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화 (13/18)

13.

렘브란트가 얘기해준 편지의 내용은 루시테의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렘브란트에 대한 내용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이야기가 루시테와 관련된 이야기였다.

루시테는 자신의 이름을 황제가 아닌 친모가 지어주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루시테는 이로써 렘브란트를 만나 묻고 싶었던 그 의문이 모두 해소되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를 사랑했는지. 그 사실을 알고 싶었는데…….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만 봐도 그녀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했는지 루시테는 절절히 느낄 수 있었다.

루시테는 물기 어린 보랏빛 눈으로 렘브란트를 향해 환하게 미소 지었다.

“감사합니다. 삼촌.”

“그래. 너무 슬퍼하지 말려무나. 너는 누님의 사랑하는 딸이자, 내 소중한 조카란다.”

루시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성하! 레이디를 숨기셔야 합니다! 황태자가 오고 있습니다!”

망을 보던 성기사가 급히 달려와 외쳤다.

루시테와 렘브란트는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저쪽! 저쪽에 들어가 있거라!”

렘브란트가 작은 관상용 넝쿨이 있는 쪽을 가리켰다. 루시테는 황급히 달려 그 뒤에 가서 숨었다.

루시테가 넝쿨 뒤로 숨자마자 때맞춰 알렉산더가 렘브란트가 있는 정원에 당도하여 외쳤다.

“대신관!”

“무슨 일이십니까. 황태자 전하.”

렘브란트는 태연한 낯빛으로 황태자를 맞이했다.

조금 전까지 눈에 눈물이 맺혀 있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멀끔해 보였다.

황태자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렘브란트를 노려보았다.

무언가 수상했으나 안타깝게도 수상한 구석은 발견할 수 없었다.

황태자는 성큼 걸음을 옮겨 조금 전까지 루시테가 앉아 있던 테이블에 털썩 앉았다.

“대신관도 앉으시오.”

알렉산더는 선심 쓰듯 렘브란트에게 권했다.

렘브란트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고요한 눈빛으로 알렉산더를 응시했다.

“흠. 대신관께 알려줄 게 있어서 왔소.”

“무엇입니까? 태자 전하께서 제게 친히 알려주실 것이.”

“메이븐의 황제가 죽었네.”

알렉산더가 진득한 미소를 지었다.

“그 나라도 내 꼴이 나겠더군. 대신관 당신이 이곳에 있으니 말이야.”

알렉산더의 말에 대신관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제국의 황제가 즉위하려면 신전의 인정을 받아야 한다.

지금까지 이크릭스는 형식상 서류를 통해 인정을 받아왔다.

그러나 지금은 친선을 위해 대신관이 직접 이크릭스의 황성에 당도한 상황.

알렉산더가 황제가 되려면 반드시 공식적으로 대신관에 의해 황제의 관을 건네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메이븐은 원래도 신성 대제국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으니 말할 것도 없었다.

메이븐의 황태자가 황제로 등극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대신관이 방문하여 황위 계승식을 진행해주어야 한다.

렘브란트는 금빛 머리칼에 꽤 호기로운 눈빛을 갖고 있던 이안 황태자를 떠올렸다.

그가 신전으로 축복을 받으러 왔을 때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더랬다.

이안 황태자는 단연코 알렉산더보다 훨씬 큰 황제의 그릇이었다. 그는 유일하면서도 뛰어난 황태자다.

렘브란트가 장담하건대, 이안 황태자는 제 아비보다 더 훌륭한 치세를 할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다음 대 메이븐의 황제가 되는 일은 당연한 수순이거늘.

황위 계승식이라는 절차를 밟지 못해 황제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나? 대신관. 그대가 내게 계승식만 치러준다면 나는 바로 그대를 메이븐으로 보내 드릴 생각이 있는데 말일세.”

알렉산더가 간드러진 목소리로 대신관을 회유하려 했다.

“황태자 전하. 제 생각은 변함이 없습니다.”

렘브란트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국장을 먼저 치르십시오. 저는 마땅한 절차 없이는 결코 한 발자국도 나설 생각이 없습니다.”

알렉산더가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났다.

“그대는 정말 말이 안 통하는 인간이로군!”

알렉산더는 상스러운 소리를 대신관 앞에서 잘도 내뱉었다.

“대신관! 내 그대의 의견은 그대로 메이븐에 전해주겠네! 나 때문이 아니라 그대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발생한 것이라고!”

“모든 일은 신의 뜻대로 이루어질 뿐입니다.”

대신관은 알렉산더의 협박에도 끝까지 생각을 바꾸지 않았다.

쾅!

알렉산더는 열이 뻗치는지 의자를 발로 찼다. 의자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알렉산더가 위협적인 모습으로 으르렁거렸지만 렘브란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고요하고 단호한 눈동자로 알렉산더를 응시할 뿐이었다.

“젠장! 신전이란 것들은! 대신관의 감시를 더 철저히 해라! 쥐새끼 한 마리도 이 궁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

알렉산더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명령하고는 결국 씩씩대며 제 궁으로 돌아갔다. 아무 성과도 얻지 못한 채로 말이다.

대신관은 어두운 표정으로 루시테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감시가 강화되었다니 큰일이었다.

루시테를 원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지 못하게 되었다.

대신관은 성기사들을 시켜 루시테를 저들이 보지 못하게 가려 궁 안으로 데리고 들어오도록 했다.

“어떻게 하죠? 삼촌, 비스커스 님께 제가 이곳으로 온다는 사실을 얘기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레일리에게도.

루시테는 불안하여 쉴 새 없이 손을 만지작거렸다.

레일리가 걱정할 모습이 눈에 선연했다.

“미안하구나, 루시테. 일단 기다려 보자꾸나. 감시가 소홀해지면 반드시 돌려보내 줄 테니.”

대신관이 눈빛이 슬퍼졌다.

루시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렘브란트도 지금 상황이 괴로울 것이다. 그녀가 그를 더 힘들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렘브란트의 궁은 방이 여러 개였다. 그 중 한 방에 루시테가 숨어 지낼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루시테는 방의 테이블에 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레일리에게 소식이라도 전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루시테의 얼굴이 한없이 어두워졌다.

* * *

한편 레일리는 생각보다 빨리 루시테의 부재를 알게 되었다.

알렉산더가 찾아와 비스커스에게 수양딸을 자기에게 달라고, 자기와 결혼을 하게 해달라고 떼를 썼으므로.

“비스커스! 왜 싫다는 것이오! 내가 그대의 딸을 황후로 만들어주겠다니까?”

루시테와 알렉산더의 결혼이라니.

레일리는 알렉산더의 미친 소리를 듣자 가슴에 불길이 이는 듯했다.

레일리는 알렉산더와 비스커스가 투닥거리는 것을 내버려 두고 루시테의 방으로 향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루시테의 방문이 열려 있었다.

레일리는 싸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당장 문을 열고 루시테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 근처에 깨진 유리잔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루시테의 흔적은 방 안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레일리는 매서운 눈으로 생각했다.

루시테를 이 황성에서 데려갈 이라면 세 명쯤. 알렉산더, 세드릭 디에고, 그리고 대신관.

알렉산더는 비스커스를 찾아와 저러고 있으니 제외다.

세드릭 디에고는 지하 감옥에 갇혀 있으니, 그도 제외.

“대신관.”

사나웠던 레일리의 기세가 가라앉았다.

만약 알렉산더가 루시테를 데려갔다면 레일리는 당장 사자궁을 부숴버리겠다고 날뛰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아닌 대신관이라면, 루시테가 진짜 가족인 그와 함께 있다면 어느 정도 안심이었다.

당장 구하러 가야 할 정도로 위험한 상황은 아닐 터였다.

그러나 온전히 안심할 수는 없다. 대신관은 알렉산더의 철저한 감시 하에 있으니 언제 루시테가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지 몰랐다.

레일리는 루시테의 방을 나와 연구실로 돌아왔다.

약물이 들어 있는 비커 속에 위험하게 연기를 내뿜는 검은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그런 비커가 연구실 안에 수십 개.

하나만 불이 붙어도 방 하는 우습게 날려 버릴 만한 위험한 폭발물이었다.

레일리가 미친 듯이 연구해서 만든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아직 조금 더 만들어야 했다. 그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는.

‘이제 곧이야.’

레일리의 은빛 눈동자가 위험하게 번뜩였다.

레일리의 자유.

레일리는 진정한 자유를 찾고 싶었지만 그게 무엇인지 정확히 답을 찾지 못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하게 그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고 있었다.

진정하게 억압받는 것에서 해방되려면 황제의 죽음이 다가 아니다.

누군가 또 안티매직을 사용해 레일리를 이용하려 들지 모를 일이 아닌가.

