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머리카락 색이.’
검은색이 아니었구나.
위장하기 위한 마법이었어.
루시테는 멍해졌다.
왜일까. 레일리의 머리칼이 그녀와 같은 검은 색이 아니었다니 가슴 한구석이 휑한 기분이었다.
레일리는 루시테가 살면서 마주친 유일한 검은 머리였다.
그런데 그게 마법이었다고 하니. 또다시 루시테는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루시테는 저주받은 검은 머리칼이 익숙한 사람이었다.
가슴이 휑한 건 휑한 거고 아름다운 건 아름다운 거다.
은빛 머리칼을 휘날리는 레일리는 루시테가 지금까지 본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심지어 이렇게도 화려한 응접실 안의 다이아몬드와 크리스털보다도 레일리는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왜 황자들을 소재로 한 대부분의 연정 소설에서 2황자 카일러스가 결국 진 남주 자리를 차지하는지 루시테는 이제 알 것만 같았다.
황태자를 내버려 두고 2황자가 진 남주라니.
읽을 때는 웃고 넘겼으나 루시테는 이제야 그 작가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레일리, 아니, 2황자 카일러스 미카엘 이크릭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피조물이었으니까.
“끝까지 반항할 모양이구나. 아들아.”
황제가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부 다 끌고 가라.”
황제가 최후의 명령을 내렸다.
황제의 뒤에 밀집해 있던 군사들이 순식간에 방 안으로 들어와 레일리 일행을 에워쌌다.
기사들이 검을 빼 들었다.
챙!
날카로운 칼날의 끝이 루시테와 레일리, 그리고 레일리의 집사를 향했다.
칼날의 선봉에는 세드릭이 있었······.
‘음?’
루시테는 겁에 질린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 말고 세드릭을 쳐다봤다.
당연히 기사들의 선봉에 있어야 할 세드릭이 검도 뽑지 않은 채 서 있었다.
언제 왔는지, 그녀의 바로 근처에서.
“붙잡아라!”
“큭!”
기사들이 거리를 좁혀왔다. 레일리는 재빨리 루시테를 제 등 뒤로 더 밀어 넣었다.
“엔다이론! 실피드!”
레일리가 물의 상급 정령과 바람의 중급 정령을 불렀다.
푸른색의 커다란 늑대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거센 바람이 루시테와 레일리의 앞에서 으르렁거렸다.
“이럴 수가! 정령이라니!”
“상급 정령!”
황제와 함께 온 황실 정예 마법사 무리 중 누군가가 놀라 외쳤다.
루시테는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서야 레일리가 불러낸 게 마법이 아니라 정령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크하하하하!”
황제가 호탕하게 웃었다.
“역시 내 아들이로구나! 내 아들 카일러스! 내 너를 반드시 데리고 돌아갈 것이다!”
루시테는 고개를 내렸다.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는 레일리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쿵.
루시테는 순간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레일리의 약한 모습을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만한 미소가 그렇게도 잘 어울리는 남자인데.
이리도 약한 모습이라니.
별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루시테는 왠지 슬퍼졌다. 지금 이 순간. 레일리가 너무나 불쌍했다.
루시테는 레일리의 고통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가족에게 이용만 당하다 버려지는 그 고통.
루시테가 살아왔던 지난 세 번의 생애 어디에도 이크릭스의 다음 대 황제가 카일러스라는 역사는 없었다.
결국 루시테의 지난 생에도, 지지난 생에도, 레일리는 이렇게 황제에게 끌려가서 이용만 당하다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그래.’
머리카락 색이 다 무슨 소용이야.
인생이 이리도 비참한데.
만약 신이 이유가 있어 루시테의 생을 계속 반복시킨 거라면.
이번 생애에 살아남아야 할 사람은 루시테뿐만이 아니었다.
루시테의 칠흑 같은 검은 눈동자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보랏빛 불꽃이.
* * *
레일리의 응접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크릭스 최정예 기사단 화이트 울프의 폭발적인 공격에 크리스털 식탁이 부서졌고 샹들리에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사방의 물건들이 박살이 나고 벽이 무너졌다.
물론 그 가운데 황제는 강력한 호위 기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어 안전했다.
기사들이 한 번에 덤벼들어 레일리를 공격했다.
레일리는 뛰어난 마법사였지만, 정령술에는 상대적으로 약했다.
그러나 지금은 신룡 나브레의 안티매직 탓에 어떤 마법도 쓸 수 없는 상태.
레일리는 소환한 정령으로 공격을 해보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쉼 없이 쏟아지는 강한 공격에 레일리는 정령의 힘으로 보호막을 생성하여 루시테와 집사 스티븐을 지키는 것밖에 할 수는 없었다.
쾅! 쾅!
오러를 실어 내리치는 일격에 정령으로 만든 방어막이 크게 요동쳤다.
“크윽.”
정령을 소환하는 일은 마나를 한 번에 물 쓰듯 쓰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은 레일리에게 큰 집중력을 요했다.
레일리는 꽉 잡고 있던 루시테의 팔을 어쩔 수 없이 놓았다.
그리고 두 손을 뻗은 채 마력의 흐름에 집중했다.
레일리의 마나의 근원은 끝없이 생명력이 용솟음치는 드래곤의 심장이다.
그의 마나로는 언제까지고 정령을 소환시켜 둘 수는 있었지만, 이대로는 방어만 하느라 끝이 없었다.
황실 정예와 레일리 사이에 끝없는 공방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잠깐! 모두 멈춰라!”
갑자기 누군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은 소리친 사람을 돌아보았다. 황제가 멈추라고 명령한 것인가 싶어 우왕좌왕했다.
그러나 정작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소리를 지른 사람은 보이지를 않는 것이다.
화이트 울프 기사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분명 자신들의 단장인 세드릭 디에고였기에.
잠시 레일리를 향한 공격이 멈춘 사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레일리도 정령으로 만든 보호막을 일시적으로 해제했다.
그때였다.
“꺄악!”
작은 소녀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작은 소녀의 목소리라니. 이 장소에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아니던가.
황제를 비롯한 기사, 마법사들은 비명이 들린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명이 들린 곳은 바로 레일리의 뒤쪽이었다.
그곳에는 그들이 그토록 찾던 ‘잠깐 멈춰!’라고 소리쳤던 세드릭 디에고가 서 있었다.
“왜, 왜 이래요!”
루시테가 세드릭의 팔에 가둬진 채 버둥거렸다.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황제는 세드릭 디에고에게 한소리를 하려 했다.
조금 전에도 공격하라고 했더니 자기 혼자 쏙 빠져서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던가?
아무리 큰 공을 세웠다고는 해도 황제의 명령을 들어야 할 것 아닌가?
황제는 머리를 짚으며 세드릭을 부르려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황제의 눈에 제 아들 카일러스의 얼굴이 들어왔다.
갑작스러운 소녀의 비명에 이 방에서 가장 놀란 사람은 황제도 아니었고 다름아닌 카일러스였다.
그는 눈을 크게 뜬 채로 이를 악물고 세드릭과 세드릭의 품에 잡혀 있는 검은 머리 소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카일러스의 은빛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황제가 아는 제 둘째 아들은 자존심이 세고, 결코 굽히지 않으며 남에게 일절 관심을 두지 않는 인간이었다.
