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비올레타 황녀! 그대는 정녕 주신이 선택한 대리인들을 죽이실 생각이신 겝니까! 주신께서 내리실 벌이 두렵지도 않으신단 말입니까?”
렘브란트는 철창을 붙든 채, 가려져서 보이지 않는 비올레타를 향해 외쳤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비올레타의 마음을 돌려 그의 조카 루시테만은 구하기 위하여,
“주신께서 내리실 벌이라. 제가 왜 그런 걸 두려워해야 합니까? 저주로 얼룩진 자들을 마땅히 벌하려고 하니 오히려 상을 내리시겠지요.”
비올레타는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하고, 대신관이 무어라 더 말을 걸기 전에 뒤로 돌아 감옥을 나왔다.
비올레타의 뒤에서 루시테가 있는 감옥이 다시 잠겼다.
“비올레타 황녀! 정녕 무고한 이들을 죽인 책임이 피해갈 거라 생각하는 겁니까!”
“저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비올레타는 대신관의 말에 대꾸하고 빠른 걸음으로 지하 감옥을 빠져나와, 그대로 잠시도 쉬지 않고 거처로 돌아왔다.
꽉 쥔 주먹이 하얗게 질려 파르르 떨렸다.
“주신…… 주신의 벌. 내가 그런 걸 두려워할 것 같아?”
비올레타는 연보랏빛 눈에 힘을 주고 눈을 부릅떴다.
진짜 성녀가 될 수만 있다면.
진짜 성녀가 되어 모두의 추앙을 받고, 그리고 이안에게 인정받을 수만 있다면.
그걸 위해서라면 비올레타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그녀의 목적 앞에서는 주신이건, 대신관이건, 루시테건 다 아무것도 아니었다.
모두 다 걸림돌일 뿐이었다.
「비올레타. 대신관은 안 되더라도 가서 루시테만 데리고 와. 그러면 너를 성녀로 세워 주지.」
이안이 했던 말이 비올레타의 머리를 맴돌았다.
비올레타의 몸이 덜덜 떨리고 꽉 쥔 주먹 안 살갗으로 손톱이 파고들었다.
손바닥이 찢겨 붉은 피가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이안은 모를 것이다. 비올레타가 어떤 심정으로 그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뭐? 루시테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도와주면 성녀든 뭐든 시켜주겠다고?
빠드득.
비올레타는 이를 악물었다.
절대 이안이 원하는 대로 되게 두지 않을 것이다.
루시테를 처리하고 당당하게 성녀가 되어 돌아가리라.
다시는 그가 자신을 무시하지 못하게 하리라.
그가, 이안이 자신을 똑바로 보게 만들고야 말리라.
비올레타의 연보랏빛 눈이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
* * *
“뭐라고?!”
이안은 의자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그의 눈이 부릅뜨였다.
그가 심어 놓은 첩자가 수정구를 통해 몰래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네가 한 말이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사실이란 말이냐?”
“네. 전하. 비올레타 황녀의 사병 때문에 방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나온 후에 이크릭스의 근위대가 성하와 3황녀님을 끌고 가 사자궁의 지하 감옥에 가뒀습니다.”
그 외에도 첩자는 이크릭스 황성의 동향을 보고했다.
비올레타 황녀를 진짜 성녀로 추대하려는 움직임과 대신관과 3황녀를 대재앙의 근원으로 내몰아 처형하려는 움직임.
그런 이야기들이 고스란히 이안에게로 전해졌다.
“알렉산더! 그 머저리 같은 놈이 감히!”
이안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떨었다. 그의 잔뜩 힘이 들어간 팔에 핏줄이 불거졌다.
“같잖은 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이안이 이를 악물고 인상을 썼다.
아무래도 비올레타만 믿고 맡겨 두기에는 불안해 실력 있는 첩자를 따로 붙인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잘못했다간 루시테가 처형되고 나서야 그 소식을 전해 들었을지도 모른다.
‘알렉산더 황태자.’
그 머저리가 혼자 벌인 일일 리가 없다. 분명히 주변 누군가의 입김이 들어갔을 것이다.
“앤체프!”
이안이 수정구의 통신을 중단하고 그의 보좌관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앤체프 자작이 안경이 삐뚤어진 채로 헐레벌떡 달려왔다.
“당장 중앙회의를 소집하고 기사 단장들을 모조리 불러라.”
“전하, 지금 회의를 소집하기에는 늦은 시간입니다. 혹시 무슨 일이신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앤체프 자작은 시간을 확인하곤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크릭스에서 대신관과 3황녀 루시테 클라우디오를 공개 처형하겠다더군.”
“그런!! 대신관 성하를 말씀이십니까?!”
앤체프 자작이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입을 벌렸다.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무리 이크릭스의 황태자가 어리석은 이라 하더라도 대신관을 죽이려 들 줄은 몰랐다.
거기다 3황녀라니?
메이븐을 떠난 폐위된 3황녀가 어떻게 이크릭스의 황실과 엮여 그런 일을 당하게 된 건지 앤체프 자작은 감도 안 왔다.
앤체프 자작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이안이 싸늘한 표정으로 한 마디 한 마디 씹어뱉듯 내뱉었다.
“전쟁이지. 당장 기사단장들에게는 모든 군대를 소집하고 출정 준비를 하라 일러라. 중앙회의는 지금 당장 소집하도록.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겠다.”
“예! 전하.”
앤체프 자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달리듯 이안의 집무실을 벗어났다.
그는 전쟁을 일으킨다는 이안의 말에 안 된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했다.
유능한 보좌관인 앤체프는 평화를 추구하는 편이었지만 이 일은 전쟁 없이 넘어갈 수 있는 사안이 아니었다.
주신 헤카레트가 다스리는 이 세상에 그의 대리인인 대신관을 처형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폐황녀 루시테 클라우디오를 처형하는 것만으로도 전쟁의 사안이었지만, 대신관은 더더욱 넘어갈 수 없었다.
아마 그 어떤 귀족들도 반박하지 못할 것이다. 이안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서.
전쟁.
아니 보통 전쟁이 아니다. 신의 대리인을 구하기 위한 성전이었다.
“말도 안 돼.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앤체프 자작은 눈을 꽉 감았다 떴다.
아슬아슬하게 유지되고 있던 오랜 평화가 종식되었다.
두 달이 넘도록 비가 오지 않고, 이제는 전쟁이 일어난다.
온 대륙에 전운과 재앙의 기운이 감도는 것만 같았다.
예언 속의 진짜 대재앙.
기근과 가뭄 질병, 그리고 피로 물든 대재앙이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 * *
“이놈아, 준비는 다 되어 가느냐?”
“네. 스승님.”
더벅머리 가발을 쓴 레일리가 비스커스의 물음에 머리를 벅벅 긁었다.
“조금만 더 만들면 됩니다. 계량한 양까지 얼마 안 남았습니다.”
비스커스는 방안을 가득 채운 폭발물들을 잠시 바라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비스커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도 대마법사인지라, 자신의 제자가 저것을 만들어 어디다 쓸지는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 레일리이기 이전에 2황자 카일러스인 제자 녀석의 오랜 숙원.
