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현실은 비록 하루도 채 가지 않았으나 엘라임이 만든 공간에서 머물렀던 레일리의 시간은 일주일에 가까웠다.
그 시간 동안 잠 한 숨 자지 않고 황제의 홀을 부수기 위해 끝없이 마나를 쏟아붓고 정신력을 유지했더랬다.
레일리는 지금 상태로는 전쟁터의 한 가운데에서 노이와 루시테를 모두 지킬 자신이 없었다.
“일단 들어가서 제대로 옷을 입는 게 좋겠군요.”
“좋아! 그리고 나서 나를 데려가야 해.”
노이가 앞장서서 집 안으로 향했다.
레일리와 노이를 번갈아 쳐다보던 리브와 에단, 시드니아는 누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노이의 뒤를 따라 집으로 향했다.
그 뒤를 레일리가 천천히 걸었다.
‘어서.’
어서 루시테를 구하러 가야 하는데. 너무 이곳에서 힘을 많이 쓴 모양이었다.
레일리는 문의 입구에 서서 휘청이며 문간을 짚었다.
“레일리님? 괜찮으십니까?!”
에단이 놀라 레일리에게 달려왔다.
레일리의 시야가 어두워졌다.
나브레의 유산인 은빛 구슬까지 무사히 처리해 긴장이 좀 풀려서였을까.
엘라임의 공간에서 쌓였던 모든 피로가 한 번에 몰려왔고 레일리는 그대로 기우뚱 쓰러지고 말았다.
“레일리님!”
에단이 놀라며 황급히 쓰러지는 레일리의 몸을 받았다.
“저, 저도 좀 쉬고 싶어요…….”
슬슬 체력에 고비가 온 시드니아 역시 중얼거렸다.
그녀의 몰골도 말이 아니었다.
꼼짝없이 바깥에서 밤을 지새우고 제대로 먹지 못한 채 레일리를 찾아다녔던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온 것이다.
갑자기 성장해 아직 힘이 안정되지 않은 노이와 지쳐 쓰러진 레일리, 쓰러지기 직전인 루시테의 동생.
리브와 에단은 바쁘게 움직였다.
레일리를 침대로 옮기고 시드니아를 방으로 안내했다.
리브는 시드니아에게 먹일 속 편한 음식을 준비하러 부엌으로 달려갔다.
환자들을 살피느라 변화한 노이에게 감탄하고 있을 시간도 없었다.
바쁜 건 노이도 마찬가지였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루시테를 구하러 가고 싶었지만 레일리가 쓰러지는 바람에 그럴 수 없게 되었다.
노이는 가만히 앉아 깊은 명상에 잠겼다.
사실은 노이도 알고 있었다.
지금의 자신은 너무 어지러워서 레일리와 루시테에게 짐이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노이는 심장에 있는 마나를 수족처럼 움직이기 위해 눈을 감고 집중했다.
레일리가 깨어날 때까지만이라도 달라진 몸에 익숙해지기 위함이었다.
소란스러운 산 중턱 하우스의 뒤로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붉은 노을이 명상에 잠긴 노이의 얼굴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 * *
마법 대제국 이크릭스와 신성 대제국 메이븐의 전쟁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승기를 잡고 있는 국가는 명백해 보였다.
대신관을 되찾으리라는 굳건한 목표는 메이븐의 군인들을 똘똘 뭉치게 했다.
그들은 엄청난 사명감으로 이크릭스 제국군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메이븐에는 뛰어난 실력의 성기사들이 있었고 누구보다도 강한 검술을 선보이는 소드마스터 황태자가 있었다.
어디로 보나 메이븐 측에서 곧 이크릭스를 찍어 누를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갑자기 상황이 알 수 없게 되었다. 이크릭스에서 1급 사형수라는 패를 꺼내든 것이다.
이안이 소드마스터라는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 대륙에서 가장 강한 검사 타이틀을 갖고 있던 사람.
전 화이트울프의 기사단장이었으며 소드마스터인 세드릭 디에고가 전쟁터에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전쟁천재라는 소문에 걸맞게도 세드릭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전술을 펼치며 상황을 바꿔갔다.
여전히 승기는 메이븐에서 잡고 있었음에도 이제는 결과를 예측하기가 어려워졌다.
두 제국은 치열한 공방을 펼치며 피 튀기는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길어질수록 불리한 건 두 나라 모두 마찬가지였다.
전쟁 중인 상황에도 나라에서 발생하는 각종 문제가 시시각각 이안에게 전해졌다.
비는 여전히 단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고 필요한 물을 호수와 강에서 간신히 보급하는 실정이었다.
대평원의 곡식이 메말랐고 식량 조달에도 점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백성들의 삶은 더욱 심각했다.
물이 끊기니 각 지역에서 전염병이 창궐했다. 전염병은 심각한 문제였다.
전쟁 중이 아니라면 당장 전염병부터 잡았을 텐데, 지금 이안에게 그럴 여유가 없었다.
당장 전쟁으로 인해 발생하는 환자를 돌보기도 어려웠다.
물이 부족하니 상처를 깨끗하게 소독할 수 없었고 부상병들의 상처는 그대로 썩어들어가도록 방치되었다.
문제는 메이븐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크릭스도 마찬가지로 메이븐과 다를 바 없는 각종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다.
알렉산더가 신경 쓰지 않고 있을 뿐이지 이크릭스 역시 나라 안팎에서 곪아가는 실정이었다.
“모두 정비하라! 진지를 이동한다!”
“이동한다!”
한밤중 별안간 이크릭스 군대가 병장기를 들고 이동할 준비를 했다.
“따라오시오!”
루시테를 감시하던 두 병의 병사가 루시테의 손을 포박한 밧줄을 잡아당겼다.
루시테는 지친 얼굴로 비틀거리며 병사들에 이끌려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사방에 암울한 기운이 가득했다.
병사들은 피로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몹시 예민했다. 하나같이 표정이 어둡고 그늘져 있었다.
루시테는 슬픈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부상자들이 힘겹게 대열에 합류하고 있었다. 다리 한쪽을 잃은 사람. 팔을 잃은 사람.
그보다 더 심하게 다친 사람은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해 그대로 남겨졌다.
부상으로 신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사방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매일같이 싸우는 소리와 고통에 찬 울부짖음을 들으니 그녀마저 이상해질 것 같았다.
전쟁은 루시테의 상상 이상으로 끔찍했다.
하루하루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를 불안 속에서 견뎌야 했다.
“힘내세요! 여러분. 당신은 고통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때 암울한 이크릭스 진지의 한복판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연보랏빛 머리칼을 흩날리는 여자가 돌아다니며 병사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비올레타, 루시테의 이복동생은 사나운 눈매를 감추고 눈꼬리를 휜 채 입으로만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아픈 부상자를 향해 성력을 사용했다.
보랏빛 기운이 비올레타의 손을 통해 부상자의 상처 부위에 닿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상처 부위가 씻은 듯이 나았다.
“성녀님! 성녀님이시다!”
비올레타를 본 한 병사가 외쳤다.
“성녀님! 이크릭스에 은총을!”
“제 상처도 봐주십시오! 제발! 성녀님! 저를 한 번만 돌아봐 주세요!”
병사들이 비올레타를 성녀라 부르짖으며 은총을 갈구했다.
