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렘브란트는 모든 일을 마치고 신전으로 돌아와 대신관의 중요한 업무를 마무리 짓기 위해 펜을 들었다.
헤카레트 역사서.
주신과 관련된 모든 일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대신관의 의무이자 숙명 중 하나였다.
렘브란트는 펜을 들고 조심스레 첫 문장을 써 내려갔다.
이 두루마리에 기록되는 내용은 한 번 기록하면 수정할 수 없으며 영원히 남게 된다.
렘브란트는 아주 신중하게 펜을 움직였다.
[성녀 일레일라 이후로 오래도록 나타나지 않았던 성녀가 300년 만에 나타났다.]
펜촉이 두루마리에 닿을 때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조용한 방 안을 울렸다.
[성녀의 이름은 루시테 클라우디오. 메이븐의 3황녀이자 대신관 에일란테의 딸이다.]
루시테의 이름을 쓰던 대신관의 손끝이 떨렸다.
렘브란트는 이어 쓰기를 잠시 멈추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아픈 손가락이자 유일한 피붙이. 누님의 딸인 루시테.
그 애만 생각하면 대신관은 마음 한구석이 아팠다.
그녀가 성녀라는 사실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는 않았지만 역사서에 기록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기록은 대신관으로서의 그의 의무이니까.
그리고 헤카레트 역사서에는 한 치의 거짓도 기록되어서는 안 된다.
만약 거짓을 한 자라도 기록한다면 아무리 대신관이라 할지라도 주신의 저주를 받아 그 자리에서 죽는다.
루시테는 렘브란트의 조카이기도 했지만, 그 누구보다도 주신의 예언에 깊게 관련이 있었으므로 렘브란트는 루시테를 역사서에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대신관의 허락 없이는 누구도 함부로 헤카레트의 역사서를 읽을 수 없다는 점이다.
심지어 메이븐의 황제가 와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니 적어도 렘브란트가 살아 있는 한은 루시테의 비밀을 지켜줄 수 있을 터였다.
“후우…….”
렘브란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펜을 고쳐 잡았다.
[성녀 루시테 클라우디오는 저주를 받아 이십육 세까지 성녀로서의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신관의 축복으로 저주가 풀렸고, 루시테 클라우디오가 성녀로 각성한 때에 주신의 두 가지 예언이 모두 이루어졌다.]
주신의 두 가지 예언. 하나는 삼백 년 전부터 내려오던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렘브란트가 계시로 받은 것이었다.
–저주받은 존재가 피에 점철된 전쟁과 대기근을 불러올 것이며 보랏빛 축복의 성녀가 전쟁과 기근을 끝내고 이 땅에 축복을 내릴 것이다.
삼백 년 동안 이루어지지 않고 전해져 내려왔고, 수많은 설화와 가짜 성녀를 만들어낸 예언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예언은.
-그 누구도 온전히 갈망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렘브란트는 펜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편 후 첫 번째 예언에 대한 풀이부터 적어 나갔다.
[대기근과 전쟁을 불러올 저주받은 존재와 보랏빛 축복의 성녀는 같은 사람이었다.]
저주받은 존재는 메이븐의 황제 때문에 태어났다.
주신의 대리인인 대신관을 범한 죄는 끔찍하다.
그 때문에 루시테가 저주받은 채 태어났고 루시테의 어미이자 대신관이었던 에일란테는 딸을 낳자마자 죽었다.
그리고 황제는 저주받은 딸을 방치했다.
황제의 자식이라면 응당 대신관의 축복을 받는 관례가 있는데, 그 축복만 받았어도 루시테는 금방 저주에서 풀려났을 터다.
그 흔한 축복 하나 못 받은 황제의 딸.
그렇게 방치했기에 결국 루시테가 메이븐을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대기근이 일어났으며 전쟁이 터졌다.
재앙이 저주받은 존재로 인한 것은 맞다.
그러나 결국 성녀를 저주받아 태어나게 만들고 방치한 것은 메이븐의 황제였다.
렘브란트는 모든 사실을 가감 없이 적어 내려갔다.
예언의 성녀였던 루시테 클라우디오.
그녀가 모든 재앙을 해결하고 세상에 평화를 가져왔노라고. 루시테 덕분에 이 땅이 회복되었노라고.
그렇게 적었다.
렘브란트는 밤을 꼬박 새며 헤카레트의 역사서에 글을 빼곡히 채워 넣었다.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뻣뻣해진 몸을 쭉 폈다.
식어버린 차를 들고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
렘브란트는 차를 한잔 마시고 동이 터오르는 창밖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온전히 갈망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주신의 예언.
알렉산더는 황태자위를 보장받았지만 결국 황제가 되지 못한다. 이안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에.
세드릭은 그가 원했던 대로 루시테를 저주에서 풀긴 하지만, 결국 그녀를 소유하지 못한다. 드래곤이 만들어낸 얼음산에 영원히 갇혀 죽었을 테니.
그 외에도 그 예언에는 루시테나 이안 황제, 비올레타 황녀 등 아마 많은 인물이 얽혀 있을 터다.
본인들은 모르지만 주신의 예언이 결국 성취되었겠지.
렘브란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차가운 찻물을 목으로 넘겼다.
렘브란트의 기분만큼이나 차의 맛이 씁쓸했다.
렘브란트는 자리로 돌아와 밤새 쓴 두루마리를 모두 정리했다.
그리고 깨끗한 종이를 꺼내어 편지의 서두를 적었다.
[루시테에게.
잘 지내고 있느냐?
나는 그동안 밀린 업무를 모두 마무리 지었단다.
얼마 전 봤던 너의 무사건강한 모습이 눈에 선연하구나.]
천천히 편지를 쓰는 동안 렘브란트의 입가에는 점차 씁쓸함이 아닌 밝은 미소가 어리었다.
비록 과거에 있었던 일들은 마음이 아프지만 루시테의 앞날은 행복할 터였다.
또한, 자신이 대신관이라 만나기는 쉽지 않을 터이지만 편지는 얼마든지 주고받을 수 있지 않은가.
안 그래도 얼마 전 루시테로부터 편지가 도착한 참이었다.
그녀가 얼마나 행복하게 지내는지. 가족들은 누가 있는지.
그리고 얼마 후 결혼식을 올릴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렘브란트는 기쁘게 루시테의 편지에 대한 답장을 써 내려갔다.
보고 싶다는 이야기. 그리고 결혼식에는 꼭 가겠다는 그런 이야기를 쓴 후, 편지를 부치고 나서야 렘브란트는 기분 좋게 잠에 들어 그간 쌓였던 피로를 달랬다.
에일란테가 그렇게 죽은 후, 오랜 기간 그를 괴롭혔던 불면이 이제야 가시고 있었다.
렘브란트는 고른 숨을 내쉬며 깊은 잠에 빠졌다.
* * *
“우리 비올레타! 우리 비올레타를 찾아주세요! 제발! 황제 폐하!”
“우리 시드니아 황녀도 찾아주세요! 황제 폐하의 피붙이이지 않습니까!”
1태비와 2태비가 이안의 집무실로 찾아와 목청을 높였다.
이안은 짜증스럽다는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이마를 짚었다.
좀 잠잠하다 싶더니 그들은 딸에 대한 미련을 도무지 버리지 못했는지 다시금 이안을 찾아와 괴롭히고 있었다.
