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약조하시는 겁니까?!”
알렉산더의 눈빛이 일말의 기쁨과 환희로 물들었다.
그러나 그 희망의 불씨는 뒤이은 황제의 말에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황제가 단호하게 말했다.
“헤카레트의 방문은 대외적 차원에서 이제 신전과 관계를 개선해 나가기 위한 것으로 한다. 그리고 내가 너를 위해 약조할 일 따위는 결단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약조하지.”
황제가 약조를 언급하며 사악하게 입술을 올렸다.
황제의 마음속에 움직이지 않던 저울이 툭 기울었다.
절대로 바뀌지 않을 예정이었던 황태자 위가 지금 막 황제의 마음속에서 다른 가능성을 열었다.
더 능력이 있고, 현재 그의 말을 잘 듣고 있는 또 다른 아들에게로.
“어, 어떻게!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실 수가 있습니까!”
알렉산더가 눈을 어찌나 부릅떴는지 눈에 핏발이 섰다.
금방이라도 피가 흐를 것처럼 그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깨져버렸다. 알렉산더의 최후의 보루가.
그리고 그가 황제에게 갖고 있던 마지막 믿음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알렉산더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황제를 노려보았다.
황제는 처음부터 자기를 갈아치울 생각이었던 게 분명하다.
알렉산더는 제 실수를 깨닫지도 못하고 말도 안 되는 의심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알렉산더의 오해로 비롯한 황제와 황태자 사이의 불신의 골은, 이제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마른 볏짚 더미에 던져진 작은 불씨가 이제는 온 들판에 번져 모든 것이 불길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 * *
하늘이 우중충하더니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비는 멈추지 않고 세차게 쏟아졌다. 장대비였다.
우르릉 쾅쾅.
쉴 새 없이 천둥이 쳤고 이따금 눈이 시리도록 흰 번개가 황성의 첨탑 위로 내리쳤다.
거대한 아덴티움을 둘로 쪼개버리기라도 할 것 같은 번개였다.
이제 내일이면 헤카레트의 대신관이 방문하는데 날씨가 영 좋지 않았다.
마치 죽음의 사신을 부르듯, 헤카레트 대신관의 방문을 저주하듯.
불길한 기운을 품은 비가 세차게 내렸다.
“디에고 백작. 거기에 있는가.”
습기가 축축하게 내려앉은 적막한 집무실 안.
알렉산더가 낮은 목소리로 세드릭 디에고를 불렀다.
집무용 탁자 위에 올려놓은 작은 등만이 어둠을 희끄무레하게 비추었다.
“부르셨습니까.”
세드릭이 여느 때와 같은 뚱한 얼굴로 황태자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황태자는 모두를 물리고 세드릭과 독대를 했다.
“백작은 내게 충성의 맹세를 했지. 내가 기사의 도를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충성의 맹세는 진심이었겠지?”
“그렇습니다.”
오로지 루시를 위해 한 충성의 맹세.
헤카레트의 대신관을 끌어들이겠다는 목적을 위해 그는 황태자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니 황태자에게 한 충성은 진심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원해서 한 맹세이니.
“그렇다면 날 위해 어디까지 할 수 있지?”
알렉산더의 탁한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의 가래 낀 목소리에 세찬 빗소리가 더해져 더욱 음험한 분위기를 풍겼다.
“뭐든지. 주군께서 원하시는 거라면.”
세드릭의 심해처럼 깊고 어두운 눈빛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그래. 내가 믿을 자는 백작, 그대뿐이다.”
알렉산더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대는 그 누구의 사람도 아니었지만 스스로 다가와 내 사람이 되었지. 그리고 이 제국의 가장 강한 검사이기도 하다.”
알렉산더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세드릭은 그저 어두운 눈동자를 알렉산더에게 고정한 채 그의 말을 기다렸다.
“황제를 죽여라.”
“!”
엄청난 말이 알렉산더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세드릭의 한쪽 눈썹이 휙 치켜 올라갔다.
“내 아버지. 발칸트리히 2세를 죽이란 말이다.”
알렉산더는 확인 사살을 하듯 한 번 더 강하게 얘기했다.
세드릭은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오려 했다.
그토록 자신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알렉산더가 은밀하게 부르기에 무슨 얘기를 하려나 했더니.
한참 너를 믿느니 어쩌느니 하는 헛소리도 장황하게 지껄이기에 심상치 않다 싶기는 했더니.
이따위 말이나 하려고 그를 불렀단 말인가.
세드릭은 미간을 좁혔다.
황제를 죽이라고.
저 머저리의 머릿속에서 나온 발상다웠다.
“왜 그러지? 겁을 먹은 건가? 그대는 내게 충성의 맹세를 하지 않았나? 헤카레트 대신관을 약조한 대로 불러들였다. 그대는 내게 갚아야 할 빚이 있다.”
알렉산더가 혹여 세드릭이 제 말을 듣지 않을까 싶어 구차하게 주절거렸다.
세드릭은 픽. 실소를 머금었다.
황제가 그렇게 제 아들을 위해 레지스탕스를 비롯한 반란 세력을 진압하겠다고 날뛰었는데.
진짜 반란 세력이 여기에 있었다. 제 아들.
“백작? 너무 놀라서 얼어버린 건가? 내 말을 들은 게 맞는 겐가?”
알렉산더가 초조해하며 세드릭을 불렀다.
“그 명 받들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마침내 세드릭은 황태자를 향해 대답했다. 그의 아비를 죽이려는 패륜아를 돕겠다고.
이미 황태자파에 선 이상 돌이킬 수 없었다.
세드릭은 황태자와 약조를 했고 이제 그에게 그 빚을 갚을 시간이었다.
“제가 황제를 죽이겠습니다.”
번쩍.
집무실의 창문이 내리꽂히는 번개로 인해 순식간에 환해졌다 다시 어두워졌다.
그 섬뜩한 번개가 잔악한 얼굴을 한 세드릭을 환히 드러냈다 사라졌다.
그 얼굴을 목도한 황태자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
미친놈.
이크릭스의 미친개.
손에 피를 묻히고 즐거워하는 미친 종자.
그 별칭들이 단 한 명을 가리키는 데는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알렉산더는 섬광처럼 느꼈다.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었고, 알렉산더는 후회하지 않았다.
황제만 죽으면 그는 바로 황제가 되는 것이다.
‘쉬운 일이었어.’
황제만 죽이면 되는데 내가 너무 돌아갔잖아?
알렉산더가 섬뜩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처음부터 이랬어야 했다. 처음부터.
번쩍.
창문 밖으로 또 번개가 내리꽂혔다. 알렉산더의 탁한 눈빛이 기묘하게 빛났다.
세드릭이 나간 뒤 잠시 후.
“어떠냐. 성공하겠느냐?”
알렉산더의 조용한 목소리에 한쪽 벽면이 스르르 열렸다.
두터운 로브를 둘러쓴 왜소한 몸집의 사내가 소리도 없이 걸어 나왔다.
여름인데도 사내는 더운 기색 하나 없었다. 사내는 오히려 스산한 기운을 내뿜었다.
오싹한 한기가 황태자 알렉산더를 건드렸다.
알렉산더는 흠칫 떨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두터운 로브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그는 알렉산더가 매수한 흑마법사였다.
황제가 척결하고자 한 흑마법사와 은밀히 내통하는 자. 그 근원이 바로 황태자였다.
