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열 번 찍어 (2/22)

2장. 열 번 찍어

아니 넘어가는

나무 없다

기업 파티가 있던 첫 만남 이후였다. 승현은 은우에 대해 집중적으로 파기 시작했다. 속된 말로 덕질을 했다. 재벌답게 자금을, 돈을 좀 쓰니 금방 이것저것 정보가 들어왔다. 하지만 워낙 대단한 집안의 자제라 상세한 정보까지는 파악하기 힘들었지만, 대외적인 정보는 쉽게 얻을 수 있었다. 그러면서 더욱더 은우에 대한 왕성한 호기심과 관심이 용솟음치며 솟아났다.

이제 막 대학교에 들어간 승현은 신입생 1학년 새내기였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따위 내팽개치고 은우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은우의 뒷조사를 하면서 가장 먼저 파악한 정보는 은우의 학교와 대학 시간표였다.

어떻게 은우와 만나 볼까 계획을 짜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인 한 대표는 뭐든 몸으로 부딪치고 경험하게 한 덕분에 승현은 맨땅에 헤딩하는 것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래서 무작정 학교로 찾아갔다.

“음… 공학관이 어디지?”

은우의 대학 캠퍼스 안내판을 들여다보며 게슴츠레하게 눈을 떠서 각 건물의 명칭을 살폈다. 하지만 눈을 씻고 찾아봐도 공학관다운 명칭이 보이지 않아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설마, 이 학교 학생이 아닌 거 아니야? 그 정보가 페이크인가? 그럴 리가 없는데.”

결국 타 학교 학생인 승현으로서는 알 수 없어서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지나가는 이 학교 학생처럼 보이는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죄송합니다. 길 좀 물을게요.”

“…네? 어디를 찾으세요?”

승현의 큰 키와 외모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충분했다. 모델만큼이나 큰 키와 다부진 체격과 남자답게 잘생긴 외모는 저절로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저, 화공과가 어디 붙어 있어요?”

“아아, 화공과는 여기 길을 따라서 쭉 가면 가장 끝부분에 본관이 있어요. 본관의 오른쪽 날개가 공학관이에요.”

여학생은 손짓을 가리키며 길을 안내했다. 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길을 외웠다.

“감사합니다.”

그녀에게 공손하게 감사의 인사도 빼놓지 않은 승현은 미소를 지으며 알려 준 길을 저벅저벅 걷기 시작했다.

연예인 같은 훤칠한 키와 외모로 인해 방금 승현이 말을 건 여학생은 멀어지는 승현을 힐끔거리며 뚫어지게 응시했다.

때깔 좋은 명품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휘감은 승현은 멋들어진 행동으로 주머니에서 또한 비싸 보이는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큰 키에 걸맞은 긴 다리가 성큼성큼 걸어 자리를 떠났다.

“공학관… 멀어도 너무 머네.”

승현은 긴 다리를 이용한 파워 워킹으로 오 분을 걸었는데, 아직 본관의 지붕이 보일 듯 말 듯 하자 잘생긴 외모에서 욕지거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나 매일 이 길을 걷는 은우를 생각하니 바보처럼 웃음이 나려고 했다.

저 멀리 드디어 보이는 본관 건물을 향해 다시 쉬지 않고 걸었다. 손목에 찬 시계도 어깨에 힘이 들어갈 정도로 비싼 시계라고 보이듯이 번쩍번쩍 햇빛을 받아 광택이 흘렀다.

“음, 아직 수업이 끝나려면 시간이… 여유가 있네.”

승현은 은우에 대해 조사하면서 알아둔 학교 시간표를 중얼거리며 되새겼다.

그에 대해 알게 되면서 다소 의외라는 생각이 지배했다. 은우는 자신이 들었던 소문과 전혀 다른 생활을 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눈에 두드러진 점은, 은우는 집과 학교 외에는 밖으로 잘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파다하게 퍼진 소문에 의하면 분명 그는 문란한 생활을 해야 하지만, 자신이 알아본 바에 의하면 그는 오히려 앞뒤가 꽉 막힌 샌님 같은 생활 패턴을 보였다.

