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벤타블랙
정문을 나온 것까지 좋았는데, 은우는 마땅히 갈 만한 곳을 떠올리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승현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잠시 고민하다 대학 정문 근처의 소박한 가정식 백반집으로 향했다.
그곳은 중년의 부부가 운영하는 오래된 식당이었는데, 은우는 그 사장님 내외를 만나며 자신이 집에서 겪어 보지 못하는 정감을 느꼈었고, 승현도 이런 정감을 느꼈으면 싶은 생각이 왠지 모르게 들었다.
은우는 정말 단골이라는 듯 허름하고 소박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어? 어쩐 일이야? 은우 학생!”
그리고 주인 부부가 은우를 알아보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에 저녁을 다 먹으러 오고, 오늘도 실험 때문에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자리에 앉은 승현과 은우를 보며 주인아저씨가 물컵과 물병을 테이블 위에 올려 주며 살갑게 말을 걸었다.
“그런 건 아닌데요. 그냥요.”
“아아, 그러고 보니 이제 올해 졸업인가?”
“네. 올해 졸업이에요.”
“졸업하면 이제 못 보겠네!”
“자주 찾아올 수 있도록 해볼게요.”
은우는 꾸밈없는 편안한 미소로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것이 신기해서 신기한 눈으로 승현은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그럼 졸업하면 뭐 하려고? 취업은 어디에 하려고? 하긴 화공과는 대부분이 대학원에 간다는데, 은우 학생도 대학원 가려고?”
그 주인집 사장 부부는 은우가 일품 그룹의 둘째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아서 오히려 승현은 놀란 얼굴을 했다.
“맞아요. 그래서 저도 대학원 가려구요.”
“아휴, 화공이나 그런 과는 그래야 한다고 하더라…. 우리 가게에 밥 먹으러 오는 학생들 보면 다 취업도 엄청나게 잘했어! 은우 학생은 장학금도 받는 거 보면 좋은 데 취직할 거야. 부모님이 엄청 좋아하시겠네.”
은우는 하얀 물티슈로 손을 가볍게 닦으며 주인아저씨의 실없는 농담에 옅은 웃음을 지었다.
승현은 눈에 들어온 은우의 웃는 얼굴이 거짓말 같았다. 처음 만났던 그날 지었던 웃음은 가식적이고 가면적인 웃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날 아무것도 담기지 않았던 눈빛이 온화한 빛으로 아무런 계산 없이 웃고 있는 사실이 놀랍게 다가왔다.
“…여기 형 진짜 단골인가 봐요.”
주인아저씨는 밑반찬을 가지러 자리를 떠났고, 승현은 주위를 둘러보며 은우에게 말했다. 은우의 모든 걸 알고 싶었다.
“뭐, 그냥.”
소박한 식당은 분위기도 상당히 오래된 가게인 듯 그릇들과 의자, 테이블 등 가게 안의 모든 것이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주머니 사정이 힘든 학생들이 마음 놓고 먹을 수 있게 푸짐한 양은 덤이었다.
탁. 탁. 밑반찬 접시를 놓아주는 주인아저씨가 승현을 힐끔 보며 인자하게 웃더니 은우에게 향했다.
“근데 오늘은 친구들이랑 안 오고 처음 보는 학생이랑 왔네?”
“네. 그냥 좀 오가며 아는 사이인데, 이렇게 됐어요.”
늘 자신에게 가시 돋친 말만 하는 은우가 지금은 싹싹하게 말하는 것이 신기해서 새로운 모습을 놀라운 눈빛으로 응시했다.
그러다 어디서 나는지 진동 소리가 났다.
징- 징-
핸드폰이 은우의 가방 속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은우는 전화인지 메시지인지 확인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어두워지는 얼굴로 무심하게 핸드폰의 알람을 꺼 버렸다.
승현은 눈동자를 굴려서 은우를 관찰했다.
가방 속을 뒤적거린 은우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무언가를 꺼냈다. 그리고 작고 가는 손으로 그것을 입속에 밀어 넣고, 물컵에 물을 한가득 따라 입속에 넣은 것과 함께 삼켰다.
분명 약인 것은 알았지만, 먹은 것이 빨간색이라는 것까지만 본 승현은 그것이 무슨 약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가 없어서 눈만 가늘게 떴다.
물어볼까? 말까? 싫어하겠지? 그래도 궁금한데….
승현은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은우를 살폈다. 입을 열어 지금 먹은 것이 무엇이냐고 묻고 싶었다.
지금까지 쭉 은우의 곁에서 맴돌면서 관찰한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이미 소문으로 들어 아는 사실은 은우는 ‘오메가’라는 것이었다. 눈앞의 은우는 그 무언가를 입속에 넣은 채로 삼켰고, 승현은 그것을 모른 척했다.
“왜 그렇게 봐?”
물컵을 내려놓는 은우는 게슴츠레한 눈을 한 승현에게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야… 이상하게.”
“형, 오늘따라 되게 피곤해 보여요.”
“…그렇지는 않은데.”
은우는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돌렸다.