신룡 나브레의 유산 안티매직을, 제자 녀석은 날려버리려 하는 것이었다.
“그게 통할 것 같으냐?”
비스커스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 제자가 하는 일은 무모했다.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누구도 안티매직의 권능 앞에 저항할 수 없었다.
아무리 폭발 물질을 때려 부어 봤자 건물만 폭발하지, 신룡의 유산은 멀쩡할 터였다.
눈에 뻔히 보이는 싸움이었다.
“하는 데까지 해 봐야지요.”
레일리가 씁쓸하게 대꾸했다.
“그보다 요즘 황태자의 동향이 이상하구나. 문지방이 닳도록 루시를 달라고 드나들더니 발길이 뚝 끊겼단 말이야.”
“포기했나 봅니다.”
“아니다. 그보다는 이상해. 엊그제 사자궁이 소란스러웠다던데 알아내려 해도 알 수가 없구나. 황태자가 함구령이라도 내린 건지.”
비스커스는 황성 안에서 마법을 쓸 수 있었다면 도청이라도 했을 거라고 중얼거렸다.
문득 부지런히 움직이던 레일리의 손이 뚝 멈췄다.
“대신관이 갇혀 있는 곳이 사자궁 옆이 아닙니까? 그곳에 루시도 있고요. 설마 알렉산더가 무슨 짓을 한 건 아니겠지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대신관을 건드리겠느냐. 그놈도 머리가 있을 텐데.”
비스커스가 말도 안된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이상합니다. 1황녀와 2황녀가 메이븐에서 오지 않았습니까.”
“황녀들이 왔으니 더더욱 건드리지 못하겠지. 무슨 걱정이냐. 내가 알아볼 테니 걱정 말고 어서 하던 일이나 마저 하거라.”
레일리는 말없이 손으로 다시 비커를 집었다.
그러나 그의 은빛 눈동자만은 생각에 잠겨 심각한 빛을 띠었다.
아무래도 루시테가 그와 함께 있지 않는 이상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와 연락할 방법을 찾아봐야 할 듯싶었다.
“걱정 말래도! 내가 한 번 알아보마.”
비스커스가 그렇게 말했음에도 레일리의 심각한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안전할 거라고만 생각했던 루시테가 지금은 몹시 걱정되기 시작했다. 무언가 불안했다.
비스커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레일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레일리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곤 연구실을 나오려 했다.
그런 그의 앞을 갑자기 무기를 든 병사들이 가로막았다.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병사들이 창날을 비스커스에게로 들이밀었다.
“이, 이게 무슨 짓들이냐!”
비스커스가 놀라 외쳤다.
소란스러운 소리를 들은 레일리가 연구실 밖으로 나왔다.
“스승님! 무슨 일이십니까!”
레일리가 사나운 눈으로 병사들을 바라보았다. 병사들은 레일리를 보더니 서로 눈짓을 했다.
“대장님! 한 명이 더 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같이 끌고 가라. 어차피 한통속이다.”
“예!”
병사들은 곧바로 레일리에게까지 창을 들이밀었다.
“왜 이러는 게냐! 나는 대마법사 비스커스다!”
비스커스가 끌려가지 않으려 몸을 비틀며 외쳤다.
“당신들은 저주받은 폐황녀를 끌어들여 나라를 망하게 하려 한 죄로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오!”
병사들의 대장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끌고 가라!”
“예!”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레일리와 비스커스를 포박했다.
레일리와 비스커스는 더 거부할 수도 없이 놀란 눈으로 눈을 마주쳤다.
‘저주받은 폐황녀를 끌어들여?’
비스커스는 모르는 이야기라 하더라도, 레일리는 그 저주받은 황녀가 누구의 이야기인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루시테!
그녀의 정체가 알렉산더에게 들킨 것이다.
“저, 저게 무슨 소리냐?”
비스커스가 레일리를 향해 물었다.
저주받은 폐황녀라니 말도 안되는 소리였으나, 순간적으로 어두워진 그의 제자의 얼굴을 보니 무언가 짚이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순간 비스커스의 머릿속으로 지나치게 아름답던 그의 수양딸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라고, 그런 사람과 관련 없다고 비스커스는 외치고 싶었으나 입 밖으로 말이 안 나왔다.
루시. 자신의 수양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비스커스와 레일리는 안티매직의 권역 안에서 아무런 반항도 해보지 못하고 속절없이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 * *
“루시테. 걱정 말거라.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보마. 신전에서 이대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게다.”
대신관은 비올레타가 왔다 간 후 실의에 빠진 루시테를 다독였다.
비록 손을 잡고 어깨를 어루만져 줄 수는 없었지만 대신관은 창살에 몸을 붙인 채 루시테의 기운을 북돋워 주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 어떤 말도 루시테에게 위로가 되지는 못했다.
오히려 대신관의 목소리가 들리면 들릴수록 루시테의 마음속에서 죄책감이 피어날 뿐이었다.
자신 때문에 대신관까지 끌어들이게 되었다는 죄책감.
비올레타를 설득해 이 위기를 헤쳐 나가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남은 건 퉁퉁 부은 오른쪽 뺨뿐이었다.
“루시테. 괜찮은 게니?”
루시테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렘브란트가 불안한 목소리로 다시금 루시테를 불렀다.
그때 루시테의 맞은 편 철창 안에 대자로 누워있던 붉은 머리 남자가 몸을 일으켰다.
남자의 팔과 다리에 끼워져 있는 커다란 수갑과 족쇄가 바닥과 부딪혀 시끄러운 소리를 냈다.
“종알종알. 시끄러워서 잠을 잘 수가 없군.”
남자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루시테는 놀라 벌떡 일어나 철창 가까이 다가가 그를 쳐다보았다.
지하 감옥 안이 어두워 여전히 그의 이목구비가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녀를 마주 보고 있을 남자의 시선만이 뚜렷이 느껴졌다.
맹수 같은 푸른 눈동자가 그녀의 맞은편 감옥 안에서 그녀를 숨죽인 채 바라보고 있었다.
“저, 저기……!”
루시테는 남자를 불렀다.
세드릭인지 아닌지 확신은 가지 않았다.
목소리가 비슷한 것도 같은데, 감옥 안이 울려서 그것도 분명하지 않았다.
“저기, 그……!”
루시테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 그를 애매한 말로 부르기만 했다.
“저기, 저기. 뭐 어쩌라는 거지? 내가 네 친구라도 되는 줄 아는 건가?”
싸늘한 대답이 감옥 저편에서 돌아왔다.
루시테는 눈을 크게 떴다. 목소리와 말투가 익숙했다. 분명 세드릭. 세드릭의 말씨였다.
“세드릭!”
루시테는 철창을 콱 잡았다.
“세드릭! 여기에 갇혀 있었군요!”
루시테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세드릭은 황당하다는 눈으로 한쪽 눈썹을 휙 치켜올렸다.
그러나 그 사이 자라난 덥수룩한 머리칼과 수염 때문에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루시테는 볼 수 없었다.
“세드릭!”
“세드릭, 세드릭. 시끄러워 죽겠군. 좀 조용히 하지 그래?”