레일리는 황성에만 오면 자신을 끔찍하게 얽매는 족쇄를 찬 느낌이 들었다.

그 치명적인 약점이 언제 자신을 찾아올지 모른다면, 레일리는 멀리 떠나서도 결코 편안히 살 수 없으리라.

레일리는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볼 생각이었다.

그의 모든 것을 걸고 초대 황제의 유산과 결판을 내리라.

“나브레…….”

레일리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 * *

이안은 자나 깨나 루시테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메이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지만, 돌아오고 나서도 계속 후회했다.

차라리 억지로 데려올걸. 아니면 더 머물러서 설득이라도 할걸.

이안은 밀린 업무를 하면서도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비록 지금 황제가 쓰러져 병상에 누워 있지만, 일어나면 다시 이크릭스로 찾으러 가야겠다. 그런 계획을 세우는 중이었다.

그런데 웬걸.

쓰러졌던 황제는 시름시름 앓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어느 새벽, 조용히 숨이 꺼져 가던 황제는 마침내 숨을 거뒀다.

메이븐의 태양이 진 것이다.

이안은 황제의 부고 소식을 들었을 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공석이 된 자리를 자신이 채워야만 할 테고, 국장을 치르고 황위를 물려받고, 황제 일을 본격적으로 하고.

정세를 안정화시키는 등 해야 할 일이 밀물처럼 이안을 덮쳤다.

이안은 결국 루시테를 찾으러 다시금 이크릭스로 떠나지 못하고 메이븐에 완전히 발이 묶이고 말았다.

그렇게 국장을 치르고, 황위 계승과 다른 일을 준비하던 중. 이안에게 한 소식이 들려왔다.

이크릭스로 보낸 성기사로부터 들려온 은밀한 편지였다. 이안이 심어둔 측근 기사였다.

[황태자 전하께 보고드립니다.

폐황녀 루시테 클라우디오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폐황녀가 대신관 성하의 조카라고 합니다. 대신관 성하께서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

편지에는 루시테가 사실 누구의 딸이었는지. 그 속사정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루시테가 저주가 풀려 어떤 모습이 되었는지도.

이안은 편지의 모든 내용을 읽고 충격에 휩싸였다.

자신이 루시테를 떠난 그 사이에 루시테의 저주가 풀리고 친모에 대한 진실이 밝혀졌다.

이안은 당장 메이븐을 떠나 이크릭스에 있는 루시테에게로 달려가고 싶었다.

루시테가 저주를 풀었다니.

저주를 푸는 방법을 알고서도 메이븐에서 떠난 그 여자가.

“루시테…….”

이안은 머리를 싸맸다. 저주받은 제 이복누이. 그녀가 너무 그리웠다.

그녀가 떠나기 전에 조금만 더 잘해줄 걸.

그랬다면 떠나지 않았을까.

이안은 뒤늦게 후회를 했다. 그가 그녀에게 함부로 대했던 그 시절들이 가슴에 사무쳤다.

이안은 루시테가 저주받은 황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공표해야 할지 말지를 한참 고민했다.

만약 지금 공표한다면?

루시테의 친모가 전대 대신관 에일란테라는 것도 밝혀야 하고.

그렇다면 사실은 황제가 대신관을 후궁으로 삼았다는 것이 물 위로 드러나게 된다.

지고한 대신관을 후궁으로 삼아 놓고 천박한 하녀로 몰아붙여 욕받이로 만들었다는 것이 모조리 드러나게 된다.

“젠장.”

이안은 쥐고 있던 서신을 와락 구겼다.

전대 황제는 벌을 받아 마땅한 놈이지만 이런 식으로는 안 됐다.

만약 지금 황제의 죄악이 공개된다면 불안한 정세가 크게 흔들리게 된다.

황제가 한 짓은 신성모독이다.

황제가 한 짓이지만 황실 전체가 손가락질받을 것이며, 신성 제국이라는 타이틀이 흔들릴 것이다.

전대 황제가 황위에 있었다면 이안은 무슨 일이 있어도 루시테의 억울함을 알렸겠지만.

지금 최고 자리에 있는 사람은 이안이었다. 아직 황위 계승식은 하지 못했지만 이안은 황제나 다름이 없었다.

모든 서류가 이안의 손을 거쳤고, 사람들은 이미 이안을 황제로 대하고 있었다.

만약 지금 루시테의 억울함을 공표한다면 흔들리는 것은 전대 황제의 명예뿐만이 아니다.

아직 황위 계승식을 하지 않은 이안의 지위와 명예가 흔들리게 된다.

간신히 안정되어가는 그의 세력이 위험해진다.

“젠장! 젠장!”

이안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는 한숨도 자지 못하고 밤새 고민했다.

날이 밝아오고, 이안은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이안은 의자에서 일어나 성기사가 보내온 서신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천천히 촛불로 가져갔다.

치이익.

서신이 검게 변하며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서신은 순식간에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다.

‘루시테…… 미안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이안은 죄책감에 사로잡혀 작게 중얼거렸다.

결국 그에게는 그의 삶이 우선이었다.

루시테를 원하지만 그는 신성 대제국을 짊어지고 있는 황태자였다.

고작 여자 때문에 그의 삶을 내버릴 수는 없었다.

이안은 루시테의 일을 공표하지 않고 덮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평소처럼 업무를 보고, 신료들과 회의를 하고. 짬을 내 검술을 훈련하고. 그렇게 하루를 보냈다.

저녁때가 되어 이안이 마저 업무를 보고 있는데, 그의 보좌관이 급하게 노크를 했다.

“무슨 일이지?”

“황태자 전하! 그것이!”

“왜, 또 이크릭스의 머저리가 무슨 짓이라도 했다고 하던가?”

이안은 피곤한 얼굴로 물었다.

이크릭스의 머저리. 알렉산더.

그 작자가 지금 국장도 치르지 않고 대신관을 묶어둔 채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이안도 잘 아는 바.

이안은 그 건에 대해서는 당장은 두고 볼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자신이 황위 계승식을 당장 치르지 않는다고 해서 결국 황제가 되지 못할 것은 아니었으므로.

어차피 이 나라에 황자는 이안 하나뿐이었다.

유일무이한 황자이자 황태자 이안. 그의 권력은 굳건했다.

이크릭스의 머저리처럼 황위를 차지하기 위해 아등바등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였다.

“아닙니다! 그게 아닙니다! 이크릭스의 상황은 계속 같습니다.”

이안의 보좌관 앤체프 자작이 다급한 얼굴을 했다.

“그럼 무슨 일이란 말인가?”

“아벨라 대평원의 밀이 말라가고 있다고 합니다. 아직도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이안은 미간을 좁혔다. 안 그래도 골치 아픈 일이 한두 개가 아닌데 이제는 날씨까지 그의 속을 썩였다.

희한한 일이었다.

아벨라 지역에 비가 이토록 오래 내리지 않은 일은 처음이었다. 비가 내리지 않은 지 벌써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원인은 조사해 봤나?”

앤체프 자작은 고개를 흔들었다.

“원인은 알 수가 없습니다. 그곳은 비가 적게 오는 지역이 아닙니다. 날씨 기록을 전부 뒤져 봤지만 이렇게 오랜 기간 비가 내리지 않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전하.”

“일단 급한 대로 마법사와 정령사를 차출하여 켈라트 호수의 물을 옮기도록 하고, 호수부터 농지로 연결하는 수로를 만들라 명하라.”

“예, 전하.”

수로를 만드는 작업은 많은 노동과 비용이 들어가는 큰 작업이었지만 아벨라 대평원은 제국 최고의 곡창지대였다.

그곳에 문제가 생기면 당장 다음 해 제국민의 식량 공급에 문제 발생한다.

비용이 얼마가 발생하든 대비책을 세워 마땅했다.

“비가 안 오는 지역은 그곳뿐인가?”

“최근에 다른 지역도 다 비슷한 상황입니다. 꼭 하늘이 막혀버린 것처럼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 모든 지역에 비가 안 내린다니. 기다리다 보면 비가 올 것이다.”

이안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메이븐은 신성하며 풍요로운 제국이다. 매년 산과 바다, 들에서 엄청난 양의 식량이 거두어진다.

비가 오지 않는 문제로 메이븐이 곤란에 빠진 적은 지금껏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곧 비가 올 것이다. 그래서 발생하는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그렇게 이안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날씨 문제는 그대로 넘어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한 달에서 하루가 더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열흘이 더 지나 두 달이 되어갔다.

하늘에서는 여름의 뙤약볕이 내리쬐는데 비가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다. 단 한 방울도.

“전하! 큰일 났습니다!”

이안의 보좌관이 다급하게 문을 두드렸다.

이안의 집무실 문은 쉴 틈이 없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들락거리며 각 지방의 영지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보고했다.