“이로써 저주가 발동했습니다.”
사아아.
마치 뱀이 기어가는 것만 같은 스산한 목소리가 두터운 로브의 사내에게서 나왔다.
“세드릭 디에고는 저주에 따라 전하께서 원하시는 그 일을 이룰 것입니다.”
“좋아. 수고했다.”
알렉산더가 사악하게 웃었다.
알렉산더는 세드릭 디에고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니 세드릭이 약조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리가 없었다.
세드릭이 황성을 벗어난 그때. 안티매직의 권역을 벗어난 때, 이미 황태자가 붙인 흑마법사에 의해 저주의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천천히 맞물리던 톱니바퀴가 이제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 이상 멈출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빗속을 뚫고 루시테가 갇혀 있는 곳으로 향하는 세드릭의 붉은 머리칼이 핏줄기처럼 선득했다.
세드릭의 걸음이 빨라졌다.
* * *
루시테는 철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철창을 사이에 두고 안과 밖으로 기묘한 공기가 흘렀다.
다른 사람들은 억울함을 호소하다 지쳐 잠들어 있었다.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따금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였다.
세차게 내리는 비가 너무 거세어 오히려 정적에 휩싸인 것처럼 느껴졌다.
루시테는 가만히 숨을 죽이고 철창 밖 어두운 지하 감옥의 복도를 응시했다.
누군가 들어왔다. 이 어둡고 축축한 곳에.
잠시 후 묵직한 발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발소리의 주인은 정확히 루시테와 에이프릴 일행이 들어 있는 철창 앞에서 발을 멈췄다.
루시테는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동자.
오롯이 그 안에 루시테만을 담고 있는 푸른 눈동자가 루시테를 빤히 응시했다.
마치 맹수의 그것 같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시린 빛을 뿜었다.
“역시 네가 맞았군.”
세드릭은 루시테와 눈을 마주치곤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낮고 굵직한 목소리가 거센 빗소리에 묻혀 잔잔하게 흩어졌다.
루시테는 차마 그의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였다.
평소의 그녀 같았다면 세드릭에게 한마디 했을 것이다.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얘기했는데 왜 자신의 앞에 나타난 거냐고.
그러나 차마 그런 말이 안 나왔다.
세드릭의 불행한 과거를 알게 되어서 그런 걸까.
눈앞에서 자살한 아버지와 목을 매달아 죽은 어머니.
그가 얼마나 불우한 과거를 보냈을지.
루시테는 그의 얼굴을 보니 또 떠올랐다.
“왜 황성에 들어왔지? 이렇게 위장해서 오지 않았어도 원한다면 내가 데려왔을 텐데.”
세드릭이 낮은 목소리로 다시 읊조렸다.
“지하 감옥에 갇히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금방 풀려날 거라고 생각해요.”
“그럴 리가. 네가 황태자를 한참 모르는군.”
“그럴 지도요.”
루시테의 목소리가 시무룩해졌다.
세드릭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짤랑.
열쇠 소리가 맑게 울렸다.
지하 감옥에 어울리지 않는 청명한 소리에, 지쳐서 눈을 감고 있던 에이프릴 일행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그건……?”
“열쇠다. 황태자는 너희를 가둔 건 신경 쓰지도 않을 거다. 풀어줄 테니 나와.”
세드릭이 감옥의 문을 열었다.
철커덩.
빗장이 돌아가는 소리가 나며 그토록 끔찍하게 그녀와 에이프릴 일행을 가두고 있던 쇠창살이 열렸다.
“세, 세드릭 디에고 백작님?!”
그 누구보다도 가장 풀이 죽어 있던 케이트가 세드릭을 보곤 놀라 비명처럼 외쳤다.
“디에고 백작님이 어떻게 여기에?!”
케이트는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세드릭에게로 다가왔다.
“저를 구하러 와 주신 건가요?”
케이트는 놀람과 감동이 점철된 얼굴로 목소리를 떨었다.
“세, 세드릭 디에고 백작님이 나를 위해…!”
루시테는 케이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뒤로하고 감옥 저 안쪽, 침음에 잠겨 있는 로난에게 다가갔다.
로난은 실의에 젖어 힘들어하다가 잠시 선잠에 빠져 있었다.
루시테는 로난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아저씨. 로난 아저씨.”
“으음…?”
로난이 피곤에 절은 얼굴을 들었다.
“로난 아저씨. 저희 이제 나갈 수 있대요. 얼른 일어나세요.”
“그, 그게 정말이냐?”
로난은 바로 잠에서 깨어 눈을 크게 떴다.
로난을 깨우니 일이 수월해졌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다른 이들을 모두 일으켰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세드릭을 따라 지독한 지하 감옥을 나올 수 있었다.
“하아…….”
한숨과 함께 거세게 내리는 비 사이로 입김이 나왔다. 여름비와 함께 불어온 바람이 찼다.
오랜만에 코끝에 닿은 바깥의 공기가 선선했다.
루시테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감옥 밖의 공기를 만끽했다.
“디에고 백작님! 저는 정말 백작님께서 저를 구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케이트는 몸을 배배 꼬며 세드릭의 옆에서 그의 관심을 얻기 위해 애를 썼다.
루시테는 케이트가 세드릭을 얼마나 만나고 싶어 했으며, 얼마나 그에게 관심을 갖고 있는지 익히 들어서 아는 바.
루시테는 세드릭과 케이트에게서 멀리 떨어져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세드릭이 루시테와 에이프릴 일행을 데리고 도착한 곳은 루시테도 익히 아는 곳이었다.
고작 이틀을 머물렀던 곳일 뿐인데 황성에서 처음으로 머물렀던 곳이라 그런지 눈에 익었다.
황제가 레일리를 잡으러 온 날.
루시테가 세드릭에게 달랑달랑 끌려와 갇혀 있던 바로 그 외딴 건물이었다.
“오셨습니까. 백작님.”
세드릭이 미리 명령해두었던 건지. 그들이 도착하자 하녀 두 명이 나타나 그들을 맞았다.
“씻을 물과 식사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따라오십시오.”
하녀들의 말에 에이프릴 일행은 환호했다.
그들은 즐거운 발걸음으로 하녀들의 뒤를 따랐다.
루시테도 그 뒤를 함께 하는데, 세드릭이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
“잠깐 나와 얘기 좀 하지.”
루시테는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러나 순순히 그의 말을 따르기로 했다.
고작 얘기하자는 것뿐 세드릭이 해코지를 하겠다고 한 것도 아니었으니.
그리고 지금 루시테와 일행을 꺼내준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세드릭이다.
루시테는 세드릭에게 어느 정도 고마움을 느꼈다.
그와 따로 이야기하는 것쯤 얼마든지 가능했다.
“뭐야?! 안나 너 어디가?”
케이트가 하녀들을 따라가다 말고 매서운 눈길로 루시테를 쏘아보았다.
케이트는 손을 뻗어 루시테의 손목을 꽉 잡았다. 절대 루시테를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를 담아.
“백작님과 단둘이 어딜 가느냔 말이야!”
케이트가 루시테를 붙잡고 가려는 길을 방해하자 세드릭이 미간을 좁혔다.
슬금슬금 그의 한쪽 눈썹이 기분 나쁘다는 티를 내듯 치켜 올라가려 했다.
“케, 케이트. 아무것도 아니에요.”
