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장. 소문 (1/22)

선량한 야만인(Salvaje) 1권 (19세 미만 구독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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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장. 소문

2장. 열 번 찍어 아니 넘어가는 나무 없다

3장. 벤타블랙

4장. 10분

5장. 선량한 야만인

6장. 오메가의 억제제

7장. 알파의 ‘기억’

8장. 언제부터(1)

1장. 소문

알파와 오메가는 유전적으로 월등한 형질을 가지고 태어난다. 물론 어떤 환경이냐에 따라 성장은 다르지만, 오메가는 불안정한 호르몬 때문에 알파로 태어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형질을 가지고 있어도 차별을 받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것은 오메가라는 편견을 생기게 했고, 오메가라는 인식을 나쁜 쪽으로 사람들에게 심어 주었다. 이 때문에 가장 평범한 베타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오메가는 호르몬 조절을 스스로 할 수 없기 때문에 베타보다 덜떨어진 취급을 받았다.

그래서 사회 지도층이라 불리는 상류층 사람들은 오메가를 낳기를 꺼렸고, 오메가를 낳을 확률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그 확률을 줄이기 위해서라면 알파와 베타가 만나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다. 월등한 알파를 낳는 것도 포기할 정도로 오메가의 인식은 날이 갈수록 점차 나빠지며 나아지지 않았다.

세계에서 내로라하는 기업인 일품 그룹을 이끄는 은우의 아버지는 알파였지만, 그의 어머니는 베타였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태어난 은우는 오메가였다. 이렇듯 오메가를 낳는 확률은 줄어들 뿐 태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다.

이런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류층의 사람들은 오메가를 기피했고, 오메가로 태어난 사람은 사회활동에 아주 큰 제약을 받았다.

그들은 보통 두 가지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집에서 과잉보호를 받거나, 나머지 하나는 집안의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내놓은 자식이 되거나. 이 둘 중 하나였다.

오메가로 태어났지만 어렸던 은우는 사회에 나가서 회사를 멋지게 경영하겠다는 꿈을 가지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오메가라는 핸디를 당당히 딛겠다는 결심은 하루하루 갈수록 무너졌다.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한 살 한 살 나이를 먹어 가면서 체득하며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은우가 2차 성징을 겪어 오메가의 호르몬 억제제를 복용하기 시작하면서 그 꿈은 완전 산산조각이 났다.

상류층에서 바라보는 오메가에 대한 흉흉하고 차별적인 시선, 알파 잡아먹는 오메가 등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소문들. 실상은 그 반대였지만, 알파라는 특권이 누리는 것을 오메가는 누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은우의 뒤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소리도 그랬다. 그 수군대는 소리와 비아냥을 견딜 자신이 없어서, 은우는 멋지게 꾸었던 자신의 꿈을 접었다.

은우가 철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는 ‘그날’이 있던 날부터 은우는 오메가의 호르몬 억제제를 만들고 싶어졌다. 그 뒤 대학의 진로를 결정하고 대학원을 가기로 마음먹었다. 은우 주변의 오메가들이 알게 모르게 받는 차별을 보는 게 남 일 같지 않았다.

그렇지만 은우는 남을 위한 숭고한 정신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을 위해서였다. 그나마 자신은 내로라하는 재벌가의 자식이라고 남들이 앞에서는 차별하진 않았지만, 속으로 손가락질을 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 탓에 은우는 더욱 몸을 사리고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오메가로 태어났으니 재벌이 아닌 차라리 평범한 삶을 꿈꾸었던 은우는 제 삶에 끼어든 선량한 야만인에 의해 변화를 맞이했다.

✻  ✻  ✻

은우의 가족은 네 식구였다. 하지만 집에서 일하는 직원들만 해도 대략 수십 명에 달하는 저택, 혹은 재벌 집이라 부를 만한 커다란 집안이었다.

소위 대한민국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부촌에 위치한 곳에서도 제일 큰 집이었다. 집에 분수도 있었고, 정원도 있었고… 뭐 그런.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저택이었다.

안락하다고 하기에는 다소 어폐가 있었지만 3층으로 지어진 본채의 가장 커다란 중앙 홀이 있다. 보통 거실이라 칭하는 중앙 홀은 가족들의 만남의 광장 같은 공간이었다.

거실의 커다란 소파의 중앙에 앉아 근엄한 얼굴을 한 중년의 남성이 은우의 아버지 변 회장님이었다. 그는 세계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드는 기업을 이끄는, 이른바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이었다. 매년 저명한 해외 잡지에서 선정하는 기업인 중 카리스마 리더에 늘 이름을 올리는 회장님이었다.

변 회장의 시선이 신중한 표정으로 은우에게 향했다. 그 순간 그는 아버지의 얼굴이 아니라 그룹 회장님의 눈으로 바뀌었다.

“은우 너는 그렇게 확실히 정한 것이냐?”

흔들림 없이, 확고하게 변함없다고 은우도 앉은 자세에서 온몸으로 피력했다.

“네, 아빠.”

작게 끄덕이는 움직임에도 결 좋은 다갈색의 얇은 머리카락이 움직임에도 하늘거렸다. 은우는 습관적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변함없는 의지로 대답하는 눈빛은 어려도 야무진 면이 있었다. 검은색에 가까워 보이는 진한 남색의 교복을 입은 열여덟 살의 은우는 아직 소년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청소년답지 않게 똑 부러지고 단호한 말투였다.

은우는 전체적으로 선이 고왔다. 특히 손가락이 예뻤다. 아니, 예쁘다고밖에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사내치고, 또 키에 비해 작은 손을 가졌고, 또 손가락이 길고 가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은우는 엄마를 닮아 미모도 예뻤다.

“회사는 형이 물려받는 게 좋아요. 그리고 그게 훨씬 사람들에게 좋게 보이잖아요. 저는….”

말끝을 흐리던 은우는 작년의 일이 떠올라 아버지를 마주 본 상태에서 무릎 위로 올린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말아 쥐며 고개를 숙였다.

네 식구가 옹기종기 모여 앉기에는 거실도 집도 컸지만, 변 회장의 존재감이 넓은 거실을 가득 채웠다.

은우 옆에 앉은 은우의 형인 정윤과 은우와 마주 보고 앉은 은우의 어머니도 숨을 죽인 채 은우와 그녀의 남편인 변 회장을 번갈아 가며 응시했다. 다시 묵직한 변 회장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 마음은 알겠다. 그럼 너는 뭐가 하고 싶은 것이냐?”

“저는… 음, 공부할래요. 아빠.”

“공부?”

“네, 제가 하고 싶은 공부 할래요. 그러니까 아빠, 제가 하고 싶은 공부 시켜 주세요. 그러니까… 지금처럼 형이 회사 물려받는 경영자 수업 하는 게 저는 좋아요.”

“네가 하고 싶은 공부가 뭐냐?”

“…아시잖아요. 아빠.”

변 회장은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은우는 가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허벅다리에 손바닥을 슥슥 문질렀다. 아직 그날의 기억 속에 남은 알파의 페로몬이 아직 느껴지는 듯했다.

“저는 회사, 그런 거에 관심 없어요.”

은우는 마지막 말에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사실 거짓말이었다. 세상에는 발버둥을 쳐도 어쩔 수 없는 사실이 존재하는 법이었다. 가령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느니,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느니 그런 문제들 말이다.

은우도 어렴풋이 옛날 어렸던 아니, 불과 일 년 전까지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아버지처럼 그룹을 호령하는 모습을 그렸다. 아버지를 보며 어렸을 적엔 멋지게 회사의 경영을 하는 꿈을 꾸었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었다.

마치 저런 문제들처럼 아무리 발악해도 변할 수 없는 사실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걸 이겨낸 뒤 멋있는 기업가의 꿈을 꾸었었던 자신의 모든 의지를 한순간에 꺾게 만든 기억이 되살아났다.

