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화 (17/18)

17.

“말이 안 통하는 분들이로군요.”

조금 전까지 계속 방어만 하던 레일리의 기세가 별안간 사나워졌다.

그는 실드를 해제하고 하늘 위로 높이 떠올랐다.

세드릭이 레일리가 있는 곳을 올려다보며 검을 흔들며 내려오라고 고함을 쳤다.

한껏 흥분하여 검을 치켜들고 있는 이안도 세드릭과 같은 심정이긴 마찬가지였다.

레일리는 싸늘한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며 손을 뻗었다.

공기가 일렁이더니 레일리의 옷자락과 머리칼이 마구 흔들렸다.

레일리의 손 아래로 거대한 마법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주위로 빛의 화살이 수백 개. 아니 수천 개가 생성되었다.

화살은 제각각 무시무시한 위력을 뽐내는 듯 번쩍거렸다.

-뇨옹!

루시테를 소중하게 품고 있던 노이가 레일리가 하는 양을 보고 놀라 소리쳤다.

노이는 날개를 퍼덕이며 레일리보다 더 높이 날아올랐다.

그렇게 하늘에 둥둥 떠 있는 노이를 바라보는 한 시선이 있었다.

물론 수많은 사람이 노이를 보고 있긴 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신기함과 두려움을 담아 보는 것과는 달리, 그는 노이를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알렉산더가 고용했던 흑마법사 빈센트.

빈센트는 알렉산더가 죽었음에도 전장을 떠나지 않았다.

알렉산더가 빈센트에게 은밀히 약속했던 것은 두 가지.

흑마법 탄압을 줄이고, 마지막 용의 행방을 찾을 수 있도록 돕겠다는 것이었다.

알렉산더는 자신의 제위 계승을 위해 처음부터 흑마법사를 끌어 들여왔다.

빈센트는 흔쾌히 알렉산더의 은밀하고 더러운 명들을 수행해 왔으나, 알렉산더가 죽은 지금 모든 게 물거품이 되어버린 상태였다.

알렉산더가 죽어버렸으니 황제가 되어 흑마법 탄압을 줄여주지도 못할 것이고.

더 이상 금전과 정보를 지원해주지 않으니 마지막 용을 뒤쫓지도 못할 것 아닌가.

빈센트는 분노에 차서 전장을 떠나지 못하고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토록 찾아 헤매던 용이 멀쩡하게 성장한 상태로 제 발로 찾아오다니!

‘드래곤 하트! 드래곤 하트는 내 것이다!’

빈센트는 흥분에 겨워 입술을 핥았다.

모두가 레일리가 펼친 공격 마법에 시선을 빼앗겨 있을 때였다.

흑마법사 빈센트는 주문을 외우며 천천히 하늘로 떠올랐다.

노이가 있는 곳으로 더욱더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빈센트가 노이에게 접근하고 있는 그때.

수천 개의 빛의 화살을 하늘에 띄운 레일리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퍼버버벙!

펑!

폭죽이 터지는 것처럼 빛의 화살이 세드릭과 이안에게로 떨어져 폭발했다.

병사들은 메이븐이고 이크릭스고 할 것 없이 마법의 권역을 피하기 위해 뒤로 물러섰다.

병사들이 뒤로 물러서는 모습이 꼭 썰물이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크으윽!”

“커윽!”

이안과 세드릭은 쏟아지는 빛의 화살을 정신없이 막아냈다.

레일리를 공격하기는커녕 그의 공격을 간신히 쳐내는 게 고작이었다.

이안과 세드릭의 발 아래로 땅이 터지고 파였다.

이안과 세드릭의 주변으로 거대한 구덩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구나.’

이안은 탄식했다.

무시해왔던 마법사의 실력이 이 정도라니.

소드마스터 둘이 덤벼도 당해낼 수가 없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아마 이안이 직접 상대해보지 않았다면 절대 믿지 못했으리라.

이안은 번쩍이는 빛 사이로 눈을 찡그리고 저 하늘 높은 곳을 올려다보았다.

빛의 화살을 퍼붓는 은빛 눈의 마법사와 그 주위로 끝없이 생성되는 빛의 화살.

마법사는 마나가 고갈되지도 않는지 수천 개의 화살을 계속해서 만들어 내어 쏟아붓고 있었다.

그리고 마법사의 더 위쪽에는 그림자만 봐도 무시무시한 거대한 드래곤이 날개를 펄럭이며 상황을 관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조금이라도 수가 틀리면 이곳을 전부 날려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드래곤의 눈초리가 사나웠다.

“하.”

이안은 그저 실소가 나왔다.

인간이 아닌 것 같은 경지의 마법사와 드래곤.

그들에게 자신의 이복누이가 꽁꽁 보호받고 있는 모습에 자괴감이 들었다.

‘루시테.’

검을 든 손에 점점 힘이 빠짐에 따라, 루시테를 반드시 차지하여 돌아가고야 말겠다는 그의 의지도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끔찍하게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났으나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제 이복누이는 자신이 없어도 보호해줄 사람이 넘쳤으며.

자신은 결코 이복누이가 온전히 믿고 의지할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으아아아아아아아!”

이안은 괴성을 질렀다.

이대로 루시테를 포기할 수밖에 없단 말인가.

너무 화가 나고 괴로웠다.

마음에 큰 구멍이 생긴 듯하여 몹시 힘들었다.

살면서 한 번도 결핍이란 것을 느껴본 적 없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잘난 이안이, 루시테를 포기해야 함에 몹시도 괴로워했다.

이안은 자신이 이대로 돌아가면 다시는 루시테를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루시테가 만나주지 않을 것이었으며 무엇보다 저 남자.

저 인간 같지도 않은 마법사가 가만있지 않을 터였다.

이렇게 될 거였으면 따뜻한 말을 한마디라도 건네줄 것을.

왜 그리도 다른 이들의 시선을 신경 썼던가.

어쩌면 그가 조금이라도 루시테에게 잘 대해주었다면 루시테가 황성을, 그를 떠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안은 이제와서야 루시테의 고통을 외면했던 그의 과거를 진심으로 후회했다.

핏!

힘이 빠진 이안의 머리통 바로 옆으로 빛의 화살이 지나가더니 땅을 터뜨렸다.

만약 땅이 아닌 이안의 머리에 화살이 직격했다면 그대로 머리가 터져나갔을 것이다.

이안은 이제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루시테를 차지하기 위해 끝까지 해보느냐, 아니라면 지금에라도 항복을 하고 목숨과 나라의 안위를 선택하느냐.

이안의 선택은 고민의 크기에 비해 쉬웠다.

아무리 루시테를 원한다 한들 그 마음이 이안의 현실보다 크지는 않았다.

이안은 잃을 게 많은 사람이었다.

자신이 죽으면 당장 나라의 안위가 흔들리게 된다.

자신은 메이븐의 황태자로, 반드시 살아남아 나라를 다스려야 하는 사람이었다.이안은 자존심이 상하여 얼굴을 와락 구겼으나 곧 선택을 따랐다.

“레일리 아사드! 항복! 항복하겠다!”

이안은 높이 떠 공격을 퍼붓는 레일리를 향해 외쳤다.

“다시는! 루시테를 찾지 않겠다!”