보좌관은 문지방이 닳도록 각 지방에서 벌어지는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나타났다.

두 달이 넘도록 내리지 않는 비에 잠잠하던 제국민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레지스탕스의 세력이 늘어났고, 제국민들의 원성이 점점 높아졌다.

신성제국 메이븐으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당장 살기가 팍팍해지니 하늘을 뚫을 듯 높았던 황실의 권위가 떨어지고 있었다.

황성 안팎의 분위기가 살얼음판을 걷듯 살벌했다.

* * *

이안은 늘 해오던 황족의 전통대로 여느 때처럼 오찬을 열었다.

한 달에 한 번 모든 황족이 모여 가지는 식사 자리.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식사였다. 다른 거라면 이안이 전대 황제가 앉았던 가장 상석에 앉았다는 점 정도였다.

결벽증이 있는 데다 피곤한 이안은 언제나처럼 음식은 입에도 대지 않고 포크로 건드리기만 했다.

“태자. 그러다 몸이 상합니다. 업무를 좀 줄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이시엘라 황후의 물음에 이안이 딱딱하게 대답했다.

아무 감정도 묻어 있지 않은 그야말로 사무적인 목소리였다.

황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어느 때부터인가 그녀의 아들이 멀게만 느껴진 탓이었다.

“요즘 비가 오지 않아 얘기가 많아요. 몰상식한 자들이 황제의 부재 탓이라고도 하던데……. 황태자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1황비 아나스타샤가 눈치도 없이 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이시엘라 황후가 매서운 눈길로 아나스타샤를 바라봤지만, 아나스타샤는 황후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1황녀 비올레타의 어머니인 그녀는 자신이 성녀를 낳았다는 데에 대한 자신감이 대단했다.

비올레타. 보라색 유전을 모두 타고 태어난 그녀의 딸은 백성들에게서 성녀라 추앙받고 있었다.

보랏빛 머리칼에 보랏빛 눈을 가지고 태어난 아름다운 그녀의 딸.

분명 각성만 하게 된다면 넘치는 성력을 발현할 터였다.

그렇다면 어쩌면 제 딸을 여황제로 세울 수 있을지도 몰랐다. 황위 계승식도 하지 못한 황태자를 밀어내고 말이다.

아나스타샤는 야망이 가득한 눈으로 이안을 진득하게 쳐다보았다.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1황비께서는 대신관의 부재 때문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이안은 싸늘한 얼굴로 1황비를 향해 되물었다. 이안의 목소리가 건조했다.

1황비는 이안의 싸늘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입을 놀렸다.

“역시 모르시는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황태자도 신은 아니시지요.”

이안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저 여자가 저러는 것이 한두 번도 아니었기에 이안은 그저 잠자코 들었다.

아나스타샤는 이안을 깎아내리기 위해 계속해서 뭐라고 떠들어댔다.

“그래서 말입니다. 저희 비올레타를 이크릭스로 보내는 것이 어떻습니까?”

“!”

시선을 아래로 두고 있던 이안은 아나스타샤의 마지막 말은 무시하지 못했다.

그는 고개를 들고 아나스타샤를 쳐다보았다.

저 미친 여자가 지금 뭐라고 한 것인가. 이안의 표정이 사나워졌다.

“들어보세요. 황태자. 만약 성녀라 추앙받는 우리 비올레타가 이크릭스로 간다면 대신관 성하께서 얼마나 좋아하시겠습니까? 그 고집을 꺾으시고 메이븐으로 돌아오시겠지요. 그렇다면 황위 계승식을 할 수 있을 테고 비가 내릴 게 아닙니까?”

이안의 반듯한 미간에 주름이 갔다. 듣자 듣자 하니 저 미친 여자가 못 하는 소리가 없었다.

지금 정세가 어떤 줄 알고 황녀를 적대국으로 보내자는 소리나 한다는 말인가?

만약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비올레타는 바로 볼모 행이었다.

“안 됩니다.”

이안은 싸늘한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황태자! 생각해 보세요! 지금 대신관을 모셔와야 할 게 아닙니까! 일어나지도 않을 나라 간의 문제가 걱정이신 겝니까? 지금 비가 안 오는 문제가 더 심각한 게 아닙니까! 정말 예언 속의 일이 지금 벌어진 거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나스타샤의 언성이 높아졌다.

“1황비께서는 지금 비가 안 오는 게 예언 속의 대재앙이라는. 그런 말씀을 하고 싶은 겁니까?”

‘하.’

이안의 푸른 눈동자에 점차 분노가 담겨갔다.

감히 자신이 황제가 되는 이런 시기에 대재앙 같은 소리를 지껄이다니.

나이프를 쥐고 있는 이안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안이 스산한 눈빛으로 아나스타샤를 노려봤다.

“아니, 그건 아니지만. 황태자!”

아나스타샤는 이안의 기세에 놀라 말을 더듬었다. 그러나 곧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들어보세요. 우리 비올레타가 정말 예언의 성녀일지 모른단 말입니다. 예언에서는 어둠이 묻은 소녀가 각성하여 온 세상에 닥친 재앙을 해결할 신의 딸이 된다고 되어있지 않습니까. 이 메이븐의 황실에서요!”

예언의 성녀.

그 성녀가 나타날 거라는 얘기는 전대 성녀가 죽은 후 오래 있어 온 이야기지만 아직 이렇다 할 신성력을 가진 여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 가장 유력한 후보가 비올레타이긴 했다.

많은 학자와 사제가 ‘어둠이 묻은’이라는 구절을 각성하기 전 신성력이 없는 상태라고 해석했다.

비올레타는 원래는 신성력이 없었으나 점점 미약하나마 신성력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나스타샤의 말대로 비올레타가 예언 속 성녀일지도 몰랐다.

-가장 고귀한 자리에서 태어난다.

-어둠이 묻었다.

-각성하여 세상을 구한다.

각성한다는 내용만 빼면 예언의 내용과 비올레타와 다 들어맞고 있었다.

하지만 이안은 그 재앙이 자신의 대에 일어날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 성녀가 나타날 리도 없는 것이다.

“오라버니.”

그때 내내 조용히 있던 비올레타가 이안을 불렀다. 연한 보랏빛 눈동자가 이안을 똑바로 응시했다.

이안은 시선만 돌려 비올레타를 마주 봤다.

“오라버니, 어머니의 말씀이 맞아요. 황제가 없기에 비가 내리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설사 사실이 아니더라도. 지금 황제 자리가 비어서는 안 되지 않나요? 공석이 된 지 너무 오래됐어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

이안의 목소리에 짜증과 피곤이 묻어났다. 모녀가 쌍으로 그를 피곤하게 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올레타는 이안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비올레타는 오히려 미소 지었다. 살짝 올라간 아름다운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저를 보내주세요, 오라버니. 제가 반드시 대신관 성하를 모셔오겠습니다. 성하가 계시는데 주신께서 비를 안 내려주시겠습니까? 하다못해 축복이라도 받아야지요.”

비올레타가 제 가슴에 여린 손을 올리곤 호소했다.

“저를 믿어주세요, 오라버니. 저라면 가능해요. 저라면 대신관 성하를 설득할 수 있습니다. 아직 신성력을 각성하지 못했을 뿐, 저는 가장 유력한 성녀가 아닙니까? 메이븐을 위해 뭐라도 하게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오라버니.”

이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방 안에 싸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 * *

비올레타와 그의 어머니 아나스타샤는 며칠을 계속 이안을 찾아와 괴롭혔다. 자신을 이크릭스로 보내 달라고 말이다.

거기에 한술 더 떠 2황녀 시드니아의 어미인 2황비 타니아까지 나섰다. 이대로 가다간 모든 공을 비올레타에게 빼앗길 거라는 걱정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타니아는 비올레타 대신 시드니아를 보내라며, 아니면 둘이 같이라도 보내라며 이안을 밤낮으로 괴롭혔다.

1황비와 2황비는 여론을 몰아갔고 귀족들을 끌어들였다. 마침내 먼저 지친 쪽은 이안이었다.

비가 여전히 내리지 않아 문제는 끊임없이 몰아치는 와중에, 비올레타와 시드니아의 어미들이 죽어라 그를 귀찮게 했다.

결코 비올레타와 시드니아, 그 누구도 이크릭스로 보낼 생각이 없었던 이안의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만.”

피곤한 얼굴로 생각에 잠겨 있던 이안이 눈을 번쩍 떴다. 이안의 푸른 눈이 시리게 빛났다.

그는 턱을 괸 채 무릎을 손끝으로 빠르게 두드렸다.

이안은 벌떡 일어나 작은 함을 가져왔다.

죽은 황제가 애지중지 보관하던 국보였고, 이 물건의 존재는 이안만이 알고 있었다.

