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어디로 데리고 갈 거냐?”
루시테는 멈칫했다.
리브에게 데리고 돌아간다고 약속은 했는데 소년을 이 꼴로 데려갈 수는 없었다.
분명히 리브가 충격을 받을 테니까.
게다가 이들은 집도 없어서 마구간이나 인적이 드문 거리에서 잔다고 하지 않았던가.
‘끙.’
루시테는 힘이 빠지려 하는 허리에 힘을 주며 소매치기 소년을 제대로 부축했다.
“꼬마, 어디로 데려갈 거냐니까?”
“기사님이 상관하실 바가 아닙니다.”
루시테는 딱 잘라 말하곤 세드릭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사람을 이렇게 때려놓은 주제에 그 뒤는 무슨 상관인지.
루시테는 이제 소년을 돌려받았으니 세드릭이 무슨 생각을 하든, 뭘 하든 알 바 아니었다.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라니. 도와주겠다. 그 조그만 몸으로 데리고 가기는 어려울 테니.”
세드릭이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루시테의 옆으로 성큼성큼 따라왔다.
한편 루시테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레일리가 세드릭과 루시테의 사이를 막아섰다.
레일리 역시 루시테를 지켜보던 입장이었지만 그는 세드릭이 더 이상 루시테에게 상관하는 것을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백작의 도움은 필요 없다지 않나.”
“아사드 공이야말로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만.”
둘 사이에서 사나운 공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백작이 쓸데없는 짓을 하는 바람에 루시 양이 고생하는 걸 모르는 건가? 염치가 있는지 모르겠군.”
레일리의 은빛 눈동자가 사납게 번뜩였다.
“제가 염치가 있건 없건 공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만. 이건 저와 꼬맹이 둘 사이의 일이니 신경끄든지 하십시오.”
세드릭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금방이라도 달려들 사람처럼 위협적인 기세를 내뿜었다.
‘하아······.’
또 시작이네.
루시테는 한숨을 삼켰다.
루시테는 이럴 때면 둘 모두를 버리고 이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어졌다.
둘이 만나자마자 으르렁거리는 것은 지난번에도 봤지만, 역시 다시 봐도 둘 모두와 인연을 끊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아졌다.
저들이 저럴 때마다 어디에선가 그녀의 명줄이 간당간당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저번처럼 다 버리고 도망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그녀에게는 다친 사람이라는 짐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 루시테가 누구의 손을 들어야 할까. 정답은 하나였다.
“레일리.”
루시테는 손을 뻗어 레일리의 옷자락을 잡았다.
레일리와 세드릭이 순식간에 기세를 갈무리하고 루시테를 돌아보았다.
“레일리, 저를 도와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지금 도와주세요.”
루시테는 염치는 잠시 접어두고 레일리에게 당당하게 도와 달라고 요구했다.
평소라면 할 리가 없는 말이었다.
그것을 아는 걸까. 레일리는 승리자의 얼굴로 오만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루시 양. 말만 해요, 나의 레이디.”
레일리의 미소와 목소리가 악마의 그것처럼 매혹적이었다.
그는 루시테가 그에게 도움을 요청한 것에 못내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그러나 루시테는 레일리의 유혹적인 미소에도 레일리를 온전히 믿지는 않았다.
루시테는 레일리의 미소 속에 시커먼 꿍꿍이가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그에게 꿍꿍이가 있기에 이토록 순순히 도와주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루시테를 쳐다도 보지 않을 사람이란 걸 루시테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루시테는 레일리에게 다시 부탁했다.
“저랑 이 소년을 제 집으로 데려다주세요. 지금 당장.”
“그러죠, 나의 레이디.”
레일리는 제 소매를 붙든 루시테의 손을 역으로 탁 붙잡았다.
“젠장! 기다려!”
레일리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챈 세드릭이 벼락처럼 외치며 루시테를 붙잡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레일리의 마법이 한발 빨랐다.
레일리와 루시테, 그리고 다친 소매치기 소년의 발밑에 빛나는 원이 나타났고 그들은 순식간에 부서지듯 원 안으로 사라졌다.
세드릭이 손을 뻗었을 때 붙잡은 것이라고는 루시테가 있던 자리에 남은 잔상뿐이었다.
“젠장!”
세드릭은 버럭 화를 내며 당장에 지하실을 벗어나 위층으로 올라왔다.
세드릭은 이것저것 생각할 것도 없이 문을 박차고 당장 집을 나섰다.
몇 안 되는 백작저의 시종들이 세드릭더러 어딜 가느냐고 붙잡았다.
그러나 막무가내인 그를 막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세드릭은 제가 왜 루시라는 여자의 뒤를 따라가는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그녀의 집을 향해 달렸다.
세드릭의 콧잔등을 타고 땀방울이 뚝뚝 흘렀다.
마법사 레일리 아사드에 대한 승부 욕인지, 아니면 루시 필드라는 여자에게 끌리는 마음인지.
세드릭은 알 턱이 없었다. 그는 그저 늘 그래왔듯 그의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향했다.
루시 필드의 수상한 산 중턱 하우스에서 있었던 일이 잔상처럼 스치듯 지나갔다.
그곳에서 느꼈던 편안한 분위기와 그곳에서 먹었던 따스한 음식의 냄새가 그의 코끝을 맴도는 듯했다.
* * *
루시테는 2층의 방 중 하나에 소년을 눕혔다.
혹시 몰라 죄다 치워두길 잘했다. 그렇지 않았으면 먼지 속에 환자를 눕힐 뻔했다.
방 안에는 곳곳에 루시테의 손길이 안 닿은 곳이 없이 깨끗했다.
햇빛 아래 잘 말려 바작바작한 흰 시트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고, 방 안의 분위기는 정갈하고 따스했다.
레일리는 한쪽 벽에 기대어 바쁘게 움직이는 루시테를 가만히 관찰했다.
루시테는 쉴 새 없이 움직였다. 물을 떠 오고 어디서 가져온 건지 각종 연고와 약초들을 들고 왔다.
루시테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소년의 옷을 벗겼다.
소년은 이제 눈 뜰 힘도 없는 듯 눈을 감고 색색거리며 가쁜 호흡만을 내쉬고 있었다.
상처 부위를 물로 닦아내고, 연고를 바르고, 약초를 붙이고. 붕대를 감고, 또 잊지 않고 소년의 입에 물과 미음을 넘겨주고.
그 모든 행동이 어린 소녀 같은 그녀의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능숙해 보였다.
모든 일을 하는 동안, 루시테는 레일리에게 어떤 도움도 구하지 않고 오롯이 혼자만의 힘으로 소년을 치료했다.
‘신기해.’
레일리는 루시테를 지켜보며 생각했다.
쳐다만 보고 있어도 시간 가는 줄을 모르겠다는 말을 레일리는 새삼 체감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은 결코 하지 않고, 하루에도 수십 번 변덕이 죽 끓듯 하는 그로서는 몹시 드문 경우였다.
레일리는 이곳에서 루시테를 만난 이후 지금까지도 루시테에 대한 호기심에 푹 빠져 지내고 있었다.
그는 그동안 루시테에 대한 모든 정보를 모으고 분석했다.
정확히는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뒤틀린 마나와, 용종의 힘을 이어받은 그조차 쉬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독한 저주에 대해 알기 위해 깊이 연구하는 중이었다.
신성 제국 메이븐의 역사를 속속들이 파헤치는 것은 물론이고 헤카레트 신전과의 관계, 메이븐을 타고 흐르는 신성한 힘에 관해서도 깊이 파고들었다.
그러나 어느 쪽을 조사해봐도 루시테 클라우디오, 저 여자의 저주에 대한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어느 쪽일까.’
레일리는 입꼬리를 올렸다. 마법 아니면 신성력. 그 둘 중 하나에 분명 실마리가 있을 터였다.
아직도 세상에 자신이 풀지 못한 비밀이 있다는 사실이, 용종의 피를 이어받은 그의 호기심을 미치도록 자극했다.
“레일리.”
상념에 잠겨 있는 레일리를 작고 청아한 목소리가 깨웠다. 듣기 좋은 담담하고 맑은 미성.
레일리는 제 눈앞에 서 있는 작은 여자를 보곤 은빛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제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루시 양.”
“아뇨. 그게 아니에요.”
루시테는 고개를 저었다.
“배고프시지 않나요? 내려오세요. 저녁 챙겨드릴게요.”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군요.”
“네. 그럼 내려오세요. 준비하고 있을게요.”
루시테는 말을 마치곤 바쁜 걸음으로 1층으로 내려갔다.
멀리 그녀가 계단을 내려가는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레일리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루시테가 나간 곳을 쳐다보았다.
