥도 제대로 못 먹었을 게 아닌가.

얼마나 심심하고 배가 고팠을까.

루시테는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이리와, 노이. 내려가서 밥 먹자.”

루시테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노이가 냉큼 꼬리를 흔들며 달려왔다.

“뇨옹!”

노이는 루시테의 품에 폭 안겼다.

“끄응.”

루시테는 힘겹게 노이를 안아 들었다. 그새 또 자란 건지 이제는 정말 들어 올리기도 힘들 정도로 무거웠다.

루시테는 노이를 안아 들고 1층으로 내려왔다.

세드릭이 먹은 식기를 치우고 노이와 둘이 저녁을 먹기 위해 다시 테이블을 세팅했다.

노이는 기분이 좋은지 의자에 앉은 채로 짧고 통통한 발을 앞뒤로 흔들었다.

‘이게 우리의 저녁이지.’

루시테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집에 돌아온 느낌이 들었다.

한편 세드릭 디에고는 산 중턱을 내려가려다 말고 서서 그녀의 집을 바라보았다.

루시 필드. 그녀가 주는 모든 것이 안정감이 있고 편안했다.

각박한 세드릭의 세상에서 그녀처럼 그에게 따스함을 내어준 사람은 처음이었다.

아늑한 집안, 손수 만든 따뜻한 음식.

그리고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인상적인 그녀의 얼굴.

세드릭은 그렇게 한참 동안 루시 필드의 집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 어두운 그늘이 내려앉았다.

* * *

어제 찾아와 진상처럼 굴다 간 붉은 머리 기사 세드릭 디에고는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었다.

“아 글쎄 아가씨, 무슨 죄라도 지은 거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루시테는 부동산 업자와 실랑이를 했다.

왜 제 정보를 알려주었느냐고 따지러 온 건데 오히려 범죄자 취급을 받게 된 것이다.

“글쎄, 그분이 이 일대를 다 뒤지고 다녔다니까? 아가씨 하나 찾으려고! 아가씨, 어쩌다 그런 높은 분께 찍힌 거요?”

“그 사람이 뭐 하는 사람인데요? 많이 대단한 사람인가요?”

루시테의 목소리가 조심스러워졌다.

“황실 근위대에서 가장 악명 높은 화이트 울프 기사단장이잖아! 아가씨 못 들어봤어?”

루시테는 고개를 저었다.

이크릭스 제국의 기사단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 정도야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서 누가 제일 대단하고, 누가 유명하고 이런 건 잘 몰랐다.

이크릭스가 강대국이긴 해도 메이븐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였고, 보통 사람들은 멀리 있는 남의 나라 기사단에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당연히 그건 루시테도 마찬가지였다.

“화이트 울프의 기사단장 세드릭 디에고 백작을 몰라?”

부동산 업자가 기함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루시테가 시골 사람이긴 시골 사람이라며 면박을 주면서도, 세드릭 디에고가 어떤 인간인지를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세드릭 디에고 그 진상은, 유명하고 실력 있는 또라이였다.

과연 그 또라이를 또라이라고 생각한 게 루시테뿐이었던 건 아닌 모양이다.

세드릭 디에고는 황제의 충실한 개이자 제국에 이익을 가져다주는 인재였다.

당연히 황제와 제국민들에게 큰 지지와 사랑을 받는 국가의 높으신 분이기도 했다.

게다가 그 인간은 젊은 나이에 또 뭘 그렇게 한 게 많은지 공적이 끝도 없이 나왔다.

어린 나이에 오러를 사용하는 경지에 오른 그가 처음 기사가 되어 한 일은 악명 높은 해적들을 소탕한 것이었다.

성격은 그 모양이었으나, 전투에 있어서만큼은 대단한 감각을 갖고 있다고 했다.

제 실력만 과신하지 않고 누구도 생각하지 못할 천재적인 전술을 구사했으며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해적을 소탕한 후 수도 일대의 몬스터들을 싸그리 토벌했는데, 이만큼이나 몬스터가 줄어든 이유도 다 그 인간의 공이라 했다.

길목에 수시로 출몰하여 사람들을 힘들게 하던 몬스터들이 그 씨가 마를 정도로 줄어들어 이제는 나브레 산과 아킬라 산맥 깊은 곳에 숨어 지내는 건 그 때문이었다.

