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눈부신 빛무리가 그녀를 감쌌다. 환한 빛이 터져나갈 것처럼 방 안을 밝혔다.
마침내 빛이 사그라든 그곳에는 두 명의 남녀가 쓰러져 있었다.
어깨 가까이 오는 은빛 머리를 한 남자가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었고, 그 옆에는 보랏빛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여자가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차린 레일리가 눈을 깜박였다.
레일리는 눈을 뜨자마자 허리를 벌떡 일으켰다. 그는 배에 손을 얹었다. 아프지 않았다.
온몸이 쪼개지는 통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이 살아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레일리는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채 다 받아들이기도 전에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루시테. 루시테는?’
레일리의 은빛 눈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레일리는 금세 제 옆에 쓰러져 있는 여자를 발견하고 미간을 좁혔다. 루시테가 무사히 도망을 간 건가?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이 여자는 누구란 말인가?
그 사달이 난 중에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건지.
수많은 의문이 레일리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다 한 가지 가정이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기적.
자신이 살아있는 것은 기적이었다.
어떤 기적이 이 방에 강림한 게 틀림없었다.
레일리는 떨리는 손으로 보랏빛 머리칼에 손을 가져갔다.
믿을 수 없이 부드럽고 가는 머리칼이 그의 손가락 사이로 쏟아지듯 흘러내렸다.
레일리는 조심스레 머리칼을 들어 옆으로 밀었다.
폭포수 같은 머리칼을 치우자 그 아래 곤히 잠들어 있는 흰 옆얼굴이 드러났다.
나붓이 내려앉은 보랏빛의 긴 속눈썹 아래로 그늘이 드리워지고 오똑한 콧망울 아래 다물린 도톰한 입술이 붉었다.
이전보다 훨씬 성숙한 얼굴이었으나 레일리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루시테.’
그녀가 틀림없었다.
늘 예민하게 곤두서 있지만 누구보다 다정한 여자.
호기심을 풀기 위해 접근했지만 어느새 그의 삶에 스며든 여자.
자그마하지만 강한 여자.
루시 필드, 아니. 루시테 클라우디오. 그녀였다.
흠칫, 레일리는 매서운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밖이 웅성거렸다. 절그럭거리는 병장기 소리가 들렸다.
주변이 소란스러웠다.
레일리는 재빨리 루시테의 허리와 다리 아래 손을 넣어 그녀를 안아 들었다.
그는 빠르게 방 안을 빠져나와 어둠에 스며들었다.
달도 뜨지 않은 깊은 밤이었다.
세드릭이 그 일을 벌이고 나간 지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았다. 자신이 비교적 빨리 정신을 차려 다행이었다.
레일리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루시테를 안아 든 채 걸음을 옮겼다.
그간 이곳을 탈출하기 위해 비밀 통로를 얼마나 열심히 찾았던가.
어차피 루시테를 헤카레트의 대신관과 만나게 하기 전까지는 도망칠 생각은 없었으나,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알아 둔 것이었는데. 그 준비가 바로 지금 빛을 발했다.
어느 길이, 몇 시에 경비가 교대하는지. 어느 쪽의 경비가 허술한지.
레일리는 황성 전체의 모든 시스템을 꿰뚫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옮기는 발걸음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그가 애초에 황성에 머물렀던 목적을 달성했다. 그러니 이제 더 이상 미련은 없었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황성 안이 소란스러웠다.
새카만 밤이 유난히 을씨년스럽고 불길했다. 레일리는 그 소란을 틈타 조용히 황성을 벗어났다.
달 없는 밤.
곤히 잠든 여자를 품에 안은 은빛 머리의 남자가 조용한 광장을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여자의 긴 보랏빛 머리칼이 바람결에 흩날렸다.
* * *
“이…… 이분이 정말 루시 아가씨란 말씀이세요?”
리브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놀란 건 에단과 노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늘은 루시테를 누인 침대 옆에 다닥다닥 붙어 루시테의 얼굴만 들여다보았다.
같은 사람인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볼수록 신기했다.
어떻게 안 본 지 몇 주 만에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 버릴 수가 있을까.
짧았던 검은 머리는 온데간데없었고, 대신 그 자리에는 아름다운 긴 보랏빛 머리칼이 있었다.
짧고 여린 팔다리 대신 길쭉한 몸을 한 성인 여성이 누워있었다.
얼굴을 요리조리 뜯어보고 자세히 보면 분명 그들의 아가씨 루시가 맞는데. 리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가씨에게 마법이 걸린 거예요?”
리브는 아이 같은 천진한 얼굴로 레일리를 올려다봤다.
“아뇨. 리브 양.”
레일리가 씁쓸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루시 양의 저주가 풀렸답니다.”
“저주요?”
리브가 입을 헤 벌렸다.
그러고 보니 제 아가씨가 그렇게 작은 이유가 저주라고 했던 것을 리브는 기억해 냈다.
리브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루시테의 긴 머리칼을 건드렸다. 신기했다. 꼭 동화 속에서 봤던 공주님 같지 않은가.
“며칠 제가 이곳에 머무를 수 있을까요? 리브 양.”
“그럼요!”
리브와 에단은 이미 레일리를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루시테가 그를 퍽 살갑게 대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흔쾌히 레일리가 산 중턱 하우스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했다.
무엇보다 아가씨를 무사히 모셔와 주신 분이니, 더 극진히 모셔야 하는 게 당연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마침 깨끗한 방이 하나 남아요!”
리브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레일리에게 방을 안내해주었다. 루시테와 같은 층 끝에 있는 방이었다.
이안이 머무른 적이 있었지만 이미 다 청소를 해두었기에 깨끗했다.
방이 비록 크지는 않았지만 누구에게 보여주어도 부끄럽지 않을 만큼 아늑하고 깨끗해서, 리브는 자신 있게 방문을 열었다.
레일리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문을 닫고 들어왔다.
그는 창가에 있는 작은 의자에 앉아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밤이 깊었고 눅진한 여름 바람이 창 안으로 스며들었다.
‘저주.’
루시테의 저주가 풀렸다. 그리고 자신이 살아났다.
그 방안에는 어떤 성수도, 헤카레트의 대신관도 없었다.
오로지 그녀와 그. 둘 뿐이었다. 그렇다면 레일리는 자신을 살린 이가 루시테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루시테의 머리는 선명한 보랏빛이 아니던가. 강한 신성력을 상징하는 보랏빛.
루시테의 머리칼은 헤카레트의 대신관의 머리칼과 똑같았다.
루시테의 저주는 주신 헤카레트와 관련이 있다고 했다. 주신의 저주.
레일리는 미간을 좁혔다.
루시테의 두 가지 저주 중 첫 번째 저주에 대한 실마리가 풀렸다.
거기에 루시테가 현 헤카레트 대신관의 조카였다는 사실이 큰 도움이 되었다.
성력의 봉인.
루시테 클라우디오에게 걸린 저주는 애초에 저주가 아니었다.
성력이 봉인되어 그런 형태가 된 것으로 볼 수 있었다.
그 봉인이 어떤 계기에 의해서 이제 완전히 풀리게 된 것이다.
더 이상 그녀에게서 뒤섞이고 혼탁한 마나의 흐름은 읽히지 않았다.
이제 루시테에게서는 그 어떤 저주의 흔적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저주에 걸리지 않았던 사람처럼 마나는 깨끗하게 루시테 주변을 흘러갔다.
더 정확히 알려면 그녀가 눈을 떠야 하겠지만 이제 루시테는 완벽하게 저주에서 해방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레일리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레일리는 엘라임이 말하던 그 해답을 아직 찾지 못했다.
레일리가 진정으로 찾고 싶었던 것은 자유. 루시테의 자유와 그의 자유.
과연 엘라임은 어떤 의미로 헤카레트의 대신관을 찾아가면 답을 찾을 수 있다고 한 걸까.
레일리가 찾고자 하는 그 답은 여전히 미궁 속에 있었다.
* * *
레일리가 루시테의 집에 피신해 있는 동안 황성은 큰 혼란을 맞이했다.
이크릭스에서 가장 강한 검사인 세드릭 디에고가 수많은 궁인을 학살했다.
황제의 궁이 침입을 당했고, 황제의 기사들이 나서 세드릭을 저지했다.
그러나 세드릭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가진 기사는 드물었고, 미쳐 폭주하는 세드릭을 막을 수 있는 자는 없었다.
황성 안에는 많은 뛰어난 마법사들이 있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안티매직의 권역 안이었다.
마법사들은 아무런 손도 쓸 수 없었고, 세드릭에게서 도망 다니기에만 바빴다.
황제가 뒤늦게 안티매직을 해제하려 했으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그가 막 거대한 마법진을 해제하려 하기도 전에 세드릭의 검이 이미 그의 앞에 당도해 있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황족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안티매직이 오히려 그의 목숨을 앗아가는 계기가 되다니.