“태비님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비올레타 황녀와 시드니아 황녀는 모두 죽었습니다. 드래곤의 브레스에 꽁꽁 얼어버렸다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럴 리가 없다고요! 내 딸은! 내 딸은 성녀인데! 그렇게 죽었을 리가 없는데!”
1태비가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
“그날의 기적을 황제 폐하께서도 보지 않으셨습니까! 그 기적은 성녀인 제 딸이 한 겁니다. 제 딸! 비올레타가 진짜 성녀로 각성해서 기적을 일으킨 거라구요! 그런데 죽었다니요! 그럴 리가 없단 말입니다!”
“실종입니다! 황제 폐하! 시드니아는 실종된 거라구요! 그 아이를 그렇게 내버려 두실 겁니까? 찾아야지요. 찾아서 좋은 집안에 시집이라도 보내주셔야 할 게 아닙니까!”
2태비 역시 이안을 향해 시드니아를 찾아달라며 호소했다.
“하…….”
이안은 검지와 중지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성녀는 없습니다.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 자리에 계셨던 대신관 성하가 증명해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날 있었던 일은 그저 주신께서 직접 내려주신 기적일 뿐입니다.”
이안은 최대한 짜증을 억누르고 씹어 뱉듯 태비들을 향해 대꾸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럼 그 망할 드래곤의 얼음이라도 깨고 시신이라도 찾아다 주시란 말입니다!”
1태비가 또 제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시신이라도! 시신이라도 찾아다 주시면 믿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받아들일 수가 없단 말입니다! 아이고, 아이고…… 비올레타…… 불쌍한 내 딸…….”
1태비는 억울하고 분하고 원통하여 눈물을 펑펑 쏟았다.
그러나 아무리 호소해도 결국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이안의 집무실을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녀들도 알고 있었다.
비올레타의 죽음을 목격한 병사들이 많았다.
창대에 찔려 죽었다는 것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리고 실버 드래곤의 브레스는 녹지 않는다.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이 되어 그 브레스가 지나간 자리는 전쟁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은 얼음산이 되었다.
이미 수차례 사람을 보내어 얼음을 녹이려고 해보기도 하고 깨부숴 보려고도 해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거라곤 이안을 닦달하는 것뿐.
비올레타와 시드니아를 평생 찾을 수 없으리라는 것은 이미 태비들도 사실은 알고 있는 것이었다.
그저 받아들이지 못할 뿐.
1태비와 2태비는 제 딸들을 사지로 내몬 자신들의 과거를 후회하고 또 후회하며 천천히 황제의 궁을 벗어났다.
그녀들이 가는 길은 울음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앤체프.”
이안은 싸늘한 목소리로 제 보좌관을 불렀다.
“예, 폐하.”
앤체프 자작이 재빨리 이안의 앞으로 다가갔다.
“태후께 1태비와 2태비의 행태를 고하고 조치를 해달라 말씀드려라.”
“예. 폐하.”
“어디 지방으로 요양이라도 보내버리라고 해.”
“예. 폐하.”
앤체프 자작은 별말 없이 이안의 명령에 바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이 정도면 이안이 꽤 오래 참은 편이었으니, 태비들도 정말 황성에서 쫓겨나게 되어도 항의할 수는 없을 터다.
앤체프는 빠른 걸음으로 이시엘라 태후가 있는 궁으로 향했다.
태후 궁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 앤체프 자작의 발걸음이 느릿해졌다.
태후가 거처하는 궁은 언제나 약 냄새가 났으며 죽음의 기운이 짙게 퍼져 있었다.
시녀, 시종들 모두 날이 서 있었으며 태후 궁 안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모두 살얼음판 위를 걷듯 행동하고 있었다.
이시엘라 태후가 아프다.
전쟁이 끝나고, 기적의 치유의 비를 맞은 수많은 아픈 사람들이 병을 고쳤는데.
이상하게 그 날 이후로 이시엘라 태후가 아프기 시작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었다.
나날이 쇠약해지고, 말라가기만 했다.
그래서 이안 황제가 두 태비의 처벌을 미루고 또 미뤘던 것이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아픈 태후의 손을 빌려 두 태비를 처벌하려 하는 것이다.
“태후 전하, 앤체프 자작님이 오셨습니다.”
태후의 시녀가 조용한 목소리로 앤체프가 왔음을 알렸다.
“왔는가.”
몹시 수척해진 이시엘라 태후가 힘겹게 병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예, 황제 폐하의 전언을 가지고 왔습니다.”
앤체프 자작은 사무적으로 이시엘라 태후를 대했다. 그는 딱딱한 목소리로 이안이 전하라고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하여, 태후 전하께서 두 분 태비님들을 벌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후우…… 알았네.”
이시엘라 태후는 침대에 손바닥을 짚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황급히 시녀들이 달려와 태후를 부축했다.
태후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앤체프는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고개를 돌렸다.
“저는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러시게.”
“예.”
앤체프는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태후 궁을 나왔다.
앤체프는 이시엘라 태후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좋아하고 말고를 떠나 그녀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그저 이안 황제의 어머니 되는 사람이니 예우를 갖출 뿐, 앤체프는 이시엘라 태후에게 단 한걸음도 더 다가가지 않았다.
앤체프는 어릴 적 황궁에 와서 3황녀를 본 적이 있었다.
길을 잘못 들어 외진 곳에 있는 3황녀 궁으로 들어섰더랬다.
그날의 기억은 앤체프의 기억에 꽤 강하게 남아 있었다.
팔짱을 낀 채 고고하게 서서 모든 것을 지켜보는 이시엘라 황후.
황후의 명을 받아 어린 소녀에게 가위질을 하던 황후의 시녀들.
소녀가 울며 발버둥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머리카락을 잘라내던 그 모습이 소름끼치게 무서웠다.
그 기억 때문에 앤체프 자작은 지금까지도 날붙이를 무서워하게 되었다.
그 장면을 본 그도 지금까지 괴로운데 직접 당한 3황녀는 어떻겠는가?
‘츳.’
앤체프 자작은 혀를 찼다.
이시엘라 황후는 어쩌면 벌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불쌍한 사람의 인생을 더욱 불행하게 만든 벌을.
앤체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빠른 걸음으로 태후 궁을 벗어났다.
이시엘라 태후의 근처에는 한시도 더 가까이 있고 싶지 않았으니까.
“…하여, 태후 전하께서 두 태비님을 벌하시기로 하셨습니다.”
앤체프는 건조한 목소리로 이안에게 보고를 마쳤다.
“수고했다. 나가 봐.”
이안은 건성으로 손을 휘휘 흔들었다.
“예, 폐하.”
앤체프 자작이 조용히 문을 닫고 이안의 집무실을 나갔다.
이안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이안은 그날의 일이 선연하게 떠올랐다.
“루시테…….”
이안은 괴로운 목소리로 루시테의 이름을 읊조렸다.
손에 닿을 듯 그의 앞에 앉아 있던 루시테.
그러나 결국 털끝 하나 닿지 못하고 고스란히 은발의 마법사에게 루시테를 넘기고야 말았다.
이안은 분에 차 이를 빠드득 갈았다.
꽉 쥔 주먹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이 지긋지긋하고 답답한 황성에 루시테가 있었더라면. 그녀가 자신의 옆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힘들고 고된 황제의 업무조차 기쁘게 할 수 있었을 것 같았다.
“루시테…….”
레일리는 슬프게 루시테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주머니에서 나침반을 꺼냈다.
루시테가 메이븐의 황성을 떠난 그 날 이후로 언제나 지니고 다니는 마법 나침반이었다.