비올레타는 같은 볼모 처지였음에도 성력을 사용함으로 자유롭게 진지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녀는 하루하루 영향력을 키워가며 이제 나타나기만 해도 성녀라는 칭송을 받았다.
루시테는 우울한 얼굴로 비올레타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 고개를 돌렸다.
비올레타가 신성력을 갖고 있든 말든, 성녀 소리를 듣든 말든 사실 그건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저 어서 이 전쟁이 끝나기를.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고통스러워서 누가 이기든 전쟁이 어서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빨리빨리 걸으시오!”
루시테를 끌고 가던 기사가 밧줄을 확 끌어당겼다.
“아!”
몸이 확 끌어 당겨지는 바람에 그녀의 몸이 비틀거리더니 바닥으로 쓰러졌다.
루시테가 넘어져 걸음을 지체하자 기사들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그들은 더 거칠게 밧줄을 확 끌어당겼다.
루시테는 흙바닥에서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계속 이런 식으로 이동하다 보니 옷은 원래의 색을 알 수 없어질 정도로 더러워지고 군데군데 구멍이 났다.
다리와 팔에는 생채기가 가득했고 성한 곳이 없었다.
“빨리 걸으란 말이오!”
기사의 재촉에 루시테는 더욱더 걸음을 빨리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저 고통스러웠고.
산 중턱 하우스에 있는 가족들이 그리웠다.
그리고 레일리…….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되어주던 그가 몹시 그리웠다.
‘시드니아는 레일리를 만났을까.’
시드니아에게 쉽지 않을 일이었을 터다.
벌써 며칠이 흘렀는데 소식을 도통 알 수가 없으니 괜한 일을 부탁한 게 아닌가 걱정도 되었다.
어쩌면 루시테의 부탁 때문에 시드니아가 위험에 처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루시테는 입술을 깨물었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이 암울했다.
모든 게 자신이 메이븐을 도망쳐 이크릭스로 갔기 때문에 일어난 일 같아 괴로웠다.
지난 세 번의 생애처럼 메이븐에서 망령처럼 살다가 살해를 당해야 했던 걸까.
모든 게 그녀가 운명을 거부한 탓인 것만 같았다.
대신관 렘브란트가 그녀와 같은 처지로 추락한 것도, 전쟁이 터진 것도 모두 자신의 잘못 같았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괴로운 마음에 루시테는 고개를 푹 숙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뒤쪽으로는 숲이 있고 근처에 깊지 않은 강을 앞둔 장소에서 이크릭스의 군대는 야영할 준비를 했다.
전술도 전술이지만 물이 부족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제국군은 천막을 쳤고 횃불을 켰다.
까만 밤하늘 아래 여기저기에서 횃불이 타올랐다.
야영 준비가 거의 끝나갔고 순찰조를 제외한 나머지 병사들은 긴장감 속에 눈을 붙이며 피로를 풀었다.
루시테 역시 다시 허름한 막사에 갇혀 기둥에 묶였다.
루시테는 기둥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몹시 피로했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루시테는 눈을 감은 채 산 중턱 하우스에 있을 가족들과 레일리를 생각했다.
리브와 에단과 노이. 레일리…….
끔찍한 기분이 그래도 약간은 나아지려 했다. 루시테는 부르튼 입술로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 찰나의 미소가 무색하게도.
쾅!!
갑자기 밖에서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루시테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바깥이 소란스러웠다.
콰앙!!
무언가 터지는 소리가 또 들렸다.
“적습이다!!”
“메이븐이 쳐들어왔다!!”
병사들이 뛰어다니며 외쳤다.
“젠장! 볼모를 대피시켜! 볼모가 죽으면 곤란하다!”
루시테가 있는 막사의 근처에서 소리 지르는 알렉산더의 목소리가 들렸다.
루시테를 감시하던 기사 두 명이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그녀를 기둥에서 풀어 밧줄을 잡아당겼다.
“일어나시오!”
루시테는 일어나 그들을 따라 비척비척 막사 안을 나왔다.
루시테는 포박된 채로 걸음을 옮기다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머리 바로 옆으로 무언가 날아왔다.
쐐액!
두꺼운 화살이 루시테 근처에 있던 병사에게 날아왔다.
병사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화살에 맞아 뒤로 쓰러졌다.
쿵!
병장기가 바닥에 부딪히는 시끄러운 소리가 울렸다.
루시테는 놀라 몸을 떨었다.
그녀가 있는 곳은 언제나 진영의 가장 끄트머리였기에 사람이 죽어 나가는 것까지는 안 봐도 되었다.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모습은 루시테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허억, 헉…….”
루시테의 호흡이 가빠졌다.
쐐액!
화살이 또 날아오고 근처에 있던 횃불이 화살에 맞아 쓰러졌다.
방금까지 루시테가 있었던 막사에 불이 붙었다.
화르륵 뜨거운 불길이 막사의 천막에 번져 하늘로 치솟았다.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사방에 자자했다.
저 멀리 눈에 띄는 검은 말이 다리를 치켜들며 울음을 내뱉었다.
히히히히히힝!
루시테는 기사들에게 끌려가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문득 검은 말에 앉아 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투구 때문에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환한 불길에 투구에 달린 보랏빛 깃털이 일렁였다.
루시테는 남자에게서 고개를 홱 돌렸다.
“빨리 걸으시오!”
급박스러운 상황 속에서 루시테를 포박한 기사들이 재촉했다.
루시테는 몸을 떨며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넘어져 있는 시체에 루시테는 몇 번이고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딱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루시테는 사람들이 눈앞에서 죽어 나가는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기사들은 자꾸 루시테를 평원의 한복판 쪽으로 끌고 가는 것 같았다.
그녀의 주변에서 병사들이 뛰어다니고 검을 부딪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펼쳐졌다.
“젠장! 쫓아오잖아!”
루시테를 끌고 가던 기사 한 명이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쫓아온다니. 무엇이?’
루시테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검은 말을 탄 조금 전 눈이 마주쳤던 기사가 검을 치켜들고 루시테가 있는 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기사는 제 앞을 가로막는 이크릭스의 제국군을 지푸라기 베듯 베어 넘겼다.
기사의 검에는 푸른 오러가 횃불보다도 더 환하게 맺혀 있었다.
“황태자다! 황태자가 단신으로 나타났다! 황태자를 공격하라!”
기사에게로 병사들이 달려들며 목청껏 외쳐대었다.
문득 검은 말을 탄 남자와 루시테는 또 눈이 마주쳤다.
푸른 눈. 남자의 눈동자는 선명한 푸른빛이었다.
푸른 오러 블레이드와 푸른 눈동자가 누구를 가리키겠는가?
이안.
이안이 틀림없었다.
루시테는 기사들을 따라 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어느 샌가 그녀는 기사들과 함께 뛰고 있었다.
그때 루시테의 옆으로 무언가 스산한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쉬이이이익!
긴 검이 루시테의 바로 옆을 스쳐지나가 루시테를 끌고 가던 기사의 몸을 찔렀다.
루시테는 놀라 우뚝 멈춰 섰다.
이안이 말을 몰고 달려와 기사를 찌른 검을 회수했다.
죽은 기사에게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투둑. 툭.
튀어오른 핏방울이 그녀의 볼을 타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루시테는 볼이 타들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
실제로 타들어 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느낄 만큼 뜨겁고 끔찍했다.
부우웅!
이안이 또 검을 휘둘러 루시테의 밧줄을 붙들고 있던 또 다른 기사를 공격했다.
