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상황을 비관적으로만 보던 여운이 가시고 나니, 루시테가 그를 찾아왔다는 것이 조금씩 현실적으로 와 닿기 시작했다.
그는 차츰 비운의 황자의 얼굴 대신 천재 대마법사 레일리 아사드의 총명한 눈빛을 되찾기 시작했다.
레일리는 눈을 깜박였다. 몽롱하던 잠에서 완전히 깨어난 것 같았다.
“그런데 루시, 그대는 왜 그대로 도망가지 않고 저를 찾아온 겁니까? 저 역시 감시받고 있지 않습니까. 제게 오셔봤자 방법이 없을 텐데요.”
루시테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예리했다. 루시테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레일리와 함께 도망치려고요.”
“네?”
오히려 당황한 쪽은 레일리였다. 루시테는 무릎으로 레일리 쪽으로 다가가 그의 옷자락을 잡았다.
“함께 도망가요, 레일리. 당신 천재잖아요. 알고 있잖아요, 방법.”
루시테의 칠흑처럼 새카만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죄송하지만 루시, 황성에 안티매직이 있는 이상 저는 마법을 쓰지 못합니다. 평범한 인간이나 다름없는 상태입니다. 그러니 함께 도망가는 것은 무리······.”
레일리는 냉정하게 상황을 이야기하려다 말을 멈췄다.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방법이 있었다.
마법이 아니라면 다른 수단으로 도망가면 되지 않는가. 레일리는 그의 주변으로 눈길을 돌렸다.
-레일리는 멋있어!
-레일리는 아름다워!
오직 레일리의 눈에만 보이는 존재들.
물의 정령이 물방울을 튀기며 그의 주변을 포르르 날아다니고 있었다.
최상급 물의 정령 엘피드.
엘피드는 독수리 형태의 거대한 정령으로 창공을 날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레일리가 별로 정령에 관심이 없어 딱히 계약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면.
이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정령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가 가진 드래곤 하트의 자연친화력이라면 물의 최상급 정령과도 계약할 수 있으리라.
“있었어, 방법이.”
레일리의 눈빛이 기쁨으로 물들었다.
루시테에게 반드시 돌려보내 주겠다던 약속을 들어줄 유일한 방법이 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레일리!”
루시테는 반색하여 그의 이름을 부르며 침대에 손을 짚었다.
레일리가 있는 쪽으로 그녀의 몸이 절로 기울었다.
“방법을 찾았나 보군요!”
루시테가 레일리를 향해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둥근 눈이 부드럽게 휘며 흑진주 같은 눈동자가 반달 모양으로 접혔다.
붉은 입술 아래로 고르게 자리한 새하얀 치아가 다 드러나도록 루시테는 기쁘게 웃었다.
도톰한 입술이 길게 호선을 그렸다.
레일리가 일순 멍한 얼굴로 루시테를 바라보았다.
루시테가 그에게 이리도 환한 모습으로 대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녀의 반짝이는 눈동자에서 레일리는 그를 향한 맹목적으로까지 느껴지는 믿음과 기대를 읽었다.
레일리는 그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의 믿음은 레일리의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다.
차갑게 식었던 것만 같았던 레일리의 심장이 뛰었다.
“그래서 무슨 방법인가요, 레일리? 우리 언제 떠나나요?”
루시테가 기대감에 찬 얼굴로 레일리 쪽으로 조금 더 몸을 기울였다.
그때였다.
쾅쾅쾅!
누군가 문을 세게 두드렸다.
“2황자 전하!”
거친 기사의 음성이었다.
“2황자 전하!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그는 레일리가 허락하지 않았음에도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기세였다.
“어, 어떡해요? 어떡하죠, 레일리? 벌써 아침이 된 건가?”
루시테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우왕좌왕했다.
숨을 곳이 있다면 쥐구멍에라도 기어들어 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미처 숨을 곳을 발견하기도 전에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리 와요, 루시테.”
레일리가 루시테의 손을 낚아채어 휙 잡아당겼다.
“으,”
‘앗!’
두 번째 비명은 레일리의 너른 손바닥에 의해 가로막혔다.
레일리는 루시테의 입을 확 막고 그녀를 껴안았다. 그리고 두터운 이불을 머리까지 덮었다.
그가 평소에도 이불에 파묻혀 잔다는 것을 아는 감시자들은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한 가지, 레일리는 혹여 이불 위로 두 명의 실루엣이 드러날까 걱정했다.
그는 루시테의 입을 막은 손바닥을 조심스레 떼고 그녀를 꽉 껴안았다.
그녀를 품에 안고 보니 다행히 실루엣이 이불 위로 드러날 걱정은 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루시테의 체구가 작아, 그의 품 안으로 쏙 들어왔다.
이불 위에는 호리호리하지만 나름 체구가 큰 편인 레일리의 실루엣만이 드러났다.
그의 품 안에서 자그마한 소녀가 잔뜩 긴장한 듯, 고르지 못한 숨을 내뿜었다.
솜털 같은 숨결이 옷자락이 벌어져 드러난 그의 단단한 맨 가슴에 닿았다.
“2황자 전하! 깨어 계십니까?!”
멋대로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기사가 외쳤다.
루시테의 심장이 쿵쿵 세차게 뛰었다.
그녀의 눈에 레일리의 단단한 맨 가슴이 한가득 들어왔다.
‘쉿.’
레일리가 그녀의 머리에 대고 작게 속삭이느라 그의 입술이 루시테의 머리에 닿았다.
루시테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분명 긴장되어야 하는 상황인데 왜 이렇게 땀이 나고, 열이 나고. 두근대는지.
루시테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전하!”
기사가 침대에 쳐진 커튼을 확 젖혔다.
“무슨 짓이냐.”
레일리가 인상을 찌푸리며 머리를 살짝 들었다.
그의 팔은 여전히 루시테를 제 품으로 바짝 붙인 채였다.
“간밤에 별일 없으셨습니까?”
화이트 울프 기사단 소속의 기사가 예리한 눈빛으로 레일리와 방 안을 살폈다.
기사는 무언가를 찾으려 했지만, 레일리는 누가 봐도 자다가 막 일어난 피곤에 찌든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 기사는 굳이 레일리의 침대까지는 주의 깊게 바라볼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레일리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아뇨, 아무 일도 아닙니다!”
기사는 레일리에게 사실을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간밤에 그들의 기사단장인 세드릭이 감시하던 소녀가 없어졌다는 사실은 극비로 하라는 황제의 명령이 이미 그들에게 떨어진 상태였다.
특히 가장 요주의 인물인 레일리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말해줄 턱이 없었다.
기사는 레일리가 물어보면 무어라 변명을 해야 할지 생각하며 머리를 쉼 없이 굴렸다.
그러나 정작 레일리는 기사에게 아무것도 물어볼 생각이 없었다.
“아무 일도 아니면 왜 아침부터 내 잠을 방해한 거냐? 피곤하니 썩 나가라.”
“저는 말씀드릴 수!”
말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던 기사는 예상과 전혀 다른 레일리의 말에 벙쪘다.
“못 들은 거냐? 나가라고 했다. 지금 당장.”
“예······ 예!”
기사는 머리를 긁적이며 침대의 커튼을 다시 쳐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레일리는 기사가 완전히 나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이불을 젖혔다.
“루시, 괜찮습니까?”
레일리가 제 품에 안긴 루시테를 내려다보며 속삭였다.
“일으켜드리고 싶습니다만, 조금만 더 이렇게 있겠습니다.”
루시테는 레일리의 속삭임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왜······.’
왜 이렇게 더 있자고 하는 거지?
루시테의 얼굴이 더더욱 발갛게 달아올라 이제 거의 홍당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마치 그들 둘이 서로 연인이며, 레일리는 연인을 품에 안고 밀어를 속살거리는 남자 같은 상황이지 않은가.
레일리가 마치, 그녀에게 당신이 너무 좋아서 떨어지고 싶지 않으니 조금만 더 이렇게 있고 싶다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심장이 루시테의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미친 듯이 뛰어댔다.
“잠시 뒤 제 세숫물과 아침을 가져다줄 시녀가 올 겁니다. 루시는 제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이대로 아무 말 말고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시, 시녀?’
시녀 때문이었구나.
밀어를 속삭이는 레일리라니.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말았다.
루시테는 제 오해를 깨닫고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마음속으로라도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몹시 부끄러웠다.
레일리가 그녀에게 밀어를 속살일 리가 없지 않은가. 레일리와 그녀가 무슨 사이라고.
한순간이라도 그런 생각을 하며 볼을 붉혔다는 사실이 루시테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민망했다.
똑똑.
얼마 지나지 않아 레일리의 말대로 누군가 노크를 했다.