그런데 저런 표정이라니.
“크하하하!”
황제가 별안간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찾았구나. 카일러스의 약점!’
황제가 카일러스와 닮은 눈으로 은빛 안광을 형형하게 빛냈다.
세드릭 디에고에게 뭐라고 화를 낼 참이었던 황제는 마음을 바꿨다.
일이 쉽게 풀리게 만들어 줄 세드릭 디에고를 치하하기로.
“카일러스! 보았느냐!”
황제는 크게 소리쳤다.
루시테를 뚫어져라 보던 레일리는 황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반항은 그만두고 순순히 따라오거라. 그렇지 않으면 저 소녀를 죽이겠다. 알겠느냐?”
세드릭 디에고의 품에 붙들린 루시테는 눈을 크게 떴다.
‘나를, 나를 죽이겠다고!’
루시테는 레일리의 등을 바라봤다.
레일리 때문에 죽고 싶지 않았지만, 레일리가 어떤 선택을 해도 루시테는 그를 원망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레일리가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을지 이해가 되었으니.
루시테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죽고 마는 걸까.’
루시테는 잔뜩 긴장을 한 채 레일리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나 루시테가 긴장하고 고민한 것이 무색하게도, 레일리는 황제가 루시테를 죽이겠다고 협박하자마자 싸울 의지를 잃었다.
분노에 가득 차 있던 그의 은빛 눈동자가 힘을 잃었다.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돌아가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커다란 푸른 늑대와 거센 바람의 기운이 순식간에 흩어지듯 사라졌다.
레일리의 주위를 맴돌던 흉흉한 정령의 기운도 가라앉았다.
황제는 레일리가 순순히 정령의 힘을 거두자 입에 진득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세드릭이 붙잡고 있는 작은 소녀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 흔히 볼 수 없는 특이한 외모였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황제는 미간을 좁혔다.
“한 놈도 놓치지 말고 전부 다 끌고 와라.”
황제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명령을 내렸다.
카일러스를 이용할 수 있는 약점인데, 그가 놓칠 리가 없었다.
“예! 폐하!”
황제의 충실한 기사단이 충성스럽게 외쳤다.
* * *
“기사님!”
루시테는 세드릭의 팔에 달랑 들려 대롱대롱 끌려가며 발버둥을 쳤다.
루시테는 주먹으로 세드릭을 때려도 보고 손가락으로 세게 꼬집어도 보았다.
그러나 몸을 무슨 돌덩어리로라도 만들었는지 세드릭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기사님! 잠시만요!”
루시테는 세드릭의 팔을 주먹으로 팡팡 쳤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화가 나는 것을 어떡한단 말인가.
치사하게 세드릭이 자신을 노릴 줄이야.
어쩐지 황제가 명령하는데도 검도 안 뽑고 자신만 쳐다보고 있더라 했다.
처음부터 그녀만 노리고 있던 게 분명했다.
루시테는 정말이지 속상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행복하던 일상에 이런 일이 생긴 것도 황당했다.
하지만 가장 속상한 일은 자신이 레일리의 걸림돌이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레일리······.’
루시테는 레일리의 표정을 떠올리곤 몸을 축 늘어뜨렸다.
레일리가 그런 표정도 지을 수 있는 사람인 줄은 정말 몰랐다.
루시테가 세드릭의 손에 막 잡혔던 그 순간. 레일리의 표정을 루시테는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았다.
정말 당황한 사람처럼 눈이 크게 뜨이고 입술이 벌어지고, 걱정스러운 듯 미간이 좁혀지고 콧잔등이 구겨졌다.
꼭 소중한 물건이라도 빼앗긴 사람의 얼굴이 아니던가.
루시테 하나 붙잡혔다고 레일리는 그렇게도 쉽게 황제에 대한 반항을 그만두었다.
루시테는 자신 때문에 레일리가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것 같아 속상했다.
루시테의 머릿속에 자신을 놓쳐 괴로워하는 레일리의 표정이 계속 아른거렸다.
“날 소중하게 생각하는 걸까?”
루시테는 세드릭의 팔에 대롱대롱 매달려 작게 중얼거렸다.
“뭐라고 했냐 꼬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세드릭이 말했다.
“왜 절 잡은 거예요? 그냥 내버려 두셨으면 좋았을 텐데.”
본의 아니게 그녀가 레일리의 약점이 되어버린 셈이었다.
분명 황제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그녀의 목숨을 가지고 레일리를 협박한 것이겠지.
“네가 위험할 수도 있었다. 네가 마법사의 약점일 줄은 나도 몰랐어.”
‘뭐라고?’
루시테는 매달린 채로 고개를 들어 세드릭을 올려다봤다.
레일리의 약점으로 이용하려고 루시테를 잡은 게 아니었다니.
“그럼 절 왜 잡으신 거예요? 그냥 내버려 두셔도 됐는데······.”
루시테는 울컥해서 말끝을 흐렸다.
세드릭이 대답하려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레일리의 저택을 벗어난 황제는 마차에 오르고, 기사들은 말을 탈 준비를 했다.
그리고 레일리는 마법사와 기사들에게 포위를 당한 채로 강제로 마차에 태워졌다.
황제와 마법사들, 기사들이 모두 레일리의 저택을 벗어나자 레일리의 저택 위로 둘러쳐 있던 위협적인 안티매직이 스르르 녹아내렸다.
“말은 타 봤나?”
“아뇨.”
세드릭에게 화가 난 루시테는 불퉁하게 대답했다.
“그렇다면 유감이군.”
“으앗!”
세드릭은 말이 끝나자마자 루시테의 허리를 잡고 루시테를 말 위로 올려놓았다.
루시테의 시야가 훅 높아졌다.
루시테는 엉덩이 아래로 꿈틀거리는 뜨거운 생명체의 움직임을 느끼곤 잔뜩 긴장했다.
푸르르륵!
말이 갈기를 털었다.
“으익!”
루시테는 말 위에서 떨어질까 봐서 안장을 손이 하얘지도록 꽉 쥐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세드릭이 루시테의 뒤로 휙 올라탔다.
루시테의 등에 세드릭의 단단한 복부가 닿았다. 세드릭의 뜨거운 체온이 생생한 감촉으로 느껴졌다.
루시테는 깜짝 놀라 세드릭의 복부에서 제 등을 떼려 했다.
루시테는 세드릭에게서 좀 떨어져 앉기 위해 말 등 위에서 위험하게 바르작거렸다.
그때 세드릭의 손이 루시테의 배로 훅 들어왔다.
세드릭이 루시테의 배에 손을 얹고 제 쪽으로 바짝 당겨 붙였다.
조금 전보다 더 몸이 세드릭에게 밀착되었다.
루시테의 등으로 그의 배의 꿈틀거리는 단단한 근육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루시테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하여 침만 꼴깍꼴깍 삼켰다.
“위험하니 가만히 있어라.”
“네에······.”
루시테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언제나 그녀를 꼬마라고 부르며 꼬마 취급만 하는 세드릭은 모를 것이다.
루시테는 몸만 어리지 정신 연령은 훌쩍 어른이었다.
그녀는 남자와의 가까운 접촉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평범한 아가씨였다.