루시테는 케이트의 손에서 제 팔목을 확 뺐다. 케이트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졌다.
“정말 별거 아니니 가서 씻어요. 저한테 따로 묻고 싶은 게 있으시대요.”
“너한테 들을 말이 뭐가 있다고 묻기는 물어? 백작님! 저! 제가 있잖아요.”
케이트가 제 가슴께를 손바닥으로 팡팡 두드렸다. 세드릭의 얼굴이 점점 사나워졌다.
“백작님! 그 촌것은 내버려 두고 저와…!”
“너에게 볼일 없으니 꺼져.”
세드릭은 더 이상 참지 않았다. 그는 그의 성질대로 험한 말을 내뱉었다.
“네… 네?”
케이트가 일순 당황했다.
루시테는 한숨이 나오려 해 이마를 짚었다.
케이트는 그렇게도 세드릭이 미친 사람이라고 떠들어 댔으면서, 정작 세드릭이 어떤 성격인지를 모르다니.
“지금 저한테 뭐라고 하신…?”
“닥치고. 꺼지라고.”
세드릭이 살벌한 얼굴로 손을 휘휘 저었다. 케이트는 놀라 돌멩이 마냥 딱딱하게 굳었다.
세드릭은 그런 케이트를 내버려 두고 루시테에게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따라와라.”
“네에…….”
루시테는 떨떠름하게 대답하며 세드릭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뒤통수로 따가운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다.
루시테는 애써 무시했다. 어차피 케이트가 노려보고 있을 게 뻔했다.
루시테는 묵묵히 세드릭을 따라갔다. 그가 한 방의 문을 열었고 루시테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낯익은 방이었다.
세드릭과 그녀가 이틀이 조금 넘는 시간동안 머물렀던 방.
세드릭은 뭐 하러 그녀를 이곳으로 데려온 것일까. 뭐, 추억을 되새기기라도 하려고?
새삼스럽게 루시테는 세드릭이 불편해졌다.
그리고 그때 그가 자신에게 했던 말이 다시 상기되기 시작했다.
그가 뭐라고. 자신이 그녀의 저주를 풀어주니 마니 했던 그 불편한 말들.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루시테의 눈빛이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루시. 내일 헤카레트의 대신관이 온다. 내가 미리 따로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약조를 받아두었다. 내가 네 저주를,”
“세드릭!”
루시테는 세드릭이 채 말을 다 하기 전에 그의 말을 잘랐다.
그렇게까지 얘기했는데 아직도 포기하지 못했다는 게 너무 답답했다.
분명히 싫다고 말을 했는데도 이러다니.
“제가 말했잖아요. 그 일에 대해서는 상관하지 말라고. 제가 알아서 하겠다구요.”
“너는 저주를 풀어야 행복할 수 있다. 그 조그만 몸에 갇혀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제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요?”
루시테는 기가 찼다.
“대체 뭘 할 수 없나요? 저는 저주를 풀지 않아도 행복해요. 이전보다 훨씬 많은 것을 하고 살고 있다고요.”
“아니, 그렇지 않아.”
세드릭이 단호하게 대꾸했다.
그는 루시테의 저주를 풀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그녀의 말은 전혀 들을 생각이 없었다.
“너는 내가 행복하게 만들어줄 거야. 저주를, 저주를 풀어야만 행복해질 거고. 그건 오로지 나만 도와줄 수 있어.”
그의 푸른 눈이 탁하게 번뜩였다.
오로지 자신만이 저 소녀의 구원자가 될 수 있다.
어머니는 구원하지 못했지만 저 소녀는, 저 소녀는 구원해 낼 수 있다.
반드시 하고 말 것이다.
그 생각이 세드릭의 머릿속을 새까맣게 채웠다.
“필요없다구요, 세드릭! 제발 저를 그냥 좀 내버려두세요. 부탁이에요.”
“루시. 대체 왜 그런 반응이지? 나는 이해가 안 가.”
세드릭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루시테가 그에게 화를 내는 이유를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냥 나를 의지하고 모든 걸 내게 맡겨라. 그러면 편할 텐데.”
세드릭의 푸른 눈이 음험한 빛을 띄며 루시테에게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언제부터 집착이 시작되었는지, 왜 시작되었는지 세드릭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루시 필드가 그의 곁에 있기를 바랐다.
그녀가 곁에 있으면 치유되고 해방되는 것 같았다.
어린 시절부터 그를 괴롭혀 왔던 불행에서 건져지는 느낌이었다.
그를 얽어매는 모든 고통스러운 기억을 이 자그마한 소녀가 정화해주는 것만 같았다.
‘루시 필드.’
그녀는 세드릭의 구원자였다.
세드릭은 그녀를 온전히 소유하고 싶었다.
그것을 방해하는 적들이 너무 많았다.
장애물을 전부 치워버리고 그녀로 하여금 오로지 그만 의지하게 만들고 싶었다.
저주를 푸는 것은 그것을 위함이었다.
그녀의 저주를 풀기만 하면.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 될 터였다.
세드릭은 그렇게 믿었다.
그는 루시테를 갈망하는 눈빛으로 진득하게 쳐다보았다. 그에게는 그녀가 필요했다.
루시테는 손끝을 떨었다.
세드릭의 눈빛에서 짙은 탐욕과 갈망, 그런 감정들이 읽혀왔다.
너무나 불쾌하게 느껴지는 시선이었다.
“저…… 저에게…….”
루시테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였다.
당장 내 앞에서 사라지라고.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그렇게 외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루시테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 안에는 세드릭과 그녀 둘뿐.
지금은 별다른 낌새가 없더라도 그가 눈이 돌아가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저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세드릭이었다.
미친개 세드릭 디에고.
“저에게 시간을 좀 주세요.”
“왜지?”
세드릭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이렇게 그녀를 위해준다는데 자꾸만 밀어내는 루시가 세드릭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루시테는 슬금슬금 문 쪽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여기라면,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레일리가 있던 방으로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형체가 뚜렷하게 떠오르지는 않지만, 어느 쪽으로 얼마나 달렸는지에 대한 기억은 대충 남아 있었다.
‘레일리.’
대체 어디에 있나요? 당신을 너무 만나고 싶어요.
어찌나 긴장했는지 루시테의 턱을 타고 식은땀이 툭 떨어졌다.
세드릭이 한 걸음, 두 걸음. 뒷걸음질 치는 루시테에게로 다가왔다.
루시테에게는 그 모습이 너무나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그때 루시테의 등 뒤로 문이 닿았다.
순간 루시테는 문을 열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세드릭을 자극하든 말든, 그에게서 당장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채 몇 걸음 벗어나기도 전에 루시테는 커다랗고 거친 손에 의해 붙잡혔다.
“이, 이거 놔요! 이거 놔! 세드릭!”
루시테는 세드릭의 손아귀에서 제 팔을 빼내기 위해 힘을 주었다.
“시간을 달라니. 역시 안 되겠어.”
세드릭이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이 몹시 위험했다.
그는 자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도망치려 한 루시테를 보고 반쯤 눈이 돌아갔다.
오늘따라 그의 머리칼이 더더욱 피처럼 붉어 보였다. 금방이라도 핏방울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새빨갰다.
“이거 놔요!”
루시테는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했으나 소용 없었다.
그는 이크릭스 제일의 기사이자 소드 마스터였다.
세드릭은 방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 그녀를 당겼다.
“쓸데없는 짓은 그만둬.”
