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일단. 들어오든지. 이안.”
루시테는 작게 그에게 속삭이곤 이안을 지나쳐 앞으로 나아갔다.
“그래. 에단. 손님이야.”
“네, 아가씨!”
에단이 잽싸게 다가와 울타리 문을 열고는 앞으로 달려가 집의 문도 열었다.
루시테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메이븐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았던 이안은, 황태자답게 발소리 하나 내지 않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루시테의 발밑으로 드리워지는 그녀의 것이 아닌 그림자가 이안이 그녀의 뒤에서 따라오고 있음을 알려왔다.
긴장감에 루시테는 손바닥에 땀을 쥐었다.
세차게 뛰는 심장은 여전히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루시테의 뒤를 따라 이안이 그녀의 집 안으로 들어왔다.
온전히 그녀만의 공간인 루시테의 아늑하고 평온한 집 안으로.
“어머나! 아가씨 오셨어요!”
먼지떨이로 창문 청소를 하고 있던 리브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달려왔다.
“어!”
리브가 달려오다 이안을 보곤 우뚝 멈춰 섰다.
“우······ 우와······.”
리브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입을 크게 벌렸다.
“아가씨, 우리 집에 천사님이 오셨나 봐요.”
리브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루시테는 흘끗 뒤를 돌아봤다.
이안이 싸늘한 눈길로 리브를 쳐다보고 있었다.
루시테는 리브가 저런 반응을 하는 것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
왜냐하면 루시테도 한 때, 아주 오래전 이안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으니까.
머리부터 발끝까지 신이 직접 빚었다고 해도 믿을 수 있는 눈부신 외모.
그는 정말이지 얼굴만 봤을 때는 천사가 따로 없었다.
금가루를 뿌린 듯 찬란한 머리칼과 한여름의 바다를 연상케 하는 푸른 눈동자.
날카로운 턱선과 콧날, 그리고 굳세게 쭉 뻗은 금빛 눈썹까지.
그의 외모는 화려함과 세련됨의 결정체였다.
몸짓 하나하나, 걸음걸이 하나하나에도 예절이 깊이 배어 우아했으며 그가 하면 뭐든 세련되어 보였다.
이안의 시선 한 번에, 머리칼을 넘기는 손짓 한 번에 메이븐의 수많은 귀족 여식들이 울고 웃곤 했다.
‘그’ 이안이. 그녀의 이복동생이자 메이븐의 황태자인 이안이, 지금 루시테의 작은 집 안에 들어와 있었다.
그녀가 사는 작은 산 중턱 하우스에.
루시테는 어쩐지 이안과 이 집이 몹시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안 뺨치게 아름답고 우아한 레일리가 이 집 안에 있을 때는 어색한 줄을 몰랐는데.
이안에게 이 집은 맞지 않는 옷 같아 보였다.
“그간 꼬맹이들을 모아놓고 소꿉장난을 했던 거냐?”
이안이 싸늘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
루시테는 놀라 저도 모르게 이안의 손을 붙들었다.
“잘도,”
말을 이으려던 이안이 우뚝 말을 멈췄다.
그는 루시테에게 손을 붙들린 순간 얼어버린 것 같았다.
“이안. 차 마실래?”
루시테는 말을 돌렸다.
이안이 말을 재수 없게 하는 데 귀재라는 것은 하늘이 알고 루시테가 안다.
그의 싹퉁바가지 없음이 얼마나 대단하신지는 루시테가 아주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리브에게까지 상처를 주고 싶지는 않았다.
리브는 아직 어린아이였다. 그리고 이안을 천사 보듯 바라본다.
루시테는 적어도 그녀의 가족들만큼은 이안이 상처를 주도록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리브는 지금까지 힘든 삶을 보내온 것으로 충분했다.
그녀의 집에 있을 때만큼은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보호를 해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루시테는 리브가 어린아이다운 순수함을 빨리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랐다.
루시테가 그랬던 것과는 다르게.
“차라고 했나?”
얼어 있던 이안이 번뜩 정신을 차렸는지 루시테의 손에서 제 손을 확 빼내더니 명령했다.
“좋아. 안내해.”
명령이 무척 익숙한 듯 자연스러웠다. 루시테 역시 익숙한 이안의 말투인지라,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래. 이리 와.”
루시테는 이안을 꺼진 벽난로 앞 테이블로 이끌었다.
활짝 열린 커다란 창문에서는 선선한 바람이 새어들어 오고 환한 볕이 응접실 안을 비췄다.
창문 너머로는 저 멀리 아테라의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이 집에서 가장 조망이 좋고 멋진 장소였다.
이안은 의자에 바로 앉지 않고 창문 근처를 서성거렸다.
그는 잘 정돈되어 따뜻한 분위기를 풍기는 집 안을 둘러봤다.
‘짜증나는군.’
이안은 손가락으로 창틀을 툭툭 두드렸다.
창틀은 깨끗하게 잘 닦여 있어 이안이 끼고 있는 흰 장갑에는 먼지 하나 묻어나지 않았다.
이안은 습관적으로 제 장갑에 먼지가 묻었는지를 확인하고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후.’
이안은 짜증스러운 한숨을 삼켰다.
루시테가 막 황성을 떠나려는 순간 돈을 들고 허겁지겁 따라갔던 일이 아주 오래전 일이 된 것 같았다.
금방 포기하고 돌아올 줄 알았더니 이렇게 둥지를 틀고 지낼 줄이야.
이안은 주머니에 들어 있는 마법 나침반을 만지작거렸다.
이 나침반은 위치 추적 마법이 걸려 있는 물건과 한 쌍으로, 상대 물건의 위치를 탐지할 수 있었다.
나침반의 침이 해당 장소에 도착했다는 것을 알리듯 강하게 반짝였다.
이안은 루시테를 바라봤다.
“왜 그래? 안 앉고.”
루시테가 불안한 눈빛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앉을 거야.”
이안은 창틀에서 손을 떼고 루시테의 맞은편에 가서 앉았다.
그는 여전히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나침반을 만지작거렸다.
나침반의 침은 바로 루시테, 저 여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가 그 돈주머니를 아직도 지니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가 건네준 돈주머니를.
이안은 불안에 떠는 루시테를 빤히 쳐다봤다.
그날, 루시테가 황성을 떠난 마지막 날.
이안이 그녀에게 준 돈은 그가 급하게 들고 나온 돈이었다. 가진 현금이 그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하필 그가 돈을 담아준 그 돈주머니에 위치 추적 마법이 걸려 있었다.
이안은 제 물건에 종종 궁중 마법사에게 부탁해 추적 마법을 걸어두는 습관이 있었다.
일종의 결벽증으로. 누군가 그의 물건을 함부로 건드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기에 때문에 생긴 습관이었다.
덕분에 이안은 루시테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이 먼 아테라까지 오다니. 그 주머니가 아니었다면 이안은 루시테를 찾는 데 꽤 애를 먹었을 터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그 돈주머니를 돌려받겠다고 온 건 아니었고.
이안은 그녀에게, 루시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내가 준 돈은 다 썼어?”
이안은 손가락으로 무릎 위를 톡톡 두드렸다. 그가 초조할 때, 생각이 많아질 때 종종 하는 행동이었다.
그만큼 이안은 지금 꽤 초조했다.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게 아닌데. 자꾸 다른 말이 입 밖으로 먼저 튀어나왔다.
“네가 준 돈?”
루시테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네가 준 돈은 다 썼어. 필요한 곳에. 그러라고 준 돈 아니었어?”
“그러라고 준 돈 맞아.”
이안은 뭐가 그렇게 기분 나쁜지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안이 짜증이 잔뜩 나 있는 꼴을 한두 번 본 게 아니었다.
때문에 루시테는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가 작정하고 사나운 말을 할 때에 비하면 약과인 편이었다.
오히려 루시테는 이안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설마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 이안이 돈을 돌려받으러 온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조금 했었는데.
그런 이유는 아닌 모양이었다.
루시테는 찡그린 콧잔등을 폈다.
“왜 온 건데?”
“······.”
이안은 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입을 다물었다.
아까는 왜 온 건지 모르냐며 버럭 화를 내지를 않나, 무시하지를 않나.
이렇게 찾아왔으니 이유가 있을 텐데. 도통 말해주지를 않으니 대화가 되지를 않았다.
“아가씨. 차 내왔어요.”
리브가 찻잔을 조심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노이에게서 지켜낸 쿠키도 접시에 예쁘게 올려 가져왔다.
“고마워. 나머지는 내가 할게.”
“네 아가씨.”
리브가 헤헤 웃고는 종종걸음으로 부엌으로 돌아갔다.
리브는 아직 이런저런 예절들을 배우는 중이라 차를 잘 우려내지는 못했다.
루시테는 뜨거운 물이 들어 있는 찻주전자 안에 말린 꽃잎을 넣었다.
루시테는 찻물이 우러나기를 기다렸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이안의 찻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쪼르륵.