어찌나 몬스터를 죽여 댔는지 몬스터도 그 인간의 붉은 머리만 보면 치를 떨 정도라고 했더랬다.

루시테는 부동산 업자의 설명을 들으며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 뭐 그런 인간이 다 있나 싶을 정도였다.

부동산 업자의 설명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는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화이트 울프의 기사단장 세드릭 디에고에 대해서 열변을 토했다.

앞부분은 그 진상의 업적에 대한 것들이었다면, 뒷부분은 그 진상이 벌인 미친 짓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어찌나 유명한지 수도 아테라에 사는 사람이면 다 안다나 뭐라나.

“글쎄, 아가씨. 광장의 나브레 동상 아시죠?”

“네, 알죠.”

루시테는 분수대 옆에 있는 커다란 드래곤 동상을 떠올렸다.

“거기다 중매쟁이들을 남자고 여자고 할 것 없이 발가벗겨서 매달아 놨다니까요, 아침까지.”

루시테는 부동산 업자의 설명을 들으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세드릭 디에고가 1등 신랑감이라고 소문이 나기 시작하자, 수많은 중매쟁이들이 밤이고 낮이고 그를 찾아왔다고 한다.

거기에 화가 난 세드릭이 그들을 죄다 발가벗겨서 제국의 수호룡 동상에 매달아 놓았단다.

미친놈이라는 말 말고는 할 말이 없었다. 미친놈 중에 상 미친놈, 또라이 아냐, 이거?

그 인간이 한 미친 짓이 그뿐이랴.

그와 사이가 안 좋던 귀족을 황태자의 생일 연회에서 죽기 직전까지 곤죽을 만들어 놓질 않나. 마탑에 불을 지르질 않나.

놈의 기행들은 열 손가락으로 다 꼽아볼 수도 없이 많았다.

‘잘못 걸렸다.’

루시테는 부동산 업자의 가게를 나오면서 그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런 미친 사람과 엮이다니, 난 왜 이렇게 재수가 없는 거지?’

루시테는 그런 생각을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동안 살면서 그렇게 큰 죄를 지은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왜 또 이런 큰 시련이 닥쳐온 건지 알 수 없었다.

어제 그 인간이 한 인사가 루시테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또 봐.’

“으악!”

루시테는 가만히 걸어가다 비명을 질렀다.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또 보자니. 너무나 소름 끼치는 말이었다.

‘어휴, 끔찍해!’

루시테는 들러붙는 불길함을 떨쳐버릴 기세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러고는 이왕 나온 김에 이반의 서점에 들르기 위해 광장 쪽으로 걸어갔다.

분수대 근처를 지나가는데 커다란 드래곤의 동상이 눈에 띄었다.

조금 전 부동산 업자가 한 말 때문에 루시테는 또 한 번 소름이 돋았다.

루시테는 동상에서 얼른 고개를 돌렸다. 저기에 세드릭이 서 있는 것도 아닌데 괜히 또 엮일까 봐 불안했다.

루시테는 빠른 걸음으로 광장을 지나가려 했다. 그러다 문득 한 소녀가 루시테의 눈에 띄었다.

열 살쯤 되었을까. 갈색 머리를 양 갈래로 묶은 소녀는 무척 어려 보였다.

그 애는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다급한 얼굴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저희 오빠···! 저희 오빠를 혹시 보셨나요?”

사람들은 바쁜 길을 막는 소녀를 귀찮아하며 무시하거나, 길을 막는다며 화를 내고 밀치기까지 했다.

루시테는 하필 소녀가 있는 쪽 근처를 지나가는 중이었다.

“저기요!”

소녀가 루시테의 옷자락을 잡아 왔다.

“저희 오빠 혹시 보셨나요?”

소녀가 울먹이며 빛이 바랜 종이를 들어 올렸다. 서툰 솜씨로 그린 초상화였다.

도구가 없었는지 목탄으로 그린 듯 초상화의 여기저기가 번져 있었다.

루시테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초상화를 들여다보았다.

“어, 이 사람.”

“아, 아시나요? 저희 오빠?”

소녀의 얼굴이 희망으로 반짝였다.

루시테도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냥 지나갈 생각이었으나, 초상화 속의 소년은 모르는 척하기에는 본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작은 챙이 달린 납작한 빵모자, 그리고 위로 살짝 찢어져서 뾰로통해 보이는 눈매.