이안이 두 번째 마디를 외치자 미친 듯이 퍼부어지던 레일리의 공격이 뚝 멈췄다.

공격이 멈추고 먼지바람이 가신 지상의 모습은 처참했다.

거대한 구덩이가 패여 있었고 이안의 갑옷은 다 깨져 있었다.

검은 이가 다 나가 거의 부러질 듯 말 듯 한 상태였으며 팔은 피범벅이었다.

이안이 이 정도인데 세드릭은 말할 것도 만신창이였다.

세드릭은 온몸이 피범벅이 된 채로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안 황태자, 그 항복. 받아들이겠습니다. 다시는 루시테에게 접근하지 마십시오.”

레일리가 씩 입술을 올렸다.

레일리의 목소리에는 마법이 깃들어 평원에 모인 모든 사람의 귓가에 속삭이듯 울려 퍼졌다.

이로써 모든 사람이 이안이 레일리에게 항복한 것을 목도하게 되었다.

“크윽!”

이안은 검을 땅에 꽂고 무릎을 털썩 굽혔다.

그는 울컥 피를 토해냈다.

힘을 억지로 끌어내어 썼더니 속부터 엉망진창이었다.

몸이 성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황태자 전하! 괜찮으십니까!”

이안의 측근 기사들이 기겁을 하며 이안에게로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이안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아는 바이나.

저 마법사를 상대로 이 정도까지 버텨준 것만이라고 메이븐의 기사들은 생각했다.

기사들은 이안을 부축하여 구덩이를 벗어났다.

이안이 포기한 그곳에서, 세드릭만이 여전히 눈을 흉흉하게 빛내며 레일리를 노려보고 있었다.

세드릭은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가 나간 바스타드 소드에 간신히 지탱하면서도 전의를 불태웠다.

“흐음.”

레일리는 가소롭다는 눈으로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꼭 끝장을 보겠다면 그 역시 끝을 볼 생각이 얼마든지 있었다.

레일리가 다시 앞으로 손을 뻗었다. 그가 막 마나를 다시 운용하려 하는데.

-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노이의 고함이 그의 머리 위로 들려왔다.

레일리는 고개를 확 들었다.

상황을 미처 다 파악할 것도 없이 그는 순식간에 노이가 있는 쪽으로 순간이동을 했다.

노이는 흑마법사와 대치 중이었다.

흑마법사의 검은 마법이 실처럼 노이를 옭아매고 있었다.

노이는 거미줄처럼 엉킨 검은 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마구 발버둥 쳤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노이는 루시테를 꼭 품에 안았다.

반드시 루시테를 지켜내겠다는 의지가 노이의 은빛 눈동자 속에서 활활 타올랐다.

“드래곤 하트! 드래곤 하트는 내 것이다! 크하하하하하!”

흑마법사가 괴기스럽게 웃음을 터뜨렸다.

레일리는 바로 노이를 도우려고 했다. 그런데 노이의 상태가 이상했다.

노이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몸을 뒤로 젖혔다.

레일리는 눈을 가늘게 뜨고 노이를 살피다가 이내 노이에게서 물러섰다.

그는 입꼬리를 씩 올리곤 노이에게서 떨어졌다.

흑마법사 따위가 감히 용에게 혼자 덤비다니. 노이를 우습게 봐도 한참 우습게 본 것이다.

노이는 이래봬도 레일리의 제자인 셈. 결코 호락호락하게 흑마법사에게 당할 리가 없었다.

레일리는 팔짱을 끼고 흑마법사와 대치중인 노이를 지켜보기로 했다.

노이의 판단과 힘을 믿어줄 샘이었다.

-후으으으으읍.

노이가 몸을 뒤로 젖히고 배를 한껏 부풀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

노이가 입을 크게 벌리고 흑마법사가 있는 방향으로 브레스를 뿜었다.

마나가 농축되어 있는 은빛의 서릿발이 노이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실버 드래곤의 브레스는 순식간에 흑마법사를 삼키고, 하필이면 흑마법사가 떠 있던 하늘 아래 있던 세드릭을 삼키고, 그 뒤의 숲을 삼키고.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노이의 브레스에 밑에서는 난리가 났다.

사람들은 브레스의 권역에서 피하기 위해 미친 듯이 뛰어 도망쳤다.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브레스를 맞아 그대로 얼어붙었다.

노이의 은빛 브레스가 지나간 자리로 모든 것이 얼어붙었다.

거대한 숲은 한순간에 얼어붙은 숲이 되었고 언 땅 위로 두터운 서리가 내려앉았다.

얼음 무덤.

노이의 브레스가 지나간 땅은 널브러진 시체와, 사람들, 숲, 모든 살아 있는 것이 꽁꽁 얼어붙어 얼음 무덤처럼 보였다.

웬만한 열과 불로는 결코 녹지 않는 설원의 땅이 되었다.

대낮처럼 환하던 깊은 밤의 빛은 점점 사그라들었다.

마침내 주신의 축복이 이 땅에서 자취를 감추었고, 희미하게 밝아오는 새벽빛에 새파랗게 얼어붙은 설원만이 시린 빛을 뿜었다.

모든 일을 지켜보던 대신관은 탄식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것이 주신이 오래전 내렸던 대재앙의 끝임을.

* * *

레일리는 피곤하여 노이의 등에 앉아 먼 곳을 가만히 응시했다.

노이는 천천히 날개를 움직이며 하늘 위를 날아가고 있었다.

멀리 동녘 하늘에 환한 아침 햇살이 번지며 태양이 떠올랐다.

레일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제 품에 안겨있는 루시테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이 창백하고 몸이 차가웠다.

레일리는 루시테를 더 가까이 끌어안고 몇 번이고 치유마법을 불어 넣었다.

그러나 아무리 끝도 없이 마법을 써도 루시테에게서는 미동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몹시 지치고, 기운 없어 보였다.

“루시테…….”

레일리는 허리를 숙여 그녀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었다.

차가운 몸에서 미약한 온기가 느껴졌다.

“루시테…….”

미안합니다. 늦게 와서.

레일리는 루시테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손끝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루시테를 품에 안은 레일리의 얼굴이 점차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레일리는 매우 깨지기 쉬운 작은 유리잔을 다루듯 루시테를 조심스레 고쳐 안았다.

그는 루시테의 둥근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한참을 가만히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처럼 레일리의 따뜻한 입술이 루시테의 이마에 닿아 있었다.

마치 그렇게 하면 레일리의 온기가 루시테에게 전해지기라도 할 것처럼. 레일리는 그렇게 멈춰 있었다.

날개를 펄럭이던 노이가 그르렁거렸다.

“레일리! 루시는 어때?”

노이의 목소리에 불안과 걱정이 가득 묻어 있었다.

노이도 처음으로 브레스를 썼기에 많이 지친 상태였다.

그러나 루시테를 한시라도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힘차게 날갯짓을 했다.

“아직 깨어나지 않았습니다.”

레일리가 침울하게 대답했다.

“루시…….”

루시테를 보기 위해 뒤로 고개를 한껏 꺾었던 노이는 시무룩하게 얼굴을 바로 했다.

“아까 그거 루시가 한 게 맞는 거지?”

노이가 앞을 보고 날개를 펄럭이며 큰 목소리로 물었다.

레일리는 노이의가 말하는 ‘그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바로 알아챘다.