역대 이크릭스의 황제 중 가장 포악하고 간사하며 폭정을 휘둘렀던 그 황제가, 자신의 기사에게 목숨을 잃었다.
안티매직은 여전히 위엄 있게 황성을 두르고 있었으나 황제는 죽었다.
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처럼 머리와 몸이 분리된 채로 말이다.
세드릭은 황제를 죽이자 정신이 돌아왔다.
황태자는 망연자실하게 서 있는 세드릭을 제압하여 지하 감옥에 가두었고, 곧바로 황위 계승식을 준비했다.
형식상 신전에 인정받아야 하는 절차가 있었으나, 알렉산더는 그마저도 걱정이 없었다.
그 신전의 주인인 대신관이 바로 황성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나 여기에서 복병이 있었다.
바로 헤카레트의 대신관 렘브란트.
“어째서, 어째서 해주실 수 없다는 말이십니까?”
알렉산더가 대신관을 노려봤다. 그들 사이에 싸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알렉산더의 눈에 불꽃이 튀겼다.
다 된 밥에 대신관이 재를 뿌리다니.
그가 인정만 해준다면 자신은 바로 황제였다. 그 바라마지 않던 황제가 되는 것이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국장을 먼저 준비하셔야지 않겠습니까. 신전에서 특별히 함께하여 부왕의 명복을 위한 번제를 주관하겠습니다.”
렘브란트가 차분하지만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그러니! 그러니까 더더욱 제 황제 위를 인정해 달란 말이오! 대신관! 그 모든 절차를 내가 주관하겠다지 않습니까. 이 나라는 불안정합니다. 국장이든 뭐든 내가 황제가 되어 모두 주관하겠다, 이 말입니다.”
알렉산더는 다시 한 번 렘브란트에게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생각은 확고했다.
“저는 제 말을 번복할 생각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신의 뜻에 따라.”
렘브란트가 가슴에 성호를 그었다.
알렉산더가 주먹을 꽉 쥐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아버지도 이제 없는데 대신관 따위 마음대로 할 수 없다니!
알렉산더와 렘브란트 사이에 잠시간의 차가운 시선이 오갔다.
렘브란트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알렉산더를 마주 보았다.
지금 알렉산더를 황위에 앉힐 수는 없다는 것이 렘브란트의 생각이었다.
황제를 살해한 자는 알렉산더의 측근 기사. 무언가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렘브란트가 이곳에 와 있는 이상 진상을 철저히 살필 것이며 마땅히 신의 뜻에 따라 황제가 되어야 할 자에게 황위를 인정할 것이다.
그것은 렘브란트의 사명이었다.
“젠장!”
알렉산더는 대놓고 렘브란트더러 들으라는 듯 욕설을 내뱉었다.
그리고는 문을 쾅 닫고 렘브란트의 거처를 나갔다.
황태자 일행이 모두 물러나자 렘브란트의 표정이 몹시 어두워졌다.
‘어디 있는 게니. 루시테. 나의 조카야.’
렘브란트는 손에 쥔 성수를 꽉 쥐었다. 아무리 급하다 해도 그 자리에 남아 있었어야 했다.
렘브란트는 성수를 가지러 가기 위해 자리를 비웠던 그날 밤의 일을 몹시 후회했다.
렘브란트는 빨리 돌아오려 했지만 여러 사람에게 붙잡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세드릭이 한참 궁인들을 학살하고 있던 상황이라 성기사들이 렘브란트를 지키려 들었기 때문이다.
마침내 그들을 설득하여 렘브란트가 루시테를 찾으러 돌아왔을 때는, 낭자한 핏자국과 엉망진창이 된 흔적만을 확인 할 수 있을 뿐.
그 어디에도 루시테는 없었다.
“후우…….”
렘브란트는 고민에 가득 차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 누구도 온전히 갈망을 이루지 못하리라.
렘브란트는 주신의 계시를 떠올렸다.
그 계시가 내려왔을 때, 이 여정이 힘겨워질 것은 예상했으나. 그렇다고 황제가 서거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발칸트리히 황제는 그날 렘브란트를 따로 만나러 온 기사로 인해 살해를 당했다.
거기에다 제 조카 루시테가 이 황성에 있었으며, 그 기사와 루시테가 꽤 긴밀한 사이이기까지 했다.
그 기사가 친히 루시테와 만나 달라며 자신에게 부탁을 했기 때문이다.
조카와 주신의 계시. 그 모든 것들이 긴밀하게 얽혀 있었다.
‘헤카레트시여.’
렘브란트는 괴로운 얼굴로 성호를 그었다.
렘브란트는 이 모든 일이 이제 시작에 불과할 뿐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대신관으로서의 예지였다.
* * *
레일리는 황성으로도 돌아가지 않고, 아무 데도 가지 않고 며칠을 계속 산 중턱 하우스에 머물렀다.
레일리의 하루 일과가 처음으로 단출해졌다.
일어나면 가장 먼저 루시테를 살피고, 마법으로 집 주변 결계를 강화하고.
리브, 에단, 노이와 함께 밥을 먹고. 그리고 루시테가 쓰다 만 책을 읽고.
늦은 오후쯤 되어서는 창가에 앉아 사색에 잠기고.
레일리는 이렇게 오래 스스로에 대해 생각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존재의 의미, 엘라임이 말한 해답에 대해, 또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런 것들을 긴 시간을 들여 고민했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황성과 바깥이 그토록 소란스러운 때에도 산 중턱 하우스는 조용하기만 했다.
찾아오는 이도 없었고 떠나는 이도 없었다. 식료품 저장고에 쌓인 먹거리도 풍족했다.
서로가 유일한 가족인 그들은 이곳이 유일한 안식처였다.
다만 산 중턱 하우스에 머무르는 이들이 바라는 유일한 것이라면, 그들의 주인이자 소중한 가족인 루시테가 어서 일어나는 것뿐이었다.
모두가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지만 바라고 또 바랐다. 루시테가 일어나기를.
모두가 문득 생각나면 고개를 들고 루시테가 있는 쪽을 바라보곤 했다.
그렇게 또 하루가 가고 이틀, 사흘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조용한 새벽.
어스름이 밝아오던 때에 미동도 없이 누워있던 루시테가 눈을 깜박였다.
긴 연보랏빛 속눈썹이 희미한 빛이 비치는 어둠 속에서 팔랑였다.
루시테는 바짝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으음…….”
루시테는 손바닥으로 침대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얼마나 잠들었던 건지,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일어나 앉으려니 머리가 핑 돌고 어지럽기까지 했다.
루시테는 습관적으로 눈을 비비려 손을 들었다.
“어?”
루시테는 제 손을 보고 멈칫했다.
그러니까 그녀의 손은 맞는데, 그녀의 손이 아닌 것 같았다. 말랑해 보이는 작은 손이 아니었다.
루시테는 황급히 머리칼을 확인했다.
어두웠지만 또 색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어둡지는 않았다.
루시테는 희미한 빛에 의지하여 제 머리칼을 헤집었다.
허리는 훌쩍 넘을 것 같은 긴 보라색 머리칼은 분명 그녀의 것이었다. 잡아당기면 아팠고 뽑으면 따끔했다.
“저주가 풀렸구나.”
루시테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왜일까. 실감이 안 났다.
그토록 오랫동안 그 작은 몸뚱아리로 생활을 했으니 당연한 걸까.
루시테는 길어진 제 팔과 다리를 쓸어보았다.
볼살이 다 빠져 홀쭉해진 얼굴도.
모든 게 어색했다. 지난 생애 한 번 겪어봤음에도.
워낙 빨리 죽어서 그랬나. 루시테는 제 몸의 모든 게 새삼스레 이상했다.
루시테는 가만히 앉아 눈을 깜박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레일리!”
루시테는 비명처럼 외쳤다.
쓰러지기 직전의 상황들이 물밀 듯 떠올랐다.
레일리를 일말의 망설임 없이 칼로 찌르던 세드릭. 레일리의 뼈가 세드릭의 검에 으스러지는 소리.
“아, 안 돼. 안 돼! 레일리.”
루시테는 침대에서 나와 방문으로 빠르게 걸었다. 그러다 또 멈칫했다.
루시테는 그제야 자신이 있는 곳이 산 중턱 하우스에 있는 그녀의 방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낮에는 따스한 볕이 들고 밤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그녀의 방.
너무도 익숙하고 또, 그리워했기에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집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내가……. 내가 어떻게 여기에 있어?’
당황한 루시테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루시테는 방문을 벌컥 열었다.
다른 걸 다 떠나 레일리, 그가 몹시 걱정되었다. 그의 피가 쏟아져 나오던 마지막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루시테는 손끝을 덜덜 떨었다.
‘만약 그가 그대로 죽…… 죽, 죽…… 었다면…….’