‘성녀 일레일라의 눈물.’

일레일라는 벌써 삼백 년도 더 전의 인물이다. 백성들에게 따뜻한 신성력으로 큰 이적을 행했다던 강력한 신성력을 가진 성녀였다.

이안은 함을 열었다. 붉은 천 위에 물방울 모양의 보랏빛 보석이 달린 얇은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언뜻 보면 평범한 자수정 목걸이로 보이나, 이 목걸이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물건이었다.

일레일라의 신성력이 결정으로 만들어진 보석이었으니까.

일개 자수정 따위와 비교도 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다.

이 목걸이는 지닌 것만으로도 가진 사람의 상처를 낫게 해주고 마음을 평안하게 해준다.

거기다 더한 가치는 바로, 가진 자에게 신성력을 사용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이었다.

비록 위력이 크지 않고 결국에는 소모되는 것이긴 하지만……. 지금 당장은 유용하게 쓸 수 있을 터였다.

이안의 푸른 눈동자가 스산한 빛을 뿜었다. 잘만 이용하면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부르셨습니까. 오라버니.”

비올레타가 무표정한 얼굴로 이안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안은 비올레타를 보자마자 비웃음을 흘렸다. 성녀가 되고 싶어 발악하는 같잖은 꼬락서니가 우스웠다.

그따위 예언이 뭐라고 다들 그렇게 난리란 말인가.

“앉든지.”

이안은 의자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까딱였다.

“위선자.”

비올레타가 작게 중얼거렸다.

“뭐?”

이안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나 비올레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척 자리에 가서 앉았다.

루시테가 잘 모르는 사실이 있었다.

메이븐의 완벽해 보이는 황족들은 사실 곪을 대로 곪아 있어 서로서로 다 사이가 좋지 않았다.

이안은 비올레타나 시드니아, 나머지 황비들을 모두 버러지 취급했으며 무시했다.

비올레타는 그토록 제 이복오빠의 관심을 갈구했으나, 이안은 끝끝내 비올레타에게 차가운 시선만 던질 뿐이었다.

이안은 짜증스럽다는 듯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넘겼다.

비올레타는 일순 그런 이안의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사람.

비올레타는 그를 증오하면서도 그의 애정을 갈구했다.

차갑기만 한 그녀의 이복오빠.

한 번도 따뜻한 시선으로 그녀를 봐주지 않은 그의 관심을 갈구했다.

어떻게 하면 인정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가 자신을 돌아볼까.

오랜 갈망이 증오로 변질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그녀를 차기 성녀라 추앙하는데 오로지 이안만이 그녀를 무시했으니까.

그를 증오하면서 갈망했다.

비올레타는 그것이 무슨 감정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를 향한 뒤섞인 감정이 응어리가 되어 그녀의 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에게 인정받고 싶다.’

메이븐은 과거에 핏줄 유지를 위해 남매끼리도 결혼을 했다.

진짜 성녀가 된다면 자신과 이안도 어쩌면…….

이안은 보랏빛 유전을 물려받지 못했으나 자신이 완벽하게 물려받았으니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진짜 성녀가 된다면. 그러면 자신은 황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날 때부터 성녀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니까.

이안을 바라보는 비올레타의 눈에 일순 진득한 집착이 서렸다.

이안은 강렬한 시선을 느끼고 비올레타를 향해 시선을 내렸다.

비올레타는 순식간에 제 눈동자에 담았던 진득한 감정을 지우고, 무감정한 보랏빛 눈으로 이안을 마주 보았다.

“네가 진짜 성녀라도 될 수 있을 것 같나 보지?”

웃기지도 않아.

이안은 비올레타를 향해 비웃음을 흘렸다.

그는 공적인 자리에서는 성격을 어느 정도 숨겼지만, 이렇게 사적인 자리에서는 가감 없이 할 말을 다 내뱉었다.

비올레타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무리 이안이 저렇게 군다 한들 자신이 진짜 예언의 성녀가 된다면 태도를 바꿀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올레타는 그렇게 확신했다.

“저는 진짜 성녀예요. 오라버니. 예언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성녀라고요.”

“그러시겠지.”

이안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이안은 또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금실 같은 찬란한 머리칼이 비어져 나왔다.

치켜 올라간 눈썹과 다물린 굳은 입술이 무척 싸늘해 보이면서도 아름다웠다.

그의 모든 것이 완벽했다.

“비올레타.”

비올레타는 이안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오라버니.”

비올레타가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너를 성녀로 만들어주면 어떻게 할 테냐?”

“……네?”

지금 뭐라고…….

비올레타는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뭐라고 하신 겁니까?”

“내가 널 성녀로 만들어주겠다고.”

이안이 싸늘한 눈으로 입술 끝을 올리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하. 오라버니가 절 성녀로 만들어 줄 수 있다고요?”

비올레타는 어이없다는 웃음을 내뱉으며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디 한 번 해줘 보세요. 오라버니가 해달라는 건 다 해드릴 테니까요.”

비올레타는 이안에게 도발적으로 다가서며 속삭였다.

“받아라.”

이안은 비올레타의 품으로 목걸이를 휙 던졌다.

성녀 일레일라의 눈물. 황제가 대대로 보관해 온 황실의 보물이었다.

“이건…….”

비올레타는 목걸이의 보석을 빤히 바라보았다. 영롱한 보랏빛을 발하는 물방울 모양의 보석이었다.

비올레타는 이상하게 목걸이에 빨려 들어가 버릴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녀에게 미약한 신성력이 있기에 감지했다. 목걸이에서 엄청난 신성력이 느껴진다는 것을.

예사 목걸이가 아니었다.

“그걸 네게 줄 테니. 거래하자.”

“거래?”

비올레타는 고개를 들어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의 푸른 눈동자가 어둡게 빛났다.

“내 조건은.”

이안은 비올레타를 향해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전했다. 회유가 아닌 명령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비올레타는 거부할 수 없었다.

목걸이가 탐이 났으니까. 진짜 성녀가 되고 싶었으니까. 황후가 되고 싶으니까.

비올레타는 찢어질 듯한 마음을 붙들고 마침내 이안과 거래를 했다.

이안은 비올레타를 돌려보낸 후 곧바로 시드니아도 불렀다.

“부르셨어요, 오라버니.”

보라색 눈에 주홍빛 머리칼을 가진 어린 소녀가 큰 둥근 눈을 도르륵 굴렸다.

“앉아라. 시드니아.”

시드니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안의 맞은편에 조심히 앉았다. 소녀는 연신 이안의 눈치를 봤다.

“네 어미가 아직도 너에게 성녀가 되어야 한다고 성화냐?”

시드니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각성하라며 때리기도 한다지?”

“그, 그걸 어떻게…!”

시드니아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내가 너를 그 고통에서 해방시켜줄 테니 은밀히 내 부탁을 하나 들어줘야겠다.”

이안은 사악하게 입술을 올렸다.

이안은 시드니아의 아픔을 이용해 그녀에게 명령했다.

네 언니, 폐위된 언니가 이크릭스의 황성에 있으니 설득해서 데리고 오라고.

시드니아는 유일하게 루시테와 별다른 불편한 접점이 없는 존재.

마음이 약한 그 여자는 시드니아가 조르고 설득하면 통할지도 몰랐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이해했겠지?”

“네…… 네!”

시드니아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시드니아가 그것을 무사히 해낸다면 친모와 멀리 떨어뜨려 살게 해주겠다고.

이안은 그것을 시드니아에게 약조했다.

모든 밑 작업을 끝내고 나서야 이안은 마침내 비올레타와 시드니아가 이크릭스로 떠나는 것을 허락했다.

다음 날 아침. 성대한 행렬이 이크릭스로 출발했다.

* * *

“귀한 손님이 오셨구나!”

이크릭스의 황태자 알렉산더가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여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강력한 권력을 과시라도 하듯 메이븐에서 오는 손님들을 위해 성대한 환영식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안과 마찬가지로 알렉산더 역시 국고를 낭비하면 안 될 상황이었다. 비는 메이븐에만 오지 않는 게 아니었다.

벌써 한 달이 훌쩍 넘어가도록 오지 않는 비 소식은 이크릭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누군가 하늘을 딱 닫아버리기라도 한 거처럼 온 대륙 전체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 단 한 방울도.

알렉산더는 제국민들의 원성이 들끓는데도 여유가 넘쳤다.

알렉산더는 썩어 문드러져 가는 황제의 시신을 황궁 밖 마법 냉동고에 보관했다.

국장도 치르지 않았는데 황제의 시신이 아덴티움의 밖으로 내보내진 것이다.

물론 극비인 사항이었으므로 제국민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황태자의 횡포는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내 나라에 이렇게 귀한 분들을 모시게 되어 영광이오.”