뜨거운 찻물이 둥근 찻잔 안으로 부드럽게 담겼다. 이안의 싸늘한 시선이 루시테를 따라갔다.
“역시 소꿉장난이었군.”
“뭐?”
“네 하녀랍시고 있는 어린애. 차 하나도 제대로 우릴 줄 몰라 네가 하는 거냐?”
이안은 루시테가 차를 따르고 있는 것조차도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지금 배우는 중이라서 그런 거야.”
“하. 배우지도 못한 걸 하녀로 써? 네가 메이븐을 떠나지 않았다면 훨씬 더 잘 훈련된 시녀들로부터 대접을 받았을 거다.”
“······.”
제 찻잔에도 차를 따르려 하던 루시테의 손이 우뚝 멈췄다.
루시테의 손목이 부들부들 떨렸다.
‘잘 훈련된 시녀들이라고?’
그녀의 식사에 돌과 모래를 섞고 차 안에 송충이를 집어넣는 그 시녀들?
머리를 잘라 주겠답시고 목 뒤를 후벼 파는 그 시녀들?
루시테는 순간 울컥했다.
이안과 얘기하다 보면 언제나 이랬다.
말문이 막히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탁.
루시테의 손에서 이안이 찻주전자를 채갔다.
“무거우면 내려놓지 왜 그러고 서 있는데?”
루시테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다시는 과거 때문에 흔들리지 않으려 했는데.
내성이 생긴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토록 화가 나서 가슴이 터질 지경이니 말이다.
루시테는 침착해지기 위해 입술을 더 세게,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루시테는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겨 제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루시테는 들끓는 감정을 가라앉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고 심호흡을 했다.
“왜, 온 건데?”
루시테의 목소리가 들끓는 감정으로 인해 갈라졌다. 감정이 들끓으면 눈앞이 흐려지려 했다.
그러면 이안과 눈을 마주치기가 어려워졌고, 이안은 언제나 화를 냈다.
사람 눈도 똑바로 못 쳐다보냐며.
루시테는 그 소리가 듣기 싫어 더욱 억지로 눈을 치켜떴다.
“너랑 나는 이제 가족도 아니야. 알잖아?”
루시테의 말에 이안의 표정이 한층 싸늘해졌다.
“가족도 아니라면서 반말하는 거냐? 내가 누군지 알잖아?”
이안이 루시테의 말투를 따라하며 똑같이 끝을 올렸다.
루시테는 또 입술을 깨물었다.
재수 없는 자식.
루시테는 이안과 얘기하다 보면 언제나 이성을 잃었다. 지금도, 이전 생애도. 이 전전 생애도. 언제나.
“제가 실언을 했네요. 황태자 전하.”
이안은 루시테가 그에게 존대하자마자 확 미간을 좁혔다.
“누가 진짜로 경어를 쓰래? 기분 나쁘니까 그만해.”
이안이 휙 손을 털었다. 그만하라는 뜻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 재수 없는 자식. 뭐 어쩌라는 건지.
루시테는 이안을 노려봤다.
도대체 뭐 때문에 이 먼 곳까지 찾아왔는지, 어떻게 찾아온 건지, 루시테는 당최 이해할 수가 없었다.
황태자나 되는 녀석이 허락은 받고 나온 건지. 설마 가출이라도 한 건지.
생각하면 할수록 화가 나고 머리가 띵해졌다.이안에 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안과 대화하다 보면 루시테는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울화가 치밀었다.
감정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활화산 같았다. 머리가 부글부글 끓어대어 도무지 이성을 챙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루시테는 이번 생에도 이안에게 실수를 한 가지 했다.
이전 생에도, 그 전 생에도, 절대 알리지 않으리라 다짐했으나 매번 실패하고 또 실수한 것이다.
끝도 없는 악연이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가족이 아니라는 말은 틀렸네.”
이안이 싸늘하게 덧붙였다.
“우리는 원래도 가족이 아니었잖아? 피가 한 방울도 안 섞였으니까.”
“!”
루시테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의 낯빛이 창백해지다 못해 파랗게 질렸다.
루시테가 이안에게 한 실수.
그 실수가 이안의 입에서 나왔다.
“맞잖아. 네가 말해줬잖아? 나는 황제의 친아들이 아니라며.”
이안이 실소를 머금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처음부터 가족이 아니었던 거지. 이복 남매는 무슨. 웃기고 있네, 다들. 웃기고들 있어.”
이안이 짜게 식은 얼굴로 비웃음을 흘렸다.
“황후가 밖에서 낳아온 자식을 황태자랍시고 떠받들고 있으니까 말이야.”
엄청난 황실의 비밀이 이안의 입에서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안. 그건 사실 전부 거짓말이었,”
“늦었어, 루시테.”
이안이 루시테의 말을 잘랐다.
“어머니가 젊을 때 저택에서 일했던 마부. 나이가 들었어도 한눈에 알겠더군. 나랑 똑같이 생겼어.”
루시테는 어깨를 덜덜 떨었다.
“네 말대로야. 그 신성하다는 메이븐 황실의 피는 내 대로 끊어질 거야. 나한테는 신성력이라고는 한 톨도 없으니까. 안 그래?”
이안이 완벽한 예법으로 찻잔을 들고 차를 마셨다.
그가 찻잔을 다시 내려놓을 때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다시는 보라색 눈이 태어나지 않겠지.”
그가 한 마디 덧붙였다.
루시테의 어깨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저 말만은 하지 말 것을.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어쩌면 그가 그 이야기를 한 루시테에게 복수를 하려고 찾아온 게 아닐까?
루시테는 너무도 두려웠다. 눈앞에 있는 그녀의 아름다운 이복동생이.
“그래서. 하고 싶은 마, 말이······ 뭔데?”
루시테는 바보처럼 말을 더듬었다. 목소리가 떨렸다.
“네가······ 황제 폐하의 친자식이 아니라고 해서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잖아. 넌 황태자고 황제가 될 거야.”
루시테가 봤던 과거에서는 그랬으니까.
이안은 현명하고 지혜로운 황제라 칭송을 받았다. 비록 그의 치세를 오래 보기도 전에 단명했지만.
아무도 이안을 대체 하지 못한다. 그는 다가올 미래에 메이븐의 성군이 될 남자였다.
“나를. 네 비밀을 알고 있는 나를 죽······.”
루시테는 눈앞이 흐려져 입술을 꽉 깨물고 심호흡을 했다.
“나를,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래서······ 여기까지 찾아온 거야? 모든 걸 잊고 떠나겠다는 나를 죽······이겠다고 굳이 여기까지 찾아온 거냐고.”
루시테의 호흡이 다시금 거칠어졌다.
역시 이번의 생애도 드리워진 죽음을 피하지 못하게 되는 걸까. 이안의 손에 또 죽임을 맞이하는 건가?
아무리. 아무리 발악하고 발버둥을 쳐도 결국 여기까지인 걸까?
‘네가, 너무 싫어.’
이안.
루시테의 눈이 눈물을 하도 참아 붉어졌다.
이안은 말을 쥐어짜는 루시테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싸늘한 눈동자는 조금 전보다는 약간 부드러워져 있었다.
“대답해봐! 나를 죽이겠다는 거냐고!”
“아니.”
이안은 시니컬하게 내뱉었다.
“네가 내 비밀을 알고 있다고 어떻게 할 생각은 없어.”
“······뭐?”
루시테는 코를 훌쩍였다. 눈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눈물이 툭 떨어졌다.
‘핫!’
루시테는 깜짝 놀라 재빨리 손바닥으로 눈물을 훔쳤다.
이안이 자신을 비밀 때문에 어떻게 할 생각이 없다니.
“그게 정말이야?”
루시테는 믿지 못하고 되물었다.
“그래.”
“정말이야?”
“그래.”
루시테는 눈을 깜박였다.
가빴던 호흡이 진정되고 차올랐던 눈물이 몇 방울 더 떨어졌다.
루시테는 손바닥으로 눈물을 휙 훔쳤다. 우는 모습 따위 다시는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안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건 자존심이 상했다.
너 같은 거 때문에 더 이상 상처받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방금 눈물 두 방울은 슬퍼서 운 게 아니다. 화가 나서 운 거지!
루시테는 눈에 힘을 준 채 이안을 쳐다봤다.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루시테의 질문에 이안이 눈동자만 슥 돌려 다른 곳을 보았다.
“아는 수가 있어.”
“그래.”
루시테는 이안의 대답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이안은 어차피 한다면 하는 인간이었다.
루시테는 이안이 제 목표를 놓치는 법을 본 적이 없었다.
이안이 찾기로 마음먹었다면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찾아냈을 터.
지금 중요한 건 이안이 그녀를 어떻게 찾았느냐가 아니었다. 이안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거지.
“그럼 여기는 왜 왔어?”
“······.”
루시테의 물음에 이안은 조금 전 그녀가 똑같은 질문을 했을 때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다물린 입술이 단호했다.
이안의 침묵을 끝으로 그들은 말이 없었다. 그들 사이에 한참 정적만이 감돌았다.