그러나 나침반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침이 쉼 없이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회전했다.
추적 마법이 잘 작용했더라면 침은 한 곳을 가리켜야 정상이다.
루시테에게 줬던 그의 돈주머니가 있는 곳.
“하.”
이안은 헛웃음을 내뱉으며 나침반을 부서질 듯 꽉 쥐었다.
그러나 곧 그의 손아귀에서 힘이 스르르 빠졌다.
분명 그 마법사의 짓일 터였다.
그 정도의 실력자인 마법사가 추적마법을 눈치채는 건 쉬운 일일 것이다.
그 마법사가 추적 마법을 해지했거나 무슨 수를 쓴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았다 한들 지금의 이안이 루시테를 되찾아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루시테를 보호하고 있는 이들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마법사도 마법사거니와 특히 그 드래곤.
그것들이 루시테를 지키고 있는 한 이안이 루시테를 데려오기란 불가능할 터였다.
이안은 씁쓸한 얼굴로 제 손에 들린 나침반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잡은 것만 같던 것들이 모래처럼 그의 손아귀를 다 빠져나가 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반드시 되고자 했던 황제 자리조차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황제 자리가 무거워 더더욱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자리를 비울 수가 없으니 루시테를 찾으러 갈 수도 없었다.
만약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무엇이 달라졌을까?
이안은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몸을 일으켜 편안한 소파에 털썩 앉았다.
그리고 꽤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냈다.
* * *
“하앗! 핫!”
어린 이안의 기합 소리와 함께 그가 들고 있던 목검이 허공을 갈랐다.
십여 년 전, 꽤 어렸던 그가 손이 부르트고 굳은살이 박이도록 검 연습을 했던 때가 있었다.
황성은 지금보다도 더 날이 선 분위기였다.
아들을 낳으려 안달이 났던 황비들이 수시로 이안의 목숨을 옥죄어 오곤 했다.
이안은 황비들의 감시를 피해 황궁의 한구석에 숨어 몰래 매일같이 검술을 연습했다.
그날은 이안이 유난히 검술에 벽을 느끼던 날이었다.
슬슬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를 즈음, 이안은 갑작스런 인기척을 느꼈다.
검술이 잘 안 되는 데다, 황비들의 지나친 간섭에 환멸을 느끼던 때라 이안은 인기척에 몹시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안은 어린 나이치고는 믿을 수 없이 재빠른 속도로 인기척이 난 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불청객이 누구인지 확인할 것도 없이 이안은 목검으로 불청객을 공격했다.
“아악!”
불청객이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불청객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두려운 눈으로 이안을 바라보며 색색 숨을 내쉬고 있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을 한 조그마한 소녀였다.
소녀는 이안에게 맞은 곳이 아픈지 맞은 어깨를 꽉 쥐고 몸을 떨었다.
“너는…….”
이안은 인상을 찌푸리고 소녀를 보았다.
몇 번 본 적은 없지만 분명 아는 얼굴이었다.
먼발치에서만 봤던 저주받은 황녀.
저주받은 검은 머리칼과 검은 눈동자를 가진 그의 이복누이 루시테.
그 소녀가 틀림없었다.
이안은 눈살을 더더욱 찌푸리곤 목검을 소녀의 목에 위협하듯 들이밀었다.
“누가 시켰지? 감히 내 훈련 장소는 어떻게 알아낸 거냐?”
이안은 금방이라도 목검 끝으로 소녀를 후려치기라도 할 기세였다.
“누가…….”
소녀가 어깨를 떨더니 작은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뭐라고? 똑바로 말해라. 저주받았다더니 벙어리인 거냐?”
“누… 누가 시키지 않았어요! 저, 저는 지나가는 길이었어요! 제발 그냥 보내주세요. 황태자 전하.”
소녀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나가는 길이었다고? 그걸 어떻게 믿지?”
이안이 눈을 부릅떴다. 이상한 일이었다.
소녀가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니 화가 치밀어 올랐다.
검술에 느낀 벽과 황비들의 간섭으로 인한 고통. 그 더러운 기분이 한 번에 욱하고 올라왔다.
이안은 목검을 번쩍 치켜들고 소녀의 어깨를 가격했다. 조금 전 때린 곳과 같은 곳이었다.
“아악!”
소녀가 비명을 지르며 바닥으로 넘어졌다.
“하윽…….”
소녀가 간신히 바닥에 손을 짚고 몸을 일으켰다.
그에게 맞은 팔을 움직이지 못하는 것을 보니 뼈가 부러지기라도 한 듯했다.
소녀는 고통을 억누르며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말해. 누가 시켰지? 1황비? 2황비?”
이안의 푸른 눈동자가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는 금방이라도 또 소녀를 목검으로 때릴 기세였다.
소녀의 검은 눈에 일순 독기가 어렸다.
소녀는 이를 악물고 한 마디 한 마디 이안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제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그쪽은 틀림없이 소드마스터가 될 테니 제발 저에게 화풀이하지 말아 주시겠어요? 그리고.”
소녀는 턱으로 휙 옆을 가리켰다.
소녀의 턱짓을 따라 이안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두꺼운 책 두 권이 떨어져 있었다.
“오랜만에 도서관을 다녀오는 길이었어요.”
소녀는 심호흡을 했다.
“이쪽 방향에는 제 궁이 있으니까요. 저는 누가 보내서 온 것도 아니고. 그저 지나가는 길이었을 뿐이에요. 다시는 이쪽은 얼씬거리지 않을 테니 저를 보내주세요. 제발. 황태자 전하.”
소녀의 어려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몹시 어른스럽고 침착하며 단호한 말이 소녀의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늘상 공식적인 자리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푹 수그리고 있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이안의 미간이 더더욱 좁혀졌다. 눈앞의 소녀가 거짓을 말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걸 내가 어떻게 믿지?”
이안이 싸늘하게 대꾸했다.
“전하. 제가 누군지 아시지 않나요? 사람들은 저를 싫어합니다. 제가 근처에 있으면 저주가 옮는다고요. 그러니 황비님들께서 제게 사주할 일도 없지 않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황태자 전하와 결코 엮이고 싶지 않아요, 절대로요.”
이안은 그 말에 이성이 천천히 돌아오는 듯했다.
“하. 뭐? 나와 결코 엮이고 싶지 않아?”
이안은 어이없다는 듯 말을 뱉어냈다.
“네.”
소녀는 이안을 한번 응시하더니 비척거리며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떨어진 책 두 권을 다치지 않은 팔로 힘겹게 주워들었다.
“볼일이 끝나셨다면 이만 가보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그 길로 소녀는 이안에게서 멀어져갔다.
다리는 절뚝이고, 한쪽 팔을 까딱도 못 하면서도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이안에게서 멀어졌다.
이안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서 멀어지는 소녀의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았다.
이안은 제 거처로 돌아와서도 그날 마주쳤던 3황녀와의 일을 한동안 잊지 못했다.
비 맞은 쥐새끼처럼 벌벌 떠는 주제에 할 말은 다 하던 침착함이 우스웠다.
거기다 뭐?
그쪽은 틀림없이 소드마스터가 될 테니 화풀이하지 말라고?
제까짓 게 그에 대해 뭘 안다고 다 아는 척 지껄인단 말인가.
이안은 우습기도 하고 분노가 치밀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이 그날 그 여자애에게 화풀이한 건 사실이었다.
