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18)

9.

“루시테.”

이안은 루시테를 달래듯 조금 더 나지막하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대신관 얘기가 나오는 것 같던데, 네 저주를 신전에서 풀 수 있는 거냐?”

루시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묻지 않겠다. 하지만 너도 계속 지금처럼 살고 싶지는 않겠지. 나와 돌아가자.”

“뭐?”

이안은 마침내 그가 내내 참아왔던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이안은, 루시테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

루시테가 떠나기 직전, 이안은 루시테가 후회할 것이라고 호언장담했지만 정작 후회한 사람은 본인이었다.

조금 더 덜 괴롭혔더라면. 조금 더 친절을 베풀었더라면.

루시테가 안 떠나지 않았을까.

이안은 루시테가 메이븐에 없는 내내 그런 생각을 하며 후회에 휩싸여 있었다.

“황제 폐하가 편찮으시다. 곧 나는 황제가 될 거야. 나와 돌아가자. 내가 너를 저주에서 풀어주고,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만들어 줄 거야. 그렇게 만들 거야.”

이안이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읊조렸다.

루시테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녀가 얼마나 듣고 싶었던 말이던가. 누구에게라도.

누구라도 좀 도와주었으면 했던 지난 생애, 간절히 듣고 싶었던 말이다.

왜 구원자가 필요했던 지난 세 번의 생애에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으면서.

모든 것을 포기한 이제야 도와주겠다고들 나서는 건지.

루시테는 구원자에 대한 기대를 접은 지 오래였다. 이제는 도움 따위는 필요 없었다.

루시테는 충분히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안.”

“그래, 루시테.”

이안이 기대 어린 얼굴로 루시테의 대답을 기다렸다.

“너무 늦었어.”

“뭐?”

“그런 말은 내가 황궁을 떠나기 전에 했었어야지.”

이안의 푸른 눈이 크게 흔들렸다.

“나는 다시는 메이븐에 돌아가지 않을 거야. 그리고 확실히 말해 두는데. 나는 절대로 저주를 풀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네 도움 따위는 필요 없어.”

“진심이야?”

이안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진심이면 어쩔 건데?”

루시테의 물음에 이안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그의 얼굴이 음험해지고 눈빛이 어둡게 침잠했다.

‘설마 저 자식이 나를 억지로 데려가려는 건 아니겠지.’

루시테의 얼굴이 덩달아 딱딱해졌다.

이안이 뭐라고 말을 꺼내려 하는데, 갑자기 그의 주머니 언저리에서 새파란 빛이 번쩍거렸다.

이안이 눈살을 찌푸리곤 주머니에서 빛을 내는 것을 꺼냈다.

푸른 유리구슬이 번쩍번쩍 빛을 발했다. 루시테도 본 적 있는 물건, 통신구였다.

“무슨 일이냐.”

“황태자 전하!”

통신구 안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이안을 불렀다.

“급한 일에만 연락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말귀를 못 알아들은 거냐?”

이안의 목소리가 살벌했다.

“황태자 전하! 정말 급한 일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황제 폐하께서!”

“말해.”

“황제 폐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루시테의 눈이 커졌다.

황제가 쓰러졌다니. 전생에 황제가 쓰러졌던 게 이맘때쯤이었나?

제국력 882년.

루시테는 기억을 더듬었다.

‘아니, 아니야.’

황제가 죽는 것은 원래라면 오 년은 더 뒤였다.

‘그냥 쓰러진 거겠지? 죽은 게 아닐 거야.’

그러나 루시테의 기억 속에 황제는, 크게 쓰러진 후 다시는 일어나지 못한다.

루시테는 아닐 거라고 하면서도 황제가 죽었을 거라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루시테는 손톱을 깨물었다.

‘어째서지?’

사건 진행이 지난 생보다 훨씬 빨랐다.

루시테가 알고 있는 대로라면 오 년 뒤 메이븐의 황제가 서거하고 이안이 황제로 등극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끔찍한 재앙이 시작된다.

“황태자 전하 어서 돌아오십시오! 상황이 위급합니다!”

수정구 너머의 신하가 이안에게 돌아오라고 간절히 설득했다.

“알았으니 그만 끊어라.”

이안은 일방적으로 통신을 끊었다.

“그만 돌아가. 가봐야 하잖아.”

루시테는 이안에게 다가가 그의 손에 들린 파이프 봉지를 빼냈다.

“돌아가. 이안.”

루시테는 이안에게서 뒷걸음질로 한 걸음 멀어졌다.

미련 없이 그에게서 돌아서 산 중턱을 마저 오르려 하는데, 이안이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굳은살이 박인 큰 손이 루시테의 손을 감쌌다.

이안은 장갑도 끼지 않은 맨손이라, 서로의 체온이 그대로 전해졌다.

루시테는 이안에게 붙잡힌 제 손을 한 번 보고, 이안을 올려다봤다.

“왜 이래?”

“나랑 같이 가.”

이안의 푸른 눈동자가 간절함을 담았다.

“루시테.”

이안은 루시테가 대답하지 않자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루시테의 손을 잡은 이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루시테는 이안을 잠시 바라보다 그의 손에서 제 손을 빼냈다.

루시테는 빙긋 미소 지었다.

“싫어.”

‘미안해.’가 아닌 ‘싫어.’

그녀는 같이 가지 않는 것에 대해 하나도 미안하지 않으니 미안하다고 할 필요가 없다.

“이안, 너는 훌륭한 황제가 될 거야. 틀림없이. 그러니까 다시는 나 찾지 말고 잘 살아. 안녕.”

루시테는 지금까지 이안에게 지었던 모든 표정을 통틀어 그에게 가장 환한 웃음을 선사했다.

일순 이안의 표정이 멍해졌다.

아마, 처음으로 웃어준 게 아닐까 싶었다.

루시테는 그대로 이안에게서 돌아섰다.

작별 인사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루시테는 그대로 걸음을 옮겨 산 중턱을 마저 올랐고. 이안은 그녀를 따라오지 않았다.

정말로 끝이었다.

이안은 멍한 표정으로 루시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언덕 너머로 루시테의 모습이 사라져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하염없이.

그의 주머니에서 통신구가 또 푸른빛을 내며 번쩍였다.

이안은 통신구가 번쩍거리게 내버려 두곤, 이제는 루시테가 사라진 오르막길을 바라보았다.

‘루시테.’

애정과 증오가 함께 공존하는 그의 사랑스러운 이복누이.

그는 자신이 데리러 오면 당연히 루시테가 함께 갈 줄 알았다.

그에게 있어 루시테가 거절한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황성을 떠난 타지에서 루시테가 행복할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실제로 와서 본 루시테는 꽤 잘 지내고 있었다. 이안은 그것이 너무도 거슬렸다.

루시테가 황성을 나간다고 한 그날, 이안을 루시테에게 돈을 주었다.

그때는 루시테가 고생하지 않기를 바랐지만, 한편으로는 떠나서 고생하기를 바랐다.

그를 떠나서, 자신을 떠나서 후회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루시테가 꾸린 행복해 보이는 집구석. 그 모든 것을 망쳐버리고 싶었다.

그녀가 손수 가꾼 모든 것들을 다 부숴버리고 싶었다.

잔인하고도 불온한 생각이 이안의 마음속에서 움텄다. 그러나 이안은 그것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이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더 큰 힘.

루시테가 거부할 수 없는 힘을 가져야 한다.

피가 통하지 않은 이복누이를 황후 자리에 올려놓을 수 있을 만한 더 큰 힘. 그 힘을 가져야 한다.

이 감정이 사랑인지, 증오인지 또는 가족애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안에게는 그녀가 필요했다.

다른 사람은 필요 없었다.

이안은 거기까지 생각한 후에야 마침내 산 중턱 하우스의 반대쪽으로 몸을 돌렸다.

장신의 그림자가 빠르게 산 중턱 하우스에서 멀어져갔다.

한편 세드릭은 루시테와 이안이라는 놈이 나간 후 카페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터덜터덜 카페를 빠져나왔다.

저주를 풀고 싶지 않다니.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니.

루시가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다는 게 세드릭은 믿을 수가 없었다.

‘너무 성급했던 건가.’

세드릭은 자신이 했던 말을 곱씹어 보며 후회했다.

그리고 어떻게 루시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세드릭은 조금 전 일을 생각하느라 주변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그래서 세드릭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의 처진 그림자가 늘어진 거리의 저 뒤 골목에, 검은 로브를 둘러쓴 수상한 자가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검은 로브 아래로 앙상하게 마른 창백한 손이 튀어나왔다.

해골처럼 바싹 붙은 살가죽 위로 푸른 핏줄이 도드라졌다.