그림 속 사람은 분명 그때 봤던 소년과 비슷해 보였다.

“아시는 거죠? 그렇죠, 아가씨?”

소녀가 간절한 눈빛으로 루시테를 바라보았다.

“혹시 너희 오빠가 언제 없어졌어?”

“이틀 전부터요······. 이틀 전부터 집에 안 들어왔어요!”

“그랬구나······.”

루시테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 녀석은 내 돈주머니를 소매치기하고 도망가다가 화이트 울프의 단장에게 붙잡혔고, 지금은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혀 있을 거야.’

…라고는 차마 소녀에게 말하기 어려웠다.

“아가씨! 저희 오빠를 보신 거죠? 그렇죠?”

소녀가 루시테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부탁이에요! 제발요, 아가씨.”

소녀의 큰 연두색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저기, 그게.”

루시테는 소녀에게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떻게 해야 할까. 루시테의 마음속에 짧은 순간 수많은 갈등이 스쳐 지나갔다.

그때 소녀의 뱃속에서 큰 소리가 났다.

꼬르르르륵.

소녀가 놀라 제 배를 움켜잡았다. 소녀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루시테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열 살은 되었을까. 루시테보다도 더 작은 여자아이였다.

옷은 다 낡아 몇 번이나 기워 입은 티가 났으며 군데군데 구멍이 나 있었다.

드러난 팔에는 커다란 화상이 있었는데, 어쩌다 생겼는지는 몰라도 몹시 아팠을 것 같았다.

“많이 굶었니?”

루시테의 물음에 소녀가 부끄러워하며 작게 끄덕였다.

“뭐라도 먹을래?”

소녀가 고개를 저었다.

“오빠를 찾아야 해요! 오빠가 걱정돼요······.”

소녀가 우물거렸다.

루시테는 손을 뻗어 소녀의 손을 잡았다. 부르트고 거친 작은 손이 루시테의 손 안에 잡혔다.

“네 오빠를 내가 아는 것 같아.”

“정말이에요? 저희 오빠 어디에 있어요? 오빠를 어디에서 보셨어요?”

“내가 보긴 봤는데, 가서 한 번 찾아봐야 할 것 같아. 내가 찾아보는 동안 너는 어디 가서 뭐라도 먹고 있으렴.”

루시테는 주머니에서 동전 몇 개를 꺼내어 소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아니! 아니에요! 저도 같이 갈래요! 오빠 찾으러 갈래요!”

소녀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루시테는 숨을 삼켰다. 소녀를 데리고 가다니. 그건 안 될 말이었다.

루시테는 세드릭 디에고에게서 이 소녀까지 지켜줄 자신이 없었다.

“얘, 너 이름이 뭐야?”

“저는 리브예요.”

“리브, 내가 네 오빠 꼭 찾아다 줄게. 약속할게. 그러니까 기다려 줄래?”

루시테는 리브의 손을 꼭 쥐었다.

자신이 리브의 오빠를 감옥에 갇히게 만든 것도 아닌데, 괜히 심한 죄책감이 느껴졌다.

소매치기는 잘못이지만, 어쩌면 그 소년도 소매치기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루시테는 씁쓸하게 생각했다.

“집이 어디야? 집에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내가 오빠를 찾아서 데리고 갈게.”

“저는 집이 없어요.”

리브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집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정말이에요. 집이 없는걸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살던 집에서 쫓겨났어요.”

루시테의 얼굴이 충격과 슬픔으로 물들어갔다.

“그럼 지금까지 어디서 지냈는데?”

“음식점 마구간에 숨어서 자거나 뒷골목에 숨어서 잤어요!”

리브가 해맑게 대답했다.

루시테는 주먹을 꽉 쥐었다. 세상은 이렇게 어린아이들이 살아가기에 너무나 힘든 곳이었다.

생각해보면 자신도 그것을 잘 알기에 남들 앞에서는 지금처럼 두건을 푹 눌러 쓰고 다니는 게 아니던가.

루시테는 리브에게 큰 연민과 미안함을 느꼈다.

이 애의 오빠에게 일어난 일에 자신의 탓도 큰 것 같다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았다.

“리브, 나랑 어디 좀 가자.”