기사는 검을 치켜들고 이안을 막으려 했으나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는 전투였다.
이안의 오러 블레이드는 기사의 검을 그대로 종이 자르듯 잘라버리고 기사를 베었다.
이안이 검을 치켜든 채로 루시테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으으…….”
루시테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에게서 멀어지고 싶었다.
그냥 이 모든 상황이 다 끔찍했다. 루시테는 온몸을 덜덜 떨며 몸을 돌려 마구 달렸다.
“루시테!! 거기 서!”
뒤에서 이안이 고함치듯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루시테 클라우디오!”
루시테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정신이 하나도 없고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루시테는 귀를 막고 소리 질렀다.
“오, 오지 마! 오지 마!!”
루시테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내저었다.
“이안 황태자!”
그때 루시테의 맞은편에서 커다란 덩치를 가진 붉은 머리의 남자가 달려왔다.
이안과 닮았지만 훨씬 거칠고 사나운 얼굴.
세드릭이 푸른 눈동자를 시퍼렇게 번뜩이며 검을 들고 나타났다.
세드릭은 어찌나 적을 베어 넘겼는지 온몸에 피칠갑이 되어 있었다.
그는 여전히 루시테를 알아보지 못하고 루시테의 옆을 지나쳤다.
세드릭의 몸에서 짙은 피비린내가 훅 풍겨왔다.
콰앙!
루시테의 바로 근처에서 두 소드마스터의 검이 맞붙었다.
엄청난 기의 파동이 퍼져나갔고 근처의 땅이 둘의 검이 지나갈 때마다 움푹움푹 패여 나갔다.
루시테의 보랏빛 머리칼이 마구 휘날렸다.
루시테는 그들에게서 멀어지기 위해 또 달렸다.
그러다 시체에 발이 걸려 얼마 도망가지 못하고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으, 으윽! 으아악!”
루시테는 귀를 막고 눈을 감고 비명을 질렀다. 그저 이 모든 것이 지독히도 끔찍했다.
“비켜! 루시테! 거기 서!”
이안이 악을 쓰며 루시테에게 다가오려고 했다. 그는 검을 휘두르며 분노에 차서 발광했다.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저주가 풀린 그의 루시테가 있는데 접근조차 할 수 없다니.
이안은 미칠 지경이었다. 그의 앞을 가로막는 것을 전부 치워버리고 싶었다.
누구 때문에 이 전쟁을 시작했는데 차지할 수가 없다니.
“루시테!!”
이안이 고함쳤다.
간신히 그녀의 소재를 알아내고 루시테가 있는 막사 근처로 군대를 끌고 쳐들어왔더랬다.
그러나 루시테의 막사는 너무 안쪽에 있었고, 이안 혼자 진지를 뚫고 혈혈단신으로 제국군의 깊은 곳까지 들어온 상황이었다.
그가 소드마스터이기에 가능한 일이지, 일반 검사였다면 불가능했을 터였다.
물론 일국의 황태자가 벌일 일은 아니었지만 그만큼 이안은 급했다.
하루 빨리 루시테를 구해내야만 한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세드릭은 만만치 않은 상태였다.
같은 소드마스터를 일반 병사들처럼 쉬이 쓰러뜨릴 수는 없었다.
이안의 실력이 더 우위에 있을지는 모르나 세드릭은 실력이 뛰어날뿐더러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기사였다. 경험 면에서 이안을 웃돌았다.
그간의 전투 중 한 번도 직접 맞붙을 기회 없이 전술로만 치열하게 싸웠던 둘이었다.
둘이 직접 만나 검을 부딪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장의 두 괴물이 검을 휘둘렀다.
쾅! 쾅!
검을 부딪칠 때마다 공기가 떨리고 대지가 진동했다.
주변의 병사들은 둘의 전투에 휘말려 개죽음을 당하지 않기 위해 미친 듯이 뒤로 물러났다.
세워져 있던 막사들이 쓰러지고 부서지고, 불이 붙고. 파편들이 날아다니고. 적군 아군 할 것 없이 시체를 밟고 넘어 다니고.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지옥이 있다면 이런 모습일까.
콱!
근처에 널브러져 있던 부상자가 갑자기 루시테의 발목을 잡았다.
“꺄아아악!”
눈을 감고 있던 루시테는 소스라치게 놀라 비명을 질렀다.
“사, 살려줘…… 살려줘 제발…….”
부상자가 루시테에게 애원했다.
루시테는 가쁜 호흡을 내쉬었다.
여전히 그녀의 얼굴에서는 조금 전 즉사한 기사의 피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머릿속이 뜨거웠다.
이 많은 사람이 비명을 지르고 고통받고 싸우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루시테는 천성이 마음이 약하고 다정했다.
아무리 강해지려 해봐도 어머니인 전대 대신관 에일란테에 물려받은 성품은 바뀌지 않았다.
루시테는 제 발목을 잡고 살려달라 비는 사람을 외면할 수도 없었고. 많은 사람의 비명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아아…….”
루시테는 머릿속에서 무언가 간신이 부여잡고 있던 이성의 끊이 뚝 끊기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냥 전부 다 지겨웠고, 전부 다 끝나버렸으면.
그렇다면 얼마나 좋을까.
전쟁 따위 없어져 버렸으면.
그러면 좋겠다.
루시테는 멍한 보랏빛 눈으로 제 발목을 잡고 있는 사람의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그녀는 주저앉아 있던 자세를 고쳐 천천히 무릎을 꿇었다.
“주신이시여.”
루시테는 멍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어떠한 예고도 없이 모든 성력을 끌어내어 그녀의 발목을 잡고 살려달라 사정하는 그 병사에게 쏟아부었다.
보랏빛 기운이 일렁이더니 별안간 눈이 멀 정도로 새하얀 빛이 폭발하듯 대지에 퍼져나갔다.
한밤중인데도 불구하고 온 세상이 대낮처럼 밝아졌다.
커다란 빛이 이 땅에 강림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빛은 대평원을 다 뒤덮고도 끝도 없이 퍼져나갔다.
투둑. 툭.
그 빛을 타고 하늘에서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여름 내내 오지 않던 비가 메말라 갈라진 땅과 아프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쏴아아아아!
한 방울씩 떨어지던 비는 어느새 세찬 비로 변했다.
평범한 비가 아니었다.
신성력을 머금은 빗줄기는 모든 것을 회복시켰다.
전장에 흩뿌려진 피를 씻기고 아프고 다친 사람들을 회복시켰다.
메마른 땅에 싹을 틔우고 말라가는 강을 불렸다.
루시테의 얼굴에 흠뻑 젖어 있던 피도 비를 통해 말끔히 씻겨 내려갔다.
병사들은 싸움을 멈추고 환한 빛 속에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병사들의 상처가 아물고 피가 멈췄다.
집에서 잠을 자던 백성들은 쏟아지는 비에 놀라 저마다 집 밖으로 나왔다.
비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아프고 병든 것을 모두 회복시켰다.
우연히 비를 맞은 사람들, 집 밖으로 나와 비를 맞은 사람들.
누구든 아픈 곳이 있다면 전부 씻은 듯이 나았다.
압도적인 신성력이 불러온 축복의 비였다.
얼마나 비가 쏟아졌을까.
서서히 빗줄기가 잦아들었다.
하늘은 여전히 대낮처럼 환했다.
서서히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환호성을 외쳤다.