검은 로브의 사내는 품에 검은 구슬을 안고 세드릭의 뒤에 서서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검은 구슬에 스산한 빛이 감돌더니 구슬에서 검은 연기가 새어 나왔다.

연기는 뱀처럼 기어 세드릭의 늘어진 그림자로 스며들었다.

그림자 속에 숨어든 어두운 기운은 곧 충격을 받아 멍한 세드릭의 마음 언저리, 저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갔다.

“으윽!”

세드릭은 문득 심장 부근이 따가워 허리를 숙였다.

그는 손으로 가슴을 꾹꾹 눌렀다. 심장 부근이 언제 따가웠냐는 듯 아무렇지도 않았다.

세드릭은 고개를 갸웃하며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든 그의 푸른 눈에 조금 전과 다른 기운이 감돌았다.

진득한 어두운 기운이 푸른 눈동자 속으로 깊숙이 가라앉았다.

* * *

루시테는 에단과 리브와 힘을 합쳐 낡은 파이프를 갈았다.

끼릭.

에단이 마지막 파이프 조각을 끼워 맞췄다.

“또 터지지는 않겠죠?”

“당분간은 괜찮겠지.”

에단이 땀을 닦으며 말했다.

“휴우.”

루시테와 리브, 에단은 부엌을 마저 다 정리하고 나서야 한숨을 돌렸다.

“그 손님은요?”

리브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물었다.

“갔어.”

“가셨어요? 위층에 아직 짐이 있을 텐데.”

“다 버려.”

“버려요? 하지만······.”

“괜찮아. 다시 올 일 없을 거야.”

루시테의 단호한 대답에 리브는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였다.

리브는 루시테를 힐끔 바라봤다.

칠흑같이 검은 눈동자에는 어떤 생각도 읽히지 않았다. 굳게 다물린 선홍빛 입술이 단호했다.

동생이라는 그분을 다시는 볼 일 없다는 아가씨가 왠지 리브는 처연하게 느껴졌다.

‘아가씨는 정말로 어떤 분이신 걸까?’

리브는 왠지 그녀의 아가씨가 생각보다 훨씬, 훨씬 더 대단한 분이실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이안을 보고 느낀 직감이었다.

리브가 보기에 이안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길거리에서 구르는 동안 수많은 사람을 봐 왔는데, 이안에게서는 높은 사람이 풍기는 특유의 분위기가 짙게 배어있었다.

그냥 높은 사람 정도가 아니다.

아마도 아주 아주 높은 사람. 아주 아주 귀한 사람.

리브는 제 아가씨를 응시했다. 아가씨의 눈동자가 슬퍼 보였다.

솔직히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리브는 이안과 관련하여 더 이상 아무 얘기도 꺼내지 않았다.

리브는 아가씨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저, 이번에 보고 겪은 일은 리브의 마음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문득 루시테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리브를 발견했다.

루시테는 리브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었다.

리브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 눈을 접으며 해사하게 웃었다.

루시테는 귀엽다는 듯 리브의 머리를 몇 번 더 쓰다듬고 방으로 올라갔다.

루시테는 제 방에 들어가기 앞서 이안이 머물렀던 방으로 향했다.

고작 하루 머물렀을 뿐인데도 방 안에는 이안의 향기로 가득했다.

루시테는 방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시원한 밤바람이 물밀 듯 불어 들어왔다.

루시테는 천천히 방 안을 둘러봤다.

이안이 남기고 간 것은 별로 없었다.갈아입을 옷가지 몇 벌 정도.

‘버려도 되겠네.’

루시테는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아 방을 나왔다.

이안과 달리 루시테는 미련 따위는 한 톨도 없었다.

이안을 다시 보지 않아도 된다니 속이 시원할 뿐이었다.

그보다도 지금 루시테는 이안보다 신경이 쓰이는 사람이 있었다.

‘레일리.’

루시테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세드릭이 왔다 가니 더 걱정되었다.

차라리 세드릭을 달래 레일리의 소식이나 물어볼 것을 그랬다.

너무 성급하게 세드릭에게 화를 내고 나와 버렸다는 생각이 뒤늦게 루시테의 뇌리를 스쳤다.

루시테는 자기 직전까지도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레일리의 소식을 알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레일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말이다.

* * *

“디에고 백작.”

세드릭은 멍한 표정으로 벽을 바라보았다.

루시 필드가 그에게 다시는 찾아오지 말라며 화를 냈던 게 눈에 선연했다.

갈피를 잃은 느낌이었다.

“디에고 백작!”

“세드릭 디에고!”

회의를 하던 황태자 알렉산더가 결국 세드릭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부르셨습니까.”

세드릭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후.”

알렉산더가 짜증을 삼키며 컵을 꽉 쥐었다.

알렉산더의 팔뚝에 핏줄이 불거졌다.

평소 성질 같았으면 진작에 컵을 세드릭에게 던지고도 남았을 텐데.

알렉산더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제 성질을 간신히 참았다.

아직 세드릭 디에고는 내쳐서는 안 될 패였다.

중요한 순간에 쓸모가 있으리라. 그러기 위해 밑 작업도 해두지 않았던가.

알렉산더는 이를 악물고 세드릭을 향해 다시 말했다.

“백작이 낸 의견은 아주 쓸모가 있었소. 아무리 황제 폐하라도 헤카레트의 대신관 앞에서 맹세를 한다면 그것을 어길 수는 없겠지. 대신관 앞에서 약조를 받아 낼 것이오. 나를 반드시 황제위에 앉히겠다는 약조를.”

세드릭은 뚱한 얼굴로 알렉산더의 말을 들었다.

‘쓸모없는 놈.’

세드릭은 알렉산더의 면전에서 태연하게 속으로 알렉산더 욕설을 중얼거렸다.

뭐 하나 쓸모 있는 일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정쟁에 관심이 없는 세드릭 조차 알렉산더에게 황제의 자질이 턱없이 부족함을 눈치챌 정도였다.

성미가 불같고 소리만 지를 줄 알지 말주변은 삶아 먹었고, 붙어 있는 근육은 장식인 양 검에 재능도 없었다.

명색이 황태자라는 놈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라의 위신도 버렸다.

명목상 신전을 의지하긴 하지만 신전과 사이는 좋지 않다.

그것이 이크릭스의 입장이었다. 그 입장을 이어 온 지가 벌써 수백 년인데.

이 버러지 같은 황태자는 이크릭스의 명분 따위는 휴지조각으로 여겼다.

세드릭이야 그따위 명분, 입장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으니 신전을 끌어들이는 데 죄책감이 없었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이크릭스의 차기 황제로서 마땅히 죄책감을 가져야 할 입장이었다.

그런데 고작 후궁의 자식이 황성으로 돌아왔기로서니 냉큼 신전을 끌어들여?

권력에 눈이 돌아간 쓸모없는 인간.

그게 세드릭이 알렉산더에게 내린 평가였다.

세드릭은 지루한 회의가 끝나고 휴식을 받아 황태자궁을 나왔다.

세드릭은 무심코 또 루시와 함께 머물렀던 외진 궁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루시 필드. 그 저주받은 작은 여자를 생각하니 세드릭은 또 괴로워졌다.

세드릭은 최근 들어 악몽을 계속 꿨다.

「세드릭. 내 사랑하는 아들. 엄마를 위해서 뭐든 다 해 줄 거지? 그렇지?」

세드릭의 친모는 검은 머리는 아니었지만 검은 빛에 가까운 고동색 머리칼을 가진 여자였다.

친모는 꿈속에서 언제나 짙은 고동빛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채 처연한 얼굴로 세드릭에게 다가왔다.

꿈의 마지막은 친모가 목을 매단 장면이었다.

천장에 매달린 어머니가 세드릭을 향해 손을 길게 뻗어왔다. 손은 하염없이 길게 늘어났다.

「세드릭. 너 때문에 내가 죽었어. 네가 엄마를 잘 지켜주지 않아서. 그래서 내가 죽었어!」

친모가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비명을 지르고.

그러면 세드릭은 땀에 쫄딱 젖은 채로 꿈에서 깨어났다.

세드릭은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얼굴에 마른세수를 했다.

루시 필드에게 거절을 당했다. 그녀를 그저 지켜주고 싶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거지?

세드릭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미 헤카레트의 대신관은 오기로 했고, 그것은 돌이킬 수가 없다.

그리고 세드릭의 집착 역시 이미 돌이킬 수가 없었다.

안 되면 납치라도 해서 저주를 풀어줄 것이다. 그게 결국 루시 필드를 위한 일이다.

그렇게 세드릭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제 어미도 세드릭의 도움을 거부하다 결국 죽지 않았던가.

거부하더라도 도와야 한다.

“그래. 그게 맞지.”

세드릭은 푸른 눈을 형형하게 빛냈다.

마치 어둠 속에서 먹잇감을 잡아채기 위해 숨을 죽이는 맹수와 같은 눈빛이었다.

