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18)

12.

“하.”

레일리가 대놓고 짜증스러운 한숨을 토해냈다.

그는 케이트의 손이 제 팔에 닿으려는 순간 텔레포트를 했다.

그가 마법을 써서 다시 나타난 곳은 루시테의 옆이었다.

“마, 마법사?”

케이트는 눈을 크게 뜨고 레일리를 쳐다보았다. 졸부의 차남이 아니라 마법사였다니.

케이트는 그 짧은 사이 머릿속에서 주판을 튕겼다.

저 어리버리한 남자가 졸부의 차남이 아니라 마법사라면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적당히 놀아줄 상대가 아니라 완전히 붙잡아야 할 상대.

그녀를 돈방석뿐만 아니라 신분까지 상승시켜줄 동아줄이었다.

하늘에서 오로지 케이트만을 위해 내려준 운명의 동아줄.

“미스터, 부끄러우신가요?”

케이트가 눈을 한껏 접으며 레일리를 향해 교태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하아……. 저 아십니까?”

“네?”

“저를 아시냐고 물었습니다.”

레일리는 케이트가 처음 루시테에게 했던 똑같은 태도로 케이트를 모르는 사람 취급했다.

“그쪽은 제 일행의 지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쪽을 모릅니다.”

“에이, 이제부터 알아 가면 되죠!”

케이트는 지지 않고 레일리에게 다가가려 해봤다.

“루시테의 친구는 제 친구가 아닌가요? 그렇지 않니, 루시테?”

케이트는 루시테를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그녀가 알았다고 대답하기를 바라며.

“누구 맘대로?”

레일리는 루시테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싸늘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네?”

“누구 맘대로 그쪽이 내 친구니 마니 하는지 모르겠는데. 나는 그쪽을 모릅니다.”

레일리는 특유의 목소리로 존칭과 반말을 섞어가며 케이트에게 칼같이 선을 그었다.

케이트를 향한 그의 목소리가 한없이 차가웠다.

그래, 레일리는 원래 저런 인간이었다.

누구에게나 한없이 차갑고 사납고, 선을 긋는 사람.

그는 오로지 호기심으로만 움직였으며 그의 흥미를 끌지 않는 모든 것에 철통같이 벽을 쳤다. 거기에 케이트도 예외는 되지 못했다.

“루시테, 이런 인간을 아는 사이라고 계속 두실 겁니까? 저는 싫습니다. 루시테에게 접근한 목적이 뻔히 보이는데 계속 두실 겁니까?”

레일리는 루시테의 옷소매를 잡고 속살거렸다.

루시테를 향한 목소리는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약간의 칭얼거림이 담겨 있었다.

그는 대놓고 케이트더러 들으라는 듯 얘기했다.

“보세요. 탐욕에 젖어 루시테에게 접근한 게 티가 나지 않습니까. 참 천박하고 표독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레일리는 돌려서 말하지도 않았다.

루시테의 생각을 최대한 존중하려는 레일리가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는 케이트를 직접 쫓아버릴 수 있음에도 루시테에게 선택하기를 미뤄주었다.

그녀에게 케이트가 싫다고 대놓고 얘기함으로써.

레일리의 말을 듣고 있던 케이트의 얼굴이 점차 울그락불그락 해졌다.

케이트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창피함을 느끼며 꽉 쥔 주먹을 떨었다.

저 얼빠진 남자가 자신의 꿍꿍이를 다 꿰뚫어 봤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루시테. 루시테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레일리는 루시테의 옷소매를 살살 흔들었다.

루시테는 레일리의 처음 보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픽 미소를 흘렸다.

레일리가 이렇게 싫다고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케이트는 루시테에게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레일리야말로 중요한 사람이지.

“죄송하지만 케이트, 이만 돌아가 주세요. 저는 당신을 모릅니다. 오늘 처음 봤어요. 그리고 더 이상 당신과 친분을 갖고 싶지 않아요.”

루시테는 단호하게 케이트를 향해 이야기했다. 그녀의 얼굴에서는 더 이상의 망설임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이!”

케이트는 화가 나서 루시테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왔다. 일이 틀어진 게 모두 저 여자 때문인 것만 같았다.

“이 건방진 게!”

케이트는 화를 참지 못하고 루시테를 향해 손을 확 치켜들었다.

케이트의 손이 막 루시테를 향해 떨어지려 할 때, 루시테는 케이트의 손목을 확 잡아채어 막았다.

오랜 기간 집안일과 등산 아닌 등산으로 다져진 루시테의 건장한 팔 힘이 케이트를 이겼다.

레일리와 케이트는 동시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레일리는 여차하면 자신이 막아주려 했지, 루시테가 케이트를 직접 저지할 줄은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뭐, 뭐…!”

케이트가 루시테에게서 팔을 빼내려 했다. 루시테의 손에 붙잡힌 제 손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이상하시면 저도 가만 안 있어요. 보다시피 힘이 세거든요.”

루시테는 웃지도 않았다.

그녀는 딱딱하면서도 단호하게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의사를 케이트에게 전했다.

루시테가 케이트의 손목을 잡은 손에 꽉 힘을 주자, 표독스럽던 케이트의 얼굴이 점차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루시테가 바보라서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저 에이프릴의 동료이자 황성에서 함께 고생했던 케이트에게 남아 있는 작은 의리를 지켰을 뿐.

그건 어디까지나 레일리가 불쾌해하지 않는 선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케이트보다 훨씬 소중한 레일리가 불편하다는데 루시테가 참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이만 돌아가세요. 아시겠나요?”

“아, 알았으니까 놔줘!”

케이트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떨었다. 조용히 화를 내는 루시테의 기에 눌린 것이었다.

루시테는 케이트의 손목을 놔주었다.

그리고 케이트는 제 손목이 자유로워지자마자 그들에게 인사도 하지 않고 뒤를 돌아 도망치듯 모자가게를 빠져나갔다.

탐욕스러운 케이트는 포기도 빨랐다.

“…… 와.”

레일리는 케이트가 꽁무니가 빠져라 도망가는 모습을 보며 순수하게 감탄을 내뱉었다.

“놀랐습니다. 루시테. 루시테에게 그런 면이 있는 줄은…….”

“뭘요.”

루시테가 씩 웃어 보였다.

“레일리가 싫으시다는데, 절 따라온 사람 제가 해결해야지요.”

레일리는 살짝 벙찐 표정으로 루시테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그녀의 행동은 예측할 수 없었다.

온전히 알았다 싶다가도 언제나 레일리가 예측할 수 없는 행동을 했다.

한없이 약하고 어리숙해 보이다가도 또 무서울 정도로 어른스럽고 책임감이 있었다.

레일리는 용기 있게 케이트를 떨쳐내 버린 루시테를 순수하게 멋지다고 느꼈다.

정말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루시테 클라우디오는 멋진 여자였다.

“저, 그 모자 구매하실 건가요?”

마음을 졸이며 상황을 지켜보던 모자가게 주인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아! 죄송해요.”

루시테는 그제야 자신들이 가게 안에서 소란을 피웠다는 것을 인지했다.

“물론 구매할 거예요.”

루시테는 손에 들고 있던 모자를 쓰며 빙긋 웃었다.

별다른 장식 없이 푸른 리본만 하나 달린 평범한 챙이 넓은 모자였다.

그런데도 레일리의 눈에는 그녀의 모습이 한 송이의 청초한 제비꽃처럼 보였다.

온갖 장식이 달린 화려한 모자를 쓰고 뽐내던 케이트와는 비교도 되지 않았다.

루시테는 그녀 자체만으로도 몹시 아름다웠다.

“얼마예요?”

“5실버예요.”

루시테는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값을 치렀다.

그녀는 모자를 쓴 채 그대로 레일리에게 다가와 그의 팔을 끌었다.

“가요. 레일리. 다 골랐어요.”

레일리는 그답지 않은 멍한 표정으로 루시테에게 이끌려 모자 가게를 나왔다.

루시테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생각보다 살롱 끌로에와 모자 가게에서 시간을 오래 쓴 모양이었다.

“오늘은 어렵겠어요. 일단 집에 돌아갈까요?”

레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테는 빙긋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레일리와 함께 산 중턱 하우스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틀었다.

“참, 레일리.”

루시테는 문득 궁금한 게 있어 물었다.

“마담 쉬라와는 원래 아는 사이셨나요?”

“그래 보였습니까?”

“네.”

“뭐……. 그 여자가 솜씨가 좋습니다. 루시테도 보셔서 느끼셨겠지만. 그래서 제 옷을 많이 맞췄지요. 워낙 눈썰미가 좋은 여자라 어차피 절 보면 변장한 모습이라도 알아볼 거라 생각했습니다.”

루시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일리는 반짝이는 보석을 좋아하는 만큼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고, 또 까다로우니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바였다.