루시테는 세드릭의 사나운 말에 흠칫 굳었다. 그녀가 알던 세드릭이 아닌 것만 같았다.
“넌 누구냐?”
“에?”
세드릭의 물음에 루시테는 바보 같은 목소리를 냈다.
“넌 누군데 나를 아는 거냐?”
루시테는 입을 살짝 벌렸다. 저 사람은 세드릭이 틀림없는데. 그가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못 알아보는 걸까.
루시테는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루시테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세드릭이 자신을 알아볼 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 세드릭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함에 이리도 당황스러운 거겠지.
누구보다 저주를 풀어주겠다며 애썼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런 그가 자신의 저주 풀린 모습을 알아보지 못하다니.
루시테는 당황스러움에 눈을 깜박였다.
‘레일리는 어땠더라?’
레일리는 한 번에 그녀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지켜주었다.
레일리가 루시테를 향해 루시테라 부르는 그 음성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넌 누구냐니까?”
세드릭의 목소리가 사나워졌다.
루시테는 입술을 달싹였다.
세드릭에게 자신이 루시라고. 네가 그렇게 싸고돌던 루시 필드라고. 진실을 밝혀야 할지 말지 망설여졌다.
쾅!
세드릭이 수갑을 찬 채로 철창을 내리쳤다.
철창이 부서질 것처럼 흔들렸다.
“사람 이름을 옆집 개 부르듯이 불러놓고 모르는 척하는 건가? 무슨 경우인지 이해가 안 가는데?”
세드릭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루시테는 세드릭을 가만히 응시했다.
세드릭이 자신에게 이렇게 낯설게 대하는 건 처음이었다.
이 모습이 오히려 루시테가 알지 못했던 원래 세드릭의 모습인 것 같았다.
남녀노소 상관없이 막무가내로 행동하고, 사납게 구는 세드릭. 이크릭스 최고의 검사이자 미친개 세드릭.
이제는 황제를 죽인 희대의 범죄자가 된 그다.
루시테는 과연 자신의 정체를 세드릭에게 밝혀도 좋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저 이대로 세드릭의 기억 속에서 잊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세드릭과 루시테는 서로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아무것도.
서로 제 코가 석자인 팔자였다.
“야! 너 누구냐니까?!”
세드릭의 언성이 높아졌다.
“죄송해요.”
루시테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죄송하긴 뭘 죄송해? 어떻게 날 아냐니까?”
“제가 아는 사람인 줄로 착각했어요. 함부로 이름을 불러서 정말 죄송해요.”
루시테는 쓰게 웃었다.
“착각? 날 착각했다고?”
“네. 여기에서 그쪽이 잘 안 보여서요. 제가 아는 친구도 붉은 머리라 몰라봤어요. 죄송해요.”
루시테의 차분한 대답에 세드릭은 기가 막혀 하며 철창을 붙들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게 거슬리게 하지 마라. 시끄러우니 조용히 좀 하고.”
세드릭은 퉁명스럽게 경고하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바닥에 드러누웠다.
“네. 알았어요.”
루시테는 세드릭을 지켜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세드릭을 만나면 하고 싶었던 말이 입안에 맴돌았으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날 왜 저와 레일리를 공격했어요?’
‘왜 황제를 죽였어요?’
루시테는 입술을 달싹였으나 입 밖으로 그 물음들을 꺼내지는 않았다.
물어봐 봤자, 어떤 답을 얻어봤자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를 위해서도, 루시테 자신을 위해서도.
루시테는 씁쓸하게 눈을 내리깔고 바닥에 주저앉아 벽에 등을 기댔다.
차디찬 돌벽의 찬기가 피부로 스며들었다.
‘하아…….’
루시테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신성 대제국 메이븐은 강력한 황권 아래 일사불란하게 군대를 움직였다.
비록 황제는 지금 공석이었으나, 곧 그 자리를 이어받을 황태자 이안이 선두에 서서 제국군을 통솔했다.
이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진격했다. 마법사를 끌어들여 포탈을 통해 군대를 이동시켰다.
군 사령부는 수도 메이헨에서 출발한 지 채 얼마 되지도 않아 국경에 도착했다.
국경 지방의 영주들은 황태자의 지시에 따라 각자 군대를 이끌고 나타났다.
대규모의 군대가 국경지대에 모이게 된 건 이안이 전쟁을 선포한 지 채 며칠이 다 가기도 전에 일어난 일이었다.
“진격하라!”
이안은 검을 빼 들고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이안은 세상에 드러내지 않았던 마스터의 검기를 가감 없이 드러냈다. 푸른 검기가 하늘을 찌를 듯 솟아올랐다.
메이븐의 성기사들은 이안의 뒤를 따라 보랏빛 망토를 휘날리며 말을 몰았다.
잘 벼려진 메이븐의 칼날이 위태롭게 흔들리는 이크릭스를 향했다.
와아아아아아!
커다란 함성이 대지를 메웠다.
승리가 그들 앞에 있었다.
* * *
“출정! 출정을 준비하라!”
알렉산더는 정신없이 군대를 소집했다.
대신관을 처형하면 결국 메이븐의 황태자와 부딪히게 될 줄은 알았지만, 이토록 빨리 메이븐 쪽에서 반응을 해올 줄은 몰랐다.
그간 달콤한 권력의 맛에 사로잡혀 기강을 다스릴 생각을 하지 않았던 이크릭스의 군대는 오합지졸이었다.
특히 황실 기사단을 하나로 모았던 구심점인 화이트 울프.
그 화이트 울프의 선두에 선 세드릭 디에고가 없으니 기사들은 우왕좌왕했다.
세드릭 디에고는 성격은 더러웠어도 기사단을 통솔하는 데는 매우 적합한 인물이었다.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기사들을 휘어잡았고 체계적인 훈련을 시켜왔다.
그러나 그 세드릭 디에고가 지금은 차가운 지하 감옥에 있었다.
알렉산더가 화이트 울프의 부기사단장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통솔하려 해봤지만, 그의 그릇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알렉산더는 뒤늦게 기사들을 출정시켜왔지만 연이어 들려오는 소식은 참혹한 패배뿐이었다.
황태자 이안 헤레이스 델렌스카이 클라우디오는 숨겨진 실력자였다.
세드릭 디에고를 능가하는 소드 마스터라는 소문이 물밀듯 퍼져나가 이크릭스의 사기를 더 떨어뜨렸다.
이안은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고 그들의 앞을 막아서는 자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며 진격해왔다.
많은 영지와 지방 귀족들이 메이븐의 앞에 무릎을 꿇고 항복의 깃발을 올렸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들이 수도로 가까이 오면 올수록 알렉산더는 정신이 나가버릴 지경이었다.
덕분에 대신관과 루시테의 처형식을 집행할 생각은 하지도 못하고, 전쟁을 신경 쓰기에 바빴다.
“비올레타 황녀! 그대를 내세우면 될 거라 하지 않았소!”
알렉산더는 비올레타를 찾아가 불같이 화를 냈다.
“성녀라면서! 어떻게 좀 해야될 것 아니오! 황녀의 말대로 저주받은 황녀와 대신관을 처형하려고 했더니 더 큰 재앙이 일어나지 않았소!”