레일리는 기다렸다는 듯 다시 루시테의 머리까지 두터운 이불을 덮었다.
그리고는 다정하게 루시테의 머리 위로 속삭였다.
“답답해도 조금만 참으세요. 루시.”
루시테는 레일리의 품 안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입이 마르고 목이 바짝바짝 탔다.
답답하기는커녕 그의 품 안은 아늑하고 편안했다.
단단한 맨가슴은 서늘했고 그녀를 감싸고 있는 양팔은 다정하고 따스했다.
그리고 조금 전부터 코끝을 짙게 맴도는 이 향기.
레일리에게서는 무척이나 좋은 냄새가 났다.
그의 품에 코를 가까이하면 할수록 그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머스크 향이 났다.
그 향기에 루시테는 정신이 아득해졌다.
코를 마비시켜버릴 것만 같은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향기에 루시테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루시테는 멍하니 레일리의 가슴에 제 이마를 기대고는 눈을 감았다.
그의 품 안이 몹시 포근했다.
“2황자 전하, 기침하실 시간입니다.”
시녀가 레일리의 침대 커튼 바깥에 서서 레일리를 불렀다.
“피곤하니 돌아가라.”
레일리는 루시테를 꽉 껴안고는 귀찮다는 투로 얘기했다.
“2황자 전하, 세숫물과 아침 식사를 챙겨왔습니다. 일어나십시오.”
“가라고 했을 텐데.”
레일리의 말에 짜증이 묻어났다.
그러나 나이가 지긋한 목소리의 시녀는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2황자 전하. 제대로 일어나서 준비하고 계시지 않으면, 저도 황제 폐하께 보고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뭐라고?”
시녀를 보내려던 레일리가 눈을 번쩍 떴다.
“지금 뭐라고 했느냐?”
“황제 폐하께서는 2황자 전하께서 잘 지내시게 도와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잘 지내시지 못한다면 저는 보고드릴 수밖에 없지요. 방법이 있단 말입니까?”
철저하게 황제의 끄나풀로서 레일리를 감시하러 온 시녀는 완고했다.
그녀는 레일리를 자기 입맛대로 하려 했고, 레일리가 말을 듣지 않으면 이런 식을 황제에게 보고하겠다며 협박을 해왔다.
황태자파인 시녀는 걸릴 게 없었다.
레일리는 황태자도 아닌 데다, 비록 대마법사이긴 했으나 황궁 안에서는 그마저도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루시테는 레일리의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레일리가 이 황궁에서 어떤 위치인지, 저 시녀의 말 몇 마디로 루시테는 전부 알 수 있었다.
거세게 뛰던 루시테의 심장이 차츰 가라앉았다.
레일리가 불쌍했다.
그에게서 이전 생애 그녀가 메이븐의 황성에서 당했던 불합리한 차별 대우들이 겹쳐 보였다.
“보고하든 말든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놓고 돌아가라!”
레일리는 시녀를 향해 버럭 외쳤다.
“하아······.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2황자 전하.”
시녀가 짜증스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분명 돌아가라고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만. 이 일은 황제 폐하께 보고 드리겠습니다.”
레일리는 대답하지 않았고. 시녀도 레일리를 떠보려는 듯 바로 돌아가지 않았다.
시녀와 레일리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도 이 방의 공기가 납덩어리라도 되는 양 무거웠다.
시녀의 그림자가 레일리의 커튼 밖에서 어른거렸다.
한참 뒤에야 시녀가 돌아서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났다.
‘휴.’
루시테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루시테는 레일리의 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바르작거렸다.
그러나 웬걸, 레일리가 그녀를 놓아줄 생각을 안 했다.
루시테는 레일리의 팔 사이에 껴서 옴싹달싹 못한 채 눈만 깜박였다.
그때 루시테의 머리 위로 뜨거운 숨과 함께 레일리의 얼굴이 닿았다.
소스라치게 놀라며 숨을 삼킨 루시테는 얼어붙은 채로 침을 꼴깍 삼켰다.
“레일리. 괜찮아요?”
루시테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레일리를 향해 물었다.
“후우······.”
레일리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스트레스를 받는 모양이었다.
“루시 양이 이런 꼴을 보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레일리.”
루시테는 감히 레일리를 위로하지 않았다.
아마 어떤 말을 해도 그에게 위로가 될 것 같지는 않았으므로.
“황자라면서…… 이런 대접을 받는 게 이상해 보이지 않습니까?”
레일리의 목소리가 나지막했다. 루시테는 그의 목소리에서 미약한 수치심을 느꼈다.
그가, 루시테에게 이런 꼴을 보인 일을 수치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루시테는 고개를 저었다.
레일리는 제 이마를 루시테의 머리 위로 묻고 있었으므로 루시테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느꼈다.
“그냥······. 그래서 레일리가 대단한 마법사이면서도 다른 이름으로 황성 밖에서 살았겠구나 싶었어요.”
루시테는 있는 그대로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루시 양은 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럼요. 누구나 감추고 싶은 치부는 있는 거니까요. 제가 뜻하지 않게 레일리의 비밀을 알게 되었지만, 그걸 가지고 제가 알던 레일리를 다르게 생각하고 싶지 않아요. 레일리는 레일리가 아닌가요?”
‘내가 저주가 풀리든 아니든 언제나 나인 것처럼.’
루시테는 뒷말을 삼키고 다시 말했다.
“그러니까 레일리. 제가 아는 당신은 대마법사 레일리에요. 그렇게 생각할래요.”
레일리는 잠시 침묵했다.
어쩐지 그가 몹시 고민했던 그의 정체성이 루시테로 인해 정의 내려진 기분이었다.
“루시 양은 참 신기합니다.”
“그런가요?”
“네. 어린 소녀 같다가도, 레이디 같고. 또 어느 때는 저보다 훨씬 세상을 오래 산 사람 같지 않습니까.”
레일리는 아무런 꿍꿍이속 없이 순수하게 자신이 루시테에 대해 느끼는 바를 말했다.
요 며칠 사이, 극도의 자괴감에 빠져 있던 그는 조금씩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오고 있음을 느꼈다.
어떤 상황에도 그는 그일 뿐이라는 말은 레일리에게 꽤 큰 위로가 되었다.
레일리는 이 작은 여자가 그를 치유해주고 있음을 솔직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았던 자존감이 회복되고, 이 막막한 상황 속에서도 무언가를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자신감이 생기려 했다.
그를 향한, 대마법사 레일리를 향한 그녀의 맹목적인 기대와 믿음이 레일리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아마 레일리의 말이 맞을 거예요.”
“네? 무엇이 말입니까?”
루시테가 한참 침묵하다 대답했기에 레일리는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루시테가 그의 무슨 말이 맞다고 대답한 건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루시테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녀는 레일리의 품 안에서 다시금 벗어나기 위해 바르작거렸다.
“아, 실례했습니다.”
레일리는 아차 싶어 그제야 루시테를 놓아 주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레일리는 조금 전 시녀에게 모욕을 당했으나 이제는 그 일이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지려 했다.
어쩌면 그가 자유로워질 방법을 정말로 찾아낼 것이라는 희망이 그의 마음속에서 싹텄다.
그의 은빛 눈동자가 다시금 반짝였다.
“참. 레일리.”
루시테가 침대에 앉아 옷매무새를 가다듬다 그를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 루시.”
“앞으로 레일리를 무어라 불러야 할까요? 원래는 다른 이름이신 것 같던데요. 카일러스라고들 부르던데.”
“루시 양이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십시오. 저는 상관없으니까요.”
레일리가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네에.”
루시테는 대답하며 레일리의 얼굴을 일순 멍하니 쳐다봤다.
눈부시도록 부드럽고 매혹적인 미소. 이제야 좀 그녀가 아는 진짜 레일리 같았다.
* * *
“디에고 백작!”
황제가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이크릭스 대마법제국의 황제 발칸트리히 2세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했다.
“백작이 그 입으로 혼자서도 충분히 감시할 수 있다고 하지 않았나?”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 사달을 내!”
황제가 또 한 번 테이블을 내리쳤다.
“황성 안을 벗어나지 못했을 겁니다.”
“그걸 아직도 못 찾고 있지 않나! 조그만 계집 하나 찾지 못하다니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내가 왜 백작에게 화이트 울프 단장 자리를 줬는지 모르겠군!”
“저도 모르겠습니다.”
세드릭은 뚱한 얼굴로 황제가 하는 말에 꼬박꼬박 말대답을 했다.
그리고 그 대답이 황제를 더 열 받게 했다.
챙!
황제가 열이 뻗쳐 던진 유리잔이 세드릭을 비껴가 벽에 부딪혔다.
정확히 말하자면, 유리잔은 사실 세드릭을 명중했으나 세드릭이 고개만 슬쩍 움직여 유리잔을 피한 것이다.