고르고 골라 그의 옷을 맞출 마담을 찾았을 것이고, 오래 이용했겠지.

마담 쉬라는 몹시 센스가 좋고 눈치가 빨라 보였다.

레일리가 딱히 입막음하지 않고 그를 알아볼 것을 알면서도 그 가게를 찾은 데는 이유가 있을 터다.

“마담 쉬라는 입이 무거우신가요?”

“그래야겠죠.”

레일리가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본인이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레일리가 입꼬리를 올렸다. 그 모습이 무척 사악해 보였다.

루시테는 레일리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더 묻지 않기로 했다.

레일리가 저렇게 얘기하는 걸 보면 그만큼 마담 쉬라가 입단속을 잘할 거라 확신한다는 뜻이니.

만약 마담 쉬라가 입이 가벼운 사람이라면?

오늘 마법사 대공 레일리 아사드를 봤노라 사람들에게 떠들고 다닌다면?

루시테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어떻게 될지는 뻔했다.

당장 황태자 알렉산더가 나서서 레일리를 찾아내 죽이려고 할 것이다.

안 그래도 위태로운 상황인 정세도 크게 혼란스러워질 테고.

현재 레일리 아사드. 그러니까 제국의 2황자 카일러스는 황제가 살해당한 날, 황제보다도 먼저 세드릭의 손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비록 시체는 없었지만 사람 한 명이 죽고도 남았을 정도로 피가 낭자했기에 황태자가 그렇게 판단한 것이다.

사람들이 더욱 세드릭에게 분노하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황제뿐만이 아니라 백성들에게 추앙받던 2황자까지 살해했다는 사실.

그런 세드릭 디에고를 황태자가 차일피일 처형을 미루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제 아비의 장례조차 치르지 않고.

이렇게 황태자에 대한 민심이 좋지 않은 상황에 만약 2황자 카일러스가 살아있다는 소식이 알려진다면?

정세는 크게 기울고 아테라는 혼란에 휩싸일 것이다.

알렉산더의 칼끝이 누구를 가장 먼저 향할지는 뻔했다. 알렉산더는 갖은 수를 써서 레일리를 죽이려 할 터였다.

‘절대 안 돼.’

루시테는 입술을 깨물었다.

루시테는 이미 한 번 레일리의 숨이 끊어지기 직전의 모습을 마주했다.

두 번 다시 레일리가 목숨이 위험해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만약 위험해질 수밖에 없는 거라면. 루시테는 그의 곁에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마음먹었다.

루시테는 손바닥을 펼쳐 들었다.

집중하고 힘을 움직이자 은은한 보랏빛 기운이 손 위에 서렸다.

온몸 가득 신성력이 넘쳐났다. 마치 그녀 자체가 신성력의 보고라도 된 듯 엄청난 성력이 샘처럼 솟아났다.

이 힘은 누군가를 해치는 데는 아무 쓸모가 없는 힘이다.

온전히 누군가를 지키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힘.

그렇다면 루시테는 이 힘으로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레일리와 함께 황성으로 들어가기로 한 이상 루시테는 뭘 하든 레일리와 함께 할 것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힘으로 레일리를 지켜내고야 말 거니까.

레일리의 옷소매를 잡은 루시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루시테의 짙은 보랏빛 눈동자에 레일리를 지키고야 말겠다는 강한 의지가 피어올랐다.

* * *

루시테와 레일리는 산 중턱 하우스로 돌아와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 드디어 황성으로 출발하기로 했다.

리브와 노이, 에단에게는 적당한 핑계를 둘러대어 안심시키고, 이 일이 끝나면 모든 것을 제대로 설명해주리라 약속했다.

레일리는 더벅머리 가발을 눈을 다 가리도록 푹 눌러 썼다.

그런 그의 변장은 어제와 한 가지 달라진 게 있었다.

“레일리, 콧수염이 잘 어울리네요.”

루시테는 레일리의 얼굴만 보면 웃음이 새어 나오려 했다.

더벅머리를 조금 잘라 콧수염과 턱수염을 만들어 붙였는데 그는 정말 다른 사람 같았다.

거기다 옷도 후줄근한 것을 입으니 방금까지 텃밭에서 일하다 나온 농부 같았다.

좀 키도 크고, 몸매도 좋은 잘생긴 농부.

“루시테도 모자가 잘 어울립니다.”

레일리가 씩 입술을 올렸다.

루시테는 따로 변장한 건 없었다. 어차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할 게 뻔했다.

그 증거로, 어제 만난 케이트도 끝까지 루시테를 알아보지 못하지 않았는가.

덕분에 루시테는 조금 더 맨얼굴로 다니는 데에 자신감이 생겼다.

레일리가 사준 편안한 원피스를 입고 푸른색 리본이 달린 모자를 썼다.

긴 보랏빛 머리칼이 모자 아래로 찰랑거렸다.

“출발할까요?”

루시테의 산뜻한 물음에 레일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에스코트하듯 루시테에게 손을 내밀었다.

루시테는 귀한 집 아가씨처럼 레일리의 손 위에 제 손을 올렸다. 따뜻한 두 손의 온기가 맞닿았다.

레일리가 루시테를 데리고 간 곳은 황성이 아니었다.

“여기는 어디인가요?”

“잠시 들렀다 가겠습니다.”

루시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황성 인근의 작은 집이었다.

집 주위에는 작은 약초밭이 있었고 나무로 만든 집 안에서는 짙은 약초 냄새가 풍겨 나왔다.

레일리가 집 문을 두드렸다.

“스승님. 접니다.”

레일리의 목소리에 문이 안으로 벌컥 열렸다.

“에잉, 쯧. 못난 놈 목소리가 들리는구나.”

머리와 턱수염이 온통 새하얗게 샌 노인이 평범한 농사꾼 같은 옷을 입고 나왔다.

그는 대뜸 레일리를 타박했다.

“뭐 하러 찾아온 게냐? 난 너 같은 놈은 모른다!”

노인은 자신이 문을 열어놓고 다시 문을 닫으려 했다.

문이 닫히기 직전 레일리가 재빨리 끼어들어 문을 잡았다.

“스승님. 정말 저를 모르십니까?”

레일리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노인을 불렀다.

“아 글쎄! 나는 너를 모른다니까! 네놈의 그 더러운 성질머리 고치기 전에는 찾아올 생각하지 말라고 했잖느냐!”

노인이 버럭 소리를 쳤다.

“그때 그 일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계십니까? 저는 여전히 스승님이 왜 화를 내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놈이 아직도!”

노인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 해졌다.

“네놈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너만 생각하지 말고 약한 자를 돌아보라는 말이 그렇게 어렵단 말이냐!”

“다른 사람들이 저와 무슨 상관입니까? 제 알 바 아닙니다.”

레일리가 서늘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남이사 굶어 죽든 맞아 죽든 제 운명이려니. 레일리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애초에 남에게 무관심하며 자기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

그게 바로 레일리였다.

스승인 비스커스는 도덕성이 심히 결여된 것 같은 레일리가 걱정되어 그토록 고치려 해봤으나 번번히 실패했고, 결국 화를 내며 찾아오지 말라고 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안 보고 지낸 지가 1년.

이렇게 또 뻔뻔스러운 얼굴을 마주하니 비스커스는 화가 치밀었다.

그러나 치미는 화보다 더 큰 감정은 안도였다.

2황자 카일러스가 죽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나가는 동안, 비스커스의 속이 얼마나 바짝바짝 타들어 갔는지 몰랐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뜬금없이 멀쩡한 얼굴을 들이밀다니.

비록 거지 같은 꼴로 변장을 하고 나타났다지만 비스커스는 레일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가 자식처럼 키운 제자가 아니던가.

결국 부모는 자식에게 질 수밖에 없는 법이었다.

비스커스는 화난 눈에 힘을 풀었다.

“못난 놈이 필요할 때만 찾고 말이야. 어디 가서 뒈졌는 줄 알았더니 멀쩡하네! 내 그럴 줄 알았지. 에잉.”

노인이 연신 투덜거렸다.

“스승님 이쪽은 미스 루시 필드입니다.”

레일리는 노인의 투덜거림이 익숙한 듯 아무렇지 않게 루시테를 소개했다.

그제야 루시테를 본 비스커스의 눈이 커졌다.

저밖에 몰라 평생 독수공방할 줄 알았던 레일리가 여자를 데려오다니?

비스커스의 눈이 튀어나올 듯했다.

“루시. 이분은 대마법사 비스커스입니다. 제 어린 시절 스승이 되어 주신 분입니다.”

한편 루시테는 노인을 빤히 보고 있었다.

레일리가 스승이라 불렀을 때부터 마법사라고 짐작은 했지만, 전혀 마법사처럼 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었다.

