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황성은 안티매직 때문에 마법 스크롤이 통하지 않는다.
시드니아는 루시테가 일러준 좌표에서 금세 모습을 드러냈다.
황성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광장의 한 골목이었다.
시드니아는 루시테가 일러준 말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쉴 틈도 없이 곧바로 움직였다.
‘이반의 서점.’
시드니아는 거리에 있는 상점들의 간판을 확인하며 빠르게 걸음을 놀렸다.
“이반의 서점!”
시드니아는 더 걸어가려다 말고 한 오래된 서점 앞에 우뚝 멈춰 섰다.
그녀는 조심스레 서점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서점 안은 오래된 책 냄새가 가득했고 안쪽 카운터에는 돋보기 안경을 쓴 나이가 지긋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시드니아는 그를 발견하자마자 그에게 달려갔다.
“아,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으음? 처음 보는 꼬마 아가씨로구먼.”
이반은 하던 일을 멈추고 보랏빛 눈의 작은 소녀를 내려다보았다.
“저는 그, 시드니아라고 해요! 할아버지께 부탁이 있어요.”
“나에게 말인가?”
이반 영감은 의아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나 곧 소녀에게서 나온 다음 말에 갸웃거리던 고개를 우뚝 멈출 수밖에 없었다.
“루시 필드라는 사람이 보내서 왔다고 하면 아실 거라고 했어요.”
루시 필드. 그가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이었다.
서점에 고용한 작은 아가씨.
이상하게 정이 가서 그가 손녀딸처럼 여기는 아가씨.
한동안 그 아가씨를 보지 못해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다.
이반 영감은 안경을 고쳐 쓰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쪽으로 오시오. 꼬마 아가씨.”
이반 영감은 시드니아를 서점 안쪽의 그의 방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오?”
“그게…….”
시드니아는 입술을 달싹이곤 루시테가 일러준 대로 이야기했다.
“저, 황성에 들어가야 하는데 도와주세요.”
“황성…… 말이시오?”
이반 영감의 눈빛이 일순 날카로워졌다.
“영감님이시라면! 저를 도와주실 거라고 했어요. 루시 언니가 모든 일이 끝나면 영감님께 전부 설명해드리겠다고 말씀드리라고 했어요.”
시드니아는 다급하게 덧붙였다.
이반 영감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나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반 영감은 자신이 어차피 루시 필드. 그 마음씨 좋고 착한 아가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반 영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시오. 지금이라면 황실에 식료품을 납품하는 마차에 끼어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소. 황태자 전하께서 자리를 비워 경계가 덜 삼엄해지기도 했으니…… 어찌저찌 가능할 것 같구먼.”
“정말인가요!”
시드니아는 벌떡 일어나 이반 영감을 따라갔다.
이반 영감은 직접 서점 문을 잠그고 시드니아를 데리고 오랜 지인인 식료품점 주인에게 데리고 갔다.
그는 대충 둘러대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시드니아를 무사히 인계해 주었다.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시드니아는 마차를 타고 떠나기 직전 고개를 푹 숙이며 이반 영감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럼 무사하길 바라네.”
이반 영감은 손을 흔들었다.
곧 시드니아와 식료품을 실은 마차가 출발했다. 시드니아는 마차의 창으로 고개를 내밀고 이반 영감을 보았다.
이반 영감이 점이 되어 멀어졌다.
시드니아는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아 무릎 위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명심해. 시드니아. 무슨 일이 있어도 레일리 아사드. 그를 찾아가. 그가 우리를 지켜줄 거야. 그를 찾아야 해. 시드니아.」
루시테의 목소리가 여전히 생생했다.
‘찾아야만 해.’
레일리 아사드라는 사람을.
시드니아는 꽉 쥔 치맛자락을 더욱 세게 부여잡았다. 시드니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의지로 활활 타올랐다.
시드니아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달렸다. 그래도 이곳에서 얼마간 지냈었기에 지리는 약간 익힌 상태였다.
근위기사 대부분이 전쟁터에 차출되어 황성의 경비는 최소한의 인원수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시드니아가 숨어서 건물을 하나씩 뒤지는 것은 다행히도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시드니아는 가장 먼저 마법사들이 머문다는 거처로 찾아가 레일리 아사드라는 사람의 행방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마법사들 역시 대부분 전쟁에 동원되었기에 레일리 아사드는 코빼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심지어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시드니아는 마법사들의 거처를 나와 궁 안을 배회했다. 그녀는 점점 초조해져 발을 동동 굴렀다.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시드니아는 하는 수 없이 이반 영감이 챙겨준 빵을 먹으며 사람이 없는 구석에 숨어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여름인데도 밤공기는 차가워 시드니아는 오들오들 떨며 아침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루시테와 자신의 목숨이 달린 일이었으니까.
아침이 밝았다. 시드니아는 새벽같이 황성을 돌아다니며 다시 레일리 아사드를 찾기 시작했다.
아무리 황성의 지리를 어느 정도 안다고 해도 아덴티움은 지나치게 넓었다. 시드니아가 모든 건물을 뒤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녀는 무작정 달리며 정신없이 궁들을 살폈다. 초조함에 시드니아의 이마에 구슬땀이 맺혔다.
‘어떡하지,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시드니아는 울상을 지으며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먹을 것도 다 떨어져서 몸에 기운이 없었다.
점점 체력은 떨어져 가고 있었다. 시드니아는 그 상태로 또 반나절을 궁 안을 숨어다니며 레일리를 찾았다.
한낮의 태양이 시드니아의 머리 위로 작열했다. 이번 여름은 유독 더 뜨거웠다.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으니 대지도 말라갔고 사람의 피로도도 극심해졌다.
시드니아의 뺨을 타고 굵은 땀방울이 쉼 없이 떨어져 내렸다. 시드니아는 비척거리며 몸을 옮겼다.
시드니아가 막 다른 건물로 옮기기 위해 몸을 틀었을 때였다.
쾅!!
멀지 않은 거리의 건물에서 커다란 폭발음이 울렸다.
콰광! 쾅!
건물이 터져나가며 검은 구름이 피어올랐다.
시드니아는 눈을 크게 떴다. 아덴티움에서 이런 폭발이라니.
시드니아는 몸을 잘게 떨었다.
그러나 더 생각할 것도 없이 폭발이 일어난 쪽으로 향했다. 온 힘을 다해 빠르게 걷다 아예 달리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이런 사고가 일어난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 시드니아는 폭발이 일어난 곳을 확인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녀는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건물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렸다.
‘레일리! 레일리 아사드!’
제발 그가 저곳에 있었으면!
시드니아는 땀범벅이 된 얼굴로 간절함을 담아 미친 듯이 달렸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으나 시드니아는 쉬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정신을 놓지 않았다.
폭발한 건물의 근처로 가면 갈수록 재가 휘날렸고 화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시드니아는 휘날리는 먼지구름을 뚫고 그 안으로 거침없이 달려 들어갔다.
“콜록! 콜록!”
시드니아는 코가 매워 기침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저 안쪽에서 무어라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예끼! 이놈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감옥 벽을 터뜨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언제까지 여기 안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을 수는 없지요.”