오메가들은 호르몬이 증폭되는 시기가 주기적으로 돌아온다. 그게 오메가들은 알파와 달리 스스로 통제와 억제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약물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메가들은 그 약이 아니면 호르몬 때문에 이성을 잃는다.
은우로서는 굳이 승현을 피해서 약을 먹을 필요가 없다고 여겼고, 숨기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오메가라는 사실을 승현이 모를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자신을 둘러싼 말도 안 되는 소문까지도 알고 있다고 봐야 무방했다. 왠지 은우는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는 들어 본 적이 없는 생각을 했다.
자신에 대한 이상한 괴소문을 승현이 몰랐으면 싶었다….
“흠흠.”
스스로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이상해서 은우는 헛기침을 하며 승현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겠어서 괜히 주방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대체 어쩌다가 승현과 이렇게까지 얽히게 되었는지. 승현이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알 수가 없었고, 또 읽을 수가 없었다.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대화도 하지 않았다.
인상 좋은 주인아저씨가 와서 맛있어 보이는 음식을 테이블에 놓으며 “맛있게 드세요.”라고 말을 걸어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깨뜨려 주었다.
“와, 진짜 배고팠는데…!”
승현은 일부러 소리를 요란스럽게 수저와 젓가락을 들어 한 입 크게 밥을 떠서 입안에 넣었다. 앞에 차려진 반찬에도 젓가락을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승현은 은우에게 말했다.
“와, 은우 형…. 여기 진짜 맛있어요!”
스테인리스 밥그릇, 그러니까 속칭 스뎅으로 만들어진 밥그릇이 승현의 손에는 한없이 작아 보였는데, 은우의 손에는 알맞은 크기로 쥐어졌다.
“…그래, 너 배고프다며. 많이 먹어.”
“근데 형이 맛있는 곳이라고 해서 단골집까지 와놓고 형은 왜 그렇게 맛없게 먹어요?”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은우를 두고 승현은 숟가락에 하얀 쌀밥을 한가득 퍼서 입안으로 집어넣으며 기분 좋은 얼굴로 은우에게 물었다.
“…그냥… 난 배가 별로… 안 고파서.”
승현이 지적한 대로 은우는 먹는 둥 마는 둥 젓가락으로 밥을 먹는 건지 쌀알을 세는 건지 구별이 안 될 정도로 한 톨 한 톨 집어 입속으로 넣었다.
은우가 걱정되는 표정으로 승현은 잠시 빤히 쳐다보고 있는데 주인아저씨가 웃으며 다가왔다.
“자, 이건… 단골이니까 서비스.”
정말 별것 아니었지만 소박한 정을 느낄 수 있는 주인 내외는 테이블에 잘 익은 계란 프라이가 담긴 접시를 놓아주었다.
“우와, 감사합니다!”
승현이 특유의 넉살로 씩씩하게 감사의 인사를 건네니 주인아저씨는 찡긋 웃으며 부족하면 더 주겠다고 말하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난 괜찮으니까, 너 다 먹어.”
은우는 슬쩍 승현에게 접시를 밀어 놓았고, 승현은 씩 웃으며 말했다.
“정말이죠? 후회하지 마요. 나중에 땅 치고 후회해도 안 돼요.”
“…별걸 다.”
힘없이 웃으며 은우는 홀랑 잘 익은 계란을 한입에 넣어 먹는 승현을 쳐다볼 뿐이었다.
밥 한 숟가락 채 떠먹지 못하고 있는 은우와 달리 뜨거운 국물도 숟가락으로 퍼마시는 승현은 음식을 통 먹지 못하는 은우가 의아했다.
“어? 형 다 먹었어요?”
결국 은우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응.”
“어, 어… 형…. 잠깐만요. 가지 말아요!”
자신이 가 버릴까 봐 헐레벌떡 입안으로 밥을 밀어 넣는 승현을 두고 은우는 친절하게 물컵에 물을 따라 주며 말했다.
“안 두고 갈 테니까 천천히 먹어.”
“…아, 다행이다.”
승현은 입안에 가득 든 음식을 크게 꿀꺽 삼키며 이제 천천히 먹으며 멍하게 마주 보고 앉은 은우를 관심 있게 보았다.
은우는 태생이 착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싫다고, 내가 왜 같이 밥 먹어 주냐고 따지더니 혼자 밥 먹기 싫다고 한 자신을 기억해서 곁을 지켜 주고 이제는 물까지 따라 주었다. 정말 식욕이 없어 보이는 은우는 물컵의 물만 마시다가 내려놓았다.
테이블에 팔꿈치로 턱을 괸 은우는 시끄러운 TV로 시선을 돌렸다. 승현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같이 있어 주었다. 혼자 밥 먹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절절하게 알고 공감한 은우는 가만히 그를 곁에서 지켜 주었다.
밥을 반도 채 비우지 못한 은우는 맛있는 음식을 두고 딴청을 피웠다. 은우는 오메가 호르몬 억제제의 약효라기보다, 부작용 같은 것을 느꼈다.