대체 무엇이 맞는 건지 알 수가 없었지만, 마음은 이미 샌님 같은 은우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래서 일단 승현은 다짜고짜 은우를 만나고 싶었다. 그와 만나야 했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뭔가 심오한 계획을 꾸미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심플 이즈 베스트였다. 우연을 가장한 만남을 꾸몄다.

운명 같은 우연이 반복되면 인연이 된다고 했다.

“후우…….”

야트막한 언덕길을 올라온 탓에 한숨을 내쉬었다. 오래된 공학관 건물 앞에서 서성거리며 은우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승현은 손목에 찬 휘황찬란한 시계를 들여다보며 건물의 입구에서 팔짱을 끼고 내부를 힐끗힐끗 살폈다.

“이쯤이면…. 수업이 끝날 때가 되었을 텐데.”

본관의 유리문에 어렴풋이 비치는 자신의 외견을 가꾸었다. 오늘은 특별히 힘주어 재력을 과시하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감았다. 헤어까지 완벽하게 스타일링 한 것이 스스로도 마음에 들었다.

나름 한 번도 누군가를 꼬실 때 실패한 적이 없었던 필승 전략이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승현은 단단히 착각했다는 사실을 조금 뒤에 깨닫고 말았다. 미처 깊게 생각하지 못한 승현은 은우가 남자였을 뿐만 아니라, 돈에 현혹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때까지도 망각하고 있었다.

“왜 안 나오지?”

수업이 끝났을 시간인데 아직 건물 밖으로 나오는 사람들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아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설마 오늘 학교 안 나온 거 아니야?”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만약을 가정했지만, 이내 승현은 머리를 세차게 좌우로 흔들어 잘못 생각했다고 정정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지만 승현이 은우의 뒷조사를 하며 알아낸 바에 의하면 은우는 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을 정도로 착실한 모범생이라고 했다. 뭐, 대학 등록금 같은 건 푼돈에 가까웠지만. 장학금과 거리가 먼 승현은 어깨를 으쓱했다.

은우를 기다리며 승현은 혼자서 이것저것 생각했다. 은우와 만나면 무슨 대화를 할까. 은우의 반응도 여러 가지로 상상했다.

그중 가장 기분 좋은 상상은, 은우가 자신을 보고 한눈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 생각에 입꼬리가 하늘 높이 찢어져 올라가려 했다. 은우가 환하게 웃으며 “안녕, 그때 기업 파티에서 만난 승현이지? 잘 지냈어?” 등등 반갑게 인사를 하며 맞아 주는 상상을 하니 배 속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나사 빠진 사람처럼 헤실헤실 웃던 승현은 건물 안에서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리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직 은우와 대면한 것은 아닌데 벌써 가슴이 웅장해지는 기분이었다.

학생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나오다가 연예인 뺨을 후려갈길 듯한 몰골을 하고 있는 자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자 승현은 그 누구보다 뿌듯함과 의기양양함으로 도취하여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아주 쉽게 먹히겠어.

승현은 은우를 너무나도 쉽게 쓰러뜨리겠다고 생각했다. 은우를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다.

주인공은 언제나 마지막에 등장하는 법이었다.

빨리 나오지 않는 은우를 기다리던 승현의 시야에 천천히 느긋하게 걸어 나오는 은우가 보였다. 진한 색의 청바지는 헐겁지도 않고 딱 붙지도 않았지만 감춰지지 않는 얇은 다리가 고스란히 보이는 듯했고, 남색의 포근해 보이는 스웨터와 대비하여 은우의 하얀 얼굴이 도드라져 보였다.

승현은 걸어 나오는 은우에게서 무척이나 환한 후광이 비치는 줄 알았다.

흔들림 없는 은우는 마치 자신에게로 걸어오는 도도한 고양이 같았다. 그때의 고슴도치는 없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앞머리가 이마에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는데, 은우는 가는 손가락으로 또한 가는 머리카락을 무심하게 쓸어 넘겼다. 그의 모든 광경이 슬로 모션에 걸려 승현에게 들어왔다.