나이가 지긋한 노인의 목소리와 젊은 남자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드니아는 먼지를 헤치고 그들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점점 그들의 실루엣이 뚜렷해졌다.
문득 대화를 나누던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그의 실루엣이 시드니아가 있는 쪽으로 돌아섰다.
“누구냐?”
낮고 서늘한 음성이 시드니아에게로 날아들었다.
“호, 혹시! 혹시 레일리 아사드 님이신가요?”
시드니아는 목소리를 높였다. 기다란 남자의 실루엣이 흠칫 몸을 굳혔다.
“레일리 아사드 님이신가요?!”
시드니아는 그녀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큰 목소리로 외쳤다.
장신의 남자는 먼지를 뚫고 성큼성큼 시드니아가 있는 쪽을 향해 다가왔다.
시드니아는 매캐한 연기 속에서 눈을 깜박이며 다가오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더벅머리와 턱수염이 있는 키가 큰 남자였다.
시드니아는 루시테가 말해줬던 레일리 아사드의 신체적 특징을 떠올렸다.
더벅머리 가발을 쓰고 변장을 하고 있을 거라던.
“제자 놈아, 누구길래 그러냐?”
나이 지긋한 노인이 더벅머리 남자의 옆으로 다가왔다.
“저, 저는 루시테 언니가 보내서 왔어요!”
시드니아는 양손을 모아쥐고 외쳤다.
루시테라는 이름에 더벅머리 남자의 입매가 눈에 띄게 동요했다.
“당신은 누굽니까?”
“저는 루시테 언니의 동생 시드니아 클라우디오예요! 루시테 언니가 레일리 아사드 님을 찾아가라고 했어요! 부탁이에요. 제 말을 좀 들어주세요.”
더벅머리 남자, 레일리는 시드니아라 자신을 소개한 소녀를 뜯어보았다.
짙은 보랏빛 눈동자와 다홍빛 머리카락.
그다지 루시테와 닮은 구석은 없었으나 보랏빛 눈동자. 그 독특한 눈동자 색은 메이븐 황실의 상징이다.
“제발 부탁이에요! 레일리 아사드님. 제 말을 좀 들어주세요.”
시드니아가 간절한 눈망울로 애원했다.
레일리는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제가 지금 바쁘니 가면서 이야기를 듣도록 하지요.”
레일리는 말을 툭 던지고는 곧바로 몸을 돌렸다.
시드니아는 잽싸게 레일리의 말을 알아듣고는 그에게 따라붙었다.
레일리의 왼쪽에는 시드니아, 오른쪽에는 노마법사가 함께 걸어갔다.
연기 너머 저 바깥이 슬슬 소란스러워지고 있었다. 몇 안 되는 경비와 사용인들이 몰려들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놈아, 잡히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냐?”
노마법사가 레일리를 향해 핀잔을 주었다.
“그러면 또 터뜨리든지 하지요, 뭐.”
레일리의 붉은 입술이 씩 호선을 그렸다.
그는 품 안에서 검은 폭발환을 꺼내 비스커스의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비스커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신머리 없는 놈.”
레일리에게 욕을 한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자, 그럼 얘기해보세요. 루시테가 당신을 왜 저에게 보냈습니까? 루시테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레일리가 제 옆을 열심히 따라 걷는 시드니아를 흘끗 보더니 말했다.
“레일리 님. 그게. 전쟁이 났어요.”
시드니아는 할 말을 정리하며 하나씩 말을 꺼내 놓았다.
고국인 메이븐에서 오라버니가 전쟁을 일으킨 것과 알렉산더 황태자가 자신들과 대신관을 모조리 볼모로 잡아 전쟁터로 끌고 갔다는 것.
「시드니아.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니 모든 것을 사실대로 얘기하렴.」
시드니아는 루시테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루시테의 말대로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둘째 언니 비올레타가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첫째 언니 루시테와 대신관 성하를 저주받은 자로 모함했다는 것.
자신이 진짜 성녀라 주장하며 알렉산더를 설득해 감옥에 처넣고 처형을 하려고 했던 것까지 모조리 이야기했다.
시드니아는 이야기를 하며 레일리라는 사람의 얼굴을 힐끗 올려다보았다.
더벅머리 때문에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아, 아무리 자세히 보아도 크게 표정이 변한 것 같지 않았다.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인 걸까?’
시드니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양손을 맞잡았다.
만약 그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면 시드니아는 끝장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도망칠 힘도, 무언가를 할 힘도 없었다.
“지금 알렉산더가 출정을 해서 이곳에 없다는 그 얘기가 사실입니까?”
모든 이야기를 들은 레일리가 심각한 얼굴로 시드니아에게 물어왔다.
시드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황태자는 전장에 있어요.”
“하.”
레일리는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뱉더니.
갑자기 손을 번쩍 들어 올려 제 머리를 잡고 확 잡아당겼다.
고동색의 더벅머리 가발이 훌렁 벗겨지고 그 아래로 눈부신 은빛 머리칼이 쏟아져 내렸다.
시드니아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레일리는 벗겨낸 더벅머리 가발을 후련하다는 듯 바닥에 내던졌다.
더벅머리 가발이 초라하게 바닥에 널브러졌다. 레일리는 가발을 보며 치를 떨었다.
그의 미관과 거리가 백만 년은 먼 가발을 쓰고 있느라 얼마나 괴로웠던가.
어디로 보나 그의 미적 기준에 하나도 부합하지 않은 쓰레기 같은 가발이었다.
레일리는 저 가발이 제 머리에 얹어져 있다는 것을 생각만 해도 기분이 나빴다.
비스커스는 그런 레일리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후.”
레일리는 개운한 얼굴로 은빛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부드러운 머리칼이 쏟아져 내렸다.
“알렉산더가 없다는데 더 이상 변장할 필요가 없지요.”
시드니아는 눈을 마구 깜박였다.
“어쩐지 감옥을 터뜨렸는데 경비병이 별로 안 오더라니. 황성이 조용한 이유가 있었군요.”
“그러게 말이다. 그 머저리 같은 놈이 머저리다운 짓을 벌였군.”
레일리가 툭 내뱉은 말에 비스커스가 끌끌 웃으며 대답했다.
“저기, 저 레일리 아사드 님이…… 맞으신 거죠?”
시드니아의 눈빛이 불안으로 흔들렸다.
레일리가 특유의 싸늘한 은빛 눈으로 시드니아를 내려다보며 씩 입꼬리를 올렸다.
“루시테가 제 머리가 가발이라고 얘기했다지 않았습니까? 저는 레일리 아사드가 맞습니다.”
그의 대답에서는 오만함과 자신감이 넘쳤다.
시드니아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눈을 깜박이기만 했다.
그들이 걸음을 재촉하여 도착한 곳은 마법사의 거처였다.
레일리와 비스커스는 거침없이 자신들의 연구실로 향했다.
만들어 놓은 폭발물이 그대로 있었다.
액체 형태가 굳어 고체가 되어야 완벽해지는데, 그들이 감옥에 갇혀 있던 사이 폭발물은 전부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레일리는 씩 웃으며 그것들을 자루에 담아 챙겼다.