세드릭의 딱딱한 목소리에 루시테는 그를 쏘아보았다.
“이런 짓이 소용 있을 것 같아요? 당신은 후회할 거예요.”
루시테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그러나 이번에도 세드릭은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
무언의 목소리가 조종하듯, 그녀를 저주에서 풀어주어야 한다는 마음속 소리가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세드릭은 루시테를 다시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소파에 그녀를 내려 놓았다.
“대체! 대체 나한테 왜 이래요!”
루시테는 압박이 풀리자마자 세드릭에게 소리를 쳤다.
“나는 네가 필요하다.”
세드릭이 위험한 목소리로 그르렁거렸다.
“저를 내버려두세요 제발…! 당신의 도움은 필요 없으니…….”
루시테의 새카만 눈동자가 세드릭을 향했다. 아무리 말해도 들어주지 않으니 너무나 답답했다.
“너는 내 도움이 필요할 거다. 분명 나중에 고마워할 거야.”
세드릭은 계속해서 제 말이 맞다고 주장했다.
“저를 도와준다고 해도, 그 도와줄 사람이 당신은 절대 아니에요.”
“하.”
세드릭이 코웃음 쳤다.
“내가 아니라면 누가 널 도와준다는 거지?”
세드릭이 일순 정상적인 눈빛을 했다.
섬뜩했던 눈동자에 순간적으로 맑은 빛이 돌아와 있었다.
루시테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무슨 말을 해야 세드릭이 좀 더 정신을 차릴지. 무슨 말을 해야 그에게 먹힐지.
그러나 시간이 짧았다. 세드릭의 눈빛이 탁해지려 했다.
루시테는 홧김에 외쳤다.
“레일리! 레일리가 절 도와줄 거예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인 레일리가요!”
루시테의 말은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다.
루시테가 레일리 이야기를 꺼내자 세드릭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세드릭도 아는 것이다. 루시테가 레일리와 얼마나 친분이 깊은 사이인지를 직접 봐왔으니까.
그보다 먼저 루시를 만났고, 먼저 루시의 마음을 산 그 빌어먹을 마법사.
세드릭의 주먹이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루시테는 변화하는 세드릭의 태도를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레일리 이야기를 꺼낸 것을 바로 후회했다.
세드릭의 눈동자에 다시 탁한 빛이 차올랐다.
“죽여야 할 놈이 한 명 늘었군. 어차피 한 명이나 두 명이나 똑같지.”
세드릭은 루시테를 그대로 두고 문밖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세드릭이 문을 열고 나가기 바로 직전,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기다리고 있어. 다 죽여 버리면 널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니까. 너한텐 나밖에 없어.”
그 아비에게 물려받은 지독한 집착이 흑마법사의 저주로 인해 그의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루시테는 몸을 떨었고, 세드릭은 그대로 문을 쾅 닫고 나갔다.
철그럭.
세드릭이 밖에서 문을 잠갔다. 루시테가 절대 이 방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루시테는 달려가 문손잡이를 돌렸다. 쾅쾅 두드려도 보고 손잡이를 흔들어도 보았다.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이럴 수가 있지.”
루시테는 문에 등을 기댄 채 주륵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황성으로 들어온 것 자체가 처음부터 실수였던 것만 같았다. 루시테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쌌다.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변하지 않고 그녀를 여전히 불안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레일리.’
그만 생각하면 심장이 선득했다.
불길한 꿈을 꾸고 난 후의 불안감이 여전히 가시지 않고 있었다. 또다시 그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 * *
비가 그렇게 쏟아졌다는 게 모두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날씨가 개었다.
해가 높이 뜨고 새파란 하늘이 물감을 뿌린 듯 아테라의 창공에 펼쳐졌다.
수백 년이 지나가는 동안 한 번도 없었던 일이 아테라에 일어나고 있었다.
신성한 행렬. 순백의 사제복을 입은 신성한 무리가 아테라의 수도로 입성하고 있었다.
신의 사도들은 어떠한 무늬도 들어가지 않은 흰옷을 입었다.
온전히 신께 귀의한다는 뜻을 담은 복장이었다.
대신관을 둘러싼 열다섯 명의 고위 사제들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주위에는 보랏빛 인장에 보랏빛 망토를 두른 메이븐의 성기사들이 사제들을 호위했다.
메이븐과 이크릭스는 적대적인 관계이나 오늘은 달랐다.
무려 대신관이 직접 이크릭스의 수도 아테라에 입성하는 날이다.
메이븐은 직접 성기사를 보내 사제들을 호위했다.
모든 정치적 관계의 소용돌이가 오늘의 행렬에 집약되어 있었다.
아덴티움이 건재한데 헤카레트와 메이븐의 성기사가 아테라로 들어오다니.
다시없을 역사의 한 장면이 수도의 한복판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아테라의 백성들은 지금까지 고수해왔던 나라의 분위기 때문에 처음에는 헤카레트의 행렬에 거부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들은 곧 마음 깊이 신의 사도들을 환영하기 시작했다.
“헤카레트여 축복을 내려주소서!”
“헤카레트여! 은총을 내려주소서!”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백성들은 사제들의 머리 위로 꽃잎을 뿌렸다.
그리고 목소리 높여 외쳤다. 신의 은총을 부어 달라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신전을 멀리한다 해도 그들의 주신은 실존하는 존재였고. 그 사도들이 뿜어내는 신성한 분위기는 거짓이 아니었다.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정화되는 듯한 신성.
행렬의 가장 중심에 있는 대신관. 주신의 유일한 신의 대리인.
그가 이곳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신성함의 상징인 보랏빛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대신관이 자애로운 눈빛으로 아테라의 백성들을 둘러보았다.
백성들은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신의 은총이 베풀어지는 듯한 착각을 느낄 정도였다.
어마어마한 신성한 기운이 그 기운과 가장 적대적인 위치에 있는 이크릭스의 한복판에 집약되고 있었다.
“환영하오. 주신의 사도들이여.”
황제 발칸트리히 2세가 친히 황성의 문밖까지 나와 대신관을 맞이했다.
구경하던 사람들은 황제가 직접 사제들을 맞이하는 것을 보고 온전히 믿었다.
이제 이크릭스도 신전과 관계를 공식적으로 맺기 시작한다는 것을 말이다.
황제는 신전에 무척 우호적인 것처럼 보였고, 그들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듯했다.
그리하여 무지한 백성들은 이 일이 황태자 알렉산더가 독단적으로 벌인 일인 줄은 털끝만큼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 저면에 어떤 복잡한 사정이 깔려있든 황제는 공식적으로 대신관을 맞이했고, 그로써 이크릭스는 헤카레트와의 관계를 개선한다.
그것은 변함없는 사실로 못 박힐 것이었다.
‘알렉산더 네놈이 결국 나를 이리도 치욕스럽게 만드는구나.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
발칸트리히 2세는 속으로 욕지기를 삼켰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환하고 인자한 미소를 백성과 사제들을 향해 지어 보일 뿐이었다.
“환영하오. 헤카레트의 대신관이여. 이 미천한 나라를 방문해주어 영광이오.”
황제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이리 환대해주시니 영광입니다.”
대신관 렘브란트가 신전의 대표로 황제를 향해 감사를 표했다. 대신관의 긴 보랏빛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렸다.