그것을 이안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다 안다는 듯 어른스러운 눈으로 자신에게 말대꾸한 그녀에게 더욱 화가 났다.
감히 이 나라의 고귀한 황태자인 자신에게 아는 척을 하다니.
이안은 그녀의 위치가 얼마나 바닥인지 그가 직접 똑똑히 알려주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생각이 들자마자 이안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소년 이안은 치기 어렸고 사춘기의 초입에 막 들어서고 있었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재빨리 황태자궁을 빠져나와, 그녀를 마주쳤던 황성의 외곽으로 향했다.
이안이 호기롭게 나왔다지만, 막상 그는 3황녀의 거처가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황성은 몹시 넓었고, 3황녀의 거처는 아주 외곽, 아무도 찾지 않는 낡아빠진 궁에 자리 잡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가 몰래 훈련하던 연무장 근처에 왔지만 당연히 3황녀를 찾을 수 있을 리는 없었다.
저번에 제 입으로 그러지 않았던가. 다시는 이쪽에는 얼씬도 않겠다고.
잠시간 길을 헤매던 이안은 어쩔 수 없이 지나가는 시종을 붙잡았다.
“이봐. 3황녀의 궁이 어디지?”
“히익! 황태자 전하?”
시종은 황급히 허리를 수그리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3황녀의 궁에는 무슨 일로 가십니까? 괜히 저주에 옮으실지도 모릅니다.”
시종은 이안을 만류했다.
“저주?”
하.
이안은 코웃음을 쳤다.
자신은 이 나라의 하나뿐인 황태자이며, 성스러운 메이븐 황실의 피를 타고난 고귀한 자다.
감히 저주받은 황녀 따위가 자신에게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입 다물고 안내하기나 해라.”
이안이 더 이상 시종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싸늘하게 명령했다.
시종은 황급히 그에게 고개를 숙이곤 그를 3황녀의 궁으로 안내했다.
궁의 근처에서 시종은 도망치듯 돌아갔고 이안은 천천히 궁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궁은 꼭 폐허 같았다.
휑했고 지나다니는 사람은커녕 쥐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츳.’
아무리 천덕꾸러기 취급받는 황녀라 할지라도 궁의 상태는 심했다. 이게 황녀에 대한 대접인가 싶을 정도였다.
오히려 황성의 말단 사용인의 환경이 3황녀 보다 나을지도 몰랐다.
궁의 입구를 지키는 사람도 없고, 안내하는 시종도 없었다.
이안은 아무런 안내나 방해 없이 입구를 통과하여 궁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방이 조용했다.
이안은 적막한 궁의 복도를 걸었다.
별로 크지도 않은 궁이었다.
방도 몇 개 보이는 문이 다였고 바닥에는 이끼가 자라 있으며 기둥은 덩굴줄기가 타고 오르고 있었다.
습하고 축축한 냄새가 났다.
궁 안쪽에는 작은 정원이 있었는데, 관리가 전혀 되지 않았는지 잔디 사이로 잡풀들이 들쑥날쑥 자라 있었다.
정원의 가장 안쪽에 작은 가제보가 있었고 그 안에 앉아 있는 한 인영이 이안의 눈에 들어왔다.
왜일까.
이안은 저도 모르게 기척을 죽이고 가제보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축축한 바람을 타고 흙내음과 풀내음이 작은 정원 안을 맴돌았다.
소녀는 가제보의 기둥에 등을 대고 편하게 앉아 두꺼운 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독서를 하고 있었다.
소녀의 칠흑처럼 어두운 검은 머리칼이 바람결에 흔들리며 그녀의 볼을 간질였다.
소녀는 거동이 힘든 팔 대신 다른 쪽 팔로 머리칼을 힘겹게 귀 뒤로 넘겼다.
뼈에 금이 갔는지 부러졌는지, 의원은 제대로 설명도 해주지 않고 붕대만 감아주고 가버렸더랬다.
소녀는 붕대가 칭칭 감긴 팔을 최대한 움직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다시 책장을 넘겼다.
그 모습을 보며 이안은 미간을 좁혔다.
제가 때려서 저렇게 된 것임에도 괜히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이었다.
한가로이 독서를 하던 소녀는 문득 인기척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었다.
이안을 발견한 소녀의 검은 눈이 크게 뜨였다.
“이, 이안?”
소녀는 어찌나 당황했는지 이안을 이름으로 불렀다.
그녀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책을 떨어뜨리고 몸을 휘청거렸다. 다친 팔이 기둥에 부딪히고 몸이 크게 기우뚱했다.
“아!”
소녀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른 찰나.
이안이 달려가 의자에서 떨어지는 소녀를 붙잡았다.
소년치고 근육으로 다져진 이안의 꽤 단단한 팔이 소녀의 허리께를 휘감았다.
소녀는 바닥에 떨어지는 대신 이안의 품에 제 얼굴을 부딪쳤다.
옅은 풀 내음이 이안의 콧속으로 확 끼쳐 들어왔다.
짙은 화장품 냄새가 아닌 청정하고 깨끗한 향기였다.
결벽증이 있는 평소의 이안이라면 제 몸에 닿은 소녀를 곧바로 밀쳐버렸을 터다.
그러나 이안은 그저 소녀를 붙들고 있었다. 이안을 아는 사람이라면 놀라 뒤집어질 만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안을 밀쳐낸 사람은 오히려 소녀 쪽이었다.
루시테는 기겁할 듯 놀라며 이안의 품에서 튀어 오르듯 고개를 들었다.
루시테가 멀쩡한 팔 한쪽으로 이안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이안의 품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이게, 이게 무슨…… 네가 대체 왜…… 여기.”
루시테는 이안이 이곳에 있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횡설수설했다.
“이, 이거 놔…… 주세요.”
루시테가 마구 몸을 비틀었다.
“누군 붙들고 싶어서 이러고 있는지 알아?”
괜히 기분이 상한 이안이 루시테를 의자로 내던지듯 밀었다.
쿵. 루시테는 의자에 또 팔을 부딪치곤 괴로운 얼굴을 했다.
“으윽…….”
루시테의 작은 신음에 이안의 미간이 더더욱 좁혀졌다.
“여기는 무슨…… 무슨 일로…….”
루시테는 고개를 푹 수그리곤 자그맣게 이야기했다.
“아무리 버러지라지만 사람 눈 하나 제대로 못 쳐다보는 거냐? 대체 교육을 어떻게 받은 거지?”
이안은 제 눈을 바라보지 않는 루시테에게 대번에 짜증스러운 어투로 다그쳤다.
왜 이 소녀를 보면 이리도 짜증이 치미는지. 이안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루시테는 어깨를 움칠 떨더니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이안의 푸른 눈과 루시테의 칠흑처럼 어두운 검은 눈동자가 빤히 마주쳤다.
루시테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아까는 잘만 반말을 해대더니 이제는 벙어리가 된 거냐?”
이안의 질타에 루시테는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고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안이 갑자기 나타나서 이러는 게 이해가 되질 않았으니.
루시테는 그저 이안과 엮이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가득했다.
전생에 자신을 처형한 그녀의 이복동생.
루시테는 이안이 끔찍하게도 미웠다.
이안을 볼 때마다 소용돌이치는 두려움과 미움, 그 감정들을 억누르느라 힘겨웠다.
“돌아가 주세요. 당신이 계실 곳이 아니에요.”