“주신의! 주신의 축복이 강림했다!”
“주신의 은총이다!”
“기적이다! 우리에게 기적이 일어났다!”
이크릭스의 병사들과 메이븐의 병사들은 한마음으로 기뻐했다.
기적. 그 말이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 없었다.
“세드릭!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멍하니 있는 그들 사이로 알렉산더와 비올레타가 달려왔다.
그들은 몰래 대피하려다 기적이 일어난 것을 보고 되돌아온 참이었다.
알렉산더의 뒤를 따라오던 비올레타의 시선이 멍하니 앉아 있는 루시테에게 닿았다.
비올레타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비올레타는 목걸이의 도움으로 신성력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비올레타는 이 기적을 누가 일으킨 건지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간 루시테를 볼 때마다 애써 외면해왔으나 이번에는 외면할 수 없었다.
루시테에게서 비올레타가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커다랗고 성스러운 기운이 느껴졌으니까.
이곳에서 이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사람은 비올레타가 아닌 루시테. 그녀 한 명뿐이었다.
비올레타는 순간 몸을 휘청였다.
그러나 곧 몸을 바로 하고 눈을 사납게 떴다.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대로 성녀가 되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저, 제가! 제가 했습니다!”
비올레타는 가슴팍에 양손을 올리고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제가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비올레타는 허리를 펴고.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한 얼굴을 했다.
루시테 저 어리석은 것은 제대로 나서지도 못할 게 뻔했다.
그 전에 먼저 나서서 이 모든 공을 가로채리라.
당당하게 모두에게 인정을 받아 성녀가 되리라.
“비올레타 황녀, 지금 뭐라고 한 것이오?”
알렉산더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비올레타를 바라보았다.
기적은 무슨 기적.
자신을 따라 도망치기에 바빴던 여자가 언제 이런 기적을 일으켰단 말인가?
그러나 실체를 알고 있는 이는 알렉산더뿐.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제가 바로 예언 속의 성녀입니다! 비를 내리지 않았습니까! 이 모든 기적을 일으킨 사람이 바로 나! 비올레타 클라우디오입니다!”
비올레타의 외침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비올레타를 향했다.
그 시선들 속에는 감탄과 감사, 기적을 일으킨 데 대한 경외가 담겨 있었다.
비올레타는 우쭐하여 더욱 고개를 치켜들었다.
모두가 자신을 성녀라며 우러러보는 기분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그때 비올레타의 시선에 한 남자가 잡혔다.
이안. 한눈에 알아볼 수밖에 없는 그의 이복오빠가 주저앉아 있는 루시테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
“이안 오라버니!”
비올레타는 그를 멈춰 세우기 위해 악을 썼다.
이안이 비올레타를 흘끗 바라보더니 싸늘한 눈빛을 했다. 그는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투구를 벗었다.
대낮처럼 밝은 하늘 아래에서 눈부시게 밝은 금빛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이안의 시리도록 푸른 눈동자가 비올레타를 향했다.
“저, 제가 성녀라구요. 제가 이 기적을 일으켰어요. 오라버니.”
비올레타는 제 가슴을 치며 호소했다.
“하. 네가?”
이안이 어이없다는 듯 입술을 비틀었다. 이안의 시선이 비올레타의 목에 닿아 있었다.
짙은 보랏빛을 발하는 목걸이. 성녀 일레일라의 유산.
비올레타는 흠칫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러나 비올레타는 포기하지 않았다.
“네! 저예요. 제가 성녀라구요.”
비올레타는 이안에게 몇 발자국 다가섰다.
제발 그가 자신을 돌아보아 주기를. 주신의 축복으로 이 모든 기적을 일으킨 자신을 돌아보아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이안은 망설임 없이 비올레타에게서 몸을 돌렸다.
이안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는 루시테에게 다가갔다.
“루시테. 맞지?”
루시테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이안은 루시테가 저주가 풀린 후에 그녀를 마주한 건 처음이었다.
이안은 제 수하로부터 루시테의 외모를 자세히 전해 듣기는 했으나, 새삼스레 그녀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제비꽃 같은 청초한 외모와 긴 보랏빛 머리카락이 아름다웠다.
아기새의 부리처럼 도톰하고 작은 입술, 반짝이는 짙은 보랏빛 눈동자를 가진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메이븐의 저주받은 황녀, 천덕꾸러기 황녀가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으로 변하다니.
만약 수하에게 자세히 전해 듣지 않았더라면 이안조차 알아보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이안은 루시테를 일으키기 위해 손을 뻗었다. 그가 막 루시테의 팔을 잡으려 한 순간.
루시테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 ……왜…….”
이안은 미간을 좁혔다. 루시테가 왜 자신을 거부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은 탓이었다.
“루시테. 이리 와.”
이안은 손을 뻗어 한 걸음 더 루시테에게로 다가갔다.
한편 분노에 가득 찬 눈으로 둘을 바라보던 비올레타는 이를 악물었다.
“이크릭스와 메이븐의 백성들이여! 성녀인 제 말을 들어주세요! 저 사특한 여자는 저주받은 마녀입니다!”
비올레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조용한 공터에 퍼져나갔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방금 전 기적을 일으킨 사람이라 추정되는 비올레타의 말을 경청했다.
“성녀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모든 재앙은 다 저 여자 때문입니다! 지금은 제가 내린 비로 일시적으로 해결되었으나 저 사특한 여자가 또 세상에 저주를 뿌릴지 모릅니다! 지금 죽여야 합니다!”
비올레타는 큰 목소리로 호소했고, 방금 전 기적을 일으킨 성녀가 하는 말은 몹시 파급력이 있었다.
“자! 모두 일어나 검을 뽑으세요! 저 사특한 마녀를 죽입시다!”
병사들은 비올레타의 말에 자극을 받아 저마다 검을 치켜들었다.
날카로운 검날이 루시테를 향했다.
“비올레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이안이 루시테를 일으키려다 말고 벌떡 몸을 세우고 벼락같이 화를 냈다.
알렉산더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비올레타가 하는 양을 내버려 두었다.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었다.
성녀인 비올레타가 저주받은 마녀로 칭하는 루시테를 신성제국의 황태자가 감싸고 든다?
민심을 이크릭스로 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이참에 이안 황태자까지 싹 다 저주에 옮았다고 몰아붙여 처리해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성녀 비올레타의 말이다! 모두 비올레타 황녀의 말을 따르라!”
알렉산더가 큰 목소리로 외치며 비올레타가 하는 말에 힘을 보탰다.
“감히! 비올레타 뭐하는 거냐!”
이안이 분노에 치를 떨며 덩달아 검을 뽑아 들었다.
“이 여자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다 죽여 버리겠다!”
이안의 검에 푸른 오러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검을 치켜들고 루시테와 이안이 있는 곳으로 다가서던 이크릭스의 병사들이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안은 강하다.
그가 푸른 기운을 번뜩이며 전장을 휩쓰는 것을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이중 함부로 이안에게 덤벼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세드릭! 이안 황태자를 막아라!”
알렉산더가 별안간 세드릭의 이름을 불렀다.
검도 내팽겨쳐둔 채 혼란스러운 얼굴로 머리를 싸매고 있던 세드릭이 고개를 들었다.
치유의 비를 맞고 흑마법사의 저주가 씻은 듯이 씻겨 내려간 그는 정신이 없었다.