“저, 아가씨. 저녁 준비 다 했는데 어떻게 할까요?”
리브가 조심스레 루시테를 불렀다.
루시테와 이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눈치껏 피해 있던 리브는 조용히 부엌에서 요리를 했다.
부엌과 응접실은 거리도 좀 있어서 다른 일을 하느라 정신이 팔려있으면 이야기 소리도 잘 들리지 않았다.
리브는 주인의 대화를 엿듣지 않도록 조심하며 저녁 준비를 완료했다.
노이에게는 손님이 오면 늘 그랬던 것처럼 위에서 내려오지 말고 놀라고 간식과 동화책을 잔뜩 챙겨주었다.
리브는 뿌듯하게 어깨를 펴고 주인의 명령을 기다렸다.
“이안. 우리 저녁 먹을 거야.”
“우리?”
이안이 리브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좁혔다.
“그래, 우리. 나랑 리브랑 에단, 셋이 같이 먹을 거야.”
‘그러니까 돌아가.’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이안을 쳐다봤다.
이안은 결벽증이 있다. 모르는 사람과 겸상도 잘 안 했으며, 더군다나 부리는 사용인과 함께 먹는다?
이안에게는 상상도 못 할 일이겠지.
루시테는 이를 핑계로 이안을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이안이 그녀를 해칠 생각이 없다면, 루시테는 이안과 더 긴 대화를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물어봐도 대답 안 해주는 걸 굳이 말해줄 때까지 꼬치꼬치 캐물어서 대답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빨리 이안을 돌려보내는 게 그녀로서는 마음 편한 일이었다.
“하. 가지가지 하는군.”
이안이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루시테를 쏘아봤다.
어떻게 사용인 따위와 겸상을 하냐는 눈빛이었다.
루시테는 그 눈빛을 모른척하며 더 세게 대답했다.
“여기는 우리 집이야. 내 마음대로 할 거야. 그게 싫으면 돌아가. 나가서 자든지 먹든지 가든지 해.”
기분 나쁘지?
‘간다고 말해. 간다고 말해줘. 제발.’
루시테는 긴장한 채 이안의 눈치를 살폈다.
이 정도 했으면 돌아가겠다고 하겠지.
루시테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웬걸, 이안은 루시테를 마저 쏘아보더니 걸치고 있던 망토를 거칠게 벗었다.
이안은 망토를 벗더니 루시테에게 던지듯 확 떠넘겼다.
루시테는 얼떨결에 이안의 겉옷을 품에 안았다. 부드럽고 값비싼 재질로 된 가벼운 옷이었다.
“오랜만에 봤는데 가라고?”
이안이 인상을 썼다.
“나, 혼자 나왔고 갈 데도 없으니까 네가 책임져.”
“뭐?”
루시테는 황당함에 입을 벌렸다.“어디 그 저녁, 차려봐. 나도 같이 먹어야겠으니까.”
루시테는 눈을 크게 떴다. 어찌나 크게 떴는지, 더 커질 데가 없을 정도였다.
이안이, 그 이안이 사용인과 겸상을 하겠다고?
갑자기 메이븐을 떠나더니 돌아버린 게 틀림없었다.
루시테는 당황함에 이안에게 나가라는 말은 더 하지 못하고 주섬주섬 그의 겉옷을 챙겨 옷걸이에 걸었다.
그렇게 루시테와 리브, 에단, 그리고 불청객인 이안을 포함한 기묘한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다.
리브와 에단은 이안이 내뿜는 불편하다는 오오라에 좌불안석이었다.
리브는 이안에게 스튜를 떠주려 했다.
“루시테.”
이안이 경고하듯 루시테의 이름을 불렀다.
리브가 그의 식사를 건드리면 가만있지 않겠다는 의지가 느껴졌다.
‘하아.’
그럼 그렇지.
루시테는 한숨을 삼켰다. 그 이안이 어디 가겠는가. 재수 없는 자식.
“리브, 이리 줘. 내가 할게.”
“네, 아가씨.”
루시테는 리브에게 국자를 건네받아 직접 스튜를 떠 이안의 앞에 놔주었다. 이안은 그제야 스푼을 들었다.
그러나 스푼을 스튜 안에 담그지는 않았다. 그는 미간을 좁힌 채 루시테만 쳐다봤다.
루시테는 머리를 짚었다. 저놈 저럴 줄 알았지. 애초에 기대도 안 했다.
같이 저녁을 먹겠다는 말은 같이 앉아있겠다는 뜻이지, 먹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메이븐에 있을 때는 한 달에 한 번 황족이 모두 모여 황제와 함께 오찬을 먹어야 했다.
거기에는 루시테도 가야 했고, 황후 외에도 황비들도 모두 참여했다.
이안은 항상 음식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고, 황제가 쳐다볼 때는 먹는 척을 하며 바닥에 음식을 버렸다.
그 장면을 루시테가 한두 번 목격한 게 아니었다.
“스튜는 버리지 마. 차라리 그냥 놔둬. 내가 먹을 거니까.”
루시테는 이안이 음식을 버리는 걸 방지하기 위해 미리 말했다.
그가 먹는 척을 하며 바닥에 버리면 리브가 힘들어진다. 음식도 아까웠고.
“리브, 에단, 눈치 보지 말고 얼른 먹어. 괜찮으니까. 저 사람은 신경 쓰지 마.”
루시테는 리브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안 녀석은 먹든지 말든지 알 바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은 먹을 건 먹고 살아야지 않겠는가?
“네 아가씨!”
리브가 그제야 마음이 조금 편해졌는지 저녁을 먹기 시작했다.
“아가씨! 역시 아가씨가 만든 스튜가 최고예요. 어떻게 이런 맛이 나지? 먹을 때마다 신기해요!”
리브는 순진한 얼굴로 감탄했다.
다른 음식은 리브가 준비한 거였지만 스튜는 어제 루시테가 만들어뒀던 것이었다.
“저는 아무리 따라 하려고 해봐도 어려워요.”
“괜찮아. 네 것도 맛있어.”
루시테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리브를 위로했다.
“무슨 소리예요 아가씨. 제가 아가씨 솜씨 따라가라면 한참 멀었어요! 진짜 맛있다. 역시 아가씨가 만든 스튜에요!”
에단이 스튜를 열심히 떠먹으며 말했다.
“루시테. 이거 네가 만든 거라고? 직접?”
이안이 스푼으로 제 스튜 그릇을 가리켰다.
“그래, 내가 만들었어.”
먹든지 말든지. 루시테는 대충 대답하며 스푼을 들었다.
루시테는 입으로 막 스튜를 넣으려다 손을 뚝 멈췄다.
어찌나 놀랐는지 스푼에 올렸던 스튜가 그릇으로 다시 툭툭 떨어졌다.
이안이 먹고 있었다. 그녀가 만든 스튜를. 리브와 에단이 함께 앉아 있는 이 테이블에서!
루시테는 이안이 함께 저녁을 먹겠다고 할 때보다 더 놀랐다.
‘저놈이 정말로 돈 걸까?’
루시테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안이 스튜를 먹고 있었다. 생각보다 잘. 꽤 맛있게.
루시테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그녀도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 * *
“대체 왜 그래? 뭐 잘못 먹었어?”
“네 스튜를 먹었지.”
루시테의 황당하다는 물음에 이안이 비아냥거렸다.
“그, 그러긴 했지.”
루시테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진짜 여기에서 자려고?”
“그래.”
이안은 루시테가 안내해준 방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루시테의 집에 있는 방은 총 네 개. 1층에 한 개, 2층에 3개가 있었다.
1층에 있는 방은 에단이 썼고 2층에는 리브와 루시테가 쓰고 있었다.
그래서 하필 한 개가 남는 바람에 이안이 그 방에서 자겠다고 우기는 중이었다.
이안이 방 안에 있는 작은 침대에 앉았다. 그의 몸집에 비해 침대가 작아 보였다.
“진짜 여기서 잘 수 있겠어? 시내로 내려가면 더 좋은 방도 많을 텐데.”
“누가 청소했는지 어떻게 알아.”
이안은 미간을 확 좁혔다.
그놈의 결벽증. 여기까지는 대체 어떻게 온 건지.
루시테는 도통 이해가 안 갔다. 이안이 이상했다.
그는 커다란 궁 하나를 통째로 혼자 쓰던 사람인데, 이 작은 방이 가당키나 할는지.
“진짜 여기서 잘 거야?”
“그래.”
이안의 대답이 단호했다.
루시테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으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루시테는 문을 열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이안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내일은 돌아갈 거지? 메이븐에서 난리가 났을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보내려고 안달이야?”
되묻는 이안의 목소리가 싸늘했다. 그는 루시테의 물음이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보내려고 안달이냐니.
당연한 거 아닌가.
루시테의 표정이 덩달아 굳었다. 루시테는 이안을 마주 쏘아봤다.
“이안. 솔직히 우리가 이럴 만한 사이는 아니잖아.”
그가 루시테를 힘들게 했던 수많은 지난날.