루시테는 이안의 시선을 먼저 휙 피하곤 딱딱하게 말을 내뱉었다.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이안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나는 이 나라의 황태자다. 감히 네가 나더러 나가라는 거냐?”
“그럴……! 그럴 리가요. 제가 어떻게 감히……. 저는 그저 이곳은 너무 누추하고…….”
“내가 분명 눈 피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안이 루시테의 말을 잘랐다.
루시테는 주춤거리며 다시 이안을 쳐다봤다.
이안이 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루시테는 당황스러워 눈을 잘게 깜박였다.
“짜증나는군.”
“네?”
이안은 루시테를 빤히 노려보더니 별안간 몸을 휙 돌려서 가버렸다.
무슨 볼일인지 여기까지 온 이유가 있을 텐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얘기도 없이 말이다.
루시테는 어안이 벙벙해져 그저 이안이 떠나버린 그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루시테는 몰랐다. 둘의 진득한 악연이 이제 시작이었음을.
그날 이후로 이안은 틈만 나면 불시에 루시테를 찾아왔다.
녀석은 올 때마다 루시테에게 신랄한 말을 퍼부었고 그녀를 괴롭게 했다.
어느 날은 이안이 유난히 그녀에게 심한 말을 했던 날이었다.
“네 어미가 너를 임신한 이유는 다 목적이 있어서겠지. 버러지 같은 하녀가 황족이 되어 보겠다고 발악하는 꼴이라니. 그렇게 죽은 것도 다 벌을 받아서 아니겠어?”
평소라면 무시하고 넘어갔을 말이다.
그런데 그날은 왜 그렇게도 화가 났는지.
여느 때처럼 이안이 한 말을 대충 무시하고 넘기려 했으나 그런 말들이 너무도 쌓여서 그런 걸까.
루시테는 참지 못하고 이안에게 대꾸를 했다.
“너도, 엄밀히 말하면 황족도 아니야, 이안.”
“뭐?”
이안의 눈썹이 휙 치켜 올라갔다.
그 시절 이안은 사춘기였고, 결벽증에 다른 황족들을 극도로 싫어했던 몹시 예민했던 시기였다.
유일한 예외는 루시테였으나.
소년 이안은 친해지고 싶은 소녀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방법을 몰랐다.
몹시 서툴렀고, 자신을 싫어하는 소녀의 관심을 끌기 위해 오히려 끊임없이 소녀에게 상처를 주었다.
소녀는 결국 이안의 심한 괴롭힘을 참지 못했고.
“네가 아주 고귀한 사람 같지? 너는 황제의 친자식 아니야.”
“뭐?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냐?”
“너, 네 어머니가 밖에서 낳아 온 자식이라고. 그러니 고귀하니 어쩌니 하면서 제발 나 좀 그만 괴롭혀 줄래? 그만 좀 찾아와. 제발.”
“…….”
싸한 정적이 둘 사이를 감돌았다.
“아.”
그제야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정신을 차린 루시테가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루시테는 사색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말을. 제가 한 말은 다 거짓말이에요.”
루시테는 제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 루시테를 내버려 두고 이안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궁을 나가버렸다.
그 이후 따로 무엇을 알아보는지, 이안은 은밀히 움직였고 한동안 루시테를 찾아가지 않았다.
그렇게 둘의 접점은 끊기는 듯싶었으나.
몇 년 후 이안이 조금 더 성장하고 나서, 그는 다시 루시테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이안은 성장했으나 루시테는 그대로였다.
열댓 살 모습에서 하나도 자라지 않아 여전히 소녀의 모습이었다.
그에 반해 이안은 루시테보다 키도 훌쩍 컸고 점점 남자다워졌다.
분위기도 많이 차분해졌고, 좀 더 분노를 감출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갔다.
루시테와 이안은 테이블을 두고 불편하게 마주 앉았다.
이안은 테이블을 검지로 툭툭 두드렸고, 루시테는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이안이 운을 떼자 루시테는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어떻게 알았지?”
“네?”
“내가 바깥에서 낳아온 자식인 거 어떻게 알았냐고.”
“…….”
루시테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도 모르더군. 심지어 그 연관성을 생각해본 사람조차 없어. 아는 사람은 너뿐이다.”
이안의 기세가 날카로웠다.
루시테는 심호흡을 했다. 신중해야 했다. 이안이 얼마나 무서운 남자인지는 누구보다도 그녀가 잘 알았다.
“그때는…… 제가 어렸고, 화가 나서 넘겨짚었던 거였어요. 그런 얘기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고, 황태자 전하를 곤란하게 할 생각은 결코 없었어요.”
픽.
이안이 비웃듯 입술 끝을 올렸다.
마치 ‘곤란하게 했다면 넌 진작 죽었을 거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루시테는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반말하던 거 듣기 좋던데 왜. 계속해. 네가 나보다 나이도 많잖아.”
“네?”
“이안. 이안이라고 불러.”
이안의 속을 알 수 없는 말에 루시테의 시선이 어지러이 흔들렸다.
이안이 좀 성숙해졌다고 루시테와 이안의 사이가 나아진 것은 전혀 아니었다.
그는 루시테가 제 시선을 피한다며 화를 냈고, 경어를 쓴다며 화를 냈다.
루시테는 여전히 이안을 피하고, 싫어했고 그런 루시테를 이안은 더 사납게 대했다.
둘의 관계는 그야말로 개와 고양이, 앙숙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것을 다 가진 이안은 호감 가는 여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또한 그것이 호감인지도 몰랐기에, 그저 가끔 찾아가 루시테의 속을 긁어놓곤 했는데.
그렇게 커진 감정을 이안은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가, 루시테가 떠나고 나서야 사랑이었던 것을 깨달은 것이다.
초록이 우거진 정원 안에서 독서를 하던 작은 소녀.
그녀에게서 풍기던 시원한 풀 내음과 깊이 가라앉은 검은 눈동자. 고요한 분위기. 그런 것들을 이안은 좋아했다.
잔잔한 목소리와 가끔 던지는 꽤 뼈가 있는 말. 그런 것들을 이안은 좋아했다.
황성 안의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이안은 언제나 곤두서 있었다.
결벽증 때문에 다른 이들과 한 자리에서 무언가를 먹는 것도 그에게는 큰 고통이었고, 그에게 날아드는 황비들의 날선 말과 참견들도 그를 몹시 피곤하게 했다.
언제나 머릿속이 복잡하고 시끄러웠다.
그런데 그를 괴롭히는 모든 것들이 루시테의 곁에 있으면 조용해졌다. 시끄럽고 복잡한 머릿속이 잔잔해졌다.
루시테는 더럽고 지저분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그녀가 함께 있을 때면 차를 마시거나 같이 무언가를 먹는 것도 싫지 않았다.
* * *
“하…….”
이안은 괴로움에 연거푸 마른 세수를 했다.
과거를 돌이켜 생각해봤자 남는 거라곤 후회뿐이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 감정이 사랑이었던 줄은.
이제야 알았는데. 이제는 그녀가 없으면 안 되는데.
너무 멀리 와 버렸다.
돌이킬 수 있는 시점은 이미 한참 전, 루시테가 황성을 떠난 그때 지나가 버렸다.
차라리 그때 루시테를 붙잡고 함께 떠났다면?
이 따위 황제 자리 따위 포기하고 같이 갔다면?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안은 황위를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니.
그렇다면 차라리 그녀가 떠나기 전에 그녀에게 조금 더 마음을 쏟고 다정하게 대해줬더라면?