약초꾼이나 농부 그쯤.

그러나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루시테가 잘 알았다.

‘비스커스.’

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다.

전생에 대기근과 가뭄이 닥쳤을 때 이크릭스에서 큰 활약을 한 마법사였다.

물을 끌어내는 마법의 약초로 사람들을 구한 마법사.

비록 대량생산이 불가능했기에 모든 사람을 구할 수는 없었지만, 루시테가 기근과 가뭄을 해결하기 전까지 그의 약초가 큰 역할을 했더랬다.

뛰어난 마법사이면서 누구보다 약자를 위하는 마법사로 이름을 떨쳤던 사람.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지만 루시테는 비스커스, 존경받아 마땅한 그 대마법사를 알고 있었다.

‘저 사람이 레일리의 스승님이라니.’

저런 사람을 만났기에 레일리가 비뚤어지지 않고 잘 자랄 수 있었던 걸까.

자세한 속사정은 알지 못하지만 루시테는 비스커스가 레일리에게 좋은 영향을 많이 미쳤음을 짐작했다.

루시테는 미소를 머금고 비스커스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마법사님.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비스커스는 반달 모양의 작은 돋보기안경을 올려 쓰고 루시테를 쳐다보았다.

그는 눈앞의 아가씨가 누구인지, 뭐 하는 사람인지 꼬치꼬치 캐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애써 참았다.

“뉘시오?”

루시테는 비스커스의 질문에 잠시 고민했다.

비스커스는 이미 루시테의 이름을 레일리에게서 들었다. 그러니 이 질문은 이름을 묻는 게 아니다.

레일리와 무슨 사이냐고 묻는 것.

“저는…… 레일리의 친구입니다.”

‘친구.’

정겨운 단어가 루시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한 번도 친구를 가져본 적이 없었지만, 레일리와 루시테의 사이를 굳이 정의 내린다면 친구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친구. 루시테는 레일리를 유일한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러냐?”

비스커스가 레일리를 향해 물었다.

레일리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비스커스의 질문에 대답했다.

“네, 스승님. 제 친구입니다.”

친구라.

비스커스는 팔짱을 꼈다. 건방진 레일리 놈은 지금껏 제대로 된 친구도 하나 없었다.

이 참해 보이는 아가씨가 친구라면 참 훌륭한 시작이었다.

“오냐. 네 계획을 설명해 봐라.”

비스커스는 레일리가 루시테를 친구라고 직접 인정하자마자 바로 본론을 꺼냈다.

돌아가는 상황쯤이야 비스커스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레일리가 그를 찾아온 목적을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 거지 꼴을 하고 날 찾아온 이유가 있을 테지?”

비스커스가 예리한 표정으로 레일리의 변장을 지적했다.

레일리는 기다렸다는 듯 비스커스에게 그의 계획을 설명했다. 내용은 대략 이랬다.

비스커스가 마법 서적을 살펴보고 중요한 연구를 한다는 이유로 입궁을 하고, 함께 레일리와 루시테를 데려가 주는 것이었다.

루시테는 비스커스의 수양딸 루시, 레일리는 루시와 비스커스의 하인 톰으로 행세하기로 했다.

비스커스는 툴툴거리면서도 흔쾌히 그 부탁을 수긍했다.

“에잉, 쯧. 젊은것들이 늙은이를 힘들게 하네. 쯧쯧.”

비스커스는 혀를 차며 방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마법사의 로브를 입고 마법사의 지팡이를 짚고 나오니 그는 더 이상 농부처럼 보이지 않았다.

“자, 빨리빨리 출발하세.”

비스커스가 지팡이로 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순식간에 그들은 집의 입구로 나와 서 있었다. 그들의 뒤로 자동으로 집의 문이 철커덕 잠겼다.

‘우와.’

루시테는 입을 벌렸다.

역시 마법사는 마법사. 누가 레일리의 스승 아니랄까 봐 마법을 부리는 스타일이 꼭 레일리 같았다.

“놀랄 것 없네. 이미 만들어둔 마법진을 건드린 것뿐이야.”

비스커스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앞으로 나서며 지나가는 마차를 잡기 위해 지팡이를 들었다.

비스커스가 앞쪽으로 나가 있는 사이 루시테는 레일리에게 살짝 속삭였다.

“레일리도 집에 마법진을 가득 그려놓았나요?”

“그러긴 했습니다만.”

레일리가 오만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저는 이 세상에서 마법진이나 수식 없이 마법을 쓸 수 있는 유일한 마법사라. 저런 간단한 마법은 마법진도 필요 없답니다.”

“예끼! 다 들린다 이놈아!”

마차를 잡던 비스커스가 벼락같은 호통을 쳤다.

레일리와 루시테는 동시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곤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들은 마차를 잡아타고 마침내 아덴티움으로 향했다.

황성이 가까워질수록 화기애애했던 분위기가 점차 가라앉았다.

콧수염 아래로 레일리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고, 루시테는 표정이 어두웠다.

“표정 펴! 이놈들아 누가 보면 죽으러 가는 줄 알겠구나.”

비스커스가 쯧쯧 혀를 차며 레일리와 루시테를 타박했다.

그럼에도 어두워진 루시테와 레일리의 얼굴은 쉽사리 펴질 줄을 몰랐다.

마침내 황성의 입구를 지날 때. 루시테는 아가리를 쩍 벌리고 있는 거대한 괴물의 속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앞으로 닥칠 일이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루시테와 레일리는 이 황성 안에서 각각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어쩌면 어렵고 고통스러운 여정이 될지 몰랐다.

“네! 대마법사 비스커스 님 확인했습니다! 일행들은 어떤 분들이신지, 목적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황성 입구의 병사가 비스커스의 마차를 세웠다.

“예끼 이놈! 이쪽은 내 딸이고 저놈은 내 종놈인데 그런 것까지 확인하느냐?! 마법 서적을 좀 빌려 가려는데 손이 부족해서 데려왔건만!”

병사를 향해 벼락같이 화를 낸 비스커스가 아예 지팡이를 들어 병사의 투구를 한 대 때리려 했다.

병사는 기겁하며 물러서며 손사래를 쳤다.

“죄송합니다, 비스커스 님! 제가 대마법사님을 몰라보는 것이 아니라, 요즘 시기가 시기인지라 방문자를 철저히 검문하고 있어서 그렇습니다. 이해해 주십시오!”

“흥. 알겠네.”

비스커스가 심통 난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렸다.

루시테는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긴장되는 순간이었으나 병사는 다행히 비스커스라는 이름을 믿고 그들을 들여보내 주었다.

다그닥 다그닥.

멈췄던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고서야 루시테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벌써부터 살얼음판인 황성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잘 달리던 마차가 또 멈춰 섰다.

“여기서부터는 마차가 들어가지 못합니다! 걸어가셔야 합니다!”

마부가 바깥에서 소리쳤다.

“에잉! 쯧! 내가 이래서 오기가 싫다니까.”

비스커스가 툴툴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 뒤를 루시테와 레일리도 따라나섰다.

“따라와라. 황제 폐하께서 내게 허락하신 처소가 따로 있으니.”

비스커스는 거침없이 발걸음을 놀렸고, 루시테와 레일리는 입을 꾹 다문 채로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서로 별다른 대화를 하지 않았는데도 둘은 통한 듯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시간이 필요한 일, 결코 하루 만에 처리하고 돌아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런 중에 비스커스가 저명한 대마법사라 정말이지 다행이었다. 덕분에 황성에 당당하게 머무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루시테는 고개를 들어 저 안쪽에 있는 높은 황금색 돔 건물을 보았다.

황제의 사자궁. 원래라면 발칸트리히 2세가 거처할 궁이다.

하지만 발칸트리히 2세가 죽은 지금 저곳에 누가 머무르고 있는지는 불 보듯 뻔했다.

‘알렉산더.’

루시테는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헤카레트의 대신관 렘브란트, 그를 만나야 했다. 그리고 세드릭도.

루시테는 건물들을 눈에 익히며 어떻게 그들을 만나야 할지 쉴새 없이 머리를 굴리며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새 비스커스를 따라 그의 거처에 도착해 있었다.

마법사의 거처를 관리하는 총괄 시녀가 비스커스와 일행이 온 것을 확인하고 곧바로 인원을 배정했다.

비스커스는 방으로 들어와 주변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입을 열었다.

“내가 황성으로 들어왔다는 게 곧 황태자의 귀에 들어갈 게다. 내 제자가 너라는 건 이미 잘 알려져 있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네, 스승님.”

레일리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괜찮을까요? 레일리.”

루시테의 목소리에 걱정이 잔뜩 묻어났다.

“쉿. 루시. 톰이라고 불러야지요.”

레일리가 손을 뻗어 나무라듯 루시테의 이마를 톡 건드렸다.