“스승님, 이제 뒷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레일리는 자루를 어깨에 둘러메고 비스커스에게 인사했다. 더 이상 비스커스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래. 나는 이만 집으로 돌아가 보마.”
비스커스 역시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제자의 능력을 믿기도 했고, 무엇보다 알렉산더가 없는 이상 이 황성의 1인자는 그의 제자였다.
명실상부하게 알렉산더 다음으로 강력한 황위 계승 후보였으니 말이다.
그 누구도 감히 2황자 카일러스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막지 못할 터였다.
“이 시각에는 3문 경비가 허술합니다. 스승님.”
“알고 있다, 이놈아! 내가 너보다 황성에서 더 오래 지냈는데 모르겠느냐?”
비스커스는 퉁명스럽게 대꾸하곤 몸을 홱 돌렸다.
“이만 가 보마.”
“예 스승님.”
레일리는 멀어지는 비스커스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시선을 옮겼다.
“저는 지금부터 황성을 좀 터뜨리러 갈까 하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레일리의 서늘한 목소리가 시드니아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네…… 네?!”
황성을 터뜨린다고?
시드니아는 입을 벌렸다.
눈앞의 남자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가볍게 내뱉고 있었다.
“따라오셔도 좋고 여기 계셔도 됩니다. 마법사의 거처에는 보통 사람들이 잘 안 오기 때문에 숨어 계시기에는 좋을 겁니다.”
“여, 여기 있을게요! 데리러 와 주세요.”
시드니아는 두려움에 얼른 두 번째 선택지를 골랐다.
게다가 그를 따라가기에는 몹시 지쳐 쉬고 싶기도 했다.
레일리는 입꼬리를 올렸다.
루시테의 이복동생이라지만 역시 진짜 그녀와는 많이 달랐다.
루시테라면 무조건 그를 따라나선다고 했을 것이다.
용감하고 따뜻한 여자이니까.
그가 걱정돼서라도 무조건 따라가겠다고 나섰을 것이다. 루시테라면.
레일리는 미소를 머금고 그녀를 떠올리며 맞은편 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알았습니다. 그럼 저 방에 들어가 계십시오. 루시테가 이곳에 머무는 동안 썼던 방입니다.”
“언니가요!”
시드니아가 반색하며 좋아했다.
레일리는 시드니아를 안전한 곳으로 안내해 준 후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저 높이 솟아 있는 금빛 지붕의 화려한 궁으로 향했다.
그는 사나운 눈을 하고 씩 미소를 지었다.
알렉산더도 없고 나브레의 유산을 다룰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완벽한 절호의 타이밍이 아니던가.
레일리는 폭발물이 가득 든 자루를 둘러멘 채 망설임 없이 사자궁으로 향했다.
“2, 2황자 전하?!”
레일리를 알아본 시종들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2황자가, 카일러스가 살아있었다니.
황태자 알렉산더가 궁에 없는 이상 지금 궁의 주인은 더 말할 것도 없이 레일리였다.
사람들은 두려운 눈길로 레일리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레일리의 길을 막을 사람은 없었다.
레일리는 당당하게 사자궁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황제의 알현실.
커다란 문 앞에 도착하여 레일리는 문을 밀었다. 육중한 문이 부드럽게 밀리며 열렸다.
붉은 융단이 바닥에 깔려있고 양옆에 순금으로 만든 거대한 사자상과 드래곤 상이 세워져 있었다.
천장에는 거대한 은빛 드래곤이 벽화로 그려져 있었다.
황제의 의자가 놓여 있는 곳은 커튼이 쳐져 있고 몇 계단 위에 있는 곳이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볼 수 있도록 놓여 있는 의자는 전체적으로 위압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레일리는 계단을 뛰듯 올라가 커튼 안쪽에 있는 황제의 공간으로 들어갔다.
레일리가 유심히 이곳저곳을 살폈다.
황제의 홀.
나브레의 유산. 그것이 분명 이곳에 있을 터였다.
레일리는 방안의 여기저기를 손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문득 레일리의 시선이 의자로 향했다.
레일리는 의자를 툭 밀어보았다. 의자가 움직이지 않았다.
바닥에 고정되어 있다는 뜻이었다.
“찾았다.”
레일리의 붉은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의자를 이곳저곳 더듬던 레일리가 손잡이 부근을 잡았을 때.
딸깍.
손잡이의 끝부분 위에 새겨진 드래곤 장식이 옆으로 옮겨졌다.
기이잉.
기계음이 들리며 알현실의 황제의 의자가 옆으로 밀려났다.
의자 아래에 있는 공간에는 검은색의 긴 상자가 딱 맞게 들어 있었다.
레일리는 상자를 꺼내서 열었다.
상자 안에 있는 물건은 겉보기에는 특별해 보이지 않았다.
기다란 모양의 황제의 홀. 은색의 긴 대 위에 주먹만 한 검은색 구슬이 얹혀 있었다.
보통사람은 이 구슬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겠지만 레일리는 알 수 있었다.
구슬 안에서 거대한 마나가 쉼 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 안에 아덴티움을 다 둘러싸는 안티매직의 결정체, 신룡 나브레의 유산이 들어 있을 터였다.
레일리는 홀을 들고 알현실 바깥으로 나갔다.
시종 몇이 불안한 얼굴로 서 있었다.
“사람들을 전부 피신시키세요.”
“예? 그게 무슨 말이시온지,”
“지금부터. 사자궁은 지도에서 지워질 것입니다. 같이 죽고 싶지 않다면 모든 사람을 대피시키는 게 좋을 겁니다.”
레일리가 입꼬리를 올린 채 사나운 눈으로 이야기했다. 그의 은빛 눈동자가 번뜩였다.
시종들은 놀라 입을 벌렸다.
“어서 움직이시는 게 좋을 텐데요.”
“예, 예!”
시종들은 그대로 뒤로 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2황자의 눈빛은 농담하는 사람의 눈빛이 아니었기에.
게다가 그는 이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가 아니던가. 시종들은 황자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대피하시오!”
“대피하시오!”
그들은 사방을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곧 각 위치에서 일하던 한 무리의 사람들이 사자궁 밖으로 저마다 뛰쳐나갔다.
레일리는 그들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알현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바닥에 황제의 홀을 내던졌다. 황제의 홀은 붉은 융단 위에 볼품없이 굴렀다.
레일리는 그가 가지고 왔던 폭발물질이 담긴 자루를 열었다.
그 안에서 폭발환들을 꺼내 황제의 홀 옆에 하나하나 내려놓았다.
어찌나 많이 만들었는지 알현실 하나가 다 모자랄 지경이었다.
레일리는 부싯돌로 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알현실 안에 내려놓고 문을 닫았다.
낮은 초이니 아마도 오 분 내로 다 타들어 갈 것이다. 그러면 알현실 안에서부터 폭발이 시작되겠지.
저 정도 양이면 사자궁은 먼지가 되고도 남을 양이었다.
그러나 홀에 균열이 갈지 어떨지는 미지수였다.