알렉산더는 분을 참지 못하고 찻잔을 집어 던졌다.
와장창!
찻잔이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이 났다.
일국의 황녀 앞에서 이런 만행이라니. 평소 같았으면 비올레타 역시 참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알렉산더만큼이나 혼란스러운 건 비올레타도 마찬가지였다.
비올레타는 이안이 전쟁까지 일으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정도로 루시테를 각별하게 생각할 줄은.
비올레타는 주먹을 꽉 쥐었다.
‘도대체 그 저주받은 여자가 뭐라고?’
이안.
이안 오라버니.
비올레타는 천사처럼 아름다운 그녀의 이복오빠를 떠올렸다.
이 일로 이안이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줄 알았다면, 비올레타는 이안을 한참 잘못 알고 있는 것이었다.
“비올레타 황녀!”
알렉산더가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비올레타는 싸늘한 시선을 알렉산더에게로 돌렸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그대는 무사하지 못해. 명심하시오!”
알렉산더는 씩씩대며 비올레타의 방에서 돌아 나가려고 했다.
비올레타는 나가려는 알렉산더를 붙들었다.
“그래서! 그래서 처형은요? 벌써 며칠이나 미루시지 않았습니까! 처형은 언제 하실 작정이십니까?”
비올레타는 애타는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처형이 문제인가! 저것들을 처형한다고 하니 메이븐의 황태자가 미쳐 돌아가는데!”
알렉산더는 버럭 화를 냈다.
“하지만 이 대재앙이 전부 저주받은 폐황녀와 대신관 때문이라면요? 그러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이 모든 재앙이 폐황녀를 처형하면 해결된다면요!”
비올레타는 간절한 목소리로 알렉산더를 꼬드겼다.
알렉산더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는 제 옷소매를 붙들고 있는 비올레타를 거세게 내팽개쳤다.
“저리 비키시오! 지금 제정신이오?”
비올레타는 휘청거리며 몸을 바로 하곤 알렉산더를 노려보았다.
머저리 같았던 알렉산더가 그래도 머리는 있는 건지, 쉽게 비올레타의 꼬드김에 넘어오지 않았다.
“왜,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황태자 전하. 폐황녀와 대신관만 죽이면 모든 게 해결 된다지 않습니까! 진짜 성녀인 제가요! 제가 증명합니다!”
비올레타는 호소하며 제 가슴을 탁탁 두드렸다. 그러나 알렉산더는 넘어가지 않았다.
알렉산더는 씹어 죽여도 시원찮다는 얼굴로 비올레타를 노려보았다.
죽은 아버지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신전 것들은 다 미신만 믿는 쓰레기들이며, 가까이해서 좋을 게 하나도 없다는 전대 황제의 말이 이제야 알렉산더는 이해가 되었다.
비올레타의 말을 들은 자신이 미친놈이었다.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 나서야, 알렉산더는 이제야 그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황위를 차지하겠다는 데에 눈이 멀어 하나만 보고 주변 정세를 돌아보지 않았음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황태자 전하! 어서! 어서! 그 저주받은 것들을 처형하시,”
“닥치시오!”
알렉산더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네?”
황태자의 욕설에 당황한 비올레타가 입을 뻐끔거렸다.
“그 입 다물고 얌전히 있으시오. 내가 황녀를 죽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쾅!
알렉산더는 테이블을 거세게 걷어찼다. 테이블이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기우뚱 뒤집어졌다.
알렉산더는 그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비올레타의 처소를 빠져나왔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든지, 뭐라도 해야 했다.
민심이 처참했고 제국의 상황이 처참했다.
비는 여전히 오지 않았고, 제국에는 전쟁으로 인한 포로와 부상자가 넘쳐났다.
몇몇 지역에는 전염병이 돌기 시작한다는 보고도 수시로 올라왔다.
알렉산더는 그야말로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둘러본 제국의 실정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드득.
알렉산더는 이를 악물었다.
황성에 있는 메이븐과 관련된 것들을 모조리 끌고 출정하여 메이븐의 황태자와 협상해야 한다.
대신관이건, 저주받은 폐황녀건, 비올레타건 모조리 볼모로 삼아 끌고 가야 한다.
지금으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 * *
“왜 이래요!”
루시테는 비명을 질렀다.
갑자기 병사들이 감옥에 우르르 몰려 들어오더니 자신과 대신관을 우악스럽게 끄집어내는 것이 아닌가.
루시테와 대신관, 그리고 세드릭까지 병사들에게 잡혀 끌려 나왔다.
“이거 놔요!”
루시테는 몸을 마구 비틀었다.
“삼촌!”
루시테는 손을 뻗어 렘브란트의 옷자락을 붙들려 했다.
그러나 병사들이 그녀를 거세게 잡아끌어 포박했기에 그녀의 손은 렘브란트에게 닿지 않았다.
병사들은 루시테와 렘브란트의 머리에 검은 두건을 씌워 얼굴을 가렸다.
순식간에 루시테의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루시테와 렘브란트는 병사들의 손에 이끌려 어딘가로 속절없이 끌려갔다.
뭔가 탈것에 실렸고,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루시테가 탄 탈것이 덜컹거리는 바퀴 소리를 내며 굴러갔다.
루시테는 양손을 모은 채 불안에 떨었다.
며칠 밤낮이 지났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두건을 얼굴에 쓴 채로 하루 하루 끔찍한 시간이 흘러갔다.
두건에서 해방될 때는 잠깐 주어지는 식사 시간뿐이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루시테는 두건을 벗고 주변을 확인할 수 있었다.
루시테가 갇힌 곳은 어느 천막 안이었다. 렘브란트는 다른 곳으로 옮겨진 듯했다.
루시테는 기둥에 팔이 묶인 채로 앉아 불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막 밖으로 갑옷을 입은 병사들의 그림자가 비쳤다.
병사들이 주위를 수시로 돌아다녔다. 그들의 발소리와 부딪히는 병장기 소리가 시끄러웠다.
루시테는 몸을 움직여보았다. 그러나 단단히 묶인 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때 천막 안으로 누군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들어왔다.
루시테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그녀와 같은 보랏빛 눈동자의 작은 소녀가 천막의 입구 쪽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시테는 소녀가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주홍빛 머리칼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를 지닌 보랏빛 눈동자의 작은 소녀.
루시테가 메이븐에 있었던 시절 유일하게 사이가 크게 나쁘지 않은 가족이었다.
“시드니아.”
루시테의 긴장감 어린 낮은 목소리가 천막 안에 내려앉았다.
“루시테…… 언니.”
시드니아의 눈동자가 불안으로 흔들렸다.
루시테의 또 다른 이복동생이자 메이븐의 2황녀인 시드니아가 루시테에게로 천천히 다가왔다.
시드니아는 루시테 앞에 서서 양손을 맞잡고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그녀는 몹시 불안해 보였다.
루시테는 시드니아가 할 말을 기다릴 틈이 없었다. 그녀는 시드니아가 무어라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말을 꺼냈다.
“어떻게 된 거야? 여기는 어디고?”
시드니아는 입술을 깨물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기만 했다.