대낮처럼 밝은 하늘과 신성력이 담긴 치유의 비.

보통 마법사는 아무리 뛰어나도 신성력을 읽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밤하늘을 강타한 그 기운은 얼마나 강하고 짙은지 레일리조차 신성력임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일반인들은 그저 빗물이라고 느낄지 모르겠으나 레일리는 아니었다.

환하고 밝은 기운은 멀리서부터 전쟁터까지 연신 순간이동을 하고 있던 레일리에게까지 닿았다.

주신이 이 세상에 내려왔다고 느껴질 정도로 막대한 기운이었다.

웬만하면 잘 놀라지 않는 레일리의 팔을 타고 소름이 쫙 끼칠 정도였다.

그 기운을 드래곤인 노이가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

덕분에 예상보다 그들이 루시테가 있는 장소를 빨리 찾을 수 있기도 했다.

그 기운의 근원지를, 레일리는 전쟁터에 도착하자마자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루시테…….”

레일리는 루시테의 등 뒤에서 찰랑이는 보랏빛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손 안에 잡히는 머리칼이 몹시 부드러웠다.

지금 그녀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은 몹시 옅어져 있었지만 분명 아까 전 그 기운과 동일했다.

강한 신성력을 가진 예언 속의 성녀.

레일리도 민간에 전해진 성녀에 대한 예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예언 속의 모든 게 루시테와 맞아 떨어졌으니, 더 부정할 것도 없었다.

“레일리? 루시가 맞는 거야?”

레일레에게서 대답이 없자 노이가 다시 한번 소리쳤다.

“그래요. 루시테가 한 게 맞습니다. 그녀가 신성력을 쓴 겁니다.”

레일리의 대답에 노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사람들이 성녀를 찾겠다고 나서면 루시테가 곤란해질지도 모른다.

레일리와 노이는 모두 깊은 생각에 빠졌다.

루시테를 되찾았으나 앞으로가 걱정이었으니.

* * *

많은 것을 잃은 전쟁이었다.

누구 하나 승리자라 뚜렷하게 결정지을 수 없었다.

오히려 메이븐과 이크릭스 모두 전쟁의 패배자였다.

나라 안은 엉망이었고 전란과 기근이 겹쳐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러웠다.

이안은 쓰디쓴 패배감과 그 무엇 하나 얻지 못한 채로 나라로 되돌아갔다.

딱 하나. 대신관이 살아서 그와 함께했다.

대신관 덕분에 이안은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는 전쟁일지라도 큰 공을 세운 마냥 칭송을 받았다.

대신관의 목숨을 구한 황태자.

이안은 메이븐에서 전쟁영웅이라는 엄청난 명예를 얻었다.

이안은 굳이 그 소문을 정정하지 않았다.

진실은 이미 가려졌고 드러나는 것은 소문에 부풀려진 것들 뿐이었으나.

그는 오히려 그 소문과 부풀려진 명예를 철저히 이용했다.

이안은 황권을 탄탄하게 다졌고, 곧바로 황위 계승을 진행했다.

대신관에게 황관을 건네받고 이안은 마침내 메이븐의 황제로 등극했다.

딸을 잃어버린 두 황비는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전전긍긍했으나, 전쟁영웅이 된 이안에게 감히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했다.

제 딸들인 비올레타와 시드니아를 누구 입으로 이크릭스로 보내 달라 그렇게 요구했던가. 바로 자신들이었다.

이안에게 협박과 괴롭힘,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비올레타와 시드니아를 이크릭스로 보내 달라 외쳤더랬다.

이안은 그저 비올레타와 시드니아 모두 전쟁 중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을 뿐이었다.

말이 실종이지 드래곤이 브레스를 쏘아 시체도 찾기 어려운 마당이니 둘 다 죽은 거나 다름없었다.

죽어버렸다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두 황비는 망연자실하여 이안이 황위에 오르는 것을 쓰디쓴 얼굴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이라곤 어떤 명예도 권력도 없었다.

딸을 이용해 한 권력 차지해보려던 자들의 최후였다.

한편 이크릭스는, 이안의 치세 아래 빠르게 정리되어 가는 메이븐과는 다르게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제국의 구심점 황제 자리가 공석이었으니까.

“제발! 제발 황위를 이어 주십시오!”

“2황자 전하! 제발 황위를 이어 주십시오!”

고위 귀족들, 행정관들, 기사들이 모조리 레일리의 집 앞에 모여 며칠 내내 진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집에도 가지 않고 목소리를 높여 하루 온종일 레일리에게 황제가 되어달라며 애원했다.

레일리의 활약은 이미 알 사람은 다 알았다.

드래곤의 호위를 받으며 전쟁을 종결시킨 이크릭스의 영웅.

대마법사 레일리는 이미 이크릭스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가 아니라면 누가 황위를 잇는단 말인가.

이 상황에서 대마법사인 그보다 현명한 통치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으리라고 모든 관료들과 귀족들은 생각했다.

“하아…….”

마법으로 변장한 레일리가 멀리서 그 꼴을 보곤 한숨을 삼켰다.

레일리는 집에서 챙겨오려던 물건들이 있었으나 내버려 두고 발걸음을 돌렸다.

대체 언제쯤 돌아가려나 지켜봤으나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데도 그들은 돌아갈 생각을 안 했다.

레일리는 심란한 표정으로 돌아와 산 중턱 하우스의 문을 두드렸다.

해질녘의 산 중턱 하우스는 초록빛의 싱그러운 풀냄새와 짙은 꽃향기가 가득했다.

저택의 뒤 하늘에는 주홍빛 물감을 풀어놓은 듯 온통 노을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곧 집 안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에단과 리브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레일리를 맞이했다.

“레일리 님!”

“레일리 님, 다녀오셨어요!”

1층이 시끄럽자 노이와 시드니아도 계단을 내려왔다.

노이는 폴리모프를 한 상태라 은빛 머리칼의 소년의 모습이었다.

이제 너무 커져 버린 본 모습으로는 집 안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레일리!”

노이가 후다닥 달려와 에단과 리브의 옆에 서서 레일리를 불렀다.

“다녀오셨어요. 레일리 님.”

시드니아는 노이의 뒤에서 수줍게 인사했다.

이제 완벽하게 산 중턱 하우스의 일원으로 스며든 시드니아는 에단과 리브와 함께 있어도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루시테는 좀 어떻습니까?”

레일리는 집 안으로 들어서며 루시테의 안부부터 물었다.

그가 나갔다 온 시간은 고작 하루 반나절이지만, 그 사이 혹시 루시테가 깨어났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그러나 레일리의 물음에 모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리브는 울먹였고 시드니아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루시는 아직 안 일어났어.”

노이가 대표로 레일리에게 대답했다.

“그렇군요.”

레일리는 외투를 벗고 가발을 벗고. 곧바로 위층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향했다.

가족들은 레일리가 누구에게 가는지 뻔히 알고 있기에 굳이 그의 뒤를 따라가지 않았다.

레일리가 루시테를 돌아보는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노이는 테이블에 앉아 책을 펼쳐 들었고 시드니아는 차를 꺼냈으며 에단은 자신의 방으로, 리브는 부엌으로 갔다.

지평선에 걸려있던 해가 완전히 넘어가고 땅거미가 내려앉았다.