재미있었다.
레일리는 자신이 루시테의 저주에만 흥미가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몸이 자라지 않는 지독한 저주에 걸린 채로 23년의 인생을 산 여자는 언제나 그의 예상과 다른 행동을 했다.
그간 그녀가 어떤 일을 겪어왔으며, 또 어떤 결심을 하고 이곳에 왔는지 정도는 뻔히 예상할 수 있었다.
메이븐의 황성에서 짐승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고통을 받았을 것이고, 그것이 싫어서 이렇게 먼 아테라까지 온 것일 텐데.
그런 억눌린 환경에 자란 여자치고는 너무도 특이하지 않은가.
루시테 클라우디오.
루시 필드라는 가짜 이름 속에 자신을 숨기고 사는 저 여자는 언제나 그의 예상을 넘어선 행동을 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침착하고.
목숨이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다른 이를 위해 기꺼이 위험 속으로 뛰어들 정도로 책임감과 의리가 강하고.
자라온 환경을 생각하면 이기적이고 자기만 생각하고 살아도 모자랄 판에, 이타적이고 정이 많고 어떨 때는 놀랄 정도로 생각이 깊기도 했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해야 할 말과 해야 할 일을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여자가 제 돈주머니를 훔친 소매치기 소년을 구했다.
염치도 없이 저를 원망하려는 소년을 달래고 치료하고 먹였다.
상처를 치료하는 방법은 또 어디에서 배웠단 말인가?
메이븐 황성에서 갇혀만 지냈을 텐데, 어떻게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능숙한 손길로 상처를 치료한단 말인가?
저 작은 여자가 23살의 나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른스럽고 지혜롭게 느껴질 때가 종종 있었다.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과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일까?
“아주 재미있어.”
레일리는 중얼거리며 짙게 미소 지었다.
그는 이제 온전히 인정했다.
자신이 루시테 클라우디오라는 저주받은 폐황녀에게 마법적 호기심뿐만이 아니라 인간적인 흥미까지 깊이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지금조차, 저렇게 바쁜 상황에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켜보고만 있는 그의 저녁을 챙기겠다고 부산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우스웠다.
이타적이며 지독하게도 성실한 모습이 성스럽기까지 했다.
레일리는 기대고 있던 벽에서 천천히 등을 뗐다.
레일리는 걸음을 옮겨 침대에 누워있는 좀도둑 소년에게로 다가갔다.
소년은 가만히 누워 끓어오르는 열로 가슴을 들썩이고 있었다.
루시테가 돌봐준 덕에 한결 나은 상태이긴 했으나 여전히 위중했다.
“운이 좋은 놈이로군.”
레일리는 소년의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레일리의 손에서 흰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소년에게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빛이 스며들면서 소년의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들끓던 열이 내리고 호흡이 편안해졌다.
부었던 얼굴이 가라앉고 피가 뭉친 멍이 빠졌다. 부서진 갈비뼈가 붙고 생채기가 사라졌다.
최소 6서클 이상의 마법사가 쓸 수 있는 ‘힐’이었다.
드래곤 하트의 힘으로 8서클 이상의 힘을 가진 그가 사용한 ‘힐’은 위력이 남달랐다.
소년이 입은 모든 상처를 치유하고도 남을 마나가 소년을 뒤덮었다.
소년은 숨결이 완전히 편안해진 상태로 고르게 호흡하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레일리는 그 모습을 확인하곤 뒤로 돌아 1층으로 내려왔다.
1층에서는 루시테가 부지런히 저녁 식탁을 차리고 있었다.
루시테의 뒤를 통통한 실버 드래곤이 졸졸 따라다니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여자는 참 이상한 것들이 꼬이기도 많이 꼬였다.
이 세상의 마지막 드래곤에다가 드래곤 하트를 유전한 자신. 그리고 미친 검사 세드릭 디에고까지.
“레일리! 거의 다 됐어요. 앉으세요.”
“그러죠. 루시 양.”
레일리는 의자를 빼고 앉았다. 그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루시테의 뒤를 따랐다.
그는 아무에게나 마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누구도 억지로 그에게 마법을 쓰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런 그가 죽어도 상관없는 소년에게 많은 마나를 필요로 하는 치유 마법을 썼다.
오직 타국의 폐황녀 루시테 클라우디오를 위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까?
레일리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그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호기심을 충족하는 데 최선을 다하기로 마음먹었다.
* * *
쾅쾅쾅쾅!
루시테와 노이, 그리고 레일리가 막 식사를 시작하려 하는데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렸다.
루시테는 입술을 달싹였다. 왠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어이, 꼬마! 집에 있지? 잠깐만 나와 봐!”
굵직한 목소리의 주인이 소리를 치며 문을 쾅쾅 두드려대었다.
루시테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왜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를 않는 걸까.
어딜 보나 세드릭 디에고 그 인간이었다.
“제가 쫓아줄까요?”
레일리가 아주 솔깃한 제안을 했다.
루시테는 잠시 혹하여 레일리를 바라보다 곧 고개를 저었다.
저 둘이 입구에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레일리더러 쫓아내 달라고 한단 말인가.
잘못하다 집 문을 부수거나 집을 터뜨려 버리거나 하면 매우 곤란했다.
“식사하고 계세요. 제가 나갔다 올게요.”
루시테는 내키지 않는 걸음을 이끌고 입구로 나가 문을 열었다.
땀에 푹 절은 모습의 세드릭이 그녀의 집 문 앞에 서 있었다.
‘왜 여기까지 쫓아온 걸까.’
나한테 무슨 볼일이 있다고.
루시테는 세드릭이 나타난 게 이해가 안 됐다.
모든 게 그가 원하는 대로 된 상황이 아닌가.
레일리가 황성에 다녀왔다고 했으니, 세드릭도 당분간은 레일리를 데려오라는 황제의 명을 수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기사님. 어쩐 일이세요?”
‘조금 전 우리 할 말은 다 끝난 거 아니냐’는 뉘앙스로 루시테는 딱딱하게 말했다.
“하.”
제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기던 세드릭은 눈앞의 작은 여자를 쳐다보며 푸른 눈동자를 굴렸다.
여태껏 달렸으면서 본인조차 생각해보지 못한 물음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냐니.
그러게나 말이다. 자신은 여기까지 왜 쫓아온 건가.
세드릭은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쳤다.
“나도 잘 모르겠군. 어쩐 일로 왔는지.”
“네?”
루시테는 입을 벌렸다. 본인이 여기까지 찾아와 놓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할 말이 있어서 온 거 아닌가? 그럼 어서 할 말만 하고 가면 좋으련만.
세드릭 디에고는 이안과 닮은 얼굴을 하고서는 얼빠진 표정만 짓고 있었다.
“기사님, 죄송하지만 저는 오늘 바빠요. 집에 환자가 있어서요. 아시겠지만······.”
루시테는 세드릭에게 돌아가라는 뉘앙스를 계속 풍기며 얘기했다.
그러나 세드릭은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는 보석 같은, 하지만 얼빠진 눈동자로 루시테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어떤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잠시만요.”
루시테는 집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물을 컵에 따르고 깨끗한 수건에 물을 적셨다.
그녀가 물과 적신 수건을 다시 들고 세드릭에게로 온 것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 마셔요.”
루시테는 세드릭에게 물컵을 건넸다.
“이걸로 땀도 좀 닦고요.”
세드릭은 바보 같은 표정으로 루시테에게서 수건을 건네받을 뿐 멀뚱멀뚱하고 있었다.
루시테는 팔짱을 끼고 세드릭을 잠시 쳐다보았다.
“휴.”
‘이 인간, 대체 왜 이러는 거람.’
루시테는 한숨을 삼키고 세드릭에게서 수건을 빼앗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젖은 수건으로 그의 턱에 맺힌 땀방울을 닦았다.
푸른 눈이 도륵 굴러 루시테를 향했다.
“기사님, 고개 좀 숙여 보세요. 손이 안 닿아요.”
세드릭은 넋이 나간 것처럼 보였지만 고분고분하게 말은 잘 들었다. 그는 루시테가 시키는 대로 허리를 구부렸다.
루시테는 손을 뻗어 그의 얼굴에 묻은 땀을 수건으로 대강 닦아냈다.
세드릭은 제 얼굴에 차갑고 부드러운 감촉이 닿았다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됐어요.”
루시테는 세드릭의 목에 수건을 걸어준 후 손을 뗐다.
그 손끝을 세드릭이 아쉽다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물 드세요. 그거.”
세드릭은 제 손에 들린 물컵을 쳐다보았다.
세드릭은 곧바로 컵 속의 물을 전부 다 마셨다. 굵은 목울대가 꿀꺽꿀꺽 움직였다.