“말해줘. 부탁이야, 시드니아. 성하께서 모함을 당했어. 그분이 위험할지도 몰라.”
“그게…… 여기는 르하란 평원이에요…….”
“뭐?”
루시테는 바보 같은 목소리로 반문했다. 르하란 평원은 수도 아테라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곳이었다.
“그게…… 전쟁이 났어요. 이안 오라버니가 이크릭스를 공격했어요.”
“뭐…… 뭐?”
루시테는 당황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시드니아는 작은 목소리로 더듬더듬 상황을 알려주었다.
이안이 대신관을 구한다는 명목 아래 전쟁을 일으켰으며 메이븐이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
그리고 알렉산더가 이안을 협박하기 위해 자신들을 모두 볼모로 잡았다는 것이다.
비록 비올레타와 시드니아가 묶여 있는 상황은 아니지만 전쟁터에 끌려온 것만으로 이미 볼모 처지라는 것이었다.
“그럴 수가…….”
루시테는 눈을 깜박였다. 긴 보랏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이전 생애에는 전쟁이 나지 않았다.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오랫동안 평화를 유지한 대륙에 전쟁이라니?
매번 삶이 다르게 흘러가기는 했으나 이번에는 유독 이상했다.
모든 게 루시테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저, 언니…….”
시드니아는 다시금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루시테를 불렀다.
루시테는 의아한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예전에 정말 죄송했어요…… 저는 언니가 정말 저주받은 줄로만 알아서 그랬어요. 이렇게 변한 언니를 보니까 그냥…… 그냥 정말 죄송해요.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왔어요.”
시드니아는 루시테와 큰 접점은 없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일부러 루시테를 피해 다녔고 다른 이들이 루시테를 손가락질할 때 조용히 그들의 편에 섰던 아이였다.
방관자나 다름없었다.
루시테는 시드니아를 질책할 생각은 없었다.
유약한 아이이니 시드니아가 취했던 방식도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주받았다고 함께 손가락질했던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루시테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평생 자신에게 다가와 말 걸 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시드니아가 사과를 하다니. 이상했다.
“시드니아. 진짜 하고 싶은 말을 해. 다른 할 말이 있는 거잖아?”
루시테의 말에 시드니아가 흠칫 몸을 떨었다.
“그, 그게.”
“괜찮으니 말해.”
루시테는 체념한 목소리로 얘기했다.
시드니아는 몇 번 더 말을 더듬더니 루시테의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루시테의 귓가에 속삭였다.
“이안 오라버니가 언니를 꼭 데리고 오라고 했어요. 저와 함께 이안 오라버니에게 가요. 저에게 방법이 있어요.”
시드니아는 품속에서 마법 스크롤을 슬쩍 꺼내 보여주더니 얼른 집어넣었다.
루시테는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이안이 시드니아를 비올레타와 함께 딸려 보낸 목적이 이런 거였다니.
분명 그때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한 것 같은데도 이안은 포기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시간이 없어요. 언니, 어서요.”
시드니아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루시테를 붙들고 스크롤을 찢을 기세였다.
아무리 루시테가 이안에게 가고 싶지 않다 하더라도 시드니아가 강제로 그녀를 붙들고 마법 스크롤을 쓴다면 억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그건 막아야 했다.
“시드니아. 나를 데려가는 대신 이안에게 무엇을 약속받았니?”
“네?”
발을 동동 구르던 시드니아의 몸이 우뚝 멈췄다.
“말해줘. 너에게 억지로 끌려가게 생겼는데, 이유는 알아야 하지 않겠니?”
루시테는 조금 더 세게 시드니아를 몰아붙였다.
유약한 아이였다.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마음이 약해 털어놓을 수밖에 없을 터다.
“그, 그게…….”
아니나 다를까 시드니아가 울상을 하고 입을 열었다.
“저를 어머니의 곁이 아닌 먼 곳으로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어요. 언니를 데려오면 꼭 그렇게 해주겠다고…… 이안 오라버니가…….”
루시테는 시드니아를 똑바로 쳐다봤다.
어머니와 떨어져 살고 싶다니. 그런 약속을 받았다니.
루시테는 탐욕스럽기 그지없는 시드니아의 어미, 2황비를 떠올렸다.
시드니아가 이 정도로 2황비와 떨어지고 싶었던 줄은 미처 몰랐다.
어쩌면 시드니아 역시 그 황성 속에서 언제나 희생하는 위치에 있던 루시테의 동류일지도 모른다.
루시테는 처음으로 시드니아에게 약간의 연민을 느꼈다.
“시드니아. 너는 그저 네 어머니의 손길이 닿지 않는 먼 곳에서 살고 싶을 뿐이지?”
“네? 그걸 어떻게…….”
시드니아가 말꼬리를 흐리면서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원. 내가 들어줄 테니 내 부탁을 들어주렴.”
“네? 하지만,”
“시드니아. 나는 이안에게 절대 돌아가지 않을 거야. 만약 네가 억지로 나를 데리고 간다면 나는 평생 너를 원망할 거야. 그래도 좋겠니? 내가 널 평생 원망해도 행복하게 살 수 있겠어?”
시드니아의 커다란 눈이 잘게 흔들렸다.
유약한 그녀는 안 그래도 마음에 짐이 있는 루시테의 말을 쉬이 넘길 수 없었다.
루시테는 자신이 저주받았다고 손가락질했던 이복 언니였다.
루시테에게 또 다른 잘못을 저지르면 두고두고 그 잘못이 시드니아를 따라다니며 괴롭힐 게 뻔했다.
“걱정 마. 내 부탁을 들어주면 너는 이안에게 기대지 않고도 네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살 수 있어. 내가 도와줄게.”
루시테는 간곡하게 시드니아를 설득했다.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는데요?”
마침내 시드니아의 입에서 긍정의 대답이 나왔다.
“네? 저 혼자요? 같이 가면 안 돼요?”
시드니아가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쉿!”
루시테는 황급히 시드니아의 입을 막았다. 둘은 서로 놀라 바깥을 살폈다.
바깥은 여전히 병사들이 교대로 돌아다니며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황녀님, 아직 멀었습니까?!”
천막의 바깥에서 시드니아를 재촉하는 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 조금만요! 조금만 더 언니를 만나게 해주세요!”
시드니아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대꾸했다.
둘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잘 들어, 시드니아. 만약 나도 같이 가면 비올레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나를 다시 잡으려고 수를 쓰겠지.”
시드니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시드니아도 비올레타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터.
비올레타가 얼마나 루시테를 죽이기 위해 집착하는지 순간 간과했다.
“그러면…… 언니는 여기에 있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괜찮아. 내가 말한 사람을 찾으면 나를 구해주러 올 거야. 꼭.”
레일리.
루시테는 그리운 은빛 눈의 남자를 떠올렸다.
시드니아는 확신에 찬 루시테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드니아. 명심해. 아덴티움으로 가면 무슨 일이 있어도 레일리. 레일리 아사드라는 사람을 찾아. 그 사람에게 모든 상황을 설명해주렴.”