* * *
황제의 뒤에 서서 헤카레트의 대신관을 맞이하는 알렉산더의 눈에 핏발이 섰다.
제 아버지가 원망스럽고도 원망스러웠다.
그는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은발머리의 눈엣가시 동생을 노려봤다.
황성을 떠나서 살 거면 더 멀리 가서 살 것이지 하필 가까운데 살아서 꼬리를 밟히느냔 말이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알렉산더는 자신의 앞길을 막는 놈들은 다 치워버리고 싶었다.
알렉산더는 제 뒤에 서 있는 섬뜩한 눈의 붉은 머리 기사를 흘끗 쳐다봤다.
세드릭이 시선을 느끼자마자 눈동자를 굴려 알렉산더와 눈을 맞추었다.
“내가 시킨 일을 잊은 건 아니겠지.”
알렉산더는 쐐기를 박듯 세드릭에게 다시 한 번 이야기했다.
“물론입니다. 황태자 전하께서도 저와의 약조를 잊지 마십시오.”
세드릭이 너야말로 딴소리하지 말라는 뜻으로 황태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세드릭은 지금 몹시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젯밤 루시와 있었던 일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왜 그토록 원하는데도 그의 것이 되지 않는지.
세드릭은 그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지켜주겠다는데, 저주도 풀어주고, 돌봐주겠다는데 대체 왜 거부하는지.
세드릭은 부리부리한 눈으로 헤카레트의 대신관을 쏘아보았다.
대신관은 황제와 인사를 나누는 중이었다.
‘저놈만 있으면.’
저놈만 있다면 루시의 저주를 풀 수 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을까.
세드릭은 루시의 저주를 푸는 데에 이제 모든 것을 걸었다.
루시가 자신을 계속해서 밀어내는 이유는 오직 저주를 풀지 못해서. 그 이유인 것만 같았다.
세드릭의 눈빛이 집착과 광기로 번뜩였다. 마치 그의 아비가 그의 어머니에게 그랬던 것처럼.
한편 알렉산더의 옆에 조용히 서 있던 레일리는 우연히 그들의 기묘한 대화를 엿듣게 되었다.
알렉산더 저 머저리는 본론을 이야기하지만 않으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리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럴 리가.
‘수상해.’
둘의 대화가 몹시 수상하다.
레일리의 은빛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알렉산더가 세드릭 디에고에게 시킬 만한 일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세드릭 디에고가 알렉산더에게 요구할 만한 것은?
레일리는 서늘한 눈동자로 세드릭을 빤히 쳐다봤다.
세드릭 디에고는 몹시 화가 난 듯했다. 아니, 화가 났다기보다는 초조해 보였다.
세드릭의 서슬 퍼런 눈길이 조금 전부터 대신관을 뚫을 듯 향해 있었다.
마치 대신관에 뭐라도 맡겨 놓은 것 같은 눈빛…….
레일리는 거기까지 생각하다 흠칫 몸을 굳혔다.
‘설마.’
레일리는 세드릭을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남의 일에는 관심도 없는 저 미친개 세드릭 디에고가 왜 하필 대신관에게 관심을 갖겠느냔 말이다.
세드릭 디에고와 헤카레트의 대신관 그사이에는 아무런 접점도 없었다.
그러나 그사이에 루시테를 넣는다면?
아주 커다란 접점이 생긴다.
세드릭 디에고가 루시테의 비밀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가정 하에.
레일리의 눈빛에 날이 섰다. 세드릭 디에고, 저 미친개가 몹시 수상했다.
문득 레일리의 시선을 느낀 세드릭이 고개를 돌렸다.
레일리의 은빛 눈동자와 세드릭의 푸른 눈동자가 정면으로 마주쳤다.
세드릭은 레일리를 보자마자 험악하게 인상을 구겼다.
세드릭은 다시금 상기했다. 그가 죽여버려야 할 자가 황제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레일리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세드릭의 눈동자를 피하지 않고 응시했다.
그들의 신경전은 대신관 무리와 황제가 자리를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 * *
대신관은 하루 종일 바빴다.
황제가 나름 제대로 맞이한다고 직접 황성을 구경시키고, 온갖 귀족을 불러 모아 예를 갖추고, 식사를 함께하고, 정말로 극진한 대접을 했다.
대신관은 밤이 늦어서야 이 이상의 파티 참여를 거절하고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황태자는 그 틈을 노렸다.
“성하. 제가 이번 화친의 가장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요?”
황태자는 대신관에게 은밀히 찾아가 이야기했다.
“알고 있습니다.”
대신관이 인자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은 제가 긴히 부탁이 있습니다. 절대 성하께 해가 되는 일은 아닐 것입니다.”
“무엇입니까.”
“저 말고 제 호위의 부탁입니다.”
황태자는 제 뒤에 서 있는 세드릭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쳤다.
세드릭이 눈을 빛냈다.
드디어 왔다. 루시의 저주를 풀 기회가. 그리고 루시의 마음을 제게로 돌릴 기회가.
세드릭의 눈빛이 갈망으로 가득 찼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약속을 잊지 말게, 백작.”
황태자는 결국 세드릭과 대신관의 자리를 만들고야 말았다.
황태자는 마지막까지 세드릭에게 약조를 강조하며 대신관이 머무는 거처를 망설임 없이 나갔다.
“그래요. 저에게 황태자 전하께서 직접 말할 정도의 부탁이 무엇입니까?”
대신관은 세드릭의 얼굴에서 갈망을 읽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계시를 받고 이곳에 온 몸.
원래라면 사특한 소망은 들어주지 않을 테지만, 계시가 있는 한 이곳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의지가 있었다.
“성하. 저를 따라와 주십시오. 제 여자가 황성의 서쪽에 있는 궁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제발 그 여자를 만나 주십시오.”
렘브란트를 향한 세드릭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제가 만나야 할 이유가 있는가 보군요. 좋습니다.”
렘브란트가 흔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드릭은 눈을 크게 떴다. 대신관이 이리도 쉽게 응할 줄은 몰랐다.
아덴티움은 그야말로 대신관에게는 적진의 한복판이 아닌가.
항상 몸을 사리고 있을 터인데, 황태자의 호위 따위를 이렇게 쉽게 따라나선다고?
세드릭은 제가 요청을 해놓고서도 놀란 눈으로 렘브란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쳐다봐도 그의 얼굴에서는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신의 깊은 뜻. 렘브란트는 그것을 따라왔으니 세드릭이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당연했다.
“어디입니까? 안내해주겠습니까?”
렘브란트가 인자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물었다.
“따라오십시오.”
세드릭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걸음을 옮겼다.
메이븐의 성기사 다섯이 그들의 뒤로 말없이 따라붙었다.
그들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세드릭과 그들의 성하의 뒷모습을 바라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감히 신의 대리인인 대신관이 하고자 하는 일을 어떻게 막을 수 있겠는가.
그들의 임무는 그저 이 사특한 땅에서 대신관을 안전히 지키는 것. 그뿐이었다.
조용한 무리가 어두운 황성 안을 가로질러 갔다. 밤바람에 대신관의 긴 보랏빛 머리칼이 흩날렸다.
그러나 아무도 몰랐던 사실이 있었다. 그들의 뒤를 따라가는 자가 한 명이 더 있었다는 것을.
레일리는 슬며시 세드릭의 뒤를 밟았다.
레일리는 기사들이 자신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멀찍이 떨어져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수상하게 굴던 세드릭이 드디어 움직이고 있었다.