“앗!”

맞다. 톰.

루시테가 어색하게 톰이라는 이름을 중얼거렸다.

“저를 철저하게 하대해주세요. 마이 레이디. 저는 레이디의 하인입니다.”

레일리가 입꼬리를 올렸다.전혀 하인 같아 보이지 않는 방자한 미소였다.

“놀고들 있네.”

비스커스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는 눈을 씻고 방금 장면을 다시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시건방지고 돌 보듯 하던 제 제자가 루시라는 여자에게 이리도 살갑게 굴다니.

인생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비스커스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제 못난 제자 레일리가 제대로 임자를 만난 모양이었다.

저 순해 빠져 보이는 참한 아가씨에게 아까 전부터 눈을 한시도 떼지 못하고 절절매는 꼴을 보아하니 말이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할 테냐? 궁에 들어왔고.”

비스커스가 레일리를 지팡이로 가리켰다.

“네놈부터 계획을 말해봐라.”

비스커스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는 진심으로 제 제자가 하는 일을 도와줄 의향이 있었다.

그러나 레일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스승님. 이 일은 저 혼자 할 겁니다. 제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레일리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비스커스가 쯧쯧 혀를 찼다. 어차피 레일리 놈이 그렇게 대답하리라 비스커스는 예상하고 있었다.

“못난 놈. 그러든지 해라. 필요한 거 있으면 얘기하고.”

비스커스는 뒤의 한 마디를 덧붙였다.

레일리는 언제나 한다면 하는 녀석이었다. 녀석의 지독한 고집은 스승인 자신도 못 말렸다.

레일리가 저런 눈빛을 한 이상 비스커스는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러면 아가씨 계획을 들어봐야겠군.”

비스커스가 시선을 루시테에게로 돌렸다.

“기왕 내 수양딸이 되었는데, 내가 뭐 도울 게 있겠소?”

루시테는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비스커스의 도움을 받아도 될지 판단이 안 섰다.

그야, 그의 도움을 받으면 루시테가 원하고자 하는 목적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는 있을 터였다.

그러나 만약 그로 인해 비스커스에게 피해가 간다면? 그런 일은 절대 원치 않았다.

“뭘 고민하고 그러시오? 아가씨는 내 수양딸로 황성에 들어왔고 그렇다면 아가씨에 대한 책임은 나한테 있소. 이미 한배를 탄 거라는 뜻이지.”

“맞습니다. 루시. 스승님께 필요한 부분을 이야기하세요. 스승님은 믿어도 됩니다.”

레일리가 루시테를 안심시키듯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루시테는 긴장한 얼굴로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곳에서 만나야 할 사람이 두 명 있어요.”

“만나야 할 사람?”

비스커스가 반달 모양의 돋보기안경을 고쳐 썼다.

“그게 누구요?”

“하나는 렘브란트……. 헤카레트의 대신관님이요.”

“허어…….”

비스커스가 뭔가를 생각하듯 침음성을 삼켰다.

“나머지 한 명은 누구요?”

“세드릭…… 디에고 백작이요.”

“허어…….”

비스커스의 침음성이 더 커졌다.

“거참. 지금 이 황성에서 가장 만나기 어려울 두 명을 만나겠다고 하는구만.”

비스커스는 루시테에게 왜 만나야 하냐고는 묻지 않았다.

그저 그녀의 말을 듣고 바로, 어떻게 만나야 할지 고민에 빠졌을 뿐.

“만나기만 하면 되는 거요? 뭐, 대신관이나 황제를 죽인 1급 사형수를 빼돌리겠다 그런 목적은 아니시겠지?”

비스커스는 확인차 질문을 했다.

“네. 만나기만 하면 돼요. 그저, 그분들을 만나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그뿐이에요.”

루시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대신관과 세드릭.

둘 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는 만날 수 있을지를 장담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특히 세드릭. 그는 얼마 후 죽게 될 것이다.

알렉산더는 결국 세드릭을 처형하고야 말 테니까.

그러니까 지금이었다. 지금 꼭 만나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루시테는 평생 후회하며 살 수밖에 없을 터였다.

“비스커스 님!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저는 그 두 사람을 꼭 만나야만 해요.”

루시테는 비스커스의 넓은 옷소매를 간절하게 붙잡았다.그녀의 짙은 보라색 눈이 슬픔으로 잘게 떨렸다.

“알았네. 내 일단 황태자를 알현하고 오지.”

비스커스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망토 자락을 뒤로 휙 젖히며 문 쪽으로 다가갔다.

“스승님.”

레일리가 비스커스를 붙들었다.

“황태자에게 무슨 얘기를 하려고 그러십니까?”

“대신관이 황성에 머무는 김에 내 수양딸이 축복을 받을 수 있느냐 물어 볼란다.”

루시테는 눈을 크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다.

“황태자가 알았다고 할까요?”

“거절할 수 없을 거다. 황태자는 한 명이라도 더 저에게 지지해주기를 바랄 테니까.”

루시테와 레일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기발한 방법이었다.

비스커스의 계획은 분명 먹힐 것이다.

왜냐하면 비스커스는 제국민에게 잘 알려진 저명한 대마법사였으니까.

그의 지지를 받는다면 황태자는 든든한 아군을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특히 2황자 카일러스의 스승인 비스커스가 황태자를 지지한다면?

그 소식은 지금의 정세의 판도를 바꿔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2황자의 스승인 마법사가 황태자를 지지한다면, 더 이상 사람들은 황태자가 세드릭을 시켜 2황자를 살해했다고 오해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 * *

“어서 오시오. 위대한 마법사 비스커스여.”

비스커스의 예상대로. 황태자 알렉산더는 비스커스를 크게 환대했다.

“안녕하셨습니까. 황태자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비스커스는 형식적으로 황태자에게 인사했다.

“어서 와서 앉으시오.”

알렉산더는 버선발로 비스커스를 이끌어 친히 의자를 빼주었다.

그러면서도 매서운 눈으로 늙은 대마법사를 살폈지만.

몹시 예민한 상태인 그는, 노마법사를 바라보며 무슨 목적인지, 무슨 꿍꿍이인지를 알아내려 붉게 충혈된 눈을 굴렸다.

“안 그래도 그대가 오랜만에 입성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내 친히 인사하러 갈까 했다네. 혼자 들어온 게 아니라던데…….”

알렉산더는 어떻게든 비스커스를 떠보려 했다. 비스커스를 향한 알렉산더의 말에 뼈가 있었다.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비스커스가 아니었다.

“안 그래도 황태자 전하께 청이 하나 있습니다.”

비스커스는 먼저 선수를 쳤다.

“호오. 그게 무엇이오?”

알렉산더는 탁한 초록빛 눈을 빛내며 거만하게 물었다.

대마법사 비스커스가 자신에게 부탁이라. 그의 약점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제게 딸이 하나 있습니다만.”

“딸? 그대가 결혼을 했었던가?”

“결혼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전하. 수양딸을 들였습니다. 부모를 여의고 슬퍼하기에 제가 거뒀습니다.”

“호오. 그랬구려.”

알렉산더는 흥미롭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다름이 아니라, 그 수양딸에게 대신관의 축복을 받게 하고 싶습니다.”

비스커스는 마침내 본론을 꺼냈다.

“뭐라?”

대신관에 대한 얘기에 알렉산더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알렉산더는 비스커스를 빤히 노려보며 그의 의중을 파악하려 했었다.

감히 그 앞에서 대신관을 만나겠다고 하다니. 그것도 이런 시기에?

이 노망난 늙은이가 무슨 생각인지, 알렉산더는 사나운 눈으로 비스커스를 쳐다보았다.

“이크릭스인으로서 전하께 이런 말씀을 드리기는 조금 그렇지만, 사실 제 수양딸이 꽤 독실한 헤카레트 신자입니다.”

비스커스는 황태자가 쉽게 넘어오지 않자 강수를 두었다.

헤카레트를 믿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이크릭스에서는 큰 약점을 보여주는 거나 마찬가지인 얘기였다.

“호오. 그러시오?”

알렉산더의 사나운 기세가 조금 가라앉았다.

“제 수양딸이 부모를 여읜 지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대신관의 축복이라도 받고 마음을 위로해주고 싶군요.”

“그러시겠군. 딸을 생각하는 마음이 참 절절하오.”

알렉산더는 잠시 고민했다.

이렇게 제 딸을 비스커스가 생각하는데, 이번 기회에 그의 말을 들어주어 마음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인 듯했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좋소! 내 특별히 그대의 수양딸을 위해 대신관과의 자리를 마련하겠네.”

알렉산더가 큰 은혜를 베푸는 척 호탕하게 얘기했다.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됐다.’

비스커스는 눈을 빛냈다. 계획이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다.