애증도 아니다. 거의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가진 이안과 루시테 사이인데 보내니 마니 하다니.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그럼 어떤 사인데?”
이안은 정말 궁금하다는 듯.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되물어왔다.
‘하.’
루시테는 헛웃음을 삼켰다.
어이가 없었다.
“너랑 나는 남보다 더 못한 사이야.”
“남이면 남인 거지 남보다 뭣한 사이는 뭐야.”
이안이 어이없다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
“남은 서로 친해질 여지라도 있지. 너랑 나 사이에는 어떤 가능성도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야. 네가 날 싫어하고, 내가 널 증오하니까.”
“뭐?”
가만히 듣고 있던 이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가 날 증오해?”
루시테를 바라보는 이안의 푸른 눈이 뜨거웠다.
그 안에서 일은 불길로 루시테까지 태워버릴 것처럼 그 시선이 뜨거웠다.
“그, 그래.”
루시테는 언제나처럼 저도 모르게 이안이 두려워져 말을 더듬었다.
소년이었던 이안은 어느새 커다란 남자가 되어 있었고, 그녀는 여전히 작은 소녀였으니까.
루시테는 언제나 이안의 위협적인 시선 아래서 움츠러들곤 했다.
“네가 왜 날 증오해?”
어느새 루시테의 앞으로 성큼 다가온 이안이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걸, 그걸 몰라서 물어?!”
“모르니까 묻지? 대답해봐.”
이안의 목소리가 위압적이었다.
“네가 왜 날 증오하는지.”
“난······ 난 너랑 이런 얘기 하기도 싫고. 할 말 없어.”
루시테는 잡고 있던 문고리를 확 잡아당기고 그 사이로 빠져나왔다.
쿵.
루시테의 뒤로 문이 닫혔다. 루시테는 복도를 달려 그녀의 방으로 들어왔다.
“루시이.”
노이가 루시테를 보더니 침대에서 쿵 뛰어내려 달려왔다.
“루시이.”
노이가 루시테의 다리를 붙잡고 얼굴을 부볐다.
차가운 체온이 느껴져 루시테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노이. 잘 놀고 있었어?”
루시테는 무릎을 굽히고 노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가 왜 이러지.’
루시테는 노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루시?”
노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아······.”
루시테는 노이를 끌어안고 고개를 숙여 노이의 머리에 제 머리를 기댔다.
노이는 기분이 좋은 듯 오랜만에 경쾌하게 울었다.
“삐로로로록!”
그리고는 루시테가 제 차가운 체온을 느끼도록 가만히 안겨 있었다.
둘은 가만히 서로의 온기를 공유했다.
“노이. 뭐 하고 있었어?”
“나, 나!”
노이가 루시테의 품에 제 몸을 푹 기댄 채로 종알거렸다.
“잠깐만! 루시이!”
노이가 루시테의 품에서 빠져나가 작은 책상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에단이 노이를 위해 만들어준 어린이용 책상이었다.
노이는 루시테가 선물해준 메모장을 가지고 와서 자랑하듯 루시테에게 보여주었다.
“베이컨 치즈 샌드위치, 딸기 케이크, 커다란 초콜릿 쿠키, 훈제 닭고기······.”
루시테는 메모장 안에 삐뚤빼뚤하게 쓰인 글씨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이게 뭐야?”
“헤헷!”
노이가 자랑스럽게 이를 씩 드러내고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루시테의 품에 폭 기댔다.
“이건 말야. 음식 목록이야.”
“음식 이름을 그냥 써 본 거야?”
“아니이. 리브한테 줄 거야. 리브한테 해달라고 할 거야! 다 먹고 싶어!”
“그랬구나.”
루시테의 입가에 살풋 웃음이 맺혔다. 루시테는 노이를 끌어안고 노이의 머리에 제 얼굴을 기댔다.
“노이가 이 음식들이 먹고 싶었구나······.”
“응! 루시이.”
노이가 또 헤헷 하며 자랑스럽게 웃었다.
루시테는 노이가 종알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꽉 감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안과 대화하는 동안 일었던 마음의 불길이 가라앉지를 않았다.
과거. 그놈의 과거.
언제까지 과거에 쫓겨 다녀야 하는 걸까. 메이븐을 떨치고 나오면 모든 게 끝날 줄 알았건만.
과거는 여전히 가까이에 있었고, 달라진 줄 알았던 그녀 자신조차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루시테는 이안을 만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안 앞에 서면 예전의 그녀의 모습이 그대로 튀어나왔다.
짓밟히는 데 익숙하며, 움츠러들고, 숨으려 하는 루시테.
지긋지긋할 정도로 소심하고 당할 줄밖에 모르는 루시테.
저주 받은 루시테. 끔찍한 루시테. 바보 같은 루시테.
뜨거운 감정이 차오르고 루시테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루시이. 왜 그래? 아파? 루시이.”
노이가 루시테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듯했다.
노이는 오늘 뭐 했는지 이야기하기를 뚝 멈추고 루시테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다.
그러나 루시테는 노이를 더 꽉 껴안았다. 감정이 폭풍처럼 들끓어댔다.
“루시이.”
루시테를 부르는 노이의 목소리에 걱정스러움이 물들었다.
“노이. 있잖아.”
루시테의 뜨거운 눈물이 노이의 뺨을 타고 흘렀다.
“노이, 나는. 내가 너무 싫어.”
사실은.
이안을 증오하는 게 아니라 당하기만 하는 자신. 저주받아서 태어난 자신.
그녀 스스로를 증오하고 있었다는 것을 루시테는 이제야 알았다.
계속해서 반복되는 삶에 지쳐 애써 무시하고 있던 진실이었다.
죽고 나서 끝이라면 아마 루시테는 진작 몸을 던지거나 목을 매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죽으면 끝이 아니니. 어차피 죽어봤자 다시 살아야 하니.
루시테는 그녀 스스로를 증오한다는 사실을 마음 한구석에 꽁꽁 숨겨둔 채 아슬아슬, 하루하루 줄다리기하듯 살아왔던 것이다.
그 잠겨 있던 작은 상자가 산 중턱 하우스에서 이안과 재회하고서야 열렸다.
“루시이······. 나는 루시 좋아.”
노이가 루시테의 품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그 작은 중얼거림은 루시테의 안에서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작은 물결은 점점 커져 루시테의 마음속에 퍼져 나갔다.
노이는 낭랑한 목소리로 또박또박 발음했다.
“리브도. 에단도 루시 좋아.”
루시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노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마음 속 저 깊은 곳에서 응어리진 무언가가 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가 천천히 밀려 내려갔다.
“나는 루시 없으면 안 돼. 울지 마 루시이. 루시 싫어하지 마.”
아테라의, 아니 이 세상의 마지막 드래곤이 저를 구해준 은인을 위로했다.
노이의 깊은 은빛 눈동자가 아름답게 반짝였다.
루시테는 품 안의 통통한 아기 용이 중얼거리는 소리에 가만히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노이는 루시테에게 끊임없이 ‘네가 필요하다’고, ‘네가 좋다’고 속삭였다.
들끓던 마음속에 천천히 평온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마치 폭풍이 치던 바다가 잔잔해지고 그 어둠 속을 한 줄기 햇빛이 환히 비추는 것 같았다.
“하아······.”
루시테는 깊은숨을 토해냈다.
어쩐지 마음이 몹시도 후련했다.
모든 사람이 손가락질하는 자신을 스스로조차 증오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루시테는 자신에게 큰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
그러나 인정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런 그녀이지만, 곁에는 사랑을 나누는 가족이 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믿어주고 사랑한다 말 할 수 있는 가족이.
그래서 루시테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상처는 극복하는 게 아니다. 굳이 이겨내려 아등바등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인정해버리고 그다음 단계로 나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그냥 그렇게, 서로 사랑하며 보듬으며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다.
어느새 루시테의 눈에 눈물이 그치고. 그녀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세 번의 생에 걸쳐 형성된 깊고도 진득한 트라우마가 조금씩 걷히고 있었다.
루시테는 문득 레일리를 떠올렸다.
그녀와 비슷한 아픔을 겪었으며 지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매여 있는 레일리.
레일리의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연했다.
그날. 그녀가 레일리와 한 침대에서 껴안고 있었던 날.
품에 안겨 있었던 건 루시테였지만 어쩌면 레일리는 누군가에게 안기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레일리가 지금의 루시테처럼 누군가의 온기로 위안을 받고 싶어 했다는 것을 루시테는 이제는 알 수 있었다.
‘레일리.’
외롭고 고독한 황성에서 그의 곁에 누군가 있을까? 그의 온기가 되어 줄 사람이.
루시테는 진심으로 레일리가 안타까웠고 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스스로에게 여유가 생기니 가질 수 있는 마음이었다.
“루시이.”
루시테의 품속에서 노이가 바르작거렸다.
“노이. 고마워.”
루시테는 노이의 반들반들한 머리에 입을 쪽 맞췄다.
“뇽!”