‘알파’의 향기, 그리고… 씻을 수 없는 소문.

변 회장은 상당히 고민하는 얼굴을 했다. 그렇지만 은우의 그 말에 어딘가 편안해 보이는 표정을 드러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았다. 은우, 네 고집도 알았고, 네 마음도 알았으니….”

변 회장의 얼굴에서 예리한 눈초리가 은우의 형인 정윤에게 날아가 박혔다. 정윤은 아버지의 시선에 기합이 들어가 허리가 곧추세워졌다.

“정윤이가 영 시원찮다면, 은우 너의 가능성은 열어 두는 거로 하자.”

“…네, 아빠.”

은우는 그것까지는 허락했다. 아버지가 일부러 그런 말을 한 것이라 알고 있었다. 어차피 형인 정윤은 잘하리라 생각했다. 힐끗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형을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보다 일곱 살이나 많은 형이 멋쩍게 웃고 있었다.

모든 걸 포기한 은우는 이날 이후로 자신에게 가장 큰 지원군이자 방패막인 형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고, 둘도 없는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원래 기업의 총수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싸우는 세간의 재벌가 이야기는 비일비재했다. 하지만 은우와 정윤은 나이 차이가 크게 났기에 그렇게 형제끼리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이 일을 계기로 두 사람은 오히려 다른 집안의 사람들보다 우애가 좋았는데 더 좋아졌다.

팔방미인인 은우가 여러모로 출중해서 그 능력을 부각해 드러낸다면 정윤과는 속된 말로 총수의 자리를 놓고 왕자의 난을 벌일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되면 정윤과 사이가 틀어질 수도 있었지만, 은우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경영에서 손을 떼겠다고 밝혔다.

변 회장은 속이 쓰렸다. 옛날부터 머릿속으로 회사를 물려받은 은우와 그를 보좌하는 정윤의 모습을 그릴 정도로 은우의 재능과 능력을 눈여겨본 변 회장은 그날 이후 꺾여 버린 아들의 날개를 내심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 내심 가능성을 열어 두기 위해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은우에게 회사의 지분 주식을 정윤과 거의 똑같이, 아니 오히려 형인 정윤보다 더 많은 지분을 상속해 부각시켰지만 은우는 그 뜻을 꺾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은우는 적당히 이름이 알려진 여타 중견 기업의 사장님보다 많은 재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 일로 후계자로 지목되어 경영자 수업을 하는 정윤은 초조해하며 은우를 견제하는 눈초리를 했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정윤의 속내를 파악한 은우는 정윤에게 걱정하지 말라는 듯 보란 듯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은 진학했다. 덕분에 정윤은 은우가 정말로 경영에 관심이 없다는 걸 파악한 뒤에 동생인 은우를 믿어 의심치 않게 되었다.

기업가의 꿈을 접어야 했던 은우의 현재 꿈은 ‘오메가의 억제제’ 신약 개발이었다.

✻  ✻  ✻

“하암-”

하품을 하고 졸린 눈을 비비며 주방에서 커피를 내리는 은우 뒤로 정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윤은 정수기에서 물을 받으며 싱크대에 양손을 짚고 서 있는 은우에게 말을 걸었다.

“공부는 잘돼 가?”

멍한 정신으로 멍 때리고 있던 은우는 이제 대학교 3학년 2학기 기말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응? 아, 형…….”

어느새 다 내려진 커피를 빼 들고 다시 하품을 “하암-” 하며 눈가를 슥슥 손등으로 비빈 은우가 다정하게 웃었다.

“…응, 뭐 그럭저럭. 근데… 졸려 죽겠어. 내일 두 과목 시험인데.”

“언제 방학이야?”

“나는 내일! 내일 시험 다 보면 끝나지-”

“뭐야, 오늘만 고생하면 되겠네.”

“응, 그래서 오늘은 밤을 좀 새워 보려고. 그나저나 형은 잘하고 있어?”

은우는 새카맣게 보일 정도로 진하게 우려낸 커피를 후후 불더니 한 모금 마시며 웃었다.

“나? 뭐…….”

“흐음, 지금 형 얼굴로 봐서는… 맨날 혼나는 거 아니고?”

“야, 이 형을 뭐로 보고.”

정윤과 은우는 우애가 나빠질 뻔한 적도 있었지만 늘 좋았다. 돈 앞에서는 형제도 부모도 없지만 둘의 균형은 아주 좋았다. 정윤보다 더 많은 회사 지분을 물려받은 은우는 정윤의 의견에 모든 것을 맡겼다.

하지만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마음속에 있던 정윤은 자신을 놀려 대는 은우를 향해 눈을 흘기다가 은우를 따라서 물을 마시면서 슬쩍 물었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사람 속은 모른다고 했다.

“벌써 내년이면 졸업반이네?”

“응… 그렇게 됐네. 시간 진짜 빠르다. 대학 들어간 게 엊그제 같은데.”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나?”

“응, 진학…할 거야?”

“응…? 아아, 그래야지. 석사 나부랭이 정도는 되어야 신약 개발할 때 현미경 조리개나 한번 손으로 만져 볼 수 있지, 학사 정도는 받아쓰기밖에 못 해. 박사까지 하고 싶어. 그리고 무엇보다 공부가 더 재미있어. 할 수만 있다면 계속 공부하고 싶은데?”

동생의 우스갯소리에 정윤도 실소를 터트렸다. 은우는 머그잔을 들고 주방을 나가면서 농담을 던졌다.

“그러니까 형. 지금 잘하라구, 나를 위해. 나중에 제약 회사 하나 인수 좀 해주는 게 어때? 대주주의 소원이야. 난 놀면서 공부나 할래.”

“큭큭… 알았어, 알았어. 시험공부 잘하고.”

하얀 김이 폴폴 올라오는 커피를 손에 쥐고 은우는 주방을 나섰다. 은우가 한 걸음 내디뎌 움직일 때마다 머리카락이 하늘거리며 흔들렸다. 얼마나 얇은지 빛에 반짝거리는 듯했다.

흔히 말하는 손에 꼽히는 재벌 집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은우는 걱정 없이 대학원 진학을 목표로 삼았다.

친구들은 취업을 하네, 대학원을 가네, 학자금 대출을 받네 마네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은우는 그들 사이에서 순조롭고 평화로운….

앞으로도 평탄할 것만 같았던 삶이었는데, 은우의 운명은 입을 벌리고 은우를 집어삼키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  ✻  ✻

2층의 넓은 은우의 방에는 디귿 자 모양의 소파가 있다. 모노 톤의 깔끔한 소파에 은우는 반쯤 누워 대학생이 되어 맞는 마지막 겨울방학을 만끽하며 한가로이 책을 보고 있었다. 그 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똑똑.

“네.”

노크 소리에 은우는 책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건 정윤이었다.

“은우야, 잠깐 내려와.”

“응? 형, 무슨 일이야?”

“아버지가 찾으셔.”

“아버지가?”

소파 테이블에 책을 올려두고 은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윤을 따라 2층을 내려가면 거실이라 일컫는 중앙 홀이 보였다. 은우는 거실의 소파에 앉으며 일품 그룹의 회장님인 아버지를 응시했다.

“아빠, 부르셨어요?”

“그래. 은우 너는, 공부는 어떠냐?”

“뭐… 그럭저럭 해내고 있어요.”

“요즘 공부는 잘하고 있는 것 같다더라. 이번에도 장학금 받는다고 연락받았다.”

변 회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아들의 자랑거리에 좋아하지 않을 부모가 없다는 듯 변 회장도 온화한 표정을 짓자 은우도 멋쩍은 듯 머리를 손가락으로 긁적였다.