루시테는 세드릭의 손에서 물컵을 가져왔다.
“많이 늦었어요. 피곤해 보이시는데 오늘은 일단 돌아가시고 다음에 얘기해요.”
루시테는 손을 뻗어 세드릭의 뒤쪽을 가리켰다.
그녀의 집이 아닌 산 중턱을 내려가는 방향 쪽으로. 어서 돌아가라는 마음을 한가득 담아.
루시테는 세드릭의 옷소매를 잡아끌었다. 다행히 세드릭은 순순히 따라왔다.
세드릭은 천천히 루시테를 따라 걸었다.
“물어볼 게 있는데.”
잘 걷던 세드릭이 갑자기 우뚝 멈춰 섰다.
“무엇인가요?”
“정말 스물셋인가?”
“네.”
긴장했던 루시테는 별것 아닌 질문에 곧바로 대답했다.
“저 마법사 놈도 알고 있는 건가?”
마법사 놈이라.
세드릭은 레일리가 있는 자리에서는 그래도 정중한 말투를 쓰더니 그가 없으면 반말을 찍찍 날렸다.
“네. 그게 뭐 비밀이라고.”
루시테는 누구에게도 나이를 속일 생각이 없었다.
지금처럼 얼굴만 잘 가리고 다니면 될 텐데 뭐 하러 속인단 말인가?
“그게 뭐 비밀이라니! 네가 이런 걸 알게 되면 이용할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는 생각해봤나?”
세드릭은 본인이 괜찮다는데 괜히 버럭 화를 냈다.
루시테는 세드릭이 왜 이러는지 이해가 안 갔다. 자기랑 무슨 상관이라고.
“네가 그 모습인 건 사정이 있다고 했었지.”
“네.”
“무슨 사정인지 저 마법사 놈도 알고 있나?”
루시테는 잠시 고민했다.
“네. 아는 것 같아요.”
저주라는 걸 알아보았으니, 레일리가 안다고 보는 게 맞았다.
“젠장!”
세드릭이 또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왜 그놈에게는 알려준 것이냐? 내가 그놈보다 못 믿을 만하다는 건가?”
‘아.’
루시테는 세드릭이 왜 이러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 미친 인간은 지금 레일리에게 느끼는 경쟁심을 자신에게 푸는 것 같았다.
몸만 컸지 정신머리는 아주 어린 아이가 따로 없었다.
세드릭이 왜 이러는지 실마리가 잡히니 루시테는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이 인간 이렇게 보내면 분명히 다시 찾아온다.’
루시테는 대충 설명해주고 세드릭을 보내기로 마음먹었다.
이 부분도 딱히 말을 못 해줄 건 없었다.
마법사나 마녀의 저주에 걸리는 건 드물게 있는 경우였으니 말이다.
“기사님께도 알려드릴게요.”
“뭐?”
세드릭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정말로 놀란듯했다.
“나한테 말해주겠다는 거냐? 마법사 놈만 알고 있다는 그 비밀을?”
딱히 레일리만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루시테는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네. 비밀이 뭐냐면 말이에요. 제가 이 모양인 이유는······.”
세드릭이 침을 꼴깍 삼켰다. 순진해 보이기까지 한 그 모습에 루시테는 괜히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별 건 아니고, 그냥 저주를 받아서 그런 거예요.”
“저주?”
“네. 저주. 그래서 몸이 안 자라요. 이제 궁금증 풀리신 거죠? 그럼 이만 가보세요! 저 바빠요.”
루시테는 저보다 덩치가 몇 배는 큰 남자를 꾹꾹 밀었다.
세드릭은 마침내 발걸음을 옮겨 돌아갔다. 입속으로 ‘저주라고…….’ 같은 말을 열심히 중얼거리며.
“진작 이럴걸.”
루시테는 멀어지는 세드릭을 보며 만족스러워 작게 중얼거렸다.
“잘 가요! 다시는 오지 말아요.”
희망이 담긴 한 마디도 세드릭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만 작게 덧붙였다.
* * *
루시테는 세드릭을 돌려보내고 집 안으로 다시 들어왔다.
언제나처럼 일상의 풍경이 집 안에 펼쳐져 있었다.
커다란 창밖에는 물감을 뿌린 듯 주홍빛 노을이 짙게 물들어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잘 세팅한 음식 그릇이 놓여 있다.
그리고 의자에는 배를 두드리고 있는 노이가 있었다.
유일하게 그녀의 일상과 다른 것이라면…….
“대화가 길어졌나 보네요. 루시.”
레일리가 루시테를 향해 눈을 둥글게 휘었다. 루시테는 숨을 멈췄다.
짙은 검은색 머리칼이 노을 앞에서 붉은빛처럼 보였다.
언제 가면을 벗었는지 수려한 얼굴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과 반짝이는 은빛 눈동자가 흩뿌려진 주홍빛 노을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저······ 저녁 식사는 다 하셨어요?”
루시테는 입안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가 갈라졌다.
“네, 맛있었습니다. 루시 양도 식사하셔야죠.”
“아······ 아뇨. 입맛이 없어서요.”
루시테는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었다. 입안이 자꾸만 마르고 목이 탔다.
가면 쓴 모습으로만 보다가 맨얼굴을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런 걸까.
아니면 그가 자꾸만 눈을 마주칠 때마다 눈부신 미소를 보여주어서 그런 걸까.
그가 정말로 자신에게 순수한 다정함을 보여주고 있다고 루시테는 착각하고 말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어느 정도 착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거짓말도 백 번을 하면 진실처럼 된다더니. 거짓 다정함을 계속 받으니 정말로 믿게 될 것 같았다.
저 눈빛 속에 꿍꿍이가 있으리라는 것을, 정작 그는 다른 생각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루시테는 그냥 레일리를 믿고 싶어졌다.
그녀에게 자꾸 잘해주며 다가오는 레일리를.
“저, 잠시 위에 좀 올라갔다 올게요.”
루시테는 레일리에게서 고개를 홱 돌렸다.
계속 바라보고 있다간 무언가가 변할 것만 같은 불안한 기분이 들었기에.
그녀의 안에 있는 무언가가.
계단을 순식간에 뛰어 올라간 루시테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말고 우뚝 섰다.
‘의심하고 또 의심해야 해.’
루시테는 눈을 꽉 감았다.
아무리 웃는 낯으로 다가오는 사람이라도 온전히 믿어서는 안 된다.
지금 유지하고 있는 이 가늘고 촛불 같은 삶이라도 유지하고 싶다면.
루시테는 언제나 주의해야 했다.
의심하고 또 의심해서 위험을 피하고, 위기에서 도망치고.
그렇게 해서 이전 세 번의 인생과 같은 삶을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후우······.”
루시테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주마등처럼 지나간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첫 번째 생은 자살로 위장한 살해를 당했고 두 번째 생은 독살을 당했다.
그리고 세 번째 생은 사형을 당했다. 황제가 된 이복동생 이안에 의해서.
지금도 그때의 느낌이 생생했다.
끔찍했던 지난날의 기억들.
속부터 뜨거워지며 모든 게 녹아내리던 그 날의 기억들.
웃으며 다가오는 사람들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에는 루시테는 너무도 지독한 인생을 지나왔다.
끔찍한 고통 속에 삶을 허비했던 지난날들.
다시는 그런 삶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목숨을 걸고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던가.
루시테는 결코 이번 생을 같은 결말로 마무리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니까 흔들리지 말자.’
강해져야 해. 루시테.
루시테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중얼거리며 방문을 밀었다.
“어?”
루시테는 소매치기 소년의 물수건을 갈아주려다 눈을 크게 떴다.
소년의 안색이 눈에 띄게 편안해 보였다.
아니, 편안해 보이는 정도가 아니었다. 소년은 아파서 쓰러진 사람이 아니라 그냥 잠든 사람처럼 보였다.
루시테는 소년의 이마에 손을 대 열을 재어도 보고 이불을 들춰 상처를 확인도 해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열이 펄펄 끓던 이마가 미지근했다.
자잘하게 나 있던 생채기는 물론, 얼굴에 있던 커다란 피멍 자국들도 사라지고 붓기도 가라앉아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루시테는 발을 동동 굴렀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자신이 헛것을 본 건가 싶어 붕대도 죄다 풀어 보았지만 붕대 안쪽도 마찬가지로 깨끗했다.
루시테는 방 안을 배회하다 1층으로 달려 내려갔다.
기적이었다. 기적이 일어난 것만 같았다.
“레일리! 레일······.”
루시테는 레일리를 부르다 그와 눈이 마주치곤 우뚝 멈춰 섰다.