노이가 깜짝 놀라 울었다.
푸흐흐. 루시테는 노이의 머리에 입술을 몇 번 더 가져다 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그녀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었다.
* * *
루시테는 이른 아침부터 활기차게 움직였다.
리브가 일어나기 전부터 잠에서 깨어 씻고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그녀가 아침 식사를 준비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양상추를 씻고 레몬을 썰었다.
사각 사각.
드레싱과 샐러드가 섞이는 기분 좋은 소리가 났다.
빵을 뚝 뚝 썰어 프라이팬 위에 올려놓고 잼을 꺼냈다. 빵이 구워지며 고소한 냄새가 진동했다.
루시테는 빵을 그릇 위에 한 조각씩 올려놓고 프라이팬 위에 계란을 깨뜨렸다.
능숙한 솜씨로 빵 위에 잼을 바르고 샐러드를 하고 남은 양상추를 올렸다.
얇게 저민 햄, 그리고 마지막으로 막 구운 따뜻한 달걀 프라이.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샌드위치가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흠흠. 흠.”
루시테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샌드위치 위를 덮기 위한 빵을 굽고 샌드위치를 완성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흠, 흠······.”
콧노래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부엌의 입구에서 이안이 팔짱을 낀 채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씻고 나온 건지 머리칼이 살짝 물에 젖어 있었고 흰 얼굴이 말끔했다.
헐렁한 옷을 입고 있었지만 하나도 흐트러져 보이지는 않았다.
이안이 긴 다리를 옮겨 그녀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는 루시테가 벌려놓은 것들을 둘러보았다.
“하녀는 어디다 두고 네가 아침을 하는 거냐?”
뭐가 기분이 나쁜 건지 이안의 목소리가 아침부터 불퉁했다.
“네가 리브가 한 건 못 먹겠다며 수저만 들고 있잖아. 그러니까 내가 하고 있지.”
루시테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한 가지 루시테가 어제와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안만 보면 움츠러들어 덜덜 떨리던 어깨가 멀쩡하다는 것이었다.
루시테는 이안의 앞에서도 이제 어느 정도 평온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인정해버리고 나니, 이안을 두려워하던 감정이 사그라든 것 같았다.
두려워하는 것은, 이안이 정말로 그녀의 목숨을 위협하면 그때 가서 두려워하면 될 터였다.
“그래도 하녀도 있으면서 네가 뭐 하러,”
“이안. 너 내가 안 해줘도 밥 먹을 거야?”
루시테는 이안의 불퉁한 말을 잘랐다.
덩치는 그가 훨씬 큰데 작은 소녀일 뿐인 루시테가 훨씬 더 어른 같았다.
“나는 바빠. 폐 끼치기 싫으면 네가 나가서 먹든지 해. 아니면 메이븐으로 돌아가도 좋고.”
“······싫어.”
이안은 뒤를 홱 돌아 제 방으로 올라가 버렸다. 루시테가 강하게 나가자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졌으므로.
그에게 최악의 상황은 루시테가 이안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고 나가라고 하는 것이었으니.
루시테가 나가라는 말까지 할까 봐 자리를 피한 것이다.
“세상에, 아가씨! 이거 다 아가씨가 하신 거예요? 왜 그러셨어요! 제가 해야 하는데······!”
아침을 하러 부엌에 온 리브는 경악했다.
그녀의 주인 아가씨가 일찍 일어나는 편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왜 아침까지 하신 건지······!
리브는 부엌을 배회하며 안절부절못했다.
“괜찮아, 리브. 저 녀석이 있는 동안은 내가 도와줄게. 낯선 사람이 손댄 음식을 잘 못 먹거든.”
“그렇구나······.”
리브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루시테의 앞에서 우물쭈물했다.
“왜 그래?”
“저 분은 언제까지 계시는 거예요? 아가씨의 손님이 집에 머무르는 건 처음 본 것 같아서요.”
“그랬구나.”
루시테는 리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브는 기분이 좋은 듯 눈을 접으며 미소를 지었다.
어린아이지만 리브는 눈치가 빠르다.
평소라면 루시테가 하는 일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리브지만, 굳이 이안이 언제까지 머무르냐 물어본 데는 다 이유가 있을 터였다.
그와 루시테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 그것 때문에 루시테가 힘들어하는데도 이안이 계속 머무른다는 것.
그게 리브는 신경 쓰였을 터다.
‘착한 아이.’
“리브.”
“네. 아가씨.”
“소개가 늦었구나. 저 사람은 내 동생이야.”
“네에······ 네?!”
뒤늦게 루시테의 말의 의미를 인지한 리브가 눈을 크게 떴다. 리브는 경악한 얼굴로 큰 눈을 깜박였다.
리브의 얼굴에 수많은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도 안 닮았는데 동생이라니!’
‘그보다 아가씨에게 가족이?’
‘가족 얘기는 처음 들어.’
‘아가씨는 대체 어떤 분이신 거야?’
하는 생각들이 리브의 머릿속을 메우고 있는 것이 루시테의 눈에 보이는 듯했다.
“쟤 말고 두 명 더 있긴 한데, 아마 볼 일은 없을 거야.”
루시테는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메이븐과 관련된 이야기를 해도 덤덤할 수 있기에 꺼낼 수 있는 이야기였다.
“두, 두 명이나 더 있으시다고요?”
리브의 입이 딱 벌어졌다.
리브는 이제야 제 주인이 스물세 살의 성인 여자라는 게 실감이 났다.
물론 아가씨는 무척이나 어른스럽고, 멋지고, 아는 것도 많았지만 외모가 어려 보였기에 리브는 실감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멀대같은 키에 천사 같은 외모의 손님이 아가씨와 가족인데다, 아가씨가 그 사람의 누나라니.
리브는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리브.”
“네······ 네! 아가씨!”
“쟤가 언제 갈지는 모르겠는데, 그래도 있는 동안에는 잘해 줘. 성질이 아주 더러운 녀석이거든.”
리브가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부가 있겠는가. 성질 더러운 거야 봐서 알고, 아가씨의 동생이라는데. 극진히 대접해도 모자랐다.
“고마워.”
루시테는 또 리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린아이가 기특했다.
누군가 보면 소녀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으니, 꽤 웃기는 장면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리브는 루시테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좋아했다.
왜냐면 그녀의 아가씨는 그녀가 존경해 마지않는 멋진 어른이었으니까.
* * *
“이안. 할 말 있어?”
루시테는 번역을 하다 말고 몹시 신경이 쓰여 고개를 들었다.
이안이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루시테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 시선이 꽤 부담스러웠다.
거의 얼굴이 뚫리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까지 들 정도였다.
“그런 일을 해서 돈을 버는 거냐?”
“그래.”
루시테는 다시 손을 움직였다.
“카트라나는 언제 배웠지? 너는 교육을 따로 받은 적이,”
“네가 알 거 없잖아.”
루시테는 이안의 궁금증을 풀어줄 생각이 별로 없었다.
그녀는 막힘없이 카트라나를 대륙 공용어로 풀어나갔다.
“이런 걸 쓰면 한 권당 얼마나 받는 거냐?”
“1골드.”
“허.”
이안이 어이없다는 듯 비웃음을 내뱉었다.
“고작 1골드를 받으려고 책 한 권을 옮긴다고?”
루시테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안이 잘 몰라서 하는 소리지만, 1골드면 하층민들의 한 달 생활비에 가까운 돈이었다.
그렇게 치면 루시테는 꽤 많은 돈을 벌고 있는 셈이다.
열심히 일하면 한 달에 10권에서 열다섯 권 정도는 해치우니 1골드에서 15골드, 어느 때는 20골드까지도 벌었다.
물론 이안에게는 그래봤자 푼돈이겠지만.
“루시테.”
이안은 그녀를 불러 놓고 한참 말이 없었다.
루시테는 쓰던 문장에 마침표를 찍고 펜을 잠시 내려놓았다.
그리고 그를 쳐다봤다.
“왜 불러놓고 말이 없어?”
“······너 말이야.”
이상하게 이안이 뜸을 들였다. 루시테는 인내심 있게 이안의 말을 기다렸다.
“후회하지 않아?”
“뭘 말이야?”
“그러니까······.”
이안이 말하기를 망설이며 제 머리칼을 벅벅 긁었다.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메이븐을 떠난 걸 후회,”
“꺅, 아가씨!”
이안이 어렵게 꺼낸 얘기는 리브의 비명에 가로막혔다.
루시테는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달려갔다.
“왜 그래, 리브?”
“파이프가 터졌나 봐요! 물이 펑펑 새요! 어떡하죠?”
정말이었다. 부엌의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에단은?”
“목재를 살 게 있다고 광장에 내려갔어요! 이반의 서점에서 아가씨 책도 찾아온다고 했고요.”
‘으음······.’
루시테는 코를 찡그렸다.
잘은 모르지만 일단 광장에 내려가서 수리공을 찾아보든지 새 파이프를 사오든지 해야 할 것 같았다.