“세드릭 디에고오오!”
황제의 고함이 집무실을 넘어 복도를 타고 메아리쳤다.
“네놈 때문에 간신히 잡아넣은 내 아들놈이 도망가면 책임질 건가?”
“그걸 왜 제가 책임집니까? 감시를 제대로 못한 놈들을 처넣어야죠.”
“감시를 제대로 못한 놈?! 그래 네놈 말 한번 잘했다. 네놈이 그 계집을 제대로 감시 못한 책임은 어떻게 할 것이냐?! 어떻게 할 것이냔 말이다!”
황제는 역정을 냈다.
황제는 내심 세드릭 디에고를 2황자를 감시하는데 보낼 생각을 했다.
아무리 몹쓸 놈이어도 세드릭 디에고는 이 황성 내에서 가장 쓸 만한 실력을 가진 놈이었다.
“안 그래도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만, 저는 황태자 전하의 호위가 되기로 했습니다.”
세드릭은 뻔뻔한 얼굴로 황제에게 통보했다.
“뭐, 뭐라?”
저 미친놈이 지금 뭐라고 하는 것인가?
그렇게 말하는 듯한 얼굴로 황제는 세드릭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황태자 전하를 지킬 테니 태자 전하의 호위로 보내주십시오.”
세드릭이 하는 짓은 거의 허락을 가장한 강요였다.
황제는 어이가 없었다.
반성해도 모자랄 판에 제가 원하는 곳으로 보내 달라니.
그것도 2황자의 약점을 감시하던 놈이 하필이면 황태자의 호위로?
황제는 뒷목을 한 번 잡았다가 머리를 짚었다.
“디에고 백작, 대체 왜 그러는 것인가? 기사단장씩이나 되는 놈이 왜 호위를 하겠다는 건가?”
“2황자 감시나 계속 시키실 게 아닙니까? 2황자를 감시할 바엔 차라리 사직하겠습니다. 황태자에게 충성이라도 맹세할 테니 보내주십시오.”
“뭐, 뭐라? 사직?”
황제는 또 뒷목을 잡았다.
저놈과 대화하면 항상 이런 식이었다.
세드릭 디에고는 몇 안 되는 소드 마스터인데다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검사였으므로 멋대로 사직하게 두면 국력에 손실이 컸다.
세드릭 디에고는 매번 사표를 쓰겠다느니 한 몇 년 휴직하겠다는 식으로 협박 아닌 협박을 해오며, 본인이 하고 싶은 일만 했다.
황제는 그때마다 화를 냈지만, 황제가 겪어본바 세드릭 디에고는 정말로 사표를 쓰고도 남을 놈이었다.
황제는 이번에도 어쩔 수 없었다.
열불이 터졌지만 세드릭 디에고의 요청을 허락해줄 수밖에.
황제는 세드릭이 나가고 난 집무실 문짝을 쳐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미친놈.”
황제가 중얼거렸다.
* * *
세드릭은 그길로 황태자궁으로 향했다. 그는 황제 못지않게 화가 난 상태였다.
며칠간 루시 필드와 함께 지내며 그녀에게 도망갈 낌새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안심한 것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도망가다니.
‘왜?’
대체 왜?
왜 도망간 거냐, 루시 필드.
세드릭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새벽 그가 자리를 비웠던 건, 헤카레트의 대신관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서였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루시 필드를 안전하게 돌려 보내주고, 어떻게든 저주를 풀게 도와줄 생각이었다.
다른 누가 아닌 그가.
‘나 세드릭 디에고가.’
세드릭은 몹시도 씁쓸한 기분을 느꼈다.
배신당한 건 아니지만 배신당한 느낌이었다.
물론 루시 필드는 갇혀 있었고 탈출하고 싶어 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그가 어떻게 했는가. 루시에게 분명 내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래. 이 기분은 배신이 아니라 실망에 가까웠다.
루시 필드가 사실은 그를 전혀 믿지 않았다는 데에 대한 실망.
세드릭 디에고는 몹시 실망스러웠다.
루시에게 믿음을 주지 못한 자신이, 그리고 그를 믿지 않은 루시가.
세드릭 디에고는 이 알 수 없는 감정이 무엇인지 저도 잘 몰랐다.
그저, 그는 루시 필드라는 사람에게 끌렸다. 루시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레일리 아사드. 그 마법사 놈보다 더.
루시는 그를 편견 없이 대해주었고, 그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인간적으로 그녀와 가까워지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의 산 중턱 하우스에서 느꼈던 그 평온함, 따스함을 다시금 느끼고 싶었다.
부엌으로부터 흘러나오던 구수한 음식 냄새와 그녀가 있는 집이 주는 안락함이 그리웠다.
“그랬군.”
세드릭은 빠르게 걸어가다 말고 우뚝 멈췄다.
세드릭은 왜 자신이 그 작은 여자에게 이토록 다가가고 싶은지를 깨달았다.
지긋지긋한 아테라의 생활 속에서 루시 필드는 그에게 따스함을 느끼게 해준 작은 촛불이었다.
세드릭은 그 여자의 온기에 기대고 싶었다.
세드릭은 주먹을 꽉 쥐었다.
“기다려. 내가 꼭 그 저주를 풀어줄 테니.”
세드릭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루시 필드의 저주를 꼭 풀어주고 꼭 신뢰를 쟁취하리라.
저주를 풀고 싶다고 했으니, 그가 그 여자의 저주를 풀어주면 그 여자는 틀림없이 세드릭을 의지하게 될 터다.
세드릭은 단단히 결심했다.
세드릭은 다시 걸음을 옮겨 황태자궁으로 향했다.
황태자가 헤카레트 신전을 끌어들일 열쇠였다.
세드릭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루시테는 세드릭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다.
만약 세드릭이 어떤 사람인지 알았더라면 루시테는 저주를 푸는 방법을 절대 그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드릭은 이크릭스 인으로서의 자긍심도 딱히 없는 인간이었으며, 신전을 끌어들인다는 것에 대해 일말의 타격도 없는 인간이었다.
그에게는 그를 움직이는 목표만이 있을 뿐, 자존심도 목표 달성에 방해물이 되지 않는 인간이었다.
어쩌면 자존심이란 것 자체가 없는 인간일지도 몰랐다.
세드릭과 레일리는 비슷하면서도 극과 극, 대척점에 있는 존재들이었다.
둘 다 태생 때문에 아테라를 증오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했다.
하지만 레일리는 자존심 때문에 떠나고 싶어 하고, 세드릭은 자존심이 없기 때문에 떠나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정반대였다.
세드릭은 딱히 이 나라에 미련을 둘 게 없었으므로 언제든 미친 짓을 벌일 수 있는 인간이었다.
그런 세드릭이 그녀의 인생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는 일을 벌이려는 것을, 그 시각 루시테는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루시, 피곤하면 좀 주무십시오. 소환진을 그리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습니다.”
레일리가 꾸벅꾸벅 졸고 있는 루시테를 향해 말했다. 루시테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수마를 이겨 보려고 애썼으나 새벽부터 깨어 있었던 탓에 피곤함이 가시질 않았다.
“제가 어떻게 잘 수 있나요. 여긴 레일리의 침대잖아요.”
루시테는 거절 의사를 밝혔지만, 말과 행동이 따로 놀았다.
그녀의 목소리가 수마에 빠져들어 웅얼웅얼 작아졌다.
“레일리 어으 아니으아에세요.”
“네?”
루시테의 옹알이에 고개를 들었던 레일리는 루시테의 자세를 보고 픽 웃었다.
루시테가 침대의 등받이에 기대어 앉은 채 목만 꺾은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목이 꺾여 있는 모양새가 아주 기괴했다. 죽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그녀의 자세가 희한했다.
레일리는 입꼬리를 올렸다.
그는 침대가로 성큼 다가왔다. 작은 소녀의 목과 다리 밑에 손을 넣고 그녀를 들어 똑바로 누여주었다.
새처럼 작은 몸은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 가벼웠다.
꼭 감긴 눈동자가 닫힌 눈꺼풀 아래로 악몽이라도 꾸는 듯 쉼 없이 움직였다.
레일리는 루시테를 잠시 지그시 내려다봤다. 베개 위로 흐트러진 검은 머리칼이 새삼스러웠다.
이 작은 몸을 가진 여자가 어찌나 용감한지.
그 밤에 잠옷 차림으로 황성 안을 숨어다녔을 것을 생각하니 레일리는 새삼스럽게 그녀가 대견해 보였다.
아마 이 방 안으로 들어오는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그녀가 어떻게 문지기를 따돌리고 들어온 건지는 지금도 의문이었다.
“좋은 꿈 꾸시기를.”