루시테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루시테는 천천히 문고리를 밀었다. 힘이 없는 다리가 휘청거렸다.
루시테는 복도에서 한두 걸음 발을 뗐다가 그대로 주저앉았다.
쿵.
낡은 나무 복도가 작게 울렸다.
안 그래도 몸에 힘이 없는데 레일리의 잔상이 떠오르니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어쩌면 좋아. 레일리.
루시테는 입술을 덜덜 떨었다.
그때였다.
“루시테?”
어둠 속에서 부드러운 음성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루시테는 고개를 들었다. 긴 머리칼이 그녀의 어깨를 타고 물결처럼 흘러내렸다.
복도의 끝 쪽에서 들려온 목소리. 그 사람이 누구인지 실루엣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루시테는 한 번에 그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지를 알아보았다.
“레, 레일리?”
루시테는 눈을 크게 떴다.
‘내가 아직도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복도는 어두웠고 사방이 적막했다. 너무도 고요한 분위기 속에 루시테는 몽롱함 마저 느꼈다.
곧 복도의 끝 어둠 속에서 긴 형체의 사람이 루시테가 있는 쪽으로 나왔다.
루시테는 고개를 높이 쳐들어 그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으나 그가 루시테의 앞에 무릎을 굽히는 게 먼저였다.
“루시테. 드디어 일어났군요.”
레일리가 루시테의 팔을 잡고 그녀를 쑤욱 일으켜 세웠다.
“앗.”
루시테의 몸이 또 휘청였다. 이상하게 몸에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갔다.
레일리가 휘청이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레일리…….”
익숙한 향기가 루시테의 코끝으로 훅 풍겨왔다.
서늘하면서도 달콤한 머스크 향. 레일리, 그의 몸에서 나는 향기였다.
루시테는 저도 모르게 그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큰 안정감이 그녀를 감싸 안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몸에 힘이 안 들어가십니까?”
그녀를 걱정하는 부드러운 음성이 루시테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려 귓가를 간질였다.
그가 얘기할 때마다 닿아 있는 몸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살아있음. 살아있는 레일리. 그 기분 좋은 떨림이 루시테를 몹시 기쁘게 했다.
“막 깨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루시테가 오래 잠들어 있었어요.”
레일리가 루시테를 훌쩍 안아 들었다. 루시테는 순식간에 레일리의 팔에 들려 품에 안겨 있었다.
“방으로 다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루시테는 꿈인지 생시인지, 어리둥절함을 느끼며 레일리의 부축을 받아 침대에 걸터앉았다.
“레일리.”
루시테는 제게서 멀어지려 하는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레일리.”
이 꿈이 깨어 버릴까 봐. 갑자기 레일리가 피투성이로 변해버릴까 봐.
루시테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레일리를 바라보았다. 루시테의 보랏빛 눈동자에 간절함이 담겼다.
그가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레일리는 의자를 끌어와 앉으려다 그냥 루시테의 옆에 앉았다. 침대가 움푹 들어갔다.
둘은 잠시 눈을 맞추고 저마다 생각에 빠져 그대로 있었다.
레일리는 루시테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선명하게 빛나는 짙은 보랏빛 눈동자에 그의 얼굴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저주에 걸려 어린 모습이라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는 익히 들었지만, 막상 성숙해진 그녀를 마주하니 레일리는 생소하게 느껴졌다.
누워만 있던 그녀와 이렇게 마주 본 그녀는 또 달랐다.
생소하면서 이상한 감정이 레일리의 가슴 속에 피어올랐다.
그녀가 깨어났다는 안도감. 무사하다는 안도감.
그리고 다른 어떤 감정.
“레일리.”
“네. 루시테.”
“이거 꿈 아니죠?”
루시테의 말에 레일리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닙니다. 루시테.”
“그러면 어떻게…… 어떻게…….”
루시테는 말끝을 흐렸다. 차마 어떻게 살아있냐고 물어보기 어려웠다.
레일리가 지금이라도 이 모든 게 꿈이었다고 할까 봐.
그러나 레일리는 루시테가 뒷말을 무엇을 삼켰는지 이해했다. 그리고 그녀가 무엇을 불안해하는지도.
레일리는 루시테의 손을 끌어당겨 제 배에 대었다. 작은 온기가 레일리의 배에 닿았다.
루시테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레일리를 바라보았다.
“상처가 없어졌습니다. 당신이 절 살린 것 같습니다. 루시테.”
루시테의 눈이 커졌다.
루시테는 레일리의 배를 손바닥으로 더듬었다.
정말, 정말로 상처가 느껴지지 않았다.
커다란 칼이 박혀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던 그 흉터가 얇은 옷 위로 아무리 매만져 봐도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슬슬 간지럽습니다.”
레일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루시테는 그제야 아차 싶어 레일리의 배에서 손을 뗐다. 자신이 너무 그의 배를 만져댄 모양이었다.
하지만 루시테는 이제야 레일리가 살아있으며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순간 자신의 저주가 완전히 풀렸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발현된 성력으로 레일리를 살렸던 것 같았다.
‘주신 헤카레트가.’
헤카레트가 정말로 그녀의 기도를 들어 준 것이었다.
루시테는 기분이 이상하여 눈을 쉼 없이 깜박였다.
그녀는 양 손바닥을 들어 올렸다. 이제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안에서 샘솟듯 넘쳐흐르는 신성한 기운을.
* * *
깨어난 루시테를 마주한 노이와 리브, 에단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곧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노이는 그녀의 다리에 달라붙어 눈물을 쏟았고, 리브는 그녀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렸다.
에단은 그녀의 옷자락을 붙잡고는 눈물을 훔쳤다.
다 컸다고 느껴졌으나 그들은 여전히 아직 어렸고 마음이 약했다.
그들의 구원자이자 정신적 지주인 루시테가 누워만 있으니 그간 몹시 불안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마음을 놓았다.
루시테가 어떤 모습이건 상관없었다. 루시테가 깨어나 그들 앞에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리브와 노이, 에단은 두려움이 모두 가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미안해.”
루시테는 슬픈 얼굴로 그들을 다독였다.
열흘이나 자신이 잠들어 있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또 그간 걱정했을 가족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렸다.
그들은 그렇게 끌어안고 한동안 그간의 울음과 그리움을 토해내었다.
루시테는 1층의 테이블에서 리브가 끓여준 맑은 수프를 먹으며 천천히 기운을 차렸다.
레일리를 포함한 모두는 그런 루시테의 주변에 둘러앉아 루시테를 지켜보았다.
“왜들 그렇게 봐?”
“너무너무 신기해요, 아가씨.”
리브가 몽롱한 눈빛으로 턱을 괴고 루시테를 올려다봤다.
“루시, 루시 변했어. 그런데 루시 맞아. 루시 신기해. 신기한 루시 좋아.”
노이가 말을 보탰다.
“정말 신기합니다. 저주가 풀려서요.”
에단이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루시테는 손을 뻗어 제 옆에 앉아 있는 노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기분 탓인지 노이가 좀 더 큰 것 같았다. 통통하던 배가 조금 홀쭉해진 것도 같았다.
노이는 기분이 좋은지 루시테의 손에 제 머리를 부볐다.
“레일리 그런데 여기 계셔도 돼요? 황제 폐하가 찾지 않으시나요?”
루시테의 말에 그녀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레일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사실 어제 정체를 숨긴 채 광장으로 내려가 상황을 살피고 온 터였다.
온 아테라가 소란스러웠고, 레일리는 그곳에서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황제의 죽음.
그를 얽어매던 끔찍한 아비의 죽음.
강제로 사람을 죽이게 만든 인간. 그가 죽었더랬다. 세드릭 디에고의 손에.
그러나 황제의 장례는 아직도 치러지지 않았다고 했다.
자신을 황제로 인정해주기 전까지는 국장을 치르지 않겠다는 황태자.
신전에서 국장을 치른 이후에야 황위 계승식을 진행하겠다는 대신관 렘브란트.
그 둘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아테라 전체가 살얼음판이었다.
사람들은 불안해했고, 갑작스러운 황제의 죽음과 소란스러운 황성의 소문에 웅성거렸다.
황제의 시체는 관 속에서 썩어들어가는데 열흘이 넘도록 장례가 치러지지 않다니. 이례적인 일이었다.
레일리의 손에 죽어 나가던 레지스탕스들은 다시금 세력을 뭉쳤다.
이제 그들을 저지하는 대마법사와 황제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 소란스러운 틈을 타 황태자를 끌어내리자며, 레지스탕스들은 음지에서 저항의 불길을 넓혀갔다.
어리석은 황태자는 황제가 자신을 위해 레일리를 이용한 줄도 몰랐다.
그저 황제가 레일리를 총애하는 줄로만 알았지. 레일리가 레지스탕스를 소탕했는지도, 그게 모두 자신의 위치를 지켜주기 위함인지도 몰랐다.