“리브. 나 내려갔다 올게. 집이 오래돼서 그런 것 같아. 일단 물만 좀 닦고 있을래?”
“네 아가씨!”
루시테는 옷을 챙겨 나갈 준비를 했다.
루시테가 문을 열고 집을 나서는데 이안이 아무 말 없이 검을 챙겨 들고 따라나섰다.
“왜 따라와?”
“같이 가.”
루시테는 가려던 것을 멈췄다.
“같이 가는 건 알았어. 알았는데 가서 어제 네가 입고 온 겉옷 걸치고 와.”
“왜?”
“몰라서 물어?”
루시테는 이안의 등을 꾹꾹 밀어 다시 집 안으로 집어넣었다.
저 강림한 천사같이 생긴 녀석이랑 다니면 사람들이 다 쳐다볼 것 아닌가.
사람이 넘쳐나는 아테라의 한복판에서 그런 관심을 받는 건 사양이었다.
잠시 후 이안이 로브를 걸치고 나왔다.
긴 망토와 두건에 가려졌음에도 이상하게 눈에 띄는 것 같았다.
“모자 더 눌러 써.”
“싫어. 답답해.”
‘아 정말!’
루시테는 이안의 팔을 잡고 확 끌어당겼다. 그의 허리가 굽혀져 루시테 쪽으로 몸이 기울어졌다.
누가 제 몸에 손대는 것도 싫어하는 이안이, 평소 같았으면 난리를 쳤을 일을 웬일로 가만히 있었다.
이안의 푸른 눈동자가 코앞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시테는 대충 걸쳐져 있는 이안의 모자를 양손으로 잡고 제대로 푹 눌러 씌웠다.
루시테는 이안에게 모자를 씌우자마자 그에게서 떨어졌다.
이안이 느릿하게 굽혔던 허리를 세웠다.
둘은 천천히 산길을 내려왔다.
문득 가만히 있던 이안이 툭 말했다.
“이상해.”
“뭐가?”
“너 뿐이야.”
루시테는 이안의 해괴한 말에 코를 찡그렸다.
“무슨 소리야.”
“닿아도 괜찮은 건 너뿐이라고.”
이안의 눈빛은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으나.
루시테는 별 쓸모없는 소리를 다 듣겠다는 얼굴로 이안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거 네 기분 탓이야. 언젠가 고쳐질 거고, 너는 좋은 황후를 만나서 잘 살 거야.”
“······.”
이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가 향하는 시선이 루시테에게로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을 뿐이었다.
조용히 생각하며 걷던 둘은 어느새 광장에 도착해 있었다.
“너도 와봐서 알겠지만. 길 잃기 싫으면 나 잘 따라다녀.”
이제 제법 아테라의 주민 티가 나는 루시테가 이안을 향해 경고했다.
“너나 주의해.”
그럼 그렇지. 이안이 불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루시테는 바쁘게 걸으며 이곳저곳 상점을 들렀다.
파이프를 고치는 기술공은 있었지만 위치가 산 중턱이라고 하니 다들 퇴짜를 놓았다.
결국 루시테는 새 파이프만 잔뜩 사서 철물점을 나왔다.
이안은 낡은 가게를 보고는 질색하며 문 앞에서 기다리기만 했기에 별로 도움도 안 됐다.
이안은 주인 마실 나가는 데 따라붙은 똥강아지처럼 루시테를 쫄래쫄래 따라다니기만 했다.
루시테는 어차피 이안이 그럴 줄 알았으므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루시테가 광장에서의 볼일을 모두 마치고 이안과 함께 다시 산 중턱의 초입에 들어섰을 때였다.
“후. 짜증나네.”
이안이 갑자기 제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그러는 바람에 그의 모자도 같이 벗겨졌다. 다행히 주변에 사람은 별로 없었기에 시선이 쏠리지는 않았다.
“왜 그래?”
루시테는 이안의 싸늘한 분위기에 바짝 긴장했다.
이안이 저 말을 입 밖으로 내뱉는다는 건 이미 아까부터 화가 나 있었다는 뜻이었다.
“너 내가 주의하라고 했지.”
“그게 무슨 소리야?”
루시테는 이안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으니 답답하기만 했다.
이안은 설명은 안 해주고 검의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철그럭.
검집이 혁대에 부딪히는 소리에 루시테는 눈을 크게 떴다.
“왜, 왜 그래?”
이안은 루시테가 아닌 다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와. 쥐새끼.”
“!”
누가 있단 말인가?
루시테는 눈을 크게 뜨고 이안이 바라보는 쪽을 따라 쳐다봤다.
근처에 있는 커다란 나무 기둥 뒤에서 풀숲이 흔들렸다.
그리고 천천히 커다란 덩치의 남자가 나무 뒤에서 나왔다.
한 번 보면 절대 잊기 어려운 커다란 덩치와 꽤 잘생긴 얼굴.
타오르는 불덩이처럼 붉은 머리칼과 보석같은 푸른 눈동자를 가진 남자.
세드릭이었다.
“세드릭?!”
루시테가 놀라 외쳤다.
그가 대체 왜 나무 뒤에서 나온단 말인가?
루시테는 고개를 돌려 이안을 쳐다봤다. 이안이 주의하라고 말 한 게 언제였더라.
아까 전 막 광장에 나왔을 때 아니었던가.
설마 그때부터 세드릭이 따라다녔다는 건가?
‘아니겠지.’
루시테는 어안이 벙벙해져 눈을 깜박였다.
“아는 놈이냐?”
이안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세드릭을 노려보며 미간을 좁혔다.
“저놈은 누구지? 루시.”
세드릭 역시 인상을 험상궂게 굳히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숲의 공기가 무겁게 내려앉았다.
이안이 검집에 한 손을 올려놓은 채로 몸을 살짝 숙였다. 금방이라도 검을 뽑을 것 같은 자세였다.
이안의 움직임에 세드릭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등 뒤에 매인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로 손을 가져갔다.
“이안! 세드릭! 잠깐, 잠깐! 잠깐만요!”
기겁한 루시테는 비명처럼 외치며 이안과 세드릭의 사이로 냅다 끼어들어 섰다.
세드릭은 루시테가 그의 앞을 가로막자 흠칫 놀라며 검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정말로 검을 뽑을 기세였던 그는 재빨리 자세를 풀었다.
루시테는 가운데 서서 침을 꼴깍 삼켰다.
이 둘이 싸우기라도 한다면 완전히 난장판이었다.
세드릭은 이크릭스 제국의 최고의 검사이자 소드 마스터로 익히 알려져 있다.
하지만 소드 마스터인 건 이안도 마찬가지였다.
이안은 음험한 데가 있어서 자신의 검술의 경지를 세간에 알리지 않았다.
명예를 얻는 것보다는 뒤통수를 노릴 수 있는 한 방을 숨기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게 이안이었으니까.
이안이 얼마나 대단한 검술을 지니고 있는지는 무엇보다 루시테가 잘 알고 있었다.
이안과의 악연은, 이안이 몰래 검술을 훈련하는 것을 그녀가 우연히 목격한 데서 시작되었었으니까.
“세, 세드릭.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루시테는 이안의 앞을 가로막고 세드릭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그녀는 일단 둘 중 한 명이라도 자극하지 않기로 했다.
당장 세드릭에게 왜 따라왔느냐 캐묻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왜 몰래 따라왔어요?’
‘언제부터 따라왔던 거예요? 정말 처음부터예요?’
등의 말이 루시테의 입속에서 맴돌았다.
“루시.”
세드릭이 느릿하게 대꾸했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루시테의 뒤편에 있는 이안에게 향해 있었다.
“루시. 저놈은,”
세드릭이 다시 말을 꺼냈을 때.
“너는 뭔데 감히 처음 보는 사람에게 이놈 저놈 하는 거냐?”
이안이 세드릭의 말을 잘랐다. 둘 사이에 푸른 불꽃이 튀었다.
‘이안, 제발 가만히 있어!’
루시테는 고개를 홱 돌려 눈으로 이안에게 욕을 했다. 그리고 황급히 세드릭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세드릭. 쟤는 신경 쓰지 말고 우리 다른 데 가서 얘기해요.”
“뭐?”
이안이 벌컥 화를 내며 루시테의 뒤로 다가와 루시테의 어깨를 잡았다.
“누구 마음대로 따로 가?”
이안이 이를 악물었다. 목소리가 위협적이었다.
이안은 여차 하면 검을 뽑을 기세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루시테의 시선이 세드릭의 등 뒤로 향했다. 검은 세드릭에게도 있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가 오늘따라 더욱 위협적으로 보였다.
‘이대로는 안 돼.’
루시테는 이안과 세드릭의 사이에서 진땀을 뺐다.
“알았으니까 제발 진정 좀 해. 이안.”
루시테는 제 어깨에서 이안의 손을 떼어 냈다.
“세드릭도요. 좀. 툭하면 검 좀 뽑으려고 하지 말아요. 저 무서워요.”