* * *
루시테는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다가 번뜩 잠에서 깨어났다.
계속 방에 갇혀만 있으니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으음…….”
루시테는 눈을 비볐다.
문득 문밖에서 인기척이 들리는 것 같았다.
루시테는 정신을 번쩍 차리곤 똑바로 일어나 앉아 귀를 기울였다.
철커덕.
문에 감긴 자물쇠를 누군가 풀고 있었다.
“세드릭?!”
루시테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세드릭이 드디어 자신을 풀어줄 생각이 든 것일까.
오늘 대신관이 오는 날이라던데, 레일리는 괜찮은 걸까.
짧은 사이 오만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문이 열렸다.
루시테는 제일 먼저 세드릭과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세드릭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금빛 눈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남자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보랏빛 머리칼이 눈에 띄었고, 루시테는 어깨를 떨었다.
“다, 당신은…!”
루시테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놀란 것은 렘브란트도 마찬가지였다.작은 소녀에게서 무척 익숙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소녀는 몹시 닮아 있었다. 오래전 죽은 그의 누님과.
전대 대신관이자, 역대 대신관 중 가장 강력한 성력을 갖고 있던 그의 누님 에일란테.
소녀의 오밀조밀한 외모는 어린 시절의 에일란테와 판박이였다.
“이, 이름이 무엇이니?”
렘브란트는 떨리는 목소리로 루시테에게 이름을 물었다.
폐위당한 후 사라졌다는 자신의 조카일까 봐. 아무리 찾아도 만날 수 없었던 조카일까 봐.
렘브란트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아, 안나예요.”
루시테는 거짓말을 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전생에 봤던 사람이었다.
그녀의 납치를 명령하여 저주를 풀었던 헤카레트의 대신관. 렘브란트.
세드릭이 결국 그를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이다.
“거짓말 마라, 루시. 성하, 이 여자는 루시 필드입니다. 저주를 받아 스물셋의 나이에 저런 외모라고 했습니다.”
세드릭이 한 걸음 나서며 루시테가 저주를 받았다는 사실을 렘브란트에게 고해바쳤다.
렘브란트는 눈을 크게 떴다.
저주라니.
루시 필드. 루시. 루시테.
틀림없었다. 저 소녀는 제 조카인 루시테 클라우디오가 분명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나 에일란테를 닮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아아. 주신이시여.”
렘브란트는 저도 모르게 털썩 주저앉았다. 렘브란트의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서, 성하! 왜 그러십니까!”
렘브란트의 눈물에 성기사들이 일제히 놀랐다.
당황한 것은 루시테와 세드릭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대신관이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싶었다.
렘브란트는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달싹였다.
메이븐의 황제는 아무리 렘브란트가 요청해도 끝까지 그의 누님과 조카를 만나게 해주지 않았다.
얼마나 만나보고 싶었던가.
누님이 황제에게 겁탈당하여 낳은 아이. 루시테.
‘나의 조카야.’
“루시테.”
렘브란트가 나직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루시테는 흠칫 놀랐다.
‘아, 알고 있어.’
대신관이 어찌 된 일인지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대신관이 회귀를 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루시테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불쌍한 아이…….”
대신관은 바닥에서 일어나 루시테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 루시테가 주춤거리는 사이에 루시테의 손을 붙들었다.
“나를 모르겠니?”
“대신관님… 이시잖아요.”
루시테는 대신관이 자기를 향해 왜 이런 반응인지 어리둥절했다.
“네 어머니의 이름이 무엇인지 알고 있니?”
루시테를 바라보는 대신관의 눈빛이 무척이나 따스했다.
“모르겠어요.”
그러고 보니 루시테는 어머니의 이름을 몰랐다. 네 번이나 회귀를 한 지금까지도.
루시테의 친어머니는 루시테를 낳다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리고 아무도 어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그저 이름조차 알 필요 없는 천한 하녀라고 했을 뿐이었다.
마치 어머니라는 존재는 황성에서 지워 없어져 버린 것처럼. 그렇게 사람들은 루시테의 존재와 가치를 무시했다.
모르겠다는 루시테의 대답에 렘브란트의 눈빛이 슬퍼졌다.
“내가 알려주마. 네 어머니의 이름은 에일란테란다.”
“네?”
에일란테라니. 갑자기 실종된 전대 대신관의 이름이 아닌가. 루시테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너는 내 조카란다. 루시테. 에일란테는 나의 누님이야…….”
“!”
지금 이 사람이 뭐라고 하는 건지. 루시테의 머리로는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대신관 렘브란트의 엄청난 이야기에 혼란스러운 건 루시테 뿐만이 아니었다.
저 작은 소녀가 전대 대신관 에일란테의 딸이라니?
세드릭을 비롯하여 다섯 명의 메이븐의 성기사들 역시 기절할 듯 놀랐다.
그리고 어느새 근처로 다가와 엿듣고 있던 레일리조차도.
모두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드디어 만났구나. 루시테. 나의 조카야.”
루시테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놀란 눈으로 그저 렘브란트를 바라보기만 했다.
“주신께서 이 아이를 위해 나를 이곳으로 이끄셨던가…….”
헤카레트시여.
렘브란트는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이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알겠구나.”
렘브란트는 루시테의 손을 잡은 채로 무릎을 꿇고 바닥에 앉았다.
루시테가 무엇을 어찌 할 새도 없이 렘브란트가 눈을 감고 기도를 시작했다.
“주신 헤카레트시여. 이 미천한 자가 간절히 기도를 올립니다.”
부디 제 조카를 굽어살피사, 신의 대리인을 범한 황제의 죄를 용서해 주옵시고.
이 아이의 저주를 풀어주시옵소서.
“…….”
렘브란트는 한참이나 눈물을 흘리며 작은 목소리로 기도를 했다.
그리고 잠시 후 렘브란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루시테의 머리 위로 손을 얹었다.
“나 렘브란트는 나의 조카 루시테에게 주신 헤카레트의 이름으로 축복을 내린다.”
렘브란트의 목소리가 엄숙했다. 그 속에 묵직한 신성이 배어 있었다.
“아, 안 돼!”
루시테는 놀라 외쳤다. 대신관의 축복을 받다니.
‘저주가…… 저주가!’
순간 흰빛이 루시테를 휘감았다. 찬란한 광휘가 방 안을 뒤덮었다.
루시테는 제 안에 있는 무언가가 해방되는 느낌을 받았다. 상쾌한 기운이 그녀를 휘감았다.
루시테는 멍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루시 양!”
레일리가 사람들을 밀치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괜찮습니까?”
레일리가 주저앉은 루시테를 일으켜 소파에 앉혔다.
“……레일리?!”
루시테는 놀라 레일리를 불렀다.
“네. 루시.”
레일리가 그녀의 앞에 있었다. 그토록 찾았던 레일리가.
루시테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레일리의 목에 매달렸다.
그의 품에 한 번 안겨봤다고, 벌써 그의 냄새가 익숙해져 있었다.
그에게서는 익숙한 청량한 향기가 났다.
루시테가 그토록 그리던 그의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루시 양.”
레일리는 그녀를 마주 껴안으며 그녀의 등을 감싸 안았다.
“레일리 아사드!”
레일리의 뒤로 벼락같은 음성이 들렸다. 세드릭이 분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네놈이 감히 이곳에 나타나다니!”