약을 먹으면 입맛이 없어지면서 목에서부터 음식을 거부했다. 무언가를 먹으려고 하면 마치 목에 차단문이 있는 듯 음식을 거부해 삼키지 못했다. 그렇다고 또 억지로 먹게 된다면 꼭 체하고 마는 기분이었다.
부작용 중에는 식욕이 없어지는 것도 있었지만, 승현이 말한 것처럼 피곤한 사람처럼 잠이 쏟아졌다. 이건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잠이 쏟아졌다. 말로 표현하자면 의식하지 않으면 잠에 잠식되어 길을 걷다가도 잠들 것처럼 미친 듯이 쏟아지는 잠이었다.
“…하암…….”
잠이 쏟아져 피곤한 얼굴을 한 은우는 죽을 맛이었다. 승현에게 티가 나지 않게 하품을 했다.
그러자 한여름에 아이스크림이 녹아 흐물흐물해지는 것처럼 온몸이 녹아서 땅으로 흐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세포 단위로 뜨거운 액체가 되어 바닥으로 흐를 것만 같았다. 이 감각은 의식하지 않아도 간혹 은우는 온몸에서 힘이 저절로 탁 풀려 걷다가도 휘청거리기 일쑤였다. 지금 은우는 바닥으로 축 녹아내리는 감각이 자신을 지배했다.
혼자 밥 먹는 승현을 두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은우는 다시 젓가락을 집었는데, 젓가락 무게조차 버거웠다. 또 밥을 먹을 수가 없어서 젓가락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물컵을 들어 꿀꺽꿀꺽 마셨다.
어느새 승현은 깨끗하게 한 톨의 쌀알도 남기지 않고 싹싹 다 먹은 얼굴로 싱글벙글했다.
“다 먹었으면 가자.”
은우는 의식도 못 하고 앉은자리에서 가방을 챙기다가 약통을 꺼내 습관적으로 한 알을 물과 함께 꿀꺽 삼켰다. 그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들었다.
승현은 가만히 은우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잘 먹었습니다.”
“은우 학생. 다음에 또 와, 졸업하기 전에 자주 들러. 예쁜 얼굴 많이 봐 둬야지.”
이번에는 주인아저씨가 자리를 비워 주인아주머니가 친절하게 응대하자 은우는 흐릿한 미소를 지었다.
“…네, 아주머니. 또 올게요. 안녕히 계세요.”
은우는 익숙해지지 않은 약 기운을 느끼며 반응이 느려지는 것을 깨닫자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고 눈을 부릅뜨며 힘을 주었다.
“형, 은우 형!”
가게 문을 열고 나오자 한껏 텐션이 올라간 승현이 불러 은우는 느릿하게 돌아보았다. 승현이 씩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제 커피 마셔요.”
“…뭐? 싫……!”
승현은 들은 체도 안 했다. 은우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었다. 좋아하는 거, 싫어하는 거… 좋아하는 이상형 등등 뭐든.
순간 은우가 손을 만지는 걸 싫어하는 걸 잊어버린 승현은 손목을 덥석 잡고 대학 정문 앞의 번화가로 향했다.
“에이, 밥은 형이 사 줬으니까 커피는 내가 사 줄게요. 아, 저기 카페 있다!”
“야, 야……!”
키도 크고 다리도 길어서 승현은 거침없이 걸어가면 그와 다른 은우는 승현의 속도에 맞추려면 뛰어야 했다. 나른하게 퍼지는 약 기운 때문에 늘어지는 몸과 버거운 무게의 전공 책이 은우를 꼼짝 못 하게 했다.
만사가 다 귀찮아지려는 은우를 데리고 승현은 카페의 포근한 소파 의자에 앉혀 놓았다. 승현이 꼭 활기찬 댕댕이가 펄쩍펄쩍 뛰는 거 같아서 은우가 화를 내기 민망할 정도였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요.”
“싫어, 나 갈 거야.”
“형- 커피도 안 마시고 진짜 치사하게. 밥 배, 커피 배 따로 있다고요. 그냥 가 버리면 내일 또 쫓아다닐 거예요.”
순진한 건지, 은우의 반응이 귀여워 승현은 네 살이나 위인 은우를 놀렸다.
“야…. 약속이… 다르잖아.”
“그러니까 가지 말고 여기서 기다려요. 커피 사 주고 싶어서 그래요. 밥 먹고 커피는 기본이니까.”
막무가내로 말하는 승현을 힐끗 노려보며 은우는 하는 수 없이 깊게 소파 의자에 몸을 기댔다. 또 사실 저런 승현의 모습이 이제는 싫지 않기도 했다.
승현은 선량한 시민의 얼굴을 했다. 실상은 포악한 야만인이자 정복자와 다르지 않은 강요를 하고 있었지만.
“맞다, 형. 커피는 뭐 마셔요?”
“…아무거나.”
은우는 심드렁한 반응이었지만 배도 부른 데다 텐션이 높아진 승현은 어깨춤이라도 출 것처럼 신나서 어쩔 줄 모르는 듯했다. 산책길이 너무 신나는 강아지 같았다.