“아직 너희 형처럼 회사 다니고 싶은 마음은 없고?”

“네, 아빠…. 대학원 가고 싶어요.”

아버지의 칭찬에 옅은 미소로 은우가 말했다. 그러면서 꼭 한 번씩 은우에게 저렇게 떠보는 탓에 은우보다 정윤은 긴장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저는 회사 관심 없어요. 그런데 아빠, 무슨 일이세요?”

변 회장은 아쉬운 표정을 뒤로하고, 그래도 굳게 먹은 마음에 변함이 없는 은우가 기특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평온한 얼굴이 점차 사그라지며 굳어졌다. 그리고 어느새 아버지의 얼굴에서 그룹 회장님의 얼굴로 바뀌었다.

“너도 우리 회사에서 리조트 개발하는 건 알고 있지?”

“……네에.”

갑자기 튀어나온 이야기가 회사 일이라서 은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아버지를 보다가 옆에 앉은 정윤을 살폈다. 회사 경영에는 손을 대지 않겠다 했기에 은우는 정윤에게 선을 넘는 것이 아닌지, 정윤의 허락을 살폈다. 형의 표정을 미루어 보아 괜찮다는 것을 파악한 은우는 긴장이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회장님의 얼굴을 한 아버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 건을 네 형이 책임지고 리조트 개발에 공들이고 있는데…. 예전부터 A&C 그룹이 협력했으면 하는데 말이다. 아무리 먹을 것을 앞에 들이대도 도통 발을 들이지 않는구나.”

“……아빠.”

변 회장은 흔들림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데 다음 달에 그 A&C 그룹의 막내아들이 사교계 데뷔한다고 기업 파티를 연다는 초대장이 왔다.”

은우의 눈동자가 흔들려 정윤을 힐끗거렸다.

설마… 설마…….

“하필 그날은 나도, 너희 엄마도, 정윤도 모두 일정이 있어 바빠… 대신 네가 가야겠다.”

결국, 바라지 않는 말이 아버지 입에서 나왔다.

“…….”

은우는 양손을 마주 잡고 깍지를 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으로 정윤에게 시선을 던졌는데, 정윤은 미안하다는 미소로 부드럽게 사정을 말했다.

“그게 은우야, 그날 아버지랑 나는 해외로 바이어 만나러 가는 날이고 중요한 미팅이 있어. 엄마는 여수에 일정이 있고…. 네가 특히 싫어하는 건 아는데….”

은우는 고개를 푹 숙이며 입술을 꿈틀거리다가 아버지를 향했다.

“…안 가면… 안 되나요?”

“안 된다. 한 대표와는 예전에 한 번은 만났지 않느냐.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이 일은 아주 중요해. 반드시 가야 해.”

단호한 아버지 때문에 왜소한 은우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한숨을 푹 내쉬며 대답을 할 필요도 은우는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아버지가 정했다면 그렇게 결정이 난 것이다. 적어도 이 집안의 사람으로서, 가문의 구성원으로서 해야 하는 일이 응당 있기 마련이다. 내 몸을 지키기 위한 재산을 손에 쥐고 있으려면 하기 싫은 일도 해야 하는 대가였다.

✻  ✻  ✻

바라지 않던 기업 파티가 있는 그날이 왔다.

먼지 한 톨조차 용납하지 않게 반짝반짝 광택을 낸 고급스러운 외제 차를 보자 은우는 부담스러웠다. 고급스러운 슈트를 차려입은 것도 어색하고 부담스러워서 자꾸만 옷깃을 툭툭 잡아당겼다. 경영에 손을 떼겠다고 한 순간부터 이런 특권을 내려놓았던 삶을 산 은우는 어색했다.

지방으로 내려가기 전 어머니가 챙겨 주신 슈트에서 새 옷 냄새가 났다. 은우는 주머니에 넣어 둔 동그란 약통을 움켜쥐었다.

“아, 잠시만요.”

뒷좌석의 문을 열어 주는 운전기사에게 말하더니 은우는 재빠르게 집 안으로 뛰어들었다. 빠르게 달리는 은우의 머리카락이 하늘거리며 춤을 췄다.

2층으로 성큼성큼 뛰어오르면서 주머니에 넣어 둔 약통을 꺼냈다. 은우는 방으로 들어가 책상 서랍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서랍에서 부족하지 않게 채워 놓은 빨간색으로 코팅된 동그란 알약 패키지를 꺼냈다.

2열 6행으로, 도합 열두 알에 한 세트.

은박지 재질로 밀봉된 약을 꾹 눌러 은우는 약통에 그 열두 알의 약을 모조리 담았다. 이미 약통에는 약이 있었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약이 절대로 부족해지지 않게 했다.

그제야 안심되는 표정으로 은우는 그중 한 알을 익숙하게 물도 없이 삼켰다. 그냥 삼키기는 제법 크기가 컸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탓에 입안에 고인 침만으로도 삼킬 수 있었다.

습관적 복용이라는 걸 은우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먹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었다. 약통을 주머니에서 부적처럼 꽉 쥐었다.

방금 약통 속에 약을 가득 채웠음에도 강박적으로 한 번 더 확인하고 나서야 방을 나갔다. 차분한 발걸음으로 은우는 대문 밖으로 나왔다. 운전기사가 차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2월의 쌀쌀한 바람이 불었는데 자신 때문에 밖에 서 있게 한 것에 은우는 공손하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운전기사도 안면 근육을 풀며 말했다.

“아닙니다. 타시죠.”

열린 뒷좌석으로 올라탔다. 고급스러운 세단 차량이 주는 안락함은 포근했다. 운전기사가 운전석으로 향하고 나자 차량은 엔진소리도 없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은우가 창틀에 팔꿈치를 괴고 창밖을 응시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을 멀뚱하게 보고 있었다. 아침에 먹은 건지, 오후에 먹은 건지, 아니면 방금 먹은 약 기운이 퍼지는 건지 작게 “하암-” 하품을 하며 나른한 표정으로 운전석의 운전기사를 힐끗거렸다.

“저 들어갔다가 금방 인사만 하고 나올 거예요. 길어야 한두 시간 정도예요. 몇 시간 안 걸릴 거 같으니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예.”

룸미러로 운전기사가 눈을 마주쳤다.

점점 잠이 쏟아질 것 같은 은우는 몽롱하게 꾸벅꾸벅 졸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느새 차는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속도가 줄면서 주차장으로 들어섰다.

캄캄한 밤인데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검은 세단의 차량이 넓은 주차장에 즐비해 있었다. 한눈에도 한 대에 수억을 호가하는 고급 세단들이었다. 엠블럼만 보아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의 고급 차가 줄줄이 소시지처럼 주차되어 있었다. 이미 그곳에서 어느 차가 더 비싼가를 경쟁하는 건 무의미해 보일 정도였다. 도심 5성급 호텔의 넓은 주차장의 모습이었다.

오늘은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이었기에 호텔의 입구에서부터 호텔 측은 이 이상 넘지 말라는 포토라인이 세워졌다. 수십 곳의 신문사, 잡지사와 방송국의 기자들은 초저녁부터 진을 치고 앉아 무슨 건수가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호텔의 입구로 들어오는 차량을 향해 플래시를 팡팡 터트리고 셔터를 눌러 챡, 챡, 챡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은우는 쏟아지는 잠에서 번쩍 깨어나려고 두 뺨을 가볍게 찰싹찰싹 두드려 긴장 상태로 들어갔다. 낯선 그 전경을 눈에 담으며 긴장이 한숨이라는 형태로 표출되었다.

“후우…….”

스스로 깨닫지도 못한 채 은우는 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내 빨간 알약을 하나 더 입속으로 밀어 넣었다.