특히, 이전 네 번의 생애 동안 남자와의 깊은 신체적 접촉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
루시테가 세드릭의 밀접한 접촉을 더 민망해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루시테는 슬쩍 세드릭을 돌아보곤 그냥 가만히 있기로 했다.
그러나 가만히 있기는 개뿔. 말이 출발하자 루시테의 작은 몸뚱이가 위아래, 앞뒤로 미친 듯이 흔들렸다.
“으앗! 윽! 힉!”
루시테는 흔들릴 때마다 작게 비명을 질렀다. 금방이라도 토가 나올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세드릭이 거슬렸는지 한쪽 팔로 루시테의 허리를 휘감아 붙들었다.
루시테는 민망하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세드릭의 팔을 꽉 붙잡았다.
혹여나 세드릭이 그녀를 놓치면 어떡한단 말인가.
루시테는 동아줄 붙잡듯 세드릭의 팔에 꽉 매달렸다.
세드릭은 한 손으로 말고삐를 잡고 나아가며 루시테를 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루시테를 붙들고 있는 세드릭의 손에 더욱 힘이 들어갔다.
소드 마스터인 그가 말 위에서 루시테를 놓칠 리가 없었지만, 정말로 놓쳐버릴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세드릭은 더욱 힘을 주어 루시테를 제품에 껴안았다.
“꼬마. 나는 정말 널 이용하려고 붙잡은 게 아니다. 알아뒀으면 좋겠군.”
“네?”
루시테는 꽉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면 왜 저를 붙잡았어요?”
“네가 거기에 있었으니까.”
세드릭은 잠시 말을 멈췄다. 루시테의 머리 위로 세드릭의 따뜻한 숨결이 닿았다.
“너를 본 순간 어떻게 하면 휘말리지 않게 할 수 있을지만 생각했다. 황성에 가면 또 안티매직 마법진이 펼쳐질 거다. 황제에게 신룡의 안티매직이 있는 한 저 마법사는 너를 지켜주지 못해. 내 곁에 있어라. 내 곁에 있어야 가장 안전해.”
루시테는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달싹였다.
세드릭이 그녀를 지키기 위해 붙잡은 거였다니.
믿어야 할지 아닐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진실한 세드릭의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지금 상황이 이렇게 되긴 했지만 기회를 봐서 내가 너를 반드시 안전하게 돌려 보내주겠다. 너를 도울 사람은 나뿐이다.”
세드릭의 보석 같은 푸른 눈동자가 투명하게 루시테를 비췄다.
“기사님도 같은 말을 하시네요.”
“그게 무슨 소리냐?”
“레일리도 저에게 그렇게 말했거든요. 저를 반드시 안전하게 돌려 보내주겠다고.”
루시테는 그녀를 빼앗기고 고통스러운 얼굴을 하던 레일리를 다시금 떠올렸다.
레일리의 얼굴은, 단지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만 접근한 사람에게서 나올 수 있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 표정은 루시테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표정이었다.
루시테는 레일리를 믿고 싶어졌다.
목표가 있는 사람은 강하다.
세 번의 인생 평생 한마디 못하고 살다가, 폐위시켜달라는 선언을 하고 메이븐을 떠났던 자신처럼.
레일리 역시 자신과의 약속을 위해 강해질 거라고 루시테는 믿었다.
‘그와 나는 같은 처지이니까.’
그렇기에 루시테는 레일리에게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
그의 슬픔을 엿보고, 깊은 동료애를 느끼고, 그리고 그의 슬픔에 깊은 공감을 했기에.
또한 사실은 레일리 역시 단순한 호기심으로 루시테에게 접근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루시테는 이제 레일리를 믿었다. 레일리가 그녀에게 반드시 약속을 지키리라는 것을.
“기사님.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저는 레일리를 믿거든요.”
“어떻게 그런 쓸데없는 확신을 하지? 그 마법사는 널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거다.”
세드릭이 사납게 내뱉었다.
그는 루시테가 레일리를 신뢰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 사이 아니라고 하던 꼬마가 이제는 레일리를 믿는다고 하고 있다니.
“지금 널 지키고 있는 건 나다. 그걸 기억해.”
세드릭은 루시테를 더욱 꽉 붙들며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그의 푸른 눈에 루시테를 놓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 * *
전날 저녁에 있었던 일로 황실은 발칵 뒤집혔다.
초대 황제 이후로 단 한 번도 사라진 적 없었던 황성의 거대한 안티매직 마법진이 갑자기 사라진 게 시작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웅장했던 마법진이 갑자기 녹아내린 것이다.
사람들은 우왕좌왕했으며 어떻게 된 일인지 알기 위해 황제와 마법사들을 정신없이 찾았다.
그러나 그 시각 황제와 황성 수석 마법사 대부분이 자리를 비웠으므로 안티매직 마법진이 사라진 이유를 찾을 수 있을 턱이 없었다.
재앙이 일어났다며 골방에 숨어들어 덜덜 떠는 궁인들도 있었고. 전쟁이 일어났다며 도망칠 짐을 싸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저녁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황제와 마법사들이 궁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법진이 재가동 되었다.
윗선들은 마법진을 사라지게 한 게 황제라는 사실을 알고 의아함을 품었다.
그러나 제대로 소식을 모르는 아랫사람들은 이 사건을 ‘사라진 안티매직’ 사건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황제는 제 아들 카일러스를 데려오기 위해 큰 결단을 내렸던 것이다.
황성 아덴티움을 수호하는 안티매직을 해제하고 일시적으로 일개 마법사의 저택에 설치하다니.
그런 건 지금까지 역사상 완전히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이 성공했다.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대마법사이자, 드래곤의 심장을 그대로 유전 받은 2황자 카일러스를 황성에 잡아 둘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황제는 당장 제국의 내로라하는 정령사와 마법사를 소집했다.
그리고 황성에 정령 소환 금지 마법진을 증축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정령 소환이 불가능하도록 만들 때까지 카일러스를 어떻게 붙잡아 둘 것이냐인데.
“잘됐지. 정말 잘됐어.”
황제는 은빛 눈을 번뜩이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검은 머리 소녀. 그 아이를 정령 소환 방지 마법진이 완성될 때까지 잡아두면 된다.
카일러스는 그 계집애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면 순순히 말을 들었으니 말이다.
이로써 카일러스를 황실에 잡아두겠다는 황제의 원대한 계획이 완성되었다.
카일러스를 끌고 황실로 들어온 이튿날 아침.
중앙회의에서 황제는 모든 신료 앞에서 선포했다.
“마법사 레일리 아사드는 2황자 카일러스 미카엘 아드레이 델 이크릭스였다. 레일리 아사드의 마법사 대공 지위를 폐하고 2황자로서의 권한만을 남긴다.”
이와 같은 선포에 황성은 물론 수도까지 2차적으로 들썩였다.
천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대마법사 레일리 아사드.
그가 사실은 2황자 카일러스였으며 그 마법의 근원이 황실의 피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황실의 권위를 높이는 소식이었다.
백성들은 위대한 황제의 혈통을 칭송했다.
황실의 권위가 치솟았고 카일러스의 명예 역시 덩달아 상승했다.
이 상황에 가장 큰 불만을 가진 이들은 황태자와 그 측근들이었다.
황태자 알렉산더 이크릭스. 그는 황제의 첫째 아들이면서 황후의 아들이었다.