레일리는 루시테의 목까지 이불을 잘 덮어주고는 침대 가의 커튼을 쳤다.
촤르르르륵.
루시테를 비추던 한 줄기 햇살이 사라졌고, 루시테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루시테가 잠든 사이, 레일리는 바닥에 깔려있는 양탄자를 치웠다.
정령을 부를 물이 넉넉지 않아 소환진을 꼼꼼히 제대로 그려야 했다.
그는 벽난로 안에서 숯을 꺼내 목탄으로 소환진을 그려나갔다.
그가 살면서 이 정도로 정령이 절실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모든 게 마법으로 해결이 가능했고, 정령은 그저 심심풀이로 한 번 불러 내본 것뿐이었는데.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했던 정령이 이렇게 필요해질 줄이야.
레일리는 씁쓸한 얼굴을 했다.
‘반드시 성공시켜야 해.’
이 소환진이 그와 루시테에게 자유를 가져다 줄 마지막 희망이었다.
레일리는 그의 안에 있는 정령 친화력을 바닥까지라도 박박 긁어 끌어내 볼 생각이었다.
반드시.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다.
-레일리! 레일리!
-아름다운 레일리! 위대한 나브레의 후예 레일리!
바람의 정령과 물의 정령이 레일리의 주변을 날아다니며 속삭였다.
여느 때와 달리 레일리는 정령들의 속삭임을 하나도 신경 쓰지 못했다.
그의 매끈한 뺨을 타고 구슬땀이 또르륵 떨어져 내렸다.
그는 엄청난 집중력으로 복잡한 소환진을 하나하나 완성해나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방의 한 가운데 거대한 소환진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소환진을 보며 감탄하고 있을 시간 따위는 없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면 안 됐다. 점심을 먹으라며 언제 시녀가 들이닥칠지 모를 일이었다.
레일리는 빠르게, 그러나 정확히 완성한 소환진의 한가운데 물그릇을 놓았다.
그리고 그 안에 손을 담그고 눈을 감았다.
‘아스 나하스 데스카 스필라.’
고대어로 되어 있는 정령을 부르는 주문이었다.
레일리는 고도로 집중을 하며 주문을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그의 안에 있는 정령의 기운을 극도로 끌어올려 소환진에 쏟아 부었다.
그 순간.
갑자기 그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무언가가 기운을 쑥 뽑아가듯 거대한 힘이 레일리가 가진 정령의 기운을 뽑아갔다.
정령의 기운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끝없이 샘솟는 마나를 한 번에 뿌리 뽑듯 뽑아갔다.
순간적으로 막대한 힘이 빨려 나가자 레일리의 몸이 휘청거렸다. 엄청난 압박감이 그를 덮쳤다.
마침내 압박감이 가시고 나서야 레일리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는 주위를 둘러봤다.
방 안은 고요했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물그릇 안에 들어 있는 물조차 한 방울도 줄어들지 않았다.
“실패인가?”
레일리는 미간을 좁혔다.
실패할 리가 없는 소환진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가 그렸으니까.
아무리 실패라도 중 상급 정령 정도는 소환되었어야 할 터였다. 그런데 그 어떤 것도 소환되지 않다니.
그럴 리가 없었다.
‘다시.’
레일리는 망설임 없이 물 안으로 손을 다시 집어넣고 눈을 감았다.
엄청난 기운이 빠져나갔기에 기력이 없었으나 레일리는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몸이 부서지더라도 반드시 물의 최상급 정령 엘피드를 소환할 생각이었다.
-그러다 죽을 텐데.
파도가 치는 듯, 거대한 수면 위에 파문이 이는 듯, 물이 일렁이는 것 같은 스산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
레일리는 눈을 번쩍 떴다. 몸이 절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목소리의 주인이 그의 정령의 기운과 마나를 무지막지하게 빨아들인 놈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방안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으나 공기가 무거웠다.
마치 바다 저 깊은 곳으로 가라앉기라도 한 것 같았다.
방 전체가 물로 가득 차버린 듯 습하고 무거운 공기였다.
레일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앞 허공에 푸른 형체가 아지랑이처럼 꾸물거렸다.
사파이어 같은 푸른 눈동자가 일렁이는 아지랑이 속에서 번뜩이며 레일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푸른 연기는 점점 형체를 만들어져 갔다.
레일리는 계속해서 그의 심장에서 마나가 새 나가고 있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푸른 물방울인지 연기인지 모를 것이 형체를 완전히 갖추었다.
그리고 레일리의 심장에서 마나가 빠져나가는 것도 멈췄다.
-중간계의 공기는 언제나 답답하군.
장신의 남자가 허리까지 오는 긴 푸른 머리칼을 손끝으로 휙 넘겼다.
창백한 얼굴에 푸른 눈동자와 푸른 입술.
남자의 이마 한가운데에는 푸르른 보석이 눈이 시리도록 빛을 내며 박혀 있었다.
레일리의 눈빛이 놀라움으로 물들었다.
레일리의 지식이 맞다면 그는 분명······.
-나를 불러낼 수 있는 인간이 있다니. 1500년 만이로군. 아니. 1700년 만인가?
그가 길고 창백한 손가락을 접으며 헤아렸다.
그가 손목을 들자 넓고 푸른 소맷자락이 물결에 휩쓸리듯 흔들렸다.
-내 소개가 늦었군. 나는 정령왕 엘라임이다. 놀란 표정이로구나, 인간.
장신의 남자의 정체는 물의 정령왕 엘라임이었다.
최상위급 정령을 넘어선 신에 가까운 존재. 이 세계의 사대 근원 중 하나.
그런 존재가 지금 레일리의 방 한가운데에 강림한 것이다.
-놀랄 만하지. 나 같은 왕급 정령은 처음 볼 테니 말이다.
엘라임이 허리를 젖히며 웃음을 터뜨렸다. 해수면이 일렁이는 것 같은 소리가 방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놀랐던 레일리는 차츰 침착해졌다.
정령왕은 중간계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존재라 그에 관해 남아 있는 자료는 얼마 없었다.
그런 정령왕에 대한 기록 중, 신빙성이 떨어지는 기록으로서 정식이 아닌 야사로 분류된 자료가 있었다.
그 자료에는 엘라임은 쓸데없이 말이 많으며 왕자병 말기라서 하루 종일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는 내용이 쓰여 있었다.
레일리는 그 기록의 내용이 진실임을 깨달았다.
냉혈한같이 생긴 엘라임이 쉴 새 없이 자화자찬하며 무어라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
레일리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나와 정령의 기운이 모조리 빠져나가 바닥을 치니 몹시 피로했다.
“저와 계약하실 겁니까?”
레일리는 무어라 중얼거리던 엘라임의 말을 잘랐다.
-계약? 내가 너와 계약을 할 리가 없지 않느냐.
레일리는 미간을 좁혔다.
계약을 안 할 거면 왜 튀어나왔느냐는 눈빛으로 레일리는 엘라임을 싸늘하게 쳐다봤다.
레일리는 정령왕이 필요한 게 아니었다.
딱 그가 필요한 정령은 최상급 정령 엘피드, 그 이상도 이하도 필요 없는데 쓸데없는 게 튀어나와 시간도 없는 그를 귀찮게 하고 있었다.
아무리 대단한 존재를 소환했다 한들 뭐에다 쓰냔 말인가? 쓸모가 없는데.
“계약을 안 하실 거면 왜 소환되신 겁니까?”
레일리의 목소리는 더 이상 호의적이지 않았다.
정령왕급 되는 존재는 자의로 소환될지 아닐지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러니까 엘라임은 굳이, 이곳에 자의로 소환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기분 나빠 하지 말거라. 나브레의 아이야.
엘라임의 목소리가 진중해졌다.
-나는 내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따라왔단다.
엘라임이 소맷자락을 펄럭이며 침대 가를 향해 손짓했다.
침대의 커튼이 휙 걷히며 곤히 잠들어 있는 루시테가 보였다.
-불쌍한 아이······.
루시테를 바라보는 엘라임의 눈빛이 회한에 잠겼다.
레일리는 엘라임과 루시테를 번갈아 보았다.
정령왕이 일개 인간을 알고 있다니. 루시테 그대는 대체 뭐지?
레일리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녀에게는 저주뿐만이 아니라 어떤 더 깊은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 같았다.
레일리는 그것이 궁금했다.
-나는 물을 다스리는 왕이다. 모든 죽은 자는 강을 건너가야 하지. 그런데 그 운명을 내가 뒤틀어 버렸다. 얄궂은 운명에 너무 화가 났거든.
엘라임이 회한에 잠긴 얼굴로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저 아이가 죽지 못하고 계속해서 삶을 반복하는 건 다 나 때문이야. 저 아이나 나나 주신에게 저주를 받았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많았지만 레일리는 엘라임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주의 깊게 들었다.