세드릭은 어떤 타이밍에 루시 필드를 납치해야 할지 고민하며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 * *

쾅!

성미가 불같은 이크릭스 제국의 황제 발칸트리히 2세가 책상을 내리쳤다.

“알렉산더 그놈이 결국······!”

황제가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가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알렉산더가 일을 진행시킨 것이다.

헤카레트 대신전 측에서는 이크릭스와의 돈독한 관계를 위해 대신관이 직접 출발했다는 것이었다.

정말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결코 움직이지 않는 대신관이 말이다.

“감히 아덴티움에 헤카레트의 대가리를 끌어들이다니 말이 되는 소리란 말인가!”

황제는 불같이 화를 내며 포효했다.

황제의 집무실 가운데에 서서, 레일리는 아무 말 없이 황제를 바라보기만 했다.

레일리의 얼굴은 표정이 없이 싸늘했다.

“카일러스.”

“예, 폐하.”

레일리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대신관을 암살할 수 있나?”

황제는 엄청난 내용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다.

“불가능합니다.”

“어째서냐?”

“제 능력은 신룡의 능력, 일개 신관이라면 모를까 대신관에게는 통하지 않습니다.”

레일리는 아무렇지 않게 거짓말을 했다.

물론 방금 한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이긴 했으나 방법을 찾으라면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레일리는 방법을 찾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누구 좋으라고 방법을 찾아준단 말인가.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레일리는 더더욱 알렉산더를 위해 움직여줄 생각이었다.

그 머저리는 레일리를 경쟁자랍시고 날뛰는 상황이나, 레일리는 누구보다도 알렉산더를 위해 황제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황권과 황태자 위를 위협하는 은밀한 세력들. 반란의 조짐을 보이는 세력들.

그들을 레일리는 밤의 사자처럼 찾아가 모조리 살해했다.

황제 자리 따위는 관심도 없으니 헤카레트의 대신관만 데리고 올 수 있기를.

레일리가 황제의 개처럼 구는 유일한 목적이었다.

이미 황제의 명령으로 인해 손에 많은 피를 묻혔다. 여기에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오로지 그녀, 루시테 클라우디오를 위하여.

레일리는 품 안에 안겼던 작은 온기를 떠올렸다.

‘루시테. 조금만 기다리세요.’

답을 찾아 드리겠습니다.

레일리의 지혜로운 은빛 눈동자가 청명하게 반짝였다.

레일리는 그날 물의 정령왕 엘라임을 만난 이후로 종종 깊은 생각에 몰두하곤 했다.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고서의 고서까지 다 파헤쳐 흔적을 찾았다.

레일리는 엘라임이 했던 말을 전부 다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특히 루시테와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는 엘라임이 한 말을 그대로 외우고 있었다.

「나는 내 실수를 만회할 기회를 따라왔단다.」

「불쌍한 아이.」

「나는 물을 다스리는 왕이다. 모든 죽은 자는 강을 건너가야 하지. 그런데 그 운명을 내가 뒤틀어 버렸다. 얄궂은 운명에 너무 화가 났거든.」

「저 아이가 죽지 못하고 계속해서 삶을 반복하는 건 다 나 때문이야. 저 아이나 나나 주신에게 저주를 받았지.」

「헤카레트의 대신관에게 저 아이를 데려가거라. 그러면 네가 찾는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해수면이 일렁이는 듯한 스산한 목소리가 레일리의 귓가에 그대로 재생되었다.

고작 다섯 마디 정도뿐이었지만 지혜로운 용의 후손인 레일리가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상당히 많았다.

불쌍한 아이란 루시테를 가리킨다.

엘라임은 루시테에게 실수를 했다.

그 실수란, 죽은 루시테가 죽은 자의 강을 건너가야 하는데 엘라임이 물의 권능을 이용해 그 운명을 뒤틀었다는 것.

그 결과로 루시테와 엘라임은 저주를 받았다.

엘라임은 소멸하지 못하고 루시테의 끝을 지켜봐야만 하는 저주.

루시테는 죽지 못하고 계속해서 삶을 반복해야만 하는 저주.

레일리의 눈빛이 예리하게 번뜩였다.

솔직히 그가 유추한 내용에는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운명이 뒤틀린 것이라든지, 루시테가 이미 죽은 적이 있다는 것이라든지, 루시테가 계속해서 삶을 반복해야만 한다는 것이라든지.

온전히 믿을 수는 없었지만 신에 가까운 존재인 정령왕이 한 말이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레일리는 루시테의 저주란 것에 대해 고민하면 할수록 그녀가 불쌍해졌다.

불쌍하고 또 불쌍해서, 어떻게든 그녀를 해방시켜주고 싶었다.

엘라임의 말대로라면 루시테는 두 개의 저주에 걸린 것이 아닌가.

몸이 자라지 못하는 저주와 죽지 못하는 저주.

이 모든 것에서 루시테를 해방시켜주고 레일리는 엘라임이 말했던 해답을 찾으리라.

레일리의 결심은 굳건했다.

레일리와 세드릭, 그리고 알렉산더.

셋은 모두 한 가지를 원했다.

헤카레트의 대신관과 만나는 것.

셋은 모두 같은 목표를 갖고 있었으나 원하는 것은 모두 달랐다.

알렉산더는 대신관을 이용해 황태자 자리를 지키려는 목적.

세드릭은 루시테의 저주를 풀고 성인이 된 그녀를 제 곁에 묶어두려는 목적.

마지막으로 레일리는, 루시테를 해방시켜주고 그의 자유를 되찾으리라는 목적.

셋의 의지가 한데 섞여 이제 운명은 걷잡을 수 없어졌다.

그 누구도 빠져나갈 수 없는 소용돌이 속으로 그들은 속절없이 휘말려 갔다.

* * *

주신 헤카레트는 이크릭스로의 여정을 떠난 자신의 대리인에게 예언을 내렸다.

-그 누구도 온전히 갈망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헤카레트의 대신관 렘브란트는 자던 중에 계시를 받고 벌떡 일어나 기록했다.

때때로 신은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이 계시를 내리곤 했다.

대개 재앙 급의 엄청난 일이 일어나기 전에 그런 계시가 내려오곤 했기에, 렘브란트는 손에 땀을 쥐고 계시의 내용을 기록했다.

렘브란트의 손이 덜덜 떨렸다.

그가 이런 시간과 장소에 상관없는 계시를 받은 것은 살면서 두 번째였다.

첫 번째는 그의 누이의 딸이 저주를 받았을 때.

두 번째는 바로 지금.

주신의 대신관 렘브란트는 이번 이크릭스로의 여정이 심상치 않을 것을 깨달았다.

폭풍전야.

거센 폭풍이 다가오기 직전의 잔잔한 밤.

그러나 깨달았음에도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신의 계시가 내려왔고 렘브란트는 이 여정을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 끝에 신이 무엇을 예비했는지, 어떻게 계시를 이루는지.

렘브란트는 신의 대리인으로서 모든 것을 보고 기록해야 하는 사명이 있었다.

렘브란트가 쥐고 있는 깃펜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사실은, 깃펜이 떨리는 것이 아니라 렘브란트가 떨리는 것이겠지만.

‘누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렘브란트는 식은땀을 흘리며 눈을 감고 제 누이를 떠올렸다.

역대 대신관 중 가장 강력한 신력을 갖고 있었으나 황제에게 범해져 황제의 후궁이 된 누이.

그리고 저주받은 누이의 딸.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렘브란트의 식은땀이 그의 턱을 타고 흘렀다. 모든 것이 심상치 않았다.

무엇이 되었든 그 끝에 가서 보면 알 수 있으리라.

렘브란트는 양손을 맞잡고 눈을 감은 채 간절히 주신께 기도를 올렸다.

간절히 바라옵고 바라옵나니.

‘부디 재앙이 일어나지 않기를······.’

* * *

루시테는 새벽같이 집을 나서 이반 영감의 서점으로 향했다.

간밤에 꿈자리가 뒤숭숭했다.

원래도 악몽을 잘 꾸는 편이긴 했으나, 이번에는 유독 심했다. 무언가 불길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인생 4회차 루시테는 제 감각을 무시하지 않는 편이었다.

자신이 진짜 성녀라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무언가 큰일이 일어나기 전 예지처럼 이런 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난 세 번의 생애 모두 이상하게 죽을 때쯤 되어 이런 불길한 느낌이 들었었다.

피하려고 해도 피할 수 없는 위험.

이 불길하고 선득한 느낌은 바로 그런 위험에 대한 감각이었다.

지금 그녀는 목숨의 위험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주변에 목숨의 위협을 느낄 만한 사람이란?

루시테는 이럴 때 한 사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레일리.’