자신이 대체 이곳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왜 이곳에 있던 건지. 머릿속이 전부 백지였다.
“세드릭 디에고 백작! 뭐 하고 있는 것이오! 이안 황태자를 죽이라니까!”
알렉산더가 격분하여 길길이 날뛰었다.
세드릭은 알렉산더를 한 번 쳐다보고 이안을 바라보았다.
그래, 저자는 확실히 기억이 났다.
이안 필드라는 놈.
루시와 가족인지 뭔지 애매했던 놈. 그런데 저놈이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세드릭은 푸른 눈을 깜박였다. 지난날의 기억이 흐릿한 잔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의 기억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마치 그동안 긴 꿈을 꾼 것만 같았다.
그 흐릿한 기억 속에서 세드릭은 이안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냈다.
자신과 전쟁터에서 죽어라 싸운 메이븐의 황태자가 아니던가.
이안 헤레이스 델렌스카이 클라우디오.
그런데 저놈은 이안 필드인데?
‘이안.’
이안 필드.
이안 클라우디오.
루시의 가족이라던 놈이 갑자기 메이븐의 황태자라고?
의문이 가득한 세드릭의 눈이 순간 이안이 지키겠다고 서 있는 이안 뒤의 여자를 향했다.
감옥에서 만났던 여자.
그리고 메이븐의 폐황녀라던 볼모 루시테 클라우디오.
“!!”
루시 필드. 이안 필드. 루시테 클라우디오. 이안 클라우디오.
세드릭은 눈을 부릅떴다.
이안의 뒤에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는 저 여자는……!
“루시, 루시 필드?”
세드릭은 입 밖으로 그녀의 이름을 내뱉었다.
루시테는 제 이름이 들리자 고개를 돌려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루시테는 눈을 천천히 깜박였다. 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모든 기운이 몸 밖으로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세드릭…….”
루시테가 힘이 없는 목소리로 세드릭을 불렀다.
번개같은 깨달음이 세드릭을 꿰뚫었다.
저주. 저주가 풀린 것이다.
세드릭은 당장 그녀를 보호하기 위하여 루시테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더 이상 다가오면 죽이겠다.”
이안이 검을 세드릭 쪽으로 향하며 사납게 읊조렸다.
“그래! 싸워라! 황태자를 죽여!”
알렉산더가 잘됐다는 듯 거칠게 외쳤다.
루시테는 알렉산더의 목소리를 들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돼.”
그 목소리를 가장 먼저 들은 것은 세드릭이었다.
세드릭은 눈을 좁히고 루시테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세드릭 안…… 돼요. 알렉산더의 말을 들으면……. 안 돼요.”
루시테는 힘겹게 세드릭을 향해 말을 내뱉었다.
“황태자는…… 흑마법사를 부려서, 당신에게…… 저주를 걸었어요.”
세드릭이 눈을 크게 떴다. 흑마법사의 저주라니.
세드릭의 푸른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그의 드문드문한 기억이 그제야 설명되었다.
레일리 아사드를 찔렀을 때. 아니 그보다 더 이전이다.
루시를 광장에서 만나고 돌아오던 길, 그 이후부터 그의 기억이 잘려있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지만, 흑마법사의 저주라면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대마법제국의 황태자라는 놈이 금기인 흑마법사와 결탁을 한 데다 자신을 이용하려 저주를 걸어?
모든 일이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세드릭의 머릿속에서 짜 맞춰졌다.
세드릭의 푸른 눈에 분노가 피어올랐다.
꽉 쥔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도망쳐요…… 세드릭. 알렉산더는…… 전쟁이 끝나면 당신을, 죽일, 거예요…….”
루시테는 세드릭을 바라보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었다. 금방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자신을 만나기 위해 저주에 걸린 세드릭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루시테는 쓰러지지 못했다. 그녀는 휘청이는 몸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하. 저 쓰레기 같은 자식이 감히 나를 죽인다고?”
주먹을 떨던 세드릭이 몸을 홱 돌렸다. 그간 이용당했다는 것에 대한 극심한 분노가 휘몰아쳤다.
알렉산더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죽는 건 자신이 아니다. 알렉산더다.
그래야만 했다.
세드릭은 바닥에 떨어뜨렸던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를 주워들었다.
루시테의 말을 듣지 못한 알렉산더는, 드디어 세드릭이 이안을 죽이려는 구나 생각하고 몹시 흡족해했다.
그러나 알렉산더의 예상과는 다르게 세드릭은 검을 주워들자마자 알렉산더를 향해 달려갔다.
누군가 알렉산더를 지키고 말고 할 시간도 없었다.
알렉산더는 세드릭의 가까이에 있었고, 세드릭은 뛰어난 검사였다.
대륙에서 가장 뛰어난 검사. 그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달려가더니 그대로 알렉산더의 머리 위로 검을 내리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알렉산더의 얼굴에 붉은 금이 갔다.
검이 지나간 자리를 따라 피가 흐르며 그가 쓰러졌다.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부릅뜬 눈이 한동안 구르더니 곧 움직임을 멈췄다.
“이, 이 무슨!!”
사람들은 처음에 무슨 일이 일어난 지 인지하지 못했다. 황태자가 죽다니.
그것도 세드릭 디에고의 손에 의해서?
기사들은 물론 병사들, 비올레타, 모두가 눈을 부릅뜨고 입을 벌린 채 죽어버린 알렉산더를 바라보았다.
싸늘한 정적이 잠시간 내려앉았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가장 먼저 이성이 돌아온 비올레타가 경악한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그녀의 힘이 되어줄 든든한 아군이 죽다니.
알렉산더가 죽다니!
“바, 반역! 반역이다! 반역자를 잡아라!!”
“반역자를 잡아라!!”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알렉산더의 측근 기사들이 검을 들고 세드릭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오러를 간신히 꺼내는 정도의 그들이 세드릭을 당해낼 리 없었다.
세드릭은 전장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고 거대한 바스타드 소드를 한 손으로 휘두를 수 있었다.
게다가 그 거대한 칼날 전체에 일관적인 붉은 오러를 두를 수 있는 실력자였다.
세드릭은 제게 덤비는 기사들을 하나둘, 베어 넘겼다.
여전히 하늘에는 주신의 축복이 강림했다는 증거로 대낮처럼 환한 빛이 감돌고 있었으나, 전쟁터에는 다시금 피가 낭자해졌다.
“모, 모두 반역자를 공격하라!”
기사들이 이크릭스의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그러나 병사들은 칼을 든 채로 주춤거릴 뿐 쉽게 세드릭에게 덤빌 생각을 하지 못했다.
눈앞에서 휘두르는 세드릭의 큰 검이 가히 위협적이었다.
병사들은 세드릭의 위용에 알렉산더의 시체가 굴러다니는데도 가까이 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나마 충성심을 갖고 있던 기사들만 세드릭에게 덤비다 개죽음을 당했다.
이안이 있는 쪽에 몰려와 있던 메이븐의 병사들은 그사이에 끼어 어떻게 할지 모르고 우왕좌왕했다.
갑자기 치유의 비가 내리고 성녀가 나타났는데, 별안간 이크릭스에서 내분이 일어나다니.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밤인데도 대낮같이 환한 빛 속에서 피가 낭자한 모습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주신의 축복을 저버리고 반기를 드는 행위 같기도 했다.
“머저리가 죽고 난장판이로군.”
이안은 어이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사태를 지켜봤다.