“음…. 그럼 제가 맞춰 볼게요. 형은 약간, 음… 달달한 거 좋아할 거 같은데. 막 휘핑크림 잔뜩 올라가서 초코 시럽, 캐러멜 시럽 왕창 뿌려진 거 어때요? 내 추리! 딱 맞죠?”
“누가 그래? 내가 단것 좋아한다고.”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평범한 친구나, 연인들처럼.
“아니 형, 얼굴 보면 되게 단것 좋아하게 생겼거든요. 몰랐죠? 쓴 거 못 먹을 거 같은 아기들 같은?”
“뭐라고? 진짜 나 지금까지 살면서 그런 말 처음 들어.”
네 살이나 어린애한테 애 취급당한 기분이라 은우가 미간을 찡긋거리며 빨간 입술을 움직였다.
“나는… 에스프레소 더블 샷. 시럽 없이.”
승현은 씨익 웃었다.
“오오, 메뉴 어른 같아. 알았어요. 그럼 난 완전 단 거.”
오히려 애 같은 취향을 가진 건 승현이었다.
은우는 뭔가 그에게 말린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다시 참담했다. 190이 넘는 큰 덩치가 가쁜 발걸음으로 주문을 하러 가는 뒷모습을 보며 은우는 아까 밥도 많이 먹고, 단것까지 먹는 승현을 놀라워했다. 하긴… 저 큰 덩치가 움직이려면 열량이 많이 필요하겠다. 승현에게서 시선을 떼어 창밖으로 옮겼다.
오후의 하늘은 맑았다. 아직 이르긴 했지만 봄 이긴 봄이어서 해가 길어졌고, 사람들의 옷차림도 겨울의 칙칙한 패딩이 아니라 화사하고 가벼워 보였다. 깨가 쏟아지는 연인들이 팔짱을 끼고 데이트를 하는 모습도 간혹 눈에 들어왔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진한 커피 향기가 풍기는 종이컵을 승현이 앞으로 내밀었다.
“형, 여기 있어요.”
“…어? 어.”
몽롱한 정신을 깨우며 내밀린 커피를 받았다. 작게 기어갈 듯 “고마워”라고 중얼거리며 승현을 힐끗 쳐다보니 커다란 손에 들린 그의 커피가 보였다. 한눈에도 엄청나게 달게 보이는 커피였다.
은우는 별생각 없이 커피를 입가로 옮기는데 승현이 묵직하게 어울리지 않는 어투로 말했다.
“형, 뜨거우니까 후후- 해서 마셔요. 아니면 내가 후후 불어 줄까요?”
인상을 찡그리며 은우는 안면 근육뿐만 아니라 온몸의 근육이 굳어졌다. 은우는 그런 일에 대한 경험이 없었다.
“……미쳤어?”
“아니, 카운터 알바생이 얘기해 줬어요. ‘뜨거우니 조심하세요’라고.”
“…….”
은우는 승현을 이상한 사람을 보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승현은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어 서로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결국 은우는 커피를 마시지도 못하고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문득 든 생각에 은우는 눈동자가 흔들렸다.
어쩌다가 그에게 휘말려서 밥도 먹고 여기 이렇게 카페에 마주 보고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은우는 무의식적으로 가방을 뒤적거리더니 하얀 약통을 꺼냈다. 망설임도 없이 빨간 약을 한 알 더 입에 넣었다.
승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은우가 방금 먹은 약은 방금 식당에서 먹었던 것을 보았다. 그런데 은우는 벌써 약을 세 번이나 먹었다. 오메가들은 원래 이렇게 약을 자주 먹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어 은우에 물어보려고 했지만 입을 다물었다.
은우는 방금 식당에서 먹은 약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앉은자리에서 순식간에 세 알이나 먹었다. 그렇다면 하루에 대체 몇 알의 약을 먹는 걸까? 궁금했지만, 아직은 물을 수가 없었다.
어딘가 초조한 사람처럼 승현은 테이블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 툭툭 두드렸다.
어쩌다가 은우는 그런 소문이 퍼지게 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당사자인 은우에게 묻기는 더욱 불가능했다. 승현은 분명 그 소문의 원인 혹은 그 소문 때문에 은우가 약을 입에서 떼지 못하게 만든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었다. 아주 못된 야만인의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만약, 저 약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
오메가가 아닌 승현은 오메가에게 약이 어떤 건지 머리로만 이해할 뿐 정확하게 공감하지는 못했다.
“뭐…야? 왜 그렇게 쳐다봐?”
“음? 제가 뭐요?”
“엄청 음흉하게 쳐다보잖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은우는 자신의 얼굴이 소멸할 것처럼 쳐다만 보는 승현에게 물으며 얼추 식어 버린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 마셨다.
“으으아- 형, 그거 안 써요?”
“애도 아니고.”
애처럼 몸서리를 치는 승현에게 어른스러운 표정과 말투로 말했다.
“근데… 너, 무슨 생각으로 자꾸… 우리 학교 와?”