알렉산더가 양팔을 벌리며 비올레타와 시드니아를 맞이했다.

비올레타가 도도한 표정으로 마차에서 내렸다. 하나로 올려 묶은 연보랏빛 머리칼 아래로 희고 긴 목선이 도드라졌다.

“안녕하세요.”

비올레타는 우아하게 치맛자락을 살짝 잡았다 놓았다.

“역시, 듣던 대로 아름다우시군요.”

알렉산더가 비올레타와 시드니아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비올레타는 가만히 있었으나 시드니아는 놀라 비올레타의 뒤로 숨었다.

“황태자 전하. 저희가 온 이유는 알고 계시겠지요?”

비올레타가 제 바로 앞까지 다가온 알렉산더에게 칼 같이 말했다.

“그럼, 그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올해는 아덴티움에 보랏빛 머리칼을 가진 아름다운 분들이 정말 많이 방문하는군요. 아덴티움에 축복이 내리려나 봅니다.”

알렉산더가 호탕하게 웃으며 비올레타와 시드니아를 황성 안으로 이끌었다.

화려한 행렬이 줄을 이어 그들의 뒤를 따라왔다.

행렬의 선두에 있는 비올레타의 목덜미에 걸린 보랏빛 목걸이가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였다.

* * *

루시테는 대신관의 거처에서 생각보다 잘 지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루시테는 대신관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머니 에일란테에 대한 이야기.

신전과 사제들, 그리고 그동안 살아왔던 서로의 이야기.

루시테는 대신관과 깊은 정서적 교감을 나누었다.

황태자의 관심이 뜸해진 틈을 타 레일리와 비스커스에게 편지도 전달해 두었다.

서신 전달은 대신관과 함께 온 성기사 중 한 명이 도와주어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말이다. 루시테, 만약 이곳을 나가게 된다면 신전을 한번 보여주고 싶구나. 네 어머니의 다른 초상화가 대신전의 내 방에 남아 있단다.”

“좋아요! 같이 가고 싶어요.”

루시테는 기쁘게 웃으며 대신관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였다.

“성하!”

성기사 중 한 명이 급하게 대신관의 방문을 두드렸다.

“메이븐에서 두 황녀가 왔다고 합니다! 지금 황태자와 함께 이쪽으로 오는 중입니다!”

성기사의 외침에 루시테와 렘브란트는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루시테는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다 두꺼운 커튼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여기 있을게요!”

루시테는 커튼으로 제 몸을 꽁꽁 숨기고 숨을 죽였다. 다행히 앞에 큰 화분도 있어 실루엣이 덜 드러났다.

루시테가 숨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바로 황태자 일행이 나타났다.

‘메이븐이라고.’

루시테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메이븐의 두 황녀라고 하면 둘 뿐이었다. 그녀의 이복동생들인 비올레타와 시드니아.

그 애들이 이곳에 무슨 일로 온 건지. 루시테는 가슴을 졸이며 방 안으로 귀를 기울였다.

“오랜만이오. 대신관.”

알렉산더가 거만한 목소리로 대신관에게 인사했다.

그가 대신관을 찾아온 건 정말로 꽤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루시테도 더욱 안심하고 대신관의 거처에 머물 수 있었거늘.

왜 갑자기 메이븐에서 비올레타와 시드니아가 온 건지 루시테는 당황스럽기만 했다.

“그나저나. 서로서로들 아는 얼굴이겠지요? 메이븐은 신전과 사이가 돈독하니 말이오.”

“예, 그렇군요. 오랜만입니다. 1황녀, 2황녀님.”

대신관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비올레타 황녀께서 어찌나 그렇게 대신관을 만나게 해 달라고 하시는지. 제가 그래서 바로 모시고 왔답니다.”

“네. 성하, 오랜만입니다. 성하를 뵈러 메이븐에서 대표로 왔습니다.”

비올레타 특유의 무감정하고 딱딱한 말투가 들려왔다.

루시테는 흠칫 몸을 굳혔다. 틀림없는 비올레타의 목소리였다.

진짜 비올레타가 온 것이다. 이크릭스로.

“안녕하십니까. 성하.”

시드니아의 앳된 목소리도 들렸다.

루시테는 긴장으로 손에 땀이 차기 시작했다.

“그래요. 황녀님께서 무슨 일로 저를 만나러 오신 줄은 알겠습니다만, 저는 아직 이크릭스에서의 볼일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대신관이 인자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벌써 비올레타가 할 말에 대해 반대를 한 셈이었다.

“성하. 성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줄은 알았습니다.”

비올레타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러십니까?”

“네. 저는 성하께 이곳에서의 일을 빨리 정리하고 메이븐으로 와달라고 말씀드리려 한 것은 맞습니다만.”

비올레타가 말을 멈췄다.

잠깐의 정적이 방안을 감돌았다.

루시테는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싶어 커튼 자락을 살짝 잡았다. 그러나 고개를 내밀지는 않았다.

“저는 성하께서 원하지 않으신다면 돌아와 달라고 할 생각은 없습니다.”

비올레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네? 언니?”

시드니아가 당황한 목소리로 비올레타를 불렀다.

“저희는 성하를 모시러 온 게 아닌가요?”

“아무것도 모르면 가만히라도 있거라.”

비올레타는 싸늘한 목소리로 시드니아를 나무랐다. 시드니아는 창백해진 얼굴로 양손을 맞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렇다면 황녀. 무슨 일로 이크릭스로 오신 거요?”

알렉산더도 궁금하다는 듯 비올레타를 향해 물었다.

비올레타는 알렉산더를 쳐다보지도 않고 싸늘한 시선을 오로지 대신관 렘브란트를 향해 던졌다.

“성하. 내놓으시죠. 숨기고 계신 거 다 알고 왔습니다.”

루시테는 선득한 기분에 고개를 들었다. 루시테가 숨어 있던 커튼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제가 무엇을 숨기고 있다는 말입니까?”

렘브란트는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저주받은 여자를 데리고 계시잖아요? 다 듣고 왔습니다.”

“!!”

루시테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저주받은 여자라 하면 자신밖에 없는데.

대체 비올레타가 어떻게 알고 온 건지 루시테는 믿기지가 않았다.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무도 숨기고 있지 않습니다.”

렘브란트의 목소리는 여전히 태연했다.

“하. 성하. 저는 최근에 신성력을 각성했습니다. 제가 저주받은 기운 하나 느끼지 못할 것 같습니까?”

“지금 황녀님이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신성력을 각성했다니요? 황녀님께 신성력이 느껴지긴 합니다만 황녀님은 각성한 게 아니라,”

“그만!”

비올레타가 별안간 소리쳤다.

비올레타는 대신관의 시선이 자신의 목에 닿아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정확히는 목에 있는 보랏빛 목걸이.

비올레타는 대신관이 더한 것을 발설하기 전에 그의 입을 막았다.

비올레타는 커튼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하.”

비올레타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드레스 자락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일레일라의 눈물 때문인지 주변에 있는 신성력이 잘 느껴졌다.

그리고 정확히 커다란 화분이 놓인 두꺼운 커튼 뒤에서 엄청난 신성력이 느껴졌다.

그 부분만 거의 빛이 나는 듯했다.

비올레타는 처음 이 방에 들어올 때부터 두 개의 거대한 신성력을 느꼈다.

대신관과 커튼 뒤에 숨어 있는 누군가.

비올레타는 그 신성력을 느낀 순간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고귀한 출생에, 어둠에 있던 소녀가 각성하여 세상을 구한다.

모든 이야기가 저주받은 그 여자와 톱니바퀴가 맞물리듯 들어맞았다.

성녀는. 자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라버니…….’

비올레타는 이를 악물었다.

‘제가 당신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게 둘 것 같습니까?’

아마도 이안은 루시테 저 빌어먹을 폐황녀가 저주가 풀린 것만 알지 신성력까지 각성한 줄은 모를 것이다.

그 전에 끝낼 것이다.

루시테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기 전에, 이안에게 알려지기 전에 모든 것을 정리할 것이다.

이안과, 이 세상에게 인정받는 성녀는 자신이어야만 했으니까.

“황녀! 말해 보시오! 무례하기 이를 데 없군. 내가 있는 것은 안 보이는 건가?”

알렉산더가 기회는 이때다 싶어 비올레타가 고함친 것으로 화를 내고 있었다.

비올레타는 싸늘한 시선으로 알렉산더를 홱 쳐다보았다.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춘 알렉산더는 어찌나 놀랐는지 체통도 없이 딸꾹질을 했다.

“죄송하지만 황태자 전하. 저희 집안의 문제인지라 제가 흥분했습니다. 대신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에 증인이 되어주세요.”

비올레타는 말을 마치자마자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루시테가 숨어 있는 커튼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렘브란트는 비올레타의 행동에 깜짝 놀라 그녀를 잡기 위해 달려갔다.