피칠갑을 한 세드릭에게 이제 더 이상 함부로 덤비는 무모한 자들은 없었다.
이 수많은 사람 중 세드릭을 상대할 만한 사람은 오직 한 명뿐.
세드릭을 웃도는 실력을 지닌 이안뿐이었다.
문득 세드릭이 이안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
그는 힘없이 앉아 있는 루시테를 한 번 보고 그 앞에 지키고 서 있는 이안을 보았다.
세드릭의 푸른 눈이 살벌해졌다.
그는 바스타드 소드를 질질 끌며 이안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세드릭이 걸어가는 그 길 양옆으로 병사들이 바다가 갈라지듯 갈라져 피했다.
“루시를 내놔라.”
세드릭이 살벌한 목소리로 이안의 앞에 서서 내뱉었다.
이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검을 치켜들었다.
결국 세드릭과 그 사이에 결판을 내지 않는 한 이 지긋지긋한 인연이 끊기지 않을 듯했다.
“루시테는 내 것이다. 너 따위에게는 과분하지.”
이안이 세드릭을 향해 차갑게 말했다.
“황태자 전하! 저희들이!”
이안의 근처에 서 있던 메이븐의 병사들이 앞으로 나서려 했다.
이안은 손을 휙 들어 그들을 저지했다.
“물러서라. 내가 상대한다.”
이안의 말에 기사들이 군말없이 대기했다.
이미 이크릭스의 황태자는 죽었고 이 전쟁의 승자는 메이븐으로 결정 난 셈인데도.
이안은 세드릭을 죽이기 위해 검에 오러를 불어넣었다.
루시테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렇고 끝까지 기분 나쁜 자식이었다. 루시테를 위해서라도 죽여버려야 한다.
이안과 세드릭은 서로 노려보며 전의를 불태웠다.
그러기를 잠시.
쾅!!!
지천을 흔드는 파열음이 울렸다.
이안과 세드릭이 검을 맞붙었다. 푸른 오러와 붉은 오러가 격렬하게 맞부딪혔다.
쾅! 쾅!
둘의 검이 부딪치는 소리는 보통의 검 부딪치는 소리처럼 맑지 않았다.
무언가가 폭발하는 소리가 계속 들리며 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검을 내질러대었다.
이크릭스와 메이븐의 모든 병사들은 손에 땀을 쥐고 둘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둘이 검을 맞대느라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려 있는 사이.
조용히 몸을 움직이는 한 인영이 있었다.
비올레타는 허리를 숙여 죽은 알렉산더의 허리춤에서 검을 빼 들었다.
알렉산더는 죽어 이용가치가 떨어졌으니 이제 그녀가 신경 쓸 바가 아니었다.
비올레타의 목적은 단 하나.
루시테를 죽이고 자신이 온전한 성녀가 되어 모두에게 인정받는 황후가 되는 것.
비올레타는 검을 들고 살금살금 루시테에게로 접근했다.
‘저것만은 죽여야 한다.’
비올레타는 이를 악물었다.
루시테를 죽여줄 줄 알았던 머저리 알렉산더가 그마저도 못하고 죽어버렸으니, 이제는 자신이 직접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비올레타는 격렬하게 싸우고 있는 이안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멀리 돌아 루시테의 뒤로 접근했다.
마침내 멍하니 앉아 있는 루시테의 뒤로 도착하여.
비올레타는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죽어라! 루시테!!”
비올레타의 검이 그대로 루시테의 목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세드릭과 이안은 그제야 이상함을 느끼고 급히 뒤로 돌았으나 비올레타의 손이 더 빨랐다.
비올레타가 내리꽂은 검의 끝이 막 루시테의 목의 살갗을 파고들었을 때였다.
펑!!
흰빛이 루시테를 감싸더니 비올레타를 튕겨냈다.
비올레타는 그대로 날아가 땅으로 곤두박질쳤다.
그런데 하필 비올레타가 떨어진 자리는 가슴에 창이 박힌 채 죽어 있는 병사의 시체 위였다.
둔탁한 것이 비올레타의 배를 강타했다.
비올레타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지 못했다.
그녀는 누운 자세로 빛나는 하늘을 한번 보았고, 시선을 내렸다. 시선 끝에는 가슴 위로 우뚝 선 창대가 보였다.
‘이게 무슨……?’
그녀는 고개를 더 내렸다. 창대는 그녀의 몸에 박혀 있었다.
“!!”
비올레타는 눈을 부릅떴다.
‘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말도 안 되는……!’
“허억……!”
비올레타는 온몸을 덜덜 떨었다.
끔찍한 고통이 비올레타를 강타했다.
순식간에 창대 주위로 피가 번져나갔다.
비올레타는 손을 덜덜 떨며 제 배를 더듬었다.
“허억……! 헉!”
이렇게 죽는다고? 이렇게 허무하게?
비올레타는 흘러나오는 피를 막기 위해 배를 손바닥으로 눌렀다.
“커흐흑!”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그녀는 허리를 꺾으며 신음했다.
두려움과 고통으로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부들부들 떨렸다.
‘모, 목걸이.’
일레일라의 목걸이.
‘나는 성녀다, 성녀야. 그러니까 살 수 있어.’
비올레타는 떨리는 손을 힘겹게 목으로 가져가 목에 있는 목걸이를 더듬었다.
딱딱한 보석이 피 묻은 그녀의 손안에 잡혔다.
비올레타는 다른 손으로 피가 흐르는 배를 꾹 눌렀다.
“커흑!”
비올레타는 입 밖으로 피를 울컥 내뱉었다.
일레일라의 목걸이를 쓰는 주문은 길고 복잡했다.
그리고 꼭 소리를 내어 말을 해야만 했다.
“라…… 델, 라…… 카르……, 커헉!”
주문을 외울 수가 없었다.
지금이 가장 성력이 필요한 순간이었는데, 그렇게 성녀가 되고자 아등바등했던 비올레타는 자신 하나 살리지 못했다.
비올레타는 제 숨이 점점 가늘어지는 것을 느꼈다.
“사, 살려줘……”
비올레타는 손을 높이 들었다. 루시테가 자신을 볼 수 있도록.
루시테의 신성력이라면 살 수 있을 테니까. 진짜 성녀인 루시테의 신성력이라면.
“살려줘 루시테…….”
나 좀.
나 좀 살려줘, 루시테…….
그렇게 비올레타가 모든 힘을 짜내어 손을 들고 루시테를 부르는 동안.
루시테는 넋이 나간 채 멀리 나가떨어진 비올레타에게는 신경도 쓰지 못했다.
루시테는 거의 정신을 잃기 직전의 상태인지라 비올레타가 자신을 공격한 것도 몰랐다.
루시테를 죽이려 한 비올레타를 튕겨낸 마법의 정체는 다름 아닌 레일리였다.
레일리는 괴로운 얼굴로 루시테를 감싸 안았다.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루시테의 몸이 높이 들려 레일리의 품에 안착했다.
루시테는 힘겹게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눈 안에 그토록 그리웠던 남자의 얼굴이 가득 담겼다.
아름다운 은빛 눈. 붉은 입술.
“레일리…….”
루시테는 손을 뻗어 레일리의 얼굴을 더듬었다.
익숙한 품. 익숙한 그의 향기.
그의 품에서는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머스크 향이 났다.
진짜 레일리였다.
레일리가 그녀를 구하러 온 것이다.