비스커스는 황태자의 약조를 단단히 받아내고 그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알렉산더는 문을 나가는 노마법사의 뒷모습을 탐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참, 탐난단 말이야. 내 사람으로 끌어들이면 좋을 텐데.”

알렉산더가 턱을 매만지며 입맛을 다셨다.

“어떻게 생각하지, 샤히드?”

한구석에 숨어 있던 황태자의 보좌관이 그의 부름에 걸어 나왔다.

“비스커스를 전하의 편으로 끌어들이면 큰 이득이 될 겁니다. 태자 전하에 대한 2황자 살해 의혹도 사그라들 테지요.”

황태자의 충실한 부하 샤히드 백작이 뱀 같은 눈을 빛냈다.

“호오. 그렇겠군. 비스커스가 그 빌어먹을 놈의 스승이니……. 어떻게 해야 비스커스를 끌어들일 수 있지? 좋은 방법이 있겠소?”

“수양딸이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여자를 황비로 삼으십시오.”

“호오.”

알렉산더가 눈을 빛냈다.

알렉산더는 이미 결혼한 황태자비가 있긴 했다. 그러나 첩으로 한 명쯤 더 들여도 상관은 없을 것 같았다.

“비스커스 그 인간이 제 딸을 내 첩으로 들인다면 좋아하겠는가?”

“그건 좋아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그 여자를 태자 전하께서 황제가 된 후에 황후로 삼아주겠다고 약조하십시오.”

“황후라.”

알렉산더가 미간을 찡그렸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나는 추한 여자는 싫다.”

제 아비인 죽은 황제를 꼭 빼닮아 알렉산더 역시 만만치 않게 여색을 밝혔다.

이미 내연 관계를 맺고 있는 여자가 다섯 손가락을 넘어갔다.

“하지만 그 정도 제안을 하지 않으면 비스커스 님이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도 그렇지.”

알렉산더는,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이미 비스커스의 수양딸을 차지하기라도 한 사람처럼 깊은 고뇌에 빠졌다.

샤히드는 고뇌에 빠진 제 주군을 향해 한술 더 떴다.

“일단 얼굴을 보고 결정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전하. 생각보다 전하의 마음에 찰지도 모를 일이 아닙니까.”

알렉산더가 샤히드의 말에 손바닥에 주먹을 탁 쳤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어차피 대신관은 만나게 해주기로 약속했으니 그때 얼굴을 보고 제안을 해야겠구나.”

알렉산더는 샤히드가 똑똑하다며 그를 칭찬했다.

* * *

루시테는 살롱 끌로에에서 샀던 보라색 드레스를 입었다.

귀족 영애가 파티 때 입을 법한 격식 있는 드레스.

섬세하게 잡힌 보랏빛 주름들이 루시테가 움직일 때마다 물결치듯 사르륵거렸다.

언제 입을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빨리 입게 될 줄은 몰랐다.

황태자도 있고, 대신관 및 사제들이 함께하는 격식 있는 자리라고 했다.

루시테는 격식을 차리기 위해 신경 써서 단장했다. 그래봤자 깨끗한 옷을 입고 머리를 여러 번 빗는 정도가 다긴 했지만.

“준비는 다 됐느냐?”

“네, 아버지.”

루시테는 비스커스의 부름에 연습하던 대로 그를 아버지라 불렀다.

친아버지에게도 아버지라 부른 적이 없거늘.

자신의 입에서 발음되는 ‘아버지’라는 단어가 루시테는 괜히 어색한 것 같았다.

“가자꾸나.”

루시테는 고개를 끄덕이고 비스커스에게 팔짱을 꼈다.

둘은 긴장한 채로 황태자의 시종을 따라 황태자가 부른 장소로 갔다.

그 뒤를 레일리가 시종 자격으로 조용히 따랐다.

“대신관, 오늘 협조 잘 부탁하오.”

알렉산더가 위압적인 목소리로 렘브란트를 향해 말했다.

방안은 첨예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사방에 화이트 울프가 무장을 한 채 대기하고 있었고, 대신관의 뒤쪽에는 메이븐의 성기사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무슨 일이 있어도 대신관을 지키기 위해 있는 존재.

만약 황태자가 조금이라도 불온한 움직임을 보일 경우 그들은 언제든 검을 뽑아 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긴장감 속에서 렘브란트는 아무렇지 않게 찻잔을 들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렘브란트의 부드러운 음성이 넓은 방 안을 조용히 울렸다.

“헤카레트의 자녀에게 내리는 축복은 언제나 기쁜 일입니다.”

렘브란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렘브란트는 헤카레트의 독실한 신자라는 대마법사 비스커스의 수양딸을 기다렸다. 렘브란트의 눈빛이 부드러웠다.

잔뜩 날이 선 황태자와는 전혀 다르게, 렘브란트는 하나도 긴장하거나 주눅 들어 보이지 않았다.

‘치잇!’

황태자 알렉산더는 화가 뻗쳐 목을 긁는 소리를 냈다. 렘브란트의 여유로운 모습에 배알이 꼴렸기에.

그러나 오늘은 렘브란트가 목적이 아니다.

대마법사 비스커스를 그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목적이지.

알렉산더는 목적을 생각하며 분노를 간신히 참았다.

“전하! 대마법사 비스커스 님과 따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때마침 응접실의 문밖에서 시종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알렉산더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들라 하라!”

알렉산더의 허가가 떨어지자 응접실 문이 부드럽게 열리고 마법사 비스커스와 그의 딸이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

문을 지켜보던 방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은 일순 숨을 멈췄다.

긴 보랏빛 머리칼이 허리께로 부드럽게 물결쳤다.

한 줌밖에 안 되는 허리와 긴 팔다리가 가녀렸다.

작고 부드러운 턱선 위로 다물린 도톰한 입술이 피처럼 붉었다.

오뚝하면서도 끝이 둥근 코가 사랑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고 그늘진 긴 연보랏빛 속눈썹 아래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깊었다.

보랏빛 오로라가 흩뿌려진 듯 자수정 같은 눈동자가 그윽하게 반짝였다.

그녀가 시선을 움직일 때마다 보석 같은 눈동자가 도르륵 굴렀다.

방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순간 착각에 빠졌다.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가 아테라에 강림하여 걸어 들어오고 있는 것이라고.

“비…… 비스커스. 저…… 저 여자가 정녕 그대의 수양딸인가?”

알렉산더의 목소리가 놀라움과 흥분으로 잘게 떨렸다. 그의 목소리가 탁하게 갈라졌다.

“그렇습니다.”

비스커스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는 황태자의 시선이 몹시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루시가 참한 건 알았다만 황태자의 탐욕스러운 얼굴을 보니 비스커스의 기분이 매우 더러워졌다.

“루시. 대신관 전하가 저쪽에 계시는구나. 어서 인사드리거라.”

“네, 아버지.”

루시테는 긴장감에 물들어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는 조금 전부터 렘브란트와 시선을 맞추느라 사람들이 자신을 어떤 눈빛으로 쳐다보는지도 몰랐다.

그녀는 천천히 대신관 렘브란트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몹시……. 몹시도 슬픈 눈을 하고 루시테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루시테는 렘브란트의 맞은편에 앉았다.

렘브란트의 표정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봤다는 것을.

“오랜…… 만이에요. 성하.”

루시테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할 수만 있다면 단둘이 대화를 하고 싶었지만 황태자가 허락할 리가 없었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사람이다. 루시테는 렘브란트를 만나면 하려던 말을 오늘 다 해야만 했다.

“오랜만이구나…….”

렘브란트는 미소조차 짓지 않았다. 그는 그저 슬픈 얼굴로 루시테만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정말로 누님을 많이 닮았구나. 정말 많이 닮았어.”

누님 얘기를 꺼내는 렘브란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루시테는 렘브란트의 말을 듣고서야 그가 어떻게 자신을 알아보았는지를 깨달았다.

닮은 것이다. 자신의 성장한 얼굴이, 전대 대신관 에일란테와.

“나의 조카야…….”

렘브란트가 슬픈 얼굴로 작게 속삭였다.

그 이야기를 황태자는 못 들었을지 모르나, 대신관의 바로 뒤에 서 있던 메이븐의 성기사들은 똑똑히 들었다.

그들은 얼마 전 렘브란트가 자신의 조카라고 불렀던 검은 머리 소녀를 기억하고 있었다.

폐황녀 루시테 클라우디오와 이름도 같고, 생김새의 특징도 똑같은 그 소녀에게 대신관이 조카라고 부르며 오열한 것을.

메이븐의 성기사들은 하나의 오차도 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아름다운 여인에게 또 조카라고 부르다니?

메이븐의 성기사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들은 귀를 기울여 루시테와 대신관의 말을 엿들었다.

여차하면 메이븐의 황제에게 보고해야 할 중대한 사안이었으니 말이다.