최근 들어 그의 생각이 훨씬 많이 났다.

이제는 그가 걱정되어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루시테는 걸음을 재촉했다. 멀리 서점의 낡은 간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딸랑.

새벽같이 문을 여는 이반의 서점이 적막한 광장에서 종소리를 울렸다.

루시테는 문 위에 달린 작은 종이 울리는 소리를 들으며 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서점 안은 조용했다.

인기척을 느낀 이반 영감이 구석에서 바닥을 쓸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필드 양. 이 시간에는 어쩐 일로 왔소?”

이반 영감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루시테를 반겼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여쭤볼 게 있어요.”

“이쪽으로 오시오.”

루시테의 표정이 심각한 것을 본 이반 영감이 얼굴을 굳혔다.

이반은 루시테를 서점의 안쪽에 있는 그의 방으로 안내했다.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루시테와 이반 영감은 마주 앉았다.

“그래서, 무슨 일로 왔소? 일감은 얼마 전에 받아 갔으니, 그 얘긴 아닌 것 같고······.”

“할아버지. 저······. 황성에 들어가야겠어요.”

“!”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잡일이라도 좋아요. 잠깐 들어가서 상황만 파악할 수 있는 그런 위치면 돼요.”

결코 황성에 들어가지 않으려 했던 루시테 치고는 꽤 큰 결정이었다.

원래 같았으면 황성 쪽으론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어쩐지 루시테는 레일리가 걱정되어 이대로 있다간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잘못하면 평생 후회를 하며 살게 될지도 몰랐다.

루시테는 후회하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부탁이에요, 할아버지.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부탁할 사람이 할아버지밖에 없어요.”

루시테는 간절한 표정으로 이반 영감을 쳐다보았다.

이반 영감의 서점은 아테라의 시내에 있는 서점 중 가장 오래되었으며 인기 있는 곳이었다.

이반 영감은 태어날 때부터 아테라의 주민이었으며, 유명한 서점을 운영한 덕에 아는 사람이 많았다.

분명, 그가 무슨 방법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이런······.”

이반 영감은 루시테의 부탁을 들으며 쯧쯧 혀를 찼다.

“곤란한 사정이 있는 것 같아 보이네만······. 필드 양,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안 되겠는가? 요즘 황성의 상황이 좋지가 않네만.”

이반 영감이 걱정 어린 표정을 했다.

“상황이 안 좋아요?”

“자네는 소식을 못 들은 모양이군. 두문불출하던 2황자 전하께서 사실은 마법사 대공 레일리 아사드 님이라는 것이 밝혀졌다네. 그 일로 수도가 한동안 떠들썩했지.”

“그건 알고 있어요. 그런데 그것 때문에 황성 상황이 안 좋은가요?”

이반 영감이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자네는 못 느꼈군. 수도 사람이 아니라 그런 건가.”

“무슨 일인데 그래요? 말해주세요.”

이반 영감이 심각한 얼굴로 목소리를 확 낮췄다.

“수도에는 언제나 있어 왔지만, 현 발칸트리히 2세가 즉위한 후 그 세력이 더 불어났다네. 황제 폐하의 억압적인 과세 정책 때문이지. 그런데 황제 폐하께서 2황자 전하를 통해 그 세력들을 죄다 처단하고 있어 지금 분위기가 말이 아니야. 어제만 해도 성문 앞에 그들 세력들의 머리가 걸렸다네.”

“네?”

루시테는 눈가를 찡그렸다.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 안 갔다.

“그러니까 무슨 세력 말씀하시는 거예요?”

“쉿.”

이반 영감이 낮게 속삭였다.

“레지스탕스라네.”

“!”

루시테는 눈을 크게 떴다. 저항 세력.

현 정권에 불만을 품어 모이는 불온한 무리였다.

레지스탕스들은 메이븐에도 있었으나, 메이븐은 신성제국이기 때문에 엄한 신성 앞에 크게 두각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신전을 멀리하는 이크릭스에는 예부터 특히 레지스탕스들이 기승을 부려 왔다.

이반 영감은 그 세력이 지금 현 황제 발칸트리히 2세의 때에 이르러 훨씬 불어났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력들을 친히 소탕하고 있는 것이 2황자 카일러스.

즉 레일리라는 것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피바람이 몰아치는데 황성 안은 훨씬 더 살벌하다네. 황태자 전화와 2황자 전하의 정쟁 구도가 갈수록 날이 서고 있어. 황성은 새로운 인물을 반기지 않을 것이네.”

이반 영감은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며 루시테에게 권고했다.

그러나 루시테의 의지는 확고했다.

명색이 저주받은 황녀가 아닌가. 그녀는 황궁에서 눈에 띄지 않고 숨어 지내는 데는 도가 튼 사람이었다.

“괜찮아요. 할아버지. 그렇다면 제가 황성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지는 않다는 거네요?”

“그건······. 그렇지.”

이반 영감이 마지못해 대답했다.

상황만, 상황만 살피고 올 것이다.

레일리가 무사한 지 그녀의 눈으로 확인만 할 것이다.

누구의 말을 통해서가 아닌 그녀의 눈으로 직접 레일리를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았다.

조용히 확인만 하고 나오면 위험해 처할 일도 없고, 지금의 평온한 일상이 무너질 일도 없을 것이다.

‘레일리. 난 당신에게 빚이 있어.’

루시테의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가 그의 아름다운 은빛 머리칼과 은빛 눈동자를 잔상처럼 그리었다.

‘반드시 당신이 내게 해준 일에 보답할 거야.’

루시테는 확신에 찬 눈빛으로 다시금 이반 영감을 설득했다.

그리고 마침내 루시테는 이반 영감을 통해 방법을 들을 수 있었다.

루시테는 심각한 얼굴로 터덜터덜 산 중턱을 올랐다.

이반이 전해준 일은 대충 이랬다.

황성에서는 현재 공식적으로 신전과 관계를 개선하기로 의지를 표명했다고 했다.

보름 뒤 헤카레트 대신전의 대신관이 당도한다.

그 일행을 예의를 갖춰 맞이하기 위해 황성에서는 대대적인 대청소와 정원 손질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민간에서 꽃을 취급하는 상점 몇 개가 선정되어 대거 황성에 물품을 납품하고, 정원 가꾸기를 도울 것이다.

그중 한 군데가 이반 영감과 친한 주인이 하는 가게라고 했다.

이반 영감은 이렇게 조언했다.

상점 주인에게 미리 소개해줄 테니,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취직하여 일손을 도우라고.

그곳에서 일을 잘하면 황성으로 들어가는 인원에 포함될 테니, 그때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가면 될 것이라고 이반 영감은 조근 조근 일러주었다.

루시테는 내일 당장 꽃 상점에 취직하기로 이반 영감과 약속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한동안 또 집을 비우게 될 것 같았다.

하루 이틀 황성으로 잠깐 들어갔다 나오기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일이 생각보다 복잡했다.

그러나 만전에 또 만전을 기하기 위해서는 이반 영감의 말대로 하는 게 옳았다.

들으면 들을수록 그가 계획한 방법이 가장 안전했다.

루시테는 이반과 리브, 그리고 노이에게 어떻게 말을 전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집 앞에서 또 한참을 서성이며 고민하다 루시테는 마침내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가씨! 다녀오셨어요!”

“루시이!”

“오셨습니까, 아가씨.”

리브와 노이, 에단이 점심을 먹을 준비를 하며 루시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따뜻하고 평온한 광경에 루시테는 왠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이들을 당분간 일주일, 아니 어쩌면 보름 그 이상을 못 볼지도 모른다.

루시테는 애꿎은 블루베리를 툭툭 건드리며 타는 속을 달랬다.

“리브, 에단. 노이. 내가 잠시 할 얘기가 있어.”

루시테는 식사를 마친 후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당분간은 필사 일을 좀 쉬고 어디를 다녀와야 할 것 같아.”

“네에?!”

리브와 에단은 푸딩을 먹다가 놀라 그릇에 툭 떨어뜨렸다.

“어디를 가십니까, 아가씨?”

“루시 가? 어디 가!”

푸딩을 입안으로 와구와구 밀어 넣던 노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별 건 아니고. 내가 꽃에 좀 관심이 있는데 일을 배워 볼까 해서 말이야.”

“갑자기 말이에요?”

“어디로 가셔서 배우시는 건데요?”

에단과 리브가 앞다투어 루시테의 행방을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의 주인이 갑자기 집을 당분간 비운다는 데 얼마나 불안하고 걱정이 되겠는가.

리브는 안절부절못했고, 에단은 초조해졌다.

“리브, 에단. 괜찮아. 아테라에 있는 큰 꽃가게야. 이반 영감님께 소개받은 거니까 걱정 안 해도 돼. 거기에서 지금 일손이 바쁘고 급하다고 해서 당분간 그곳에 머물면서 일을 배우게 될 것 같아.”