노이와 뭐라 대화를 하던 레일리가 루시테의 목소리를 듣고는 루시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레일리의 표정을 보니 어떤 확신이 루시테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레일리가 그랬어요?”
“소년을 치료한 거라면 제가 맞습니다, 루시. 잊고 계셨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꽤 강한 마법사라 그 정도 치료할 실력은 됩니다.”
레일리가 오만한 눈빛으로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루시 양을 찾아온 무식한 백작보다는 제가 훨씬 도움이 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도움을 제가 받아도 될는지.”
루시테는 입술을 달싹였다.
정말 레일리가 소년을 치료한 게 맞았다니. 자신과 상관없는 일에는 조금의 관심도 가지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이 그 소년을 치료했다니.
루시테는 레일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조금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아예 모르게 되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를 않았다.
“레일리.”
루시테는 단호한 목소리로 레일리를 불렀다.
루시테는 그에게 더 이상 빚을 지고 싶지 않았다.
가늘고 긴 삶을 위해 어차피 언제가 끊어야 할 인연.
그렇다면 셈을 확실히 해야 할 터였다.
“왜 그러십니까? 루시.”
레일리는 루시테가 감사 인사를 할 것을 예상하며 눈을 휘었다.
그러나 알고 있을까. 루시테가 레일리를 이해를 못 하는 만큼이나, 레일리도 루시테의 행동과 생각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 말해주세요. 제게 바라시는 게 뭐죠?”
루시테의 목소리가 딱딱해졌다.
“오늘 오전에 말씀하신 대로 저를 도와주셨으니, 저도 확실하게 보답을 드리고 싶어요. 말씀하세요. 제게 바라시는 게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죠.”
레일리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눈앞의 작은 여자는 순한 듯하면서도 그렇지 않을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그의 속내를 읽어내고 선을 그으려 하고 있지 않은가.
현명한 판단이었다. 현명한 판단이지만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왜 유쾌하지 않은 걸까.
레일리는 미간을 좁혔다.
그는 루시테를 통해 제 호기심만 충족하면 될 터인데, 루시테가 선을 그으려 하는 게 불편하다니.
“말해주세요. 제가 들어 드릴 수 있는 거라면 꼭 해드릴게요.”
루시테는 레일리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라고 재촉했다.
레일리는 루시테의 재촉을 듣곤 생각을 멈췄다.
그래, 그는 목적만 채우면 그만이었다. 그는 예정했던 대로 그녀에게서 많은 것을 알아낼 생각이었다.
레일리는 언제 당황했냐는 듯 평소의 그로 순식간에 돌아왔다.
그는 냉정하면서도 오만한 마법사로 돌아와 루시테에게 말했다.
“루시. 당신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어쩌면 로맨틱하게 들릴지도 모를 말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루시테는 레일리의 달콤한 말에도 침착할 수 있었다.
“저에 대해 알고 싶다는 거. 그게 당신이 제게 바라는 건가요?”
“네. 루시 양이 알고 있는 것 전부, 제가 알고 싶군요. 루시 양에게도 좋은 일일 겁니다. 어쩌면 제가 루시 양의 저주를 푸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루시테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야 레일리가 자신에게 잘해주고 다정하게 대해주고, 여러 도움을 준 이유가 투명해졌다.
마법사들이란 호기심에 미치는 작자들이라더니.
그녀에 대해 캐내고 싶어서. 오로지 저주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레일리가 그동안 따뜻하게 대해줬던 거였다.
바보같이.
‘저한테 왜 잘해주세요?’
그런 바보 같은 질문 따위 하지 않길 잘했다.
그에게 꿍꿍이가 있을 거라고 끝없이 의심하고 선을 긋기를 잘했다.
“레일리, 알고 있나요?”
“뭘 말입니까?”
“당신이 좀도둑 소년을 구출해준 데 대한 도움을 주신 일로, 당신에게 제 모든 걸 알려주라는 대가는 너무 크다는 사실을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 걸까.
루시테는 두통이 이는 것만 같아 이마를 짚었다.
루시테는 아마도 레일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비밀이 많은 사람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이번 생이 처음이 아니니까.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제가 마지막 용.”
레일리는 노이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노이를 용으로서 성장시키는 데 도움을 드리겠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면 거래가 됩니까?”
루시테의 검은 눈이 흔들렸다. 무척이나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사실, 마지막 용을 돌보는 데 자신이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루시테는 너무도 걱정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드래곤은 이 세상 모든 생명체 중에 가장 지혜롭고 강대한 생명체라던데, 노이는 날이 갈수록 식탐만 강해지고 있지 않은가.
루시테는 그게 모두 자기 탓인 것 같다는 생각에 몹시 미안하던 참이었다.
그러나 드래곤 하트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루시테에 대해서만 알고 싶어 하는 대단한 마법사라면.
그라면 노이에 대해서는 믿고 맡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루시테는 생각했다.
“한 가지 더. 여쭤볼 게 있어요.”
루시테는 거의 마음을 정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엇입니까?”
“제 얘기를 듣고 어떻게 하실지 궁금해요. 어딘가에 알린다거나······.”
루시테가 가장 걱정하는 것은 그것이었다.
이 위태로운 평화가 흔들리는 일. 제국에서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되는 일.
“제가 왜 그래야 합니까?”
“네?”
“제가 힘들게 얻은 정보를 뭐 하러 남에게까지 공유합니까? 그 부분은 걱정 안 하셔도 될 것 같군요. 대답이 되었습니까?”
레일리가 오만하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레일리는 믿을 수 없지만 믿음직했다. 언제나처럼.
“후.”
루시테는 마음을 정하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요. 뭐가 궁금하신가요?”
“오늘은 쉬시죠.”
“네?”
“많이 지쳐 보입니다. 오늘은 푹 쉬고. 제가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레일리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또 뵙겠습니다. 루시.”
말이 끝나자마자 그의 발밑에 하얀 빛무리가 나타나더니 레일리가 그대로 사라졌다.
루시테는 레일리가 사라진 자리를 잠시 멍하니 쳐다보다 휘청이며 테이블에 엎드렸다.
쌓였던 스트레스와 피로가 한 번에 파도처럼 덮쳐왔다.
루시테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오늘 하루 너무 힘겹게 뛰어다니고, 레일리와 세드릭을 상대하느라 기진맥진했으며. 소년을 치료하느라 힘들었다는 사실을.
그래서 그 사이 한 번도 쉬지 못했다는 사실을.
하루가 참 길었다.
* * *
루시테는 이른 아침부터 소년을 살폈다.
소년은 겉으로는 완벽히 치유된 것 같았지만 여전히 깊은 잠에 빠져 깨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마법으로 치유를 하면, 상처는 완벽하게 낫게 할 수 있지만 그 아픔까지 온전히 가시게 하지는 못한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소년은 아직 고통이 다 없어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먼저 환기를 시키고 침대 주변을 대충 정리한 루시테는 소년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아준 후 방을 나왔다.
루시테는 1층으로 내려오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성녀가 되면······.’
진짜 성녀가 되면 마법사가 사용하는 치유마법과는 다른 힘을 쓸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고통과 상처를 치유하는 힘. 그런 성스러운 힘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고 하던데.
“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루시테는 고개를 저었다.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세 번째 생애 자신은 신전에 납치를 당했고 대신관의 축복을 받아 저주가 풀렸다.
그때 몸이 자라 완전한 어른이 되면서 머리 색과 눈 색이 모두 보랏빛으로 변했고.
성스러운 빛깔을 휘감은 진짜 성녀.
루시테는 메이븐, 아니 이 세상의 진짜 성녀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비를 내렸을 때의 신성한 느낌이 지금도 생생했다.
손끝에서부터 퍼져나가던 신성한 보랏빛 기운. 그 기운이 하늘에 닿자 3년간 비가 내리지 않았던 하늘로부터 폭우가 내렸다.
그리고 대기근과 가뭄을 끝낸 후 그녀는 사형을 당했다.
진짜 성녀가 되고자 한 그녀의 이복동생 비올레타를 위해.
“메이븐은 저주받은 황녀가 사실은 진짜 성녀라는 걸 인정할 수 없었지.”
루시테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옛날 일을 떠올리는 그녀의 얼굴에는 고통이 가득했다.
비는 그녀가 내렸건만 정작 비를 내린 사람은 비올레타가 되어 있었고, 비올레타는 당연하다는 듯 루시테를 대신하여 제국의 성녀가 되었다.
루시테는 악마의 화신이라는 오명을 쓰고 비올레타가 보는 앞에서 사형을 당했다.
황제가 된 이안의 명령에 의해서.
사람들은 저들을 위해 정말로 비를 내려주었던 루시테에게 돌을 던졌고 저주를 퍼부었다.