승현은 그저 은우를 뚫어지게 쳐다보기만 할 뿐 어떠한 대답이 없어서 은우가 답답해서 다시 물었다.
“내 말 안 들려?”
“아주 완전… 잘 들려요.”
“근데 왜 대답이 없어?”
“생각하느라요.”
“무슨 생각?”
“형이 안 싫어할 만한 답이요.”
은우는 딱 잘라 확언했다.
“그런 건 없을 거야.”
승현은 줄곧 웃는 얼굴이었는데, 보조개가 조금 더 움푹 파이게 웃었다.
“…형, 있잖아요. 저는요. 빙빙 돌려서 말하는 것도 귀찮고, 뭐 의미심장하게 속뜻이 담긴 말하는 재주도 없구요, 멋있게 말을 꾸미는 것도 할 줄 몰라요.”
“근데.”
“그래서 지금 대가리를 열심히 굴려서 생각해 봤는데요.”
괜히 은우는 긴장되어 커피를 침과 함께 삼켰다.
“난 형이 좋아요.”
은우는 지금까지 들은 말 중에 가장 놀란 말이어서 눈이 서서히 커지며 시선이 길을 잃고 이리저리 헤맸다. 그러다가 얼굴에 피가 쏠리며 화끈거리는 열감을 느꼈다. 남부끄럽게 고백은 승현이 했는데, 당황은 왜 자신이 하는 건지 몰라서 은우는 갈피를 잃은 시선이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너, 너… 내, 내가 누군 줄 알고, 나를… 얼마나, 안다고!”
“뭐, 조금만 지나면 한 달째예요. 형을 왜 몰라요. 내가 아는 거 읊어 줄까요? 이름 변은우, 나이 스물네 살. 일품 그룹 차남에 보유 재산 가치가….”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미쳤…으면 곱게 미치든가.”
씩, 웃는 승현은 은우의 말을 곱씹었다.
“나, 미친 건가요?”
“그걸 몰라서 묻…는 거야?”
은우는 그의 시선을 마주치지 못해서 괜히 에스프레소가 담긴 종이컵을 못살게 구길 듯이 쥐었다가 입으로 옮겼다. 누군가에게 좋아한다는 고백을 생각해보니 처음 듣는 거였다.
“그런데요. 은우 형… 그냥 첫눈에 반하는 사랑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나 형, 첫눈에 반한 거 맞아요.”
“…헛소리하지 말고, 커피 다 마셨으면… 이제 그만 가. 이제 일어날래.”
은우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덥석 승현의 손이 은우를 잡았다.
“아직… 형 다 안 마셨잖아요. 나도, 형도.”
“나, 난 다 마셨…어.”
카페 안은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벌써 곡조가 두 번이나 바뀔 시간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승현은 은우를 세밀하게 하나도 놓치지 않고 관찰했고, 은우는 승현의 뜨거운 시선을 피하고 싶어서 안절부절 좌불안석으로 시선을 회피했다.
결국 승현이 커피를 다 마시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던 은우는 한숨을 내쉬는데, 그의 시선이 날아드는 것이 너무 뜨거워 눈을 깜박거리며 물었다.
“…왜, 그렇게 쳐다봐?”
“설마 몰라서 묻는 거 아니죠?”
“……뭐를?”
이번에도 승현이 무슨 말을 할지 두려워 천천히 되물었다.
“뭐, 고백도 한 마당에 모른다니까… 말해 줘야겠네.”
“…….”
“형이 너무 예뻐서요. 형이 내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어요.”
“미, 미쳤구나… 너. 정말….”
자율 신경이 변한 거라고 할 수 있는 반응으로 은우는 얼굴의 모세 혈관이 팽창해서 붉게 달아오른 것과 동시에 열기가 뻗치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습관인 된 행동으로 모든 만병통치약처럼 은우는 약통을 쥐더니 얼른 입안으로 한 알을 더 밀어 넣었다.
승현은 눈을 갸름하게 떴다.
“그러니까 이제 형, 내가 왜 자꾸 형네 학교로 오는지, 내 마음 알았죠?”
은우는 가슴 어디 한구석이 덜컹하여 말을 더듬거렸다.
“무, 뭐를?”
“다시 말해요? 나 형 좋아한다고요. 그러니까 내일 또 와도 되죠?”
일단 은우는 말도 안 된다 여기며 그를 부정했다. 승현이 좋아한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질 나쁜 ‘알파’가 또 자신을 놀리는 거라고.
“그, 그걸 어떻게 믿어! 네가 날 언제 봤다고, 나에 대해서 뭘 한다고 좋아해? 웃기지 마! 그리고 안 돼, 찾아오지 마.”
하지만 승현의 얼굴은 데미지를 받은 얼굴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달관한 표정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형이 그렇게 말할 줄도 알고 있었어요.”
“…….”
“그래서 이제 확실히 알았어요, 형.”
은우는 눈을 깜박거리며 시선을 어떻게 둬야 할지 몰라서 당황했다.
무슨 말이 나올지….