그러면 루시테가 떠나지 않았을까.
“루시테…….”
이안의 괴로운 목소리가 적막한 집무실 안에 울렸다.
그녀가 너무 보고 싶었다.
이안은 하염없이 머릿속으로 그녀의 모습을 그렸다.
여전히 그녀의 모습이 손에 잡힐 듯 선연했다.
이안의 눈에는 루시테가 저주가 풀리기 전이나 풀린 후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 보랏빛 머리칼의 여자가 루시테임을 한눈에 알아봤다.
비록 외향은 자랐어도 루시테는 루시테였다. 어떻게 잊을 수가 있을까.
“크흑…….”
이안의 입술에서 억눌린 울음이 새어 나왔다.
그의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안도 알고 있었다.
이제 다시는 루시테를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는 황제다. 그토록 올라가고자 했던 자리지 않은가?
황제가 아닌 자신의 인생을 이안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지금이라도 황제 자리를 내려놓고 루시테에게 갈 수 있느냐 하면 그럴 수 없었다.
메이븐의 통치자 이안.
날 때부터 그렇게 길러졌고, 다른 삶을 살 수 없었다.
이안은 온전히 황제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사랑, 사랑해 루시테…….”
이안은 눈물을 흘리며 아무도 듣지 않는 허공에 사랑을 고백했다.
그렇게 하면 루시테가 들을 수 있기라도 할 것처럼.
황제 자리를 버릴 수는 없지만 루시테가 없는 삶 또한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현실은 차가웠다.
다시는 루시테를 볼 수 없을 테고. 지나간 삶도 돌이킬 수 없다.
아마도 평생. 이안은 다시는 루시테를 볼 수 없을 것이다.
이안의 볼을 타고 하염없이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 * *
위대한 실버 드래곤의 후예 노이테리온은 밤잠을 설치고 새벽부터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기분을 가다듬으려 해봐도 그의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침통했다.
노이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방안을 배회했다. 건너편의 침대에서는 에단이 곤히 자고 있었다.
노이는 양 주먹을 꽉 움켜쥐고는.
-크와아아앙!
짜증스럽다는 듯 포효했다.
물론 인간의 모습으로 내지른 외침이기에,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에단이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노, 노이?”
에단이 눈을 비비며 방 한가운데 서 있는 노이를 쳐다봤다.
“흥. 에단도 나빠.”
노이는 고개를 팽 돌리고는 방문을 박차고 밖으로 나왔다.
1층 거실로 나오자마자 노이의 눈에 띄는 것은 여기저기 곱게 쌓여 꺼내져 있는 접시들이었다.
과일이 들어 있는 바구니에도 과일이 한가득.
미리 리브가 만들어둔 빵과 쿠키, 각종 디저트들도 한가득이었다.
평소 산 중턱 하우스 식구들에게는 이만큼 많은 음식이 한 번에 필요하지는 않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많은 음식이 준비된 이유는…….
“쳇.”
노이는 심통을 내며 빵이 가득 들어 있는 바구니에서 빵 서너 개를 한 손에 덥석 쥐어 꺼냈다.
과일 바구니에서도 집히는 대로 과일을 꺼내 양손 한가득 쥐고는 성큼성큼 걸어 밖으로 나왔다.
노이는 제 입에 빵을 우걱우걱 우겨넣으며 정원을 쳐다봤다.
정원도 마찬가지로 평소와는 다르게 이것저것 물건이 놓여 있었다.
잘 배치된 둥근 테이블들과 사방에 장식된 리본들.
모두 에단과 리브가 오늘을 위해 어제 미리미리 준비해 둔 것이었다.
노이는 성큼성큼 그사이를 지나가다 괜히 꽃을 한 송이 팍 꺾어 땅바닥으로 패대기쳤다.
에단이 열심히 키운 꽃이고 루시테가 좋아하는 꽃이었으나 노이는 딱히 미안한 마음 따위는 들지 않았다.
“체에에엣!!”
노이는 뾰로통해져 더 크게 콧방귀를 뀌었다.
오늘은 그의 평생의 은인이자 가족인 루시가 결혼하는 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머리가 희멀건 마법사 나부랭이와 말이다.
레일린가 에일린가. 그놈 자식.
“체엣!”
노이는 입술을 삐죽였다.
물론 레일리가 자신을 도와주었다는 걸 노이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기분과 레일리의 도움은 별개였다.
자신이 루시를 먼저 만났는데.
자신이 유일한 루시의 가족이었는데 어느새 한 명 한 명 늘더니 이제는 결혼을 한다고?
노이는 또 꽃을 꺾고는 죄 없는 꽃잎을 하나씩 뜯어내 땅바닥에 버렸다.
드래곤은 본디 소유욕이 강했다.
물론 리브나 에단도 노이와 친한 사이였지만 루시만큼은 아니었다.
루시는 노이의 유일한 동반자이자 평생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물론 성애적인 방향은 아니다. 그저 루시테를 가족으로서, 친구로서 너무 좋아하여 집착하는 것이었다.
노이가 이렇게까지 루시를 좋아하는데.
정작 루시는 노이에게 자기 얘기도 안 해주고, 도울 새도 없이 알아서 해결하려고 하고!
모든 게 다 끝나고 나서야 그동안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지 않았던가.
노이는 꽃잎이 다 떨어진 꽃을 바닥으로 또 패대기쳤다.
그런데 이제 뭐? 저를 두고 결혼을 한다고?
쒸익.
노이는 거칠게 콧김을 내뿜었다.
노이는 발로 구르며 애꿎은 잔디를 발로 찼다.
그때 노이의 뒤로 문이 열리고 잠옷 차림의 루시테가 나왔다.
그녀도 노이와 마찬가지로 결혼식 생각에 잠을 설친 상태였는데, 밖에서 노이가 궁시렁 대는 소리를 들은 것이다.
“노이.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루시테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이를 불렀다.
노이는 고개를 홱 돌렸다.
긴 보랏빛 머리칼을 늘어뜨린 아름다운 여자가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원래의 노이라면 당장에 달려가 루시테에게 달라붙었겠지만 그러지 않았다.
노이는 루시테가 결혼하는 것 때문에 몹시 심통이 난 상태였으니까.
“노이?”
루시테가 노이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잔디를 스치는 발소리가 사박사박 울렸다.
루시테는 노이에게 다가가 그를 뒤에서 껴안았다.
이제는 루시테와 키가 비슷해진 노이의 어깨에 루시테는 턱을 기댔다.
지금의 노이는 소년의 모습이었으나 루시테에게 노이는 언제나 같았다.
노이가 무슨 모습을 하고 있든 노이는 노이였다.
폭풍이 지나간 어느 날 아침, 그녀의 집 앞 흙더미 속에 파묻혀 있던 불쌍한 새끼 용. 그녀의 소중한 가족.
“노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루시테의 걱정어린 물음에 노이가 씩씩대며 어깨를 들썩였다. 그리고는 빽 외쳤다.
“나는 루시가 결혼하는 거 싫어!”
루시테는 노이의 외침에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그의 어깨에 여전히 그녀의 턱을 묻은 채 그의 팔을 토닥였다.
“왜? 노이. 내가 결혼하는 게 왜 싫어?”
“그냥!”
“노이.”
루시테는 그녀의 품에 안겨있는 새끼 용을 가만히 얼렀다.
이제는 새끼 용이라 부르기에는 많이 커버렸지만 말이다.