“황녀님! 이 무슨 짓입니까?!”

비올레타의 팔을 덥석 붙잡은 그가 포커페이스를 잃고 외쳤다.

비올레타는 차가운 얼굴로 렘브란트를 비웃었다.

“성하. 당신은 저주받은 폐황녀를 숨긴 공범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제 몸에 손대지 마십시오.”

비올레타는 거친 손길로 렘브란트에게 잡힌 팔을 확 뿌리쳤다. 비올레타의 행동은 망설임이 없었다.

그녀는 렘브란트가 다시 달려들어 자신을 막기 전에 커튼을 확 걷어 젖혔다.

“!!”

루시테의 짙은 보랏빛 눈동자와 비올레타의 연보랏빛 눈동자가 정면으로 마주쳤다.

“하!”

비올레타는 얼굴을 기괴하게 일그러뜨리며 비웃음을 내뱉었다.

비올레타는 손을 뻗어 루시테의 팔을 덥석 잡았다. 그녀는 우악스럽게 루시테의 팔을 잡아 일으켰다.

“레이디 루시??”

알렉산더는 딸꾹질을 하다 놀라 딸꾹질이 들어갔다. 모두의 시선이 루시테를 향했다.

렘브란트는 낭패감이 가득한 얼굴로 루시테를 바라보았고 시드니아는 눈이 튀어나올 것 같은 얼굴로 루시테를 쳐다보았다.

“이 여자는!”

비올레타가 크게 외쳤다.

“메이븐의 황실을 기만하고 폐위를 당한 메이븐의 3황녀 루시테 클라우디오입니다!”

“뭐라? 그 저주받은 폐황녀는 모습이 어린 소녀가 아니었소?”

“맞습니다! 그 저주로 인해 이런 모습이 된 것입니다! 보세요! 신전과 성녀인 저를 기만하는 저 악독한 모습을 말입니다!”

“아니, 딱히 악독해 보이지는…….”

알렉산더가 머리를 긁적였다.

루시를 제 부인으로 만들고 싶어 안달이 나 있는 차였는데, 비올레타가 갑자기 나타나서 이상한 소리를 하니 그게 잘 받아들여지지가 않았다.

저 아름다운 여자가 어디가 악독하다는 건지.

당장이라도 보듬어주고 싶을 정도로 청초한 한 떨기의 꽃 같지 않은가.

“황태자 전하! 그게 바로 저주받은 폐황녀의 농간이라는 것을 모르십니까! 벌써 저주에 당하신 겁니까!”

비올레타가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소리쳤다.

“말이 심합니다! 비올레타 황녀!”

언제나 인자하던 렘브란트가 화를 냈다.

“저주받았다니요! 지금 루시테가 어떤 상태이신지 모르시나 본데, 루시테는 신성력을,”

“저자가!”

비올레타가 렘브란트의 말을 끊었다. 대신관이 쓸데없는 소리를 하게 둘 수는 없었다.

대신관은 그녀의 목적에 방해만 될 존재.

그렇다면 이안이 없고 신전에 적대적인 나라 이크릭스에 있는 지금, 둘 다 끝장을 내야만 했다.

“저자가! 폐황녀를 숨겼습니다! 모르시겠습니까?”

비올레타는 이제 렘브란트에게 경어도 쓰지 않았다. 그녀는 시정잡배 부르듯 렘브란트를 호칭했다.

“저 둘 모두 주신을 배신하고 타락하여 사특한 짓을 벌이려 했단 말입니다!”

“처, 천천히 얘기하시오, 비올레타 황녀. 저 둘이 무슨 사특한 짓을 했단 말이오?”

비올레타는 알렉산더의 말에 인상을 확 찌푸렸다.

하여튼 듣던 대로 무지하고 머저리 같은 놈이었다.

“제가! 성녀입니다. 황태자 전하. 제가 주신의 계시를 받았습니다. 저 둘이 대재앙을 가져올 거라는 계시를요!”

“뭐라? 대재앙?!”

알렉산더의 눈이 커졌다.

비올레타는 씩 입술을 올렸다. 이제 좀 알렉산더와 말이 통할 것 같았다.

“그럼, 전하. 제가 성녀라는 증거를 보여드리죠.”

비올레타는 알렉산더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가 허리춤에 찬 검을 확 뽑아 들었다.

챙!

잘 벼려진 맑은 검이 검집에서 뽑히는 소리가 났다.

대기하고 있던 알렉산더의 기사들이 긴장하며 검 손잡이에 손을 가져갔다.

“씁.”

알렉산더가 손을 들었다.

“가만히 있어라. 지금 비올레타 황녀가 자신이 성녀라는 증거를 보여주겠다고 하지 않는가.”

기사들이 알렉산더의 말을 듣고 검에서 손을 뗐다. 모두의 시선이 비올레타를 향했다.

비올레타는 손속에 거침이 없었다. 그녀는 알렉산더의 검날에 제 손을 가져가더니 손바닥을 확 그었다.

지이익.

새빨간 핏물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졌다.

“보십시오. 이게 제가 성녀라는 증거입니다.”

비올레타는 깊이 베인 손바닥을 뒤집었다.

비올레타는 눈을 감고 무어라 중얼거렸다.

일레일라의 눈물을 사용하려면 시동어가 필요했고, 비올레타는 그 시동어를 이미 알고 있었다.

비올레타가 시동어를 작은 목소리로 중얼대는 그 모습은 마치 경건하게 기도를 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비올레타가 중얼거림을 멈추자 그녀의 손바닥 위로 흰빛이 반짝였다.

빛이 사라졌을 때 비올레타의 손바닥 위의 상처도 흔적 하나 없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이럴수가! 정말 성녀란 말인가!”

알렉산더는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신성력으로 치유하는 광경을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이크릭스의 황태자로 태어나 신전과 어떤 접촉을 한 적이 이번 말고 없었기 때문이었다.

알렉산더는 경악한 얼굴로 제 앞에 서 있는 연보랏빛 머리칼의 여자를 다시 보았다.

백오십 년이 넘도록 나타나지 않은 성녀가 바로 눈앞의 황녀라니.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비올레타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물었다.

“그, 그렇소. 그렇지만 저 레이디는 우리 제국의 대마법사의 수양딸이오. 어떻게 저 여자가 저주받은 황녀라는 거요?”

“그 증거 또한 보여드리죠. 폐황녀 루시테 클라우디오에게는 감출 수 없는 흉터가 있습니다. 패악질을 하다 제 스스로 낸 상처죠.”

비올레타는 긴장으로 얼어 있는 루시테를 향해 거침없이 다가갔다.

그리고는 루시테를 잡아당겼다.

“이거 놔, 비올레타!”

그녀는 비올레타의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어찌나 센 힘으로 붙잡고 있는지 뿌리칠 수가 없었다.

“이 무슨 짓이란 말입니까! 비올레타 황녀!”

렘브란트가 루시테를 구하기 위해 비올레타에게로 다가오려 했다.

“황태자 전하! 도와주십시오! 저 사특한 자가 감히 성녀인 제게 접근하려 합니다!”

비올레타가 비명처럼 고함을 쳤다.

“뭐 하느냐! 어서 도와라!”

눈앞에서 이적을 본 알렉산더는 곧바로 비올레타의 얘기를 들어주었다.

챙!

챙!

사방에서 검이 뽑히는 소리가 났다. 알렉산더의 호위 기사들은 바로 렘브란트를 저지했다.

“가만히 계십시오. 성하.”

그들은 거칠게 렘브란트의 팔을 잡고 그를 바닥에 꿇려 앉힌 후, 목에 칼을 대고 그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크윽.”

렘브란트가 얼굴을 와락 구기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주신의 유일한 대리인으로서 태어나서 이런 굴욕을 당한 일은 처음이었다.

그러나 렘브란트는 자신의 굴욕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루시테를 향해 있었다. 자신의 소중한 조카. 그 아이가 너무나 걱정되었다.

메이븐의 성기사 몇이 방의 입구에서 상황을 보고 있었으나 그들은 감히 대신관을 도울 생각은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신전이 아닌 황성에 소속된 자들. 대신관의 말보다 2황녀 비올레타의 말이 먼저였다.

게다가 그들의 황녀가 자신이 각성한 성녀이며, 대신관이 사특한 자라 주장하지 않는가.

성기사들은 비올레타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훗.”

비올레타는 주위를 둘러보며 비웃음을 내뱉었다.

모든 게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세상천지 머저리뿐인 듯했다.

“비, 비올레타, 놔줘.”

루시테가 비올레타의 우악스러운 손아귀 아래서 신음했다.

비올레타는 루시테의 목소리는 들은척도 하지 않고 알렉산더를 불렀다.