방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침대맡 탁자에서 타오르는 초가 은은하게 방 안을 비추었다.

레일리는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보랏빛 머리칼이 어지러이 침대 위에 흐트러져 있었고 루시테의 눈은 여전히 꼭 감겨 있었다.

“루시테. 언제 일어나실 겁니까?”

레일리의 손가락이 루시테의 얼굴에 닿을 듯 말 듯 아주 살짝 떨어진 채로 루시테의 얼굴 위를 훑었다.

둥근 이마. 부드러운 볼. 오뚝한 코 끝.

루시테가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줄 것만 같은데. 그녀의 눈은 뜨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루시테.”

레일리는 루시테의 볼을 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레일리의 얼굴에 금세 괴로움과 슬픔이 번져나갔다. 그는 루시테의 침대맡에 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조금 더 루시테를 일찍 찾았더라면 루시테가 이렇게 될 일이 없지 않았을까.

그런 후회가 계속해서 레일리를 괴롭혔다.

만약 자신이 나브레의 유산을 파괴하는 것을 포기하고 루시테부터 찾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이런 일은 없지 않았을까.

루시테가 자유를 갈망하는 그의 욕심으로 쓰러진 것만 같아 레일리는 마음이 괴로웠다.

깨어나지 않는 루시테를 지켜보며 레일리는 새삼스레 그의 안에 그녀가 얼마나 크게 자리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루시테. 이제 그녀가 없는 삶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바깥의 소동이 다 무슨 일이랴. 자신이 있을 곳은 바로 이곳이었다. 루시테가 있는 이곳.

진정으로 그를 이해해주고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여자는 그녀뿐이었다.

“제발. 제발 일어나요. 루시테.”

레일리는 루시테의 손을 꼭 붙들고 자신의 입술로 가져갔다.

레일리는 그대로 루시테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득 루시테의 반대편 손끝이 움찔 떨렸다.

레일리는 루시테의 손끝이 움직인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저 그녀의 손에 이마를 대고 얼굴을 묻고 괴로워하고 있었다.

‘으음…….’

루시테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희미했던 시야가 점점 명확해졌다. 루시테는 눈을 깜박이며 초점을 찾았다.

드리워진 긴 속눈썹 아래로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녀의 눈동자 위로 샛노란 촛불이 일렁였다.

루시테는 눈동자를 움직였다.

눈꺼풀이 뻑뻑했으나 피곤하지는 않았다.

빠져나갔던 성력이 다시 채워진 듯 몸이 상쾌했다.

루시테는 눈을 들어 주위를 보았다.

익숙한 천장과 창문이 보였다. 그녀의 방이었다.

쓰러지기 전 마지막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레일리가 자신을 이곳으로 무사히 데리고 온 걸까.

문득 루시테는 제 손을 잡고 있는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너무 오래 잡혀 있었는지 그 온기를 너무 자연스럽게 느껴 눈치채지 못했다.

루시테는 눈동자를 내려 침대맡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있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은빛 머리통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는 그녀의 손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푹 수그리고 있었다.

익숙한 온기. 익숙한 향기.

방 안에 그의 향기가 가득 퍼져 있는 것 같았다. 시원하고 달큼한 머스크 향.

루시테는 깊은 안도감을 느꼈다.

레일리가 그녀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믿을 수 없는 평온함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루시테는 오른손을 들어 올려 천천히 레일리에게로 가져갔다.

그녀는 고개를 수그리고 있는 레일리를 살짝 건드리려 했다.

그러나 인기척을 느낀 레일리가 루시테의 손이 그에게 채 닿기도 전에 먼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크게 뜨인 레일리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몇 초간의 정적이 흐르고 루시테는 조심스레 레일리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레일…….”

그녀의 입술에서 레일리의 이름이 채 다 나오기도 전에 레일리가 벌떡 몸을 일으켜 루시테의 손목을 잡았다.

레일리의 몸이 기울어지는가 싶더니, 레일리는 어느새 루시테의 바로 위에 있었다.

레일리가 몸을 지탱한 푹신한 침대가 움푹 들어갔다.

루시테의 코끝에 닿을 듯 레일리의 숨결이 가까웠다. 루시테의 긴 연보랏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레일리의 시선이 찌르는 듯 따가웠고 흘러내리는 듯 다정했다.

“루시테…….”

레일리가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목소리가 몹시 낮았다.

레일리가 손을 들어 루시테의 얼굴에 조심스레 제 손끝을 가져다 대었다.

루시테는 움칠 몸을 떨었다.

그의 손이 닿은 자리가 불에 댄 듯 화끈거렸다.

그러나 루시테는 레일리의 손길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언제나 침착하던 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으니까.

레일리는 떨리는 손길로 루시테의 이마, 볼, 눈, 입술을 어루만졌다.

루시테가 눈을 뜨기를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던가.

놀라움과 반가움, 감격이 담긴 레일리의 손길이 느릿하면서도 대범했다.

루시테는 레일리의 손길 아래 자신의 모든 것이 낱낱이 드러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

“루시테…….”

레일리의 쉰 듯한 낮은 목소리가 떨림으로 갈라졌다.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요?”

레일리의 흔들리는 은빛 눈동자에 루시테의 얼굴이 한가득 담겼다.

그는 루시테가 깨어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듯했다.

루시테는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레일리의 얼굴이 천천히 그녀에게로 가까이 다가왔으니까.

루시테는 흡 숨을 삼켰다.

“보고…… 싶었습니다.”

레일리가 루시테에게로 얼굴을 내렸다. 레일리의 은빛 머리칼이 루시테의 볼을 스치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루시테는 긴장하여 몸을 바짝 굳혔다.

레일리의 이마가 루시테의 이마에 닿았다.

레일리의 코가 닿을 듯 말 듯 아슬하게 루시테의 코끝을 스쳤다.

그리웠던 레일리의 따뜻한 온기가 온전히 그녀를 감싸 안는 것 같았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긴장으로 떨던 루시테의 떨림이 가라앉았다.

루시테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저도 보고 싶었어요. 레일리.”

루시테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루시테의 목소리에 레일리의 몸이 들썩였다.

레일리는 팔에 힘이 풀린 듯 루시테의 옆으로 풀썩 몸을 누였다.

좁은 침대 안에 마주 보고 몸을 누인 두 남녀의 위로 새하얀 달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레일리의 은빛 머리칼과 루시테의 보랏빛 머리칼이 은은하게 반짝였다.

레일리의 큰 손이 루시테의 손을 덮었고 루시테와 레일리는 이마를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붙인 채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시테는 레일리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반듯한 이마. 오뚝한 코. 끝이 살짝 올라간 눈매. 깊은 은빛 눈동자.

모든 것이 루시테가 기억하던 그의 모습 그대로였다.

눈을 뜨자마자 가장 그리웠던 사람의 얼굴을 보다니.

‘나는 행운아가 틀림없어.’

루시테는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루시테.”

레일리가 손을 들어 루시테의 볼과 머리칼을 또 매만졌다.

마치 눈을 감았다 뜨면 그의 눈앞에서 루시테가 사라져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레일리는 끊임없이 루시테의 온기를 손끝으로 느끼려 했다.

루시테는 천천히 눈을 깜박였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에 레일리의 절절하고 애틋한 얼굴이 한가득 담겼다.