그는 황제 위를 차지하는 데에만 눈이 멀어 모든 돌아가는 상황과 민심에 귀를 닫고 눈을 가렸다.
알렉산더는 자신이 사주해 살해했지만 명색이 황제인 아버지를 관에다 썩어가게 내버려 두었다.
시체인 아버지마저 대신관을 협박하는 용도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대신관이 자신을 인정해줄 때까지 국장을 치르지 않겠다며 협박하려는 용도.
점점 민심은 황태자를 떠나가고 있었다.
황제를 죽인 시해범을 공개 처형하지도 않고, 아비를 관 속에 벌레가 나도록 내버려 두는 파렴치한 아들을, 백성들은 손가락질했다.
원래의 황권이 강대한 이크릭스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었다.
천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마법 대제국 이크릭스가 크게 기우뚱거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입니다. 그래서 헤카레트의 대신관은 아직 황성에서 머물고 있다고 하더군요.”
레일리는 루시테에게 현재 상황을 가감 없이 설명해주었다.
그녀가 깊이 관계되어있는 일이기도 했고, 그녀에게도 알 권리가 있다고 여겼으므로.
세드릭과 헤카레트의 대신관. 그들의 일에 대해 레일리는 최대한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루시테는 눈을 내리깔았다. 눈동자 아래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루시테는 어두운 얼굴로 깊은 생각에 잠겼다.
“대신관님이 황성에…….”
세드릭으로 인해 너무 급작스러운 상황이 닥쳐 잊고 있었다.
헤카레트의 대신관이 그녀더러 조카라고 부른 것을.
루시테는 그제야 그날의 기억을 상기해냈다.
‘내가 대신관의 조카라고.’
루시테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째서 자신은 지금까지 어머니의 이름도 제대로 몰랐던 걸까.
왜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던 걸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수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어머니의 흔적을 지우려고 한 것 같지 않은가.
태어나서부터 그렇게 세뇌를 받아 왔기에 어머니에 대한 부분에 의문을 갖지 않았다. 궁금해할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물어보면 시녀들은 입에 담지 못할 험한 욕을 하며 루시테의 생모를 모욕했다.
황제를 유혹한 더러운 여자, 천한 것.
주제에 감히 높은 곳을 넘본 것.
몇 번이고 그런 대답이 돌아오자 루시테는 더 이상 어머니에 대해 알고 싶다는 생각을 갖지 못했다.
자신의 어머니는 황제를 유혹해 자신을 낳은, 신분 상승을 꿈꾸던 탐욕스럽기 그지없는 흔하고 천한 하녀.
그 정도라고 루시테는 생각해 왔다.
어머니의 못된 욕망 때문에 자신이 저주에 걸린 것이라고. 이 모든 괴로움은 엄마 때문이라고.
루시테는 그렇게 생각해 온 것이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어머니라는 존재를 원망했던가.
욕망 때문에 자신을 저주에 걸리게 하고 차가운 세상에 홀로 둔 어머니.
그 존재를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고 싫어했던가.
그런데…….
그런데 뭐라고?
‘내 어머니가 누구라고?’
실종된 전대 대신관 에일란테라고?
루시테의 손끝이 덜덜 떨렸다.
지금껏 그녀가 알던 모든 세상이 뒤집히는 느낌이었다.
대신관을 온전히 믿기 어려웠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성녀니까.’
어머니가 역대 가장 강력한 성력을 가졌던 대신관 에일란테였다면 자신의 저주와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대신관이란 신전의 최고 우두머리이면서 일종의 종신 사제다.
신의 선택을 받고 신 앞에 엎드려 겉옷을 태우고 영원의 맹세를 올린다.
평생 당신의 종이 되어 순종하겠노라고. 평생 당신의 동반자가 되어 세상의 인연을 맺지 않겠노라고.
그런 존재인 대신관이 세상과 연을 맺고 아이를 낳아 저주를 받은 것이다.
본인은 아이를 낳자마자 영혼이 거둬지고, 그녀의 아이인 루시테는 저주를 받고.
“…….”
감당할 수 없는 사실이 폭풍처럼 한 번에 몰아치는 것 같았다. 어떻게 이제야 알게 된 걸까.
어떻게 이제야…….
‘어머니…….’
루시테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어쩐지 눈앞이 흐려지려 했다.
“레일리.”
“네. 루시 양.”
레일리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그는 씁쓸한 눈길로 루시테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시시각각 표정이 어두워지는 루시테가 몹시 안쓰러웠다.
그 얼굴에서 그녀의 지난날 삶의 풍파가 읽히는 듯했다.
“저 이제 어떻게 하죠?”
루시테의 목소리가 떨렸다.
“저……. 어떻게 해야 하죠?”
레일리를 바라보는 루시테의 보랏빛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어떻게 하냐는 물음은 레일리에게 하는 것이면서도 또한 그녀 자신에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리브와 노이, 에단은 정확히 무슨 상황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조용히 기다렸다.
그들의 주인의 괴로움이 절절히 느껴졌기에.
그들에게는 그들의 주인이 언젠가 모든 것을 설명해주리라는 믿음이 있었으므로 가만히 주인의 옆자리를 지켰다.
레일리의 시선이 루시테의 덜덜 떨리는 손끝에 닿아 있었다.
레일리는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그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당신은 어떻게 하고 싶습니까?”
“저는…….”
루시테는 눈을 내리깔며 가만히 생각했다.
“저는 대신관님을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어요.”
그래. 그를 다시 만나봐야 할 것 같았다.
루시테는 다짐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리고 세드릭도…….”
세드릭.
루시테는 괴로움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날의 세드릭은 처음 본 순간부터 이상했다. 마치 무엇인가에 씐 사람처럼 눈빛이 정상이 아니었다.
아마 세드릭은 죽을 것이다. 황제를 살해했으니까.
황태자가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고는 해도 그는 분명 세드릭을 처분할 것이다. 알렉산더는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루시테는 알렉산더의 탁한 초록빛 눈빛을 떠올리며 한숨을 삼켰다.
‘세드릭…….’
루시테는 그만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해졌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지만 봐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를 그대로 죽게 내버려 두면 왠지 평생 마음의 짐으로 남아 있게 될 것 같았다.
“알았습니다. 루시. 그와 만나게 해드리겠습니다.”
레일리가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의 목소리가 마치 산책이라도 가자는 데 동의하는 사람처럼 산뜻했다.
“네? 레일리가요?”
루시테가 오히려 놀라 레일리에게 되물었다.
그에게 황성이 어떤 곳인지를 누구보다도 루시테가 가장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의 모든 것을 억압하고 짓누르는 곳. 그를 고통에 허덕이게 하는 곳. 끔찍한 장소.
아마 이 세상에서 그녀보다 더 레일리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아니요, 레일리. 황성을 들어갈 방법은 제가 알아서 찾아볼게요. 이제 발칸트리히 2세는 죽었어요. 이 세상에 당신을 얽맬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아무도 없어요.”
루시테는 빠르게 얘기하곤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강하면서도 단호하게.
“저는 황제처럼 당신을 묶어두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레일리. 이제 멀리 가서 자유롭게 살아요. 당신을 얽매는 곳에서 떠나버려요.”
레일리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루시테가 이런 얘기를 할 줄은 몰랐다.
망설임 없이 그에게 자유를 찾으라 하다니.
레일리의 마음 속에 만감이 교차했다.
레일리는 루시테의 그 한마디로 인해, 그 자신이 깊이 그리고 온전히 이해를 받는 느낌을 받았다.
루시테가 온전히 그의 고통에 공감해준 것만 같은, 누군가와 깊이 마음이 통하는 그런 느낌을 말이다.
레일리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무런 계산 없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누군가가 그를 알아준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도 썩어 문드러진 마음이 치유될 수 있다니.
“감사합니다. 루시테.”
그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 인사를 했다.
루시테는 처음 보는 그의 눈부신 미소에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몹시 후련해 보였다.
“그래서, 떠나실 건가요?”
그가 떠난다면 몹시 아쉽겠지만…….
루시테는 그를 위해 웃으며 배웅해줄 생각이었다.
“아뇨.”
레일리가 미소를 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저는 여기에 남아 루시테가 하고자 하는 일을 도울 생각입니다.”
“네?”
생각지도 못한 거절이 돌아오자 루시테는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연보랏빛 속눈썹이 나비처럼 팔랑였다.
“하지만, 레일리. 그러면 당신이 황성에 또 들어가야 하는데,”
“괜찮습니다. 진짜 자유를 찾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느낀 바가 있으니까요. 저도 황성으로 돌아가 할 일이 있습니다.”
레일리가 서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레일리의 은빛 눈동자에 매서우면서도 단호한 의지가 담겼다.