사실 은우는 누군가를 사랑한 적도, 고백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래서 누군가가 자신에게 좋아한다느니 사랑한다느니 말을 한 사람은… 승현이 처음이었다. 이상하게 심장이 쿵쾅 뛰었다.
처음 겪는 일이라서, 그런 거겠지.
은우는 심장 소리가 들릴까 봐 조마조마했다.
“형, 있잖아요. 나 정말… 형을 첫눈에 반한 거 같아요. 근데 지금 보니까, 그 정도로 끝나는 게 아니라 형을 사랑하는 거 같아요.”
“…….”
기어이 승현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왔다. 은우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경험도 없었다. 모든 것이 미지의 영역이었다. 승현에게 잡히지 않은 손만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그러니까 은우 형.”
은우는 줄곧 대답도 못 하고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떼지 못하다가 이름이 불리자 퍼뜩 들어 승현과 눈을 마주쳤다,
“……어?”
승현의 뜨거운 눈빛에 흠칫 놀라 은우는 시선을 옆으로 돌려 버렸다.
“나요. 형, 점점 형이 좋아지거든요.”
승현은 은우의 반응을 보며 확신에 찼다. 은우는 고백을 처음 받아 보는 소년같이 있었다.
“…….”
“사귀자는 소리 안 할 테니까… 그냥 저 지금처럼 만나 주면 안 돼요?”
은우는 사귀자는 말과 만나 달라는 말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검은 속내를 숨겼다. 하지만 은우는 이성적이고 똑똑하고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내가 왜?”
은우는 마지막 발악처럼 가시 돋친 말을 뱉었다. 나약한 고슴도치에게 유일한 방어막인 가시가 모조리 뽑혀 버리기 전에. 은우는 가시 속으로 숨었다.
“나는 너한테 관심 없어. 그리고 앞으로 관심 가지고 싶지도 않아.”
은우는 자신의 손이 아직 승현의 손에 고스란히 잡혀 있는 걸 발견하고 퍼뜩 놀라 손을 뿌리치며 빼내려고 했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승현의 힘이 세서 그런 건가, 아니면 내가 먹은 약 기운이 너무 세서 그런 건가.
약 기운이 너무 세서 힘이 들어가지 않는 거라 은우는 판단해버렸다.
“그럼 지금부터 관심 생기면 되겠네. 자, 커피 들고 잠깐 걸어요. 나한테 관심 생기게.”
승현은 은우의 손을 잡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왜.”
“에이, 그냥 걷는 정도는 괜찮잖아요. 소화도 시킬 겸이라고 생각하고, 아니면 건강을 위해서라고 생각해요.”
애늙은이 같은 소리를 하는 승현에게 은우는 이끌렸다. 그의 힘 앞에 은우는 종이 인형이나 다름없었다. 승현은 폭군에 가까운 야만인이 따로 없었다. 승현이 당기는 반대쪽으로 손을 빼내려는데 무용지물로 질질 끌려갔다.
“야, 진짜… 이거 놔. 정말 싫…어….”
“그럼 형 내일 또 찾아올 테니까. 같이 밥 먹어요.”
“다시 안 온다며!”
은우는 버럭 화를 냈다가 입술을 깨물었다.
“자꾸 만나야 관심도 생기지.”
막무가내인 승현 때문에 머리를 팽팽 굴리더니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이 은우가 말했다.
“나 내일 밤까지 강의 있어.”
승현은 씩 웃었다. 은우가 거짓말로 떼어 놓는 거라는 걸 알아차렸다.
“내일 오후 두 시에 끝나는 실험만 있는 거 알아요. 그거 끝나면 수업 끝나는 것도. 그 뒤로 공강이잖아요.”
알고 있었는데, 승현이 매일 본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은우는 당황한 목소리가 저절로 났다.
“윽…! 너, 어떻게….”
“내일 앞에서 기다릴 테니까 같이 밥 먹어요.”
“싫어.”
“에이, 은우 형. 그럼 나랑 사귀자고 쫓아다닐 건데요?”
“더 싫어…….”
“그럼 내일 우리 밥도 먹고, 오늘처럼 커피도 마시고, 영화도 보면 좋을 거 같아요.”
은우가 작은 목소리로 반발했다.
“…그러니까, 내가 왜 너랑….”
승현은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는 은우를 더욱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
“왜냐니요. 나 형이 너무 좋아서 미칠 거 같단 말이에요. 이참에 나한테 관심 좀 생겨 봐요.”
“그… 그걸 왜…. 그러니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
“어떻게 해야 형을 안 좋아하게 되는지 모르겠어요.”
“…….”
“그럼 형은 내가 형을 싫어하게 해줘요. 나는 형이 나를 좋아하게 해줄 테니까. 서로 누가 이기나 내기. 어때요?”
“…….”
승현은 산뜻하게 웃었다.
“미리 데이트 연습하는 거로 생각해요. 아, 벌써 다 도착했다. 그럼 내일 봐요. 오늘 잘 때 내 꿈 꿔 주면 더 좋고요!”