살기등등한 눈을 하고 있던 세드릭이 무섭다는 소리에 흠칫 몸을 굳혔다.
그는 금방이라도 검집으로 가져가려 했던 손에 힘을 풀고 툭 늘어뜨렸다.
화를 낼 줄 알았던 세드릭은 이안을 경계할 뿐, 생각보다 순순히 루시테의 말에 따랐다.
세드릭 디에고, 그 불같은 성미의 미친개는 어쩐 일인지 루시테의 앞에서만은 순한 양처럼 굴었다.
그래봤자 양의 탈을 쓴 늑대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루시테는 그것만으로도 세드릭에게 고마웠다.
‘후.’
루시테는 한숨을 삼켰다. 일단 둘 다 진정이 되긴 한 것 같았다.
“둘 다 따라와요. 어디 들어가서 얘기 좀 하죠.”
루시테는 앞장서서 걸었고. 두 사람이 루시테의 양 옆에서 호위를 하듯 걸었다.
키가 큰 남자들 사이에 낀 루시테의 꼴이 우스웠다. 꼭 고목나무 사이에 자란 앉은뱅이 풀 같았다.
루시테는 가까운 찻집이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이쪽은 비교적 한적한 길인데도 지나가는 사람들이 루시테와 그녀의 양 옆에 서 있는 남자들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루시테는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신경 쓰여 옆을 돌아봤다.
“이안!”
“왜.”
이안이 두건을 안 쓰고 있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쳐다볼 수밖에.
세드릭만 해도 시선을 끄는데, 이안은 훨씬 더 신경을 잡아끄니 사람들이 쳐다보는 것도 당연했다.
“모자 써, 모자!”
이안은 그제야 귀찮다는 듯 마지못해 모자를 눌러 썼다.
세드릭은 루시테가 이안과 나누는 모든 대화가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그는 또 부리부리한 눈을 하고 이안을 노려보았다.
“빨리 와요! 거의 다 왔으니까!”
루시테는 세드릭이 화를 낼까 봐 걸음을 재촉했다.
카페에 도착하여 그들은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한적한 카페라 그런지 사람이 많지 않았다.
지나가다 봐둔 곳인데 이런 데를 기억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아······.’
루시테는 이안과 세드릭의 사이에 앉아서 깊은 한숨을 삼켰다.
얘기는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싸늘한 분위기에 앞에 놓인 차마저도 식을 것만 같았다.
루시테는 차는 내버려 두고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키며 타는 속을 달랬다.
“일단. 제가 설명할게요.”
루시테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일단 사이에 낀 사람으로서 둘을 서로에게 소개 시켜줘야 하긴 했으니.
“세드릭, 이쪽은 이안······.”
루시테는 말을 하다 말고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안을 성 없이 소개할 수는 없었다. 저를 평민처럼 소개하는 걸 이안이 참을 리가 없으니.
하지만 이안이 이안 헤레이스 델렌스카이 클라우디오라고는 곧 죽어도 말할 수 없었다.
어떻게 남의 나라, 그것도 메이븐과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나라의 수도 한복판에서 메이븐의 황태자 이름을 당당하게 말한단 말인가.
“이안?”
세드릭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필드! 필드에요. 이안 필드.”
“하.”
루시테의 맞은편에서 이안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시테는 고개를 홱 돌려 도끼눈을 하고 이안을 쳐다봤다.
‘가만히 있어 제발 좀!’
루시테는 진심을 담아 이안을 노려봤다.
다행히 진심이 통했는지 이안은 비웃음을 흘릴 뿐 별다른 시비는 걸지 않았다.
“필드? 이안 필드?”
“네, 세드릭.”
세드릭이 이안과 루시테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었다.
루시테도 세드릭이 왜 그런 얼굴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하는 바였다.
그래서 세드릭이 무슨 생각을 하든 그냥 내버려 두었다.
보나 마나 안 닮았다는 생각 정도를 하는 거겠지.
루시테는 세드릭을 내버려 두고 이번에는 이안에게 세드릭을 소개했다.
“이안, 이쪽은 세드릭 디에고 경이야.”
디에고라는 성에 이안의 미간이 확 좁혀졌다. 루시테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안도 아는 게 분명했다.
세드릭이 누구인지를.
하긴 황태자씩이나 되는 이안이 모를 리가 없었다.
세드릭 디에고는 메이븐의 적대국인 이크릭스의 가장 강한 검사이니.
아마 이안이라면 세드릭이 이크릭스에 소문이 자자한 미친 또라이라는 것도 알고 있을 터다.
“어떻게 아는 사이야.”
안 그래도 낮은 이안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잘 말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이안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루시테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루시테의 손바닥에 땀이 찼다.
“우연히 나를 도와주신 적이 있어. 꽤 곤란한 상황이었는데 감사하게도.”
“무슨 상황이었는데.”
역시 이안. 이놈은 두루뭉술한 설명에 그냥 넘어가지를 않았다. 이안이 푸른 눈을 예리하게 번뜩였다.
옛날 같았으면 이안의 눈빛에 주눅이 들어 제대로 말도 못하고 어버버 했겠지.
그래서 또 이안의 화를 돋우고, 쓸데없이 정신력만 소모하는 신경전이 시작되고.
그러나 루시테는 이제 옛날의 루시테가 아니었다.
이안의 무서운 눈길 앞에서도 루시테는 약간의 여유가 생겼다.
“내가 소매치기를 당했는데, 소매치기를 잡아주셨어. 지갑도 되찾아 주셨고.”
루시테의 말에 이안이 흠칫했다.
“지갑을 되찾아 줬다고? 네가 지금 갖고 있는 그 돈주머니?”
“응.”
이안이 마뜩잖은 표정을 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테는 이안이 줬던 돈주머니를 그대로 지갑으로 쓰고 있었는데, 하마터면 위치 추적 마법이 걸려 있던 그 돈주머니가 그대로 에단의 손에 넘어가 사라질 뻔했던 것이다.
루시테는 제 돈주머니에 위치 추적 마법이 걸려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어쨌든 이안이 알았다고 넘어갔으니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루시. 이제는 내가 설명을 들을 차례로군.”
가만히 기다리던 세드릭이 굵직한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이안 필드라는 게 무슨 소리지? 너와 무슨 관계인,”
“세드릭.”
루시테는 세드릭의 말을 잘랐다.
웬만하면 끝까지 그의 말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루시테는 세드릭에게 이안과의 관계에 대해서 그 어떤 것도 말해줄 생각이 없었다. 말 하고 싶지도 않았다.
“누구나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쯤은 있잖아요? 성이 같다는 걸 말씀드렸는데, 그냥 이해하고 넘어가 주시면 안 될까요?”
루시테는 간절한 목소리로 세드릭에게 부탁했다.
“······.”
루시테의 말에 세드릭과 이안은 동시에 생각에 잠겼다.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
이안은 루시테의 그 말을 다시금 되뇌었다. 루시테에게 있어서 그는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라는 건가.
이안의 푸른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이안이 생각에 잠긴 동안 세드릭도 제 턱을 쓰다듬으며 가만히 생각했다.
세드릭은 이안의 이름과 성을 들은 순간 루시테에게 캐묻고 싶은 게 많았다.
불온한 눈빛을 한 저놈이 가족이 맞는지. 오빠인지 동생인지. 무슨 관계인지.
왜 저주를 받은 채로 가족의 도움 하나 없이 이 산 중턱 하우스에 혼자 자리를 잡은 건지.
무엇보다, 눈앞에 앉아 있는 시퍼런 눈의 금발 머리는 보통 놈이 아니었다.
비슷한 경지에 있는 검사로서 세드릭은 이안의 위험한 기운을 감지했다.
그와 비슷한,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저런 놈이 루시 필드와 가족 관계라고?
세드릭의 눈빛이 번뜩였다.
저런 놈은 어딜 가나 한 나라의 국력이었다.
그러니 세드릭이 이렇게 막 나가도 국왕이 그의 말이라면 대부분 들어주지 않던가.
몸에 걸치고 있는 것도 대부분 값비싼 것들 뿐.
일개 평민이 살 수 있는 옷이 아니었다.
결론은, 놈이 몹시 수상하다는 것이었다.
저놈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저런 불온한 눈빛을 가진 놈이 루시의 곁에 있다는 게 세드릭은 마음에 안 들었다.
한편 이안과 세드릭이 말없이 무언가를 생각하는 동안, 루시테는 따뜻한 차를 마시며 지친 마음에 한숨을 돌렸다.
차의 따스한 온기가 그녀의 안에 퍼져나갔다.
루시테는 찻잔을 든 채로 세드릭을 가만히 바라봤다.
갑자기 세드릭이 나타나서 당황했지만,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한 건 사실이었다.
혹여 그녀를 놓친 일 때문에 황제에게 벌을 받지는 않았는지 걱정했었다.
루시테는 세드릭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렇게 못 지낸 것 같아 보이지는 않은 몰골이었다.
장대한 몸집은 여전했으며 살이 빠지거나, 힘들어 보이는 기색도 없었다.