시드니아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그리고나서 그 사람에게 너를 산 중턱 하우스로 데려다 달라고 해. 거기라면 안전할 거야. 네가 내 동생이라고 이야기하면 그곳에 있는 내 가족들이 너를 잘 대해줄 거란다. 메이븐은 다 잊어버리고 그곳에서 지내렴. 이게 너에게 해줄 수 있는 약속이야.”
“언니…….”
시드니아는 눈물 젖은 눈으로 루시테를 바라보았다. 멀게만 느껴졌던 루시테가 조금 가까워진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레일리 아사드를 찾아내야 해.”
시드니아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가. 시드니아. 어서.”
루시테의 재촉에 시드니아는 마침내 품속에서 마법 스크롤을 온전히 꺼냈다.
떨리는 손으로 마법 스크롤에 루시테가 알려준 좌표를 적었다. 그리고 곧바로 스크롤을 찢었다.
찌익.
양피지가 찢어지는 작은 소리가 나며 시드니아가 순식간에 루시테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루시테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시드니아가 사라진 허공을 바라보았다.
‘레일리.’
시드니아가 무사히 그를 만나야 할 텐데.
루시테가 지금 시드니아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거라곤 간절히 기원해주는 것뿐이었다.
“주신이시여…….”
루시테는 눈을 꼭 감고 기도문을 읊조렸다.
이제 나머지는 시드니아에게 달려 있었다. 그저 그녀가 무사히 레일리와 조우하기를.
루시테는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 * *
짜악!
허공을 가르는 파열음이 크게 울렸다. 살과 살이 맞부딪히는 소리였다.
루시테는 한껏 돌아간 고개를 바로 했다. 그녀는 방금 제 뺨을 때린 여자를 올려다보았다.
이복동생 비올레타.
씩씩대며 찾아온 비올레타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얼굴에 한껏 표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특기인 비올레타가 이렇게 화를 내다니.
루시테는 아픔보다 그저 실소가 나왔다.
“시드니아는 나도 몰라. 내가 가라고 해서 간 게 아닌데 왜 나에게서 찾아?”
“이곳에 와서 사라졌으니 그렇지!”
비올레타가 언성을 높였다.
“어디야! 어디로 빼돌린 거냐고! 이 사특한 것!”
비올레타는 루시테에게서 신성력이 눈이 부실 정도로 넘쳐흐른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특하다는 표현을 썼다.
그렇게 부르지 않으면 끓어오르는 분노가 감당이 되지를 않았다.
그녀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 못된 것.
비올레타는 루시테를 이글거리는 눈동자로 노려보았다. 연보랏빛 눈동자에 불꽃이 튀었다.
밤을 밝히기 위해 옆에 걸어놓은 횃불만큼이나 비올레타의 눈동자가 이글거렸다.
“말해. 시드니아를 어디로 빼돌렸어?”
비올레타는 이를 악물었다.
“나는 몰라.”
루시테 역시 차갑게 대꾸했다. 뭘 알든 모르든, 비올레타에게는 아무 이야기도 해 줄 생각이 없었다.
심지어 변명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네 천막으로 들어와서 없어졌는데 어떻게 몰라! 뭐 본 거라도 있을 거 아니야?!”
비올레타는 또 화를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본 거라도 말을 하라고!”
“모른다고 했어. 네가 언제부터 시드니아를 신경 썼다고 이렇게 찾는지 이해가 안 가네.”
루시테는 싸늘하게 대답하곤 비올레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때 이 모든 대화를 함께 듣고 있던 알렉산더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와 루시테와 비올레타의 사이로 끼어들더니, 별안간 루시테의 멱살을 확 잡아 올렸다.
“으윽!”
루시테는 신음을 내질렀다.
몸이 끌어올려지면서 기둥에 묶여 있던 팔이 밧줄에 쓸렸다. 팔이 빠질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좋은 말 할 때 얘기하는 게 좋을 거다. 나는 참을성이 많지 않으니.”
알렉산더가 탁한 초록빛 눈동자를 루시테의 코앞까지 들이밀며 으르렁거렸다.
그는 지금 전쟁 상황 때문에 몹시 예민한 상태였다.
코앞까지 다가온 메이븐의 군대를 상대하기에 알렉산더의 능력은 역부족이었다.
그나마 전대 황제 때 훈련된 황실의 기사단이 저력을 발휘해 막아내고는 있었으나, 통솔력이 없는 대장 아래 그들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첨예한 상황 속에 볼모 한 명이 사라졌다. 그것은 무척이나 심각한 사안이었다.
비록 다른 볼모에 비해 가치가 떨어지는 2황녀일 뿐이라도 그녀가 없어졌다는 사실이 알렉산더를 자극하고 있었다.
그건 알렉산더가 꺼내 들 수 있는 패가 하나 더 줄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까.
“어서 얘기해!”
알렉산더는 루시테의 코앞에서 고함쳤다. 루시테의 귀가 얼얼할 정도였다.
비올레타는 그 모습을 꼴좋다는 눈빛으로 팔짱을 낀 채 지켜봤다.
루시테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알렉산더는 비올레타와 다르다.
성정이 흉포하고 급해서 제 뜻대로 되지 않으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인간이었다.
무슨 말이라도 하는 게 나았다.
알렉산더가 손을 번쩍 치켜 들었을 때.
“이안!”
루시테가 외쳤다.
“이안에게 돌아간다고 했어요! 이안이 마법 스크롤을 줬다고 했어요.”
“뭐?”
알렉산더와 비올레타가 동시에 말했다. 비올레타의 눈동자가 충격으로 잘게 흔들렸다.
“저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러 왔다고, 이제 돌아가겠다고 하고 마법 스크롤을 찢었어요.”
루시테는 한 마디 한 마디, 미리 생각해두었던 잘 짜인 변명을 내뱉었다.
알렉산더와 비올레타는 저마다 충격에 빠진 듯했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패 하나가 완전히 적진으로 돌아갔다는 사실에, 비올레타는 이안이 시드니아에게만 마법 스크롤을 챙겨줬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루시테는 피가 줄줄 흐르는 입을 앙다문 채 그들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어찌 됐든 그들이 믿는 것 같아 다행이었다.
알렉산더가 시드니아를 붙잡겠다고 아테라로 찾아갈 확률이 줄었으니까.
문득 밖이 소란스러운 것 같았다.
한밤중인데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움직임이 부산스러웠다. 멀리서 들려오는 병장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황태자 전하!”
갑자기 바깥에서 알렉산더의 부하들이 알렉산더를 불렀다.
“황태자 전하!”
한 수하가 땀범벅이 된 채로 천막 안으로 뛰어 들왔다.
“피하셔야 합니다! 적군이 쳐들어왔습니다!”
“뭐라고?”
알렉산더가 눈을 부릅뜨고 제 수하를 쳐다봤다.
“어서 피하셔야 합니다! 이안 황태자의 군대가 진영 초입을 뚫었습니다!”
수하는 숨가쁜 목소리로 알렉산더를 재촉했다.
그때 또 다른 수하가 천막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저희 쪽에 볼모가 잡혀와 있다는 소문이 흘러 들어간 모양입니다! 이안 황태자가 직접 출병을 했습니다!”
수하는 거센 호흡을 몰아쉬며 현 상황을 알렉산더에게 전달했다.
“젠장!”