밖으로 걸어 나오는 은우의 손에는 그의 생활을 단편적으로 보여 주듯이 한눈에도 두꺼워 보이는 전공 책이 들려 있었다. 전공 책… 베개로 쓰기 딱 좋은 두께로 보였다.

그런 은우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자신에게 눈길 한 번 건네지 않았다. 다들 지나가면서 자신을 힐끗거리며 쳐다봤는데, 은우는 관심도 주지 않아 자신이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연출되었다.

당황하여 승현은 티가 나지 않게 시간을 두고 말을 건넸다. 은우는 친구들과 뒤처져 막 그들을 쫓아가려고 할 때였다.

“어? 혹시… 은우 형?”

발걸음을 멈추며 은우는 고개를 돌렸다. 모르는 사람에게 이름을 불리는 경험은 지금까지 겪어 본 결과 그다지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처음 보는 낯선 남자를 보고 인상을 찡그리며 키가 큰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자신이 아는 한 연예인처럼 화려한 몰골을 가진 인물은 지인 중에 없었다.

“…누구…시죠…?”

띄엄띄엄 말을 하는 은우의 눈빛이 경계의 빛을 띠었다. 은우는 정말로 기억에 없는 인물이었기에, 그가 자신의 이름과 얼굴을 안다는 사실에 도리어 무서움을 느꼈다.

머릿속으로 정윤 형에게 전화해야 하나,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빠르게 생각했다. 그러나 눈앞의 인물은 조금 달랐다. 무턱대고 자신을 끌고 가려는 기색도 아니었고, 또 무작정 자신을 향해 페로몬을 뿌려 대며 노골적인 자세도 아니었다.

“저 기억 안 나세요? A&C 둘째 승현이라고…. 그 왜, 얼마 전에… 기업 파티에서 만났는데…. 기억 정말 안 나세요? 제가 그때 주인공이었는데…. 제가 형이라고 불러도 되냐고 해서, 형이 허락했는데…. 기억 안 나요?”

승현은 해맑은 얼굴로 주춤하며 은우에게 다가가 웃는 얼굴을 보였다. 아몬드 형태의 보기 좋은 은우의 눈가에서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렀다. 기억을 끄집어내고 있다고. 그러다 은우는 기억이 떠올랐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아… 그때….”

하지만 정체를 알고 나서도 은우는 경계를 푸는 것이 아니었다. 더욱더 은우의 눈빛에는 경계가 삼엄해졌고, 그의 왜소한 몸은 어느새 방어 태세로 들어가더니 손에 쥔 두꺼운 하드 커버로 된 전공 책을 무기로 쓸 준비를 하면서 물었다.

“…그런데 여기는 어쩐 일이야?”

꼭 왜 아는 척했어? 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은우의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될 정도로 꽉 쥔 전공 책을 힐끗 보며 승현은 가까이 다가갔던 몸을 뒤로 슬쩍 물렸다.

저 전공 책…. 한 대 맞으면 최소한 즉사다.

승현은 사심이 없는 미소를 지었다.

“저, 여기 근처에 일이 있어서 잠깐 들렀는데, 형이 보여서요. 막 달려왔죠.”

승현은 대충 허공의 한 점을 가리키며 거짓말을 했다.

“…그렇구나.”

은우는 그의 용건 따위는 관심도 없이 의무감에 대답하며 고개를 무성의하게 한 번 끄덕여 주었다. 그러자 더 이상 은우는 그에게 할 말이 없었다.

기업 파티에서 만났다는 것은, 분명 그들 사이에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렇다면 자신에 대한 소문도 알고 있었을 테고, 행여 몰랐다고 한다면 그때 그곳에서 알았으리라. 그러니 이렇게 호기심에 장난감처럼 찔러나 보는 것이 아닐까. 은우는 의심이 가득 담긴 눈초리로 그를 보았다.

비단 승현뿐만 아니었다.

이따금 소문에 대해 깊게 혹하고 믿어서 무언가를 원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일을 지금까지 숱하게 겪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뻔했다. 강제로 끌고 가려는 사람, 음담패설을 음흉하게 웃으며 늘어놓는 사람 등 각양각색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겪었던 터라 은우는 노골적으로 승현을 싫어하는 눈빛과 경계를 풀지 않았다. 분명 그는 호의적이고 사람 좋아 보이는 소년의 얼굴을 했지만 은우는 그를 향해 철벽을 세웠다.