그가 나름대로 계량하여 미친 듯이 폭발물을 만들긴 했으나 알 수 없었다.
깨지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작은 금이라도 간다면. 작은 균열이라도 생긴다면 반은 성공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작은 실금이지만 그것은 레일리에게 크나큰 의미가 있을 터였다.
천 년 동안 유지되었던 마법진에 균열이 생긴다는 뜻이니까.
그 틈에 레일리가 약간의 마법을 되찾을 수 있을 테고, 그다음에는 마법을 써서 그 균열을 넓힐 수 있지 않을까.
그게 레일리의 계획이었다.
사자궁에 일하던 궁인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탁.
레일리가 마지막 계단을 내려왔을 때.
쾅!!
콰광! 쾅!!
그의 등 뒤에서 큰 폭발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초가 전부 타들어가 그 불이 옆으로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쾅!! 쾅!!
벼락같은 폭발음이 들리며 사자궁이 터져나가기 시작했다.
강력한 황권을 상징하는 철옹성 같던 황제의 궁이. 언제나 레일리를 억압했던 친아버지의 궁이 종잇장처럼 시원하게 재가 되고 있었다.
레일리는 그 광경을 바라보며 싸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가 바라는 건 정말 나브레의 홀을 깨는 것뿐이었을까? 아니면 사자궁 역시 파괴해버리는 것이었을까.
레일리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는 몹시 속이 후련하다는 것이었다.
“꺄아아악!”
“모두 피해!”
레일리의 뒤에서 궁인들이 떨어지는 궁전의 파편을 피해 도망 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소란스러운 속에서 레일리는 그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사자궁이 무너지는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쾅! 콰광!
1차 폭발. 2차 폭발. 3차 폭발.
대마법사 레일리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폭발물이라 그런지 위력이 대단했다.
조그마한 폭발환들이 사자궁 전체를 날려버리는 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금칠한 지붕의 파편이 사방으로 떨어졌고 벽은 반이 날아가 돌무더기와 잿더미가 되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서서 역대 황제들이 심혈을 기울여 쌓아 올린 유산이 처절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멍하니 볼 수밖에 없었다.
먼지와 재가 사자궁 위로 시커멓게 피어올랐다. 여전히 불이 붙어 꺼지지 않은 곳도 있었다.
모든 폭발이 끝났을 때, 레일리는 사자궁, 이제는 궁전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 잔해 안으로 유유히 걸어 들어갔다.
레일리는 황제의 알현실이 있던 곳으로 향했다.
거대하고 육중한 문은 녹아내리고 부서져 파편으로 바닥에 굴러다녔다.
그리고 그 안쪽. 폭발환들이 잔뜩 놓여 있는 그 안쪽에는 바닥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레일리는 허리를 숙이고 구멍 안쪽을 유심히 보았다. 꽤 깊었다.
레일리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반투명한 구는 여전히 건재했다. 균열 하나 없이 온 황성을 뒤덮고 마법을 차단하고 있었다.
거대한 궁 하나가 다 무너지도록 폭탄을 터트렸는데도 아직도 나브레의 유산은 멀쩡한 것이다.
“하.”
레일리는 쓰디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거대하고 깊은 구멍 안으로 뛰어들었다.
끝장을 볼 것이다. 언제까지고 황제의 망령에 시달리며 살 자신이 없었다.
안티매직이 존재하는 한 레일리에게 진정한 자유는 없을 것이다.
반드시 이겨버리고 말리라.
신룡을.
레일리의 은빛 눈동자가 강한 의지로 번뜩였다.
그리고 그에게 스며들었던 엘라임의 푸른 기운도 그의 이마 한가운데에서 반짝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떨어졌을까. 구멍의 밑바닥에 발이 닿았다. 정확히는 바닥이 아니라 물이었다.
풍덩!
시리도록 차가운 물이 그의 몸에 닿았다. 레일리는 그대로 물에 빠져 들어갔다.
얼마나 깊이 구멍이 뚫렸던 건지 저 밑 지하 깊은 곳으로 흐르는 수로에 빠진 것 같았다.
레일리는 끝장을 볼 생각으로 숨을 참고 그대로 가라앉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어둡고 축축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게 정상일 텐데. 물속이 대낮처럼 환했다.
어느 순간부터 숨을 참고 있는지 숨을 쉬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몸이 편안해졌다.
그저 모든 시간이 멈춰버린 것 같았다.
주변의 모든 것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기도 하고, 오히려 너무나 빨라서 눈치챌 수조차 없을 정도인 것 같기도 했다.
레일리는 이상한 느낌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몸은 계속해서 가라앉고 있었다.
아무리 궁 아래 수로가 있다지만 이렇게 깊을 리가 없었다. 당연히 밝을 리도 없었다.
레일리는 손을 움직여보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비단 같은 느낌의 물이 빠져나갔다.
분명히 물의 촉감이었으나 부드러웠다. 포근하고 따스한 것도 같았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보았다.
그러자 가라앉던 몸이 언제 가라앉았냐는 듯 뚝 멈췄다.
그리고 그가 움직이는 대로 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물이 허공이나 다름없게 느껴졌다.
레일리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왠지 가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레일리가 앞으로 나아가면 갈수록 푸르르게 빛났던 물속이 더더욱 밝아졌다.
마치 물 안을 밝히는 무언가가 있는 것만 같았다.
한참을 걸었을 때. 저 멀리 긴 실루엣이 보였다.
푸른 장발을 가진 장신의 남자가 폭 넓은 소맷자락을 물결에 흔들리게 둔 채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레일리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그를 빤히 바라봤다. 익숙한 모습이었다.
“엘라임?”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레일리의 입에서 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레일리의 부름에 엘라임이 그를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오랜만이로구나.”
엘라임이 특유의 푸른 입술을 휘어 올렸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여전히 수면이 일렁이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그가 잠겨 있는 물속 전체가 술렁이는 것도 같았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레일리는 눈썹을 비뚜름하게 올렸다. 그가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정령을 소환하지도 않았는데 그냥 정령도 아닌 정령왕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황성에는 황제가 설치한 정령소환 금지 마법진도 깔려있었다. 더더욱 엘라임을 소환하기란 불가능했다.
“뚱한 표정은 여전하구나.”
엘라임이 뒷짐을 풀고는 그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저는 바쁩니다.”
레일리는 딱딱하게 대답했다.
엘라임이 얼마나 말이 많았는지를 잊지 않고 있었다.
당장 황제의 홀을 찾아 씨름을 해도 모자랄 판에 정령왕과 노닥거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흐음.”
엘라임이 긴 푸른 손톱으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어깨 뒤로 넘겼다.
“여기가 어디인지 모르겠느냐?”
레일리는 엘라임의 물음에 딱딱하게 입매를 굳혔다.
모르다마다. 이곳이 어디인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이미 그의 지식의 범위를 넘어선 곳이었다.
“모르겠습니다.”
“이곳은 나의 공간이다. 내 권능으로 만들어진 곳이지. 내가 네게 부어준 물의 축복으로 딱 한 번 소환될 수 있는 공간이다.”