황제의 많은 자식 중 가장 정당한 후계 권리를 가진 존재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그가 정당성이 부족한 이유가 있었다.
태생과 신분, 모든 것이 완벽한 알렉산더가 부족한 것은 바로 은빛 유전이었다.
이크릭스 제국의 황제는 초대 황제의 강력한 마법이 유전을 타고 흐른다.
대외적으로는 강한 인간의 마력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드래곤의 마력.
그렇기에 황실의 핏줄을 타고 흐르는 실버 드래곤 나브레의 혈통은 그 어떤 태생보다도 정당성을 부여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황태자 알렉산더는 은빛 유전을 단 한 톨도 물려받지 못했다.
알렉산더는 황후를 쏙 빼닮아 붉은 머리에 초록빛 눈동자를 갖고 태어났다.
거기다 한술 더 떠 마법적 재능이라고는 눈곱만큼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크릭스 황실의 핏줄과 정반대로 우락부락하고 힘만 센 기사 체질이었다.
그 때문에, 정실 황후의 첫째 아들인 알렉산더의 세력이 하녀의 자식인 카일러스에게 밀리게 되는 상황인 온 것이다.
쾅!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알렉산더가 테이블을 내리쳤다.
우직 소리가 나며 나무 탁자에 금이 갔다.
황태자의 최측근이자 황후의 아버지인 카렌도 후작이 침울한 얼굴로 알렉산더를 쳐다봤다.
“태자 전하. 고정하십시오.”
그는 말로만 고정하라고 했지 딱히 화를 내는 알렉산더를 말리지는 않았다.
2황자 카일러스가 대마법사 레일리 아사드였다는 사실에 열 받기는 카렌도 후작도 마찬가지였으므로.
마음 같아서는 카렌도 후작은 테이블을 부수는 것뿐만 아니라 더한 것도 하고 싶었다.
예를 들어 2황자를 없애버리는 거라든가.
“방법이 있을 겁니다. 분명. 2황자가 아무리 대마법사라 한들 여기는 아덴티움이 아닙니까. 마법이 봉인 당하면 2황자도 평범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러니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태자 전하.”
“방법은 무슨 방법!”
알렉산더가 또 책상을 쾅 내리쳤다. 책상의 한쪽 귀퉁이가 부서졌다.
“그놈의 생김새를 알지 않느냐? 은색 대갈통에 은빛 눈깔이다! 제길! 매번 황성에 머물지 않고 밖으로 나돌기에 그렇게 생겼어도 마력이라곤 쥐뿔도 없는 줄 알았더니 뭐가 어쩌고 어째? 그놈이 레일리 아사드였다고?”
알렉산더가 주먹을 꽉 쥔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고정하십시오. 태자 전하.”
황태자의 보좌관인 샤히드 백작이 간사한 뱀눈을 빛냈다.
“황제 폐하께서는 황후 폐하께 약속하신 바가 있습니다. 꼭 전하를 다음 황제로 세우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황제 폐하는 황후 폐하와 하신 약속을 어기시지 않을 겁니다.”
“후······. 그렇긴 하지.”
알렉산더는 초록빛 눈을 번뜩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하여튼 두 사람 다 동향을 철저히 살피고 방법을 간구하도록 하시오. 나는 그 버러지에게 내 자리를 위협당하는 것조차 수치를 느끼는 사람이오.”
“예.”
“알겠습니다. 태자 전하!”
카렌도 후작과 샤히드 백작은 충성스럽게 대답하곤 황태자궁을 나왔다.
그들의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면 2황자의 명성을 떨어뜨릴지에 대한 궁리로 가득했다.
* * *
“기사님. 저는 언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나요?”
루시테는 세드릭을 빤히 쳐다봤다.
세드릭은 루시테의 맞은편에 편한 옷을 입고 마주 앉아 있었다.
원래는 카일러스의 감시 역으로 배정받을 뻔했으나 세드릭이 강력히 항의하여 루시테의 감시 역이 된 상황이었다.
황제는 세드릭을 상대하기를 몹시 귀찮아했으므로 세드릭이 루시테의 감시 역이 된 것은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나도 모른다.”
루시테가 저 질문을 할 때마다 돌아오는 세드릭의 대답은 똑같았다.
“하아······.”
루시테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소파에 등을 기대고 머리를 뒤로 젖혔다.
체구가 작아 꼭 소파에 파묻힌 모양새였다.
벌써 이틀째였다. 이 방에 갇혀 지내게 된 지.
루시테는 몰랐지만 루시테의 존재는 이 황성의 극비였다.
카일러스가 대마법사 레일리 아사드라는 사실에 황성 전체가 뒤숭숭한데 카일러스의 약점이 드러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황제는 루시테를 철저히 자신만이 이용할 생각이었다.
“기사님. 저는 레일리도 만날 수 없나요?”
“그래. 그 마법사는 잊어라.”
세드릭이 딱 잘라 대답했다.
루시테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방 안에 갇혀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너무 답답했다. 산 중턱 하우스에 있는 사람들도 걱정됐다.
노이와 리브, 에단까지.
이제 막 가족이 된 아이들인데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하고 신경이 쓰였다.
아마 그들도 루시테가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해놓고서 이틀이나 돌아오지 않으니 걱정하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루시테가 걱정하고 있는 사람들은 산 중턱 하우스 식구들뿐만이 아니었다.
루시테는 레일리도 무척이나 걱정되었다.
‘레일리.’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듯한 그의 표정에 루시테는 적잖게 충격을 받았다.
오만한 표정이 세상 그 누구보다 가장 잘 어울리는 그 남자가 황제에게 붙잡혀 이용당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다니.
루시테는 레일리만 생각하면 가슴이 쓰라렸다.
그 높은 자존심에 밥은 제대로 먹고 있을지. 잠은 잘 자고 있는지.
그런 것조차 루시테는 몹시 걱정되었다.
왜냐하면 루시테도 황성에 살며 불면증과 거식증에 한동안 시달린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다.
밤마다 악몽을 꾸었고, 밥을 먹을 때면 경멸의 눈빛을 보내던 황성 사람들이 떠올라 체할 것만 같았기에.
루시테는 첫 번째 생애 각종 병을 달고 살며 몹시 고생했던 기억이 있었다.
“레일리······.”
괜찮을까.
루시테는 저도 모르게 소리 내어 레일리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데 그 말이 세드릭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 마법사가 그렇게 걱정되나?”
세드릭의 목소리가 불퉁했다.
“그럼요. 소식을 모르니 답답하고. 잠은 잘 자는지. 식사는 잘 챙겨 먹고 있는지 걱정되고. 그렇네요.”
루시테는 세드릭의 눈빛이 싸늘해졌다는 것도 모르고 소파에 푹 기대어 천장만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너와 이틀 동안 함께 있던 건 나였는데도, 그 마법사만 떠올리는 건가?”
세드릭의 목소리가 한층 싸늘해졌다.
루시테는 문득 세드릭이 풍기는 뉘앙스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루시테는 기대어 있던 소파에서 허리를 세우고 세드릭을 쳐다봤다.
세드릭의 서슬 퍼런 눈동자를 보며 루시테는 아차 싶었다.