“그래. 어떻게 된 거니? 얘기해 보거라. 루시테.”

“제 친한 친구가 죽을 위기에 처했어요.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고 바랐는데, 눈을 떠보니 제가…….”

렘브란트는 루시테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주신은 때로 자신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 그 능력을 나타낸다.

헤카레트의 큰 뜻을 어찌 한낱 인간이 다 알 수 있으랴마는.

주신께서는 루시테가 자신 스스로 간절히 저주를 풀고 싶어하기를 원하신 것이다.

문득 렘브란트의 머릿속에 번개같이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주신 헤카레트가 내린 계시와 관련하여 무언가가 렘브란트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렘브란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황태자 전하. 부모를 여읜 이 가련한 아이를 위해 축복의 기도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기도에 집중하고 싶습니다만, 자리를 마련해주시겠습니까?”

“뭐라? 그것은 곤란하오!”

루시테를 더 보고 싶었던 황태자는 역정을 냈다.

“황태자 전하! 제 딸에게 대신관의 축복을 허락해준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지켜보고 있던 비스커스가 끼어들어 외쳤다.

“그 정도 배려도 해주지 못하신단 말입니까!”

비스커스의 노기 어린 음성에 황태자의 보좌관 샤히드가 재빨리 머릿속으로 주판을 튀겼다.

그는 황태자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오늘의 목적은 비스커스의 환심을 사는 것이라고. 이 정도는 괜찮으니 허락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샤히드의 속삭임에 황태자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좋다! 내 특별히 아량을 베풀어 자리를 마련해주지! 그러나 내 눈이 어딜 가든 따라다닐 것이니 허튼 생각은 그만두길 바라오!”

“감사합니다.”

렘브란트는 황태자의 으름장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마침내 황태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응접실을 비웠다.

나가지 않으려는 메이븐의 성기사들은 대신관이 입구에서 지키고 있어 달라 종용했다.

그들까지 마지못해 나가고 나자 응접실 안에는 세 명의 사람이 남았다.

루시테와 렘브란트. 그리고 루시테의 시종으로 따라온 레일리.

레일리는 존재감을 완전히 지우고 가장 구석에 조용히 서 있었다.

아무도 커튼에 가려져 서 있는 존재감 없는 시종 따위를 신경 쓰지 않았기에 레일리가 응접실 안에 남아 있을 수 있던 것이었다.

“저 자는…….”

렘브란트가 레일리가 있는 것을 보고 눈가를 좁혔다.

“성하. 저분은 제가 살렸다는 그 친구예요. 저분은 이곳에 있어도 괜찮아요. 제 모든 것을 알려주겠다고 약속했거든요.”

루시테는 렘브란트가 레일리를 쫓아내려는 것을 막았다.

렘브란트가 눈을 크게 뜨고 시종 분장을 한 그를 다시금 쳐다보았다.

어디서 본 듯한데 기억은 나지 않았다.

렘브란트는 루시테를 믿고 일단 시종을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렘브란트의 시선이 다시 루시테를 향했다.

“그래, 루시테. 내가 물어볼 게 있다.”

렘브란트의 금빛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의 표정이 진지했다.

“혹시 너, 저주를 풀기 싫었던 게니?”

루시테는 렘브란트의 예리한 질문에 흠칫 놀랐다.

“어, 어떻게…….”

놀란 루시테의 대답이 곧 긍정이나 마찬가지였다. 루시테는 저주를 풀고 싶지 않았다.

“그랬구나…… 그런 거였어. 이제야 주신의 계시의 실마리가 풀리는구나.”

렘브란트가 양손을 모아 쥐었다. 그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무슨 얘기신지 여쭤봐도 되나요?”

“그래. 너에겐 이야기해도 되겠지.”

렘브란트가 양손을 모아 쥔 채 크게 심호흡을 했다.

“내가 이크릭스 행을 결정한 날 주신께 계시를 받았단다.”

렘브란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의 이야기는 무척 놀랄 만한 것이었다.

-그 누구도 온전히 갈망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렘브란트는 자신이 파악한 그 계시에 대해 풀어놓았다.

갈망이라 함은, 성서적인 뜻으로 풀이할 때 헤카레트를 만나서 이루어질 갈망을 말한다.

그 말을 지금 상황에 대입하면 헤카레트의 대신관인 렘브란트를 만나서 이루고자 하는 사람들의 갈망을 뜻한다.

누가 렘브란트를 만나, 어떤 갈망을 이루고자 하는가?

“알렉산더 이크릭스. 세드릭 디에고. 그리고 너. 루시테.”

렘브란트가 긴 손을 펴 접어 보였다.

“내가 지금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은 이렇게 셋이란다.”

렘브란트는 설명을 이어갔다.

세드릭 디에고는 루시테의 저주를 풀어달라며 렘브란트를 찾아왔다.

그는 루시테의 저주를 풀어 무엇을 하고 싶었을까?

분명 무언가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렘브란트는 세드릭의 목적이 친구를 위한 순수한 의도는 아닐 것이라 장담할 수 있었다.

그에게서 불길한 저주의 냄새가 묻어났으니.

그런데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가?

루시테의 저주는 풀렸지만 세드릭 디에고는 감옥에 갇혔다. 아마 곧 처형될 것이다.

“세드릭 디에고는 결과적으로 네 저주를 풀고자 하는 갈망을 이뤘지만, 그의 진정한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다 짐작하지는 못하지만…….”

렘브란트의 얘기에 루시테는 눈을 크게 떴다.

주신의 계시라니. 대신관이 이곳에 올 때 계시가 내렸다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뿐이었다.

“두 번째. 알렉산더 이크릭스.”

렘브란트가 두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내가 주신 헤카레트의 이름 앞에 예언을 하건대, 그는 결코 황제가 되지 못할 것이다.”

쿵.

렘브란트가 낮게 가라앉은 금빛 눈으로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했다.

루시테와 레일리는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나를 이크릭스로 끌어들인 자는 알렉산더 이크릭스란다. 그는 나에게 황태자 위를 보장해달라며 애원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지 아느냐?”

루시테는 고개를 저었다.

렘브란트는 슬픈 미소를 짓고는 말을 이었다.

“나는 알렉산더를 위해 황제의 앞에서 축복을 했단다. 결코 황태자 자리를 위협받지 않을 거라고. 그런데 이제는 그의 미래가 뻔히 보이는구나. 그는 결국 황태자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렘브란트는 단호한 눈으로 덧붙였다.

모든 일은 주신의 계시대로.

알렉산더 이크릭스는 황태자 위를 공고히 하려는 갈망은 이루었지만, 진정한 목적인 황제는 되지 못할 것이다.

루시테와 레일리는 렘브란트의 말을 듣고 서로 마주 보았다.

엄청난 이야기가 대신관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장 유력한 다음 황제인 알렉산더가 황제가 되지 못한 채 죽을 것이라니.

그렇다면 대체 다음 대 황제는 누가 된다는 말인가?

알렉산더를 뺀다면 황자는 둘 뿐이다. 2황자인 레일리와 3황자인 알렉산더의 동생.

“세 번째. 루시테 클라우디오.”

렘브란트가 세 번째 손가락을 접었다.

“저 말인가요? 저도 계시의 내용에 해당이 되나요?”

루시테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자신은 대신관을 만나고 싶어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주신의 계시에 해당이 된다는 말인가?

-그 누구도 갈망을 온전히 이루지 못한다.

루시테는 대신관을 만나 이루고자 하는 갈망이 없었다.

“성하. 저는 당신을 만나서 이루고 싶은 게 없었어요.”

“루시테, 너의 갈망은 바로 그것이란다.”

대신관이 칼같이 정의를 내렸다.

“나를 만나지 않고 저주를 풀지 않는 것. 그래서 평범한 삶을 사는 것. 그것을 바라지 않았니?”

루시테의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신의 대리인 렘브란트의 금빛 눈동자가 모든 것을 꿰뚫어보는 듯 예리하게 빛났다.

“슬퍼하지 말거라. 루시테. 너는 평범한 삶을 살지 못하는 대신 한 가지 이룬 게 있지 않느냐?”

“네?”

루시테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주를 풀기 싫어하던 너의 갈망이 이루어지지 않은 대신, 너는 다른 갈망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알고 있지 않니?”

렘브란트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뻗어 루시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루시테의 갈망.

“잘 생각해 보거라. 너에게 이미 이루어진 것이 내 눈에는 보이는구나.”

루시테는 렘브란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뒤에는 그녀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려낸 레일리가 서 있었다.

자신의 저주가 풀리더라도 레일리의 목숨을 구하는 것. 무슨 일이 있더라도 레일리를 살려내는 것.

자신이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평범한 삶을 버린 대신 구한 사람.