알렉산더는 주먹으로 천막의 기둥을 쾅 쳤다.
기둥이 부서질 듯 흔들리며 덩달아 기둥에 묶여 있던 루시테의 몸도 흔들렸다.
“막을 방법이 없는가?”
“이안 황태자가 직접 출병하여 어렵습니다! 저희 쪽에는 그를 상대할 만한 소드마스터가 없습니다, 전하!”
“젠장!”
알렉산더는 또 천막의 기둥을 내리치더니 칼을 뽑았다.
그는 뽑은 칼로 루시테가 묶여 있던 밧줄을 내리쳤다.
밧줄이 풀리며 피가 통하지 않아 새하얗게 질렸던 루시테의 팔이 풀려났다.
알렉산더는 곧바로 루시테의 팔뚝을 쥐고 확 끌어당겼다.
“으앗!”
루시테는 비틀거리며 알렉산더에게 끌려갔다.
알렉산더는 비올레타를 가리켰다.
“황녀도 끌고 와! 절대 볼모를 놓쳐서는 안 된다!”
“예, 황태자 전하!”
수하들이 우르르 들어와 순식간에 비올레타를 포박했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저를 폐황녀와 같은 취급을 하시다니요!”
비올레타가 소리쳤다.
“알렉산더 황태자!”
비올레타가 한 번 더 그의 이름을 부르자 알렉산더가 비올레타를 홱 돌아봤다.
그리고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황녀를 잘 모셔라. 귀한 몸이시니.”
“네! 전하!”
수하들이 비올레타의 팔을 거칠게 끌어당겼다.
루시테는 알렉산더에게 잡혀 우악스럽게 천막 밖으로 끌려갔다.
멀리 함성이 크게 들리며 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자고 있던 병사들이 모조리 나와 우왕좌왕 뛰어다녔다.
혼란스러운 틈바구니 속에서 알렉산더는 루시테를 마구 끌고 가며 수하들을 향해 지시했다.
“대신관과 세드릭 디에고를 찾아와라! 그리고 마법사 놈들도 데려와! 절대 놓쳐선 안 된다!”
“예! 황태자 전하!”
수하들이 두 무리로 나뉘어 바쁘게 움직였다.
알렉산더를 보호하기 위해 그의 뒤를 따라붙는 무리, 알렉산더의 명령을 수행하는 무리.
루시테는 아비규환 속에서 정신없이 알렉산더에게 끌려 어딘가로 걸어갔다.
여기저기에서 고함과 비명이 메아리쳤다. 횃불이 쓰러져 막사들에 불이 붙어 활활 타올랐다.
뜨거운 기운이 진영 내에 작열했다.
“허억…… 헉!”
루시테는 다리가 꼬이는 와중에도 넘어지지 않기 위해 마구 걸음을 놀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 * *
알렉산더와 루시테, 비올레타. 그리고 측근 기사들은 깊은 숲속에 있는 어느 오두막에 도착하고서야 숨을 돌렸다.
주변에는 야영 준비를 갖춘 몇 개의 천막이 쳐져 있고 그 안에 소수의 병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알렉산더가 미리 준비해놓은 퇴로의 후방부대인 듯했다.
“젠장!”
알렉산더는 오두막에 도착하자마자 붙들고 있던 루시테를 내팽개쳤다.
“아윽!”
루시테는 그대로 바닥에 넘어지며 주저앉았다.
알렉산더에게 붙들렸던 팔이 욱신거렸다. 시퍼렇게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루시테는 팔을 문지르며 빠르게 눈을 깜박였다. 턱까지 차올랐던 숨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알렉산더는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씩씩대며 나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비올레타는 제 팔을 붙들고 있던 병사의 손을 확 뿌리치곤 입을 일자로 다문 채 팔짱을 끼고 다른 의자에 앉았다.
싸늘한 정적이 오두막 안을 감돌았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나무문이 벌컥 열리더니 알렉산더의 수하가 나타났다.
“전하! 말씀하신 자들을 모두 끌고 왔습니다.”
“대신관은 막사에 묶어두고 세드릭 디에고를 끌고 와라.”
“예!”
수하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더니 곧 누군가를 데리고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다.
루시테는 세드릭의 이름이 들리자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머리칼과 턱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붉은 머리칼의 남자가 거대한 쇠고랑과 족쇄를 차고 천천히 오두막 안으로 들어왔다.
병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세드릭의 목 가까이에 대고 잔뜩 긴장한 상태로 세드릭을 연행해 왔다.
비올레타는 뒤늦게 세드릭을 발견하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렉산더 황태자! 저자는 1급 사형수가 아닙니까! 어떻게 감히 제가 있는 곳에 저자를 들일 수가 있습니까!”
비올레타는 세드릭을 알아보자마자 벌컥 화를 냈다.
알렉산더는 짜증스럽다는 눈으로 비올레타를 힐끗 보더니 말했다.
“황녀님을 막사로 모셔다드려라.”
“예 전하!”
수하 중 한 명이 비올레타에게 다가왔다.
비올레타는 한순간도 세드릭과 함께하고 싶지 않은 듯 치를 떨며 수하를 따라 자리를 벗어났다.
루시테는 구석으로 몸을 옮겨 가만히 상황을 지켜봤다.
알렉산더가 세드릭에게 무슨 짓을 할까 봐 불안했다.
지금 그녀가 세드릭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조용히 지켜보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카멜.”
“예. 전하.”
알렉산더에게 이름이 불린 기사가 곧바로 대답했다.
오두막 안에 들어와 있는 기사는 총 네 명이었는데 껌딱지처럼 알렉산더를 따라다니는 측근 기사들이었다.
“가서 ‘그’를 데려와라. 마법사들 사이에 끼어 있을 것이다.”
‘그?’
루시테의 눈에 물음이 떠올랐다.
카멜이라 불린 기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곧바로 오두막을 벗어났다.
“디에고 백작.”
알렉산더는 짐짓 부드러운 목소리로 세드릭을 불렀다.
세드릭은 대꾸도 하지 않고 구부정한 자세로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의 손과 발에 채워진 구속구가 몹시 무거워 보였다.
“백작.”
알렉산더가 그를 또 불렀지만 세드릭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에게서는 마치 세상 모든 것을 포기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났다.
“후.”
알렉산더가 열이 뻗치는지 주먹을 꽉 쥐었다 폈다.
“백작. 내가 그대에게 기회를 주려 하네. 이번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그대의 죄를 없는 것으로 해 줄 수 있어.”
알렉산더가 그가 할 수 있는 한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세드릭을 얼렀다.
“백작. 들어보게. 솔직히 말해 자네 같은 인재가 감옥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게 말이 되는가? 그대가 나와 한 약조도 지켜줬기 때문에 솔직히 나는 그대에게 안타까움을 많이 느끼고 있어.”
알렉산더는 세드릭에게로 한 걸음 다가갔다.
루시테는 어두운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았다.
세드릭의 죄를 없는 것으로 해주겠다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어떻게 황제를 시해한 자의 죄를 사해주겠는가.
알렉산더가 그럴 리가 없었다. 전부 다 거짓부렁일 터였다.
그저 세드릭을 이용하기 위한 거짓부렁.