아무리 그녀가 연애 경험이 전무하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적어도 친구를 바라보는 눈은 아니라는 것.

어쩌면 레일리도 그녀와 같은 마음일지도 몰랐다.

루시테의 가슴이 쿵쿵 뛰었다.

레일리.

그리운 레일리.

언제 이렇게 그가 그녀의 마음에 한가득 들어와 버린 걸까.

몇 번의 인생을 회귀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사랑을 꿈꿔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 생은 만약 누군가 그녀와 함께한다면, 그 사람은 레일리 말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서로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하고 보듬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런 존재였다. 레일리는.

루시테는 눈을 꽉 감았다 떴다. 그녀는 온 힘과 용기를 쥐어짜내어 레일리에게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

쪽.

작지만 선명한 소리가 적막한 방 안에 울렸다.

제자리로 돌아온 루시테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둘의 눈이 잠시 마주쳤고.

루시테가 내뱉은 숨을 채 다시 들이마시기도 전에 레일리가 그녀에게로 달려들었다.

레일리는 루시테의 머리 뒤를 잡고 그에게로 거칠게 끌어당겨 제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마치 두 동강 났던 조각이 제자리를 찾은 것처럼. 목이 마른 사람이 물을 정신없이 들이키는 것처럼.

레일리는 루시테의 입술을 탐했다.

숨이 막힌 루시테가 레일리의 어깨를 두드리자 레일리는 그제야 루시테를 놓아주었다.

그는 루시테를 제 품 안에 꽉 껴안았다.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루시테.”

루시테를 품에 안은 레일리의 어깨가 떨렸다.

“다시는 당신 곁을 떠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을 위험에 빠지게 두지 않겠어요.”

루시테를 품에 파묻듯 껴안은 레일리의 목소리가 절절했다.

루시테와 떨어져 있는 동안, 그리고 그녀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녀를 향한 많은 감정을 깨달았더랬다.

루시테가 그에게 얼마나 커다란 존재인지.

그녀가 없는 삶은 얼마나 하찮은지.

이제는 루시테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녀가 있는 곳이 레일리가 진정한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저도 사랑해요, 레일리.”

루시테는 팔을 들어 레일리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둘은 좁은 침대에서 서로를 껴안으며 진정한 평온을 느꼈다.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은 것만 같았다.

둘은 밤이 새도록 그렇게 서로를 껴안은 채 온기를 나누었다.

* * *

동이 터 오르는 아침.

루시테와 레일리는 손을 잡고 함께 1층으로 내려왔다.

루시테의 발걸음이 가뿐했다.

오랫동안 누워있다가 일어났음에도 몸이 가벼웠다.

루시테는 전쟁 때 이후로 바닥났던 성력이 몸 안에 다시 넘치는 것을 느꼈다.

“몸은 괜찮아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요?”

레일리는 루시테가 걱정되는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연신 안부를 확인했다.

“그럼요. 레일리.”

루시테는 레일리에게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둘은 따뜻한 차를 타 아주 오랜만에 창가의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아 티타임을 가졌다.

큰 창밖으로 차츰 어스름이 거두어지며 산새들이 창틀에 내려앉아 지저귀었다.

루시테를 차의 향을 음미하며 뜨거운 찻물을 천천히 목으로 넘겼다. 따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루시테. 물어볼 게 있습니다.”

루시테의 맞은편에서 햇살을 등지고 가만히 차를 마시던 레일리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루시테는 고개를 들었다.

레일리는 퍽 고민스러운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레일리의 표정에 루시테는 덩달아 긴장했다. 이제 모든 고통이 끝난 줄 알았는데 또 문제가 생긴 걸까.

“무슨 일이에요?”

루시테는 조심스레 물었다.

레일리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간 루시테를 빤히 응시했다.

그의 수심에 찬 은빛 눈동자는 한없이 깊어 보였다.

“저더러 황제가 되어달라더군요.”

마침내 레일리가 꺼내 놓은 얘기에 루시테는 눈을 크게 떴다.

레일리는 찻잔의 손잡이를 꽉 잡았다 놓고는 말을 이었다.

“루시테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네?”

루시테는 얼빠진 소리를 냈다.

레일리가 황제라니.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였으니까.

“황후가 되고 싶으십니까?”

“네?”

루시테의 입에서 한층 더 얼빠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레일리가 황제가 되는 것도 놀라운데 갑자기 황후가 되고 싶냐니.

“제가 황제가 되면 루시테는 황후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루시테가 가는 곳은 어디든 함께 할 거니까요.”

루시테는 한껏 벌렸던 입을 간신히 다물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레일리가 장난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루시테는 곰곰이 지난날을 떠올렸다.

전쟁터에서 있던 기억이 흐릿했다.

“알렉산더. 알렉산더는 어떻게 되었나요?”

그토록 황제 자리를 욕심내던 황태자 알렉산더가 레일리를 두고 보고 있을 리가 없을 터인데.

루시테의 목소리에 조바심이 묻어났다.

혹여 또 레일리가 목숨의 위협을 받을까. 평온한 일상이 망가질까 봐 루시테의 가슴이 떨렸다.

“알렉산더는 죽었습니다. 그 전쟁에서요.”

“알렉산더가 죽었다고요?”

레일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놀란 루시테를 향해 그간 있었던 일을 찬찬히 이야기해주었다.

그래서 현재 이크릭스의 황위가 공석이며, 나라의 모든 귀족이며 기사들이며, 백성들이며 틈만 나면 그의 집 앞에서 황제가 되어 달라고 외친다는 사실도.

“그랬군요…….”

“루시테.”

레일리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레일리가 루시테의 한쪽 손을 잡아 올렸다.

루시테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다정했고, 그윽했다. 깊고 짙은 감정이 묻어났다.

“루시테. 황후가 되고 싶나요?”

레일리의 서늘한 목소리가 루시테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루시테는 레일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 레일리는 진심일 터였다.

진심으로 자신에게 황후가 되고 싶냐고. 그렇게 물어보는 것이다.

루시테는 눈을 내리깔고 가만히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은 길지 않았다. 결론도 단순했다.

그녀는 다시는 황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이크릭스든 메이븐이든 어디든.

황궁은 루시테에게 감옥 같은 곳이었다.

그 복잡하고 더러운 정치판의 한 가운데에 끼어드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그러나 레일리와 황후 자리를 놓고 고민한다면…….

루시테는 입술을 깨물었다.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자신이 황후가 된다니.

생각만 해도 앞이 깜깜해지는 것만 같았다.

루시테는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기 전에 다시 레일리를 바라보았다.

레일리는 여전히 그녀의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레일리는…… 레일리는 어떻게 하고 싶으신데요?”

루시테의 물음에 레일리는 그저 씁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레일리, 레일리는 황제가 되고 싶어요?”

루시테가 재차 물었다. 조금 전보다 좀 더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잠시 침묵하던 레일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아뇨. 저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루시테.”

레일리는 자신의 생각을 꺼내 놓자 약간 후련해 보였다.

레일리는 그의 마음속에 있던 고민들을 천천히 털어놓았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제가 쓰는 힘은 황실의 피로 물려받은 것입니다. 이 상황에 황실을 외면하는 게 맞는지. 전쟁 이후로 불안정한 이크릭스를 빠르게 안정화하려면 누가 봐도 제가 황위를 잇는 게 맞는데…… 정작 저는 황제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루시테는 레일리의 이야기를 가만히 경청했다.