은우는 욕이라고 실컷 한마디 해주려고 했는데 도착했다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승현은 자신을 아까 기사가 있는 주차장 입구까지 데려다주고는 자신의 거절도, 수락도 듣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은우는 승현을 떨쳐내려고 너무 많은 힘을 준 탓에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니, 손에 남은 건 빨갛게 된 그의 손자국이었다.
그가 남긴 손자국은 마치 낙인을 찍은 듯했다. 사라지는 승현을 보다 은우는 몸을 돌렸다.
“휴우… 생각보다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해요. 지금 가요.”
“아닙니다.”
은우는 주차된 차량으로 가 한숨을 쉬고는 경호원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경호원은 묵묵하게 뒷좌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은우는 차에 올라타는 것과 동시에 습관적으로 가방에서 약을 한 알 꺼내 먹었다.
가만, 오늘 나 약을 몇 개 먹었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보다 오후에 승현이 휩쓸고 간 거센 바람 같았던 일을 곱씹으며 차에서 눈을 살며시 감았다. 폭신한 시트에 몸을 기대 팔을 들어 눈가를 가렸다. 천천히 차가 움직이는 것을 느끼던 은우는 약 기운에 잠식되어 잠에 빠져 버렸다.
✻ ✻ ✻
다음 날이었다. 은우는 이상하게 꼭두새벽부터 눈이 뜨였다. 약을 먹은 날은 거의 열두 시간, 열세 시간을, 심할 때는 꼬박 스물네 시간도 잘 수 있는데 이상하게 눈이 뜨였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잠자리가 뒤숭숭해서 뒤척였다.
아마 어제까지만 해도 평온했던 자신의 감정을 승현이 이리저리 들쑤셔 놨기에 동요된 마음을 느꼈다. 은우는 그 마음의 정체를 처음 느껴 단순히 불편하다 생각했다.
승현이 줄줄이 꿰고 있는 것처럼 오늘은 아침 열 시부터 전공 필수인 실험이 있었다. 그리고 정확히 두 시에 끝나는 실험인데, 승현이 어떻게 자신의 시간표를 알고 있는지 은우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승현과 만난다는 생각에 아침부터 이상하게 은우는 뜬구름을 걷는 기분이었다.
미쳤어, 미쳤어.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어제 승현이 남긴 말을 깨끗하게 지워 버렸다. 헛소리일 게 분명하다고 여겨버렸다. 또 못된 알파들의 장난이라고 치부했다.
뇌가 컴퓨터처럼 강제로 메모리 삭제 기능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은우는 무생물인 컴퓨터가 부러웠다. 머릿속에서 지운다고 지운 기억은 데이터처럼 클라우스 서비스로 내려받는 것처럼 복제되어 되살아났다.
“휴… 정윤 형에게 도와달라고 할까?”
그가 거북해서 도와달라고 하면 정윤이 나서서 도와줄 텐데, 왠지 은우는 정윤에게 말을 터놓기가 어려웠다. 거기다 요즘 정윤이 리조트 개발 건으로 바쁜데 번거롭게 굴고 싶지 않았다.
“후우…….”
한숨만 푹푹 내쉬는 은우가 이상해서 같이 실험하는 친구인 명진이 은우를 의아롭게 쳐다봤다.
“오늘 은우 너 이상하다. 평소에는 열심히 하는데, 오늘 왜 이렇게 실험하는 내내 집중 못 하고, 한숨이나 쉬고.”
“그러니까…. 이러면 안 되는데.”
은우도 스스로가 한심스럽다는 듯이 대답하니 명진이 걱정스럽게 되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취업 때문에 그런 건가? 너는 뭘 걱정해. 성적도 톱인 데다가…. 뭐 요즘 같은 취업난에 제약 회사는 못 들어가도, 선배들이 우스갯소리로 말해 주잖아. 설탕 공장이라도 들어가면 된다니까.”
“아니야, 그런 거.”
은우는 친구들에게조차 자신의 사생활을 한 번도 발설하지 않아서, 특히 일품 그룹의 자제라는 것을 알리지 않아서 같은 과 동기들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근데 왜 그래? 설마 아직도… 그 오메가 그런 거 때문에 고민하는 거야?”
“아아, 아니야.”
“그럼… 아! 설마 요즘 맨날 너 쫓아다니는 그놈?”
이번에 명진이 정곡을 찌르자 은우는 들통나는 거짓말로 아니라고 했다.
“…어? 어… 아, 아니….”
명진은 거짓말 속에 담긴 진실을 파악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그놈 때문이네.”
“…….”
“왜 그놈이 뭐라고 그랬어?”
“아니야, 아무것도.”
은우는 황급히 실험에 열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야, 은우야. 한 번쯤은 우리들한테 고민도 좀 털어놓고 그래, 조금은 섭섭하다. 어떻게 한 번을 말도 안 하냐.”
“어? 그게… 미안.”
멋쩍은 듯 은우는 볼에 공기를 불어 넣어 미소를 지었다. 명진은 좋은 친구였다. 하지만 은우는 누군가에게 속내를 털어놓는다는 것이 어색하기도 했고,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향해 웃음을 던졌다.