으리으리한 호텔은 5성급에 어울리는 외관으로 모던하면서 화려했다. 호텔 내부의 연회장 역시 혀를 내두를 만큼이었지만 은우는 주변을 둘러볼 생각도 없이 연회장으로 자신의 존재감을 감추며 들어갔다.

은은한 조명은 어둡지도 않고 지나치게 밝지도 않아 고급스러움을 연출했고, 높은 천장을 가진 홀의 중앙에는 다리가 얇은 와인 잔을 이용해 7층 탑을 쌓아 샴페인을 채운 장식이 샹들리에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벽을 따라 준비된 음식들은 세계 3대 진미라 불리는 것들과 함께 산해진미가 먹음직스럽고 정성스럽게 진열되어 있었다. 각 요리는 메인 셰프가 배정되어 직접 접시에 요리를 담아 줄 정도로 대접하고 있어서 이 파티에 얼마나 공을 들인 것인지 보여 주었다.

일반적인 뷔페처럼 보이는 파티였지만 딱딱한 테이블이 놓여 있어서 음식을 떠서 ‘먹는 것’에 중심을 두는 것이 아니었기에 이 넓은 홀에는 테이블과 의자가 없었다.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음식의 맛을 보고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에 중심을 두는 자리였다.

특히나 이곳에 모인 사람들에게도 정성스럽게 준비된 산해진미들이 그렇게 신기하거나 처음 보는 것들은 아니어서 음식들은 싸늘하게 식어 갔다.

은우는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한쪽 귀퉁이에 박혀 벽에 등을 기대고 먼지와 다를 바 없이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지만 감춘다고 감춰질 인물은 아니라는 듯이 선이 가는 은우를 힐끗 보는 사람들과 대놓고 노골적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은우는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거북스러운 시선을 오롯이 견디는 은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원래도 하얀 얼굴에 그마저도 핏기조차 증발하여 창백한 안색을 한 은우는 시선을 아래 바닥으로 향한 채 고정되었다. 아래로 떨궈진 가는 머리카락이 커튼처럼 앞으로 사라락 쏟아졌다. 잠깐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려던 은우는 멈칫했다. 머리카락으로 사람들의 시선이 가려진다면 이대로도 좋았다.

반짝거리며 빛나는 바닥에 가상의 동그란 점을 만들어 그 점을 멍하게 응시한 채로 은우는 조각처럼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최대한 귀에 들리는 자신에 대한 소문을 귀에 듣지 않으려 정신을 집중했다.

“어머, 저기 일품 그룹 총수 둘째 아들이잖아.”

“어디요? 누구죠?”

쌍둥이처럼 모 명품의 트위드 재킷을 걸친 중년 여성 두 명이 은우를 눈으로 훑으며 손가락으로 대놓고 가리켰다.

“저기, 저기 고개 숙이고 있는…. 이름이 아마 은우라고… 했던 것 같은데. 이런 모임에는 잘 안 나온다고 하던데, 여긴 어떻게 나왔네요.”

“아아, 저 사람… 그 소문 무성한?”

“예, 맞아요. 망측해라…. 정말… 낯짝도 두껍지.”

“…호호, 그러니까요. 오늘은 누구를 꼬시러 왔나 보네요. 그런데 그 소문은 정말 사실일까요?”

“뭔데요?”

“저도 들은 이야기지만, 한 사람이랑은 만족을 못 한다는데.”

“아아, 맞아요. 그렇다는데요. 그건 저도 들었어요.”

노골적인 비웃음과 조롱으로 웃으며 그들이 은우를 스쳐 지나갔다. 잠깐 정신을 차렸던 은우의 귓전에 파고드는 수군거림이 너무나도 가슴을 후벼 파듯 날아와 꽂혔다.

예쁜 얼굴을 가진 은우의 매끈한 눈썹이 저절로 찡그려졌다가 펴졌다. 고귀한 상류층의 사람들이라고 하기에 너무 저급한 뒷담화였다.

“…후우…….”

은우는 스스로도 화가 나서 화를 가라앉히려 숨을 뿜어 속으로 욕설을 중얼거렸다. 그래 봤자 은우가 할 수 있는 욕은 ‘미친놈’ 정도가 다였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속이 풀릴 것 같았다.

자신의 의지로 온 파티가 아니었다. 뭐 흔히들 사회적 지위라는 것이 있으니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은우는 저 자신을 그렇게 달랬다. 어쩔 수 없었다고. 부모님도, 정윤도 가능했다면 자신을 이곳에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잠깐이면 돼.

잠깐만 버티자고 은우는 자기 자신을 위로했다.

하지만 귀에 들리는 악담이 점차 커져 고개를 들어 자신을 향해 근거 없는 악소문을 내는 그 여성들에게 은우는 시선을 던졌다. 그녀들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들켰다는 듯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해 황급히 자리를 옮겼다. 그럼에도 그 두 사람은 끊임없이 쑥덕거리며 비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답답한 마음에 은우는 한숨이 저절로 나와 쉬었다. 힘없는 어깨와 눈동자가 아래로 축 처졌다. 뒷짐을 지고 등을 벽에 기댄 채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발장난을 쳤다. 발을 세워 발끝으로 툭툭 치며 시간을 보냈다. 어릴 때 운동장에서 교장 선생님의 훈화 시간을 견디게 해준 원동력인 장난이었다.

은우는 확실히 덩그러니 놓인 섬과 같았다. 그곳의 은우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은 서로 알고 지내는 것처럼 인사를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풍겼고, 준비된 음식을 먹고 품평을 하며 시시덕시시덕했다. 하지만 은우는 이곳에 도착해서 그 어떤 것도 입에 대지도 않았고, 누구와도 친밀하게 인사를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다갈색의 머리카락이 하늘거리며 자연스럽게 더욱더 앞으로 쏟아졌다. 매끈한 이마에 수놓아진 머리카락을 습관적으로 손을 뻗어 쓸어올렸다. 예쁜 손가락에 가는 머리카락이 감겼다.

그런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는지 은우의 손길 한 번에 연회장의 대부분의 사람이 노골적인 시선을 보냈다.

은우는 그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이번에는 시야가 들려 허공에 한 점을 만들어 그곳을 멍하게 쳐다봤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꽂혀 얼굴이 사라질 것 같았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익숙했다.

구둣발의 또각또각 소리가 귓가에 가까이 울렸지만,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내심 자신을 지나치길 바랐다.

“안녕하세요.”

기대와 달리 낯선 남자 두 명이 다가와 예의 가득한 웃음과 몸짓으로 인사를 건네며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세요.”

멍했던 정신이 그들로 인해 깨지며 느릿하게 은우는 말을 걸어온 남자들을 향해 시선을 돌려 인사했다. 정중하게 까딱 고개를 숙여 인사는 했지만, 그가 내민 손을 잡지는 않았다. 그러자 손을 내밀었던 그는 민망한 너털웃음을 지으며 손을 거두며 자리를 떠났다.

그 두 사람을 은우는 잠시 쳐다보며 미간을 구겼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이 자신에게 다가오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은우는 다가오는 사람들에게조차 쌀쌀맞게 대했다.

방금 떠난 이 두 사람도 그랬다.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며 일부러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고. 스쳐 지나가는 그들의 말과 비웃음이 증명하고 있었다.

“어때? 너는 맡았어? 났어? ‘오메가’ 냄새.”

“아니, 너는? 어땠어? 맡았어? 그나저나 악수 한 번 안 잡네, 사람 민망하게.”

“콧대가 높아서 그러지, 저 얼굴로…….”

“야, 무슨 소리야. 콧대? 저 얼굴로 소문은 가관인 거 몰라? 저 미모로 남자나 여자나 아무나 다 후리고 다닌다더라. 너도 조심해라. 오늘은 누구를 꼬시려고….”