이제야 승현은 완전히 잘못 판단했다고 깨달았다.

전략 미스.

스스로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은우를 향해 자신의 재력을 피력해도 소용없었고, 자신의 남자다운 매력을 발산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뒤로 물러났던 발길을 주춤하며 은우를 향해 용기를 내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했을 때였다.

“은우야-! 거기서 뭐 해?”

은우의 친구들이 저만치에서 따라오지 않는 은우를 향해 소리쳤다. 그 탓에 두 사람의 적막이 깨져 버렸고, 은우는 신경을 승현에게서 떼어 친구들에게로 옮겼다. 발꿈치를 살짝 들어 승현 너머로 친구들을 보며 편안한 표정을 보이면서 손짓을 했다. 그리고 다시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승현에게 드러냈다.

“그럼, 볼일 잘 보고…….”

“…아! 은…….”

승현이 뭐라고 잡기도 전에 은우는 친구들에게 후다닥 달려가 버리더니 그들과 섞여들었다. 승현은 잠깐 그에게로 뻗으려던 손을 원래대로 돌려놓고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은우의 친구들이 호기심 서린 시선으로 돌아보며 승현을 보더니, 은우에게 묻는 소리가 들렸다.

“누구야?”

“왜?”

“뭔데 그래?”

한 명씩 돌아가며 대답을 갈구하자 은우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대답했다.

“별일 아니야, 그냥 오가면서 얼굴만 어떻게 아는 사람이야.”

은우에게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얼굴만 아는 사람이 맞았으니까.

그다지 친하게 지내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은 부류의 인간이었다. 오늘로써 두 마디 나눠 본 사이였다. 은우는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친구들과 함께 승현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멍하게 멀어지는 은우를 보며 승현은 호기심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그에 대한 관심은 더욱더 커졌다. 그 호기심과 관심에는 불순한 의도가 담겼다는 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뱃속 깊은 곳에 담긴 욕망이 일었다. 알 수 없는 그에게 끌렸다. 그래서 승현은 전략을 다시 세워야 했다.

매일 얼굴도장을 찍기로 생각을 굳혔다. 그다음 날도 승현은 자신의 대학교가 아니라 은우가 다니는 학교로 향했다. 어차피 은우의 시간표는 꿰고 있으니 만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반대로 은우는 기막힌 우연으로 승현과 만났다고 치부해 버렸기에 기억에서 싹 지워 버렸다. 정말 우연인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그다음 날, 승현은 넉살 좋은 얼굴을 하고 불쑥 자신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은우 형.”

특유의 중저음이 울려 공학관을 흔들었다.

“응…? 아, 너….”

공학관에서 막 나오던 은우가 입구 앞에 서 있는 승현을 만났다. 은우는 잠깐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눈앞에 나타난 인물이 누구인지 어제처럼 기억을 끄집어낼 필요는 없었다. 오늘은 금방 기억이 났다. 승현을 위아래로 훑어보는 은우는 눈을 깜박거렸다.

오늘의 승현은 어제의 그 화려한 연예인 몰골이 아니었지만 어딘가 화려했다.

승현은 악의 없는 소년 같은 웃음을 지으며 자신에게 크게 한발 다가왔다. 한승현이라는 인물은 저에게 자신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 근처 지나가다가 형이 있을 거 같아서 들러 봤어요.”

은우는 가까워진 그를 피해 한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를 밀어내는 분위기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당연하지만 여전히 경계가 가득한 고양이 눈빛을 한 은우를 승현은 보았다. 등골의 털을 곧추세워 하악질을 하는 고양이처럼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며 자신에게 다가오지 말라는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승현은 눈치 따위 밥 말아 먹은 듯이 쌍꺼풀이 짙은 눈을 매력적으로 반달로 접어 웃으며 그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냥 보고 싶어서요.”