레일리의 목숨이 주신의 계시에서 말한 대가였던 것이다.

루시테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적잖은 충격이 그녀를 강타했다.

한편 레일리 역시 루시테만큼이나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대신관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자신 역시 대신관을 만나고자 갈망했던 사람이었으니까.

레일리가 대신관을 만나 이루고자 했던 갈망.

그것은 루시테의 저주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 그리고 자신의 진정한 자유를 되찾는 것.

그 둘 중 무엇이 이루어지지 않지는 불 보듯 뻔했다.

이제 슬슬 루시테의 저주에 대한 진짜 진실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가 이루지 못할 것은 ‘자유.’ 그가 그토록 바라던 자유.

주신의 계시는 레일리가 결코 자유를 되찾을 수 없을 것이라 판결을 내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과연 레일리가 자유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레일리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루시테와 레일리의 표정이 몹시 어두웠다.

주신의 계시에 대한 모든 것을 쏟아낸 렘브란트의 얼굴에 식은땀이 비 오듯 흘렀다.

그는 옷소매로 땀을 닦으며 천천히 숨을 가다듬었다.

이제야 주신의 깊은 뜻에 실마리가 잡히는 듯했다.

렘브란트는 물을 한 모금 마신 후에 눈을 깜박였다. 그의 정신이 다시금 맑아졌다.

그는 깊은 금빛 눈동자로 자신의 안쓰러운 조카를 바라보았다. 조카는 충격에 빠져 멍한 상태였다.

“루시테. 내가 주신의 계시를 풀 수 있다는 희망에 네 생각을 못 해주었구나. 말해 보거라. 대마법사의 수양딸까지 되어서 나를 만나러 온 이유가 무엇이니?”

흠칫. 루시테는 어깨를 떨었다.

그래. 맞아. 루시테는 렘브란트를 만나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다.

루시테가 막 입을 떼려 하는데 갑자기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

“축복 기도는 다 끝났는가?! 이거 너무 오래 걸리는군!”

황태자 알렉산더의 목소리였다.

가장 먼저 반응한 사람은 레일리였다.

레일리가 퍼뜩 정신을 차리곤 황급히 문의 입구 구석진 곳에 가서 섰다.

황태자가 레일리를 발견하고 쓸데없이 말이라도 걸면 곤란했으므로.

“다 끝났으면 들어가겠소!”

알렉산더가 더 기다리지 않고 문을 벌컥 열었다.

“또 자리를 마련해보마.”

렘브란트가 루시테에게 작게 속삭였다. 루시테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알렉산더는 땀을 많이 흘린 렘브란트를 쳐다보고는 씩 웃었다.

“정말 제대로 축복 기도를 해준 모양이오. 비스커스! 보셨소? 대신관 성하께서 그대의 딸에게 녹초가 될 정도로 축복을 해주셨다오!”

알렉산더는 비스커스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그것참 감사합니다.”

비스커스의 대답은 퉁명스럽기만 했다.

“볼일이 모두 끝난 것 같으니 이만 제 딸을 데리고 돌아가 보겠습니다.”

“그래! 그러시게. 피곤할 테니!”

알렉산더는 선심을 쓰듯 대마법사 일행을 배웅했다.

비스커스는 레일리와 루시테를 데리고 돌아가며 작게 속삭였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둘 다 얼굴이 그 모양인 게야?”

비스커스의 물음에도 레일리와 루시테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저마다 깊은 생각에 빠진 둘의 얼굴이 몹시 심각하고 어두웠다.

* * *

비스커스 일행이 황성에 머무른 지 며칠이 지났다.

대신관이 다시 자리를 마련해보겠다고 했으므로 루시테는 그것을 기다렸다.

루시테는 기다리는 시간을 대부분 멍하니 생각에 잠겨 있었다.

렘브란트에게 들었던 충격적인 이야기들 때문이었다.

레일리의 생명을 위해 포기한 자신의 저주가 주신의 계획의 일부였다니.

루시테는 점점 더 혼돈 속으로 흘러가는 이번 생의 삶 때문에 그저 머리가 어지러웠다.

자신의 친어머니가 에일란테인 것부터 시작해서, 대신관이 삼촌이었다는 사실에다 자신의 목숨과 맞바꿔 지킨 레일리의 목숨이라니.

그리고 결코 황제가 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할 거라는 알렉산더까지.

모든 일이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듯 진행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루시테는 그 불길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한편 루시테와 달리 레일리는 무언가를 준비하듯 바쁘게 움직였다.

그는 하루 종일 연구실에 틀어박혀 무언가를 했다.

엄청나게 많은 양의 서적을 펼쳐놓고 마법진을 그리기도 했으며 약품을 조합하기도 했다.

그렇게 각자의 시간이 흘러가는 중, 조용하던 황성 안이 떠들썩해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정확하게는 이크릭스 안에서 일어난 사건은 아니었다.

그들과 대척점에 있는 제국, 메이븐에서 들려온 소식으로 인해 이크릭스의 황성 안이 시끄러워진 것이었다.

모든 사람이 하루 종일 그 얘기뿐이었기에 루시테도 듣고 싶지 않아도 듣게 되었다.

메이븐에서 들려온 비보를.

“메이븐의 황제가 죽었대!”

“그럼 다음 대 황제는 이안 황태자겠네!”

황성의 사용인들이 저마다 모여 목소리를 높였다.

메이븐 황제의 서거.

루시테는 너무 놀라 손에 들고 있던 물컵을 놓쳤다.

쨍!

물컵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깨졌다.

루시테는 손끝을 떨었다.

그녀의 친부가 죽었다. 하필 이런 때에. 예상했던 시기보다 훨씬 빨리.

루시테가 친부의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날. 이안이 떠난 마지막 날, 이안의 수정구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더랬다.

루시테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그날의 기억을 더듬었다.

「황태자 전하!」

통신구 안에서 다급하게 부르던 목소리.

「급한 일에만 연락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말귀를 못 알아들은 거냐?」

그리고 살벌하게 대답하던 이안.

「황태자 전하! 정말 급한 일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황제 폐하께서!」

「말해.」

「황제 폐하께서 쓰러지셨습니다!」

루시테는 이안과 그의 수하의 대화를 떠올렸다.

그녀는 두통이 일어 주저앉은 채로 이마를 꾹꾹 눌렀다.

그녀의 앞에는 떨어뜨려 깨진 유리컵의 파편이 그대로 나뒹굴었다.

루시테는 파편을 채 치울 생각도 못 하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그날 메이븐의 황제가 쓰러졌다는 소식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지금은 제국력 882년. 전생에 황제가 쓰러졌던 건 원래라면 오 년은 더 뒤의 일이었다.

황제는 쓰러진 이후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기만 하다 결국 죽고 만다.

루시테는 그날 황제가 쓰러졌던 이야기를 들었을 때 설마 했다.

설마 진짜로 오 년 뒤의 일이 일어났을까. 그냥 쓰러진 것뿐이겠지.

그런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메이븐 황제의 서거 소식이라니.

정말로 죽은 것이다. 오 년 뒤에나 죽을 황제가 벌써.

루시테는 손톱을 깨물었다.

친부의 죽음은 이제 그녀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네 번의 생애 동안 황제에 대한 모든 감정을 내려놓아 버렸으니.

중요한 것은 그다음 문제였다.

루시테가 이리도 긴장하고 놀란 이유가 이와 관련이 있었다.

‘대재앙.’

황제가 죽은 뒤 이안은 바로 다음 대 황제가 된다.

그리고 이안이 치세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없을 지독한 기근과 가뭄이 시작된다.

그리고 기근과 가뭄을 해결한 성녀인 루시테는 이 모든 대재앙의 원인으로 몰려 처형을 당한다. 이안과 베로니카에 의해서.

‘어떻게 벌써?’

이렇게 빨리 대재앙이 다가오다니.

루시테는 눈을 질끈 감았다.

확실히 지난 생애와 모든 게 다르고, 또 빨랐다.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대재앙이 가까이 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도.

루시테는 지척으로 다가온 죽음의 냄새가 코끝에 느껴지는 듯했다.

똑똑똑!

다급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루시테는 벌떡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여니 그곳에는 보랏빛 망토를 두른 메이븐의 성기사가 서 있었다.

“당신은…….”

루시테는 눈을 좁혔다.

“안녕하십니까. 레이디. 성하께서 레이디를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죄송하지만 지금밖에 시간이 없습니다.”

성기사는 다급하게 이야기했다.

“알았어요. 어딘가요? 같이 가요.”

루시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밖으로 나섰다.

성기사의 걸음이 급했고, 루시테도 덩달아 거의 뛰듯 걸으며 성기사를 따라갔다.

목적지에 다다를수록 짙은 꽃내음이 풍겨왔다.