루시테는 리브의 손을 잡아끌었다.

“같이 오빠 찾으러 가는 거예요?”

“아니, 리브는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내가 네 오빠 찾아올 때까지. 약속해줘, 얌전히 기다리고 있겠다고. 그러면 내가 네 오빠 꼭 찾아올게.”

“네.”

리브는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테는 리브를 이반의 서점에 맡겼다.

이반 영감에게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잘 부탁한다고 몇 번이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이반 영감은 흔쾌히 수락했다.

루시테는 물어물어 세드릭 디에고의 집을 찾아갔다.

“후······.”

루시테는 세드릭의 집 앞에서 크게 심호흡을 했다.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진상을 고작 하루도 안 되어, 제 발로 직접 만나러 오다니.

루시테는 조금 슬퍼졌다. 그렇다고 포기하고 돌아갈 수는 없었다.

리브에게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느끼면서 사느니 이편이 나았다.

루시테는 이번 삶에서만큼은 후회하는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선택할 거야.”

작게 중얼거리며 망설임을 끝낸 루시테는 곧바로 정문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냐?”

젊은 하녀가 귀찮다는 얼굴로 루시테는 내려다봤다.

“디에고 백작님을 만나러 왔어요.”

하녀는 루시테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말했다.

“백작님은 지금 출타 중이시니 돌아가라.”

“백작님을 뵙게 해주세요. 저는 백작님을 꼭 만나야 합니다!”

하녀는 짜증스럽다는 듯 대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백작님을 아무나 만날 수 있는 줄 아느냐? 그분은 너 같은 자가 만나 뵐 수 있는 분이 아니니 돌아가라!”

루시테의 단출한 차림에 대놓고 무시하던 하녀는 결국 면박까지 주며 눈앞에서 문을 쾅 닫았다.

닫힌 문 앞에 선 루시테는 불안한 마음에 양손을 맞잡고 주물거렸다.

그 진상을 만나기조차 쉽지 않다니······.

소매치기 소년을 되찾아오는 게 몹시 막막하게 느껴졌다.

그 인간은 미친놈이지만 큰 공을 세운 제국의 기사단장이다.

그러나 루시테는 내세울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돈이나 신분은 당연히 없었고 이크릭스의 제국민도 아니었으며 심지어 당당하게 내놓을 수 있는 얼굴도 없었다.

오히려 저주 때문에 두건을 덮어쓰고 다녀야 하는 신세였으니 말이다.

쾅쾅쾅!

루시테는 문을 두드렸다.

“부탁드려요! 제발 백작님을 뵐 수 있게 해주세요! 하다못해 제가 왔다고 말만이라도 전해주세요! 제발!”

쾅쾅쾅!

루시테는 몇 번이고 문을 두드리며 간곡하게 외쳤다.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쳐도 문은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철저히 무시할 생각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렇게 물러날쏘냐.

쾅쾅쾅!

루시테는 손이 아프도록 문을 두드렸다.

그때 근처를 지나가던 누군가가 루시테를 보곤 말을 걸었다.

“루시 양? 이런 곳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낮고 서늘하며 부드러운 듯 차가운 목소리였다.

루시테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햇빛을 등지고 선, 키 큰 남자의 그림자가 루시테의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칠흑 같은 검은 머리칼 아래로 깊은 은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레, 레일리?”

루시테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를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레일리는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루시테는 그가 레일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못 알아볼 수 없는 목소리, 둥글게 휜 눈매, 서늘한 은빛 눈동자 모두 틀림없이 레일리였다.

“오랜만입니다. 루시.”

레일리가 빙긋 입꼬리를 올렸다.

“여기에서 뭘 하고 계신 겁니까?”

“저는 여기 집주인과 할 얘기가 있어요. 레일리야말로 곳에는 어쩐 일이세요?”

레일리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퇴성하는 길에 루시의 기척이 느껴지기에 와봤습니다.”

루시테의 검지에 끼워져 있는 피처럼 붉은 루비 반지가 반짝였다.

“퇴성이요?”

“네. 일이 있어서 황제 폐하를 뵙고 왔습니다.”

루시테는 입을 벌렸다.

기사단장씩이나 되는 세드릭이 황제 폐하가 레일리를 부른다는 소식을 전하러 똥개 훈련하듯 왔다 갔다 했다고 하더니.