“보세요, 황태자 전하.”

비올레타는 다른 쪽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내던지고, 그 손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우악스럽게 헤집었다.

긴 보랏빛 머리칼이 들어 올려지자 새하얀 목덜미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 목덜미에는 흉측한 흉터가 있었다.

황후의 시녀들에게 머리카락을 잘리던 날 가위에 다쳤지만, 제대로 치료받지도 못해 남게 된 흉터였다.

“보세요! 이 흉터가 바로 그 증거입니다! 이런 흉터를 갖고 있는 사람이 흔하겠습니까? 메이븐의 황녀의 이름을 걸고 이 사람이 메이븐의 저주받은 폐황녀라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정말 흉터가 있군. 황녀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인정할 수밖에…….”

알렉산더는 흉터를 보고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어떻게 비스커스의 수양딸이 된 거지? 그 마법사를 이용한 건가?”

알렉산더의 의문 섞인 혼잣말에 비올레타가 곧바로 대답했다.

“이용했을 겁니다. 아주 사특한 여자예요. 저주가 옮기 전에 가둬야 합니다. 대재앙을 일으킨 마녀라고요!”

“저주가 옮는다고?”

“그래요! 대신관을 보세요! 벌써 세뇌당해 이리도 감싸려 들지 않습니까!”

“그도 그렇군.”

알렉산더는 완전히 비올레타의 이야기에 말려들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맞장구를 쳤다.

“여봐라! 당장 대신관과 폐황녀를 잡아 지하 감옥에 처넣어라!”

“예!”

알렉산더의 기사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루시테와 대신관을 제압해 끌고 나갔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루시테는 아연한 얼굴을 했다. 전생의 일이 재현되는 것만 같았다.

결국 자신이 저주를 풀면 이런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걸까?

언제나 자신의 끝은 이렇게 되는 걸까?

아무리 도망쳐도, 도망쳐도 벗어날 수가 없는 걸까?

루시테는 머리가 멍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메이븐에서 멀리멀리 도망쳤다고 생각했는데 저주를 풀었더니 비올레타가 나타났다.

장소만 다를 뿐 지난 생애와 너무나 똑같은 상황이 아닌가.

비올레타는 자신이 진짜 성녀라 주장하고, 루시테를 마녀로 몰아세운다.

대재앙이 루시테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저 저주받은 황녀 때문에 이 모든 불행이 일어난 것이라고.

그렇게 루시테를 사형대로 내몬다.

사형 틀에 목이 걸리고 모든 사람이 그녀를 향해 돌을 던지고 손가락질을 하고. 저주를 퍼붓는다.

사람들이 그녀를 향해 욕설을 내뱉은 소리가 루시테의 귀에 환청처럼 들려왔다.

“루시테, 루시테!”

함께 끌려가던 렘브란트가 루시테의 이름을 외쳤지만 루시테는 충격에 빠져 듣지 못했다.

모두 해소했다고 여겼던 마음속 저 깊은 상처와 고통이 고개를 들었다.

결국 루시테는 정신적인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끌려가는 중에 혼절했다.

고개가 푹 꺾이고 몸에 힘을 잃은 그녀를, 기사들이 질질 끌고 갔다.

쾅!

루시테를 감방 안에 던져 넣고 기사들은 거칠게 철창의 문을 닫았다.

두 번째로 황성에 왔을 때 꽃가게 에이프릴 식구들과 함께 갇혔던 그 감옥에 다시 갇힌 것이다.

루시테와 렘브란트는 각각 다른 칸에 갇혔다. 렘브란트는 괴로운 표정을 하고 벽에 등을 대어 앉았다.

주신께서 어떻게 상황을 이렇게 이끌어 가시는지.

렘브란트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그는 정신을 잃은 루시테가 몹시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옆 칸에 갇혔기에 루시테의 상태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렘브란트는 괴로운 표정으로 얼굴을 싸맸다. 비올레타 황녀가 왜 갑자기 그런 짓을 한 건지, 어떻게 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 * *

알렉산더는 일단은 대신관과 폐황녀를 지하 감옥에 처넣은 것을 비밀에 부치기로 했다.

지금 상황을 이해하고 그들을 어떻게 할지 명확히 처우를 정하기 전까지는 그래야만 했다.

사안이 중대했다.

폐황녀는 그렇다 쳐도, 대신관을 가뒀다는 것은 이 대륙 전체 헤카레트 신도들과 척을 지는 일이었다.

만약 명확한 이유 없이 대신관을 처벌했다간 그 모든 죄를 알렉산더가 뒤집어쓰게 될지도 모른다.

알렉산더는 그 정도 생각을 할 머리는 있었다.

알렉산더는 곧바로 제 측근들을 모아 놓고 회의를 열었다.

“어떻게 하는 게 좋겠소?”

“어쩌면 이 상황이 전하께 이득일지도 모릅니다.”

카렌도 후작이 턱수염을 매만졌다.

“뭐가 이득이란 말이오?”

“비올레타 황녀를 앞세워 대신관을 저주받은 자로 몰면 전하께서 더 이상 대신관의 말을 들을 필요가 없게 되는 것 아닙니까. 대신관은 자격을 상실했으니, 전하는 독자적으로 황위 계승을 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그렇군! 후작의 말이 맞소!”

황태자는 무릎을 탁 쳤다.

“후작님의 말이 맞지만 저는 마음에 걸립니다, 전하.”

황태자의 보좌관 샤히드 백작이 뱀눈을 굴렸다.

“무엇이 마음에 걸린단 말이오?”

“아무래도 너무 비올레타 황녀의 말대로 해준 것이 찝찝합니다. 황녀가 정말 성녀가 아니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러면 저희만 비올레타 황녀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꼴이 아닙니까.”

“그럴 리가 없네!”

알렉산더는 호탕하게 외치며 손을 휘휘 저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샤히드 백작이 걱정스런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가 직접 보았네! 비올레타 황녀는 확실한 성녀였어! 그 여자의 신성력을 본다면 세상천지 헤카레트의 끄나풀들도 다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걸세.”

“그러십니까…… 아무래도 조금 더 시일을 두고 검증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샤히드 백작은 아무래도 찝찝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어서 황제 위를 이어받을 생각에 혹한 알렉산더의 귀에는 샤히드 백작의 목소리가 들어오지 않았다.

“백오십 년 만에 나온 성녀다! 그 여자를 그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거야!”

알렉산더가 호탕하게 외쳤다.

“그 여자가 그러더군. 신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신 헤카레트가 폐황녀와 대신관은 대재앙을 몰고 올 거라고 했다고도. 성녀가 한 예언이니 틀림없을 것이오!”

“그러십니까…….”

샤히드 백작은 끝끝내 찝찝한 얼굴을 했지만, 회의는 결국 카렌도 후작이 낸 방향으로 흘러갔다.

알렉산더는 열흘 뒤 대신관과 저주받은 폐황녀를 공개 처형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황권을 공고히 하고, 자신은 대재앙을 물리친 황제가 되어 완전한 이크릭스의 황제로 등극한다.

그것이 알렉산더의 큰 그림이었다.

모든 것이 알렉산더의 앞에 예비되어 있었다.

이제 대신관만 없어진다면 그의 앞에 놓인 길은 탄탄대로일 것이 분명했다.

알렉산더는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크고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일이 그의 뜻대로 아주 잘 풀리고 있었다.

* * *

“으음…….”

루시테는 몸을 뒤척였다. 지하 감옥의 돌바닥에서 찬 기운이 올라왔다.

루시테는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루시테는 눈을 깜박이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저 높이 작게 나 있는 작은 창으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희미한 빛이 눅눅하고 더러운 지하 감옥 안을 비추었다.

“?”

루시테는 눈을 비볐다.

맞은편 감옥이 빈방이 아니었다. 누군가 그 안에 대자로 누워있었다.

그의 모습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손과 다리에 걸려있는 커다란 수갑과 족쇄였다.

진한 묵빛의 수갑과 족쇄에는 작은 붉은 글씨가 가득 새겨져 있었다.

비록 그는 누워 있었지만 루시테는 어쩐지 그가 눈에 익었다.

루시테는 시선을 올려 그의 얼굴을 보았다.

고개를 돌리고 있어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머리칼의 색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

붉은 머리.

희미한 빛 속에서도 붉은 머리칼은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설마.’

설마 그일까?

“세드릭…….”

“루시테. 일어난 게니?”

옆 철창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루시테를 불렀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루시테는 목소리의 주인이 렘브란트라는 것을 알았다.

루시테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어떻게, 어떻게 저분이 이곳에…….’

루시테는 잡혀 온 것이 자신 혼자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냈다.

비올레타에 의해 자신을 감싸던 대신관 렘브란트까지도 함께 저주받았다는 죄를 덮어쓰게 된 것이다.