아덴티움의 가장 안쪽, 황태자가 대신관을 가둬둔 깊숙한 궁 뒤쪽으로 작은 정원이 있었다.

메이븐 황제의 서거 소식으로 황태자가 긴급회의를 열었다.

그 사이,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렘브란트는 루시테를 불러오라 한 것이다.

루시테의 시야에 정원 저 안쪽에 서 있는 긴 보랏빛 머리칼의 남자가 잡혔다.

“성하!”

루시테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발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루시테는 재빨리 뛰어 대신관 렘브란트의 앞에 당도했다.

렘브란트는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로 거친 호흡을 내쉬는 자신의 조카를 내려다보았다.

“루시테, 삼촌이라 불러도 된단다.”

“!”

“하나뿐인 조카에게서까지 성하라는 호칭은 듣고 싶지 않구나. 내 부탁을 들어주겠니?”

대신관의 금빛 눈동자가 슬픔으로 물들었다.

루시테는 양손을 맞잡고 입술을 달싹였다. 루시테는 보랏빛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며 갈등했다.

그가 자신의 가족이라는 사실이 아직 와닿지 않았다.

에일란테가 친모라는 것도 믿기지가 않는데 대신관이 삼촌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불러주려무나. 부탁한단다.”

렘브란트가 손을 뻗어 루시테의 손을 잡았다.

“네…… 삼촌…….”

루시테는 어렵사리 대신관을 향한 호칭을 정정했다. 삼촌이라는 단어가 너무도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루시테의 어색한 기분이 무색하게도, 그녀가 대신관을 삼촌이라 부르자마자 대신관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루시테의 삼촌이라는 호칭을 너무도 좋아했다.

“듣기 좋구나. 루시테. 나의 소중한 조카야.”

렘브란트가 기쁘게 웃으며 루시테를 정원의 작은 테이블로 이끌었다.

‘나의 소중한 조카.’

루시테는 렘브란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소중한 조카’라는 낯선 울림이 너무도 다정하게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래, 루시테. 말해 보거라. 그때 내가 급하게 이야기를 하느라 정작 네 얘기는 듣지 못했구나.”

루시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드디어 물어볼 수 있게 되었다. 루시테가 그토록 대신관을 만나 묻고 싶었던 이야기를.

루시테는 긴장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말해 보려무나.”

렘브란트가 진지하게 루시테를 마주 바라보았다.

“어머니…… 에 관해서예요.”

루시테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어디서부터 물어봐야 할까. 막상 물어보려니 이상하게 말문이 막혔다.

“그래, 누님에 대한 게 궁금하겠구나. 내가 미처 생각을 못했어. 미안하구나.”

렘브란트는 전해 들은 루시테의 어린 시절을 상기했다.

저주받은 불쌍한 3황녀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목숨을 잃고 하녀들의 손에 컸다고 했다.

아마 불쌍한 그의 조카는 제 친모의 얼굴도 모를지도 몰랐다.

렘브란트는 품속에서 작은 펜던트를 꺼냈다. 칠이 벗겨진 은빛의 원형 로켓 펜던트였다.

렘브란트는 로켓 뚜껑의 오돌토돌한 문양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졌다.

너무 많이 만져서 고풍스러운 무늬가 많이 닳아 있었다.

그가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 진짜 주인에게로 보내주어야 할 물건이었다.

“받거라. 이제 네 물건이니.”

렘브란트는 펜던트를 루시테에게로 건넸다.

양손으로 물건을 건네받은 루시테는 렘브란트를 한 번 보고 펜던트를 한 번 바라보았다.

“열어 보거라.”

렘브란트의 허락에 루시테는 조심스레 펜던트를 열었다.

펜던트 안에는 섬세하게 그려진 초상화가 들어있었다.

긴 보랏빛 머리칼에 금빛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 여자는 한눈에 봐도 렘브란트와 닮아 보였고. 그리고…….

“너와 많이 닮았지? 네 친모 에일란테란다.”

설마 했던 의문이 렘브란트의 말로 인해 사실이 되었다.

초상화 속의 여자는 루시테 자신과 몹시 닮은 외모를 갖고 있었다.

이제는 부인할 수 없었다. 전대 대신관 에일란테. 그녀는 루시테의 친어머니였다.

루시테는 초상화를 한참 들여다보다 로켓의 뚜껑을 닫고 꽉 쥐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 피어올랐다.

루시테는 심호흡을 했다.

“여쭤볼 게 있어요. 삼촌.”

조금 전보다는 제법 자연스러운 호칭이 루시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말해보거라.”

렘브란트가 햇살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머니는…… 저를 사랑하셨나요?”

그토록 물어보고 싶었던 질문이 마침내 루시테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자신이 한 번만이라도 가족의, 부모의 사랑을 받은 적이 있었는지. 친모의 사랑을 받은 적이 있었는지.

자신은 사랑으로 태어난 자식이 맞는 것인지.

루시테는 그게 궁금했다.

렘브란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는 메이븐의 황제가 자신의 누님에 대해 어떻게 소문을 냈는지 대강 들어 알고 있었다.

천한 하녀가 욕심에 눈이 멀어 황제를 유혹했고, 그 대가로 하녀는 죽고 저주받은 딸이 태어났다고.

황제는 그렇게 에일란테에 대한 이야기를 덮어버렸다.

그 누구도 저주받은 황녀의 진짜 어미가 누구인지 제대로 아는 이가 없었다.

렘브란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대신관은 신전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몸이었으며, 진실을 밝힌다 하더라도 누님의 명예만 땅으로 추락할 터였다.

거기다 아무리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도 황제는 묵묵부답.

황성에 방문하고 싶다 요청을 보내도 칼 같은 거절만이 되돌아왔다.

황제는 철저히 렘브란트가 메이븐의 황성과 접촉하는 것을 차단해버렸고, 한때 가장 강력했던 대신관 에일란테의 흔적을 그렇게 지워버렸다.

“루시테.”

고뇌하던 대신관이 조카의 이름을 불렀다.

“때로는 어떤 진실은 아주 참혹할 수 있단다. 그래도 들을 수 있겠니?”

“괜찮아요.”

루시테는 쓰게 미소를 지었다.

진실이 참혹한들 얼마나 참혹하겠는가. 루시테는 이미 네 번의 인생 동안이나 그 끔찍한 집구석에서 살았고, 살해, 독살, 처형을 당했다.

그 어떤 진실도 그녀가 지금까지 겪어온 고통보다 어렵지는 않을 터였다.

“말해주세요. 삼촌.”

루시테의 보랏빛 눈동자가 단호했다.

렘브란트는 마침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을 루시테에게 이야기해주었다.

황제가 대신관 에일란테를 납치하여 억지로 취한 일.

아이가 생겨 에일란테가 다시는 신전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된 일.

황성의 차디찬 구석에서 아이를 낳고 목숨을 잃은 일.

“그렇게 되었단다.”

렘브란트의 금빛 눈에 물기가 어렸다.

“어머니가…… 억지로…….”

황제에게…….

루시테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알고 있던 사실들이 전부 다 거짓이었다. 그 모든 것이 황제가 만들어낸 거짓.

자신이 대신관을 납치해 놓고는, 천한 하녀로 역사를 바꿔놓다니.

루시테는 황제의 끔찍함에 치를 떨었다. 자신의 친부인 것조차 부끄러운 인간이 아니던가.

루시테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제 어머니는 저를 사랑하기 어려우셨겠네요……. 억지로 낳은 아이이니…….”

“그렇지 않단다.”

렘브란트는 루시테의 손을 꼭 쥐었다.

“네 어머니가 나에게 쓴 편지가 있단다. 이곳에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너무 많이 읽어서 그대로 네게 들려줄 수 있어.”

‘편지라니.’

루시테는 눈을 크게 떴다.

렘브란트가 인자한 눈으로 편지의 내용을 읊기 시작했다.

[렘브란트.

나는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느꼈다. 하루하루 신께서 내게 준 시간이 다해간다는 것을 느낀다.

배 속 아이의 생명력이 얼마나 강한지 내 몸이 이런데도 다행히 건강하구나. 아이가 움직이는 게 느껴질 때면 내 마음이 다 벅차오르는 느낌이 든다.

만약 내 아이가 태어난다면 좋은 삼촌이 되어주렴.

아이의 앞에 예쁘고 좋은 길만 펼쳐지도록 주신의 이름으로 축복해주렴.

나의 아이. 나의 소중한 아이.

아들이라면 이실리데. 딸이라면 루시테라고 이름을 지을 거야.

두 이름 다 ‘빛의 축복을 받은 이’라는 뜻이란다.

비록 이런 상황 속에서 태어나지만 나의 소중한 아이는 행복할 거야.

못난 어미라 미안하다고.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사랑한다고. 내가 정말 너를 사랑한다고 전해주렴. 렘브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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