목이 잘리던 마지막 순간. 비올레타와 이안은 속이 후련하다는 듯 안면 가득 미소를 지었다.
루시테는 지금도 그들의 웃음을 잊을 수가 없었다.
“하아, 하.”
끔찍한 기억에 숨이 가빠져 오고 이마에 식은땀이 흘렀다.
루시테는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계단을 마저 달려 내려갔다.
레일리가 저주를 푼다느니 하는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괜히 기분이 이상해진 것 같았다.
어차피 다 부질없는 생각일 뿐인데.
“나는 절대 성녀가 되지 않을 거야. 절대로.”
루시테는 계단을 다 내려와 눈을 꽉 감았다 뜨곤 중얼거렸다.
* * *
루시테는 정신없이 오전을 보냈다.
노이의 아침을 챙기자마자 광장으로 나가 필요한 약초들을 좀 더 샀다.
그리고 이반의 서점으로 가서 리브를 데려왔다.
리브는 루시테를 보자마자 빨개진 눈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결국, 루시테가 어제 나타나지 않았기에 온갖 걱정을 하느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것이다.
루시테는 자초지종을 대강 설명하며 리브를 산 중턱 하우스로 데리고 왔다.
물론 리브를 데리고 나오기 전, 루시테를 믿고 하루 동안 리브를 맡아준 이반 영감에게 감사하다고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리브는 제 오빠가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고 테이블에 앉았다.
“리브. 이곳이 내가 사는 집이야.”
“이곳에서 정말 혼자 사는 거예요, 아가씨?”
리브는 신기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루시테는 리브에게 차를 따라 주었다. 리브는 조심스럽게 차를 마시며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루시테는 갈등했다.
이대로 소년이 깨어나면 리브와 함께 돌려보낼 것인가, 아니면 다른 제안을 할 것인가.
만약 루시테가 리브와 좀도둑 소년을 그대로 내보낸다면 저 아이들이 갈 곳이야 뻔했다.
또 거리의 생활을 할 테고.
소년은 소매치기 짓을 계속하다가 잔인한 귀족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정말 큰 벌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리브, 몇 살이니?”
“저는 열두 살이에요.”
리브가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열두 살이었다니.
리브는 나이보다도 두 살은 더 어려 보였다.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이 큰 것 같았다.
“네 오빠는? 이름은 뭐고 몇 살이야?”
“오빠는 열다섯 살이에요! 이름은 에단이에요.”
열다섯이었다니. 에단 역시 제대로 먹지 못해 그런지, 제 나이보다 두셋은 더 어려 보였다.
“흠······.”
루시테는 잠시 고민했다. 리브와 루시테 사이에 정적이 감돌았다.
리브는 뭔지도 모르면서 괜히 긴장되는지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리브, 너 혹시 일을 해 볼래? 우리 집에서.”
“일이요?”
리브의 눈이 커졌다.
“그래. 내가 혼자 사는데 할 일이 너무 많거든. 집안일을 도와줄 사용인이 필요해. 일이 고되긴 하겠지만 숙식을 제공해줄 거야. 급여도 줄 거고.”
리브의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하고 싶어요! 하고 싶어요, 너무 하고 싶어요!”
리브는 주먹을 꼭 쥐고 열의에 차서 외쳤다.
“그런데 돈은 안 주셔도 돼요! 저는 여기에 살게 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은걸요! 저랑 저희 오빠는 갈 곳이 없으니까요!”
리브는 흥분해서 벌떡 일어났다.
“리브, 리브. 앉아보렴.”
루시테는 리브를 다독였다.
“잘 들으렴. 나는 너에게 공짜로 이 집에서 지내게 해 주는 게 아니야. 일을 시킬 거란다. 네 조그만 손으로 하기에 아주 힘든 일들일 수 있어.”
“괜찮아요! 저 집안일 해봤는걸요. 저 청소 잘해요!”
“그래. 그런 일들을 열심히 하는 대신 너는 정당한 급여를 받을 권리가 있어. 그리고 나는 네게 일을 많이 시킬 거고. 네가 일한 만큼만 급여를 줄 거야. 알겠니?”
리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조건이 있어. 네가 우리 집에서 지내려면 이곳에서 보고 들은 건 어딜 가서도 절대, 절대로 말을 하면 안 된단다.”
“당연하죠! 아가씨는 저와 오빠의 은인이에요! 제가 어디 가서 그러겠어요! 저는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리브의 연둣빛 눈동자가 진실하게 빛났다.
루시테는 리브에게 한 가지 시험을 하기로 했다. 루시테는 두건을 벗었다.
“!”
리브가 루시테의 얼굴을 보곤 놀라 입을 벌렸다.
“어, 어린…….”
“리브. 나는 스물셋이야. 저주를 받아서 이런 모습이지 어리지 않아.”
루시테는 단호하게 얘기했다.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저주받았다는 사실을 별로 알리고 싶지 않아. 이반 영감에게도. 비밀 지킬 수 있겠어?”
루시테의 말을 알아들은 리브의 눈빛이 결연해졌다.
“당연하죠, 아가씨! 저는 이제부터 아가씨 말만 들을 거예요! 절대로 어디 가서 말하지 않을 거예요. 아가씨는 저를 거둬준걸요!”
리브는 어렸지만 오랜 골목 생활로 눈치가 빨랐다.
리브는 루시테의 제안이 자신 같은 길바닥 인생에게 다시 오지 않을 기회라는 것을 알았다.
어느 누가 오갈 곳 없는 열두 살짜리 여자애를 하녀로 써 주겠는가?
리브는 제 오빠를 구해주고 자신을 고용해준 루시테가 너무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앞으로 정말 열심히 루시테를 도우리라 마음먹었다.
* * *
루시테는 리브에게 먼저 노이를 소개했다.
무어라고 설명해야 할지 곤란해서 그냥 애완용 도마뱀이라고만 얘기했는데 리브는 믿는 눈치였다.
루시테는 오전동안 리브에게 여러 가지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
리브는 손끝이 야무졌다. 처음 해보는 일도 있었지만 가르쳐주면 금세 알아듣고 해냈다.
늦은 오후. 계속 침대에만 누워있던 소년이 드디어 일어났다.
소년은 겉으로는 멀쩡했으나 꽤 지쳐 보였다.
루시테는 깨어난 소년에게, 리브와 함께 그간 일어났던 일을 설명했다.
아니꼽게 루시테를 바라보던 소년의 시선이 얘기를 하면 할수록 변했다.
이야기가 모두 끝난 후. 그는 순순히 루시테에게 지갑을 훔쳐서 미안하다며 사과했다.
사과를 받은 루시테는 소년에게도 리브와 같은 제안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비록 안 좋은 일로 얽혔다고 하는 하지만, 소년이 그녀의 지갑을 훔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는 바였으니까.
“뭐해? 밥 먹자.”
루시테는 계단 앞에 서서 여전히 머뭇거리고 있는 소년을 불렀다. 소년이 주춤거리며 다가왔다.
루시테는 오전에 먹고 남겨둔 스튜에 불을 올리고 햄과 계란을 구웠다.
햄이 구워지는 짭조름하고 구수한 기름 냄새와 향긋한 스튜 냄새가 금세 집 안으로 퍼져나갔다.
루시테는 그릇에 스튜를 한가득 담아 소년과 리브의 앞에 놔주었다.
“뇽! 뇽!”
노이가 제 것은 없냐는 듯 자리에 앉아 항의했다.
루시테는 노이의 앞에도 그릇을 놔주었다.
“뭐해? 얼른 먹어.”
루시테는 머뭇거리며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기만 하는 소년의 앞으로 그릇을 더 가까이 밀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스푼을 들어 스튜를 떠먹기 시작했다.
루시테를 쳐다보며 눈치를 보던 소년이 마침내 음식을 먹었다.
녀석은 몹시 배가 고팠던 모양이었다.
한 번 음식을 입에 대기 시작하더니, 접시에 고개가 들어갈 정도로 정신없이 음식을 먹었다.
그녀가 키우는 돼지 용 노이나, 소년이나 음식 먹는 속도가 막상막하였다.
“더 먹어.”
루시테는 남은 스튜를 박박 긁어 소년의 접시에 덜어주었다.
소년은 사양도 하지 않고 냉큼 스튜를 받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싹싹 다 먹었다.
루시테는 소년이 저녁을 다 먹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소년이 저녁을 다 먹기까지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에단이라고 했지?
소년이 순순히 대답했다.
“응.”
“너도 여기에서 일할래?”
“뭐?”
소년이 멀뚱한 표정으로 루시테를 쳐다봤다.
루시테는 리브와 함께 소년이 이곳에 지내기를 원했다.