레일리는 엘라임이 자신에게 물의 축복이라는 짓을 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그때도 아무 도움이 안 된다고 느꼈던 기억이 있었는데,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왜 하필 시급한 이 때에 축복인지 뭔지가 소환되느냔 말이다.
“쯧쯧.”
엘라임이 점점 싸늘해지는 레일리의 얼굴을 보다 혀를 찼다.
“내가 너에게 답을 찾을 거라 했던 것이 기억나느냐?”
“네.”
“답을 찾았느냐?”
“……방향은 알 것 같습니다.”
레일리의 대답에 엘라임이 입술을 올렸다.
“이 공간은 내 능력의 극히 일부를 담아 만든 것이다. 나는 너에게 길을 알려주기 위해 존재하는 허상이다. 실체가 아니지.”
엘라임은 손을 크게 휘저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 무언가가 그들이 있는 곳으로 둥둥 떠올랐다.
레일리는 눈을 크게 떴다. 그가 그토록 찾던 황제의 홀이었다.
엘라임의 푸른 입술이 짙게 호선을 그었다.
“이곳에 담긴 나의 능력은 시간이다. 너에게 가장 필요할 것 같았으니…… 자!”
엘라임이 양팔을 크게 펼쳤다. 물이 크게 출렁였다.
“이곳에 있는 이상 모든 시간은 멈춰 있다. 아무것도 흘러가지 못해. 너의 앞에 있는 숙명도 마찬가지다. 이곳에서 힘을 쓸 수 있는 것은 오직 나의 축복을 받은 너 하나뿐. 신룡의 유산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한다.”
레일리는 눈을 부릅떴다.
엘라임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공간은 적어도 안티매직의 권역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는 마나를 움직여 보았다. 그의 심장에서 샘솟는 강대한 마나가 금세 그의 말을 들었다.
손바닥 위로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그럼.”
엘라임의 옷자락이 발끝부터 물보라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건투를 빌지. 부디 답을 찾아 나와 그 불쌍한 아이의 숙원을 이루어주길 바라네.”
말을 마친 엘라임의 잔상이 모두 사라졌다.
‘불쌍한 아이.’
엘라임이 가리키는 불쌍한 아이란 이 세상에 그녀뿐이다.
루시테.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레일리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녀를 떠올리자 레일리의 은빛 눈동자에 한층 강한 의지가 담겼다.
레일리는 거침이 없이 앞으로 나아가 황제의 홀을 잡았다.
그는 홀의 가장 위에 달린 검은 구슬을 꽉 쥐었다. 그리고 예고도 없이 공격을 시작했다.
아무 기교도 없이, 오직 순수한 마나로만 찌르는 공격.
물로 이루어진 공간에 거대한 파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물이 잘게 떨렸고 레일리의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검은 구슬과 닿아 있는 그의 손에서 흰 스파크가 거세게 번쩍거렸다.
구슬은 레일리의 마나를 미친 듯이 빨아들였다. 마치 끝이 없는 포식자처럼 레일리의 마나를 잡아먹는 것 같았다.
‘그래. 누가 이기나 보자고.’
레일리는 사나운 눈으로 끝없이 마나를 쏟아 부었다.
마나가 그의 심장에서 나브레의 유산 속으로 쑥쑥 뽑혀 나갔다.
“크윽.”
레일리의 옷자락과 머리칼이 미친 듯이 펄럭였다. 공간이 깨질 것처럼 크게 일렁거렸다.
레일리는 당장 쓰러질 것처럼 지치고 미칠 것 같았음에도 의식의 끈을 놓지 않았다.
오로지 나브레의 유산이 깨지기만을 기다리며 그것이 그의 마력을 빨아들이도록 내버려두었다.
아니, 오히려 더 잘 빨아들일 수 있도록 힘을 가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브레의 유산과 레일리 사이의 치열한 공방이 계속되는 동안 레일리는 영겁의 시간이 흐른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도저히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것만 같았을 때.
빠지지직.
그의 손 안에서 구슬이 균열이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빠드드드득.
구슬에서 균열이 가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레일리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그리고 마침내.
펑!!
레일리의 손 안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검은 구슬이 터져나가 흔적도 없이 바스라져 연기가 되어버렸다.
레일리는 손을 덜덜 떨었다.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아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를 휩싸고 있던 물의 공간이 순식간에 메말라갔다.
쏴아아아아.
거센 파도가 치는 소리가 들리며 공간이 소멸했다.
모든 게 한 점이 되어 사라져버리고 나니 레일리의 손에 딱딱하고 차가운 바닥이 닿았다. 레일리는 고개를 높이 들었다.
폭발환으로 인해 지붕이 날아가 버린 그곳에는 푸르고 청명한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천년이 넘도록 유지되었던 반투명한 구는 온데간데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드디어.”
레일리는 주먹을 꽉 쥔 채 고개를 숙였다.
드디어 모든 숙원이 끝이 났다. 안티매직이 완전히 소멸된 것이다.
그때 그가 있는 곳으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굴러왔다.
레일리는 힘겹게 그것을 집어 들었다. 선명하게 반짝이는 은빛의 작은 구슬이었다.
레일리는 한눈에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나브레가 남긴 유산의 진짜 핵심이었다.
그것을 둘러싸고 있던 검은 구슬이 안티매직을 이루는 마법진과 보호마법으로 점철된 결계라고 한다면.
이 은빛 구슬은 그것을 유지하는 나브레의 진짜 힘이었다.
은빛의 구슬 속에서 넘쳐흐르는 드래곤의 마나가 느껴졌다.
레일리의 심장에 흐르는 마나와 같은 결의 힘이었다.
레일리는 구슬을 주먹으로 꽉 쥐곤 몸에 힘을 주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이곳에서 할 일이 모두 끝났으니 더 이상 있을 필요가 없었다.
모든 기력을 소진하여 몸은 쇠약해져 있었지만 정신만은 또렷했다.
그 어느 때보다 가볍고 날아갈 것 같았다.
레일리는 자유였다.
그는 넘칠 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안티매직이 없는 푸른 하늘 아래에서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레일리는 마나를 가동했다.
힘이 없었지만 드래곤 하트나 다름없는 그의 심장은 다시금 마나를 생성해냈다.
레일리는 순식간에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안티매직이 없으니 모든 마법이 자유롭게 가동되었다.
그는 그대로 이동해 마법사들의 거처로 향했다.
루시테의 동생이라던 소녀가 있는 방 앞으로 내려섰다.
엘라임의 말로는 그가 있었던 물로 이루어진 특수한 공간은 시간의 흐름이 없는 곳이라고 했다.
그러니 아마 시간은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그 안에서 사투하던 레일리는 일주일이라도 흐른 것 같았지만 바깥의 시간은 그대로일 터였다.
레일리는 손을 뻗어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데리러 왔습니다.”
문 안쪽에서 성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곧 문이 벌컥 열리고 보랏빛 눈에 주홍빛 머리칼을 한 소녀가 튀어 나왔다.
루시테와 닮은 데라고는 눈동자 색밖에 없는 그녀의 이복동생.
“오셨군요!”