이것이 승현이 다시 세운 공략법이었다. 정공법.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

“뭐……? 네가 왜 날 보고 싶어 해?”

은우가 한눈에 자신에게 반해서…라는 시나리오는 개풀 뜯어 먹는 소리라고. 은우의 태도가 말하고 있었다.

“…그냥요.”

“…….”

은우는 말을 잃었다. 아니, 정말 할 말이 없었다. 눈앞에 나타난 승현이 이상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신에게 살갑게 구는 승현을 말똥말똥한 눈으로 쳐다만 봤다. 정말… 한승현이라는 사람은 달랐다.

“사실 형… 부탁이 있는데….”

“싫어.”

듣지도 않고 싫다고 대답한 은우를 보며 승현은 키득키득 어깨가 들썩이며 웃었다.

“아니, 듣지도 않고 싫다는 건 뭐예요. 아… 형!”

그런데 은우는 자신의 말을 듣지도 않고 총총걸음으로 자신을 지나쳤다.

정말 까다롭게 구네.

속마음은 그랬어도 승현은 은우의 세 발걸음을 한 걸음에 커버하며 그를 쫓았다.

“야, 쫓아오지 마.”

은우는 이제 그에게 가식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날 연회장에서 만났을 때는 상류층의 표본적인 미소와 매너를 보였다면, 지금은 전혀 아니었다. 그럴 필요도 이유도 느끼지 못했다. 예민하고 까칠한 성격이 고스란히 튀어나와 버렸다.

“아니, 형… 말 좀 들어줘요.”

“…….”

“아니면 들어줄 때까지 쫓아다닐 거예요.”

은우는 서늘해지는 기분에 무서워져 그를 피해 도망치는 발이 멈췄다. 그리고 획 몸을 돌려 버럭대는 큰소리를 내질렀다.

“왜, 뭔데!”

승현은 씩 웃었다. 그의 성격을 어느 정도 알 것만 같았다.

“형, 사실 저 지금 좀 배고픈데… 저랑 같이 밥 먹어 주면 안 돼요?”

“내가 왜 너랑! 싫어.”

어이가 없어져서 은우는 다시 몸을 획 돌려 승현을 그곳에 두고 갈 길을 가 버렸다.

이번에는 승현은 은우를 쫓아가 잡지 않았다. 저렇게 발톱을 세우고 경계하는 고양이에게 다가가려면 시간이 좀 필요하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은우는 원래 다정한 사람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건 은우가 자신에게서 도망치면서도 힐끗 뒤를 돌아 자신을 신경 쓰는 눈을 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승현은 자신에게 이렇게 관심을 드러내지 않는 은우를 보면서 질릴 법도 했는데, 질리기는커녕 더욱더 그의 관심을 끌고 싶었다.

한 번도 누군가에게 매달려 본 적도 없었다. 오히려 누군가가 자신에게 매달리는 입장이었지만, 그 위치는 완전히 뒤바뀌어 승현은 은우에게 매달리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 뒤로 하루가 멀다 하고 승현은 매일같이 은우의 앞에 나타나 얼굴도장을 찍었다. 초장부터 보고 싶어서라고 말한 덕분에 이제 이 근처에 볼일이 있다는 둥 핑곗거리를 찾지 않아도 되었다.

“아, 뭐야. 너…….”

“그냥 오늘도 형이 너무 보고 싶고 생각나서요. 얼굴 보러 왔어요.”

승현은 그랬다. 다른 알파들처럼 굴지 않았다.

“…….”

은우는 한숨을 쉬며 무시하고 지나갔다. 하지만 삭제 매일 찾아오는 자신이 정말 싫었다면 무시할 법도 했지만 한 번도… 은우는 무시한 적이 없어서 승현은 매일매일 찾아갔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이 맞길 바랄 뿐이었다.

“오늘은 은우 형, 날씨 봤어요? CG 같지 않아요? 너무 좋죠?”

“…….”

은우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승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넉살 좋은 친화력을 발산했다.

“이런 날씨는 형… 같이 걸으면서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서…. 아, 형! 또 무시하지 말구요!”

“그럼, 잘 가.”