이반 영감의 이름이 나오자 리브가 눈에 띄게 안심했다.

뭣하면 이반 영감에게 물어봐서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알겠니? 그렇게 됐으니 내가 없는 동안 그동안 배웠던 글자들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 돈은 금고에 넉넉하게 넣어뒀으니 필요하면 가져다 쓰고.”

“하지만 아가씨······.”

리브는 어느 정도 안심했지만, 에단은 아직 불안한 모양이었다.

“아가씨, 이렇게 저희만 두고 가시면,”

“두고 가는 게 아니라 잠시 다녀오는 거야. 에단, 날 봐. 이런 저주받은 모습으로 뭘 해봤겠니? 나는 하고 싶은 게 많아. 이번 기회는 내게 다시 오지 않을 소중한 기회란다.”

루시테가 이렇게까지 얘기하자 에단은 더 이상 얘기하지 못했다.

노이는 큰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는 루시테의 팔에 매달렸다.

“노이.”

루시테는 그저 노이의 머리를 계속해서 쓰다듬어 주었다.

“금방 돌아올게.”

루시테는 노이의 귓가에 몇 번이고 속삭였다.

루시테는 시간이 날 때면 이반 영감을 통해 소식을 전하기로 약속하고 나서야, 다음 날 짐을 챙겨 들고 산 중턱 하우스를 나올 수 있었다.

짐이라 할 것도 없었다. 약간의 비상금, 갈아입을 옷 두 벌을 챙겼을 뿐이었다.

그리고 이반 영감이 일러준 꽃가게에 가기 앞서, 마법 물품 상점에 들렀다.

이크릭스에는 이런 가게가 꽤 많았다. 마법이 발달해 있는 나라이기도 하고, 마법사가 많기도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시테는 아테라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마법 물품 상점에 간 일이 없었다.

이번에 처음 방문하는 것이었다.

혹시 모를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딸랑.

허름한 가게 안을 작은 종소리가 울렸다.

“계신가요?”

루시테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진열장에는 먼지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고, 그 안에는 목걸이나 반지 따위의 평범한 물건부터 해골, 동물의 뼈 같은 알 수 없는 물건들까지 다양한 것들이 놓여 있었다.

“누구쇼?”

카운터 뒤에서 발을 제치고 마법사의 로브를 걸친 중년의 남자가 나타났다.

“물건을 사러 왔는데요.”

“하아······.”

마법사가 짜증스럽다는 듯 머리를 벅벅 긁었다.

마법사가 머리를 긁을 때마다 떡 진 머리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아무거나 고르든지 말든지.”

“가발은 안 파나요?”

“가발?”

마법사는 비뚜름하게 눈썹을 올렸다.

마법 물품 상점은 각종 잡동사니를 취급했다. 물론 가발도 있었다.

그런 잡동사니는 돈도 안 됐다.

더욱이 세금이 극도로 오른 지금, 가발을 팔아 세금을 떼고 나면 남는 게 거의 없었다.

마법사는 높아진 세금 때문에 거의 장사를 포기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장사를 하나 마나, 남는 게 없으니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사정이었다.

살기가 팍팍하니 홧김에 레지스탕스라도 되고 싶은 심정이었다.

“가발을 사야 하는데······.”

“안 파니까 나가!”

마법사는 열이 뻗쳤는지 빽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루시테가 뭐라고 더 말을 해볼 틈도 없이 루시테를 내쫓았다.

루시테는 황당한 얼굴로 마법 물품 상점 앞에 잠시 서 있었다.

루시테는 그 이후로 몇 번이나 더 퇴짜를 맞으며 상점들을 돌았다.

하나 같이 마법사들이 곤두서 있고 화가 나 있었다.

마지막으로 간 상점에서 루시테는 간신히 가발을 구할 수 있었다.

갈색 머리 가발 세 개.

루시테는 웃돈을 얹어 가발보다 훨씬 높은 금액을 치르고 상점을 나왔다.

그나마 루시테에게 가발을 팔아준 그 마법사가 말하기로는, 최근 들어 마법 물품 가게에 대한 세금 징수가 훨씬 심해졌다고 했다.

그래서 장사하기 힘들어 그러는 거니 이해해 달라고 하며 루시테에게서 금화를 몇 개나 뜯어갔다.

큰 손실이었지만 그나마 루시테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했다.

황성 안에서는 안티매직 때문에 마법으로 만든 가발은 소용이 없었다.

진짜 가발만 쓸모가 있으니 구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루시테가 구한 갈색 머리 가발은 보험이었다.

아무래도 머리색이 너무 튀다 보니 무난하게 있다 오려면 이 정도라도 하고 들어가야 될 것 같았으니까.

루시테는 꽃 상점으로 가기 전 골목에 들어가 가발을 썼다.

확실히 마법 상점에서 취급하는 가발이라 그런지 질이 좋았다.

그녀의 진짜 머리칼이 아닌데도 들뜨지 않고 자연스럽게 달라붙었다.

큰돈을 주고 구한 데에 비하면 하찮은 기능이었지만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안녕하세요! 이반 영감님의 소개를 받고 온 안나입니다!”

루시테는 목소리를 높여 인사하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이반 영감과는 이름을 바꾸기로 이미 말을 맞춰놓은 상태였다.

가게 안은 습한 냄새가 가득했다. 흙냄새, 풀 냄새, 이끼 냄새. 각종 꽃향기가 진하게 퍼져 있었다.

몇 안 되는 직원이 분주하게 움직이다 루시테를 발견했다.

“꼬맹이. 네 이름이 뭐라고?”

주근깨가 가득한 날카로운 눈매의 여자가 작은 화분을 옮기다 말고 루시테를 불렀다.

‘꼬맹이.’

그것도 이미 이반 영감과 열다섯으로 하기로 나이를 맞춘 상태였다.

“네. 저는 안나입니다!”

루시테는 열다섯처럼 느껴지도록 활기차게 대답했다.

“나는 케이트다. 흥, 너 같은 꼬마가 우리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나 모르겠구나. 사장님은 잠시 볼일이 있어 나가셨으니 들어와!”

자신을 케이트라 소개한 주근깨 여자는 쉴 새 없이 뭐라고 투덜거리며 루시테를 가게 안쪽으로 안내했다.

가게 안은 상당히 컸다.

가게 자체는 조금 큰 꽃가게 정도였으나, 뒷문을 열고 나가면 커다란 하우스 안에 꽃밭이 펼쳐져 있었다.

이 정도 규모쯤 되니 황성의 정원 일에 손을 보탤 수 있는 모양이었다.

“저 구석으로 가서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와. 해야 할 일이 산더미야 빨리빨리 움직여!”

케이트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네!”

루시테는 빠릿하게 대답하며 소매를 걷어붙였다.

이런 잡일 따위 아무것도 아니었다.

낡아빠진 산 중턱 하우스를 혼자서 고치는 게 힘들다면 더 힘들었지, 이 정도쯤이야.

결코 일을 못해서 우습게 보이지 않을 테다.

‘일을 잘 해내서 황성으로 들어가는 인원에 차출되고 말 테야.’

루시테의 눈빛이 의욕으로 활활 불타올랐다.

* * *

꽃 상점에서 쉴 새 없이 일을 하다 보니 하루하루 시간이 정신없이 흘렀다.

손이 흙과 풀에 베이고 부르트고 멍이 들었다.

루시테는 인생 4회 차의 짬밥으로 거침없이 꽃집 일에 적응했다.

사장은 루시테가 꽃에 대한 지식도 많고, 몸집도 작은데 빠릿하게 일을 잘하는 것을 보고 무척 좋아했다.

역시 이반 영감이 소개시켜 준 사람이라며 이반 영감에게 고마움을 표하기도 했다.

꽃가게의 베테랑 직원 케이트와는 여전히 사이가 좋지 않았으나, 루시테는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할 일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 일주일 후. 꽃 가게 에이프릴은 황성에 들어갈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루시테는 당연히 그 일행에 포함되어 있었다.

루시테는 안나라는 이름으로 꽃가게 행렬에 끼어 황성에 입성하기를 결국 성공해냈다.

검문은 까다로웠지만, 애초에 에이프릴의 이름으로 들어갈 명단이 제출되어 있는 상태였기에 루시테는 무사히 황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안나. 네까짓 촌것이 태어나서 황성 한 번을 들어와 볼 기회가 있을 것 같아? 이게 다 우리 에이프릴 덕이야. 좀 더 감사하게 생각하도록 해.”

“네, 케이트.”

루시테는 대충 대답하며 황성의 문턱을 넘었다.

‘여기서부터가 안티매직의 경계야.’