시드니아가 기뻐 발을 구르며 레일리를 맞이했다.
“갑자기 뭐가 폭발하는 소리가 하늘을 울려서 너무 무서웠어요! 하지만 꾹 참고 기다렸답니다. 정말 다행이에요!”
시드니아가 숨 가쁘게 내뱉었다.
레일리는 시드니아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루시테가 당신을 이곳으로 보냈다고 했었지요?”
“네.”
루시테 이야기에 시드니아가 퍼뜩 몸을 굳혔다. 시드니아는 여전히 레일리가 무서웠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되지 않고, 무엇보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싸늘하기만 했으니.
그러나 루시테가 레일리 아사드에 대해 확신을 갖고 이야기했더랬다.
그가 반드시 그녀들을 구해줄 것이라는 확신.
시드니아는 오로지 루시테의 말만을 떠올리며 다시금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언니가 레일리님께 찾아가서 모든 일을 설명하고 부탁하라고 했어요.”
레일리는 눈에 이채를 띄었다.
“무슨 부탁을 하라고 했습니까?”
“그…… 저를 산 중턱 하우스로 보내주세요. 레일리님께 부탁드리면 데려다주실 거라고 했어요. 저는 그거면 돼요.”
“산 중턱 하우스 말입니까?”
레일리는 입술을 올렸다. 실로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 아닌가. 그리운 냄새가 물씬 묻어나는 이름이었다.
언제나 루시테가 반겨주던 따스한 그곳.
“네! 산 중턱 하우스요!”
시드니아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언니가 그곳에 가면 안전할 거라고 했어요. 부탁이에요. 저를 그곳으로 데려다주세요.”
“그러겠습니다.”
레일리는 미소를 머금은 채 시드니아의 어깨를 잡았다.
“잠시 어지러울 수 있습니다.”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들의 발아래로 흰 빛무리가 맴돌았다.
시드니아와 레일리는 순식간에 빛무리 안으로 빨려 들어갔고, 사라졌던 그들이 다시 나타난 곳은 산 중턱 하우스로 향하는 오르막의 끝이었다.
“따라오십시오.”
레일리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시드니아가 따랐다.
“와아.”
시드니아는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따스하고 아름다운 집이 그녀의 눈앞에 펼쳐졌다.
흰색의 낮은 울타리 뒤로 푸른 잔디밭, 그 뒤로 여름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수국과 해바라기, 라벤더가 활짝 핀 채 그녀를 맞이했다.
꽃내음이 짙었다.
꽃이 핀 정원의 뒤쪽으로는 그림 같은 이층집이 있었다.
푸른 페인트로 창틀과 지붕이 칠해진 작은 집은 동화 속에서 튀어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아름다웠다.
“이, 이곳이 산 중턱 하우스군요.”
루시테가 이야기한.
시드니아는 홀린 듯 집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이곳만은 안전하고 아늑해 보였다.
루시테의 말대로 평생 메이븐에서 도망쳐 살 수 있을 만한 곳 같았다.
누구도 쉬이 찾아오지 않는 한적하고 평온한 곳.
그때 산 중턱 하우스의 문이 벌컥 열리고 에단이 뛰어 나왔다.
인기척이 나서 내다봤다가 레일리를 발견한 것이다.
“레일리님!”
에단이 기쁜 얼굴로 멈추지도 않고 정원의 입구까지 달려왔다. 에단은 그새 또 자라서 이제 제법 소년티를 벗어가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에단 군.”
레일리는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그 역시 루시테가 소중하게 여기는 그녀의 가족들이 반가웠다.
“어?”
에단이 문을 열고 레일리를 맞이하다 그의 옆에 서 있는 소녀를 보았다.
“이분은 누구십니까? 저희 아가씨는요?”
에단은 루시테는 없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저, 저는 루시테 언니의 동생 시드니아입니다!”
시드니아는 가슴에 손을 올리고 외쳤다. 그녀의 볼이 긴장으로 상기되었다.
“루시테 언니가 이곳에 가서 지내라고 했어요!”
“아가씨가요?”
에단은 눈을 가늘게 뜨고 보랏빛 눈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시드니아는 긴장하여 양손을 맞잡고 눈을 깜박거렸다.
“루, 루시테 언니가 저더러 이곳으로 가라고 했어요…….”
시드니아의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레일리 님! 저희 아가씨는 어떻게 된 겁니까?”
에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에단은 산 중턱하우스를 지키며 그간 자나 깨나 루시테 걱정뿐이었다.
레일리가 루시테와 함께 오지 않은 것이 몹시도 의아했고, 그의 주인 아가씨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가 싶어 심히 걱정되었다.
“오빠! 레일리 님이 오신 거야? 아가씨는?”
리브가 뒤늦게 따라 나와 정원을 가로질러 달려왔다.
“오랜만입니다. 리브 양.”
“안녕하세요!”
리브가 환하게 천진한 웃음을 지었다.
“저희 아가씨는 같이 안 오셨나요?”
리브는 인사를 하자마자 두리번거리며 루시테를 찾았다.
“설명하자면 깁니다만…… 아직 일이 남았으니 일단 안으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물론이에요!”
리브는 환영한다는 의미로 양팔을 벌렸다.
“제가 너무 오래 두 분을 밖에 세워두었군요. 어서 들어오십시오!”
에단이 그제야 황급히 시드니아와 레일리를 산 중턱 하우스 안으로 이끌었다.
레일리는 리브가 차를 권하는데도 앉지 않고 바로 층계로 향했다.
“어디 가시나요?”
리브와 에단이 레일리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집 안을 두리번거리며 발을 동동 구르던 시드니아도 잽싸게 그들의 뒤를 따라왔다.
“노이를 찾고 있습니다.”
“노이요! 노이는 아가씨 방에서 책을 읽고 있어요!”
리브가 신이 나서 레일리를 앞질러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노이! 노이! 레일리 님이 오셨어!”
리브는 산 중턱 하우스가 떠나가라 노이를 불렀다. 리브의 커다란 목청에 노이가 뒤뚱거리며 방을 나왔다.
“레일리?”
노이가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레일리를 불렀다.
“세, 세상에! 용?!”
시드니아는 노이를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반짝이는 은빛 비늘의 작은 용이 눈앞에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은 것이다.
루시테의 산 중턱 하우스는 신기한 게 끊이지가 않았다. 제 또래의 아이들부터 멸종했다는 용까지.
“레일리 님. 저 사람 정말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에단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시드니아는 벌린 입을 딱 다물다 호흡이 목에 걸렸다.
히끅!
목을 타고 딸꾹질이 나왔다.
레일리는 딸꾹질을 하는 시드니아를 흘끗 보곤 고개를 돌렸다.
“루시테가 직접 이곳으로 보냈으니 괜찮을 겁니다. 제가 아닌 루시테의 판단입니다.”
“아가씨가 보내신 거라면야.”
에단은 두말없이 레일리의 말에 수긍했다.
“저분이 누구신데요?”
리브가 눈을 깜박였다.
“아가씨의 동생이래.”
에단이 대꾸했다.
“어! 정말!”
리브는 눈을 크게 떴다.