“그러게…. 아니,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유흥이지, 유흥. 우리나 저 사람이나 돈이 궁하겠어? 얼마나 닳고 닳았으면…. 하루에도 섹스를 안 하면 안 된다더데?”

“진짜 사실이야…? 나도 한번 꼬셔서 싸질러 볼까? 잘 울게 생겼는데.”

“아서라.”

“왜… 허리랑 엉덩이 잘 돌리게 생겨 가지고. 잘 흔들어 주면 끝나고 잘했다고 용돈이나 손에 쥐여 주는 거 아니야? 여기 모인 어느 사장님들보다 머니 파워가 셀 텐데….”

“푸훗, 야, 그거 좋은데? 나도 같이 낄까 봐. 어때?”

두 사람은 노골적인 시선과 음탕한 표정과 눈빛으로 은우를 훑었다. 은우는 그들의 시선 때문에 소름이 돋아 외면했다.

“이왕이면 박을 때 ‘주인님’이라고 부르게 하면 보기 좋을 거 같지 않냐?”

“큭큭, 알파만 골라 잡아먹는 일품 그룹 변은우잖아. 쩝, 근데 안 되겠지. 진짜 집안과 머니 파워만 아니었으면…. 여기 널린 알파 놈들이 아까부터 노리고 있는 것 좀 봐.”

“그러니까 다들 눈독만 들여서 쳐다만 볼 수밖에.”

“아아…. 그러니까, 아쉽다. 아쉬워.”

은우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아버지가 물려주신 재산의 가치는 저들이 손을 대기 어렵게 만들 정도였다. 다행히 은우는 그걸로 인해 제 몸 하나 부지하고 있었다.

눈을 감았다가 뜬 은우의 귀에 순간적으로 그들의 대화가 들렸다. 노골적인 대화가 고막을 흔들어놨다. 귀를 잘라 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앞에서 태연하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 뒤로는…. 아니, 뒤에서 뒷담을 하는 거면 들리지 않으니 상관없지만 이렇게 대놓고 들리게 앞에서 앞담을 하는 데 버틸 재간이 없었다.

저 두 사람이 완전히 사람들 사이로 유유히 사라지는 것을 보며 혼자 남은 설움이 치밀어 올라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울컥한 감정에 눈가가 따끔거렸다. 눈시울이 빨갛게 되려고 하자 눈꺼풀을 파닥파닥 빠르게 깜박거려 눈물을 지웠다.

“하아…….”

숨을 몰아쉬며 이곳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 주변을 획획 둘러봤다. 이 파티의 주인공이 누구고, 파티의 목적 따위는 기억나지 않았다. 은우는 맡은 임무만 수행할 뿐이었다.

일품의 변 회장을 대신하여 한 대표에게 얼굴도장을 찍을 것.

그 목표만 달성하면 지체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이곳을 벗어나리라.

너무 많은 시선을 받아 얼굴이 뜨거워져 녹아 사라질 것만 같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태연하게 연기를 해야 하는 은우는 꿋꿋하고 강단 있게 버티고 있었다.

이번에 은우는 높이 매달린 샹들리에를 정신을 집중하며 멍하게 쳐다보았다. 현실에서 모든 감각을 차단할 정도로 집중하면 귀에 윙윙거리는 소음이 완벽하게 사라지면서 혼자가 될 수 있었다.

아아, 샹들리에가 반짝거린다. 우리 집에 있는 거랑 다른 회사 제품인가? 하긴, 우리 집에 있는 거는 회사 제품이 아니지…. 엄마랑 나랑 둘이 심혈을 기울여 고른 디자이너 컬렉션이었지….

이곳과 전혀 상관없는, 그런 허무맹랑하고 동떨어진 생각을 하기 시작하자 은우의 귀에 소음이 차단되어 들리지 않게 되었다.

✻  ✻  ✻

오늘은 A&C 그룹의 기업 파티였다. 재계 순위로 보자면 대략 20위권의 그룹이었다. 주로 금융과 부동산의 투자, 그리고 호텔 사업이 주축인 그룹이었다. 이 A&C 그룹의 막내아들인 한승현이 갓 스무 살이 되었고, 그가 사교계에 데뷔하는 자리였다.

사교계라고 말하지만, 기업 내 후계자 양성을 위한 자리였다. 많은 기업의 관계자들 앞에서 얼굴도장을 찍는 관례 같은 행사였다. 일반적으로 스무 살이 넘어서 회사의 경영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일 때 하는 것이 가장 보편적인데, 승현은 평균보다 이른 나이에 치르게 되었다. 이렇게 된 것에는 한 대표의 양육과 교육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대표는 아주 어릴 때부터 뭐든 경험을 통해 배우길 원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서부터 온갖 경험을 하게 했다. 그래서 승현은 또래 애들보다 어딘가 의젓한 면도 있었고, 뿐만 아니라 그 경험을 앞세워 리더로 군림했다.

은우는 이미 고등학생 때 기업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탓에 이런 으리으리한 일을 하지 않을 예정이지만, 은우의 형인 정윤도 대학 졸업을 앞둔 가을날 이런 파티를 했던 기억이 있었다. 상류층 사회에서는 이런 일은 관행 같은 일이었다.

호텔 연회장에 바글바글 모인 사람들의 정체는 정계와 재계에서 내로라할 인물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이곳에 모두 모여 있었다. 승현은 큰 키를 이용해 빙글 장내를 둘러봤다.

TV나 신문에서 볼 법한 사람들의 얼굴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고, 간혹 유명 연예인의 얼굴도 보였다. 으레 자신이 처음 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익히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승현은 그러면서 기업 대표인 아버지와 형인 승겸을 부지런히 쫓아다니며 웃는 얼굴을 보였다.

승현은 아버지와 형이 소개해 주는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허리를 깍듯하게 숙여 눈을 마주쳐 인사를 나누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준비한 음식은 입맛에 맞는가요?”

“아, 안녕하세요. 축하합니다. 음식들은 아주 좋아요.”

속으로 썩은 미소를 지었어도 승현은 가식적인 얼굴로 허례허식을 주고받았다. 화려한 색상의 원피스를 차려입은 여성도 매력적으로 웃으며 속으로는 맛이 없다고 할지언정 겉으로는 맛있다는 눈인사를 건넸다. 인사치레로 몇 마디를 더 주고받았다. 승현은 멋있는 남자다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가 이 파티의 주인공답게 머리에는 포마드를 발라 반듯하게 넘겨 깔끔한 분위기로 호감이 가는 첫인상을 발산하고 있었다.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을 때마다 사람들이 아주 잘생겼다느니, 멋지다느니 칭찬을 입에 마르지 않게 하자 승현은 화답하는 미소를 보여야 했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서 볼에 있는 보조개가 움푹 패어 순한 인상까지 더했다. 하지만 승현은 웃는 겉모습과 다르게 속으로는 인상을 썼다.

“후우…….”

승현은 너무 많은 인사와 딱딱한 격식 때문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아픈 곳이 없어서 한숨이 저절로 쉬어졌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허리를 접어 수천 번의 인사를 하고,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들었다. 앵무새가 따로 없어서 지겨워질 참이었다.

승현은 조금 딴청을 피울 요령으로 주위를 빙 둘러봤다. 그리고 어릴 적부터 친하게 지내는 소위 불알친구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반가운 마음에 승현은 자리를 이탈해 그들에게 다가갔다.

세 사람의 친구 중 샴페인 잔을 든 남자가 유명한 로스쿨의 교수님을 부모로 둔 박전민이었고, 그 옆에 갈색의 슈트를 입은 땅딸막한 남자는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원단 수입을 하는 유일무이한 기업의 후계자 최시종이었다.

그리고 조금은 소심해 보이지만 신중한 성격으로 말이 거의 없이 언제나 도를 지나치려는 우리들의 안전 브레이크 역할을 담당하는 친구가 이선우였다.