잊고 있었다. 저놈은 제국을 들썩이게 하는 미친놈이란 것을.
“기사님. 제가 뭘 불편하게 했나요?”
루시테는 세드릭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세드릭은 이틀이나 함께 있었다고 자꾸 말했지만, 루시테는 세드릭과 전혀 가까워졌다고 느끼지 못했다.
또한 세드릭이 왜 이런 말과 행동을 하는지도 루시테는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말해주세요. 조심하겠습니다······.”
루시테는 세드릭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세드릭은 화를 풀기는커녕 루시테에게 오히려 더 흉흉한 기세를 내뿜었다.
“하. 그런 의미가 아니다.”
“네?”
“너는 눈치를 스프에 말아 먹은 건가?”
“네에?”
루시테는 세드릭의 뜬금없는 말에 입을 딱 벌렸다.
어이가 없었다. 태어나서 이런 황당한 소리는 처음 들어보는 것 같았다.
저 미친놈이 한 말이 뭐?
눈치가 없냐고?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적어도 루시테가 세드릭한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제가 뭐가 눈치가 없어요?”
루시테는 이래봬도 인생 4회차.
저런 미친놈 취급이나 받는 인간에게 눈치가 없다는 소리를 들으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혔다.
“네가 하는 말을 잘 돌아봐라. 눈치를 스프에 말아먹지 않았으면 그런 멍청한 소리나 할 턱이 없어.”
세드릭은 뚫린 입이라고 잘도 나불거렸다.
루시테는 너무 황당하고 어이가 없어 뒷목을 잡고 싶을 지경이었다.
루시테는 검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눈앞에 있는 이안과 닮은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
처음에는 마주치는 것도 싫었는데, 이제는 그가 좀 익숙해지고 있었다.
세드릭은 얼굴만 좀 닮았다 뿐이지 확실히 이안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활활 타오르는 것만 같은 붉은 머리칼인 것도 달랐으며, 무엇보다 성격이 완전히 딴판이었다.
이안은 뭐든 꿍꿍이가 있으며 계략적이고 속을 알 수 없어 그냥 재수 없는 인간이었다.
반면 세드릭은 막 지르고 보는 스타일이다.
무엇보다 세드릭은 이안처럼 루시테를 괴롭게 하지도 않았고 말이다.
루시테는 차라리 이안보다 세드릭이 훨씬 나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제가 뭘 놓치고 있는지 말해주세요, 기사님. 눈치 없다는 소리는 그만 하고요.”
루시테는 눈을 깜박였다. 드리워진 긴 검은 속눈썹이 나비처럼 팔랑였다.
세드릭은 만족스럽다는 얼굴로 루시테를 바라봤다.
그의 사파이어 같은 푸른 눈빛이 즐거움으로 반짝였다.
재수 없는 마법사 놈만 주구장창 주워섬기던 눈치 없는 꼬맹이가 드디어 제대로 자신을 봐주고 있었으니까.
“세드릭이라고 불러라.”
“제가 어떻게 기사님을 그런 호칭으로,”
“됐고, 세드릭이라고 불러.”
세드릭이 루시테의 말을 딱 잘랐다.
“어······. 음······. 네. 세드릭.”
“좋아. 잘했어.”
세드릭이 벌떡 일어나더니 루시테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는 루시테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루시테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크릭스의 대마법사이자 알고 보니 황자였던 레일리도 이름으로 부르는데.
이제는 제국 제일의 기사단의 단장까지 이름으로 부르는 인생이라니.
루시테는 이번 생애의 삶이 어떻게 보면 지난 세 번의 생보다 훨씬 더 다사다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드릭이 루시테의 옆에 앉아서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 웃었다.
덩치가 산만 한 남자가 조그만 여자가 저를 이름으로 불렀다고 이렇게 좋아하다니.
루시테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세드릭의 웃음에 덩달아 전염되듯 웃음이 나왔다.
참 바보 같은 상황이 아니던가.
인질로 끌려와 갇혀 있는 주제에 감시 역인 기사단장과 이리도 화기애애하다니.
루시테는 세드릭이 그녀의 감시 역을 자처한 것에 이제야 어느 정도 고마움을 느꼈다.
세드릭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훨씬 더 불편했을 테니 말이다.
“세드릭.”
“음?”
세드릭이 고개를 돌려 루시테를 내려다봤다.
바로 옆에 앉아 마주 보니 세드릭의 커다란 덩치 앞에서 루시테는 더욱 조그마해진 기분이었다.
루시테는 흑진주 같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양 무릎 위에 얼굴을 얹고 세드릭을 올려다봤다.
그간 많이 긴 머리가 어깨로 내려와 루시테의 볼을 간질였다.
“왜 자꾸 저한테 꼬마라고 하세요? 제 나이 알잖아요.”
“알지. 그런데 네가 꼬맹이처럼 멍청하게 굴지 않나.”
‘하.’
루시테는 이제 없어질 어이도 없었다.
세드릭 앞에서 그녀가 언제 멍청하고 눈치 없게 굴었다는 건지, 모함 전문가가 따로 없었다.
“세드릭은 몇 살인데 그래요?”
“스물셋이다.”
‘뭐라고?!’
루시테는 무릎에 댔던 고개를 쳐들었다. 루시테의 검은 눈썹이 휙 치켜 올라갔다.
세드릭이 자신과 같은 나이였다니! 세드릭은 그걸 알면서도 꼬박꼬박 꼬맹이라고 불렀던 건가?
“이제 말마따나 멍청하게 안 굴 테니 꼬마라고 하지 마세요. 저주받은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왜 그래요?”
루시테의 말에 세드릭이 멈칫했다.
‘저주.’
저주받은 사람을 놀리는 거라 생각했다니.
세드릭은 절대 그럴 의도는 없었다. 그저 그녀가 귀여워서 꼬마라 불렀던 것뿐이었다.
“앞으로 꼬마라고 부르지 않겠다. 절대.”
세드릭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세드릭의 곧은 눈썹이 굳건한 의지를 드러냈다.
“네, 감사해요.”
루시테는 세드릭에게서 고개를 돌려 앞을 보았다. 루시테는 무릎에 고개를 다시 푹 파묻었다.
산 중턱의 작은 집이 그리웠다. 노이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레일리도.
‘황제는 레일리를 어떻게 하려는 걸까.’
자유로운 날개를 꺾여버린 레일리가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을지.
루시테는 그가 몹시 걱정됐다.
마지막에 봤던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듯한 그의 눈빛이 도무지 잊히지 않았다.
“후우······.”
루시테는 마음이 답답해져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 루시테를 바라보는 세드릭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세드릭은 강렬했던 루시테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저 지나가다 부딪힌 행인인 줄로만 알았던 인간이었다.
그러나 두건을 벗겼을 때의 생김새는 세드릭이 생전 처음 보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밤 같은 사람.
어깨 언저리에서 흔들리는 검은 머리칼과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가 눈보다도 새하얀 피부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세드릭은 루시테를 처음 봤을 때 하마터면 그녀를 밤의 정령쯤 되는 것으로 착각할 뻔했더랬다.
그러나 그저 첫인상일 뿐.
세드릭은 어린 여자를 좋아하는 변태도 아니었고 애초에 다른 사람 자체에 별로 관심이 없는 인간이었다.