“나한테 집사가 필요해. 이 집은 꽤 낡아서 손 볼 곳이 많거든. 네가 여기에서 일하는 대신 나는.”
루시테는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소년이 침을 꼴깍 삼켰다.
루시테는 손가락을 하나 접었다.
“잘 곳을 제공해줄 거고.”
루시테가 손가락을 하나 더 접었다.
“식사와 일자리.”
루시테의 손가락이 차례로 접혔다.
“그리고 급여도 줄 거야.”
“급여?”
“그래. 네가 일을 하고 정당하게 번 돈 말이야. 소매치기해서 번 돈이 아니라.”
소년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루시테는 소년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일손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지만 만약 소년이 거절한다면 루시테는 붙잡지 않을 생각이었다.
루시테는 부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도 아니었다.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만한 적선할 돈과 봉사할 시간, 그 모든 게 루시테에게는 없었다.
그러니 루시테가 소년에게 할 수 있는 제안은 딱 여기까지.
소년이 거절한다면 루시테는 소년을 말리지 않을 터였다.
‘어쩌면 이 녀석, 자존심 때문에 거절하지 않을까?’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루시테가 보기에 에단이라는 이 소년은 매우 자존심이 셌다.
그래서 루시테는 에단이 어쩌면 그녀의 제안을 거절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러면 절대 붙잡지 말아야지.’
루시테는 다짐했다.
그런데 웬걸. 루시테가 다짐한 지 채 몇 초도 지나지 않았을 때.
“나, 할래! 할게!”
에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시켜줘! 제발!”
에단이 루시테의 앞에 다가와 섰다. 에단의 눈빛이 간절했다.
에단은 배운 것도 없고, 거리에 굴러먹는 고아였지만 바보는 아니었다.
동생 리브가 그랬듯, 에단 역시 루시테의 제안이 자신 같은 거리의 소매치기 꼬마에게 올 리가 없는 대단히 귀한 제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쩌면 거리의 생활을 탈출하고, 그의 인생이 완전히 달라지는 그런 소중한 기회였다.
그래서 에단은 자존심을 모두 내려놓았다.
에단은 만약 루시테가 싫다고 한다면 무릎을 꿇고서라도 빌 각오가 되어 있었다.
“싫다면?”
루시테가 에단을 떠보듯 물었다.
에단은 루시테의 말이 끝나자마자 루시테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네가 시키는 건 뭐든 할게! 제발! 제발 부탁합니다!”
에단이 엎드려 제 이마를 바닥에 댔다. 루시테는 의자에서 일어나 에단을 일으켰다.
“내가 집주인이니까 앞으로 나한테 아가씨라고 불러. 반말은 안 돼.”
에단이 눈을 크게 떴다.
제대로 된 호칭으로 부르라는 것은, 에단을 고용하겠다는 루시테의 허락이나 다름없었다.
“네! 아가씨!”
에단은 기꺼이 대답했다.
“이제 제가 무얼 할까요! 시켜만 주세요!”
에단이 눈을 반짝이며 루시테의 말을 기다렸다.
“씻자. 일단.”
루시테가 씩 웃었다.
* * *
루시테는 리브와 에단에게 각각 해야 할 일을 정해주었다.
리브는 청소와 식사 준비를 할 하녀가 되었고, 에단은 정원과 그 밖의 시설을 관리할 집사가 되었다.
둘은 아직 모르는 게 많았지만, 열의를 가지고 루시테에게서 일을 배웠다. 각자 쓸 방도 배정해주었다.
사용인의 복장에 맞게 깨끗한 옷도 두 벌씩 장만해주었다.
루시테로서는 예정에 없던 지출이긴 했지만 그래도 남매가 깨끗한 옷을 입고 있는 건 꽤 보기 좋았다.
루시테는 미련 없이 남매의 몇 번이고 기워 입은 허름한 옷을 내다 버렸다.
남매도 그들의 새 옷에 충분히 만족하고 좋아했으니 괜찮았다.
그들은 며칠을 함께 지내며 서로 적응해갔으며 각자 맡은 일을 열심히 했다.
“정말 잘한 일 같아.”
루시테는 리브가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을 보며 기분 좋게 웃었다.
확실히 리브와 에단을 고용한 일은 요사이 가장 잘한 일이었다. 남매는 생각보다 일을 잘해주었다.
게다가 사용인이 있으니 루시테가 할 수 있는 일도 훨씬 많아졌다.
필사와 번역 일을 이전보다 훨씬 늘릴 수 있게 되었고, 그녀가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시간도 많아졌다.
리브와 에단에게 지급되는 급여와 늘어난 식비라는 지출이 있었으나, 루시테의 수입이 훨씬 높아졌기에 괜찮았다.
결과적으로는 완전히 플러스였다.
루시테의 펜촉이 양피지 위에서 부지런히 움직였다.
종이 위에 펜촉이 닿아 사각거리는 소리가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한참 루시테가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에단이 공손한 자세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누군데?”
“가면을 쓴 분이었습니다. 레일리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루시테는 레일리의 이름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 다녀올게. 집이랑 노이 잘 보고 있어 줘.”
“예. 아가씨.”
루시테는 황급히 로브를 찾아 걸치고 문으로 향했다.
레일리가 온 것이다. 저번에 약속했던 얘기를 들으러.
이 얘기는 집에서 할 얘기가 아니었다.
루시테는 갑자기 긴장되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할까.'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고민이었다.
루시테는 문을 열었다.
“루시 양.”
레일리가 눈을 반달 모양으로 휘며 루시를 반겼다.
루시테는 눈을 가늘게 떴다. 햇빛 때문에 눈이 부신 건지 레일리 때문에 눈이 부신 건지 알 수 없었다.
“우리 좀 걸어요. 제가 집에서는 얘기하기가 조금······.”
“좋습니다.”
레일리는 흔쾌히 대답했다. 그는 루시테와 함께 천천히 산길을 걸었다.
“재밌는 일을 하셨더군요. 루시 양의 지갑을 훔쳤던 소년을 돌보시는 겁니까?”
레일리가 자신을 마중하러 나온 소년의 얼굴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아뇨. 에단은 제가 돌보는 게 아니라 고용한 거예요. 일을 잘해주고 있어요.”
“그렇습니까.”
“에단과 여동생 리브가 제 집에서 일하기로 했어요.”
어차피 레일리와 보게 될 테니 루시테는 미리 말했다.
“루시 양은 좋은 어른이시군요.”
좋은 어른이라니.
“그렇지 않아요. 그냥 서로 필요해서 제 집에서 일하게 된 거니 그런 말씀 마세요.”
“루시 양이 그러시다면야.”
레일리와 루시테는 잠시 말없이 산속을 걸었다.
한참을 걷는 중에 루시테의 콧잔등에 차가운 것이 툭 떨어졌다. 루시테는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맑았는데 어느새 비가 오려는지 날씨가 흐려져 있었다.
높이 솟은 무성한 나무 위로 하늘이 어두웠다.
투둑. 툭.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레일리가 루시테의 머리 위로 팔을 뻗자 루시테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비가 오는 것 같은데 다른 곳으로 갈까요?”
“제 집은 안 되는데······.”
“그곳 말고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정되고 조용한 곳일 겁니다.”
“그렇다면 좋아요.”
루시테는 흔쾌히 승낙했다.
레일리는 루시테의 머리 위로 올렸던 손을 그대로 내려 루시테의 어깨를 감쌌다.
루시테가 레일리의 온기를 따스하다고 느낀 순간 그들의 발밑으로 흰 빛무리가 맴돌았다.
루시테는 눈을 깜박였다.
눈 깜짝할 새에 루시테는 숲이 아닌 다른 장소에 서 있었다.
레일리의 도움으로 몇 번 텔레포트를 해보았다지만 그렇다고 익숙해지는 건 아니었다.
루시테는 레일리가 쓰는 마법이 여전히 신기했으며 레일리가 대단해 보였다.
“여기는 어디예요?”
루시테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굉장히 깨끗하지만, 소박하고 단순한 것과는 거리가 먼 방이었다.
아니, 오히려 눈이 부시도록 화려했다.
커다란 창문 앞에 놓인 둥근 테이블과 그 위에 올려진 촛대는 모두 크리스털이었다.
한쪽 구석에는 새하얀 갑옷이 서 있었는데, 척 봐도 엄청나게 가격이 나가는 장식으로 보였다.
그 옆으로는 듣도 보도 못한 기상천외한 모양의 조각상들이 오묘한 조화를 이루며 나란히 놓여 있었다.
루시테는 주변을 둘러보다 천장을 올려다보고 또 기함했다.