승현은 그들의 리더 격으로, 줄곧 초중고를 같이 나왔다.

그들에게 가까워지는 승현을 친구들은 발견하지 못했는지 흥미롭게 수군거리는 시종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오메가라며? 오메가들은 그 호르몬에서 풍기는 페로몬 냄새 난다고 하는 거 아냐?”

이번에는 전민이 시크하고 무심하게 샴페인을 마시며 대답했다.

“에이, 약 먹었겠지. 오메가들은 우리 같은 알파랑 달라서 약 안 먹으면 못 버틴다잖아….”

땅딸막한 키의 시종은 콧잔등을 으스대며 비볐다.

“근데… 저 얼굴로 박아 달라고, 큭큭…. 이렇게 후장을 양손으로 벌리고 질질 싸면 볼만하겠는데. 너 본 적 있어? 오메가들이 그 발정 날 때 그거… 나 학교 선배 따라가서 본 적 있는데.”

전민은 조롱에 가까운 미소로 비열하게 웃었다.

“야, 미친 새끼야. 그만해…! 괜히 저 얼굴 보고 있으니까 상상되잖아. 이 오빠 아랫도리 잘 후릴 수 있는데.”

그러다 전민은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는 듯이 손가락을 까닥하며 친구들을 가까이 불러 모았다.

“이제 생각난 건데, 내가 예전에 들은 건… 같은 오메가인데 비슷한 좆 달렸다고 펠라가 기가 막힌다더라. 목구멍까지 이렇게… 여기까지 밀어 넣는 스킬이…. 어후, 한번 저 사람 펠라를 받으면 다음부터는 다른 사람들로는 성에 안 찬다고, 너무 잘 빨아서 좆이 뽑힐 거 같대. 그리고 목구멍에서 조이는 게 뒷구멍에 쑤셔 박는 것보다 더 좋다더라. 심지어 그걸 더 잘 느낀다고…. 목구멍에 정액 싸 주면 감사하게 다 받아먹는다는 이야기.”

그가 저질스럽게 손가락을 흔들며 킥킥댔다. 이번엔 시종이 말했다.

“진짜? 난 그 이야기 처음 듣는데… 진짜 어디 그런 용감한 사람들 없나? 이렇게 되니까 한번 박아 보고 싶네. 내가 키는 좀 작아도 자지러지게 박아 줄 수 있는데… 우리 기업의 모토 ‘고객님이 만족할 때까지’처럼 말이야.”

샴페인 잔을 빙글빙글 돌리던 전민은 자랑스럽다는 듯이 아랫도리를 드러내는 시종의 몸짓에 썩은 미소로 화답했다.

“야야, 아서라…. 진짜 손댈 생각 아니지? 그랬다가는 집안 풍비박산이다. 옛날엔 삼족이 멸했지만, 지금은 삼 대가 망한다.”

역시 이들의 제동은 선우가 맡았다.

“야, 조심해. 누가 듣겠다.”

“아쉽다, 아쉬워… 일품이라는 거대한 배경만 아니었으면, 머니 파워만 아니었으면 진작에 따먹는 건데.”

전민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나쁘면서 못된 생각을 멈추지 않더니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야, 그러면 내기할까?”

“무슨 내기?”

사내놈 세 명이 머리를 맞대고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전민은 씩 웃으며 말했다.

“…누가 먼저 따먹나.”

“호오… 근데 괜찮을까? 우리 아빠 말에 어지간한 기업 사장님들보다 머니 파워가 세다고….”

“…남자가 그 정도 패기는 있어야지.”

세 사람이 노골적인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근데 종목은 뭐로 내기를 해?”

시종은 그럴 기분 만만으로 되물었다.

낄낄거리며 그들이 음탕한 농담을 주고받고 누군가를 희롱하는 대화를 들으며 승현은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친구들이 하는 이야기에 따라가지 못해서 그들이 힐끗거리며 누군가를 보고 떠드는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무심결에 닿은 시선 끝에는 한 남자가 보였다. 한쪽 벽에 손을 뒷짐 지고 등을 기댄 채 무료하게 서 있는 사람이었다.

수려한 얼굴과 달리 고슴도치가 가시로 뒤덮인 몸을 웅크려 가시를 돋아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하늘거리는 머리카락과 단정하고 예쁜 이목구비, 그리고 윤기가 흐르는 피부가 어우러져 승현 자신의 시선을 확 잡아끌었다. 그가 천천히 턱을 살짝 들어 올리더니 멍하게 천장에 붙은 샹들리에를 응시했다.

처음 보는 그 사람에게 승현의 모든 신경과 이목을 던졌다. 한순간에 승현은 누군지도 모르는 그 사람에게 빠졌다는 것을 느꼈다. 이름도 모르고, 지금 처음 만난… 아니, 만난 것도 아니고 처음 그를 발견했는데, 말 한마디 나눠 보지도 못했는데, 그에게 모든 관심이 쏠렸다. 승현은 그의 시선을 따라 천장의 샹들리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과연 저 사람은 누구지?

제일 먼저 든 생각이었다. 자신의 시야를 지배한 그를 보며 그에 대해 모든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알고 싶었다.

그의 얼굴이 눈에 크게 확대가 되어 들어왔다. 주변의 모든 것이 페이드아웃 되면서 그가 부각된 것이었다. 혈색이 좋은 피부는 비이상적으로 하얗게 보였다. 아몬드 모양의 눈, 그리고 높게 솟은 콧날과 남자치고 형태가 좋으면서 붉은 입술이 머릿속으로 스몄다. 그를 보며 승현은 충격을 받은 얼굴을 하다가 억지로 시선을 떼어 친구들에게 향했다.

“무슨 얘기 하는 거야?”

“어휴, 깜짝이야!”

그들은 갑자기 곁에서 목소리를 낸 승현 때문에 모두 화들짝 놀라 어깨를 들썩거렸다. 도둑이 제 발 저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너네, 말 좀 가려라, 사람들한테 다 들리잖아. 우리끼리 있는 사적인 자리도 아니고. 공과 사 구분도 못 하면 어떡하냐? 너네.”

승현은 미간을 좁혀 친구들을 나무랐다. 자신도 들렸다면 다른 사람들한테도 들렸을 거라 쉽게 예상했다. 멋쩍은 미소로 시종이 반응했다.

“들렸어? 조용히 말한다고 했는데, 그게 들렸네.”

“그건 그렇고 이야- 한승현, 이렇게 차려입으니까 몰라보겠는데?”

“내가 좀, 에헷.”

칭찬에 승현은 슈트의 옷깃을 툭툭 당기며 멋있는 포즈를 해 보이는데, 전민은 초를 쳤다.

“뭔 소리야. 옷이 멋있다고.”

그만 승현은 자신이 방금 한 말을 잊어버렸다.

“뭐? 이 새끼야?”

큭큭 친구들이 웃는 비아냥에 승현은 그들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야, 너 가뜩이나 큰 눈에서 눈깔 튀어나오겠다.”

등짝을 툭 치는 전민을 마지막까지 눈을 흘겨 노려보던 승현은 본래의 내용으로 돌아왔다.

“근데 무슨 이야기인데…?”

“아아, 별거 아니야.”

어깨를 으쓱한 시종은 얼버무리며 코를 훌쩍하며 손가락으로 문질렀고, 전민은 손에 든 샴페인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입을 싹 닦는 친구들을 두고 승현은 다시 홀로 덩그러니 서 있는 그에게로 시선을 옮겨졌다.

“별거 아니라고? 뭔데 그래? 방금 너네 얘기한 거 분위기는 딱 별거 있는 분위기였는데. 무슨 오메가가 어쩌고 얘기했잖아.”