그는 그냥 신기한 것을 봤다는 감상 정도가 다였다.
그러나 루시테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 것은 빌어먹을 마법사 대공, 레일리 아사드 때문이었다.
그가 그렇게 뭐 빠지게 쫓아다니던 레일리 아사드가 갑자기 나타났다. 조그만 여자애 하나 때문에.
세드릭은 지금까지 황제의 명 때문에 본의 아니게 레일리 아사드를 쫓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또한 세드릭은 본의 아니게 레일리 아사드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게 되었다.
그 인간은 세드릭과 다르지만 비슷한 유형의 인간이었다.
남자든 여자든, 다른 인간들에게는 쥐뿔도 관심이 없고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니,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려고 하는 그런 인간.
그러던 레일리 아사드가 저 조그만 여자에게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루시 양, 괜찮습니까?」
루시라는 조그만 꼬맹이에게 어찌나 부드러운 눈길을 보내던지. 세드릭은 그만 소름이 돋았다.
거기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루시라는 이름 앞에 레일리 아사드가 그토록 알현하고 싶지 않아 도망 다니던 황제까지 만나러 입궁했다.
지금 그가 황자임이 밝혀지고 아덴티움으로 잡혀 들어온 것을 보면, 레일리 아사드가 얼마나 황제를 마주치고 싶지 않아 했는지 세드릭도 이해할 수 있는 바였다.
그런데도 루시를 위한 선택을 하던 자존심 센 그 마법사 놈.
세드릭은 집으로 돌아와서도 정령 같던 꼬마와의 만남을 잊지 못했다.
그에게는 꼭 신기루 같던 하루였다.
세드릭은 다음날이 되자마자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
열다섯쯤 되는 루시라는 여자에 대해 아테라 안을 이 잡듯이 뒤졌다.
그날 세드릭이 괴롭힌 인간은 한둘이 아니었다.
아테라 제국민 명부를 관리하는 관리를 아침부터 들들 볶았다.
그러나 루시라는 15세 소녀는 아무리 찾아봐도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세드릭은 아테라 내의 부동산을 싹 돌아다니며 알아보기까지에 이른 것이다.
다행히 마지막에 간 아테라 시내 끄트머리에 있는 부동산에서 세드릭은 루시의 흔적을 찾아냈다.
부동산 중개업자가 최근 루시 필드라는 여자가 수도로 들어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중개업자가 말해준 정보는 세드릭이 생각한 것과 많이 달랐다.
15세가 아니라 23세였고, 얼굴에 큰 화상을 입었다고 했다. 그래서 얼굴을 항상 가리고 다닌다고.
‘화상 같은 소리 하네.’
세드릭은 픽 웃으며 루시테를 쳐다봤다.
잡티 하나 없는 흰 피부는 하얗고 투명했다.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건 화상이 아니라 자라지 못하는 저주를 가리고 다니는 것이었다.
세드릭은 어쩐지 루시가 저렇게 어려 보이는 얼굴임에도 스물셋이라는 걸 별로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무언가 달관한 것처럼 보이는 어른스러운 분위기 때문일까.
아니면 밤의 정령 같아 보이는 외모 때문일까.
“루시.”
세드릭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루시테를 불렀다.
루시테는 눈을 크게 뜨고 세드릭을 돌아봤다.
세드릭이 그녀를 ‘꼬마’가 아닌 이름으로 부른 건 처음이었다.
루시테는 세드릭의 입에서 나온 제 이름이 몹시도 어색하다고 생각했다.
“네······ 세드릭.”
“저주를 풀면 어떻게 되지?”
“저는 제 나이에 맞는 어른이 되지요.”
갑자기 저주에 대해 묻는 세드릭이 의아했지만, 루시테는 별생각 없이 대답했다.
이미 알려 준 바 있으니만큼 이 정도 더 말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너는 저주를 풀고 싶나?”
“아니요.”
“왜?”
‘저주를 풀면 성녀가 되어야 하니까.’
루시테는 말을 삼키고 세드릭을 잠시 바라보았다.
세드릭은 그녀가 대답하지 않으면 이유를 계속해서 꼬치꼬치 물어보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사실 풀고 싶어요. 저주에 걸렸는데 당연히 풀어야죠.”
루시테는 자세한 얘기를 별로 하고 싶지 않아 거짓말을 했다.
그렇게 하면 세드릭이 호기심을 멈추고 그만 물어볼까 싶어서.
그러나 그런 생각은 루시테의 착각이었다. 세드릭은 계속해서 그녀를 향해 저주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저주를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하긴요.”
루시테는 그런 것 따윈 모른다고 대답을 하려 했다.
그러나 세드릭의 눈빛이 한없이 진지했다.
꼭 루시테가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려준다면, 정말 마법처럼 해결해주기라도 할 것처럼.
“제가 모른다고 얘기하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찾아봐야지. 저주를 푸는 방법을.”
“언제까지요?”
“저주를 풀 때까지.”
세드릭의 단호한 대답에는 그의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그러니까 내가 평생 저주를 풀지 않으면 평생 괴롭히겠다는 뜻인 건가.’
루시테는 이마를 살짝 짚었다.
그리고 눈을 올려 세드릭을 올려다봤다.
평생이라. 저 인간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루시테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세드릭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알 것 같았다.
세드릭은 맹목적으로 그녀를 향해 잘해주려 하고 있었다. 그의 방식으로.
‘이크릭스의 미친개가 왜 나한테 이러는 걸까.’
루시테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저주받은 게 신기해서?’
아니면.
‘레일리가 황제를 알현할 수 있도록 도와줘서?’
생각하고 보니 둘 다인 것 같기도 했다.
세드릭이 그녀를 쫓아다닌 건 그때의 만남 이후부터인 것 같으니.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고 있나? 알고 있다면 내가 도와주지.”
세드릭이 루시테 쪽으로 약간 몸을 기울였다. 이안과 닮은 그의 얼굴이 루시테의 코에 닿을 듯 가까워졌다.
루시테는 세드릭을 보고 있자니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이 인간에게 말을 해줘 버리자고.
얘기를 듣고 나면 그의 힘으로 저주를 풀어주는 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그만두겠지.
그런 작은 바람이 샘솟았다.
왜냐하면 세드릭은 이크릭스 제국민이고, 이크릭스와 사이가 좋지 않은 헤카레트 대신전에 이크릭스인이 부탁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알아요. 말해드릴게요. 대신 비밀 지킬 수 있나요?”
“정말 알고 있었던 건가?”
세드릭의 표정에 놀람이 번졌다.
그의 얼굴은 곧 한없이 진지해졌다. 단단한 무릎 위에 올려진 그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하지. 절대로 그 누구에게도 너의 비밀을 얘기하지 않겠다.”
“좋아요. 제 저주는 말이에요.”
루시테는 말을 하면서도 우스웠다.
그녀가 간직해온 큰 비밀이었지만 세드릭에게 말을 하니 딱히 큰 비밀처럼 느껴지지도 않았다.
어차피 세드릭은 헤카레트 대신관을 만날 수도 없을 테니까.
“주신 헤카레트를 모시는 최고신관, 그러니까 대신관의 축복의 기도를 받아야 풀려요.”
“뭐?”
세드릭의 눈썹이 휙 치켜 올라갔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마법으로 된 저주가 아니었나?”