무엇인가 주렁주렁 달린 샹들리에가 몹시 반짝거렸다.
잘 보니 샹들리에의 몸체는 크리스털이었고 끝에 주렁주렁 매달린 것들은 모두 다이아몬드였다.
벽에도 무언가가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거대한 사슴의 뿔부터 시작해서 특이하게 생긴 시계까지.
심지어 시계에도 에메랄드와 루비가 붙어 있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 방은 화려함의 끝판왕이라 할 수 있었다.
“여, 여기는 어디예요, 레일리?”
루시테는 레일리의 옷소매를 잡았다.
레일리는 가만히 서서 루시테를 재미있다는 듯 응시하고 있었다.
“제 집입니다. 응접실이에요.”
“그, 그래요?”
루시테는 너무 놀라 입이 안 다물어졌다.
루시테가 그렇게 많은 집을 가본 건 아니었지만 확신하건대 집을 이렇게까지 화려하게 꾸며놓고 사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그렇지, 그 누가 이렇게 사방 천지에 보석을 덕지덕지 발라 놓는단 말인가.
루시테는 레일리를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제가 좀 반짝이는 걸 좋아하는지라.”
레일리가 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자신의 집에 몹시 자신감이 넘쳐 보였으며 또 이 공간을 꽤 좋아하는 것 같았다.
루시테는 어쩐지 지금 상황이 조금은 즐거워졌다. 레일리가 어떤 사람인지 약간 알 것도 같았다.
“방이 멋지네요.”
“그렇습니까?”
루시테의 칭찬에 레일리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는 루시테의 방 칭찬에 몹시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다른 방도 이렇게 꾸며져 있나요?”
“테마가 다릅니다. 나중에 한 번 구경시켜드리겠습니다.”
“좋아요.”
루시테는 빙긋 웃었다.
시니컬한 남자인 줄로만 알았더니 이렇게 화려하고 반짝이는 보석들을 좋아할 줄이야.
루시테는 미치도록 화려한 방 안이 오만하고 자신감 넘치는 레일리와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딱! 하고 레일리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곧바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이가 지긋한 노신사였다.
그는 루시테를 향해 꾸벅 인사하고는 카트를 밀고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리 와 앉아요. 루시.”
레일리가 크리스털 테이블 앞에 있는 의자를 꺼냈다.
루시테가 의자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테이블 위에는 갖가지 디저트들이 준비되었다.
마카롱과 푸딩, 생크림이 올라간 케이크, 초콜릿과 마들렌, 에클레어까지.
노신사가 솜씨 좋게 루시테의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라주고는 조용히 방을 나갔다. 레일리의 집사인 모양이었다.
“편하게 먹어요, 루시. 우리 꽤 긴 얘기를 할 예정이지 않습니까?”
루시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마카롱을 하나 집어 들었다.
그러나 레일리에게 할 얘기를 생각하니 잊었던 긴장감이 다시 차올라 마카롱을 도로 내려놓았다.
루시테는 바짝바짝 마르는 목을 축이기 위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향긋한 꽃 향이 입 안 가득 퍼져나갔다.
조금씩 내리던 비는 어느새 장대비가 되어 있었다. 창 바깥으로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하늘이 어두워지고 거센 빗소리가 났다. 빗방울이 창문을 세차게 두들겼다.
레일리가 손가락을 딱 튕기자, 크리스털 촛대에 화르륵 주홍빛 불이 붙었다.
샛노란 불이 타오르자 방 안의 분위기가 아늑하면서도 묘해졌다.
“루시 양.”
레일리의 낮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정적을 채웠다.
“너무 어려워하지 말고 얘기하세요. 저는 그 누구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으니까요.”
“네에.”
루시테는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말했다.
“좋아요. 무엇이 궁금하세요?”
“……모든 것. 루시테, 당신의 모든 것이 궁금해.”
루시테는 제 본명이 레일리의 입에서 나오자 더 크게 뜰 수 없을 정도로 눈을 크게 떴다.
루시테를 바라보는 레일리의 은빛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그 이름을 어떻게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사실······.”
루시테가 막 입을 떼려 할 때였다.
쿵쿵쿵!
“주인님!”
조금 전 나갔던 집사가 문을 두드렸다. 이상하게 밖이 소란스러웠다.
이 소란스러움은 빗소리가 아니었다.
루시테는 불안한 얼굴로 레일리를 쳐다보았다.
레일리는 고개를 창밖으로 향하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하늘과 세찬 비 때문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레일리는 무언가 보이는지,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창밖 저 멀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은빛 눈에 안광이 형형했다.
무언가 느낌이 안 좋았다.
루시테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창문에 얼굴을 바짝 대고 밖을 쳐다보았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멀리로 반짝이는 물결이 보였다.
아니, 그것은 물결이 아니었다.
은빛 갑옷을 입은 황실의 근위대였다. 그들이 레일리의 집 앞에 빙 둘러서 진을 치고 있었다.
어찌나 많은 기사가 왔는지 멀리서 보니 그것들이 물결처럼 보인 것이었다!
“어찌할까요?”
집사가 불안에 일그러진 얼굴로 물었다.
“지금까지 근위대에서 많이 왔지만 이렇게 많은 수가 한 번에 온 건 처음입니다, 주인님. 화이트 울프 전체가 나온 것 같습니다.”
‘화이트 울프!’
루시테가 아는 이름이었다. 백색에 가까운 은빛 갑옷을 입은, 이크릭스에서 가장 악명 높은 기사단.
그 기사단의 단장은 루시테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미친개 세드릭 디에고. 제국에서 그를 함부로 건드릴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세드릭 디에고.
유리창 너머 저 멀리로 언뜻 붉은 깃을 단 투구를 쓴 기사가 시야에 잡혔다.
루시테는 오싹 소름이 돋았다.
‘가뜩이나 둘이 사이도 안 좋은데!’
뭘 어쩌려고 이 많은 병력을 끌고 레일리의 집을 쳐들어온 건지.
루시테는 몹시 걱정되어 발을 동동 굴렀다. 조금 전부터 느껴지던 불안한 느낌이 가시지를 않았다.
쾅!
밖에서 무언가 폭발하는 소리가 났다.
쩌정!
집을 두르고 있던 투명한 둥근 막이 순간적으로 반투명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폭발이 일어난 부분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감히! 대마법사의 저택을 공격하다니! 무뢰배가 따로 없습니다! 이놈들을 어찌해야 합니까!”
집사가 노기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집사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그 ‘무뢰배’들에게 소리라도 칠 것처럼 보였다.
밖을 한참 노려보던 레일리가 집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기사가 한 공격이 아니다. 황제가 마법사를 보냈군.”
레일리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그는 몹시 화가 나 보였으나, 오히려 무척 가라앉아 있었다.
마치 분노를 속으로 꾹꾹 눌러 담는 것처럼.
“주인님, 저놈들을 당장 쓸어 버리···!”
“안타깝지만 그럴 수 없겠어. 황제가 내 약점을 파악한 모양이야.”
레일리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투웅!
밖에서 또 이상한 소리가 났다. 루시테는 황급히 밖을 돌아봤다.
레일리의 집에 둘러쳐 있던 보호막이 스러져 사라지며 그 위로 다른 구가 생성되고 있었다.
“저, 저건!”
집사가 놀라 외쳤다.
“그래. 나브레의 용언으로 시동되는 안티매직이지. 나 하나 잡자고 국보를 가져오는 도박을 다 하셨군.”
안티매직?
루시테도 아는 말이었다.
안티매직, 모든 마법의 힘을 쓸 수 없게 만드는 마법.
그 마법의 강력함은 천차만별이지만, 가장 유명한 안티매직은 바로 이크릭스 황성 아덴티움에 쓰인 마법이다.
반투명한 구가 황성 전체를 둘러싸고 있으며 구름처럼 생긴 위협적인 기둥이 하늘로 이어진 아덴티움의 안티매직.
루시테도 레일리와 함께 하늘에서 직접 본 적이 있었다.
‘헉.’
이제 바깥에 생성된 반투명한 구는 완전히 완성되어 있었다.
거대한 구가 레일리의 집을 삼키듯 저택을 둘러싸듯 펼쳐져 있었고, 구름 기둥 같은 것들이 생성되며 파지직 번개를 내뿜었다.
아덴티움 위에 형성된 것과 완전히 똑같은 모습이 아닌가.
루시테는 놀라 숨을 삼켰다.
루시테는 레일리가 아덴티움의 안티매직을 설명해주며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크릭스의 황성 아덴티움입니다, 루시 양. 처음 와보는 건가요?」
「여기는 왜 온 거예요?」
「아래는 안티매직이 걸려 있습니다.」
「나브레가 용언으로 만든 마법진입니다. 저라도 부숴버릴 수는 없겠더군요.」
‘레일리가 부술 수 없다던 그 강력한 마법진!’