그가 알아서는 안 될 어떤 비밀이 정령왕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 아이는 탈 없이 나이 들어 죽어야 무의미한 회귀를 끝낼 수 있을 거다. 나는 그 끝을 봐야만 무로 돌아갈 수 있고.
엘라임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방 안의 공기가 더더욱 무거워졌다.
-나는 너무 오래 살았어. 이제는 쉬고 싶구나.
루시테를 바라보던 엘라임이 뒤로 휙 돌았다. 그는 순식간에 레일리의 앞으로 당도했다.
-너는 저 아이와 나를 이 저주에서 꺼내줄 마지막 조각이야. 그만큼 강하고, 지혜롭지. 나브레의 아이야.
엘라임의 시린 눈이 레일리에게 닿았다.
-헤카레트의 대신관에게 저 아이를 데려가거라. 그러면 네가 찾는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엘라임의 푸른 눈이 레일리의 저 깊은 생각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헤카레트의 대신관이라. 레일리가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가 정령왕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즉, 폐황녀 루시테 클라우디오의 저주는 신전과 관련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레일리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겠느냐? 역시. 내가 사람을 제대로 봤구나.
엘라임의 얼굴이 기쁨으로 물들었다.
-대신 한 가지,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마. 주신의 저주로 평생 방관자로 살아야 하나, 내 권능으로 네가 원하는 것 한 가지를 이루어주고 돌아가겠다. 자, 말해 보라. 신룡의 후손이여.
레일리는 잠시 고민했다.
엘라임의 제안은 무척이나 대단한 것이었다.
엄청난 물의 힘을 요구할 수도 있고, 엄청난 부를 요구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또는 레일리가 마법사로서 가장 탐내는 것, 인간의 범위를 넘어선 지식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레일리는 루시테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러자 고민한 시간에 비해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쉬웠다. 그녀를 집으로 돌려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레일리는 씩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단숨에 이야기했다.
“그녀를 그녀의 집으로 돌려 보내주십시오.”
엘라임의 눈동자가 시린 빛을 뿜었다.
-정말 그 소원으로 되겠느냐? 인간아.
“네.”
레일리의 대답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어차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이에 그가 빠져나간 마나와 정령의 기운을 다시 채워 넣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니 최상급 정령을 소환하는 방법은 이제 쓸 수 없었다.
무엇보다 이제는 그가 황성에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생겼다.
조금 전까지도 괴롭기만 했던 황성이었으나 지금은 목적이 있었다.
‘헤카레트의 대신관.’
신전에서 잘 움직이지 않는 대신관을 만나려면 황자로서의 지위가 필요했다.
어쩌면 황자보다 더 강한 지위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엘라임을 바라보는 레일리의 눈빛이 확고했다.
-좋다. 그 소원. 들어주지.
엘라임의 말이 끝나자마자 침대에 누워있던 루시테가 물결에 휩싸여 사라졌다.
-그리고 별건 아니지만.
엘라임이 손가락을 뻗어 검지로 레일리의 이마를 툭 건드렸다.
-네게 물의 축복을 내리겠다.
레일리의 이마를 타고 청량한 기운이 그에게 깃들었다.
딱히 거대하거나 엄청난 기운은 아니었다. 그래서 레일리의 마나 회복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엘라임이 손을 거두고는 씩 입술을 올렸다.
-그럼 지켜보겠다. 나브레의 아이여. 시간이 다 되었구나.
엘라임이 처음에 왔던 그대로 형체가 흐트러졌다.
그리고 그의 형체가 완전히 흐트러졌을 때 방을 뒤덮고 있던 무거운 기운도 서서히 사라졌다.
마치 시간이 멈췄다 다시 흘러가는 것처럼, 레일리의 멈췄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황성에 잡혀 들어와 자괴감으로 허비했던 지난날들은 이제 없었다.
레일리는 황자이기 이전에 천재 대마법사 레일리였다.
자신감이 넘치고 지혜로우며 오만한 레일리.
그의 은빛 눈동자가 청명하게 빛났다.
똑똑.
때마침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2황자 전하, 메릴다입니다. 들어가겠습니다.”
황제의 끄나풀인 나이 지긋한 시녀의 목소리였다.
“들어와라.”
레일리는 당당하게 명령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괴로워만 하고 있던 카일러스는 이제 없었다.
맞부딪혀 그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리라. 그의 방식으로.
그래. 이래야 레일리 아사드, 그다웠다.
* * *
“으음······.”
루시테는 몸을 뒤척였다. 눈꺼풀이 무거웠다.
수많은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은 나지 않았다.
루시테는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볐다.
아침햇살이 그녀의 침대 위를 비추었다.
“으으으······.”
루시테는 몸을 뒤척였다. 그때 그녀의 얼굴 위로 무언가 차가운 게 떨어졌다.
얼굴을 매만지다 눈을 뜬 루시테는 눈을 뜨자마자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커다란 은빛 눈과 마주했다.
“뇽! 뇽!”
“노이······?”
잠에 막 깨어난 목소리가 잠겨 갈라졌다.
노이가 그녀의 머리맡 침대의 헤드에 거꾸로 매달려 눈물을 쏟고 있었다.
짧고 통통한 다리를 간신히 헤드 틈에 걸치고 육중한 몸을 꾹 지탱하고 있었다.
그녀를 바로 위에서 내려다본답시고 그러고 있는 모양이었다.
세로로 동공이 찢어진 커다란 은빛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그녀의 볼에 닿았다.
“뇨옹! 뇽!”
노이가 구슬프게 울었다.
“노이. 왜 그러고 있어.”
루시테는 몸을 일으킨 후 노이를 똑바로 세워주었다.
노이는 침대 위로 올라오자마자 루시테에게 달려들더니 루시테의 품에 머리를 마구 비비고 루시테의 손을 제 가슴에 품었다.
“노이. 왜 그래?”
루시테는 미소를 지으며 묻다가 순간 우뚝 멈춰 흔들리는 눈동자로 노이를 바라봤다.
꿈인가 싶어 눈을 거세게 비볐지만 눈앞에 있는 노이는 사라지지 않았다.
루시테는 주위를 둘러봤다.익숙한 풍경이 시야를 메웠다.
어딜 봐도 산 중턱 하우스의 2층, 그녀의 방 안이었다.
“말도 안 돼.”
루시테는 벌떡 일어나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달려갔다.
“아가씨! 일어나셨군요!”
루시테를 발견한 리브가 반갑게 인사했다.
막 정원 손질을 하고 들어오던 에단도 루시테를 발견하곤 목례를 했다.
꿈이 아니었다. 루시테는 황성 안이 아닌 그녀의 집, 산 중턱 하우스로 돌아와 있었다.
“레일리!”
루시테는 비명처럼 외쳤다.
“레일리! 레일리는?”
“아가씨, 누구 말씀하시는 거예요?”
리브가 고개를 갸웃했다.
“저번에 온 손님을 말하는 것 같은데.”
에단이 리브에게 말을 보탰다.
“아! 마법사 손님!”
리브가 손뼉을 쳤다.
“그분이라면 안 왔어요. 아가씨만 갑자기 나타난걸요. 숨을 쉬고 계시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는지 몰라요. 얼마나 걱정했다고요! 기다렸어요, 아가씨.”
리브가 큰 녹색 눈에 눈물을 글썽였다.
“아가씨가 그렇게 나간 뒤 안 돌아오셔서 몇 번이고 광장으로 찾으러 다녔어요.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리브는 루시테의 옷소매를 붙잡고는 눈물을 훔쳤다.
“정말 나 혼자 왔어?”
“네. 아가씨가 하늘에서 솟은 것처럼 갑자기 침대에 누워계셨어요.”
“······.”
루시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레일리가 방법을 찾았다고 했는데 그것이 성공한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레일리는 없고 자신 혼자만 돌아온 것인지.
루시테는 그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면서도 서글퍼졌다.
무언가 레일리가 한 명만 돌려보낼 수 있는 상황이었고 그래서 그녀만을 선택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루시테의 마음속에 떠올랐다.
레일리가 황성 안에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를 루시테는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만 빠져나오다니.
루시테의 마음 언저리가 저렸다.
레일리가 어떤 커다란 희생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그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그녀의 평범한 일상을 찾아주기 위해서.
루시테는 주먹을 꾹 쥐었다.
당장 레일리를 그곳에서 구해주고 싶었지만 그녀는 능력이 없었다.
제 살길 찾기도 힘든 입장에 누구를 도와줄 수 있겠는가.
루시테는 눈을 꽉 감았다 뜨곤 고개를 들었다.
“리브. 밥은 먹었니?”