레일리가 정말 대단한 마법사이긴 하다는 것이 새삼스럽게 실감 났다.

“정말 대단해요, 레일리.”

“뭘요. 그런데 여기는······.”

레일리가 목소리가 살짝 사나워졌다.

“그 백작의 집이로군요? 루시 양이 디에고 백작과 할 말이 뭐가 있을까요? 참 궁금하네요.”

레일리는 웃는 낯이었으나, 희한하게 루시테의 귀에는 환청처럼 그가 이를 바드득 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레일리가 세드릭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는 이미 봐서 잘 알고 있었다.

루시테는 괜히 긴장되어 손바닥이 축축해졌다.

“제가 백작과······. 분명 폐하를 알현하는 대신 루시 양을 찾아가지 말라고 약속했던 기억이 나는데······. 제 기억이 잘못된 겁니까?”

레일리의 기세가 조금씩 흉흉해졌다. 분명 부드럽게 웃고 있는데 무서웠다.

“그, 그게.”

“말해주세요. 루시. 어떻게 된 일입니까?”

레일리의 눈빛이 북풍한설처럼 차가웠다.

결국 루시테는 레일리에게 세드릭과 있었던 일부터 시작해서 소매치기 소년과 관련된 일까지 다 털어놓고 말았다.

“하하하.”

레일리가 표정도 없이 섬뜩하게 웃었다.

“그래서 백작이 결국 저와의 약속을 어기고 루시 양의 집까지 찾아갔다는 말이군요.”

루시테는 순간 지금 뭐라도 말하지 않으면 큰일이 날지도 모르겠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아무리 레일리가 대단한 마법사라고 해도 상대는 모두가 알아주는 미친놈이었다.

세드릭 그 미친 작자가 레일리의 집에 불이라도 지른다고 날뛰면 어떡한단 말인가?

레일리야 마법사니 어떻게든 할지 몰라도, 그 파장이 그녀에게까지 미치기라도 하면 곤란했다.

게다가 그녀는 지금 리브의 오빠를 구해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모든 게 틀어질지도 모를 큰 위기였다.

“저, 저기 레일리!”

루시테는 레일리의 손을 덥석 붙들었다.

그를 잡지 않으면 그가 당장 순간이동이라도 해서 세드릭과 한 판 싸우러 갈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레일리는 루시테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대신 살짝 놀란 눈빛으로 제 손을 붙들고 있는 루시테를 고요하게 내려다보았다.

“기사님은 저에게 돈주머니를 돌려주시러 온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화내지 말아 주세요. 저는 제 중요한 물건을 돌려받았는걸요.”

고요하던 레일리의 얼굴에 슬금슬금 장난기가 감돌았다.

“하지만 백작은 저와의 약속을 어겼습니다. 대가를 치르는 게 마땅합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루시 양은.”

“그······. 기사님이 정말 맞아도 마땅한 짓을 하긴 했지만요! 레일리가 한 번만 봐 주세요······. 부탁드릴게요.”

“제가 만약 루시 양의 말을 들어드린다면 루시 양은 제게 무엇을 해주시겠습니까?”

“네?”

생각지도 못한 물음에 루시테는 눈이 커졌다. 루시테는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생각은 길지 않았다. 여기서는 레일리의 말대로 해주는 게 맞겠다는 판단이 섰다.

루시테는 침을 꼴깍 삼켰다. 목울대가 울렁였다.

“제게 무얼 바라시나요?”

루시테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레일리의 눈매가 반달 모양로 부드럽게 휘어졌다.

“바라는 걸 해주실 겁니까?”

레일리가 오만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가 속삭이는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꿀처럼 달콤했다.

마치 악마의 속삭임처럼 매혹적인 목소리로, 레일리가 속삭였다.

“해주신다고 말하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소년을 찾아오는 일.”

레일리가 루시테의 손에 붙들린 제 손을 부드럽게 돌리더니 루시테의 양손을 제 손으로 덮듯 잡았다.

커다란 손이 루시테의 손을 덮었다. 깊고 투명한 은빛 눈동자가 반짝였다.

“네? 루시 양, 대답해보세요. 제가 그 소년을 찾아 드리는 일을 도와드릴까요?”

미지근한 온기와 속삭이는 목소리, 그 모든 것이 몹시 매혹적이었다.