루시테는 차마 그게 무엇인지 레일리에게 물어보지 못했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굉장히 위험한 일인 것 같았다.
루시테가 긴장을 한 채 레일리를 쳐다보는데, 레일리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기회에 일전에 루시와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겠군요.”
“무슨 약속 말인가요?”
루시테가 의아한 눈빛을 했다.
“노이테리온.”
레일리가 루시테의 옆에 앉아 있는 노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뇨옹?”
노이는 뜬금없이 제 이름이 불리자 화들짝 놀라며 몬스터 같은 소리를 냈다.
루시테는 그 모습이 귀여워 노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노이가 왜요?”
“마지막 용의 성장을 돕겠다고 약속했던 것을 아직 지키지 못했습니다.”
마지막 용이라는 말을 들은 리브와 에단이 입을 쩍 벌렸다.
그저 많이 먹는 돼지인 줄로만 알았던 노이가 용이라니?
멸종되었다는 그 용?
리브와 에단이 동시에 노이를 쳐다보았다.
노이는 그 시선이 쑥스러웠는지 ‘삐로로록!’ 소리를 내며 짧은 팔다리를 배배 꼬았다.
“노이, 너 정말 용이야?”
리브가 눈을 크게 뜨고 노이를 향해 물었다.
“뇨옹!”
노이가 짐짓 고개를 높이 쳐들고 거만하게 외쳤다.
루시테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바라보다 레일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루시테는 지난날 레일리와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노이의 성장을 도와주시겠다고요……. 그런 약속을 했었죠.”
그간 너무 많은 일이 있었기에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던 일이었다.
“드래곤이라는 종족은 제 새끼에게 여러 가지를 전수 합니다. 용언과 지혜, 그리고 자신의 마나의 일부를 주어 드래곤을 성장시키지요. 제가 비록 용은 아니지만.”
레일리가 자신감 있는 얼굴로 씩 웃었다.
“이 세 가지를 제가 모두 이루어 줄 수 있을 것 같군요.”
“그게 정말인가요?”
루시테는 진심으로 놀랐다.
루시테는 노이를 위해 드래곤에 대해 어느 정도 공부를 했기에 그가 한 말이 얼마나 대단한 이야기인 줄을 알았다.
용언은 용종만이 사용하는 특별한 언어. 그 언어를 레일리가 노이에게 알려줄 수 있다고?
말도 안 됐다.
이것만도 말이 안 되는데 용의 지혜에다 용의 마나를 노이에게 줄 수 있다고?
루시테는 레일리가 무슨 생각인지 가늠이 안 됐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용의 지혜는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범위의 영역이었다. 단순한 생각을 뛰어넘어 거대한 지식의 보고였다.
거기다 드래곤의 마나를 주어 노이를 성장시킨다니.
대체 레일리가 어떻게 하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게 가능한 이야기에요? 아니, 가능하긴 한 거예요?”
루시테는 재차 물었다.
레일리가 대마법사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용의 영역까지 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레일리가 하는 모든 얘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가능합니다.”
레일리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가득 차 있었다.
오만하고 자존감 높은 레일리.
루시테가 알던 처음의 그 레일리의 얼굴이었다.
“뭐, 조금 힘들긴 하겠지만 방법이 있을 것 같군요. 이번에야말로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레일리가 오만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루시테는 그의 오만한 얼굴에 오히려 믿음이 갔다.
이제야 그녀가 알던 레일리 같았다. 끔찍한 황성의 억압을 벗어나 스스로 일어나는 진짜 레일리.
그래서 루시테는 기쁘게 대답했다.
“좋아요! 그럼 부탁할게요. 레일리. 우리 잘 해봐요.”
“물론입니다.”
레일리도 흔쾌히 대답했다.
리브와 에단은 무슨 이야기인지 정확히 모르면서도 덩달아 기뻐했다.
작은 산 중턱 하우스에 아주 오랜만에 기쁨이 가득 퍼져나갔다.
* * *
“레일리 정말 그렇게 하고 갈 거예요?”
“쉬잇. 톰이라고 부르라니까요.”
머리에 이상한 가발을 얹은 레일리가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대었다. 고동색 더벅머리 가발이었다.
루시테는 의아했다. 그가 정말 저걸 변장이라고 생각하는지.
레일리는 제 딴에 변장을 한다고 했지만 루시테가 보기에 그는 그냥 더벅머리 가발을 쓴 레일리 같았다.
날렵한 턱선과 잘생긴 얼굴이 이상한 가발에도 하나도 가려지지 않았다.
“레일리,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이건 말도 안 돼요.”
루시테는 결국 산 중턱을 채 다 내려가기도 전에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녀보다 몇 걸음 더 내려간 레일리가 루시테가 따라오지 않자 그도 멈춰 섰다.
그가 뒤로 돌아 루시테를 바라보았다. 그가 더 바닥이 낮은 쪽에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키가 커서 눈높이가 비슷했다.
“무엇이 말도 안 됩니까?
레일리가 눈을 부드럽게 휘었다.
“그야…!”
루시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연히 말이 안 됐다. 저렇게 허술하게 분장을 하고 황성을 들어가겠다니.
분명 모두가 레일리를 알아볼 것이다.
2황자 카일러스가 잘생겼다는 소문이 얼마나 자자한지를 레일리 본인은 잘 모르는 것 같은데.
책이고, 신문이고 사방 천지에서 2황자의 외모를 떠들어댔다.
심지어 황성에서는 카일러스에 대해 여기저기에서 뭉쳐 수군대는 시녀들 때문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갔다간 바로 들킬 거예요. 모두가 레일리만 쳐다볼 거라고요.”
“저만 쳐다볼 거라고요?”
레일리가 픽 웃었다. 루시테의 말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아니, 그럴 리가 없다뇨.”
루시테는 답답함에 가슴을 탁탁 두드렸다.
레일리는 그렇게 아는 것도 많고 똑똑하면서 자기가 잘생겼다는 것도 모르다니.
루시테는 불퉁한 얼굴로 레일리를 바라봤다.
“루시테는 변장하지 않습니까?”
“네에?”
지금 레일리의 변장에 대해 말하는 중인데 레일리는 뜬금없이 그녀에 대해 이야기했다.
“제가 왜 변장해요? 이대로 가도 돼요.”
“어째서입니까?”
“봐요. 누가 절 알아보겠어요?”
루시테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자신도 저주가 풀린 스스로가 어색한데 다른 사람은 알아보겠는가.
대체 누가 꼬맹이 루시 필드가 이렇게 커졌다는 것을 믿을까.
게다가 아테라에는 그녀가 저주에 걸렸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몇 없었다.
그러니 애초에 저주가 풀렸다는 걸 사람들은 가정할 수조차 없을 터였다.
심지어 에이프릴 식구들과 마주친다 해도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루시테는 장담할 수 있었다.
레일리는 당당하게 어깨를 편 루시테를 보곤 피식 웃었다.
“그런 말이 아닙니다, 루시테. 제 말은 지금의 루시테가 너무 눈에 띈다는 뜻이었습니다. 루시테와 함께 있으면 사람들은 저는 신경도 쓰지 않을 거예요. 지금 제 변장을 걱정하실 상황이 아니실 텐데요.”
레일리는 웃음 섞인 말을 하며 루시테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다는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네?”
루시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뭐가 눈에 띄나요?”
이제야 드디어 평범해졌는데 무슨 이야기인지. 루시테는 저주를 푸는 것도 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더 이상 더운데 두터운 로브를 둘러쓰거나 커다란 모자를 턱까지 눌러 쓸 필요도 없었으니까.
이제야 제 나이로 보이는데 굳이 변장할 필요가 없었다.
“정말 모르십니까?”
“그러니까 무엇을 말이에요?”
루시테는 답답한 마음에 레일리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말해주세요. 제가 뭘 모르나요?”
레일리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루시테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는 루시테의 어깨 아래로 흐르는 긴 머리칼에 손을 넣어 머리칼을 손바닥 위로 올렸다.
물이 흐르듯 부드러운 보랏빛 머리칼이 그의 손바닥 위에 흘러내렸다.
레일리는 머리칼을 얹은 손바닥을 그대로 제 입술 가로 가져갔다.
“레, 레일리…….”
당황한 루시테는 모기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레일리의 모든 행동이 느릿하게 보였다.
그가 그녀의 머리칼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그대로 눈만 들어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녀를 빤히 올려다보는 살짝 치뜬 은빛 눈동자에 루시테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고작 그가 그녀의 머리칼에 입술을 대고 있는 것뿐인데도 루시테는 몹시 부끄러워졌다.
왠지 모르게 루시테는 그의 모습이 무척 야하게 느껴졌다. 레일리에게서 묘한 색기가 풍겨 나오는 것 같았다.
루시테는 갑자기 그가 낯선 남자처럼 느껴졌다. 대마법사 레일리나 2황자 카일러스가 아닌 평범한 남자.