눈엣가시 같은 레일리가 나타난 것도 모자라 그의 여자를 품에 안고 있었다.
세드릭은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렘브란트는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2황자에게 안겨 있는 루시테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째서?’
그의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 떠올랐다.
저주가 풀리지 않았다.
그가 진정으로 축복의 기도를 올렸는데도 저주가 풀리지 않다니.
루시테는 조금 전 작은 소녀의 모습 그대로였다.
분명 신의 광휘가 그녀를 휘감았고 신성력이 방 안에 휘몰아쳤다.
렘브란트는 그것을 똑똑히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주가 풀리지 않다니.
렘브란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잠시 생각했다.
그는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조카의 편이었다.
어떠한 신의 섭리와 사정이 조카에게 작용해 있는 것이리라.
“루시테. 내 잠시 가지고 올 것이 있단다. 잠시 기다리고 있거라. 금방 돌아올 테니.”
렘브란트는 급히 뒤로 돌아 방을 나갔다. 당장 방에 돌아가 찾아올 것이 있었다.
렘브란트는 걸음을 늦추지는 않았지만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조금만 기다리거라. 루시테.’
렘브란트의 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한편 렘브란트가 떠난 방 안은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살기는 일방적으로 세드릭이 내뿜고 있는 것이었다.
세드릭이 등에서 칼을 뽑았다.
스릉.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가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검신을 빛냈다.
“왜 이래요?!”
루시테가 놀라 레일리의 앞으로 나섰다.
“저주가 풀리지 않았군. 나에게 거짓말을 한 건가?”
세드릭의 눈동자가 위협적으로 번뜩였다. 살기가 풀풀 흘러나왔다.
루시테는 소드마스터가 풍기는, 살을 에는 듯한 살기에 정신이 아득해지려 했다.
“루시 양. 뒤로 물러나요.”
레일리가 루시테의 어깨를 붙잡았다. 루시테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레일리는 이곳에서 마법을 쓸 수 없는 몸이다. 아마도 검을 든 세드릭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터다.
자신이 어떻게든 세드릭을 달래야 했다.
루시테는 이를 악물었다.
“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세드릭이 버럭 소리를 쳤다. 그 모습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루시테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렇다면 왜 저주가 풀리지 않은 것이냐! 헤카레트의 신관만 만나면 풀린다고 했잖아!”
세드릭은 화가 잔뜩 나 보였다.
흡사 저주가 풀리지 않은 루시테를 향해 떼를 쓰는 어린아이 같기도 했다.
“저, 저도 모르겠어요!”
왜 저주가 풀리지 않았는지는 루시테도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이전 생애에는 대신관의 축복의 기도를 받고 저주가 풀렸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그대로인가.
루시테는 분명 충만한 신성력과 제 안에서 해방되는 무언가를 느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변한 건 없었다. 이상했다.
혹시 자신이 저주가 풀리고 싶지 않다고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서인 걸까. 알 수가 없었다.
“오호라. 그래. 다 저놈 때문이로구나.”
세드릭이 으르렁거렸다.
“루시 양. 물러나요.”
레일리가 루시테의 어깨를 감싸며 제 뒤로 확 당겼다.
그 행동이 세드릭을 더욱 자극했다. 세드릭의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렸다.
그는 레일리와 루시테의 앞으로 한 걸음 더 다가왔다.
커다란 덩치의 기사가 위압적인 기운을 내뿜으니 루시테는 꼭 공기가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역시, 네놈은 너무 거슬려. 그래. 다 네놈 때문이었어.”
세드릭이 중얼거렸다. 그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붉은 기운이 세드릭의 검에 스멀스멀 타고 올라왔다.
금방이라도 바닥에 피를 뿌릴 것 같은 섬뜩한 기운이 검에 휘감겨 일렁거렸다.
세드릭의 푸른 눈마저 붉게 일렁이는 것만 같았다.
레일리는 긴장하며 허리춤에 차고 왔던 검을 뽑아 들었다. 방 안의 공기가 더더욱 무거워졌다.
“백작. 그만둬.”
레일리는 루시테를 더욱 자신의 뒤로 밀어 넣었다.
혹시 모를 상황이 되면 어떻게든 루시테를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안티매직만 없었다면.’
레일리는 미간을 좁혔다.
나브레의 안티매직이 아니었다면 레일리가 이렇게 무능력함을 느낄 필요도 없으리라.
이 황성은 레일리에게 족쇄나 마찬가지였다.
황성 전체가 마법은커녕 정령조차 사용할 수 없도록 제어하고 있으니.
“세드릭! 대체 왜 이래요!”
루시테가 다시 세드릭에게 소리쳤다.
“우리, 말로 해요!”
그러나 세드릭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세드릭은 이미 눈이 돌아가 루시테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세드릭은 마치 죽은 제 부모가 귀에 대고 속삭이는 것 같은 환영을 보고 들었다.
-죽이렴, 세드릭. 전부 죽여 버리렴. 네 것을 탐하는 자를 모두 죽여.
어머니의 환영이 세드릭에게 쉼 없이 속삭였다.
“으, 으아아아악!”
세드릭이 레일리와 루시테가 서 있는 곳을 검을 횡으로 그었다.
-다 죽여라. 다 죽여 버리거라, 세드릭. 눈앞에 있는 것을 전부 죽여.
세드릭에게 걸린 흑마법사의 저주가 세드릭의 친모의 모습으로 쉴 새 없이 속삭였다.
콰앙!
찰나의 순간 레일리가 루시테를 껴안은 채로 바닥을 굴렀다.
조금 전 둘이 서 있던 자리에 있던 탁자가 반으로 쪼개져 바닥을 굴렀다.
“세드릭!”
루시테가 비명처럼 세드릭을 불렀다.
그가 자신을 향해 정말로 칼을 휘두르다니. 충격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너무 이상했다. 그녀가 알던 세드릭이 아닌 것만 같았다.
“루시테. 제가 막을 테니 도망가세요.”
레일리가 루시테의 손을 꽉 잡았다. 루시테는 흠칫 굳었다. 레일리의 손바닥에서 식은땀이 묻어났다.
그가 긴장했다. 그 말은 지금의 레일리는 세드릭을 감당하기 어렵다는 뜻이었다.
“싫어요!”
루시테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레일리를 두고 갈 수 없었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루시테는 레일리를 잃고 평생 후회하며 살 자신이 없었다.
“절대. 절대.”
루시테는 절대 레일리의 손을 놓지 않을 것처럼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웃기고들 있군.”
굵직한 목소리가 루시테와 레일리의 사이를 파고 들어왔다.
그가 또 한 번 검을 휘둘렀다. 묵직한 바람 소리가 났다.
쾅!
조금 전 레일리와 루시테가 서 있던 곳의 바닥이 크게 패이며 부서진 대리석 파편들이 튀었다.
조금만 늦게 피했다면 레일리와 루시테는 그대로 대리석 조각처럼 가루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루시테를 꽉 붙든 레일리의 손끝이 파랗게 질렸다.
일을 이렇게까지 만든 안티매직이 레일리는 이 순간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만약 살 수만 있다면. 이 상황에 살아나갈 수만 있다면 안티매직을 부숴버리리라.
레일리는 몇 번이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오지 않겠지.
레일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방금 두 번 세드릭의 검을 피한 건 순전히 요행이었다.