“하지만 만약 루시테가 황후가 되고 싶다면…… 꼭 황후가 되고 싶다고 한다면…….”

레일리는 미간을 좁히고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아뇨. 레일리. 저는 황후가 되고 싶지 않아요.”

레일리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루시테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그녀의 마음을 이야기했다.

“레일리. 우리 더 이상 괴로워하지 말아요. 우리 둘 다 황실을 떠나고 싶어 그렇게 애를 썼잖아요. 이제 행복해져요.”

괴로워하던 레일리가 잠시 멍한 눈으로 루시테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레일리. 당신이 꼭 그 짐을 떠맡을 필요는 없어요. 당신 동생 한 명 더 있잖아요.”

레일리가 의아하다는 듯 한쪽 눈썹을 올렸다.

“3황자요. 당신 동생. 질리언 미켈라이 이델바르트 델 이크릭스.”

루시테는 눈을 빛내며 이크릭스 황가의 계보를 떠올렸다.

연정소설에서도 읽었던 셋째 황자. 레일리의 이복동생이자 알렉산더의 친동생.

은빛 유전을 물려받아 눈이 레일리와 같은 은빛이며 머리는 알렉산더와 같은 붉은색에 가까운 적갈색이었다.

비록 셋째 황자가 알렉산더의 친동생이지만 그 성품은 많이 다르더랬다.

유약하며 온순하고 책에 파묻혀 사는 셋째 황자 질리언.

그라면 레일리의 빈자리를 대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도 은빛 유전을 물려받은 이크릭스의 핏줄이니 말이다.

“지금은 사람들이 이렇게 나와도 당신이 황위를 포기하면 결국 그 자리는 질리언 황자가 물려받을 수밖에 없을 거예요.”

“질리언. 그 녀석이 있었군요.”

레일리는 새삼스럽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질리언은 언제나 알렉산더를 피해 황궁의 한구석에 숨죽여 살았다고 들었다.

그래서 레일리도 질리언을 실제로 본 적이 몇 번 안 되었기에 그 녀석은 레일리의 기억 속에 희미했다.

그러나 그 녀석의 존재만으로도 지금 상황은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여전히 레일리가 강력한 황위 계승 후보임에는 변함이 없지만, 정당한 황위 계승 후보가 레일리 말고도 한 명 더 있다는 뜻이니.

어째서 그 녀석을 잊고 있었을까.

모두가 레일리를 찾아 대는 지금, 안 그래도 희미했던 3황자의 존재감이 더욱 흐릿해져 있었다.

레일리뿐만이 아니라 다른 귀족들 모두 질리언은 잊어버린 것처럼 굴고 있지 않은가.

레일리는 붙들고 있던 루시테의 손에 입을 맞췄다.

“감사합니다. 루시테. 당신은 역시 현명해요.”

“뭐, 뭘요.”

루시테는 갑작스런 레일리의 칭찬에 볼을 붉히며 대답했다.

레일리는 루시테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없이 사랑스럽고 소중했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루시테에게로 가까이 몸을 기울였다.

그때 뒤쪽에서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레일리 님?”

잠에서 깬 리브가 눈을 비비며 레일리와 루시테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아, 아가씨?!”

뒤늦게 루시테를 발견한 리브가 놀라 들고 있던 컵을 툭 떨어뜨렸다.

나무로 만든 컵이 투박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굴렀다.

“세상에! 정말 아가씨예요?!”

리브가 놀라 외치며 루시테에게로 달려왔다.

레일리는 리브를 위해 옆으로 비켜 서주었다.

리브는 루시테를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가 않는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오랜만이야. 리브.”

“아가씨이…….”

루시테의 다정한 목소리에 리브의 눈망울에 금세 눈물이 차올랐다.

루시테는 자리에서 일어나 리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침부터 울지 마.”

루시테의 다독임에 리브의 감정이 더욱 북받쳐 올랐다.

아가씨. 리브의 주인이자, 은인이자 소중한 가족.

얼마나 애타게 속을 태우며 기다려왔던가.

“보고 싶었어요, 아가씨.”

리브는 루시테의 품에 얼굴을 묻고 그녀의 허리를 꼭 껴안았다.

루시테는 괜히 마음이 아파 그저 리브를 마주 안고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잠에서 깨어난 다른 이들도 하나둘 계단을 내려왔다.

시드니아, 에단. 그리고 노이까지.

“아가씨!”

“루시테 언니!”

“루시이이!”

저마다 깨어난 루시테를 보자마자 그녀를 향해 정신없이 달려왔다.

루시테는 그들 모두를 다독여주느라 정신없는 아침을 보내야 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을 때. 루시테는 모두를 한자리에 모았다.

“리브, 에단. 너희가 눈치챘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메이븐의 저주받은 황녀야.”

리브는 기절할 듯 놀라 입을 벌렸지만, 에단은 의외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루시테는 그간 있었던 일을 그녀의 소중한 가족들에게 하나하나 털어놓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묵묵히 들어주는 가족들 앞에서, 그녀의 아픈 과거를 꺼내어 놓는 일이 하나도 쓰라리지 않았다.

오히려 속이 시원하고. 잔뜩 어질러진 방 안을 깨끗이 정리한 것처럼 후련했다.

하나둘 꺼내어 놓는 가슴 아픈 일들에 차츰 리브의 얼굴이 울상이 되어 갔다.

에단과 노이도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신분을 넘어, 리브와 에단은 진심으로 루시테의 고통에 힘들어했다.

덕분에 루시테는 리브와 에단이 자신을 다르게 대할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남았던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신분 때문에 다르게 대하기에는 그들은 이미 너무도 깊은 사이였다.

“언니. 미안해.”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조용히 있던 시드니아가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루시테는 손을 뻗어 시드니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널 용서할게.”

루시테의 짧지만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그 대답에.

시드니아는 하염없이 소리 없는 눈물을 쏟았다.

* * *

루시테가 깨어나고 산 중턱 하우스는 시끌벅적해졌다.

집주인이 깨어났으니 더 이상 슬픔에 잠겨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마음껏 웃고, 떠들고. 부지런히 일했다.

에단이 가꾸는 정원은 날이 갈수록 아름다워졌고, 리브가 관리하는 텃밭에는 싱싱한 채소들이 앞다투어 자라났다.

시드니아는 리브에게서 요리를 배우기도 하고 함께 텃밭을 가꾸기도 했다. 루시테에게서는 카트라나를 배워 루시테의 필사와 번역 일을 도왔다.

시드니아는 메이븐의 황성으로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았는지, 루시테가 있는 산 중턱 하우스에 완전히 정을 붙이고 한 가족이 되었다.

노이는 종종 사라졌는데.

용에 대해 연구를 하겠다며 나브레 산을 헤집고 다니느라 매일같이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레일리 역시 몹시 바빠져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레일리는 더 이상 회피하기를 그만두고 당당하게 황성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지방으로 피신하여 숨을 죽이고 있던 질리언 황자를 찾아내어 황위 계승 준비를 시작했다.

레일리는 분명하게 황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질리언이 황제가 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도왔다.