“루시테?”

렘브란트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다시금 루시테를 찾았다.

루시테는 목이 메여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루시테는 양 손바닥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감쌌다.

렘브란트는. 가장 고귀한 위치에 있는 그녀의 삼촌이자 대신관 렘브란트는 이런 곳에 올 사람이 아니다.

그 누구보다도 저주와 거리가 멀고 성스러운 사람이었다. 그런데 자신과 엮였다는 이유로 이런 꼴을 당하다니.

루시테는 고통스러움이 이루말 할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게 그녀의 죄인 것만 같았다. 그녀가 저주받아 태어난 죄.

대신관을 끌어들이게 될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황성 따위 들어오는 게 아니었다.

루시테가 괴로워하고 있는데 감옥 문이 열렸다.

철컹.

묵직한 철문이 열렸다가 쿵 닫히는 소리가 났다.

사박거리는 작은 발걸음 소리가 루시테가 갇혀 있는 철창 앞에서 멈췄다. 루시테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구불거리는 연보랏빛 머리카락. 무심해 보이는 낯빛. 차가운 시선.

그녀의 이복동생 비올레타 클라우디오였다. 비올레타가 그녀를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무감정한 딱딱한 음성이 비올레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비올레타.”

루시테는 비올레타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수많은 말들이 입안에 맴돌았다 스러졌다.

‘왜…….’

왜 나에게 이러는데?

왜 또 나를 죽이려고 해?

내가 너에게 무얼 잘못했다고?

비올레타를 바라보는 루시테의 보랏빛 눈동자가 처연했다. 그 안에 많은 감정이 휘몰아쳤다.

비올레타는 루시테의 이복동생이다.

그러나 루시테는 비올레타가 자신을 언니라고 부르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살갑게 대하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저 비올레타가 자신을 내버려 뒀으면. 이안이고 비올레타고 평생 자신을 잊고 신경 쓰지 않아 줬으면.

루시테는 그저 그것을 바랐다.

그런데 어찌 이럴 수가 있을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 내가 나쁜 사람 같잖아?”

한참 말이 없던 비올레타가 싸늘한 말을 던졌다.

“나쁜 사람은 넌데.”

말을 덧붙이는 비올레타의 무감정했던 연보랏빛 눈동자에 악독한 기운이 담겼다.

“내가…… 뭐가 나쁜데?”

루시테의 목소리가 떨렸다. 메마른 입안이 밭고랑처럼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루시테는 정말 궁금했다. 알고 싶었다.

저번 생의 비올레타는, 그래. 진짜 성녀가 되고 싶었다 치자. 그래서 자신이 방해가 되었다?

이해는 안 되지만 그래도 억지로 이해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생의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비올레타에게 피해 끼칠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비올레타가 원한다면 평생 비올레타의 눈에 띄지 않게 살 자신이 있었다.

신성력을 쓰지 말고 살라고 한다면 그것도 자신이 있었다.

“말해줘…… 비올레타. 내가 대체 너에게…… 뭘 잘못했어?”

비올레타의 시선은 루시테의 절절한 목소리에도 싸늘하기만 했다.

비올레타는 또 루시테를 향해 비웃음을 던졌다.

“그거 알아?”

“?”

루시테의 눈동자에 의문이 담겼다.

“너는 그런 곳이 어울려. 차가운 돌바닥. 남루한 차림새. 버러지 같은 것들. 그곳에서 나를 원망하고 원망해. 그러다 죽어버려. 그게 네 위치야.”

루시테는 입술을 달싹였다.

비올레타의 비수 같은 말들을 들어 온 게 한두 해가 아니다.

이제 저런 말들은 비올레타가 루시테에게 하는 인사나 다름없었다.

“호기롭게 메이헨을 떠났으면 계속 조용히 살지 왜 나타나서는…….”

비올레타는 계속해서 루시테를 향해 날카로운 말들을 읊조렸다.

바늘처럼 날카로운 말로 루시테를 찌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비올레타는 루시테가 상처를 받을 법한 말을 골라서 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오히려 루시테를 정신 차리게 했다.

루시테는 천천히 눈을 몇 번 깜박이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침을 모아 마른 입안을 축였다.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

괴롭고 엉망진창이 되었던 머리가 맑아진 느낌이었다.

홀로서기를 하고 사랑하는 가족, 친구도 생기고 많은 성장을 한 루시테는 이전의 루시테가 아니었다.

지난 생애의 그녀와 같지 않았다.

조금씩 떨리던 루시테의 몸의 떨림이 가라앉았다.

“비올레타. 그런 얘기 말고 진짜 네 얘기를 해. 네가 나에게 이러는 목적.”

루시테는 더 이상 목소리를 떨지 않고 명확하게 비올레타에게 하고자 하는 말을 했다.

“뭐?”

“후우…….”

루시테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철창 앞 비올레타가 서 있는 곳 바로 앞까지 다가갔다.

그래. 또 죽으면 어쩌겠는가? 이미 세 번 죽었던 몸. 될 대로 대라지.

루시테의 움츠러들었던 마음이 점점 커졌다.

비올레타와 동등하게 대화를 할 수 있을 만큼. 어쩌면 비올레타와 더 어른스러운 사람으로.

“네가 그렇게 나를 바라보면 뭔가 달라질 것 같아?”

비올레타는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제 앞에 마주 선 루시테를 쏘아보았다. 비올레타의 눈빛에 경멸이 진득하게 묻어났다.

루시테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비올레타를 내려다봤다.

더 이상 저주받은 루시테가 아닌, 저주가 풀려 성장한 루시테의 키가 비올레타보다 조금 더 컸다.

“나는 네가 나한테 왜 이러는지 이유를 들어야겠는데. 비올레타. 내가 마녀가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너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니?”

“뭐?”

비올레타의 눈썹이 사납게 치켜 올라갔다. 비올레타는 어이없다는 듯 윗입술을 일그러뜨렸다.

“누가 네게 말대꾸해도 좋다고 허락했지? 감히.”

비올레타의 차가운 말 속에는 일말의 틈도 없었다.

비올레타는 매번 이런 식이었다.

자신은 그렇게 못된 말들을 쏟아내면서 루시테가 하는 말은 견딜 수 없어 한다.

루시테는 비올레타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쯤 되니 비올레타가 자신에게 이렇게 구는 이유가 진짜 성녀가 되기 위해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면 가만히 있는 자신을 여기까지 쫓아와 죽자고 달려들 리가 없지 않을까.

‘그게 뭘까.’

비올레타의 진짜 이유.

“네가 날 죽인다고 해서 진짜 성녀가 될 수는 없을 거야.”

루시테는 비올레타를 도발했다.

“네가 날 죽여도 없는 성력이 생기지는 않을 테니까.”

“버러지 같은 것이, 감히.”

비올레타의 연보랏빛 눈동자에 불길이 치솟았다.

“열어라.”

비올레타의 명령에 옆에 조용히 서 있던 기사가 열쇠를 꺼내 감옥 문을 열었다.

비올레타가 감옥 안으로 성큼 걸어들어왔다.

그녀는 루시테 앞에 서서 루시테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별안간 손을 들어 루시테의 뺨을 내리쳤다.

철썩!

손바닥과 뺨이 마찰하는 커다란 소리가 감옥 안을 울렸다.

루시테는 몸을 크게 휘청거렸다.

눈앞에 별이 반짝였고 볼이 불이 붙은 것처럼 얼얼했다.

“비올레타!”

그녀는 비올레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스릉.

비올레타의 옆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검을 뽑아 들어 루시테를 겨눴다.

날카로운 칼끝이 위협적이었다. 루시테의 목을 금방이라도 파고들 것만 같았다.

“그냥 여기서 죽을 테냐? 너 같은 마녀를 처벌하는 데 아무도 죄를 묻지 않을 텐데.”

비올라테가 섬뜩한 눈을 하고 루시테를 노려보며 낮게 읊조렸다.

“비올레타 황녀!”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대신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비올레타의 이름을 외쳤다.

“왜 그러시죠? 대신관.”

비올레타는 무감정한 딱딱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비올레타 황녀, 정말 이러실 겁니까! 당신이 한 행동은 옳지 않습니다! 지금이라도 모든 걸 되돌려 놓으세요!”

렘브란트는 어떻게든 비올레타를 설득해 보려 했다.

그러나 비올레타는 차가운 비웃음을 내뱉었다.

“이러지 않으면요? 저더러 어쩌란 말씀이십니까? 제가 어떻게 감히 저주받은 대신관과 폐황녀를 살리겠습니까. 신께서 저주를 거둬 가면 모르겠습니다만.”

비올레타는 태연하게 대신관과 루시테를 모함했다.

-4권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