“아, 아직이에요, 아가씨.”
“그럼 오랜만에 내가 해줄게. 그동안 집을 잘 지켜주고 노이를 잘 돌봐줘서 고마워. 에단도.”
“아니에요, 아가씨! 당연한 일을 한걸요!”
리브의 녹색 눈에 한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에단은 리브보다는 의젓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리브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리고 작게 중얼거렸다.
“아가씨께서 저희에게 베풀어준 걸 생각하면 당연합니다.”
“뇨옹! 뇽!”
“삐로로로로록!”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노이가 루시테의 다리를 두드렸다. 저도 봐달라는 몸짓이었다.
노이는 배를 보이며 뒤집어 눕기도 하고 구르기도 하며 애교를 부렸다.
“그래. 그래.”
루시테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노이를 쓰다듬었다.
지키지 않고 모른 척해도 될 약속을 지켜준 레일리. 그의 덕에 되찾은 평온이었다.
레일리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없다면 레일리를 위해서라도 이 평온을 지켜야 한다.
겁도 없이 황성을 상대로 날뛰기에는 루시테는 너무 어른이었다.
그녀는 제 처지와 분수를 알았다. 지금은 기다려야 할 때였다.
그러나 언젠가 반드시, 그녀가 필요한 순간에는 반드시 레일리에게 보답하고야 말리라.
그만큼 레일리가 루시테의 마음에 지운 짐은 무거웠다.
그리고 루시테는 레일리에게 진 이 빚을 잊지 않을 생각이었다.
“자. 그럼.”
루시테는 노이와 리브, 에단을 돌아보며 환하게 웃었다.
“밥 먹자.”
“네!”
“네 아가씨.”
“뇽뇽!”
루시테의 소중한 가족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 * *
집에 돌아온 뒤 루시테는 며칠간을 밤낮없이 바쁘게 보냈다. 일이 많이 밀려 있었다.
물론 집안일이 밀려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부지런한 리브와 에단이 루시테가 신경 쓸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일을 잘해주고 있었으니까.
빗물이 새던 지붕이 말끔하게 고쳐졌고, 정원의 잡초도 다 뽑혀 있었다.
허물어진 울타리는 다시 세워졌고 흰 페인트로 새로 칠해졌다.
모든 게 에단이 온종일 일을 한 결과였다. 그는 루시테가 좀 쉬어가며 하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았다.
더 이상 소매치기가 아닌 일다운 일을 하고, 그에 따른 돈도 받는다는 사실.
에단은 종종 일을 하지 않고 있을 때면 그게 실감이 나지 않아서 하루 종일 부지런히 움직였다.
정원의 한구석에는 루시테가 그토록 원하던 작은 밭이 만들어지고 있었고, 집의 둘레를 따라 작은 화단도 착실하게 만들어지는 중이었다.
루시테가 에단과 리브를 믿고 월급 외에도 집을 위한 예산을 미리 맡겼는데, 그들은 그 돈을 허투루 쓰지 않았다.
제대로 루시테의 집을, 그리고 그들의 집이기도 한 산 중턱 하우스를 꼼꼼하게 가꿔가고 있었다.
덕분에 집안일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었으나, 루시테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었다.
밀린 번역과 필사 일이었다. 늦은 오후, 루시테의 펜이 부지런히 움직였다.
노이는 배가 볼록 나온 채 소파에서 햇빛을 쬐며 낮잠을 자고 있었고, 리브는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며 감자를 깎았다.
평화로운 산 중턱 하우스의 오후 전경이 펼쳐졌다.
“아가씨, 이게 뭡니까?”
에단이 그녀의 근처를 지나가다 고개를 숙이고 루시테가 하는 것을 바라봤다.
“카트라나를 공용어로 옮기는 거야.”
“아가씨는 카트라나도 할 줄 알고 공용어도 아시는 건가요?”
“그럼. 둘 다 할 줄 알지.”
카트라나는 이크릭스의 상류층 언어.
그 언어를 대륙 공용어로 번역하는 게 루시테의 일이었다.
루시테는 대답을 하면서도 손을 바삐 움직였다.
에단은 지나가지 않고 신기한 듯 한동안 계속 그녀가 하는 일을 지켜봤다.
마침내 한 권을 마무리한 루시테는 책을 덮고, 펜을 내려놓은 후 에단을 쳐다보았다.
“글을 읽을 줄 아니?”
“아니요. 배운 적이 없어요.”
에단이 고개를 저었다. 글자들을 바라보는 에단의 눈빛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배우고 싶니?”
에단은 머뭇거렸다.
“솔직하게 얘기해. 괜찮으니까.”
제국에는 문맹자가 많았다.
대륙 공용어도 어려웠으며 카트라나는 더더욱 복잡한 언어였다.
그래서 따로 학교를 다니기 어려운 평민들은 아예 글 쓰는 법을 모른 채 자라는 게 대다수였다.
그렇기에 만약 글을 읽고 쓸 수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의 폭이 넓어졌다.
대륙 공용어는 물론이고 만약 카트라나를 쓸 수 있게 된다면?
그렇다면 언젠가 웬만한 귀족 저택에서 높은 위치의 가신으로 채용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배······ 배우고 싶어요.”
에단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루시테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도 시간이 부족한데 에단에게 글을 가르쳐 주려면 시간을 더 쪼개야 할 터였다.
그러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루시테는 후회하는 인생을 살고 싶지 않다고 언제나 생각했다.
후회가 남는 삶들은 지난 세 번의 인생으로 충분했다.
이왕이면 선택의 기로에서 행복하고 좋은 쪽을 선택하며 지금보다 더 행복하고 싶었다.
그렇게 가늘고 긴 인생을 살아가고 싶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가족이나 다름 없는 에단이 글을 배우고 싶다는 선택지에서는?
분명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나중에 후회하겠지.
“좋아 에단. 내가 가르쳐 줄게. 리브한테도 물어봐 줄래? 어차피 가르쳐 줄 거 둘 다 배우면 좋겠네.”
에단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가, 감사합니다, 아가씨!”
그가 허리까지 숙이며 그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에단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평생 길바닥에서 굴러먹다 죽을 인생이 따뜻한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받고, 일자리를 구했는데.
거기다 그의 주인이 이제는 그에게 글까지 가르쳐 준단다.
에단은 입술을 꽉 깨물고 흐려지는 눈에 힘을 주었다.
에단은 흐릿한 시야로 루시테를 바라보았다. 그의 주인은 정말 특이한 사람이었다.
외양부터가 특이했다. 검은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라는 무척이나 특이한 외모를 갖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제 또래쯤으로나 보이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지만 사실 그 속에는 스물셋의 어른이 들어 있다고 했다.
저주를 받아서 그런 모습이라고.
에단은 처음에는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온전히 믿지 못했다.
그야 그의 주인은 영락없이 어린 소녀의 모습이었으니까.
그러나 지내면 지낼수록 에단은 그의 주인이 하는 말을 신뢰하게 되었다.
에단이 모르는 것들을 주인은 모두 알고 있었고, 주인이 내리는 판단들은 신중하고 현명했다.
무언가를 홧김에 하는 법이 없었다.
이제 에단은 그의 주인인 루시 필드를 온전히 믿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허투루 말하는 법이 없었으니까.
‘저주는 무슨.’
우리 아가씨는 성녀야.
그렇지 않고서야 보통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도 신성해 보일 수 있단 말이야.
에단은 주먹을 더욱 꽉 쥐었다.
‘평생 충성할 거야.’
그와 그의 소중한 동생을 구해준 그녀에게. 새로운 삶을 알게 해준 그녀에게.
에단은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충성을 맹세했다.
루시 필드. 루시테.
그녀가 사실은 정말로 성녀인 줄 알았더라면 에단은 아마도 까무러쳤을 것이다.
그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면서도 루시테를 몹시 고귀하고 신성한 존재 바라보듯 쳐다보았다.
바라만 보고 있어도 그녀에게서 신성한 빛이 흘러나오는 듯했으니까.
* * *
“자아. 셋 다 따라 해봐. 이쉬흐.”
“이쉬흐.”
에단, 리브가 동시에 말했다.
“이쉬뇨옹!”
그리고 노이도.
어쩌다 보니 글을 배우는 인원이 세 명이 되어 있었다.
정확히 하자면 두 명과 ‘한 마리’였다.
에단과 리브, 그리고 루시테까지 셋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으니 노이가 큰 관심을 보였다.
어느새 노이는 에단과 리브의 사이에 앉아 은빛 눈을 반짝이며 글자를 따라 하고 있었다.
루시테는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노이를 쳐다봤다. 어디가 모자란 줄 알았는데 그건 또 아닌 것 같았다.
그저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지내는 것도 좋았는데, 글자를 배우겠다고 하다니.