루시테는 침을 꼴깍 삼켰다. 딱히 숨길 만 한 마법을 두른 것도 아닌데 괜히 긴장되었다.

레일리를 그토록 힘들게 한 안티매직.

루시테는 고개를 높이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반투명한 거대한 구가 사방을 둥글게 뒤덮고 있었으며, 군데군데 빛나는 안개구름 같은 것에서 위협적으로 스파크가 튀었다.

신룡 나브레의 안티매직.

한번 해제되었다가 다시 만들어진 마법진이었어도 그 위용은 여전했다.

마을 한두 개는 합한 것만 한 크기의 황성 아덴티움에서 루시테는 이제 레일리를 찾아야 한다.

루시테는 주먹을 꾹 쥐었다. 이제 진짜 시작이었다.

“참. 너.”

케이트가 루시테를 팔꿈치로 툭 쳤다.

“네. 케이트.”

“우리가 지금 황성에 왜 들어가는지 알기는 아니?”

루시테는 쓸데없는 아는 척을 하지 않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요. 황성의 정원 일을 도와드리러 가는 게 아닌가요?”

루시테는 아무것도 모르는 양 대답했다.

케이트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루시테를 바라보았다.

그럼 그렇지, 촌것이 뭘 알겠니, 하는 케이트의 속마음이 들리는 듯했다.

“우리가 황성에 이렇게 오래 머물 수 있는 기회가 몇 안 되거든? 평소에는 납품이나 하지 우리 같은 것들이 황성을 바라볼 수나 있겠니.”

케이트는 탄식했다.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제대로 남자를 잡아야 돼. 뭐, 너는 얼굴도 반반하니 기사라도 한 명 잡아 결혼하렴.”

케이트는 진지하게 충고했다.

언제나 신분 상승을 꿈꿔온 케이트에게는 이번 황성행이 그녀에게 큰 기회였다.

어차피 일할 사람은 널렸다.

아무리 일손이 부족하다 한들, 그녀가 하지 않으면 누군가는 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저런 꼬맹이라도 일손으로 뽑은 것이 아닌가.

안나는 케이트가 농땡이를 피울 동안 대신 두 배의 일을 해 줄 귀중한 인재였다.

그렇기에 특별히 케이트는 안나에게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기회가 왔을 때 남자를 잡으라고 말이다.

“그래서 말이야. 남자를 꼬시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면.”

케이트가 계속해서 옆에서 수다스럽게 떠들었다.

루시테는 케이트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주위의 건물과 길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레일리.’

어디에 있나요?

루시테의 검은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그날 레일리의 방에 간 날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게다가 사방이 너무 어두워 사물의 위치도 어렴풋할 뿐. 제대로 기억나는 구조물은 없었다.

루시테는 그것이 몹시 아쉬웠다.

“···나! 안나!”

“네, 네?”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그럼요.”

케이트가 루시테를 흘겨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말야. 누구랑 결혼하고 싶냐면, 세드릭 디에고 기사님도 좋아.”

루시테는 케이트의 말을 흘려들으려다가 그녀에게로 고개를 홱 돌렸다.

누구?

‘세드릭 디에고?’

루시테도 아는 이름에 그녀는 케이트를 빤히 쳐다보았다.

케이트는 신이 나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러니까 그분은 말이야. 너는 시골에서 와서 그분 이름도 안 들어봤지? 그분은 이 제국에서 가장 강한 검사님이야. 무려 황실 근위대 화이트 울프의 단장님이시라고.”

루시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아는 이야기였지만 루시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분은 비록 소문은 안 좋지만 나는 그런 것도 다 극복할 수 있어. 부모님이 다 자살해서 죽다니 얼마나 안타깝니. 내가 보듬어주면 디에고 경도 모든 걸 잊고 행복해질걸? 그러면 나는 디에고 백작 부인이 되는 거고. 그 집의 재산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치장하고…….”

케이트가 계속해서 무어라 그녀의 환상을 늘어놓았다.

루시테는 한참 케이트의 말을 들어주다 그녀에게 물었다.

“세드릭 디에고라는 기사님의 부모님이 자살로… 돌아가셨어요?”

“그래. 꽤 유명한 얘기야. 부인이 어렸는데 의처증으로 미쳐버린 백작이 자식과 부인을 학대했대. 종종 광장까지 부인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나와서 수도 전체에 집안 사정이 다 소문이 나 버렸어. 그러다 백작이 갑자기 목숨을 끊었고, 백작 부인도 뒤이어 세상을 등졌지. 그런 집에서 자랐으니 기사님이 정상적이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가.”

케이트는 아련한 눈을 하고 달뜬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미친개면 뭐 어때! 내가 다 보듬어 줄 수 있어. 디에고 경은 나에게서 위로를 얻고 나는 디에고 경에게 부와 명예를 얻고! 이 얼마나 완벽한 계획이야.”

케이트는 상상만 해도 좋은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루시테는 숙연한 얼굴로 케이트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세드릭.’

루시테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세드릭을 떠올렸다.

그가 그런 고통스러운 일을 겪고 자란 줄은 몰랐다.

세드릭.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루시테는 다시는 그를 보지 않으려 했는데.

그의 고통스러운 성장 배경을 들으니 괜히 마음이 약해졌다.

불쌍한 사람.

왜 이렇게 세상에는 불쌍한 사람이 많은지. 모두가 행복할 수는 없는 걸까.

루시테의 검은 눈이 슬픔으로 물들었다.

에단과 리브도. 그리고 노이도.

그리고 그녀 자신도.

모두가 사연이 있었다. 사연을 터놓고 얘기해보자면 결코 우열을 가릴 수 없을 것이다.

에단은 소매치기였지만 동생을 돌보기 위해서라는 이유가 있었다.

어린 시절 부모를 여의고 길거리로 내쫓긴 두 남매.

그들은 몹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터였다.

그리고 노이. 그녀의 소중한 가족.

노이는 용으로 태어나서는 제대로 부모 아래에서 자라지 못하고 몬스터에게서 자랐다.

용으로서 누릴 수 있는 권능을 하나도 배우지 못하고 새 형태의 몬스터가 하던 울음소리를 그대로 따라하던 노이.

그 유일한 부모인 몬스터마저 노이의 눈앞에서 흑마법사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었다.

모두의 인생을 하나하나 생각할수록 루시테는 가슴이 쓰라렸다.

왜 이렇게 고통을 받아야만 할까.

신은 무얼 하길래?

루시테는 고개를 높이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반투명한 마법진 그 너머로 푸른 하늘이 보였다. 시리도록 청명하고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는 여름 하늘.

그 너머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신은 분명 존재하는데 왜 그 은총이 우리에게 닿지 않는 걸까.

루시테의 눈동자가 슬퍼졌다.

‘그래서 나는 성녀가 되지 않을 거야.’

절대로.

루시테는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신은 불공평하다. 적어도 루시테가 느낀 바로는 그랬다.

그러니까 불공평한 신의 축복을 받은 성녀 따위 절대 되지 않으리라고, 루시테는 몇 번이고 생각했다.

‘레일리.’

어디에 있나요?

루시테의 눈동자가 하염없이 건물과 사람들 틈 사이에서 레일리의 흔적을 찾아 헤맸다.

루시테의 목적은 오로지 하나뿐.

레일리가 무사한 것을 그녀의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뒤에 원래의 평온한 삶으로 돌아가는 것.

루시테의 단호하게 다물린 입술에 결연한 의지가 배어났다.

“안나! 뭐 하고 있어! 빨리빨리 오지 않고!”

케이트가 신경질적으로 안나에게 손짓했다.

“가요!”

루시테는 상념을 멈추고 얼른 에이프릴 일행이 있는 곳으로 달렸다.

일터로 도착한 루시테의 눈앞에 광활한 정원이 펼쳐졌다.

아덴티움의 자랑인 여름 정원이었다.

“할 일이 많다! 숙소에 짐을 놔두고 바로 다시 모인다. 알았느냐?”

에이프릴의 사장 로난 에이프릴이 명령했다.

루시테는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나 넓은 정원이라니. 정말로 할 일이 많긴 많을 것 같았다.

에이프릴 일행은 황성의 안내자로 붙은 하인을 따라 숙소로 안내받았다.

숙소는 정원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하인들 숙소 중 한 귀퉁이였다.

“자! 짐 풀었지?! 어서 가서 움직이자고! 시간이 없다!”

로난이 밖에서 쩌렁쩌렁 외쳤다.

루시테는 황급히 짐을 내려놓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후 달려 나갔다.

레일리를 찾는 것이 목표였지만, 대충 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를 소개해준 이반 영감에게 민폐였으니.

루시테는 에이프릴 일행을 따라 소매를 걷어붙이고 광활한 여름 정원으로 향했다.

* * *

뙤약볕이 내리쬐는 황성 안에서 루시테는 하루 종일 정원 일을 했다.