쌍꺼풀이 진하게 진 승현의 큰 눈이 친구들의 얼굴을 세세하게 살폈다. 이렇게까지 말한 승현에게 더 이상 그들은 숨길 수도, 숨길 것도 없다는 얼굴을 하고 손짓으로 가까이 오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비밀 이야기라는 것이 주는 스릴감은 묘한 소속감을 주어 승현은 심장이 튀어 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그들은 비밀 이야기를 가장해 소문을 입에서 입으로 실어 날랐다.

“저기 혼자 떨어져 있는 사람 보이지?”

“응.”

승현은 그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오랜 시간을 그는 꼼짝없이 가만히 서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적어도 샴페인을 들고 마실 때 그는 물 한 모금조차 입에 대지도 않을 정도로 조금의 움직임도 하지 않았다. 그를 천천히 살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분위기가 차분했고, 또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장벽을 세웠다.

전민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이 일품 그룹 둘째 아들인데, 우리보다 네 살 많아. 근데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오메가라고 소문이 퍼졌어. 뭐, 오메가가 나쁜 건 아닌데, 그냥 저 사람 소문이 그래. 그 소문이… 저 얼굴로 봐봐. 여기 모인 알파들이 한둘이 아니잖아? 정말 드물게 이런 사교 모임에 얼굴을 비치고는 마음에 드는 알파 하나 꼬셔서 밤새 물고 빨며 떡을 친다는 소문이 파다해. 한번 저 사람한테 물리면 양기가 쪽쪽 빨린다더라…. 실은, 나도 소문만 들었지, 처음 봤어. 워낙 이런 모임에 나타나지 않으니까…. 근데 여기서 저 사람 소문 모르는 건 한승현 너밖에 없을 거다.”

“뭐…? 에이, 설마… 그런 짓을? 일품이라며?”

귀에 전해 들은 이야기가 믿을 수가 없어서 승현은 처음 본 그를 변호했다.

“잘못 안 거 아니야? 그럴 리가 있겠어?”

이번에는 시종이 침을 튀기며 말했다.

“왜 몇 년 전에… 그… 이름이 뭐더라? 아무튼, 파산한 기업 대표가 있었는데, 기억 안 나? 갑자기 한순간에 주가 폭락해서 파산한 것도 실은 그 대표가 저 사람한테 손대서 그렇다고 소문 있었잖아…. 아, 맞다. 그리고 얼마 전에 최모병 국회의원 의원직 박탈당한 거 기억나지? 그거 일품이 그랬다고 소문이 쫙 났어.”

“……진짜야?”

“그 의원 워낙… 밝혔잖아. 이런 데 와서도 앞뒤 구분 못 하고….”

음흉하고 음산한 목소리가 승현의 청각을 강타했다. 하지만 승현은 그를 힐끗거리며 못 미더운 표정을 했다. 처음 본 그를 보며 들은 소문을 믿지 않으려 하는 승현을 향해 이번에는 전민이 재차 승현에게 아는 이야기 전부를 들려줄 생각인지 말을 이었다.

“아아, 맞아…. 그 이야기는 나도 들었어. 그리고 얼마 전에는 그런 이야기도 있었어, 오메가들이 발정 나면 호르몬에서 풍기는 페로몬 냄새 있지? 그걸 맡았다고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녔다고 하더라고, 맡아 본 사람들이 하나같이 장난 아니게 황홀하다고…. 얼마나 우성인자를 가진 건지 그 향이 미칠 정도래. 맡기만 했는데 아랫도리가 후끈후끈하다더라.”

승현은 눈을 가늘게 떠서 그의 주변에 맴도는 사람들을 살펴보았다. 시종인지 전민인지 누군가가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치며 말했지만 승현은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근데 워낙 집안이… 일품이잖아. 쉽게 손도 못 대고 있는 거지. 아니었음, 당장 여기 화장실에 끌려가서 변기통에 처박혀서 다구리로 잡아먹혔을걸…? 여기 노친네들 중에도 입맛 다시는 인간들이 고상한 척하면서 많을 거야.”

승현은 친구들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접근하지도 않으면서 곁눈질을 하는 것이 보였다.

“저 입에 내 똘똘이를 물려 주면 잘 받아먹을 거 같지 않냐? 쪽쪽 빨면서, 좆이 뽑힐지도 몰라.”

승현은 커다란 눈을 깜박거리며 멀뚱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친구들의 음담패설에 미간이 찡긋거려져 그들을 말렸다.

“야, 말 좀! 사람들한테 다 들리잖아.”

“미안, 미안. 나도 모르게.”

그러면서도 승현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난잡한 말이 뇌리에 남았다. 불꽃이 튀는 운명의 상대를 만났는데, 그 운명의 상대가….

세 친구는 서로 작당 모의를 하듯 멍하게 은우를 바라보고 있는 승현을 보며 서로 눈짓을 주고받으며 입을 맞췄다. 죽이 딱딱 맞는 것이…. 전민은 제일 키가 큰 승현의 어깨에 손을 올려 힘겹게 어깨동무를 하며 말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너를 위해 양보해 줄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뭐를 양보해?”

“우리가 지금 내기를 하려고 했는데… 우리보다 먼저 사교계를 데뷔하는 너를 위해, 우리가 참아 볼게.”

사악하게 웃는 친구들의 얼굴을 승현은 하나하나 살폈다.

“우리 중 누가 먼저 따먹을까, 내기 중이었거든. 근데 너한테 양보한다고.”

승현의 커다란 눈이 놀라 휘둥그레지며 흰자까지 모두 다 드러날 정도로 크게 뜨였다. 무슨 헛소리인가, 말을 잃은 승현은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으며 서 있는 그에게 눈길이 쏠려 고정되었다.

“승현아.”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그를 보며 생각에 잠겼던 승현은 자신을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아버지가 손짓으로 오라는 사인을 보내고 있었다.

다시 끝이 없는 인사 지옥이 시작됐음을 직감한 승현은 친구들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자리를 벗어나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밑도 끝도 없이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시작된 인사는 끝이 없이 이어졌다.

“인사해라, 승현아. TV로 뵈었지? 전 국회 의장이신 채종건 의장이시다.”

“안녕하세요, 의장님. 화면보다 실물이 훨씬 훤하시네요.”

넉살 좋은 승현의 말에 풍채가 좋은 그는 인자하고 반질반질한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승현은 반듯하게 허리를 숙여 내민 손을 맞잡고 인사를 건넸다. 그의 두툼한 손가락이 힘주어 악수하다가 키가 큰 승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 나서야 승현은 숙이고 있던 허리를 펼 수 있었다.

은우의 존재를 알고 난 뒤 승현은 마음가짐이 달라졌다. 그를 알기 전에는 앞으로 이 짓을 몇 번 더 해야 하나 싶어 고되고 지루하기 짝이 없었는데, 그를 알고 난 뒤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아직 그와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지 않았다는 사실엔 앞으로 그를 정식으로 만나게 된다는 설렘이 있었다. 그 여정이 짧지는 않았지만 승현은 의무적으로 기계처럼 허리를 숙이고 인사하는 일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승현의 시선과 신경은 줄곧 그에게 쏠려 있었다. 운명을 느낀 상대였다.

“안녕하세요. 방 사장님.”

허리를 반복적으로 굽혔다가 펴는 승현은 소개를 받고 소개를 했다.

승현은 이 넓은 호텔 연회장을 가득 메운 사람 중 절반의 사람들과 인사를 하는 동안 은우를 관찰했는데, 정말 소문이 그를 말해 주고 있는 듯했다. 그는 어떤 누구와도 말 한마디 웃으며 말을 섞지 않았고, 간혹 그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는 이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한눈에도 노골적인 비웃음을 가득 담고 있었다는 사실을 승현은 두 눈으로 확인했다.