‘역시.’
이런 반응일 줄 알았다며 루시테는 작게 미소 지었다.
“자. 저는 말씀드렸어요. 비밀 지켜주시고, 딱히 저주를 엄청나게 풀고 싶은 것도 아니라서 세드릭은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도 돼요.”
루시테는 세드릭을 향해 빙긋 웃어 보이고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금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생각에 잠겼다.
더 이상 피곤하게 그를 상대해 주고 싶지 않았다.
‘그놈의 저주, 저주.’
그 꼬리표에서 좀 벗어나고 싶었다.
그녀를 그냥 다른 사람과는 조금 다른 사람으로서 평범하게 봐주면 안 되는 건지.
그녀는 저주를 풀 생각도 없는데 왜 자꾸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저주를 풀어주고 싶어 안달인지 루시테는 알 수가 없었다.
루시테는 그냥 지금 이대로 산 중턱 하우스로 돌아가서 노이와 새로 생긴 가족들과 가늘고 긴 삶을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을 뿐이었다.
“하아······.”
‘보고 싶어, 노이.’
조용한 방 안에 루시테의 무거운 한숨이 깊게 가라앉았다.
루시테는 생각에 빠져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세드릭 역시 진중한 표정으로 심각하게 무언가를 고민하는 줄은.
* * *
루시테는 잠을 푹 자지 못했다.
나이 많은 하녀가 와서 아침 점심 저녁을 챙겨주고, 씻을 물도 꼬박꼬박 가져다주고, 갈아입을 옷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시테는 모든 것이 가시방석 같았다.
루시테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도 금방 깨곤 했다.
그렇게 잠깐 잠이 들 뿐인데도 눈을 뜨면 소파에는 항상 세드릭이 앉아 있었다.
벌써 황성에 온 지 삼 일째였다.
루시테는 고작 사흘뿐인 이 시간이 마치 삼 년처럼 길게만 느껴졌다.“으응······.”
루시테는 피곤한 눈으로 침대에 누워 기지개를 쭉 편 후 누운 채로 고개를 내려 소파 쪽을 확인했다.
루시테가 눈을 뜨면 세드릭이 언제나 그곳에 앉아 있었으니까.
“어?”
루시테는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잠옷 차림으로 재빨리 침대에서 내려왔다.
단숨에 소파가 있는 쪽까지 걸어와 세드릭이 늘 앉아 있던 자리를 확인했다.
‘없어!’
세드릭이 없어!
루시테는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없었다. 아무도.
세드릭은 루시테가 잠든 사이에 잠깐 씻고 오는 듯했다. 가끔 머리칼이 젖어 있는 걸 목격하곤 했으니.
그러나 루시테가 눈을 떴을 때 세드릭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아직 새벽인데 세드릭이 없다니.
그가 루시테가 자고 있을 거라 생각이라도 한 것일까.
루시테의 눈이 흔들렸다.
루시테는 두 번 생각할 것도 없이 문가로 달렸다.
루시테는 문을 벌컥 열었다. 눈앞에는 처음 들어왔을 때 딱 한 번 봤던 복도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잠겨 있지 않아···!’
루시테의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황제가 루시테의 존재를 비밀로 하려는지 세드릭 외에는 어떤 감시도 붙이지 않았다.
그래서 세드릭이 없는 지금, 루시테가 도망치는 것을 막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루시테는 복도를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잠결에 나왔기에 가벼운 잠옷 차림에 맨발이었지만 그런 것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지금은 이곳에서 도망치는 게 급선무였다.
루시테는 복도를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미친 듯이 달렸다.
아직 동이 트지 않은 새벽이라 돌아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궁 안은 쥐새끼 소리 하나 없이 조용했다.
루시테는 그녀가 있던 궁을 나와 정원이 나올 때까지 한참을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이봐. 교대 시간이야.”
얼마나 달렸을까. 근처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힉!’
루시테는 몸을 움츠리고 주변을 살폈다.
잘 다듬어 놓은 낮은 정원수가 보였다. 루시테는 재빨리 달려 정원수 아래로 몸을 숨겼다.
새벽이슬이 정원수에서 떨어져 루시테의 옷을 적셨다.
루시테는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미동도 없이 주변으로 귀를 기울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철그럭거리는 병장기 소리가 들렸다.
루시테가 숨은 바로 앞길로 병사 한 명이 지나갔다.
병사의 발소리가 멀어질 때쯤 잔뜩 긴장했던 루시테는 순간적으로 다리에 힘이 풀려 잔디밭으로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후우, 후······.”
침착하자. 침착하자 루시테.
아직 조용한 이때가 기회였다.
황성에서 없어진 그녀를 찾겠다고 뒤지기 시작하면 완전히 끝이었다.
다시 붙잡혀 들어간다면 지난 이틀만큼의 편안한 생활은 꿈도 못 꿀 것이다.
분명 황제는 그녀를 도망치지 못하기 위해 더 많은 감시를 붙이고, 더 꽁꽁 감금하려 들 것이다.
지금 도망쳐야 한다고. 루시테의 본능이 그렇게 얘기하고 있었다.
루시테는 몸을 숙인 채 정원수 뒤에서 나와 살그머니 움직였다.
희미한 빛만 보이는 어둠 속에서 루시테의 귀가 무척이나 기민해졌다.
사방에 주의를 기울이며 또 한참을 나아갔다.
그러나 가도 가도 빠져나갈 만한 길은 보이지 않고 건물들뿐이었다.
어디 담이라도 나오면 넘을 생각이라도 할 텐데, 이놈의 황성은 얼마나 큰지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를 않았다.
지금 있는 곳이 어디인지만이라도 알 수 있었다면 더 나았을 텐데.
길을 모르니 방향감각조차 잡을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근처에서 또 철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루시테는 재빨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번에는 딱히 숨을 만한 곳이 없었다.조경을 위한 나무도, 꽃밭도 없었다.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루시테는 하는 수 없이 기둥 뒤에 몸을 숨기고 최대한 몸을 움츠렸다.
조금이라도 옷자락이 삐져나와 들킬까 봐 루시테의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지금이 어두움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녀는 진작에 들켰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철그럭 소리를 내며 병사 한 명이 루시테가 숨어 있는 기둥 바로 뒤를 지나갔다.
“이봐 교대 시간이다. 그만 졸아.”
“어흠! 흠! 벌써 그렇게 되었나?”
두 명의 병사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래, 여기에 계신 분이 누군지 모르나? 정신 차리게.”
“예끼 이 사람! 여기는 뒷문이잖나! 앞문은 화이트 울프가 지키고 있는데 무슨 걱정인가?”
“그렇긴 하지. 하여튼 조심 좀 하시게! 칠칠치 못한 작자 같으니라고.”
두 병사는 시시콜콜한 얘기를 떠들더니 곧 한 명이 자리를 떠났다.
루시테도 이동하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루시테는 발을 한쪽만 내민 채로 멈칫했다.
‘화이트 울프가 앞문을 지키고 있다.’
화이트 울프가······.
루시테는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어떤 생각에 멀리 병사가 지키고 있는 문을 홱 돌아봤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국 최고의 기사단인 화이트 울프가 지키는 사람이라면 누구겠는가?