꽤 신경이 쓰였었는데 잘 지냈던 것 같았다.
이제 세드릭에 대한 마음의 짐은 털어버려도 되겠다. 다행이었다.
“좋다. 저놈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겠다.”
충분히 생각한 세드릭이 루시테를 향해 말했다.
“감사해요. 세드릭.”
역시 세드릭은 거친 사람이긴 해도 그녀의 말을 잘 들어줬다.
루시테는 몰랐다. 세드릭이 이렇게 순한 양처럼 구는 대상은 그녀가 유일하다는 것을.
루시테는 세드릭과 이안을 번갈아 바라봤다.
루시테는 이 둘을 한 장소에서 볼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닮았지만 한 데 보니 이안과 세드릭은 완전히 달랐다.
세드릭은 어디로 튈지 모를 도무지 이해 못할 미친놈이었다.
반면 이안은 철저하게 계획적으로 사람의 기분을 더럽게 만드는 싹퉁바가지의 최고봉이었다.
세드릭은 의도가 없이 사람을 열 받게 만든다면, 이안은 의도를 가지고 사람을 열 받게 만든다.
모로 보나 너무도 다른 둘이었다. 둘 중 누가 더 낫냐고 하면, 루시테는 당연히 세드릭이었다.
세드릭은 그녀에게만큼은 친절하기라도 하니까.
“그래도 무슨 일이 있으면 이야기해라.”
세드릭은 이안을 노려보다 루시테를 바라봤다.
“네.”
세드릭은 이안을 아주 불순한 놈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마 세드릭에게 그 ‘이야기’를 할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순순히 대답한 루시테가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로 오셨나요?”
루시테의 물음에 세드릭이 이안을 슬쩍 쳐다봤다. 그가 있어 말하기 곤란하다는 뜻이었다.
이안 때문에 곤란한 건 루시테도 마찬가지였으나, 만약 세드릭과 그녀가 이안을 내버려 두고 따로 이야기하러 간다면?
이안이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을 거라는 건 불 보듯 뻔했다.
루시테가 이안을 한두 해 겪어보겠는가?
루시테는 애초에 이안을 자극할 만한 모험 따위를 할 생각이 없었다.
“세드릭, 괜찮으니 여기에서 얘기해요. 이안은 그냥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요. 어차피 제 일에 별로 깊게 상관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에요.”
‘루시테의 일에 깊게 상관할 수 없는 사람.’
이안의 얼굴이 또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한층 싸늘해진 얼굴로 팔짱을 낀 채 루시테와 세드릭을 지켜봤다.
“좋아. 그럼 대강만 얘기하지.”
세드릭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작게 말했다.
“보름 뒤, 황성으로 네가 들어와야 한다. 은밀히 들어와야 하니 내가 데리러 오겠다.”
“황성이요?”
루시테는 화들짝 놀랐다.
‘내가 거길 왜 가!’
그 미친 황제가 있는 곳이 아닌가.
레일리가 어떻게 되찾아 준 일상인데 황성으로 제 발로 들어간단 말인가.
“제가 왜 황성에 가야 해요?! 황제가, 황제가 절 다시 잡아 오라던가요?”
루시테는 흥분하여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성 얘기에 이안의 얼굴이 사나워졌다.
이안은 여차하면 검을 뽑을 생각으로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게 아니다. 루시.”
“그, 그럼 뭔가요?”
“잘된 일이야. 네 저주를 풀 수 있게 되었어.”
“!!!!”
루시테의 눈이 크게 뜨였다.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헤카레트 대신관이 신전과 사이가 좋지 않은 아테라에 오기라도 한단 말인 건가?
루시테의 눈동자가 쉴 새 없이 흔들렸다.
그날 세드릭에게 말해주는 것이 아니었다. 저주를 푸는 방법 따위 알려주는 것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한단 말인가?
“어, 어떻게······ 어떻게······.”
“황태자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약조를 받았다. 대신관과 개인적으로 만날 수 있는 시간을 허락받았어.”
루시테의 물음에 응하듯 세드릭이 대답했다.
쿵.
루시테는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세드릭이 황태자에게 충성을 맹세했다고…….
이크릭스 최고의 검사이자 화이트 울프의 단장이자, 디에고 백작가의 세드릭이 황태자 파에 섰다니.
황태자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면 레일리는?
“······.”
루시테는 입술을 달싹였다.
특정 정치색을 보이지 않던 세드릭이 레일리가 아닌 황태자파가 되었다.
고작 그녀의 저주를 풀겠다는 목적 때문에.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 레일리는 어떻게 되는 거지?
레일리는······.
“알겠나? 너는 저주를 무사히 풀 수 있을 거다. 보름 뒤에 데리러 올 테니 기다리고 있어라.”
“하.”
루시테는 실소를 내뱉었다. 이해할 수 없는 루시테의 태도에 세드릭은 미간을 좁혔다.
“세드릭,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저는 저주를 풀 생각이 없어요.”
루시테의 목소리에 분노가 묻어났다.
“뭐?”
“왜 항상 제가 부탁하지도 않은 일을 하시는 건가요?”
“너는 그때 분명,”
“진심이 아니었어요!”
루시테는 소리쳤다.
“진심이 아니었다고요. 그리고 제가 세드릭한테 제 저주를 풀어달라고 한마디라도 했던가요? 제발 착각하지 말아요. 세드릭은 제 일에 참견할 자격이 없어요.”
루시테는 싸늘한 목소리로 세드릭을 쏘아보며 말했다.
“제발, 당신이 저의 뭐라도 되는 것처럼 제 일에 참견하지 말고. 가서 당신 일이나 똑바로 해요. 가요. 다시는 보고 싶지 않으니. 다시는! 찾아오지 마세요.”
일어난 그대로 몸을 홱 돌린 루시테는 몹시 분노한 채로 빠른 걸음으로 카페를 나가버렸다.
이안은 루시테를 따라 벌떡 일어나더니 세드릭을 한 번 노려보았다.
“다시 접근하면 죽여버리겠다.”
이안은 싸늘한 말투로 세드릭에게 경고를 날렸다.
그리고 루시테가 놔두고 간 짐을 주섬주섬 챙긴 후 재빨리 루시테의 뒤를 따라 나갔다.
루시테는 카페를 벗어나자마자 마구 달렸다. 선을 넘은 세드릭의 행동 때문에 너무 기분이 나빴다.
다시는 그가 보고 싶지 않았다.
이안은 루시테의 뒤를 따라 달렸다.
조그만 게 쉬지도 않고 오르막길을 계속 뛰어올라가고 있었다.
이안은 루시테를 금방 따라잡았지만 루시테를 멈추게 하지는 않았다. 그냥 그 옆을 따라 달렸다.
마침내 루시테가 멈추었을 때는, 집에 거의 다 도착한 지점이었다.
“하아. 하아······.”
루시테는 허리를 숙여 양손으로 무릎을 잡은 채 거친 호흡을 내쉬었다.
‘불쌍한 레일리.’
어떡하면 좋아.
그에게 미안한 게 한 가지 더 생기고 말았다.
“루시테.”
루시테는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옆을 돌아봤다.
이안이 숨소리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채로 그녀의 옆에 서 있었다.
루시테는 그제야 이안이 함께 있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의 손에는 루시테가 내버리고 온 파이프 봉지가 달랑달랑 들려 있었다.
“하······.”
루시테는 한숨을 쉬며 이안에게 손을 뻗었다.
“이리 줘.”
그러나 이안은 루시테에게 파이프 봉지를 넘기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빤히 쳐다볼 뿐이었다.
루시테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보곤 손을 다시 거뒀다.
이안이 별일이었다. 저런 걸 들어주다니. 원래 같았으면 더럽다고 기겁을 했을 것을.
루시테는 이안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산을 마저 오르려고 했다.
“루시테.”
이안이 다시 그녀를 불렀다.
“왜?”
“너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고 있었던 거냐?”
루시테를 바라보는 이안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안은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
이안은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었지만 루시테가 메이븐에서 어떤 위치였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루시테가 저주받았다며 경멸하던 사람 중 한 명이었으니까.
그런데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고?
평생 본인을 괴롭힌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도 폐위를 시켜달라고 요구하고 황성을 떠났다고?
루시테는 흔들리는 이안의 눈동자를 보곤 짜증스럽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왜들 그렇게 자신의 저주에 관심들이 많은지.
남이사 저주를 풀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본인이 괜찮다는데 주변에서 더 난리인 것 같았다.
“관심 꺼.”
루시테는 이안에게 딱 잘라 말했다.
저주에 관해서는 이안조차 선을 넘을 수 없다.
그 부분은 루시테가 이안에게 허락할 수 있는 마지노선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는 황녀였다. 황제 폐하께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요구를 했다면···!”
“이안! 못 들었어? 관심 끄라고.”
루시테의 표정이 점점 사나워졌다. 아무리 약한 생쥐라도 궁지에 몰리면 무는 법이다.
이안은 지금 그녀를 궁지에 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