아마 지금 시점에서 이안을 대적할 만한 인물이 없으니 세드릭을 버리는 패로 쓸려고 그러는 것 같았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죽을 입장. 알렉산더는 끝까지 세드릭을 이용해 먹기 위해 안달이 난 것 같았다.
루시테의 얼굴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세드릭…….’
알렉산더의 세드릭을 향한 설득은 계속되었다.
그는 대답이 없는 세드릭을 향해 용케도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의 원래 성질대로라면 진작 세드릭에게 화를 내고도 남았을 텐데도 말이다.
그때 오두막의 문이 열리고 카멜이 나타났다.
“태자 전하. 그자를 데려왔습니다.”
“오오! 그래! 어서 모셔라.”
알렉산더가 눈에 띄게 반가워하며 카멜이 데려온 자를 환대했다.
카멜의 뒤로 검은 로브를 쓴 남자가 스르륵 따라 들어왔다.
루시테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흠칫 놀라 몸을 굳혔다.
로브를 쓴 남자는 가면을 쓰고 있었고 평범한 마법사처럼 보였다.
그러나 루시테는 그에게서 몹시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무시할래야 무시할 수 없는 선득하고 혐오스러운 느낌.
루시테는 몸을 움츠리며 눈에 띄지 않도록 구석에 더욱 바싹 붙어 섰다.
등허리와 팔뚝을 타고 오싹 소름이 돋아났다.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기운이었다.
노이를 부모처럼 키워준 새 몬스터를 죽인 흑마법사.
가면을 쓴 저 마법사에게서 그때 그 흑마법사와 똑같은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루시테와는 상극인 어둠의 기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알렉산더.’
흑마법사를 끌어들이다니.
어찌나 긴장했는지 루시테의 입술이 하얗게 질렸다.
볼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쪽으로 오시오.”
알렉산더는 크게 반가워하며 흑마법사를 자신이 있는 쪽으로 이끌었다.
루시테는 흘끗 주변의 기사들을 살폈다. 그들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마법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알렉산더가 흑마법사와 결탁한 것을 아는 걸까?
루시테는 입술을 깨물었다.
마법 대제국 이크릭스가 엄하게 처벌하는 흑마법사와, 바로 그 이크릭스 황태자의 결탁이라니.
알렉산더는 알면 알수록 더욱 쓰레기 같은 놈이었다.
“빈센트. 이 자를 봐주시오. 내가 얘기했던 세드릭 디에고 백작이오.”
알렉산더는 마법사더러 세드릭을 보라며 종용했다.
“호오…… 저와는 구면이로군요.”
가면 아래에서 스산하고 진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면 때문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루시테는 저 빈센트라는 흑마법사가 웃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입니다. 세드릭 디에고 백작.”
빈센트가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세드릭에게 아는 척을 했다.
지금까지 가만히 있던 세드릭이 살짝 얼굴을 들고 사나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그쪽을 모르는데.”
“그러시겠지요. 지나가다 뵈었을 수도 있을 겁니다.”
빈센트가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그러나 루시테는 그의 말이 몹시 신경 쓰였다.
세드릭은 빈센트를 본 적이 없다는데. 빈센트라는 흑마법사는 저렇게도 세드릭에게 아는 척을 한다고?
흑마법사와 구면이라는 건 결코 좋은 얘기가 아니었다.
그녀는 흑마법사가 얼마나 지독한 자들인지 직접 겪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분명 무언가가 있을 터였다.
루시테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백작님, 이번에는 아무 소원이 없으십니까?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해드릴 텐데…….”
빈센트가 손을 뻗어 세드릭의 쇠고랑 위에 손을 얹었다.
살가죽이 뼈에 눌러붙어 앙상한 뼈다귀 같은 손이 로브 아래로 슬쩍 드러났다.
창백한 피부 아래로 검푸른 핏줄기가 튀어나와 있었다.
루시테는 황급히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세드릭의 큰 덩치에 가려져 기사들은 마법사의 손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루시테는 당장이라도 저자는 흑마법사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랬다가는 루시테가 죽은 목숨. 알렉산더가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루시테는 주먹을 꽉 쥐었다. 세드릭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백작님 말해 보십시오. 간절히 바라시는 게 있지 않습니까?”
빈센트가 스산한 목소리로 쉼 없이 세드릭에게 속삭였다.
“마음속에 간절히 바라는 것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것을 제가 들어드릴지도 모릅니다.”
“바라는 것…….”
세드릭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가 멍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세드릭의 눈이 살짝 풀려 있었다.
루시테는 황급히 시선을 돌려 흑마법사의 손끝을 다시 보았다.
“!”
흑마법사의 손끝에서 뱀 같은 검은 연기가 기어 나와 세드릭에게로 스며들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순간 루시테의 머릿속으로 섬광처럼 한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세드릭이 레일리를 칼로 찌른 그 날. 세드릭의 눈빛이 몹시 이상했더랬다.
평소 같은 푸른 눈동자가 아니었다.
그는 무언가에 휩싸인 사람처럼 제정신이 아니었다. 루시테가 무슨 말을 해도 듣지 못했고 이성을 찾지 못했다.
‘설마, 설마.’
루시테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떨었다.
그래 아무리 세드릭이 미친개라 유명하다 하더라도 세드릭은 사람을 그렇게 마구잡이로 죽일 사람이 아니었다.
세드릭은 처음부터 이용을 당한 거였다.
알렉산더와 저 흑마법사에게.
쿵.
루시테는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을 받았다.
지금 알렉산더는 또 흑마법사를 이용해 그때처럼 세드릭을 이용하려는 것일 터다.
이미 검은 연기는 완전히 세드릭에게로 스며들어 있었고 세드릭의 눈빛이 이상해져 있었다.
선명한 푸른 눈동자에 탁한 기운이 차오르고 있었다.
“자. 백작님 어떻습니까? 말해주십시오. 바라는 것을.”
빈센트의 물음에 세드릭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만나기를 원해.”
“그래요. 누구를 만나고 싶으십니까?”
“루시…… 루시 필드.”
“!!”
루시테는 눈을 부릅떴다.
“루시…… 그 여자를 만나고 싶다…….”
“좋습니다. 만나게 해드리지요. 그러면 황태자 전하의 부탁을 들어주시겠습니까?”
“그래…… 좋다.”
세드릭은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안돼. 안돼, 세드릭.’
루시테는 가슴이 미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 때문에 세드릭이 흑마법사의 손에 떨어진 것이었다니.
처음부터 끝까지, 황제를 죽인 것까지 전부. 알렉산더의 손에 놀아난 것이었다니.
루시테는 몸을 가누기가 힘들어져 옆의 벽을 짚었다.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오로지 지켜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자신이 너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알렉산더는 세드릭에게 선두에 서서 적군과 이안을 죽이라고 명령했고, 세드릭은 거기에 대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세드릭이 알렉산더의 명령에 알겠다고 대답을 함으로써 그에게 스며들었던 검은 연기가 그의 속에서 진득하게 퍼져나갔다.
눈에 보이지는 않았으나 루시테는 그 더러운 기운이 세드릭을 점령하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너무나 끔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