엉망이 된 나라 안팎의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 정세를 안정시켰다.

레일리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지만, 어지러웠던 이크릭스가 차츰 눈에 띄게 안정되고 있었다.

“흠흠. 흠.”

루시테는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커다란 붓에 물감을 한가득 묻혔다.

시원하게 붓을 놀리니 흰 캔버스에는 금세 노을이 물든 주홍빛 하늘이 가득 채워졌다.

시드니아가 번역 일을 도와주니 그녀의 삶에도 큰 여유가 생겼더랬다.

그래서 그토록 하고 싶었던 그림을 이제야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루시테는 그녀의 방 안에, 창밖이 보이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에 이젤을 놓고. 천천히 흰 캔버스 안을 채워갔다.

물감을 풀어놓은 듯 온통 붉게 물든 하늘이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루시테는 그 풍경을 캔버스 안에 담고 있었다.

여름이 다 지나고 가을이 되어 바람이 꽤 차가워졌다.

활짝 열린 창밖으로 불어 들어오는 가을바람이 저무는 가을의 냄새를 묻혀 들어왔다.

바람결에 루시테의 하나로 올려 묶은 긴 보랏빛 머리칼이 마구 흔들렸다.

리브는 밑에서 저녁 먹은 식기를 다 정리한 후 시드니아와 티타임을 갖고 있었고, 에단은 방에서 책을 읽었으며 노이와 레일리는 아직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루시테는 어두워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초에 불을 켰다.

노을이 지고, 땅거미가 내려앉고 사방이 점차 어두워졌다.

루시테는 달그락거리며 물통과 이젤을 정리했다.

막 이젤을 들어 구석으로 옮기는데, 그녀의 뒤로 인기척이 느껴졌다.

“루시테.”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고요한 정적 속에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루시테의 몸이 우뚝 멈췄다. 그녀가 발밑으로 장신의 긴 그림자가 늘어졌다.

익숙한 목소리와 익숙한 존재감. 익숙한 그의 향기.

루시테는 뒤를 휙 돌아봤다.

어깨 가에서 가지런히 찰랑이는 결 좋은 은빛 머리칼.

깊고 반짝이는 은빛 눈동자를 가진 장신의 남자가 그윽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꼬박 보름만이었다.

레일리가 그동안 어찌나 바빴는지 얼굴 한 번 보기가 힘들었는데.

루시테의 긴 보랏빛 속눈썹 아래로 그림자가 졌다.

루시테는 이젤에서 손을 떼고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창밖으로 넓고 검푸른 밤하늘이 펼쳐졌고, 별빛이 스며들어오는 아래 레일리가 반짝였다.

“루시테.”

레일리가 루시테에게로 손을 내밀었다.

루시테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 홀린 듯 천천히 레일리에게로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레일리는 루시테가 제 손을 잡자마자 루시테의 허리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아!”

루시테는 갑자기 끌어당겨지자 깜짝 놀라 숨을 삼켰다.

레일리는 씩 입술을 끌어올리더니 루시테를 제품에 꼭 껴안았다.

“보고 싶었어요.”

레일리의 나지막한 속삭임이 루시테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이제 모든 게 끝났어요. 루시테. 당신과 어디든 영원히 함께할 수 있어요.”

레일리의 목소리에 뜨거운 열기가 묻어났다.

기쁨과 열망이 가득 담겨 루시테에게 그가 얼마나 진심인지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레일리. 질리언 황자가 황위를 물려받았어요?”

루시테는 고개를 들어 레일리를 올려다보았다.

레일리가 루시테의 팔목을 꽉 잡았다.

“네. 내일이 대관식입니다. 헤카레트의 대신관을 초청했어요.”

헤카레트의 대신관 이야기에 루시테의 눈이 커졌다.

레일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잠시 바람 쐬며 이야기 좀 할까요?”

레일리의 부드러운 음성에 루시테는 고개를 끄덕였다.

레일리는 침대맡에 걸쳐 있는 루시테의 숄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숄이 순식간에 레일리를 향해 날아왔다.

레일리는 루시테의 어깨에 숄을 둘러주곤 엄지와 검지를 튕겼다.

루시테와 레일리의 발밑이 흰빛으로 둘러싸였다.

그들을 둘러싼 흰 빛무리가 사라질 즈음 차가운 바람이 루시테의 얼굴에 부딪혔다.

루시테는 눈을 깜박이다 조심스레 눈을 떴다.

“!”

루시테의 눈앞으로 광활한 어둠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쏴아아아아.

발밑으로 파도가 철썩였다.

거대한 물결이 절벽에 부딪혀 쉼 없이 부서졌다.

바닷바람에 루시테의 긴 보랏빛 머리칼이 마구 휘날렸다.

“이곳은…….”

루시테가 멍한 표정으로 앞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레일리는 말없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레일리의 손짓에 따라 은은한 빛을 내는 작은 구슬들이 허공에 둥둥 떠올라 반딧불이처럼 레일리와 루시테의 주위를 맴돌았다.

레일리는 루시테의 허리를 껴안은 채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섰다.

루시테의 시야는 밤하늘에서, 끝도 없이 펼쳐진 수평선으로 천천히 내려왔다.

“아.”

문득 루시테의 발아래로 부드러운 모래가 밟혔다.

루시테는 발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모래를 밟았다.

사부작 사부작.

발 아래로 모래가 뭉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그들은 모래 위에 앉아 손을 잡고 한참을 말없이 파도가 부서지는 바다를 응시했다.

“바다는 처음 봐요.”

바다를 바라보던 루시테가 레일리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레일리도 루시테를 마주 바라보았다.

레일리는 물의 정령왕 엘라임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저 아이가 죽지 못하고 계속해서 삶을 반복하는 건 다 나 때문이야. 저 아이나 나나 주신에게 저주를 받았지.」

이해할 수 없는 말들이 많았지만 레일리는 엘라임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주의 깊게 들었더랬다.

「그저 아이는 탈 없이 나이 들어 죽어야 무의미한 회귀를 끝낼 수 있을 거다. 나는 그 끝을 봐야만 무로 돌아갈 수 있고.」

무의미한 회귀. 죽지 못하고 삶을 반복하는 것.

레일리는 루시테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앳된 어린 모습에서 벗어난 어엿한 여인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깊은 눈빛만은, 저주가 풀리기 전이나 풀린 후나 똑같았다.

깊고 슬픈 눈.

그녀의 눈은 어느 때는 몹시 오래 살아온 사람 같은 빛을 띠곤 했다.

레일리는 엘라임의 말을 어느 정도 깨달을 수 있었다.

루시테는 자신이 짐작할 수 있는 것보다도 더 큰 상상도 하지 못할 고통을 겪어왔다는 것.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고작 저주를 풀 수 있는 조건이 무탈하게 살다가 죽는 것이겠는가.

그녀가 살았을 삶을 짐작하면 그저 레일리는 심장이 욱신거리는 듯했다.

레일리는 손을 들어 루시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레일리?”

놀란 루시테가 눈을 빠르게 깜박였다.

레일리는 그녀가 몹시 사랑스럽다는 듯 부드럽게 눈을 휘었다.

엘라임이 한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직접 루시테에게 물을 수도 있었으나 레일리는 그러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저 이 사랑스럽고 소중한 여자를 한평생 행복하게 해주리라.