한참을 씩씩대던 노이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나를…… 나를 혼자 내버려 둘 거지? 그 마법사랑 둘이 또 사라져 버릴 거지?”
“응? 그게 무슨 소리야?”
루시테는 놀라 노이에게서 몸을 떼고 그의 앞으로 가서 섰다.
노이는 얼굴을 잔뜩 구긴 채 입술을 한껏 삐죽 내밀고 있었다.
“나를 또 내버려 두고 그 마법사랑 사라져버릴 거잖아! 둘이 결혼하면 그 녀석이랑은 진짜 가족이 되는데 그러면 나는? 또 나는 잊어버릴 거잖아!”
노이가 으르렁대며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루시테는 노이의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노이는 지켜줘야 하니까. 노이와 리브와 에단을 그녀의 일에 휘말리게 할 수 없으니까.
그래서 그간의 일들을 모두 비밀로 하고 혼자 움직였던 것이었다.
몇 번이나 오랫동안 산 중턱 하우스에 돌아가지 못했지만.
그래도 다시 돌아오긴 했으니 그걸로 되었다고.
그간 가족들을 걱정시켰던 건 괜찮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노이가 이렇게 크게 상처를 받았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노이…….”
루시테는 손을 뻗어 노이의 손을 잡았다.
노이는 그래도 루시테가 좋은지, 화가 났어도 루시테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얌전히 그녀의 손에 잡혔다.
“노이, 내가 너에게도 비밀로 해서 미안했어.”
루시테는 나직한 음성에 노이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네가 가족이 아니라서 말없이 사라진 게 아니야.”
“거짓말! 레일리만 가족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야?”
“아니야. 노이. 정말이야. 그때는 내가 약했고, 너를 지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랬던 거야. 결코 네가 소중하지 않아서가 아니야. 너는 언제나 나의 노이인걸.”
노이는 가만히 생각하는 듯 루시테의 손안에서 제 손을 꼼질 거렸다.
“그럼 지금은? 지금은 나도 쎄.”
노이가 눈을 부릅 뜨곤 당당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알지! 당연히 알지! 우리 노이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실버 드래곤인 걸! 만약 이제 무슨 일이 생기면 노이에게 가장 먼저 말할 거야! 나를 지켜 달라고!”
루시테는 고개를 끄덕이며 노이의 손을 꽉 쥐었다.
“정말이야?”
“그럼!”
루시테의 확신에 찬 대답에 노이가 그제야 와락 구긴 얼굴을 조금 폈다.
“그러면 결혼하고 나서는? 네가 레일리랑 결혼하고 나서도 우리는 함께야?”
“당연하지! 이제 어디든 함께할게. 노이. 우리는 영원히 함께야!”
“약속이지?”
“그럼!”
루시테의 대답에 노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약속 지켜, 루시. 나는 네 가족이야! 레일리보다 더 가깝다고!”
노이가 허리에 손을 얹고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드디어 노이의 기분이 좀 나아진 듯했다.
루시테는 노이의 의기양양한 얼굴을 보곤 덩달아 미소 지었다.
“그래. 당연하지.”
루시테는 손을 뻗어 노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잠에서 깬 리브가 루시테를 찾는 목소리가 집안에서 들려왔다.
“아가씨! 어디 계세요? 준비하셔야 되는데! 아가씨!”
리브가 발을 동동 구르는 것이 안 봐도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루시테는 산 중턱 하우스를 한 번 보고 다시 노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환한 웃음을 지었다.
“가자. 집으로.”
“응!”
노이가 기분 좋게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 * *
“아가씨! 고개를 조금만 이쪽으로 해보세요. 네! 그렇게 그렇게.”
리브가 한껏 집중하여 조심스레 손을 움직였다.
눈썹을 곧게 다듬고, 정성스레 분을 발랐다.
흰 도화지 위에 붉은 꽃잎이 떨어진 듯, 루시테의 입술이 장미처럼 붉게 물들었다.
긴 보랏빛 머리칼을 곱게 땋아 올리고 그 위로 긴 베일을 씌웠다.
시드니아가 직접 몇 달 동안이나 한땀 한땀 수를 놓은 베일이었다.
무늬가 많이 들어가지 않은 흰 드레스를 입고 섬세하게 수 놓인 베일을 길게 늘어뜨린 루시테는 청초하고 우아했다.
곱게 피어난 한 떨기의 라일락 같았다.
“언니. 정말 예뻐.”
시드니아가 감격에 젖어 양손을 모았다.
시드니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메이븐의 황녀에서 전쟁의 볼모로. 그리고 평범한 삶으로.
여기까지 온 지나간 시간들이 루시테를 보니 새삼스레 떠오른 것이다.
루시테는 시드니아에게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이 집에 사는 모든 사람이 그렇듯, 시드니아 역시 루시테에게 자신의 삶을 구원받은 거나 마찬가지였다.
시드니아가 몹시 의지하고 존경하는 그녀의 친언니.
그런 언니가 결혼을 한다.
시드니아의 물기 어린 보랏빛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언니…… 정말 축하해.”
시드니아의 눈동자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이리 와. 시드.”
시드니아의 표정을 본 루시테가 시드니아에게 손을 뻗었다.
시드니아는 한달음에 루시테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루시테는 의자에서 조심스레 일어났다. 부드러운 드레스 자락이 차르르 떨어졌다.
루시테는 시드니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는 앞으로도 행복할 거야.”
시드니아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걱정하지 말렴. 무슨 일이 있으면 우리가 반드시 지켜줄 거니까. 그렇죠, 레일리?”
루시테는 문을 향해 레일리를 불렀다.
“네? 레일리 님이요?”
리브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드니아도 의아하다는 얼굴로 루시테가 바라보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런, 들켰군요.”
문이 열리며 레일리가 머쓱한 얼굴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가지런히 넘긴 머리를 괜히 매만졌다.
몸에 딱 맞는 흰 양복을 입은 장신의 레일리는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다웠다.
반듯한 이마와 쭉 뻗은 콧날이 베일 듯 날카로웠다.
“저기. 그, 루시테.”
레일리가 가만히 서 있지 못하고 방 안을 이리저리 배회하며 안절부절못했다.
시드니아와 리브는 동시에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모두들 레일리가 왜 저러는지 충분히 짐작이 갔기 때문에.
물론 레일리도 굉장히 멋졌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루시테였다.
새신부의 모습은 누가 봐도 눈부시게 아름다울 터였다.
직접 루시테를 꾸민 리브와 시드니아는 괜히 우쭐해졌다.
“우린 잠깐 나가 있을까?”
시드니아가 눈치껏 리브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리브가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서둘러 방을 나가고, 방 안에는 레일리와 루시테 둘만 남았다.
레일리는 루시테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레일리가 루시테에게 손을 뻗었고, 루시테는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았다.
레일리는 천천히 루시테를 끌어당겨 허리를 잡았다.
“아름답군요.”
“레일리도 아름다워요.”
루시테는 레일리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이런 날이 오다니.
용기를 내어 메이븐을 떠나오기를 잘했다.
자신이 폐위당했을 때를 떠올리면 루시테는 이제 그 어느 때보다도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웠다.
노이를 만났고, 리브와 에단을 만났고, 이반 할아버지를 만났고, 시드니아, 렘브란트, 그리고…….
레일리를 만났다.
폐위시켜달라는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여전히 그 황성에서 괴롭게 아등바등 살아남으며 결국은 살해를 당하거나 처형을 당했을 것이다.