꼼짝없이 정원에 묶여 해가 저물 때까지 다른 일이라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꽃을 새로 심고 정원수를 다듬는 일은 생각보다 고되었다.

해가 넘어간 지 한 참 후의 저녁쯤 돼서야 루시테는 자유 시간을 받을 수 있었다.

케이트는 그녀의 목표인 신랑감을 찾으러 나간다며 냉큼 자리를 비웠다.

루시테는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몰래 가져온 비장의 준비물을 꺼냈다.

황성의 하녀복.

황성 안으로 들어오기 전 혹시 몰라 준비했던 의상이었다.

나름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해 보고 준비한 것 중 하나인데 하녀복은 준비하길 정말 잘한 것 같았다.

루시테는 하녀복을 입고는 비교적 큰 무리 없이 하녀들 사이로 섞여들었다.

복도를 걸어가도 그냥 좀 어린 말단 하녀로 봤을 뿐, 누구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루시테는 그날 밤 밖을 한참을 배회하며 레일리가 있을 만한 곳을 살피러 다녔다.

그러나 레일리는 대체 어디로 꽁꽁 숨어 버렸는지, 그의 흔적을 찾기란 도통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낮에는 정원 일, 밤에는 레일리 찾기.

그 짓을 삼 일 내내 계속해서 이어나가려니 점점 몸이 못 버틸 지경이었다.

‘이러다 아무 소득 없이 돌아가게 되면 안 되는데.’

루시테는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어두운 얼굴로 먼 곳을 바라봤다.

레일리를 만나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한 일이 모두 헛수고로 돌아간다.

수척한 루시테의 입안이 초조함으로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대신관이 방문하기까지 앞으로 닷새.

루시테에게 허락된 시간도 앞으로 닷새였다.

이튿날 아침, 루시테와 에이프릴 일행이 여느 때처럼 일손을 모아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을 때였다.

여름 정원은 에이프릴 일행만 손대는 것이 아니라 황실의 정원사와도 함께였는데, 주로 에이프릴 사람들이 일을 했고 황실의 정원사는 관리를 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 트러블이 발생했다.

“일을 이렇게 하면 어떻게 하나! 아무리 오합지졸을 모아 놓은 곳이라도 그렇지, 이건 거의 한 구획을 통째로 못 쓰게 만든 셈이로구나!”

황실의 정원사가 벌컥 화를 냈다.

“저희는 시키는 대로 했습니다만 이제 와 그러시면 어떻게 한단 말입니까? 분명 정원사님께서 이렇게 하라 명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에이프릴의 사장 로난이 조근조근 얘기하며 문제를 해결해보려 했다.

그러나 황실 정원사는 막무가내였다.

“네놈들이 이제는 하극상을 하는 거냐?! 감히 네놈들의 실수를 황실 정원사인 내게 덮어씌우려 해?!”

황실 정원사는 길길이 날뛰었다.

그의 말을 주장하자면 이랬다.

그가 말하는 여름 정원의 구획은 주신을 상징하는 성화 벨리스로 장식하기로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청 업체인 에이프릴의 실수로 벨리스가 아닌 다른 꽃으로 장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말도 안 돼.’

루시테는 피곤한 얼굴로 콧잔등을 찡그렸다. 에이프릴은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다.

애초에 황실 정원사가 착각하여 실수한 일을 지금 에이프릴에게 덮으려는 것밖에 안 되는 상황이었다.

“네 이놈들을 당장!”

황실 정원사가 고래고래 고함을 쳤다. 주위에 점점 구경하는 눈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황실 정원사는 그의 실수를 루시테 일행에게 덮어씌우려 발악했고, 에이프릴 일행은 아니라고 주장하기에 바빴고.

결론이 나지 않는 갑론을박이 계속되는 상황이었다.

그때 웬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무슨 일이냐?”

“!”

사람들은 목소리의 주인을 보자마자 머리를 숙였다.

“이크릭스의 작은 태양,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사람들의 인사에 루시테도 놀라 황급히 예를 갖췄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황태자의 등장에 사방에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루시테는 로난과 에이프릴 일행 틈에 숨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저 사람이 황태자로구나.’

1황자 알렉산더.

책의 삽화에서 본 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붉은 머리칼에 녹색 눈동자. 붉은 머리칼은 책에서 봤던 것보다 더 갈색에 가까운 탁한 색이었다.

레일리는 책보다 훨씬 실물이 잘났는데, 황태자는 책이 오히려 많이 미화된 것 같았다.

성미가 급해 보이는 눈동자와 치켜 올라간 눈매, 매부리코는 어디로 보나 잘생겼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저 사람이 레일리와 정쟁 관계에 있는 사람이란 말이지.’

루시테는 가만히 알렉산더를 관찰했다.

알렉산더가 본인의 출생이 훨씬 잘났으면서 왜, 서자 출신인 레일리에게 기를 쓰고 정쟁을 벌이는지 루시테는 어느 정도 알 것 같았다.

이런 거 저런 거를 다 떠나서 출생만 제외하면 레일리가 훨씬 잘났다.

외모는 당연히 레일리가 월등하게 잘났고, 마법 능력도 잘났다. 레일리는 말씨도 곱고 온화하고, 부드럽고, 친절하고……. 등등.

루시테의 마음속에서 레일리에 대한 칭찬이 끝도 없이 나왔다.

“무슨 일인 거냐. 설명하라.”

알렉산더가 사나운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 그게 말입니다.”

황성의 정원사가 황태자에게 본인이 유리한 쪽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아주 괘씸한 놈들이로구나.”

“아닙니다! 황태자 전하! 저희에게도 설명할 기회를 주십시오.”

로난이 목소리를 높였다. 긴장했는지 그의 말이 살짝 떨렸다.

로난의 긴장에 루시테도 덩달아 긴장되기 시작했다.

늘 자신만만하던 에이프릴의 사장 로난이 긴장하다니.

잘못하면 생각보다 일이 커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루시테의 마음속에 스멀스멀 올라왔다.

“무엄하다! 감히 황태자 전하의 허락도 없이 말을 하다니!”

황태자를 등에 업은 황성 정원사가 기세등등하여 외쳤다.

“황태자 전하, 제발 설명할 기회를 주십시오!”

로난이 간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알렉산더가 탁한 초록빛 눈을 사납게 번뜩였다.

“어디 한번 말해 봐라.”

“가, 감사합니다! 전하!”

로난은 허리 숙여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그들이 얼마나 억울한 상황인지를 피력했다.

로난이 모든 얘기를 마치고 기대 어린 얼굴로 알렉산더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알렉산더가 입꼬리를 올려 비웃음을 지었다.

그 표정이 얼마나 악독한지, 사악하기 그지없었다.

“저들이 거짓말을 하여 감히 황성을 능멸하려 드는군. 모조리 잡아다 옥에 가둬라!”

“예! 황태자 전하!”

알렉산더의 뒤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루시테 일행이 있는 쪽으로 우르르 몰려왔다.

“황태자 전하! 억울합니다! 황태자 전하!”

로난은 사색이 되어 알렉산더를 향해 외쳤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사악하게 웃으며 로난의 말 따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쓰레기.’

루시테는 주먹을 꽉 쥐고 부들부들 떨며 알렉산더를 노려보았다.

그때 문득 루시테는 알렉산더 근처에 있는 기사들 사이로 한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

입이 벌어지고 루시테의 눈이 크게 뜨였다.

황태자와는 다른 선명한 붉은 머리칼과 보석 같은 푸른 눈동자. 이안과 닮은 얼굴.

루시테가 못 알아볼 리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곳에서 마주칠 줄이야.

루시테는 황급히 몸을 숙여 일행의 뒤로 몸을 숨겼다.

‘어쩌지. 봤을까?’

루시테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내밀고 세드릭이 자신을 알아봤는지 확인할 용기는 없었다.

루시테는 몸을 숙인 채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었다.

곧 황태자의 기사들이 루시테와 일행들을 연행해 갔다.

무장한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감옥으로 향하니 이렇게 처량하고 인생이 기구할 수가 없었다.

루시테가 황성에 들어와서 한 거라곤 밤낮없이 일한 것밖에 없었다.

물론 밤에 하녀 복장을 하고 돌아다니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쁜 짓을 저지른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일만 했는데도 감옥에 갇히다니. 황당하기 이를 데 없었다. 황성은 이렇게 불공평한 곳이란 말인가.

메이븐보다 더한 것 같았다. 특히 황태자의 판단력은 끔찍했다.

황성에 좋은 일을 해주기 위해 들어와서 생고생을 한 사람들을 말도 제대로 안 들어보고 옥에 가두다니.

황태자는 생각과 법도라는 게 없나?