승현의 넉살을 무시하며 은우는 지나쳤다.

승현의 핑계는 꾸준했다. 늘 처음은 보고 싶어서로 시작했다. 그러다 어떤 때는 같이 걷고 싶어서요. 비가 오는 날에는 오늘은 비가 오는 데 같이 우산 쓰고 싶어서요 등등….

그의 요구에 단 한 번도 은우는 들어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승현은 꾸준히 그런 되어 먹지도 않은 핑계를 들먹이며 자신의 앞에 찾아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먼저 승현은 자신에게 손을 뻗어 대지 않는 점이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승현이라면, 자신의 허락 없이 멋대로 굴지 않는다는 믿음이 조금씩 피어났다.

자연스럽게 괜찮을 거라는 안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승현은 이렇다 보니 어느새 자신의 학교보다 은우의 학교가 더 익숙해졌다.

오늘도 승현이 은우 앞에 나타나 해맑고 순수한 얼굴을 드러냈다. 은우는 이제 승현의 존재가 익숙해졌다. 벌써 3월 개강하고 난 뒤 보름의 시간이 흘렀다. 강의실 앞에 승현이 서 있지 않은 것이 이제는 이상해지기까지 했다.

“은우 형!”

“뭐야, 너 또 왔어?”

고양이 발톱을 세우고 하는 하악질은 사라졌지만, 아직 은우의 눈빛만큼은 경계하고 있었다. 예민하고 날카롭게 신경이 곤두선 목소리도 아니어서 승현은 무구한 표정으로 그에게 미소를 건넸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으랴.

“오늘은 또 뭐야? 무슨 핑계인데.”

은우는 삐딱하게 서서 승현을 쏘아보았다. 그는 능청맞은 얼굴로 보조개를 씩 보이며 말했다.

“저 진짜 너무 배고파서 그래요…. 형… 같이 밥 먹어 주면 안 돼요?”

“뭐야, 결국 돌고 돌아 그 핑계야? 이제 핑계 댈 게 다 떨어졌어? 싫어. 내가 왜 너랑 밥 먹는데.”

“아니, 그러지 말고요.”

“잘 가. 안녕.”

승현이 쫓아왔다. 기어이 그를 향해 신경질을 낸 은우는 사나운 눈초리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대체 너, 언제까지 쫓아다닐 거야!”

이제 더는 승현과 말을 섞고 싶지 않아서 승현을 스쳐 지나가려고 했다.

“형, 그럼 손 한 번만 잡아 주면 안 돼요? 악수했을 때 온기가 그리워요.”

고리타분한 시대도 아니고, 이쯤 쫓아다니면 없던 흥미도 생길 법한데 은우는 달랐다. 승현은 못 이기는 척 손이라도 내어주고도 남을 시간인데, 은우의 장벽은 철옹성이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의 표본 그대로였다.

승현은 오늘 조금 가까이 그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 볼 생각이었다.

은우는 행동으로 대답을 대신했지만, 커다란 손으로 승현은 은우의 손을 덥석 잡았다.

“뭐야! 안 놔?”

날카로운 은우의 목소리가 놀라 커졌다. 나긋하고 부드러웠던 로 톤의 목소리가 카랑카랑 울렸다.

“은우 형, 미안해요. 손잡아서 놀랐어요?”

“이거 놔. 누가 나 허락도 없이 만지는 거 싫어.”

도리어 승현이 놀랐다.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예민하게 놀라고 반응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다. 은우의 손을 놓기 전에 쾌활한 목소리로 다시 부탁했다.

“밥 같이 먹어 줘요. 오늘은 정말 혼자 밥 먹기 싫은데…. 그러면 안 쫓아다닐게요.”

“…….”

은우는 잔뜩 겁을 내며 경계했다가 승현의 말에 고민했다. 다시 쫓아다니지 않겠다는 말은 솔깃해서 망설여졌다. 자신의 신경질적인 억양에도 겁을 내기는커녕 씨알도 안 먹히는 승현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배고프다는 듯이 배를 살살 문지르며 애처롭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짜 배고파서 그래요. 형도 알잖아요. 처량하게 혼자 밥 먹고 싶지 않단 말이에요. 오늘 가족 다 집은 비워서 혼자거든요….”