그 누가 이런 유혹을 뿌리칠 수 있을까?

루시테는 홀린 듯 대답했다.

“조, 좋아요. 레일리.”

“그렇다면 거래 성립이로군요.”

레일리가 오만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이쪽으로 와요, 루시.”

레일리가 루시테의 손을 덥석 잡고는 그가 있는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앗!”

루시테가 코를 레일리의 가슴팍에 박았다고 느낀 순간, 그들의 발밑에 흰 원이 생겨났다.

“맞다. 처음이라면 어지러울 수도 있다는 걸 말 안 했네요.”

레일리의 듣기 좋은 저음이 루시테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그, 그걸 이제 말하면 어떡,’

루시테가 더 생각할 틈도 없이 루시테의 몸은 순식간에 빛 사이로 부서지듯 사라졌다.

눈부신 빛무리가 루시테의 눈앞에서 맴돌았다.

그 빛이 점차 사라지면서 루시테는 주변을 확인할 수 있었다.

루시테의 눈에 가장 처음 들어 온 것은 탁 트인 푸른 하늘이었다. 바다보다 더 넓은 창공이 루시테의 앞에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으, 으아아아악! 꺄아아아악!”

루시테는 발버둥을 치며 비명을 질렀다. 금방이라도 땅으로 제 몸이 곤두박질칠 것만 같았다.

“이런. 루시 양.”

커다란 손이 루시테의 허리를 확 감싸 안았다.

루시테는 레일리의 옆구리에 대롱대롱 매달린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레일리에 비해 훨씬 짧은 양 다리가 허공에 흔들거렸다.

“우, 우,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 거예요?”

루시테는 눈을 쉴 새 없이 깜박였다.

하늘에 떠 있다는 불안감과 뛰어난 마법사인 레일리가 함께 있다는 안정감이 공존했다.

루시테는 차마 레일리의 품에서 떨어질 생각은 못 한 채 그의 팔에 꼭 매달렸다.

루시테는 조금씩 주위를 둘러보았다.

발아래 솟아 있는 높은 첨탑과 거대한 성의 지붕이 그제야 루시테의 눈에 들어왔다.

은빛 용이 수놓인 붉은 천에 금빛 술을 달아 만든 깃발이 성의 곳곳에 꽂힌 채 크게 펄럭였다.

‘여, 여긴 설마.’

루시테는 할 말을 잃고 눈만 깜박였다.

세상 모든 게 발아래 있는 듯, 화려하고 휘황찬란한 모든 것이 그녀의 발아래에 있었다.

“이크릭스의 황성 아덴티움입니다, 루시 양. 처음 와보는 건가요?”

루시테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테는 한참 황성을 멍하니 내려다보다 정신을 차렸다.

“여기는 왜 온 거예요?”

“아래는 안티매직이 걸려 있습니다.”

루시테는 레일리의 손끝이 가리키는 쪽을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알아보지 못했으나 곧 볼 수 있었다.

황성의 넓은 부지 전체를 반투명한 구 같은 것이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구 위에는 중간중간 빛에 휩싸인 둥근 구름 같은 것이 파지직 소리를 내며 위협적인 빛을 내뿜었다.

“츳.”

레일리가 혀를 찼다.

“나브레가 용언으로 만든 마법진입니다. 저라도 부숴버릴 수는 없겠더군요.”

레일리가 루시테를 붙들고 있지 않은 반대쪽 손을 구부렸다.

뚜둑 하고 관절이 부딪히는 위협적인 소리가 났다.

“레일리···?”

저 무시무시한 마법진을 부술 생각을 대체 왜 하는 건데?

“왜 그러십니까?”

레일리가 태연한 얼굴로 대꾸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루시테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왠지 물어봤자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 같아 루시테는 말을 돌렸다.

“그런데 여기는 왜 온 거예요? 언제 내려가요?”

“곧 내려갈 겁니다. 잠시 찾는 중입니다.”

레일리의 은빛 눈이 섬뜩하게 번뜩였기에 루시테는 차마 뭘 찾고 있느냐고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잠자코 기다렸다.

“찾았다. 운이 좋군요. 아덴티움을 부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뭐?’

뭘 부숴?

부수고 어쩌고 한 게 농담이 아니었단 말야?