그녀를 따라다니는 지긋지긋한 저주에서 그가 직접 해방해 주리라.

그렇게 레일리는 마음먹었다.

레일리는 손을 내려 루시테의 볼을 매만졌다.

“사랑해요. 사랑합니다. 루시테.”

레일리의 뜨거운 고백에 밤바다의 차가운 바람에도 루시테의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제가 그대를 자유롭게 해주겠습니다.”

당신을 얽매는 모든 것으로부터.

메이븐이든, 저주든, 그 무엇이든.

반드시 루시테를 자유롭고 행복하게 해주리라.

루시테를 바라보는 레일리의 눈동자가 뜨거웠다.

루시테는 저도 모르게 치맛자락을 꽉 잡았다.

머리끈이 흘러내려 머리칼이 마구 휘날리는데도 머리를 잡아 정리할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먹먹했다.

자유롭게 해주겠다는 그의 말이 그 어떤 말보다 루시테의 마음을 울렸다.

그와 함께하면 정말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누구와 있을 때보다도 더.

사랑하는 그의 곁에 있는 것이야말로, 그와 함께 그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사는 것이야말로 루시테의 진정한 행복이 될 터였다.

그리고 그렇게 해주겠다는 약속을 레일리는 지킬 것 같았다.

루시테는 레일리를 믿었다.

루시테는 제 볼을 어루만지고 있는 레일리의 손 위로 그녀의 손을 덮었다. 그리고 그의 손을 꽉 잡았다.

“사랑해요. 레일리. 당신이 필요해요.”

루시테의 대답에 레일리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그녀를 그의 품으로 확 끌어당겨 껴안았다.

루시테를 품에 안은 레일리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레일리가 사랑에 빠졌대!

-사랑에 빠진 레일리!

어둠의 정령과 물의 정령이 레일리와 루시테의 주위를 포르르 날아다니며 재잘거렸다.

레일리가 루시테의 어깨를 짚고 그녀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로 천천히 제 입술을 가져갔다.

부드럽고 다정하고.

뜨거운 열기를 품은 입술이 부드럽게 루시테의 여린 입술을 머금었다.

바람이 불었고 파도가 철썩였다.

밤의 정령과 물의 정령들이 노래하듯 조잘거렸으며, 허공에는 빛을 담은 작은 구슬들이 둥둥 떠 있었다.

루시테의 뺨은 타오를 듯 붉게 달아올랐고, 그녀가 행복해하자 신성한 기운이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초가을임에도 근처의 숲에 때아닌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꽃잎을 휘날렸다.

루시테 클라우디오.

헤카레트의 축복을 받은 이 땅의 유일한 성녀이자, 다시없을 강대한 성력을 지닌 그녀의 축복이 바닷가 근처의 마을에까지 미쳐, 마을에는 때아닌 단비가 내려 지면을 적셨다.

루시테와 레일리는 한참을 깊이, 깊이 입을 맞추었다.

* * *

“질리언 미켈라이 이델바르트 델 이크릭스 3황자. 그대에게 주신 헤카레트의 이름으로 황제의 관을 드립니다.”

대신관 렘브란트가 주신의 이름으로 축복을 하고 질리언에게 황제의 관을 씌웠다.

“와아아아아! 황제폐하 만세!”

“황제폐하 만세!”

사방에서 백성들이 환호했고, 성대한 대관식이 무탈하게 진행되었다.

레일리와 루시테는 손을 잡고 사람들 사이에 몰래 숨어들어 질리언 황자의 대관식을 지켜보았다.

질리언이 황관을 쓰고, 황제의 홀을 쥐고. 붉은 망토를 두른 채 위엄 있는 모습으로 마차를 타고 나와 백성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비록 황성 아덴티움에 위엄있게 펼쳐져 있던 안티매직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대대로 황제를 상징했던 사자궁은 폭발로 가루가 되어버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질리언 황제를 반겼다.

역대 황제 중 그 누구도 하지 않은 일을 한 황제였다.

백성을 위한 정책, 백성을 돌보는 정책.

질리언은 제 형 알렉산더를 끔찍하게 싫어했고, 마찬가지로 제 아버지도 증오했던 레일리의 동류였다.

질리언은 레일리의 조언을 기꺼이 받아들여 전후 복구에 힘썼으며 백성들의 고충을 외면하지 않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안티매직과 가루가 된 사자궁은 오히려 질리언 황제가 앞으로도 백성을 위한 선정을 펼치겠다는 상징이 되어, 더욱더 백성들의 칭송을 받게 되었다.

2황자 카일러스이자 대마법사 레일 리가 드래곤이 되어 제국을 수호하고 사라졌다며 그를 새로운 수호룡으로 신격화하기도 했다.

카일러스라는 수호룡에 힘입어, 질리언은 황위를 공고히 다졌다.

그 누구도 3황자 질리언의 황위 계승을 반박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제 유일무이한 황실의 후손이었으니까.

“괜찮아요?”

루시테는 레일리의 옷소매를 잡았다.

“무엇이 말인가요?”

레일리가 빙그레 웃으며 루시테를 내려다보았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레일리를 제국의 수호룡으로 삼겠다고 하는데…….”

루시테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노이랑 똑같이 생긴 은빛 용이 그려진 깃발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은 은빛 용이 그려진 깃발과, 깃발을 펄럭이며 지나가는 황제의 행렬을 향해 미친 듯이 환호하고 열광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노이를 레일리라고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레일리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도 그를 나라를 구하고 사라져 버린 용으로 취급하다니…….

더군다나 레일리는 용도 아닌데.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괜찮아요. 덕분에 제가 황제가 안 되어도 되지 않았나요? 절 죽이든 살리든, 용으로 만들든 우리를 방해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레일리는 장난스럽게 웃음을 터뜨리며 루시테를 두 팔 안으로 꽉 껴안았다.

“저렇게 해놓으면 저를 더 이상 귀찮게 굴지도 않을 테고. 마지막 용인 노이를 찾지도 않을 테니…… 좀 우습긴 해도 나쁘지 않은 결말이에요.”

레일리의 속삭임에 루시테도 웃음을 지었다.

“역시 레일리. 당신은 정말 대단해요.”

루시테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황제의 행렬을 바라보았다.

문득 황제가 탄 마차가 루시테와 레일리가 서 있는 쪽으로 가까워졌다.

그 옆에 보랏빛 머리칼을 길게 늘어뜨린 대신관 렘브란트가 백마를 타고 함께 이동하고 있었다.

“!”

익숙한 얼굴에 루시테는 눈을 크게 떴다.

그녀의 삼촌이자 헤카레트 대신전의 대신관 렘브란트.

그는 조금 수척해진 것 같았지만 그래도 건강해 보였다.

이렇게라도 얼굴을 보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그가 밧줄에 꽁꽁 묶여 자신과 함께 전장에서 험한 취급을 받았던 것을 떠올리니, 루시테의 눈가가 절로 붉어졌다.

문득 대신관이 루시테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찬란하고 거대한 신성력을 품은 루시테를 대신관이 몰라볼 리가 없었다.

대신관은 루시테를 보곤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가 작게 입술을 달싹였는데 그 입 모양이 꼭.

‘행복하거라, 루시테.’

라고 그녀를 향해 말하는 듯했다.

-외전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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