“아가씨가 그때 그 천사 같은 사람 말고도 동생이 둘 더 있다고 했었는데! 그 사람인가 보다!”
리브가 손뼉을 쳤다.
시드니아는 연신 딸꾹질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루시테의 동생이 맞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하여.
“자, 그럼. 노이.”
“뇽?”
레일리의 부름에 노이가 얼빠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노이도 갑자기 나타난 루시테의 여동생 때문에 당황스러운 탓이었다.
“이곳은 좁으니 나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레일리는 그대로 노이를 데리고 순간이동을 해 산 중턱 하우스 정원 밖, 공터로 나갔다.
에단과 리브는 놀라 뛰어서 창문으로 달려가 고개를 내밀었다.
뒤늦게 따라온 시드니아도 함께 고개를 내밀었다.
레일리가 공터로 나가 노이에게 무언가를 내밀고 있었다.
“자, 받으세요.”
레일리는 반짝이는 은빛 구슬을 노이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야? 구슬!”
노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전에 먼저.”
레일리는 손을 뻗어 노이의 이마에 손을 댔다.
그는 눈을 감고 무어라 긴 주문을 외웠다.
용들의 언어, 용언으로 이루어진 주문이었다.
레일리는 인간이지만 반은 드래곤이라 봐도 될 정도로 용종에 가까운 인간이다.
용언은 그가 드래곤 하트의 힘을 깨우치며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 언어였다.
인간이 아무리 지식으로 알려 해봐도 알 수 없으며, 배울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언어였다.
용언에서 마나에 대한 근본적인 깨우침이 나오며, 드래곤의 모든 마법이 나온다. 인간이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그 언어를 레일리가 노이에게 전해주려 하는 것이었다.
긴 주문이 끝나고 노이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이상해.”
노이가 손바닥을 펴 보였다.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은빛의 기운이 노이의 작고 통통한 손바닥 위에서 넘실거렸다.
“이게 뭐야?”
노이는 제 심장에서 샘솟는 마나의 존재를 처음 느꼈다.
마나로 가득 찬 새로운 세상이 노이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원래는 당신의 부모가 해주었어야 할 일입니다만. 제가 직접 해드리기로 루시테와 약속을 했습니다.”
레일리는 노이에게 답을 해주곤 다시 노이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이번에는 용의 지혜를 전해줄 차례였다.
레일리는 이번에도 눈을 감고 용언으로 중얼거렸다.
오로지 용언으로만 가능한 마법이었기에 많은 집중력이 필요했다.
노이도 덩달아 인내심 있게 눈을 감고 가만히 기다렸다.
레일리의 주문이 끝나자 노이의 머릿속으로 커다란 세계가 들어섰다.
마치 수많은 책으로 가득 찬 거대한 도서관이 생긴 듯했다.
드래곤들 사이에서만 전달되는 용종의 지혜였다.
이것 역시 레일리가 드래곤의 지혜를 깨달은 후 저절로 알게 된 것이었다.
인간은 절대로 접근할 수 없는 지혜. 한 인간의 머릿속에 보관할 수 없는 양의 지식이었다.
아무리 레일리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그는 근본은 인간. 용종의 지혜를 모두 깨우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노이는 다를 것이다.
노이는 진짜 용이니 레일리보다 더 넓은 지식의 보고를 열어갈 수 있을 터다.
레일리는 미소를 지으며 노이의 이마에서 손을 뗐다.
노이는 눈을 크게 떴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지식이 흘러들어왔다.
자신의 존재. 인간들의 세상. 드래곤이 축적해온 모든 역사와 지식이 쉼 없이 머릿속에서 넘실거리고 있었다.
노이가 동공이 세로로 찢어진 은빛 눈을 깜박였다.
천방지축 같았던 노이의 분위기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노이의 눈빛에 용종 특유의 지혜로운 기운이 떠올랐다.
처음으로 깊은 사고를 시작하며 잠시 아무 말이 없던 노이가 지식의 보고를 깨달은 이후 첫 마디를 꺼냈다.
“레일리. 루시는?”
노이는 뾰족한 송곳니를 드러내며 다시 말했다.
“루시는 지금 어디에 있어?”
노이가 가장 먼저 한 생각은 루시테에 대한 것이었다.
아무리 한순간에 지혜와 용언 마법을 깨닫고 드래곤답게 총명해졌다 할지라도 노이는 노이.
본질적인 노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루시테가 노이의 생명의 은인이자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노이는 루시테가 집을 비운 내내 루시테를 기다려왔다.
루시테는 노이에게 있어서 언제나 함께하고 싶은 가족이었다.
그렇기에 노이가 가장 먼저 루시테에 대한 걱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말해줘. 루시는 무사해?”
노이가 대답이 없는 레일리를 향해 재차 물었다.
“루시는…….”
노이의 물음에 레일리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이전의 노이라면 다독여서 기다리라 충분히 말할 수 있겠지만 지금의 노이에게는 그러기가 어려울 터였다.
“루시는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어?”
루시테의 행방과 안위를 묻는 노이의 표정이 단호했다. 마지막 용의 은빛 눈동자에서 꼭 듣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묻어났다.
“만약 루시가 위험하다면 나도 데려가. 이번에는 내가 루시를 구해줄 거야.”
노이가 날카로운 이빨을 딱딱 부딪쳤다.
노이를 잠시 바라보던 레일리는 쥐고 있던 은빛 구슬을 노이에게 내밀었다.
“이게 뭐지?”
노이가 짧은 목을 갸웃거렸다.
“삼키세요. 이걸 삼키면 루시테를 구할 수 있을 만한 힘을 갖게 될 겁니다.”
노이는 레일리에게서 은빛 구슬을 받아들었다.
구슬에서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양의 마나가 느껴졌다. 그러나 엄청난 양의 마나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노이는 구슬에서 이상한 친숙함을 느꼈다. 익숙하며 그리운 기운이었다.
“레일리. 이게 대체 뭐야?”
“느끼셨나 보군요. 당신에게는 꽤 익숙할 겁니다. 같은 계열 드래곤이 제 심장에서 직접 마나를 모두 뽑아 만든 물건이니.”
노이는 눈을 찌푸렸다. 심장에서 마나를 모조리 뽑았다니. 지식 속의 드래곤이란 것들은 하나 같이 다 이상했는데.
이 구슬을 만든 녀석도 보통 드래곤은 아니었다.
“이걸 만든 드래곤이 누구인데?”
“실버 드래곤 나브레입니다.”
레일리의 대답은 간결했으나. 나브레라는 이름 속에는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이크릭스를 세운 초대황제이자 지금까지 신룡으로 추앙 받고 있는 이크릭스의 수호룡.
나브레가 누구인지는 노이도 명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노이의 머릿속에 있는 지식의 보고가 원하지 않아도 정보를 찾아다 주었으니.
노이는 손바닥 위의 은빛 구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한눈에 봐도 보통 물건이 아닌 데다 나브레의 유산이라니.
레일리가 어떻게 이것을 구해온 건지 노이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이런 귀한 물건을 나에게 줘도 되겠어? 네가 힘들게 구한 물건 아니야?”