루시테는 놀라 고개를 홱 돌려 레일리를 쳐다보려 했다.

그러나 그럴 틈조차 없었다.

레일리가 루시테를 안은 채로 또 순간이동을 했기 때문에.

히히히히힝!

막 출발하려던 마차 앞에 두 명의 인영이 나타났다. 말이 놀라 다리를 들어 올리며 크게 울었다.

레일리는 바로 앞에서 말이 다리를 드는 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으나, 루시테는 아니었다.

루시테는 심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말의 발에 그대로 차여 죽는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루시테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파랗게 질렸다.

그러나 루시테가 채 한숨을 돌리기도 전이었다.

쾅!

마차의 주인이 마차의 문을 거칠게 발로 차며 마차 밖으로 튀어나왔다.

“어떤 놈이야?!”

그는 커다란 바스타드 소드를 철그럭거리며 눈을 부라렸다.

불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가 덩달아 거칠게 흔들렸다.

루시테는 흉흉한 푸른 눈을 마주 보고 나서야 레일리가 말한 ‘찾았다.’의 의미를 깨달았다.

레일리는 루시테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세드릭 디에고를 찾아온 것이었다.

“아사드 공?”

레일리를 발견한 세드릭의 기세가 더 흉포해졌다.

“왜 제 마차를 막으신 겁니까?”

세드릭은 손을 뒤로 가져가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여차하면 뽑아 들겠다는 일종의 경고였다.

금방이라도 싸움이 터질 것 같은 그들의 사이에서, 루시테는 레일리의 팔을 뿌리치고 그의 앞으로 튀어 나갔다.

“기, 기사님!”

루시테의 목소리에 세드릭의 시선이 자그마한 두건을 쓴 인영에게로 떨어졌다.

그의 거대한 덩치에 비해 너무 작아 눈에 띄지 않은 조그마한 몸이 지금은 그에게 그 어느 때보다 큰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었다.

“꼬마!”

세드릭은 순식간에 기세를 풀고 반갑게 외쳤다. 자신이 조금 전까지 레일리 아사드에게 죽일 듯 살기를 뿜어내던 것도 잊고.

“꼬마! 여기는 어쩐 일이냐?”

세드릭이 한걸음에 루시테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 * *

다그닥 다그닥.

불편한 정적 속에서 말발굽 소리가 울렸다.

루시테는 레일리를 한 번 보고 세드릭을 한 번 보았다.

서로를 그토록 싫어하고 무시하는 두 사람이 같은 마차를 타다니. 루시테는 태풍의 눈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온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놈을 달라 그 말이냐? 꼬마.”

루시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어디에 있어요?”

“내 집. 은인의 물건을 도둑질한 놈인데 내가 직접 심문을 했지.”

세드릭이 잔인한 눈빛을 하고 웃었다. 루시테는 세드릭의 표정을 보니 괜히 불안해졌다.

“죽······ 은 건 아니죠?”

“설마. 제국 치안대에 넘기려고 했다. 소매치기니까 벌을 받아 마땅하지 않나? 어차피 네가 할 일, 내가 대신해주려던 거다.”

“아니, 아니요.”

루시테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냥 그 애를 풀어주셨으면 좋겠어요.”

“어렵지 않지. 누구 부탁이라고 내가 안 들어줄까.”

세드릭이 빙글빙글 웃으며 루시테를 쳐다보았다.

루시테는 세드릭을 보고 있노라니 한숨이 절로 나오려 했다.

저번부터 은인이라느니 뭐니 하며 계속 친한 척 다가오는 그가 몹시 부담스러웠다.

미친놈이라더니 원래 저런 걸까.

‘하여튼 그 애만 돌려받으면 절대로 더 엮이지 말아야겠어.’

루시테는 다짐 또 다짐했다.

그녀가 지향하는 가늘고 긴 인생에 세드릭 디에고는 완전히 독약 같은 인간일 터였다.

세드릭의 집에 도착한 마차가 멈춰서자, 루시테는 세드릭의 뒤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다녀오셨습니까. 백작···!”

세드릭에게 인사를 하던 하녀가 세드릭의 옆에 서 있는 루시테를 알아보았다. 하녀의 눈이 크게 뜨였다.

제가 쫓아낸 사람이 주인과 당당하게 함께 들어오니 놀랄 만도 했다.