“그래요. 루시테. 늦게 와서 미안해요.”
낮고 서늘한 음성이 루시테의 귓가에 날아들었다.
“괜찮습니까?”
레일리의 물음에 루시테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이 끊길 듯 말 듯 힘겨웠다.
루시테는 손을 툭 떨어뜨렸다. 손을 들고 있을 힘조차 없었다.
이상하게 레일리의 목소리를 들으니 그간의 모든 힘들고 괴로웠던 기억들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의 따뜻한 품 안에서 마음이 놓였다. 이제 안심할 수 있었다.
루시테는 간신히 붙들고 있던 끈을 놓았다.
루시테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루시테는 안전한 그의 품에서 정신을 잃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레일리는 슬픈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긴 보랏빛 속눈썹 아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너는 누구냐!”
이안이 분노했다.
이안과 세드릭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레일리를 향해 투기를 드러냈다.
이안은 레일리가 누구인지 몰랐지만 세드릭은 잘 알고 있었다.
세드릭의 꽉 쥔 주먹에서 우두둑 소리가 났다.
마법사 놈. 처음부터 끝까지 지긋지긋한 레일리 아사드.
고작 루시 하나를 원할 뿐인데 뭐 이렇게 방해물이 많은지.
정말이지 지긋지긋했다.
이번에야말로 끝장을 내리라.
세드릭은 레일리를 향해 전의를 활활 불태웠다.
“네놈은 누구냔 말이다!”
이안이 고함을 쳤다. 이안은 비록 레일리가 누구인지 몰랐으나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세드릭이나 알렉산더, 비올레타 따위가 다가올 때와는 차원이 다른 불안함이 이안을 강타했다.
보통 놈이 아니었다.
아니 보통 놈이 아님을 떠나, 저놈의 품에서 편안한 안색을 한 루시테를 보니 견딜 수가 없었다.
어디 제 이복누이가 그런 표정을 한 적이 있었던가.
이안은 이를 갈았다. 죽여야 할 놈이 세드릭만이 아니었다.
진짜 경계해야 할 위험한 놈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젠장! 루시테!’
대체 어디서 저런 찰거머리 같은 놈들을 붙여 온 건지.
이안은 욕설을 중얼거렸다.
반드시 죽여야 한다.
저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어디서 굴러왔는지 모를 은발머리를 반드시 죽여버려야 한다.
그 후에 세드릭 디에고도 죽여야 한다.
그래야만 루시테를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이안은 그렇게 확신했다.
“누구냔 말이다!”
이안은 칼을 치켜들고 레일리를 다그쳤다.
레일리는 루시테를 안아든 채 가소롭다는 눈빛으로 이안을 바라봤다.
이안을 바라보는 레일리의 시선은 하찮은 것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다름없었다.
“저는 레일리 아사드입니다.”
레일리는 어깨를 으쓱였다.
레일리의 등장으로 사방이 술렁였다.
레일리를 알아본 사람은 세드릭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이크릭스의 기사들과 병사들은 눈을 크게 뜨고 레일리를 바라보았다.
레일리는 자신들의 2황자 카일러스가 아닌가.
레일리가 등장한 순간 그들이 따를 사람은 죽어버린 알렉산더가 아니다.
이 시간 황위 계승 순위 1위가 되는 2황자 카일러스.
그가 이크릭스의 모든 병사들이 따라야 할 사람이었다.
“레일리인지, 베일리인지. 내 누이를 내놓아라.”
이안이 레일리를 향해 으르렁거렸다.
“흐음. 그쪽이 루시테의 재수 없는 동생이로군요. 죄송하지만 루시테는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녀는 물건이 아니니까요.”
레일리는 따뜻한 눈으로 루시테를 한 번 내려다보곤 다시 고개를 들었다.
“루시테가 왜 메이븐에서 도망쳐 왔나 했더니 네놈 때문이었던 거군요. 한눈에 알겠습니다.”
레일리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루시테를 바라보는 이안 황태자의 눈에서 진득한 감정이 느껴졌다.
레일리는 빠르게 사태를 파악해갔다.
빠드득.
이안이 이를 갈았다.
이안은 검을 높이 치켜들고 외쳤다.
“메이븐의 병사들이여! 저놈을 모두 공격하라!”
황태자의 명령에 메이븐의 병사들이 검을 쥐었다.
“2, 2황자 전하를 지켜라!!”
이크릭스의 병사들도 정신을 차리고 고함을 쳤다.
“2황자 전하를 지켜야 한다! 메이븐을 공격하라!”
이크릭스의 병사들은 저마다 소리를 질렀다.
이 전장에서 황자를 둘이나 잃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챙!
챙!
병사들의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시끄럽게 전장을 울렸다.
루시테의 신성력으로 가라앉았던 전쟁이 다시 일어나려 했다.
하늘도 탄식하듯, 대낮처럼 밝았던 하늘이 다시 어두워지려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모두의 머리 위. 창공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육중한 날개가 펄럭이는 소리가 났다.
-크와아아아아아아아아!
거대한 짐승, 아니 그 위의 존재가 창공을 쪼갤 것처럼 포효했다. 하늘이 진동하는 듯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창검을 휘두르기를 멈추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하늘로 들어 올렸다.
사람들은 휘둥그렇게 눈을 뜨고 입을 벌렸다.
“드, 드 드래곤이다!”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저마다 하늘을 가리키고 비명을 질렀다.
번쩍이는 은빛 비늘의 드래곤은 너무도 위협적이었다.
드래곤의 브레스는 대평원 전체를 날려버리고도 남을 것이다.
드래곤의 등장은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멸종되었다던 드래곤이 왜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단 말인가.
세상이 미쳐 돌아가고 있었다.
세드릭과 이안도 황당하고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드래곤이 날뛴다면 이안과 세드릭의 힘만으로 막기가 어려울지도 몰랐다.
혼란 속에서 오직 한 사람만이 여유로웠다.
레일리는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따라오지 말라고 했건만. 기어코 노이가 이곳까지 레일리를 따라온 것이다.
-루시이이이이이!!!!
드래곤이 소리를 질렀다. 천둥이 치는 것처럼 시끄러웠다. 하늘이 쩌렁쩌렁 울렸다.
-루시이이이이이!! 어디에 있어!!!!
드래곤이 날개를 펄럭이며 목을 길게 내빼고 사방을 굽어보았다.
-레일리이이이이!!
노이가 레일리고 루시고 찾는 이들의 이름을 마구 불렀다.
레일리는 순간 텔레포트를 했다.
땅에는 흰빛의 잔상만 남아 있고 레일리는 순식간에 노이의 앞에 나타났다.
소리를 치던 드래곤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2, 2황자님 위험합니다! 내려오십시오!!”
위를 올려다보던 이크릭스의 병사들이 기겁하여 외쳤다.
아무리 2황자가 대마법사라도 드래곤은 위험할 터였다.
“2황자 전하! 위험합니다!”
병사들은 저마다 목소리를 높여 레일리더러 돌아오라며 외쳐대었다.
레일리는 가볍게 병사들의 목소리를 무시했다.
“노이.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새 마법이 또 늘었군요.”
-당연히 따라가지! 루시가 위험한데!
노이가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레일리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쩌렁쩌렁 울리는 드래곤의 목소리만 들렸다.
이안은 주먹을 말아 쥐었다.
“크윽! 대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
이안은 뜻대로 풀리지 않는 상황에 화를 냈다.