은우는 멈칫했다. 혼자 밥 먹는 기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은우도 바쁜 가족을 뒤로 늘 혼자 밥 먹었는데, 승현도 그렇구나… 싶었다.

“…정말… 같이 밥 먹으면… 안 쫓아다닐 거야?”

승현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은우는 본성이 착한 사람이지 않을까 생각해서 그의 동정심에 매달려 보았는데, 정답이었다.

“그럼 은우 형, 같이 밥 먹어 주는 거예요?”

승현의 얼굴은 한껏 무해하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그가 잡은 손의 힘은 전혀 무해하지 않았다. 은우는 작게 한숨을 쉬고 체념한 얼굴빛으로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여 응낙하면서 손을 빼내려고 했다. 그런데 정말이지, 거짓말처럼 승현의 손에서 제 손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의 힘에 다시 겁부터 집어먹었다.

“휴… 알, 알았으니까….”

은우의 목소리는 다시 평소와 다름없이 나긋한 목소리로 돌아와 있었다. 타인이 자신의 신체에 닿는 것이 싫었다. 특히 ‘알파’와의 신체 접촉은 가족들이 아니고서야 꺼려졌다. 그때의 기억이 남아 있어 거북스러웠다.

“와 씨! 너무 좋은데요? 신난다, 드디어 형이 나를 봐준 거 같잖아요!”

어쨌든 처음으로 자신에게서 무언가의 허락을 받는 승현은 그 커다란 몸을 펄쩍펄쩍 뛰면서 좋아했다. 마치 대형견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흡사, 말라뮤트나 레트리버 같은 커다란 개 말이다.

커다란 승현이 순진한 멍뭉미를 뽐내며 좋아하는 모습을 보자 은우는 살짝 웃음이 배어 나오려고 하는 걸 꾹꾹 눌러 참았다.

왜 이제야, 이 정도의 부탁을 들어줬을까. 밥… 정도는 들어줘도 괜찮았는데.

오히려 은우가 그런 생각을 스스로 하게 되었다.

“은우 형, 여기 주변에는 뭐가 맛있어요?”

넉살 좋은 승현은 잡은 은우의 손을 놓지 않은 채 앞장서서 걸었다.

“야, 근데, 손 좀….”

꽉 잡은 승현의 손을 빼내려고 은우는 힘을 바짝 주어 당겼는데, 승현도 놓지 않으려 오히려 손에 힘을 꽉 쥐어 잡았다. 조만간 은우가 자신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게 하고 싶었다. 여전히 싫어하긴 해도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일취월장이라 생각했다.

잠시 서로 보이지 않는 실랑이가 이어졌지만, 순전히 힘만으로는 승현을 감당하지 못하는 은우는 인상을 쓰며 그를 올려다봤다.

승현은 자신의 어깨쯤 오는 은우를 슬쩍 내려다보며 지금 쓰는 힘은 아주 새 발의 피라는 듯 태연하게 말했다.

“그냥 이렇게 손잡고 가면 안 돼요? 나 형 손 잡아서 기분 너무 좋은데.”

“어…? 시, 싫어. 좀…!”

은우는 몸을 움츠려 손을 비틀고 힘주었다. 결국 승현의 손에서 손을 빼내는 데 성공을 하긴 했지만, 만화에서처럼 뽁 하는 소리가 들릴 것처럼 손이 빠져나간 탓에 은우가 뒤로 휘청거리며 넘어지려 했다.

승현은 동물적인 감각으로 뒤로 넘어지려는 은우의 가는 손목을 잡아당겼다. 은우가 화내기도 전에 승현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먼저 사과했다.

“아, 깜짝이야. 휴- 다행이다, 미안해요. 형, 괜찮아요? 이렇게 싫어할 줄 몰랐어요. 정말 미안해요. 어디 다친 데 없어요?”

“어, 어…. 괜찮아. 안 다쳤어.”

볼썽사납게 넘어지려고 해서 창피한 건지 붉어지는 얼굴을 돌려 피한 은우는 넘어지려고 한 건 자신인데 오히려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의 사과에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 주었다.