점점…. 조금만 더….

승현은 점점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승현의 아버지인 한 대표가 그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듯이 불러 승현의 눈빛에 활기가 돌았다.

“어? 은우 군, 오랜만이네?”

사심과 꿍꿍이 없이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은우는 금방 멍한 눈빛을 지워내며 눈에 초점을 또렷하게 맞추고 한 대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승현은 아버지 곁에 바짝 다가가 서며 가까워진 은우를 그제야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미미한 웃음을 짓는 그가 얼마나 경직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안녕하셨어요. 한 대표님.”

듣고만 있어도 기분 좋은 로 톤을 가진 은우의 목소리였지만, 어딘가 나른하고 기운이 없는 나긋한 억양이었다. 승현은 그의 목소리에 때 이른 따스한 봄날을 느꼈다. 봄날의 따스한 햇볕을 머금은 바람을 온몸에 맞는 기분이었다.

“아버지나 정윤 군이 올 줄 알았는데, 은우 군이 올 줄은 몰랐네.”

“그러게요. 저도 제가 올 줄 몰랐어요. 아버지랑 형은 출장 중이고, 어머니도 일이 있으셔서… 제가 부득이하게 왔습니다.”

그리고 생각보다 훨씬 은우의 목소리는 심지가 단단하게 강단이 있었다. 타인인 승현 자신이 봐도 은우에게 날아드는 시선을 느낄 정도인데,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모를 리가 없었다.

이런 시선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은우는 강한 사람이었다. 승현은 그렇게 느꼈다.

그의 붉은 입술을 가르고 나오는 목소리가 노랫소리처럼 승현은 귓가를 통과해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은우는 반갑게 맞이해 주는 한 대표를 향해 허리를 사선으로 숙여 인사를 하고 옆에 있는 키 큰 남자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그를 보며 처음 인지한 것은 신장이었다. 자신은 176센티미터 정도 되었는데, 눈앞의 그는 머리가 하나 더 있는 듯해서 키를 가늠해 보았다.

거의 190 후반, 그러니까 한 197, 198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겨우 자신의 시선이 그의 어깨에 닿을 정도였기에. 은우는 그의 첫인상을 ‘큰 사람’으로 정리했다. 그러는 사이 시선이 잠깐 마주쳤지만 금방 은우는 눈길을 피해 버렸다.

시선이 닿은 찰나의 순간도 승현은 놓치지 않았다. 은우가 시선을 방금 피해 버리는 순간 그의 표정과 눈빛이 ‘질렸다’고 말하는 것을 읽었다.

“이쪽은 우리 둘째 아들, 승현이라고 하네. 아버지나 형님한테 잘 말 좀 해줘.”

“네에, 한 대표님. 그럴게요.”

은우는 얼굴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지만, 목소리만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예의 반듯하게 천천히 시선을 돌려 정식으로 승현을 올려다보았다.

“승현아. 이쪽은 일품 그룹의 둘째 아드님, 변은우 군. 너보다 훨씬 훌륭한 형님이다. 인사드려.”

드디어 정식으로 소개를 받았다. 아버지가 덩치가 큰 승현의 등을 툭툭 쳤고, 승현은 그에게 빨려 들어갈 것처럼 멍하게 은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가 허둥지둥하며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덩치에서 나오는 낮고 울림통이 큰 남자다운 목소리가 울렸다.

“안녕하세요.”

은우는 승현의 목소리를 들으며 자신과 역시 다른 사람이구나, 속으로 여기며 그와 같이 맞춰 공손하게 인사했다.

“…어, 저… 그럼 형이라고 불러도 되나요?”

은우의 몸가짐이 보이는 모습은 그런 소문으로 점철된 인물이 가질 법한 반듯함과 예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기품이 있었다. 승현은 끔벅끔벅 커다란 눈을 순진하게 뜨며 은우에게 물었다.

“예…? 아…… 응.”

은우는 그의 말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해 되물었다가 곤란한 듯 표정을 만들더니 마지못해 작게 대답했다.

비록 작은 대답이었지만 은우에게서 흘러나오는 예의는 그가 얼마나 예절 반듯한지 몸에 밴 매너를 보여 주어 승현은 그가 자신과 다르게 얼마나 엄격하게 자랐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승현은 은우가 이색적이고 색다른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은우는 손을 뻗어 악수를 청하지 않는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승현이 먼저 손을 뻗어 악수를 청했다. 그러자 곧바로 은우의 표정은 곤란하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는 내민 자신의 손을 거절하지 못했다. 어색한 눈동자로 내민 손을 보고 망설이며 은우는 주춤하는 손길로 자신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잡은 은우의 손이 작았다. 손 크기가 자신과 사뭇 달랐다. 승현은 조금 힘을 주어 잡으려다가 말았다. 마치 꼭 힘을 주면 부러지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휘감는 느낌이 전율로 전해졌다. 그래서 승현은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려는 찰나였는데, 은우가 금방 손을 빼 버렸다.

은우는 이제 할 일이 끝나 후련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 대표에게 시선을 돌렸다. 승현은 빠져나가는 은우의 손이 아쉬워서 몇 번 손을 움켜쥐다 펴기를 반복했다.

“그럼 인사는 드렸으니까, 한 대표님 저는 그만 가 볼게요. 아버지나 형에게 말해서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어어, 그래.”

눈인사를 하는 은우는 한시름 놓인 얼굴로 숨을 몰아쉬었다. 숙인 머리에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슬쩍 쓸어 넘겼다. 별거 아닌 손짓이었지만 승현에게는 관능적인 모습으로 박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은우는 몸을 돌렸다. 이 넓은 연회장을 유유히 걸어 나가는 은우의 구두 굽이 대리석의 바닥과 만나 청량한 소리를 만들어냈고, 걸을 때마다 자연스럽게 흔들리는 머리카락이 발걸음에 맞춰 춤을 추었다. 한결 편안해진 얼굴로 희고 가는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다시 쓸어 넘겼다.

승현은 아버지의 얼굴이 이전과 다르게 굳은 걸 읽어 조심스럽게 재차 확인했다.

“아버지, 일품이면… 그 일품 맞죠?”

“그래, 맞아. 몇 년 전에 일품 그룹의 대주주로 올라선 둘째 아들. 누가 될지 몰라도 결혼 상대로 모셔가기만 한다면…….”

“…….”

아버지의 말을 들으며 승현은 더욱더 묘해졌다. 친구들의 음담패설이 귀에 남았고, 그런 은우의 소문을 모르지 않는 아버지의 발언은 뜻밖이었다.

그의 진실을 알고 있는 듯한…. 순간 승현은 아버지에게 사실을 확인하려고 했으나 입을 다물었다. 이 자리에서 꺼내기 어려운 발언이었을뿐더러, 맞지 않았다. 무엇보다 승현은 자신의 힘으로 그에 대해 알아가고 싶었다.

은우는 숨이 막히는 상황에 질린 표정을 이제 숨기지 않고 과감하게 드러낸 채 연회장을 나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져 슬쩍 뒤를 돌아보며 자신에게 날아드는 시선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다시 앞으로 돌렸다. 홀을 빠져나가며 답답함을 느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목에 갑갑하게 매인 넥타이를 풀었다.

승현은 은우의 손짓과 몸짓이 굉장히 매혹적이면서 요염하다 느끼며 그를 놓칠세라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러다 방금 살며시 돌아보는 은우의 눈빛이 너무나도 깊게 박혔다. 연회장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모습을 좇고 있다는 사실도 승현은 그가 나가고 나서야 알아차렸다.

은우라, 변은우.

호기심이 생겼다. 친구들이 밀어붙인 내기와는 별개로, 승현은 자신의 내면의 무언가를 간지럽히는 충동과 욕구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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