노이는 레일리를 올려다보았다.
이 구슬만 있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무리 마나에 무지한 자라도 세상을 호령하는 대마법사가 단숨에 될 터였고.
이미 마법사인 자가 얻게 된다면 기존의 수준을 몇십 배, 아니 몇백 배는 뛰어넘는 힘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드래곤의 무한한 영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레일리가 이런 것을 선뜻 자신에게 내놓는다는 것이 노이는 무척 의아했다.
노이의 물음에 레일리는 고민도 하지 않고 쉽게 대답했다.
“저는 그 따위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레일리는 오히려 그것을 노이에게 떠넘겨 후련하다는 얼굴이었다.
안티매직으로 자신을 괴롭혔던 나브레의 구슬 따위 소유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으므로.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었다.
레일리는 짙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루시테와 약속했습니다. 당신을 성장시켜주기로. 그러니 감사는 루시테에게 하시지요. 루시테가 당신이 드래곤으로서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길 바라니까요.”
“그렇군.”
루시테의 이야기에 노이는 쉽게 납득했다. 그녀가 원한다는데 자신에게 나쁜 것일 리가 없었다.
노이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은빛 구슬을 입안에 넣고 삼켰다.
사아아아아아.
환한 빛이 노이를 감쌌다.
은빛의 구슬은 순식간에 풀어져 노이의 몸속으로 스며들어 한 곳을 향했다. 드래곤 하트.
같은 실버 드래곤의 기운이라 그런지 은빛의 기운이 날뛰듯 노이의 심장으로 파고들어갔다.
마치 온전히 제집을 찾은 것처럼 마나가 노이의 심장에 안착했다.
빛에 감싸인 노이의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지금까지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던 노이의 몸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드래곤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존재보다도 마나에 가까운 존재이다.
그런 드래곤이 성장하려면 제대로 된 먹이가 필요한데, 바로 이 세상에 충만한 마나이다.
그 먹이가 드디어 잠들어 있던 노이의 기운을 깨우고 노이를 성장시켰다.
마침내 환한 은빛의 기운이 모두 갈무리 되었고 감추어졌던 노이의 실루엣이 드러났다.
카아아아아아아아!
커다란 은빛의 드래곤이 하늘을 향해 크게 포효했다.
모든 것을 창문으로 지켜보던 에단과 리브, 시드니아가 놀라 집안에서 뛰어나왔다.
“노이가 어떻게 된 거예요?!”
“노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리브와 에단이 레일리가 있는 곳으로 달려와 외쳤다.
“괜찮습니다. 위험하지 않습니다.”
레일리가 놀란 에단과 리브를 다독였다.
노이가 날개를 크게 퍼덕였다. 광풍이 휘몰아치고 모두의 머리칼과 옷자락이 미친 듯이 휘날렸다.
-에단! 리브! 정말 기분 최고야!
노이가 드래곤으로서의 체통도 잊고 소리쳤다.
포효하는 것처럼 들리는 노이의 외침에 공기마저 저릿저릿했다.
노이는 날갯짓을 하더니 더 높이 올라가 한 바퀴를 돌았다.
리브는 손바닥으로 햇빛을 가리며 저 높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노이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노이가 맞긴 한 것 같아요. 하는 짓이 그대로예요.”
“그렇네.”
리브와 에단은 레일리가 설명하지도 않았는데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루시가 제게 부탁했던 일이었습니다. 덕분에 노이가 성장하게 된 것입니다.”
“뭔진 몰라도 노이한테 잘된 거죠?”
“아가씨가 한 일이라면 뭐 좋은 일이겠죠.”
레일리가 꺼낸 루시테라는 이름에 리브와 에단은 쉽게 대답했다.
그들이 갖고 있는 루시테에 대한 신뢰는 절대적이었으니, 좋은 게 좋을 일이라며 쉽게 납득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리브! 에단!
노이가 신나게 날개를 펄럭이며 다시 그들이 있는 곳으로 내려왔다.
“노이. 폴리모프를 써 보십시오. 이제 할 수 있을 겁니다.”
-폴리모프?
노이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천천히 땅에 내려섰다.
“아직 서투르시니 제가 조금 도와드리겠습니다.”
레일리가 다가가 노이의 이마를 툭 건드렸다.
어떤 이미지들이 노이의 머릿속에 펼쳐졌다.
-아하! 알겠다!
노이가 그르렁거렸다.
-폴리모프!
노이는 마나를 가동하며 시동어를 외쳤다.
커다랗던 드래곤의 몸체가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줄어들고 줄어들어 사람의 모습이 되어갔다.
곧 은빛 비늘과 커다란 송곳니를 가진 드래곤은 온데간데없고, 그 자리에는 은빛 머리칼과 은빛 눈을 가진 아름다운 소년이 서 있었다.
17세 즈음. 에단과 비슷하나 조금 더 작은 소년이었다.
그런데.
“꺄악!”
리브가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렸다.
“꺄아아악!”
시드니아 역시 덩달아 비명을 지르며 눈을 가렸다.
갑자기 나타난 은빛 머리 소년이 발가벗고 있었기 때문에.
레일리는 마법 주머니에서 로브를 꺼내 노이에게 건넸다.
“입으십시오. 인간의 형체이기 때문에 옷을 걸쳐야 합니다.”
노이는 그때까지 자신이 발가벗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노이는 레일리가 말하고서야 깨닫고는 얼른 로브를 몸에 둘렀다. 모든 것이 신기한 것뿐이었다.
“아직 다 큰 건 아닙니다. 당신은 이제 해츨링에서 벗어난 단계, 시간과 마나가 당신을 더 성장시켜줄 겁니다.”
노이는 레일리의 가르침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머릿속에 지식이 있다고는 하나 적재적소에 꺼내어 펼쳐보기에는 아직 한참 부족했기 때문에, 노이는 아직 어리숙한 소년 용이었다.
“아! 루시!”
노이는 갑자기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루시테에 대한 걱정은 언제나 그의 가슴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어서, 잠깐 잊었다 하더라도 금세 떠올랐다.
“루시를 찾으러 가야 해! 레일리. 알려줘. 루시는 지금 어디에 있어?”
소년의 은빛 눈이 걱정으로 물들었다.
루시테에 대한 이야기에 레일리의 표정도 덩달아 가라앉았다.
그녀가 부탁한 이곳에서 할 일을 모두 마쳤으니 이제 그녀를 찾으러 가야 할 때였다.
“그곳은 이제 해츨링에서 벗어난 당신이 가기에는 위험합니다. 제가 루시테를 반드시 찾아오지요.”
레일리는 노이를 다독이려 했다.
“아니!”
노이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나는 루시를 구하러 갈 거야. 루시가 위험하다는 데 이곳에서 가만히 기다리기만 할 수는 없어.”
노이는 레일리가 말린다면 그의 뒤를 억지로라도 쫓아서 따라올 기세였다.
레일리는 은빛 눈을 내리깔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고집불통 소년 용을 막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지금 그는 몹시 지친 상태로 가까운 거리를 텔레포트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사실 감추고 있었으나 손이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