그것도 황제가 레일리를 막 잡아 온 이 시기에!
‘레일리!’
저 문 안에 감금된 사람은 레일리임이 틀림없었다.
루시테는 이대로 도망가려던 마음을 돌렸다.
루시테는 잠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하다 복도 옆 바닥에 깔린 조경용 흰 조약돌을 몇 개 집어 들었다.
루시테는 돌을 집어 들자마자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실행에 옮겼다.
기둥에서 뛰어 나와 반대편 벽으로 달려간 그녀는 벽에 바짝 달라붙어 숨을 삼켰다.
병사가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것을 보니 그녀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었다.
루시테는 손에 한가득 쥔 작은 조약돌들을 병사의 앞쪽보다 약간 더 먼 방향을 조준하고 휙 던졌다.
따당!
땅!
몇 개의 조약돌은 복도 위에 부딪혀 큰 소리를 냈고 좀 더 멀리로 떨어진 조약돌은 누군가 인기척을 낸 것처럼 수상한 소리를 만들어냈다.
“누구냐!”
병사가 곧바로 검을 꺼내 들었다.
챙!
병사의 검이 뽑히는 소리가 났다.
바로 근처, 병사가 문 앞에서 걸어 나와 기둥, 조금 더 바깥쪽까지 걸어 나왔다.
‘지금이다!’
루시테는 재빨리 달렸다. 몸집이 작고 가벼워 발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루시테는 문을 밀어 열고 잽싸게 그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쿵. 쿵. 쿵.
심장이 얼마나 세게 뛰는지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루시테는 살그머니 움직였다.
뒷문이란 게 하녀들이 다니는 문이었던 모양이었다.
좁은 복도가 나왔고, 그 길을 따라 걸으니 또 문이 나왔다.
여기까지 온 이상 되돌아간다는 선택지 따위 존재하지 않았다. 루시테는 망설임 없이 문을 밀었다.
루시테가 연 문은 욕실 옆으로 나 있는 사용인용 쪽문이었다.
루시테는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들어갔다.
눈앞에 커다란 방의 전경이 펼쳐졌다. 산 중턱 하우스의 응접실이 두 개는 들어갈 만큼 큰 방이었다.
고급스러운 태피스트리가 걸린 맞은편 벽 쪽에는 커튼이 쳐진 큰 침대가 있었다.
그곳에서 미약하게 고른 숨소리가 났다.
루시테는 살금살금 침대로 다가갔다.
루시테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두꺼운 커튼을 살며시 젖혔다.
만에 하나 이 안에 있는 사람이 레일리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숨을 죽인 채 왔던 길로 다시 나가야 할 것이다.
이 안에 있는 사람을 절대 깨워서는 안 됐다.
루시테는 긴장감에 작게 심호흡을 한 후 커튼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침대 안을 샅샅이 살폈다.
이불 아래로 사람이 누워있는 듯한 굴곡이 보였다.
그 사람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있었으나 이불 위로 머리카락이 살짝 삐져나와 있었다.
그리고 머리카락의 색은…….
루시테는 눈을 크게 떴다.
은빛이었다. 반짝거리며 아름다운 은빛 머리카락.
루시테가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는 색이기도 했다.
루시테는 살며시 손을 뻗어 머리칼을 가리고 있는 이불 끝을 잡았다.
이불을 살짝 젖히기 위해 루시테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떨렸다. 루시테의 몸이 침대 가까이 기울어졌다.
루시테가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막 젖히려 할 때였다.
휙!
은빛 머리칼의 주인이 이불을 젖히더니 루시테의 손을 덥석 잡고 잡아당겼다.
“꺄악!”
루시테는 눈을 꽉 감았다. 세상이 뒤집히는 듯 어지러웠다. 넓은 침대에 그녀의 등이 털썩 닿았다.
“누구냐.”
은빛 머리칼이 그의 이마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가 피곤에 찌든 눈으로 루시테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눈을 찌푸리며 물어왔다.
목소리가 잠겨 지독히도 허스키했다.
그러나 루시테에게는 그 목소리가 무척 익숙했다. 목이 잠겨 있어도 알아챌 수 있었다.
루시테는 눈을 깜박이며 제 양 손목을 붙잡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봤다.
레일리. 레일리였다.
“레일리. 저예요.”
적막한 방 안. 작고 낭랑한 목소리가 녹아들었다.
레일리는 루시테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눈을 번쩍 떴다.
은빛 눈동자는 여전히 다이아몬드처럼 아름다웠지만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는지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루시?”
그가 탁한 목소리로 루시테를 불렀다.
레일리는 피곤한 눈을 깜박이며 루시테의 얼굴을 빤히 내려다보았다.
레일리의 코가 루시테의 코에 부딪힐 듯 가까웠다.
“저, 레일리. 이것 좀 놓아주세요.”
루시테는 레일리의 양팔 안에서 바르작거렸다. 자세가 몹시 불편했다.
“아. 미안합니다, 루시 양.”
레일리가 그제야 루시테의 손목을 놔주며 위에서 비켰다.
둘은 침대 위에서 마주 보고 앉았다.
“어떻게 오신 겁니까?”
레일리는 사방으로 뻗친 머리를 거칠게 넘기며 정리했다.
언제나 완벽하던 부드러운 머릿결이 푸석해진 것을 보니 그가 그사이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세드릭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도망쳤어요.”
루시테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도망치다 보니 우연히 이곳이 레일리가 있는 곳이란 걸 알게 됐고 몰래 숨어들어왔어요.”
“용감하시군요.”
레일리는 일어나 침대를 내려갔다.
루시테는 레일리가 뭘 하는 건가 싶어 시선으로 그를 쫓았다.
그는 구석에 있는 방문을 열더니 다시 나왔다. 그의 손에는 얇은 겉옷이 들려 있었다.
그는 루시테에게 다가와 겉옷을 내밀었다.
“왜요? 저 안 추운데.”
“옷이 얇습니다.”
옷?
루시테는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얇은 슈미즈 위로 살결이 비쳤다. 짧은 치마 아래는 흰 다리가 그대로 드러났다.
“아.”
루시테의 창백했던 두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루시테는 얼른 레일리가 준 겉옷을 꿰입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뒤 레일리를 바라보았다.
가만 보니 그의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레일리. 괜찮아요? 많이 피곤해 보여요.”
“괜찮습니다, 루시. 그보다 루시 양을 이런 일에 끌어들여 미안합니다······.”
레일리의 얼굴이 침울해졌다.
“루시 양은 좀 괜찮습니까?”
“네에······.”
그들은 잠시 침묵했다.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레일리는 알고 보니 2황자 카일러스였고, 함께 황궁으로 잡혀 와 감금을 당했다.
모든 일이 고작 사흘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레일리. 본의 아니게 당신의 비밀을 듣게 되었네요. 미안해요.”
“아닙니다. 이제는 비밀도 아닐 텐데요. 비밀이라 치면 제국민이 다 아는 비밀인 셈이로군요.”
레일리가 자조적으로 웃었다.
루시테는 레일리에게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를 고민했으나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은 어떤 말을 해도 딱히 레일리에게 위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럴 때는 그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함께 있어 주는 게 차라리 나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루시테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레일리는 제 얼굴을 쓸어내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고개를 들고 다시 루시테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