그가 마법사이기 때문에 오러의 흐름을 읽은 것일 뿐, 또 한 번의 기회가 있을 리 만무했다.
상대는 이 나라 최고의 검사. 세드릭 디에고였으니까.
‘반드시.’
반드시 루시테만은 살려야 해.
레일리는 이를 악물고 세드릭을 노려보았다.
레일리의 차가운 은빛 눈동자와 그 어떤 불꽃보다도 뜨거운 세드릭의 푸른 눈동자가 마주쳤다.
그 순간 세드릭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죽어! 죽어버려! 레일리 아사드!”
세드릭이 고함을 쳤다. 그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검을 들고 레일리에게로 달려들었다.
레일리는 세드릭의 움직임은 읽지 못했지만 마나의 흐름을 읽고, 순간적인 판단으로 루시테를 밀쳤다.
푸욱!
“크윽!”
레일리의 입에서 피가 흘렀다.
레일리가 루시테를 세게 밀쳤기에 루시테는 바닥에 부딪혔다.
루시테는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곧 레일리가 무슨 짓을 당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아, 아, 안돼! 레일리! 레일리이이이!”
루시테의 목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레일리를 부르는 비명이 처절했다.
“어서, 도망가세요. 루시테.”
레일리가 입으로 쿨럭 피를 토하며 루시테에게 도망가기를 부탁했다.
루시테의 몸이 덜덜 떨렸다.
세드릭의 거대한 검이 레일리의 배를 그대로 관통해 있었다.
레일리의 등으로 피가 묻은 긴 검신이 그대로 보였다.
그리고 레일리는 제 배를 관통한 검의 손잡이를, 정확히 말하자면 세드릭의 손을 꽉 붙들고 있었다.
“도망, 어서.”
쿨럭!
레일리가 또 입으로 피를 한 움큼 쏟아냈다. 세드릭과 힘겨루기를 하는 레일리의 손이 떨렸다.
“안돼, 안돼, 안돼!”
루시테는 비명을 토해내며 레일리에게로 다가갔다.
칼이 그녀의 손에 닿는 것은 아랑곳 않고 루시테는 피가 새어 나오는 레일리의 배를 손으로 막았다.
레일리의 옷자락이 물에 물감이 번지듯 피로 물들어갔다.
새빨간 핏줄기가 끊임없이 레일리의 배에서 흘러나왔다.
“안 돼! 제발! 레일리!”
루시테의 눈에서 그토록 참았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레일리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정신이 나가버릴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뜨거웠다. 그녀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미쳐버릴 것 같았다.
“세드릭! 만족해요?! 이제 만족하냐구요!”
루시테는 세드릭을 향해 고함을 쳤다. 루시테의 눈에서 눈물인지 피눈물인지 모를 것이 쉴 새 없이 떨어졌다.
레일리의 피가 묻어 그리 보인 것이었지만 세드릭의 눈에는 마치 루시테가 그 때문에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보였다.
자살한 그의 어머니. 그리고 피눈물을 쏟고 있는 루시테가 세드릭의 눈에 번갈아 가며 겹쳤다.
-죽여. 전부 다 죽여.
“아, 아니, 안 돼. 안 된다.”
세드릭은 어깨를 떨었다.
세드릭이 저주의 속삭임에 미약하나마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어머니의 모습을 하고 있던 저주가 순식간에 괴기한 모습으로 변형되어 세드릭을 휘감았다.
-황제를 죽여라. 황제를 죽여.
저주가 세드릭의 귀에 달라붙어 속삭였다.
손을 피로 적신 세드릭은 이제 저주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세드릭은 홀린 듯 칼을 잡아당겼다.
우드득 소리를 내며 레일리의 뼈와 살에 박혔던 칼이 쑥 뽑혀 나왔다.
푸악!
칼이 뽑힌 자리로 레일리의 피가 솟구쳤다. 레일리는 바닥에 풀썩 쓰러져 창백한 손을 늘어뜨렸다.
“안 돼! 안 돼! 레일리!”
루시테는 레일리의 옆에 주저앉아 레일리의 배 위에 두 손을 얹었다.
아무리 막으려 해도 피는 루시테의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왔다.
‘안 돼. 안 돼. 안 돼. 죽으면 안 돼. 레일리!’
루시테는 턱을 덜덜 떨었다. 그녀의 작은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세드릭은 그런 둘을 뒤로하고 검을 든 채로 몸을 돌렸다.
그가 발을 뗄 때마다 피에 적셔진 신발에서 찌걱거리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났다.
세드릭은 피에 물든 채 넋이 나간 얼굴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황제가 있는 곳으로.
“레일리! 레일리! 제발 정신 좀 차려 봐요. 제발!”
루시테는 목에서 피가 나도록 레일리를 불렀다.
“루시…… 테.”
레일리가 힘겹게 손을 들어 제 손을 루시테의 손 위에 얹었다.
피는 이리도 뜨거운데, 레일리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레일리! 정신 차려요! 제발!”
“루시, 테. 도망, 가세요. 당신을 지켜, 주지…… 못해, 미안. 합니다…….”
“그, 그게 무슨 소리예요!”
루시테는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죽어가는 중에도 하는 소리가 이런 말이라니.
무슨, 무슨 방법이 없을까?
루시테는 레일리의 상처를 양손으로 막고는 뜨거워서 터져버릴 것만 같은 머리로 마구 생각했다.
지금 달려가서 대신관을 불러오기엔 레일리가 위험했다. 그때까지 그가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제발. 제발. 무슨 방법이 없을까?’
차라리 자신의 저주가 풀렸다면. 진짜 성녀가 되었다면 레일리, 그를 구할 수 있을 텐데.
레일리의 피가 섞인 뜨거운 눈물이 루시테의 볼을 타고 흘렀다.
그토록 되고 싶지 않았던 성녀가 지금은 되고 싶었다.
자신의 저주가 풀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녀의 인생을 통틀어 그 어느 때보다 원망스러웠다.
평생 되고 싶지 않았던 성녀가,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되고 싶었다. 레일리 단 한 사람을 위해.
평생 풀고 싶지 않았던 저주가,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풀고 싶었다. 레일리, 그가 죽지 않기를 바라니까.
루시테는 이렇게 레일리를 잃으면 살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죽는 것만도 못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신이시여.”
루시테는 레일리의 배 위에 올린 손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세 번의 생애 동안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기도의 첫음절을 뗐다.
“바라옵고 바라옵나니. 저의 저주를 풀어주세요.”
루시테는 울분을 터뜨리듯, 그러나 간절하게 주신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제발, 제발 제 말을 한 번만 들어주세요. 저는 저주가 풀려야 한다고요! 지금 당장!”
루시테는 울분과 함께 거친 숨을 토해냈다.
그녀의 손바닥 아래에서 레일리의 생명이 점점 꺼져 가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제발. 존재하신다면 제 말을. 한 번만. 딱 한 번만 들어주세요. 성녀가 될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제 저주를 풀어주세요. 제발, 제발요…….”
루시테는 울음과 그동안 맺혔던 뜨거운 감정, 알 수 없는 폭발적인 어떤 감정들을 삼켰다.
그녀의 안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뭉쳐지는 것 같기도 했고 반면 터져버릴 것 같기도 했다.
“으, 흐, 으아아아아!”
루시테는 비명을 질렀다.
레일리가 살았으면 좋겠다. 루시테가 바라는 것은 단 한 가지. 그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