“어, 어서 알려 주세요!”
루시테는 뒤로 한 걸음 물러서며 레일리의 손에서 그녀의 머리칼을 확 빼냈다.
분명 변장에 대한 추궁을 루시테가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이렇게 입장이 달라져 버린 걸까.
루시테는 레일리의 언변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말해주세요. 제가 무엇을 모르는지요.”
어느새 루시테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레일리는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그러더니 그는 반달처럼 눈을 휘며 입꼬리를 올렸다.
“루시테가 너무 아름다워서, 이렇게 사람들이 루시테를 대할 거라는 얘기입니다.”
“네에?”
레일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루시테가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저보다 루시테가 훨씬 시선을 끌 겁니다. 그러니 제 변장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지요.”
레일리가 빙긋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가 걸음을 옮기자 루시테는 황급히 그를 따라 다시 걷기 시작했다.
“제가 아름다워요? 그렇지 않은데…….”
루시테는 레일리의 옆에 걸음을 맞춰 걸으며 중얼거렸다.
지난 세 번의 인생 동안 더럽다거나 천하다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서 그런 걸까.
루시테는 레일리의 말이 거짓말처럼만 느껴졌다.
아무리 벗어나려 노력해 봐도, 저주받았다는 손가락질이 여전히 그녀를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루시테는 고개를 수그리고 목 뒤를 매만졌다.
흉측하게 자리한 울퉁불퉁한 흉터가 손에 잡혔다.
거친 가위 날이 파고든 그 흉터는 아직도 화인을 맞은 것처럼 선명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마치 몸이 아닌 영혼까지 낙인이 찍히듯 저주의 자욱이 그렇게 루시테를 따라다녔다.
레일리가 갑자기 손을 뻗었다. 루시테가 채 눈치채기도 전에 레일리가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시테. 루시테는 아름다워요. 광장에 내려가 보면 금방 느낄 거예요.”
레일리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서늘한 목소리가 다정했다.
이제야 루시테가 아는 그 레일리 같았다.
그래. 조금 전 느꼈던 그에게서 흐르던 낯선 남자 같은 느낌은 그녀의 착각이었던 거다.
레일리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루시테는 긴장을 풀고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레일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제야 루시테의 머리 위에서 손을 뗐다.
둘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아테라의 시내에 도착해 있었다.
‘으음…….’
루시테는 좌불안석이 되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레일리에게 바짝 붙어 걸었다.
“저, 레일리.”
루시테는 레일리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레일리가 부드러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왜 그러십니까, 루시테?”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아니요.”
“그런데 사람들이 왜 이렇게 쳐다보는 거죠?”
루시테는 불안한 눈길로 주위를 살폈다.
시선을 돌리는 족족 모르는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바쁘게 가다가도 문득 고개를 돌려 그녀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다.
“거봐요. 사람들이 저는 쳐다도 보지 않죠? 이게 다 루시테 덕분입니다.”
레일리가 장난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내 덕분이라고?’
루시테는 치맛자락을 쥐었다 폈다 했다.
레일리가 아름답다고 얘기했던 게 정말일까.
루시테는 지난 생에 저주가 풀리고 만난 사람이 별로 없었다. 계속 어딘가에 갇혀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자신의 얼굴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평범해졌다고는 생각했을 뿐.
‘으음…….’
사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아무래도 집에서 모자라도 가져왔어야 했던 모양이다.
루시테는 고개를 들어 모자가게를 찾았다.
급한 대로 하나 사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들렀다 갈까요?”
루시테의 시선이 길거리의 매대들에 향하는 것을 본 레일리가 말했다.
루시테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네. 빨리요.”
루시테와 레일리는 즐비한 가게들 앞을 서성였다.
꽃부터 레이스, 화려한 리본이 달린 모자들이 가게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모자만 파는 가게, 리본만 파는 가게 등 다양했다.
“흐음…….”
레일리는 턱을 쓰다듬으며 루시테를 바라보았다.
“루시테, 여기보다는 옷가게를 먼저 가는 게 어떠십니까?”
“옷가게를요?”
“네, 시간은 많으니까요.”
레일리가 루시테의 어깨를 손으로 감쌌다. 그는 그녀를 살롱 거리가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
루시테는 레일리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옷을 사러 가자니. 자신의 옷이 너무 허름해 보였던 걸까.
루시테는 시선을 내려 제 옷을 살폈다.
저주가 풀려 키가 크는 바람에 맞는 옷이 없었다.
그래서 급한 대로 있는 옷을 잘라 천을 덧대어 다시 기웠는데, 옷의 모양새가 퍽 좋진 않았다.
겨드랑이 쪽은 꽉 끼어 보였고 치마는 짧았다. 딱 봐도 낡은 치마를 기워서 계속 입는 모양새이긴 했다.
레일리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한 옷가게 앞에서 멈춰 섰다.
루시테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제 수중에 얼마나 있는지를 생각했다.
“저, 레일리 제가 가진 돈이 얼마 없는데 그냥 다른 곳으로 가는 게…….”
“괜찮아요. 생각보다 싼 옷도 많아요. 겉으로 보기만 화려한 겁니다.”
레일리가 루시테를 다독이며 그녀를 가게 안으로 밀었다.
루시테는 레일리의 말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하는 수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종업원처럼 보이는 사람이 문이 열리자마자 다가왔다. 머리를 하나로 틀어 올린 젊은 여자였다.
그녀는 루시테의 아름다움에 놀라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곧 허름한 차림을 보곤 눈살을 찌푸렸다.
종업원이 보기에 그 옆에 서 있는 더벅머리를 눈까지 덮은 남자도 그렇게 돈이 있어 뵈지는 않았다.
둘 다 이런 곳에 오기에는 후줄근해 보였다.
“옷 사러 오신 건 맞으시겠죠?”
종업은 확인차 물었다.
어쩌면 저들이 구걸하러 들어온 사람일 수도 있으니까.
“불쾌하군.”
레일리가 대뜸 내뱉었다. 그의 목소리가 무척 퉁명스러웠다.
“레일리?”
루시테는 놀라 그를 불렀다. 레일리가 왜 화가 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레일리는 굳은 입매를 풀지 않았다.
“마담 쉬라를 데려오세요.”
종업원은 레일리의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다. 저가 뭐라고 마담을 오라 가라 한단 말인가. 돈도 없으면서.
“쉬라 님은 지금 바쁘세요. 제가 용무를 도와드릴 테니 이쪽으로 와서 옷을 보세요.”
종업원은 비교적 싼 옷이 걸려있는 쪽 옷걸이를 가리켰다.
물론 비교적 싼 옷이라는 거지, 눈앞의 허름한 차림의 남녀가 사기에는 비쌀 것이다.
종업원은 이 둘이 어서 대충 가격을 보고 놀라서 나가길 바랐다.
거지들까지 일일이 상대해 줄 정도로 이 살롱이 한가한 곳이 아니니까.
딸랑.
그때 살롱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어서 오세요.”
종업원은 들어오는 사람을 확인하곤 기계적으로 인사했다. 오늘은 진상만 찾아오는 날인 모양이었다.
케이트. 매번 와서 한참 입어만 보고 옷을 한 벌 살까 말까 한 꽃가게의 가난한 종업원이었다.
“하아…….”
종업원이 레일리와 루시테더러 들으라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기계적인 미소로 방금 온 사람에게 말했다.
“어서 오세요, 케이트. 지금 쉬라 님은 부재중이시기 때문에 제가 옷을 고르는 것을 돕겠습니다.”
“네! 알아요! 바쁘시잖아요.”
새초롬한 목소리가 루시테와 레일리의 뒤에서 들려왔다.
루시테는 눈을 크게 떴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루시테는 몸을 홱 돌려 그들의 뒤를 따라 들어온 손님의 얼굴을 확인했다.
“케이트?!”
루시테는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날 이후로 정말 오랜만이었다.
케이트는 꽃집 에이프릴의 직원이었고 그녀와 함께 황성에 들어갔다가 옥에도 갇혔던 사람이었다.
비록 사이는 별로 안 좋았지만 무사한 얼굴이 보기 좋았다.
“케이트! 정말 오랜만이에요. 꽃집 식구들은 다 잘 지내나요?”
루시테는 케이트를 향해 인사했다. 케이트가 새초롬한 표정으로 눈을 치떴다.
케이트는 루시테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좀 예쁘장하게 생긴 건 알겠다만, 누군데 자신에게 아는 척을 하는 건지.
차림새를 보아하니 옷도 무슨 다 헐어 있는 게 아는 척 해봤자 아무 쓸모도 없을 것 같은 여자였다.
“누구세요? 저 아세요?”
케이트는 기분 나쁘다는 듯 루시테를 향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네?”
루시테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루시테.”