루시테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그 싹퉁 바가지에 재수 없는 이안이라도 이러지는 않았다.

이안은 매사에 신중한 편이었고, 나름 자비를 베풀 줄도 알았고, 무엇보다 아랫사람에게는 공정하게 굴었다.

똑같은 황태자인데 이리도 다르다니. 루시테는 마음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철컹.

루시테와 에이프릴 일행 앞에서 기사는 쇠창살 문을 보란 듯이 닫았다.

지하 감옥은 작게 뚫린 창으로 희미한 빛이 들어올 뿐 어두웠다. 습하고, 축축했고 더러운 냄새가 났다.

“이게 뭐예요!”

울그락불그락한 얼굴로 바들바들 떨고 있던 케이트가 버럭 화를 냈다.

“저는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이런 곳에 갇히다니요! 로난! 어떻게 좀 해봐요!”

케이트는 자신이 이런 곳에 갇힌 게 믿기지 않는 듯 비명처럼 외쳤다.

“곧 풀려날 거다. 너무 걱정하지 마라.”

로난이 확신이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 곧이 언제인데요! 네? 로난!”

“그래요! 로난, 이건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던 다른 에이프릴의 직원들도 로난에게 따졌다.

그러나 여기에서 가장 억울한 건 루시테였다.

루시테는 원래 에이프릴의 직원도 아닌데다가, 오로지 황성에 들어올 수단으로 잠깐 일을 한 것뿐인데. 이렇게 발목이 잡혀 버리다니.

루시테는 감옥의 쇠창살에 기대어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에이프릴의 직원들이 앞다투어 저희의 사장인 로난에게 따져대느라 감옥 안이 몹시 시끄러웠다.

그 시끄러운 속에서 루시테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황태자도 머리가 있는 놈이라면 아마 무고한 그들을 계속 가둬놓지는 않을 것이다.

대신 황성에서 대금을 받기는 어려워질 수 있어, 에이프릴은 큰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것이다.

로난에게는 안 된 일이지만 사실은 루시테와 크게 상관이 있는 일은 아니었다.

루시테는 에이프릴로부터 일당을 안 받아도 딱히 상관은 없었다.

물론 일한 시간은 아까웠지만, 애초에 황성에 들어오겠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으니 돈에 미련은 없었다.

여기에서 문제는 언제까지 갇혀 있어야 하냐는 것이었다.

루시테에게는 찾아야 할 사람들이 있었고, 집에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지긋지긋한 아덴티움.’

이제 황성에 들어온 건 고작 두 번째였지만, 올 때마다 어디에 갇히거나 안 좋은 일만 일어나는 것 같았다.

“하아…….”

루시테는 괜히 마음이 심란해져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을 무릎에 푹 묻고 눈을 감았지만 여전히 에이프릴의 직원들이 싸우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가슴이 답답했다.

* * *

지하 감옥에 갇힌 지 하루가 가고, 이틀이 지났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를 모를 정도로 지하 감옥 안은 어두웠다.

때마다 간수가 가져다주는 딱딱한 빵 덩어리를 먹을 때에야 루시테는 지금이 언제인지를 짐작했다.

처음에는 시끄러웠던 사람들도 차츰 조용해졌다.

그들은 저마다 심란한 얼굴로 말없이 각자 구석을 차지하여 앉아 있기만 했다.

간간히 케이트가 훌쩍이는 소리가 조용한 공간을 울렸다.

“이게 뭐야……. 나는 백작 부인이 되어야 하는데 이게 뭐야…….”

케이트는 아직도 세드릭의 부인이 되기를 꿈꾸는 듯, 헛소리를 중얼거렸다.

루시테는 가만히 앉아서 그저 조용히 기다렸다.

어차피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황태자의 절대적인 권력 앞에서 힘없는 그녀가 뭘 할 수 있겠는가?

루시테는 소름 끼치는 무기력함 속에서 그저 기다리기만 하는 것에 익숙했다.

누구보다 능숙하게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 속에서 인내할 수 있었다.

루시테의 검은 눈이 깊게 침잠했다.

앞으로 이틀. 헤카레트의 대신관이 아덴티움에 당도하기 고작 이틀을 앞두고 있었다.

문득 끼익 지하 감옥의 입구가 열리는 소리가 났다.

철컹.

이중으로 앞을 막고 있는 육중한 쇠창살이 열렸다.

횃불에 비친 크고 긴 그림자가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 안으로 슬그머니 비집고 들어왔다.

타오르는 뷹은 머리칼의 빛이 언뜻 불빛에 일렁였다.

* * *

“폐하! 어떻게 그러실 수가 있단 말입니까!”

알렉산더는 절규하듯 황제 발칸트리히 2세를 향해 외쳤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게 이러실 수는 없습니다!”

알렉산더는 그 드높은 자존심을 굽히고 황제의 앞에 털썩 무릎을 굽혔다.

“너는 네 알량한 생각 때문에 이크릭스의 명예를 저버렸다! 아덴티움에 헤카레트의 끄나풀이 발을 디디는 것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그게 중요한 것입니까? 아버지! 제가 얼마나 확신이 필요했으면 그랬겠습니까!”

“확신? 대체 무슨 확신 말이냐!”

“아버지께서 그 자식을 데리고 오시지 않았습니까! 신룡의 유산을 사용하셨잖아요! 저를 황태자 위에서 밀어내려 하셨던 게 아닙니까?!”

알렉산더가 고함치는 소리가 황제의 집무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알렉산더와 똑 닮은 황제가 알렉산더의 말에 뒷목을 잡고 책상을 짚었다.

“이런……. 멍청한!”

황제는 이를 갈 듯 내뱉었다. 그가 가장 총애하는 아들이었다.

그를 쏙 빼닮은 외모와 성격, 배포까지. 은빛 유전만 없다 뿐이지 다른 모든 게 황제의 판박이였다.

황제는 알렉산더를 예정대로 황위에 올릴 생각이었으며 카일러스를 데려온 것은 순전히 알렉산더를 위함이었다.

그런데 저런 멍청한 자식이 혼자 망상을 하여 헤카레트의 대신관을 끌어들이기까지 한 것이다.

아무리 그가 총애하는 아들이라도 황제는 이것까지는 못 참았다.

황제는 알렉산더가 벌인 불명예스러운 일에 치를 떨었고, 그의 멍청함에 탄식했다.

어찌 이렇게 생각이 짧을 수가.

황제는 분노가 일어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숨을 한 번 참았다.

“아들아, 지금이라도 다시 생각해 보거라. 너의 잘못된 판단을 인정하고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 놓으면 나도 이번 한 번만은 참고 넘어가마.”

평소 황제의 성정을 생각하면 굉장히 관대한 처사였다.

화가 나면 뭐라도 부숴야 진정이 되는 황제가 그가 총애하는 아들을 위해 마지막으로 설득하고 있었다.

“아버지, 그렇다면 헤카레트 대신관 앞에서 황태자 위를 절대 바꿀 생각이 없다고 맹세해 주십시오! 제가 아버지께 원하는 것은 그것 단 하나뿐입니다!”

알렉산더는 황제를 향해 절규했다.

하나는 보고 둘은 보지 못하는 알렉산더.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황제가 그에게 갖고 있던 마지막 애정이 식어간다는 것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네가…… 네가 정녕 할 말이 그것뿐이냐?”

황제가 어찌나 화가 났는지 목소리를 떨었다.

두렵거나 슬퍼서 떤 것이 아니다. 분노가 극도로 치달아 떠는 것이었다.

황제의 은빛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뜨거운 것과 가장 먼 색인데도 금방이라도 불타오를 것만 같았다.

“그렇습니다! 폐하. 저와 당장 약조해주십시오. 헤카레트 대신관 앞에서 황태자 위를 절대 바꾸지 않겠다고 말입니다!”

하나에 꽂힌 알렉산더는 제 생각을 바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하고자 하는 것은 밀고 나가야만 하는 성미였다.

그리고 그 성미를 가장 드러내서는 안 될 사람에게 가감 없이 퍼붓고 있었다.

이 나라의 지존인 황제 발칸트리히 2세에게.

“네가 정녕 그렇게 나오는구나.”

황제의 은빛 눈동자가 싸늘하게 식었다.

너무 분노한 나머지 황제의 뜨거웠던 눈빛은 이제 오히려 차가웠다.

그에게 남아 있던 아들을 향한 마지막 한 조각의 애정마저 거두어졌다.

황제는 아들을 총애했지만, 제 말을 끝까지 거스르는 자까지 품을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알렉산더는 황제의 성품을 그대로 닮았다.

그 말은, 황제가 알렉산더보다 더한 성미를 지니면 지녔지 덜 하지는 않다는 뜻이었다.

“알렉산더. 내가 약조하지.”

황제의 목소리가 분노로 그르렁거렸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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