처음 황성을 떠나겠다는 결심을 했을 때만 해도 꽤 막막했다.
잘 살 수 있을지.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지. 그런 게 걱정되었는데…….
물론 힘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버텨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 왔다.
레일리와 영원히 함께이기를 약속하는 이 순간.
이 남자가 없는 인생은 생각하기가 어려웠다.
서로에게 누구보다도 필요한 두 사람.
“사랑해요. 레일리.”
루시테의 감정이 담뿍 묻은 그 음성에 레일리의 입술이 떨렸다.
“저도 사랑합니다, 루시테. 저와 결혼해주어서 고마워요.”
둘은 손을 잡고 이마를 맞대고 그렇게 한참을 서 있었다.
* * *
손님들이 하나둘 나타나 자리를 채웠다.
결혼식 장소는 루시테의 집 산 중턱 하우스다.
산 중턱 하우스의 정원에 흰 천을 깔고 둥근 테이블을 마련했다.
각 테이블은 루시테의 정원에서 에단이 직접 키운 꽃들로 장식되었다.
리브와 에단, 시드니아와 루시테, 레일리가 모두 함께 고민하여 꾸며서 그런지 결혼식 장소는 소박하지만 아름다웠다.
이반 서점의 이반 영감과 에이프릴 꽃집의 사장인 로난 에이프릴이 함께 나타나 자리에 앉았다.
로난은 이크릭스의 황성에서 한때 루시테와 함께 감옥살이를 했던 사이였다.
루시테는 모든 일이 끝나고 로난에게 인사를 하러 간 일이 있어 지금까지 좋은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레일리의 집사인 스티븐, 레일리가 루시테의 옷을 사주었던 살롱 끌로에의 마담 쉬라도 초대를 받아서 나타났다.
마담 쉬라는 누가 옷가게 주인 아니랄까 봐 한껏 멋들어지게 치장을 하고 나타나 우아하게 자리에 앉았다.
그 외에도 평소 산 중턱 하우스 식구들과 인연이 있는 몇몇 사람들이 나타났고.
결혼식이 거의 시작하기 직전 무렵 한 사람이 나타났다.
긴 보랏빛 머리칼과 금빛 눈동자를 가진 아름다운 남자.
그가 천천히 정원으로 걸어들어왔고 그를 따라 검을 찬 두 명의 호위기사가 따라 들어왔다.
마담 쉬라와 로난 에이프릴은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고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발치에서만 봤던 헤카레트의 대신관 렘브란트가 아닌가.
한평생 직접 만날까 말까 한 존재를 이런 외딴집에서 이루어지는 결혼식에서 보다니?
마담 쉬라와 로난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그러나 이 자리는 루시테가 결혼을 하는 자리다.
그들은 대신관의 등장에 놀랐지만, 괜히 아는 척을 하거나 소리를 쳐 소란을 피우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그저 오늘의 주인공에 대해 새삼스럽게 대단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한편 대신관 렘브란트를 알아본 몇몇 사람이 놀라고 있는 사이, 그 뒤로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 한 명이 은밀히 결혼식장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고급스럽지 않은 평범한 차림에 붉은빛이 도는 적갈색 머리.
모자의 그림자에 가려 눈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으나 별로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크릭스의 황제이자 레일리의 이복동생인 질리언이었다.
시드니아는 루시테의 부탁으로 손님들을 체크하기 위해 정원으로 나왔다가 문득, 혼자 앉아 있는 적갈색 머리의 남자를 발견했다.
“안녕하세요. 저기…… 혹시 루시테 언니의 지인이신가요? 아니면 레일리 님의?”
시드니아는 차라도 한 잔 가져다주기 위해 그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시드니아는 꽤 낯을 가리는 편이었기에 이 정도 인사한 것도 큰 용기를 낸 것이었다.
“저기…… 제가 루시테 언니의 동생이라서요…… 그…… 혼자 계시기에…….”
시드니아는 우물쭈물 말을 덧붙였다.
“안녕하세요.”
시드니아를 잠시 바라보던 남자가 인사했다.
그가 고개를 살짝 들어 시드니아와 눈을 맞췄다.
모자로 그늘졌던 그림자가 살짝 걷히고. 따사로운 햇빛 아래 일순 그의 눈동자가 드러났다.
은빛 눈동자였다. 레일리와 같은.
“안녕하세요! 저는…… 시드니아에요. 시드니아 필드! 루시테 언니의 동생이에요. 결혼식에 와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남자는 잠시 시드니아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딱딱했던 표정에 살짝 이채를 띄었다.
“저는 질리언입니다.”
“아…… 네, 질리언 님.”
시드니아가 수줍어하며 양손을 모았다.
그때 에단이 식의 시작을 큰소리로 알렸다.
대신관 렘브란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가 섰다.
신랑 입장하라는 구호에 따라 흰 예복을 입은 레일리가 꽃으로 장식한 입구로부터 가운데로 나 있는 길을 걸어왔다.
이어서 루시테가 느린 걸음으로 나타났다.
둘은 길의 끝과 끝에서 서로 마주보고 섰다.
레일리의 부드러운 눈길이 루시테를 향했다.
봄바람에 아름답게 수 놓인 루시테의 베일이 흔들렸다.
루시테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레일리에게로 걸어갔다.
마치 이 세상에 둘만 있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하는 길이었다.
비록 둘 다 서로를 서로에게 보내줄 부모님은 없었으나 당당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어느 누구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마침내 레일리에게로 루시테가 도착했고 둘은 두 손을 마주 잡았다.
그들을 향한 박수갈채가 끊이지 않았다.
레일리는 루시테를 에스코트하여 대신관 렘브란트 앞으로 데려갔다.
“삼촌.”
루시테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루시테가 환하게 웃었고. 렘브란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의 사랑하는 가족 루시테와 앞으로 가족이 될 레일리 아사드. 그대들을 위하여 주신 헤카레트의 이름으로 축복하겠습니다.”
렘브란트가 나직한 목소리로 축사를 시작했다.
* * *
거대한 드래곤이 창공에서 날개를 펄럭였다.
드래곤의 은빛 비늘이 햇빛을 받아 무지개처럼 반짝였다.
-콰아아아아!
드래곤이 기분이 좋은 듯 크게 포효했다.
“루시테. 괜찮으십니까? 어지럽지는 않으십니까?”
노이의 등 위에서 레일리가 루시테를 꽉 붙들고 물었다.
“네! 바람이 시원해서 기분 좋아요.”
루시테가 신이 나서 두 팔을 벌렸다.
“루시이이! 더 세게 날아도 돼?”
노이가 하늘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쳤다.
“안 됩니다.”
노이의 물음에 대한 대답은 레일리에게서 나왔다.
“체엣!”
노이가 콧방귀를 뀌더니 날개를 펄럭이는 속도를 천천히 늦추었다.
루시테의 긴 머리칼이 바람결에 마구 휘날렸다.
루시테는 행복한 얼굴로 함박웃음을 지었고 레일리는 부드러운 눈길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레일리는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루시테는 레일리의 얼굴이 가까워지는 것을 보고 살그머니 눈을 감았다.
루시테의 연보랏빛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레일리의 입술이 루시테의 입술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둘은 가만히 눈을 감고 서로의 온기를 느꼈다.
창공 위를 가르는 드래곤의 날갯짓이 더더욱 느려졌다.
-크와아아아앙!
은빛의 드래곤이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로 기분 좋은 포효를 내질렀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