레일리가 피식 웃으며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루시테는 그제야 퍼뜩 깨달았다.
케이트가 알고 있는 사람은 저주가 풀리기 전의 안나이지, 저주가 풀린 후의 그녀가 아니었다.
“저를 어떻게 아시냐고요.”
케이트가 공격적인 말투로 루시테에게 한 걸음 다가서는데.
루시테는 그제야 손사래를 쳤다.
“죄송해요! 제가 아는 사람과 닮아서 착각했어요. 정말 죄송해요. 어서 일 보세요.”
루시테는 케이트에게 사과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흥.”
케이트는 고개를 홱 돌리곤 가게의 안쪽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레일리, 저희도 가서 얼른 사고 나가요.”
루시테는 괜히 민망하여 레일리의 옷소매를 잡고 재촉했다.
레일리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못이기는 척 루시테를 따라갔다.
원래의 그의 계획대로라면 마담 쉬라를 불러 루시테가 입을 만한 옷을 여러 벌 맞출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대로 루시테에게 맞춰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일리는 루시테와 함께 싼 옷이 걸려있는 코너로 다가갔다.
뭐가 되었든 그녀의 기분이 상하지 않는 것이 레일리에게는 우선이었으니까.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이 옷은 내가 먼저 찜한 옷이에요. 입어 볼 생각도 하지 마요.”
케이트가 루시테를 향해 경고했다. 어쩌다 보니 둘이 함께 옷을 고르는 상황이 되었다.
“네. 알았어요.”
루시테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케이트가 짚지 않은 다른 쪽의 옷을 살폈다.
케이트는 의기양양하게 옷을 꺼내다 문득 다시금 루시테를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분명히 모르는 사람이 맞는데, 이상하게 그녀의 순순한 태도가 익숙했다.
저렇게 얼굴만 번지르르한 사람은 모르는데, 저렇게 멍청할 정도로 순박한 사람은 한 명 알았다.
안나.
그날 황성에서 일이 있은 이후 하늘로 솟은 듯 사라져버린 작은 여자아이.
케이트는 유심히 루시테를 바라보았다.
‘에이. 그럴 리가 없지.’
케이트는 고개를 홱 돌렸다.
케이트는 루시테에게 신경 쓰기를 그만두고 곧 제 옷을 고르는데 푹 빠졌다.
그녀는 수십 벌이 되는 옷을 골라놓고 탈의실을 들어갔다 나왔다 했다.
케이트가 이미 거의 모든 옷을 찜해 놓았기에 루시테가 고를 수 있는 옷이 몇 벌 안 됐다.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루시테는 몇 벌 안 되는 옷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딱히 다 비슷비슷해서 고를 것도 없었다.
루시테는 그냥 그중 덜 화려해 보이는 옷을 집어 든 것뿐이었다.
“그게 마음에 드십니까?”
루시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일리가 종업원에게 루시테가 든 옷을 가리키며 입어 볼 수 있느냐 물었다.
“지금 탈의실 꽉 찬 거 안 보이세요? 저쪽에 앉아서 기다리세요.”
종업원이 쌀쌀맞게 대답했다.
루시테는 레일리의 눈치를 봤다. 레일리의 표정이 또 안 좋았다.
“레일리, 그냥 우리 다음에 올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루시테, 그거 아십니까?”
레일리가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세상에 돈이면 안 될 게 거의 없습니다.”
레일리의 표정이 악덕 마법사마냥 세상 사악했다.
레일리가 검지와 중지를 튕기자, 그의 손 위에 두꺼운 가죽 주머니가 나타났다.
레일리는 그 속에서 보지도 않고 무언가를 한 움큼 쥐어서 꺼냈다.
그는 종업원이 서 있는 테이블에 다가가더니 그 위로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쏟아버렸다.
후두두둑.
빨갛고 파란 색색의 보석들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로 떨어져 내렸다.
루비, 에메랄드, 사파이어, 호박…….
“이, 이게 무슨…!”
종업원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마침 탈의실을 나오던 케이트도 그 장면을 보곤 눈을 크게 떴다.
“마담 쉬라를 데리고 오세요.”
레일리가 오만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당신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으니 마담을 데리고 오면 내 눈앞에서 사라져 주시고요.”
레일리의 싸늘한 목소리가 사색이 된 종업원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종업원은 어찌할 바를 모르더니 곧장 가게의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우리는 마담이 올 때까지 여기에서 앉아서 기다리죠.”
레일리가 루시테를 이끌어 푹신해 보이는 소파에 앉혔다.
루시테는 놀란 눈을 깜박이며 레일리를 쳐다봤다.
“레일리, 그 보석들은…….”
“아아. 신경 쓰지 마세요. 저한테 저런 것들은 발에 채일 정도로 많으니까요. 루시테는 그냥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레일리가 거만하게 팔짱을 낀 채로 다리를 꼬았다.
보석이 널렸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이 몹시 자신만만했다.
눈을 덮는 더벅머리 아래로 그의 은빛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반짝였다.
문득 루시테는 잊고 있던 그의 집 응접실이 떠올랐다.
천장부터, 벽, 바닥까지. 온통 보석과 비싼 것투성이였던 그의 집.
샹들리에에 달린 거 하나만 뜯어가도 루시테의 반년 생활비는 될 것 같았더랬다.
샹들리에가 뭐였더라. 다이아몬드?
루시테는 레일리에게 돈 얘기를 꺼내기도 머쓱해졌다.
그 많은 보석은 루시테가 갚을 능력도 안 되었지만, 이 사람이라면 갚겠다느니 어쩌느니 말을 꺼내는 것 자체를 모욕으로 느낄 것 같았다.
루시테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냥 레일리의 옆에 덩그러니 앉아 마담을 기다렸다.
잠시 후 중년의 여성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그녀는 무언가를 하다 나온 모양인 듯 손등에 핀이 잔뜩 꽂힌 핀꽂이가 매여 있었다. 목에는 줄자와 긴 천을 걸고 있었다.
그녀는 쭈뼛거리는 그녀의 종업원이 따로 설명하기도 전에 루시테와 레일리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더벅머리를 하고 후줄근한 옷을 입은 레일리를 잠시 아무 말 없이 빤히 쳐다보았다.
레일리 역시 꼰 다리를 풀지 않고 그녀를 마주 바라봤다.
“어머! 세상에!”
날카로운 눈으로 레일리를 살피던 그녀가 갑자기 손뼉을 짝 쳤다.
“여기는 어쩐 일이신 거예요! 저는 돌아가신 줄로만 알았지 뭐예요. 이렇게 멀쩡하신 줄 알았으면 조금 덜 걱정했을 것을!”
“쓸데없는 소리.”
“어머 그렇죠, 그렇죠. 내 정신 좀 봐. 하여튼 제가 필요하시다면 불러주시지 그러셨어요. 그러면 제가 진작에 댁까지 직접 갔을 텐데. 아사드,”
“톰.”
레일리가 그녀의 말을 잘랐다.
“톰입니다.”
레일리가 비뚜름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네에! 그렇죠! 톰! 톰!”
그녀가 눈치 빠르게 레일리의 말을 알아듣고 제 말을 정정했다.
“이쪽 아가씨는…?”
“오늘 옷을 맞출 사람입니다.”
레일리가 루시테를 대신해서 그녀를 소개했다. 아주 단순하게.
‘옷 맞출 사람.’
“어머! 어머! 안녕하세요. 살롱 끌로에의 마담 쉬라입니다.”
쉬라는 곧바로 루시테를 향해 우아하게 인사를 해 보였다.
“안녕하세요.”
루시테는 어색하게 마주 인사했다.
“어여쁜 아가씨! 이쪽으로 오세요. 제가 예쁘게 해드릴게.”
마담 쉬라가 루시테를 잡고 이끌었다.
귀한 손님을 위해 준비된 특별한 룸에서 쉬라가 능숙하게 루시테의 사이즈를 쟀다.
“너무너무 예뻐요. 아가씨. 어쩜 이렇게 예쁠까? 이걸로 갈아입어 보세요. 내 최신 역작을 줘도 되겠는데?”
쉬라가 화려한 술과 레이스가 달린 보랏빛 드레스를 루시테에게 내밀었다.
“아, 저…… 저는 이런 드레스는,”
“어머 드레스가 왜요? 잠시만요. 손님!”
쉬라가 탈의실의 커튼을 벌컥 열어 레일리를 불렀다. 소파에 앉아서 기다리던 레일리가 한쪽 눈썹을 들었다.
“이 드레스 좀 보세요! 어떠신가요? 제가 무려 한 달을 걸려 한 땀 한 땀 만든 거랍니다.”
“입어 봐요. 루시테.”
레일리가 드레스를 유심히 보더니 말했다.
“하지만, 제가 드레스를 입을 일이 있을까요.”
“흠, 입어 보는 건 상관없잖아요?”