루시테는 노이가 몹시 대견했다.
루시테는 손을 뻗어 노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노이가 눈을 크게 뜨고 입을 헤 벌렸다.
“이쉬뇨옹! 이쉬뇨오오옹!”
노이가 통통한 앞발을 짝짝 부딪치며 좋아했다.
“아가씨, 저는요? 저는요?”
리브가 기대 어린 눈빛으로 루시테를 올려다봤다.
문득 또 다른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루시테는 옆을 바라보았다.
에단 역시 기대 어린 눈빛으로 루시테를 바라보고 있었다.
“흠, 흠. 이쉬흐.”
에단은 헛기침을 하며 루시테가 가르쳐준 단어를 또 따라했다.
루시테는 그만 웃음이 비죽 튀어 나왔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탁자를 빙그르 돌아 에단과 노이, 리브의 뒤로 갔다.
손을 뻗어 그들을 꽉 껴안으니 작은 품 안에 꽉 들어찼다.
어느새 리브와 에단, 노이도 서로서로 마주 껴안았다. 너무도 평온하고 행복했다.
루시테는 이 순간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이 행복이 영원했으면 좋겠다고.
* * *
아무 일 없이 평온한 몇 주가 흘렀다. 날씨는 이제 완연한 여름에 들어서 있었다.
산 중턱으로 올라오는 길은 초록이 우거져 그늘을 드리웠고, 작은 밭에 심은 채소도 무럭무럭 자랐다.
산 중턱 하우스 앞마당은 이제 마당이 아니라 어느 정도 정원 같은 모양새를 갖춰갔다.
에단이 잔디와 작은 묘목을 열심히 심고 가꾼 덕분이었다.
하우스 앞으로 넓게 깔린 잔디는 파릇파릇했고, 빛나는 햇살을 받으면 푸르른 물결처럼 보일 정도로 윤기가 흘렀다.
집의 벽을 빙 둘러서는 수국과 해바라기가 심어졌다.
샛노란 해바라기와 분홍빛의 수국은 무척이나 색이 곱고 아름다웠다.
흰 울타리 안에 펼쳐진 아름다운 정원과 그 뒤에 자리 잡은 아담한 2층 저택.
저택의 1층에서 커튼을 젖히고 큰 창문을 열면 저 아래 광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조망이 좋은 집.
이제 산 중턱 하우스는 더 이상 다 쓰러져 가는 폐가가 아니었다.
가까이 가면 달콤하고 향긋한 꽃내음이 물씬 풍겨져 나오는 사랑스러운 집이 되어 있었다.
“노이! 이리 와! 그 쿠키는 아가씨 거란 말이야!”
쿠당탕탕.
산 중턱 하우스 안에서 쿵쾅대는 발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싫지롱뇽!”
덩치가 아주 조금 커진 노이가 잽싸게 도망갔다.
놀랍게도, 열심히 글을 배운 결과 노이는 어느 정도 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리브와 에단은 노이와 함께 글을 배워서 그런지 노이가 말을 하는 것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같지 않았다.
도마뱀이 말을 하는데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다니.
어린아이들이라 순수해서 그런 걸까?
루시테는 차를 홀짝이며 신기하게 리브를 바라봤다.
노이는 쿠키를 품에 쥔 채 짧은 다리로 잽싸게 도망갔다.
그새 다리 길이가 아주 조금 자랐다고 노이는 아주 재빨랐다.
노이는 리브에게 붙잡힐세라 네 발로 2층을 오르락내리락했다.
“리브. 괜찮으니까 그건 노이 줘.”
“안 돼요! 아가씨! 노이가 이러는 게 한두 번이에요? 노이는 벌써 쿠키를 다섯 개나 먹었다고요! 안 되겠어요. 오늘은 꼭 혼쭐을 내주고 말 테야.”
리브는 작은 몸집으로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씩씩거렸다.
리브는 노이를 뒤쫓다 말고 작은 메모장을 펼쳐 무언가를 쓱쓱 메모했다.
-노이 대왕 초코 쿠키 한 개 훔침.
깨알같이 날짜도 쓰여 있었다.
이제 리브는 대륙 공용어를 조금씩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루시테가 리브와 에단에게 선물로 메모장과 펜을 사주자, 리브는 그 메모장을 필요한 식재료를 기록하는 것 외에도 노이의 잘잘못을 적는 용도로 아주 잘 사용했다.
루시테는 리브가 쓰는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찻잔을 내려놓고 2층으로 올라온 그녀가 광장에 나가기 위해 짐을 챙겼다.
짐을 다 챙기고 옷걸이에 걸어둔 로브를 집어든 루시테는 로브를 잠시 쳐다보다 도로 옷걸이에 걸쳤다.
날이 더웠다.
루시테는 얇은 원피스를 입고 그 위에 로브를 걸치는 대신 챙이 둥근 모자를 집어 들었다.
여름용으로 쓰기 위해 얼마 전 산 것이었다.
모자를 눌러 쓰고 목에 리본을 묶으면 챙이 둥글고 길어서 얼굴에 깊은 그림자가 졌다.
일부러 모자를 벗기지 않는 한 그녀의 얼굴 생김새를 누군가 알아볼 일은 없었다.
루시테는 책이 든 배낭을 챙겨 들고 집을 나왔다.
“다녀올게.”
“조심히 다녀오세요!”
리브가 활기찬 목소리로 그녀를 배웅했다.
루시테는 천천히 산길을 내려왔다.
흔들리는 나뭇잎 사이로 옅은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와 그녀의 머리칼을 흔들었다.
짧았던 머리카락은 이제 어깨를 좀 넘는 길이로 길어 있었다.
루시테는 머리카락을 감추지 않고 당당하게 풀었다.
챙이 둥근 모자 아래로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이 내려와 있었다.
조금 특이하게는 생각해도 그 누구도 그녀에게 저주받았다며 손가락질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상념에 잠겨 있다 보니 어느새 광장에 도착해 있었다.
광장은 여느 때처럼 사람들로 붐볐다. 날이 따뜻해지니 사람들이 더욱 바삐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늘진 곳에는 더위를 피해 쉬고 있는 사람들도 더러 보였다.
루시테는 바로 이반의 서점으로 가지 않고 조금 더 걸었다.
황성에서의 일이 있던 이후로 생긴 습관이었다.
그녀는 높이 고개를 들었다. 저 멀리 거대한 마법진이 번쩍였다.
이크릭스 제국의 상징이자 황성 아덴티움을 둘러싼 절대 마법 안티매직이었다.
‘레일리······.’
루시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그가 몹시 걱정되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루시테는 레일리가 그녀를 위해 희생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루시테도 바보가 아니었다.
만약 황제가 그녀를 도로 잡아들이려 했으면 진작 뒷조사를 끝내고 군사를 이끌고 잡으러 왔으리라는 것을 잘 알았다.
황제는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고 또한 그럴 능력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무서울 정도로 아무 일도.
그게 무슨 뜻이겠는가?
황제가 레일리를 움직이는 데 더 이상 그의 약점을 필요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레일리가 자발적으로 황제의 말을 따르고 있는 거야.’
그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그의 아비의 말을.
루시테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레일리가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녀가 지금 누리는 이 평온은 전부 레일리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루시테는 잊지 않았다.
“레일리.”
루시테는 그의 이름을 자그맣게 불러보았다.
마치 이렇게 부르면 그가 금방이라도 마법처럼 나타나 대답을 해줄 것만 같았다.
레일리.
언제나 그녀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주던 그가 너무 보고 싶었다.
루시테는 그에게 갚아야 할 빚이 있었다.
루시테는 슬픈 눈을 하곤 황성의 반대편으로 돌아섰다.
문득 지나가는 길에 눈에 띈 빨간 머리를 보고 루시테는 또 멈춰 섰다.
황성의 일이 있은 후로 생긴 또 하나의 습관이었다.
빨간 머리칼의 덩치 큰 남자면 혹여나 세드릭이 아닌가 싶어 멈춰 서는 것.
루시테는 그날 그렇게 도망친 이후로 세드릭이 계속 신경 쓰였다.
그녀 하나 살자고 도망쳤지만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세드릭, 그가 자신을 얼마나 배려해줬던가.
그 혼자만 감시로 그녀를 지키고 있던 것은, 다 그가 힘써준 덕분이라는 걸 루시테는 알고 있었다.
황궁 생활 한두 번 해보겠는가.
황궁이 그렇게 원하는 대로 굴러가는 녹록한 곳이 아니라는 걸 루시테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누군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면, 반드시 다른 누군가는 힘들어야만 하는 그런 곳이 황성인데.
‘세드릭.’
괜찮을까?
그가 황제에게 징계를 받지는 않았는지 걱정되었다.