그러나 하늘에 떠 있는 드래곤이 언제 브레스를 뿜으며 날뛸지 모른다.
그로서는 지켜보는 것 말고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받으십시오. 노이.”
레일리는 노이에게 루시테를 내밀었다.
노이의 은빛 눈이 레일리의 품 안에 곤히 잠들어 있는 아름다운 여자에게로 향했다.
-루, 루시!
노이는 아까처럼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기쁨으로 인해 작게 외쳤다.
붕붕 흔들리는 꼬리가 녀석이 얼마나 신이 났는지를 대변했다.
노이는 순식간에 몸을 둥글게 말더니 통통한 손을 내밀었다.
손바닥 위에 루시테를 올린 노이가 그녀를 소중하게 품으로 가져갔다.
노이는 기분이 좋아져 쉬익 콧김을 내뿜었다.
-루시가 무사했어! 다행이야!
노이는 작은 목소리로 레일리에게 말했다.
“잘 데리고 계십시오. 저는 밑에 볼일을 마저 보고 오겠습니다.”
-좋아! 기다릴게!
노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레일리는 노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땅으로 다시 나타났다.
“2황자 전하! 드래곤과 아는 사이십니까?! 저 레이디는 대체 누구시기에.”
이크릭스의 기사들이 황급히 레일리에게 달려와 물었다.
레일리가 품에 안고 있던 여자를 드래곤에게 넘겼고, 드래곤이 그 여자를 저리도 소중하게 안고 있다니.
아래서 올려다본 사람들이 보기에는 황당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루시테를 어떻게 한 거냐!”
이안이 화를 내며 레일리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당장 루시테를 내놔라!”
이안은 레일리를 향해 검을 들었다.
“루시는 내 것이다.”
어느새 다가온 세드릭이 마찬가지로 레일리를 향해 검을 겨눴다.
세드릭에게서 진한 살기가 피어올랐고, 셋의 사이에는 순식간에 진득한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병사들은 하늘 위에 자리잡고 있는 드래곤을 몹시 신경 쓰면서도 세드릭과 이안, 그리고 레일리의 주위에서 뒤로 물러섰다.
대마법사와 소드마스터가 두 명이다.
자칫하면 휘말리기 십상이었다.
그 중 이크릭스의 용감한 기사 몇이 레일리에게 다가섰다.
“2황자 전하! 물러서십시오! 엄호하겠습니다!”
그들은 황제가 될지도 모를 레일리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그를 엄호하는 시늉을 했다.
레일리는 가소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필요 없습니다.”
레일리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 말을 한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안과 세드릭이 레일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상대는 마법사.
이안은 결코 레일리를 얕보지 않았다.
주문이나 시동어도 없이 눈앞에서 순간이동을 하지 않았던가.
범상치 않은 실력자였다.
마법사는 근거리에 취약하다.
그 점을 노리고 이안과 세드릭은 레일리에게 바싹 붙어 들어갔다.
무시무시하게 빠른 속도였으나 레일리는 그들에게 틈을 내주지 않았다.
레일리가 끼고 있는 화려한 반지들이 번쩍 빛을 뿜었다.
레일리가 평소에 힘의 폭주를 막기 위해 끼고 있던 제약 장치들이었다.
순식간에 봉인이 풀리고 레일리와 이안, 세드릭의 힘이 맞부딪쳤다.
레일리는 도망치지 않았다. 실드를 구현하여 이안과 세드릭의 검을 막아냈다.
쾅!!
먼지바람이 휘날렸다.
“크윽.”
세드릭은 신음성을 내뱉었고 이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고작 3서클 마법인 실드 따위가 자신들 둘이 함께한 공격을 막아내다니.
레일리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실드를 단단하게 구현하고 있었다.
두 소드마스터의 공격에도 깨지지 않는 실드는 3서클 마법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안 황태자. 알고 있습니까?”
레일리는 이안에게 말을 걸고는 순간이동을 하며 실드를 해제했다.
두 소드마스터는 레일리가 이동하는 기운의 흐름을 읽고 곧바로 다시 레일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콰앙!!
이안은 레일리에게 들어가지 않는 검을 들이밀며 이를 악물고 내뱉었다.
“내가 뭘 알고 있냐는 거냐.”
“뻔하지 않습니까.”
레일리는 도망치지 않았다. 실드를 구현하여 이안과 세드릭의 검을 막아냈다.
“루시테는 결코 메이븐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습니다. 보아하니 루시테를 가족 이상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포기하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네가! 네가 뭘 알아!”
이안이 레일리가 펼친 쉴드를 쾅 쾅 내리쳤다.
레일리의 다 안다는 듯한 그 말이 이안의 치부를 건드렸다.
“네가 뭘 아느냔 말이다!!”
“제가 뭘 모릅니까?”
레일리가 되물었다.
이안과 세드릭의 공격이 맹렬히 쏟아지는데도 레일리의 얼굴은 여전히 평온했다.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마음을 말이다! 이제야! 이제야 되찾을 수 있게 되었는데! 네놈 때문에!”
이안의 자신의 마음속에 쌓여 있던 아픔을 내뱉으며 그간의 울분을 토해냈다.
이안은 절박했으나 레일리는 이안의 모든 말이 우습기만 했다.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사랑하는 여자에게 다가가지 못한다고?’
그래서 루시테가 메이븐을 떠나 먼 나라 이크릭스에 힘겹게 정착하도록 내버려둔 거란 말인가.
개소리였다.
레일리는 루시테를 이안에게 넘겨줄 생각도 없었지만.
만약 루시테가 돌아가더라도 저런 이기적인 놈 옆에 있다가는 루시테가 또 괴롭고 힘들어질 게 뻔해 보였다.
“내게 루시테를 돌려줘!”
이안이 악에 받친 목소리로 고함을 쳤다.
“루시테는 내 것이다. 네 놈들 따위에게 넘길 수 없다!”
듣고 있던 세드릭도 지지 않았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레일리와 이안이라는 자식 모두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
“후.”
얘기라도 들어보려 했던 레일리의 얼굴이 점점 사나워졌다. 그의 눈썹이 휙 치켜 올라갔다.
레일리는 실드를 유지한 상태로 짜증스럽게 한쪽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둘 다 가장 중요한 걸 생각하지 않고 있군요. 루시테는 네놈들의 물건이 아닙니다.”
“뭐?”
“뭐라?”
이안과 세드릭이 동시에 대답했다.
“당신들과 함께하기를 원한다면 루시테에게 물어봐야지 왜 강제로 데려가려 합니까?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거야! 루시테가 싫어하니,”
이안은 말을 하면서 멈칫했다.
그래. 루시테는 한 번도 자신을 따라가고 싶어한 적이 없었다.
애써 무시해왔던 사실이었으나, 그래도 함께 가고 따뜻하게 대해주고 잘해준다면 루시테가 좋아할 거라 막연하게 장담했더랬다.
“잘 알고 계시는데 왜들 그러십니까? 세드릭 디에고. 그대도 마찬가지다. 왜 자꾸 억지로 그대의 생각을 그녀에게 강요하지?”
“그건 내가 원하기 때문이다!”
세드릭은 죄책감도 없이 외쳤다.
자신은 루시가 있어야 행복할 수 있으니까.
루시만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과 함께 있으면 루시테도 분명 좋아하게 될 것이다.
세드릭은 그렇게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