“맞네! 맞아요.”
마담 쉬라가 레일리의 말에 맞장구쳤다.
루시테는 둘의 성화에 결국 드레스를 입어봤다. 보랏빛 드레스는 부드럽게 루시테의 몸에 휘감겼다.
레이스가 화려하게 수놓여 있는데도 많이 불편하지 않고 몸에 잘 맞았다.
루시테는 이리저리 움직여보았다.
보랏빛 파도가 치는 것처럼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아름다운 보랏빛 주름이 물결쳤다.
“어머! 어머! 세상에! 내가 이 옷을 아가씨를 입히려고 만들었나? 임자 만났네, 임자 만났어! 내가 이 맛에 옷을 만든다니까!”
쉬라가 손뼉을 치며 환호했다.
“손님, 이것 좀 보세요! 어서요!”
쉬라가 레일리를 불렀다. 레일리는 문턱에 기대어 팔짱을 낀 채 그녀를 쳐다봤다.
정면에 있는 거울 너머로 루시테는 레일리와 눈이 마주쳤다.
레일리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휘었다.
아몬드형 눈매가 부드러운 반달로 접히며 루시테를 향해 따스한 눈빛을 보냈다.
“아름답습니다. 루시테.”
순간 루시테의 볼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쉬라. 이 옷은 넣어두고, 다른 옷은 일상복으로 준비해 주세요.”
“네에! 그러겠습니다!”
마담 쉬라가 손뼉을 짝 쳤다.
그러자 대기하고 있던 다른 종업원이 들어와 루시테가 방금 입었던 드레스를 포장할 준비를 했다.
문득 열린 문틈으로 루시테와 케이트의 눈이 마주쳤다. 케이트의 눈동자에 부러움과 시샘이 가득했다.
루시테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그녀는 다른 이의 시샘을 받는 위치라는 게 어떤 게 몰랐다. 평생 손가락질을 받고 살아왔으니까.
루시테는 레일리를 바라보았다.
레일리는 언제나 그랬다. 그는 꼭 그녀가 특별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대해준다.
“그럼 손님, 저희 아가씨는 다른 옷을 또 입어 보아야 하니 잠시 나가 계셔 주시겠어요?”
마담 쉬라가 탈의실 커튼을 치며 다시 레일리를 내보냈다.
레일리가 나가기 직전 루시테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즐겨요.”
그 말을 끝으로 탈의실의 두터운 커튼이 닫혔다.
루시테는 저도 모르게 볼우물이 패이도록 작게 미소를 지었다.
레일리의 말에 이상하게 안심이 되면서도 지금 상황이 즐거워졌다.
그가 꼭 마법이라도 부린 것만 같았다.
자신은 마법사에 의해 아름답게 변한 동화 속 공주님이 된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이렇게 아름다운 옷을 입어 본 적도, 골라본 적도 없었으니까.
네 번의 인생 중 처음. 그 처음을 레일리의 덕분에 겪게 되었다.
이후 마담 쉬라가 골라주는 옷들도 루시테는 기분 좋게 갈아입었다. 꼭 즐거운 인형 놀이를 하는 것 같았다.
루시테는 몸에 꼭 맞는 예쁜 옷을 입고 레일리의 앞에 한 바퀴 돌아 보였고, 레일리는 그녀에게 아름답다 말해주었다.
어느새 그녀의 얼굴에서 피어오른 기분 좋은 웃음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루시테는 마법에 빠진 사람처럼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이 상황을 즐겼다.
그녀를 향해 아름답다 말해 준 사람은 네 번의 인생 동안 레일리가 처음이었고, 이처럼 특별하게 여겨주는 사람도 레일리가 처음이었다.
총 열 벌의 옷을 구매했고, 열 벌의 옷을 맞췄다. 맞춘 옷은 몇 주쯤 뒤에 레일리와 다시 함께 찾으러 오기로 했다.
루시테의 허름한 옷은 마담 쉬라가 바로 버려버렸다. 산 옷들은 레일리가 챙기겠다며 마법 주머니 속에 다 넣었다.
루시테는 새로 산 심플한 드레스를 입고 살롱 끌로에를 나왔다. 꼭 짧은 순간 꿈을 꾼 것만 같았다.
몽롱한 표정의 그녀를 향해 레일리가 손을 내밀었다. 마치 레이디를 에스코트하는 신사처럼.
“루시테.”
레일리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레일리.”
루시테는 흰 손을 뻗어 그가 내민 손을 맞잡으려 했다.
“저기요! 잠시만요!”
케이트가 황급히 루시테와 레일리의 뒤를 쫓아 나왔다. 케이트가 루시테의 팔을 우악스럽게 붙잡았다.
“너! 루시테라고 했지? 너를 이제야 기억해서 미안해!”
케이트가 귀동냥으로 들은 그녀의 이름을 외치며 루시테에게 바짝 다가섰다.
“루시테! 아까 몰라봐서 미안해. 내가 요즘 너무 바빠서 말이야. 그렇지?”
케이트는 눈에 힘을 주고 입술을 끌어올려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며 루시테를 노려봤다. 어서 루시테가 처음 봤을 때처럼 그녀에게 아는 척을 하기를 바라며.
“저기…….”
루시테는 당황했다. 케이트가 왜 이러는지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자신이 기억난다니.
케이트가 아는 자신은 저주가 풀리기 전의 자신이다.
게다가 케이트가 아는 이름은 루시테도 아니다. 황성으로 들어가기 위해 쓴 가명인 ‘안나’이지.
“루시테, 아는 사람입니까?”
레일리가 루시테의 어깨를 잡아 그녀를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레일리는 케이트의 손에서 루시테를 떼어 냈다.
“그럼요! 알다마다요!”
아는 사람이냐는 레일리의 질문에 대답한 사람은 루시테가 아니었다. 대답은 케이트에게서 나왔다.
케이트는 포기하지 않고 루시테에게 팔짱을 끼고 그녀의 옆에 바짝 붙었다.
“루시테! 이제 어디 가? 오랜만에 보는데 나도 같이 가자.”
케이트가 루시테가 뭐라 대답도 하지 못하게 말을 막았다.
“응? 가자! 얼른!”
루시테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테는 레일리와 케이트의 사이에 낀 채 어색하게 걸었다.
레일리는 미묘한 표정으로 루시테와 케이트를 쳐다보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섣불리 참견하여 루시테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모자와 리본, 장식용 핀 따위를 파는 가게들이 있는 곳에 들어섰다.
“루시테, 아까 필요하다 말씀하셨지요?”
레일리는 루시테가 모자를 사고 싶다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네.”
루시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얼른 들어가서 구경하자! 나도 좋아!”
케이트가 재빨리 나서 모자가게 안으로 루시테를 우악스럽게 잡아끌었다.
“너한테는 이런 게 어울리네!”
케이트가 무채색에 장식이 없는 모자를 루시테에게 내밀며 써 보라며 종용했다.
케이트는 그런 모자들만 찾아내어 루시테에게 건네고는 자신은 화사한 꽃장식이 달린 모자를 꺼내 들었다.
“톰 씨! 어때요? 저한테 잘 어울리지 않나요?”
케이트가 제 딴에 할 수 있는 한 가장 밝게 웃으며 레일리에게로 다가갔다.
케이트는 루시테 같은 얼빠진 여자보다 이 남자에게 훨씬 잘할 자신이 있었다.
남자도 딱 보아하니 돈만 많은 얼빠진 놈이었다.
차림새도 후줄근하고 별 볼 일이 없어 보이는데, 이런 남자를 케이트라고 차지하지 못할 바가 무언가?
어디 돈 많은 졸부의 차남 정도일 게 틀림없었다.
케이트는 남자가 보석을 쏟아붓는 모습을 떠올리며 탐욕스러운 눈빛을 했다.
‘빼앗고 말 거야.’
케이트는 더벅머리를 한 남자에게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그녀의 눈에 레일리는 참 좋은 먹잇감이었다.
언제나 부와 명예를 바라왔던 그녀를 드디어 돈방석에 앉혀 줄 얼빠진 남자.
“저기 레일,”
모자를 써 보던 루시테가 레일리를 부르려 하는데, 케이트가 루시테를 어깨로 퍽 치며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저기요! 이것도 좀 보세요! 이건 어떤가요?”
루시테는 놀라 어깨를 문지르며 케이트와 레일리를 보았다. 둘은 몹시 화기애애해 보였다.
루시테는 아직도 케이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케이트는 앞머리에 가려진 레일리의 표정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조금 전부터 레일리가 그녀를 얼음장보다 더 차갑게 쳐다보는 것은 알지도 못한 채 케이트는 레일리에게 가까이 다가가 떠들어대고 있었다.
“저기요, 선생님.”
케이트가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은근슬쩍 팔짱을 끼어 몸을 가까이할 생각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