만약 같은 시간으로 돌아가더라도 그녀는 또 도망을 쳤을 테지만 그래도 세드릭에게는 미안했다.
루시테는 답답했다.
몇 주 째 레일리는커녕 세드릭의 소식조차 듣지 못하고 있으니······.
일상은 흘러가고 있음에도 마치 그녀의 시간까지 멈춰버린 것만큼 세상이 고요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광장에는 사람이 이리도 많은데 말이다. 오직 그녀만이 시간이 멈춘 외딴 섬 같았다.
“하아······.”
루시테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서든 둘의 안부라도 알고 싶었다. 잘 지내는지, 몸은 건강한지, 밥은 잘 먹고 잠은 잘 자고 있는지.
그런 일상적인 것들을 아는 일이 이리도 어려운 일이었다면······.
루시테는 진작, 한 번쯤 세드릭에게 따스한 말 몇 마디라도 던져볼 것을 그랬다며 후회했다.
루시테는 고개를 들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걸음이 조금 전보다 빨라졌다.
빨리 걷고 있으면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느낌이 조금은 덜했으니까.
그녀가 바쁜 걸음으로 향한 곳은 이반의 서점이었다.
루시테는 익숙한 손길로 서점의 문을 잡아당겼다.
딸랑.
문이 열리고, 루시테는 아무 생각 없이 서점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그녀의 시선은 늘 그랬듯 서점의 한 가운데 신간 전시된 곳을 향했다가 그다음으로 서점의 안쪽 카운터로 향했다.
“!”
루시테는 걸음을 우뚝 멈췄다.
로브를 눌러쓴 장신의 남자가 이반 영감의 앞에 서 있었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싸늘했다.
그 남자가 루시테를 돌아보고 욕을 한 것도 아니고, 검을 들이민 것도 아닌데.
루시테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이상하게 남자의 분위기가 익숙한 탓이었다.
루시테는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카운터로 다가갔다.
‘아닐 거야. 그가 이곳에 있을 리가 없잖아.’
루시테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장신의 남자는 이반 영감과 조용조용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말소리가 작아 무슨 내용이 오가는지는 알 수 없었다.
루시테는 배낭 속에서 재빨리 번역한 책을 꺼냈다.
‘괜찮을 거야. 모자를 썼잖아.’
루시테는 모자를 더욱 푹 눌러 썼다.
그가 이곳에 있을 리가 없는데도 이상하게 긴장이 됐다.
“이반 할아버지!”
루시테는 재빨리 책들을 카운터 위로 올려놓았다.
“급한 책 가져왔어요. 대금이랑 다음 의뢰는 나중에 와서 받을게요. 준비해 주세요. 오늘은 바로 갈게요. 급한 일이 있어서요.”
루시테는 이반 영감이 그를 무어라 부르기도 전에 뒤로 홱 돌아 빠른 걸음으로 서점을 빠져나왔다.
그녀는 서점을 나오자마자 달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책을 가져다준 것으로 충분하다. 급한 책이라고 했으니까.
이반이 돈을 떼먹을 사람도 아니고, 어차피 그가 리브의 얼굴을 알고 있으므로 리브를 다시 보내면 될 일이었다.
루시테는 차오르는 숨을 참으며 다리를 놀렸다.
누군지 얼굴은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그저 그 녀석과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다는 것만으로도 루시테는 그 남자를 피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다시 가보면 아무 일도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저 평범한 손님이고, 서점의 손님으로서 평범하게 이반 영감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을 것이다.
다음번에 가면 이반 영감은 그가 누구였는지 기억도 못하겠지.
루시테는 이런저런 해피엔딩을 상상하며 산 중턱으로 향하는 오르막길을 뛰어올랐다.
거의 집에 다 도착했을 즈음 루시테는 무릎에 양손을 짚고 거친 숨을 내쉬었다.
곧 집이라는 생각이 그녀를 안심하게 했다.
“후우······.”
루시테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크게 호흡했다.
그래. 요즘 좀 예민해진 터라 괜한 걱정을 한 것뿐이다. 그 손님은 그냥 지나가는 사람일 뿐일 거야.
루시테는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그녀는 숨을 가다듬고 길을 마저 가기 위해 고개를 들려고 했다.
그때, 루시테의 머리 위로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루시테의 몸이 우뚝 멈췄다.
“루시 필드는 너무 흔한 이름 같은데.”
중저음의 미성이 루시테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몹시도 싸늘하고 차갑기 그지없던 그 목소리.
이곳에서 들릴 리가 없는 이의 목소리였다.
루시테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몸을 세우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앞에는 조금 전 서점에서 봤던 남자가 서 있었다. 로브를 푹 눌러 쓴 키가 큰 남자가.
남자는 루시테가 자신을 쳐다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두건을 젖혔다.
그의 얼굴의 반을 덮고 있던 로브가 벗겨지고, 눈부시게 아름답고 찬란한 금빛 머리칼이 드러났다.
청명하게 반짝이는 보석 같은 푸른 눈동자까지도.
루시테에게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무서울 정도로 낯선 그 얼굴이었다.
날카로운 턱선 위로 입술이 굳게 다물려 있었다.
“이, 이안.”
루시테는 말을 더듬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혀가 떨렸고, 입술이 떨렸고, 몸이 덜덜 떨렸다.
그냥 닮은 정도인 세드릭과는 비교도 안 됐다. 그는 이안 본인이었다.
“루시테.”
이안은 푸른 눈을 번뜩이며 마찬가지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안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언제나 그녀를 싸늘하게 바라봤던 그 눈빛 그대로.
북풍한설 속 차가운 얼음장처럼 그렇게 싸늘하게 루시테를 쏘아보았다.
이안은 오랜만이니, 잘 지냈니, 따위의 상투적인 인사는 하지도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위로 살짝 드러난 지붕을 쳐다봤다.
“저기가 네 집인 거냐? 그렇게 도망쳐서 자리 잡은 곳이 고작 이런 후진 구석이라니 웃기지도 않는군.”
“······.”루시테는 불안함에 몸을 떨며 양손을 맞잡았다.
다시 그 끔찍한 곳으로 돌아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아니. 아니야. 나는 폐위 당했잖아.’
폐황녀잖아.
저주받은 황녀를 왜 다시 데려가려고 왔겠어.
“여······ 여기는 왜 온 거야?”
루시테는 간신히 그에게 말을 꺼냈다.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이안은 대답하지 않고 루시테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잠시간의 침묵이 그들 사이에 흘렀다.
쏴아아아아.
나뭇잎이 옅은 바람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그들 사이의 침묵을 메웠다.
언뜻언뜻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이안에게 한 줄기 빛을 비추었다.
햇살을 받은 그의 금빛 머리칼이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이안은 갑자기 뒤로 홱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루시테의 집이 보이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루시테는 눈을 깜박이며 이안의 뒷모습을 쳐다보다 황급히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이안은 흰 울타리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 안에 펼쳐진 아름다운 초록빛의 작은 정원을 잠시 바라보았다.
울타리 문 안으로 돌길이 집 문 앞까지 이어져 있었고 그 양쪽으로는 잔디와 키가 작은 조경수가 심겨 있었다.
집의 돌벽 바로 앞에는 해바라기와 분홍빛 수국이 그들을 반기고 있었다.
이안은 동화처럼 아름다운 집을 그렇게 잠시 싸늘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쓰레기 같군.”
이안의 읊조림에 루시테는 또 심장이 철렁했다.
이안이 당장이라도 그녀를 붙들어 메이븐으로 데려가려고 할까 봐.
만약 그렇게 된다면······.
루시테는 눈을 꽉 감았다 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앞에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죽음뿐일 것이다. 지난 세 번의 생애처럼.
“무슨 일로 왔는지······ 말해줘. 이안.”
루시테는 다시금 용기를 내 이안에게 말했다.
이안이 별안간 화난 표정으로 루시테를 홱 쳐다봤다.
“그걸 지금 몰라서 묻는 거냐?”
이안이 짓씹어 뱉듯 말을 내뱉었다.
“너······.”
이안이 성큼, 루시테 앞으로 한 발자국 다가섰다. 커다란 그림자가 루시테의 몸 위로 덮였다.
“어! 아가씨! 오셨습니까?”
에단이 잔디에 물을 주기 위해 정원으로 나왔다가 루시테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루시테에게로 향하던 이안의 손이 뚝 멈췄다.
“아가씨! 그분은 누구십니까? 손님인 겁니까?”
이안은 뒤를 흘깃 보더니 루시테를 다시 내려다보곤 싸늘하게 웃었다.
“하. 아가씨?”
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지만, 바로 앞에서 말한 터라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루시테는 명확하게 들을 수 있었다.
루시테는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