손을 치워내며 승현을 지나치며 빠른 걸음으로 걸어 나갔다. 은우는 얼굴이 화끈거림을 느끼며 두꺼운 전공 책을 구길 듯 세게 움켜쥐었다.

쫄래쫄래, 큰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것처럼 승현은 자신의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너, 밥… 뭐 좋아, 하는데…?”

처음으로 은우는 먼저 승현에게 말을 걸었다. 그 사실을 깨닫고 은우는 민망해져 볼이 불그스름해졌다.

“형은요? 형은 뭐 좋아해요?”

뭐야, 왜 왔어 같은 가시 돋친 말이 아니어서 승현은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내가 먼저 물었잖아.”

“전 형이 좋아하는 거면 다 좋아할 거 같아요.”

“…뭐라고……?”

“뭐긴요! 근데 진짜 형은 뭐 좋아해요?”

처음 사랑을 하는 소녀처럼 은우에 대해 관심을 표하는 승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서 은우는 결국 그를 무시하며 재빠르게 캠퍼스를 지나쳤다. 힐끗 은우는 승현을 따라서 시선이 움직였다.

“뭐, 아무거나 상관없어요. 형! 좋아하는 곳으로 가요!”

아주 씩씩하게 사심 없이 승현은 은우의 속도에 맞춰 걸었다. 바지런히 총총거리며 걷는 은우를 쉽게 따라잡을 수 있는 긴 다리로 태어나 다행이었다.

“도련님.”

“아…….”

은우는 빠르게 걷던 발을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학교 캠퍼스는 공학관인 본관에서 쭉 정문을 향해 내려오면 학생 야외 주차장이 마련되어 있었다. 주차장 입구에는 건장하고 딱딱한 사내가 저만치에서 날카로운 분위기로 경계를 하며 승현을 쳐다봤다.

승현도 으레 발길을 멈추며 그를 히죽이며 노려보았다. 위아래로 은우를 부른 그 사내를 승현은 쭉 훑어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호위 기사라 불리는 개라는 건가. 앞길을 막아선 건 일품가에서 붙인 경호원이었다.

승현은 은우의 반응을 살피려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은우는 눈짓으로 자신에게 기다리라고 말을 하더니 경호원에게 다가갔다. 당연히 승현은 은우의 뒤를 따랐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여기 앞에 갔다 올게요.”

“예. 알겠습니다.”

부드럽게 말하는 은우의 뒤에서 승현은 의기양양하게 콧등을 추켜세웠다. 어린아이처럼 이겼다는 표정으로 경호원을 힐끗거렸는데, 경호원은 직업의 특성 때문에 첫눈에도 적의를 드러내며 달가운 눈빛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타인에게 적의를 받고도 호의를 보일 정도로 승현은 나이를 먹지 않았다.

“에이… 형, 제가 데려다줄게요. 기사분 그냥 가시라고 해도 될 것 같은데.”

승현은 은우에게 다가가 그의 팔꿈치를 살짝 잡아당겼다.

“그냥 너 혼자 밥 먹을래?”

“엇! 그건 안 되죠. 죄송합니다.”

예리하게 올려다보는 은우의 뾰족한 말에 승현은 장난스레 사과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괜히 넉살 좋게 말했다가 퇴짜를 맞아 고개를 세차게 절레절레 흔들어 순진한 강아지의 애처로운 눈망울을 하고 그를 응시했다.

은우를 따라 걷는 승현은 얼굴에서 헤실헤실하는 미소가 번졌다.

“…아까부터 왜 이렇게 웃어? 무섭잖아.”

“아니, 형…. 기분이 너무 좋잖아요.”

“뭐가 그렇게 기분이 좋은데?”

“오늘, 이렇게까지 관계가 발전한 게 어딘가 싶어서요.”

“관계?”

“형과 나 사이요.”

“그런 거 없어.”

“흐음…….”

그저 웃으며 콧소리를 낸 승현은 배 속이 간질거려 손으로 뱃가죽을 옷 위에서 벅벅 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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