루시테는 레일리와 바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대체 황제가 레일리에게 무슨 원한이 있길래 황성에서 사용하는 국보까지 가지고 왔단 말인가.
“미안합니다. 루시. 저 때문에 괜한 일에 휘말리게 되셨군요. 지금은 제가 마법사용이 불가능하니.”
쾅!
레일리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누군가 응접실을 박차고 들어왔다.
붉은 깃의 투구를 쓰고 흰색에 가까운 은빛 갑옷을 입은 남자. 세드릭 디에고였다.
“제가 기회를 봐서 꼭 돌려 보내드리겠습니다.”
레일리는 세드릭을 노려보며 나머지 말을 루시테의 귀에 속삭였다.
그리고는 루시테의 팔을 잡아끌어 제 뒤로 밀었다. 루시테의 시야에는 레일리의 등만 보이게 되었다.
루시테는 슬쩍 고개를 내밀어 세드릭 디에고를 보았다.
세드릭은 꽤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둘의 대치가 살벌했다.
세드릭의 뒤로는 로브를 입은 마법사들도 몇 보였다.
레일리의 말대로 레일리를 잡기 위해 마법사까지 동원된 모양이었다.
“대마법사 레일리 아사드는.”
정적을 깨고 세드릭이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부터 2황자 카일러스 미카엘 에드라이 델 이크릭스로서 황제 폐하를 알현하라.”
“!”
‘뭐?’
뭐라고?
레일리가 누구라고?
루시테는 입을 쩍 벌렸다.
레일리가, 오만한 마법사 레일리가 2황자 카일러스라니.
믿을 수가 없었지만 믿지 않을 수는 없었다.
집 밖에는 아덴티움의 안티매직이 펼쳐져 있었으니까.
황제가 아니라면 누가 감히 신룡 나브레의 용언 마법을 사용하겠느냔 말이다.
“황제 폐하 드십니다!”
루시테가 얼이 빠져 있을 때 누군가 외쳤다.
‘황제 폐하?’
이 나라의, 그러니까 이크릭스 제국의 황제 폐하? 발칸트리히 2세?
루시테는 지금 벌어진 일에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왜 대관절 이런 애먼 장소에서 황제를 알현하게 되었느냔 말이다.
루시테는 황급히 무릎을 굽히려고 했다.
그러나 웬걸, 루시테의 팔목을 붙들고 있는 레일리의 손이 꿈쩍도 하지 않고 루시테를 놔주지 않았다.
황제가 앞에 왔다는데 인사도 못하게 하다니.
여기서 인사를 안 했다는 이유로 개죽음을 당하는 건 아닐까.
루시테는 발을 동동 굴렀다.
“꽤 거창하게 하셨더군요. 황제 폐하.”
레일리의 싸늘한 목소리가 루시테의 위에서 울렸다.
루시테는 레일리의 등 뒤로 얼굴을 살짝 내밀고 상황을 보았다.
‘황제!’
레일리의 앞에 정말로 황제가 서 있었다.
발칸트리히 2세는 루시테가 책에서 초상화로 본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초상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황제는 주름이 자글자글했지만 은빛 눈만은 노인답지 않은 흉흉한 빛으로 레일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루시테는 탄식했다.
이제보니 황제와 레일리에게는 닮은 구석이 있었다.
왜 알아보지 못했을까.
루시테는 그제야 연정 소설 ‘오 나의 황자님’ 속 2황자의 삽화와 레일리가 똑같이 생겼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래서 가면을 쓰고 다녔구나.’
자신이 2황자라는 걸 들킬까 봐.
루시테는 아연한 눈으로 레일리를 바라보았다.
“네가 내 아들이라는데 당연히 데려와야 하지 않겠느냐? 카일러스.”
황제가 굵직한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제가 폐하께 쓸 만해졌나 봅니다? 이제 와서 찾으시는 걸 보니.”
루시테의 팔목을 잡은 레일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루시테의 손보다도 레일리의 손이 훨씬 큰데도, 루시테는 이상하게 레일리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의 대화를 한두 마디만 들어봐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레일리가 그녀와 동류였다는 사실을.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수년 동안 황성 내의 천덕꾸러기로 조롱과 멸시를 받았지만, 그럼에도 가족의 사랑을 갈구했던 루시테가.
듣기만 해도 레일리의 말이 무슨 뜻인지를 다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또한 레일리가 황자가 아니라 마법사로서 이름을 바꿔 황성을 떠나 살았던 이유도 말이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너는 언제나 내 아들이었다.”
“하.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 자식이 십 년이 넘도록 집을 떠나 있었는데도 찾지 않으셨는데 잘도 폐하의 아들이었겠습니다.”
레일리의 목소리가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레일리의 말에는 몹시 가시가 돋쳐 있었으나,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뻔뻔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 이제 찾으려 하지 않느냐. 돌아오거라, 카일러스.”
황제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레일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어서. 함께 돌아가자꾸나, 내 아들아. 돌아가서 용종의 심장을 받은 자로서 네 형을 도와야 하지 않겠느냐.”
황제가 레일리의 속을 긁는 말만 계속했다. 그럴수록 레일리의 기세가 점점 더 흉흉해졌다.
“카일러스.”
“그렇게 부르지 마십시오. 저는 그 이름을 버린 지 오래입니다. 차라리 폐위시켜주십시오.”
‘폐위.’
루시테의 가슴이 선득해졌다.
당연하겠지만, 레일리는 순순히 황제를 따라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스티븐, 이쪽으로 와라.”
“네, 주인님.”
황제가 있는 쪽에 서 있던 레일리의 집사가 후다닥 레일리의 뒤쪽으로 왔다.
루시테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크릭스 제국의 황제와 척을 지게 되는 건가.’
루시테는 그냥 레일리의 집에 잠깐 방문했을 뿐인데,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다.
루시테는 제 팔목을 내려다보았다.레일리는 여전히 그녀의 팔목을 꽉 잡은 채 놓을 생각이 없었다.
“카일러스, 폐위라니 무슨 소리냐. 그런 유산을 물려받고도 네가 이크릭스가 아니라 할 셈이냐?”
황제는 어떻게든 레일리를 어르고 달래서 데려가려는 모양이었다.
레일리의 등 뒤에 숨어 있던 루시테는 다시금 레일리의 허리 옆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상황을 살폈다.
그러다 무시무시하게 부릅뜬 시퍼런 눈동자와 눈이 빡 마주쳤다.
‘히익!’
루시테는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언제부터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던 건지, 세드릭 디에고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루시테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꼬마. 네가 왜 여기에 있나?’
세드릭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세드릭은 레일리와 황제, 그리고 루시테를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그는 허리에 올린 손끝을 까딱였다.
세드릭은 금방이라도 루시테가 있는 쪽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황제와 레일리는 이 순간 아무도 세드릭을 신경 쓰지 않았지만 루시테는 세드릭이 미친 듯이 신경 쓰였다.
저 인간은 황제고 레일리고 저리 가라 하는, 또라이 중에 상 또라이가 아니던가.
저 인간이 왜 그녀만 쳐다보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지만 루시테는 굉장히 불안해졌다.
“카일러스, 결국 반항하겠다는 거냐? 내가 신룡의 홀을 가져왔다는 걸 알면서도?”
‘크윽.’
레일리가 작게 침음성을 삼켰다.
루시테는 불안한 눈빛으로 레일리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신룡 나브레의 홀이라는 것이 레일리에게 치명적인 약점인 것 같았다.
“황제 폐하. 제가 그걸 부숴버려도 후회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레일리는 황제에게 굽히지 않았다. 그는 이를 악물고 싸늘한 음성으로 얘기했다.
-파지지직.
루시테를 잡고 있지 않은 레일리의 반대편 손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안티매직이 걸린 상태에서 마법을 쓰니 당연하겠지만, 레일리의 손에서 스파크는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크으윽.”
레일리가 손에 힘을 주었다. 팔뚝과 손의 마디마디마다 핏줄이 튀어나오며 손끝이 붉어졌다.
“크으윽.”
레일리가 목을 긁으며 고통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시테는 불안한 마음에 레일리를 올려다봤다.
“!”
조금 전까지는 몰랐는데. 레일리의 머리 색이 변해 있었다.
신룡 나브레의 안티매직.
영역 안에 있는 모든 마법을 무효화시키는 마법이다.
번쩍!
창문 밖 거센 빗줄기 사이로 번개가 내리쳤다.
그리고 번개의 섬광과 똑같은 레일리의 은빛 머리칼이 서늘하게 반짝였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