하녀의 눈빛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제 주인이 얼마나 돌은 놈인지 잘 아는 하녀는 루시테가 자신을 고자질할까 봐 불안한 모양이었다.

제가 세드릭과 아는 사이인 루시테를 문전박대하고 쫓아냈다는 사실을 말이다.

“다, 다과라도 준비해드릴까요?”

하녀는 재빨리 루시테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이며 알량하게 속삭였다.

“아니오.”

루시테는 하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고자질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하녀와 더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으므로.

“아니긴. 온 김에 차라도 한잔하고 가지 그래?”

세드릭이 루시테의 어깨에 손을 올려 그녀를 제 옆구리로 확 끌어당겼다.

덩치 큰 세드릭에게 어깨동무를 당하니 그 모습은 마치 고목나무에 붙어 있는 매미 같았다.

루시테는 낑낑거리며 세드릭의 품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그러나 세드릭의 팔은 무슨 돌덩어리라도 되는 마냥 꿈쩍도 하지 않았다.

“차는 됐어요.”

루시테는 세드릭의 옆구리에 매달려 우물거렸다.

“거절하지 마. 우리 사이에.”

‘우리 사이는 무슨?!’

루시테는 소름이 돋았다.

“기사님! 저는 어서 그 애가 괜찮은지부터 확인하고 싶어요!”

루시테는 비명을 지르듯 외쳤다.

"그래? 그럼 하는 수 없지.“

세드릭은 방향을 틀어 바로 지하실로 향했다.

지하는 어두컴컴하고 서늘했다.

철창이 꽤 많았으며 비릿한 냄새가 났다.

루시테는 이 많은 철창을 둬서 어디다 쓰는지, 비릿한 냄새는 무엇인지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그런 걸 물어봐봤자 루시테의 심신에만 안 좋을 게 뻔했으니까.

“여기야. 저 녀석이다.”

세드릭이 어둠 속에서 푸른 눈을 번뜩이며 한 철창 안을 가리켰다. 비릿한 냄새가 짙어졌다.

철창 안쪽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났다.

“세상에!”

루시테는 철창을 밀고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소매치기 소년이 축 늘어진 채 색색 숨을 내쉬고 있었다.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고 다른 데도 별로 성해 보이지 않았다.

심문했다더니 그냥 주먹으로 냅다 팬 것 같은 꼴이 아닌가.

“기사님! 이제 이 애는 제가 데려가도 될까요?”

루시테는 세드릭을 홱 돌아봤다.

“마음대로 해.”

세드릭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루시테는 소년에게 다가가 부축하기 위해 소년의 팔을 잡았다.

루시테의 손길이 닿자 소년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리브와 똑같은 연둣빛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루시테를 올려다보았다.

많이 다쳤는데도 소년의 눈빛은 전혀 생기를 잃지 않았다.

연두색 눈동자는 고집스러웠으며 분노로 가득했다.

소년의 원망 어린 눈동자가 루시테를 강렬하게 쏘아보고 있었다.

“날 기억하나 보네.”

루시테의 말에 소년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녀 때문에 이런 꼴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루시테는 씁쓸해졌다.

“우리가 서로 정겹게 인사할 사이는 아니긴 한데. 일단 여기에서 나가자. 나는 너를 여기서 데리고 나가려고 왔어.”

소년의 연둣빛 눈동자는 루시테를 여전히 신뢰하지 못하는 듯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리브, 알지?”

루시테가 꺼낸 이름에 소년의 고집스러웠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 애를 만났어. 광장에서 널 찾고 있더라. 리브에게 너를 데리고 오겠다고 약속했어. 그러니까 지금은 나를 믿는 게 좋을 거야.”

소년은 눈에서 힘을 빼곤 주먹을 쥐고 있던 손을 툭 내려놓았다. 무언의 수긍이었다.

루시테는 소년의 팔을 제 어깨에 두르고 소년을 부축했다.

소년이 얌전히 루시테의 어깨에 제 몸을 기대며 따라 일어났다.

“걸을 수 있겠어?”

루시테는 제 어깨에 닿은 소년의 얼굴이 살짝 끄덕이는 것을 느꼈다.

루시테는 소년을 부축해서 철창의 입구 쪽으로 몇 걸음을 옮겼다.

루시테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던 세드릭이 루시테 쪽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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