은우가 싫어한다는 것을 알자 명진은 더 묻지 않았다.
은우는 마지막 실험에 집중했지만, 곧 실험이 끝나는 시간인 데다가, 오늘은 승현이 했던 말 때문에 딴생각에 잠겨 제대로 하지 못한 걸 떠올렸다.
“은우야, 수업 끝나고 애들하고 같이 놀러 갈 건데. 안 갈래?”
실험 시간이 끝나 자리와 실험 장비를 정리하는 명진이 다시 물었다.
“어? 그러고 싶은데, 나는 오늘 실험 제대로 못 해서… 도서관에 가려고.”
명진은 은우의 어깨를 툭툭 치며 실험실을 떠났다.
“아아… 그래. 그럼 내일 보자.”
은우는 명진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우는 잠깐 자리에 앉아 필기하다가 아무도 남지 않은 실험실을 빙 둘러보았다. 꿋꿋하게 마지막까지 필기를 끝내더니 결국 제일 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곤하고 나른한 몸은 약 기운이 퍼지는 감각이었다. 주머니에 넣어둔 약통에서 약을 꺼내 먹었다. 책을 덮고 짐을 챙겨 실험실을 나가는 은우는 문 앞의 거대한 그림자와 마주쳤다.
“은우 형! 오늘 학교 안 온 줄 알고 조마조마했네요. 왜 이렇게 늦게 나왔어요? 저는 시간 맞춰서 왔는데.”
“아…! 너, 정말….”
믿지 않았고, 그의 말을 의심했던 은우는 승현이 실험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놀란 은우는 승현을 멍하게 응시했다.
승현의 성격이 밝았다. 그에 따라 주변이 환해지는 거 같았다. 음울한 자신과 대비되는 승현의 태평하고 천진난만한 모습에 감응되는 걸 느꼈다. 비록 만남은 자신이 원하는 만남이 아니었지만, 그와 이렇게 함께 있으면 즐거웠다.
그저 처음에는 승현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자신을 골탕 먹이려고, 놀리는 줄 알았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그런 좋아한다느니, 사랑한다느니 같은 말을 한 줄 알았다. 세상에는 쓸데없는 일에 열정적인 사람들이 많으니.
하지만 눈앞의 한승현은 달랐다. 말로 형용할 수 없지만 산책 나온 댕댕이가 자신에게 안겨드는 포근한 기분이 들게 했다.
승현은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며 은우를 위아래로 슥 훑어봤다. 편안해 보이는 연한 색의 청바지와 아기자기한 패턴 무늬가 박힌 티셔츠가 어울렸다. 그 무엇보다 하얀 가운을 입은 모습을 보며 음흉하고 야한 상상력이 떠올라서 장난스레 가슴을 움켜쥐더니 쓰러지는 척했다.
“윽! 심장이야!”
“야, 야… 너 왜 그래?”
“형… 큰일 났어요.”
“어? 무슨 큰일?”
승현은 일부러 몸을 숙이며 걱정하는 은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저 좀 살려 줘요.”
“왜 그래?”
“형, 매번 실험할 때마다 이 하얀 가운 입는 거예요?”
“어? 갑자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은우는 고개를 숙여 제 몸을 내려다보며 당연한 말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 씨발…. 형 동기들 완전 너무 부럽다.”
“…….”
은우는 태어나서 욕이라고는 미친놈 정도가 다였는데, 승현은 다양한 욕을 중얼거리니 조금 움칫하고 말았다.
“형의 하얀 가운 입은 모습이 너무 예뻐서 심장에 무리가 온 거 같아요.”
“…하아……?”
은우는 눈을 깜박거리며 정말 승현이 미친놈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내 승현을 무시하는 게 답이라 여겨 몸을 돌렸다.
미적지근한 은우의 반응에 승현은 몸을 돌린 은우의 손을 덥석 잡으며 샐쭉 웃었다.
“무, 뭐야….”
“형 반응이 왜 이래요? 왜 이렇게 미적지근해요?”
입술을 꿈틀거리며 웃는 승현은 선량하고 무해하고 착한 댕댕이 같은 미소였지만 티가 나지 않게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은우를 응시했다.
지금까지 은우는 손을 잡거나 스킨십을 하기만 해도 예민하고 까칠하게 손을 빼 버리더니, 지금은 놀란 표정을 보이긴 했어도 손을 빼진 않았다. 이 정도 스킨십에 은우는 익숙해진 거였다.
“그러니까, 형… 이 타이밍에는 ‘괜찮아? 어디 내가 좀 만져 줄까?’ 이러면서 여기를… 응? 여기를, 살살 좀 만져 주는 거잖아요.”
승현은 제 심장 부근인 가슴을 살살 만지면서 말했는데, 반대로 은우는 경악과 함께 혐오하는 단어가 어울릴 법한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봤다. 금방 승현은 우쭐해진 어깨를 축 내려 꼬리도 같이 말린 듯한 모양으로 주눅 들었다.
“아, 미안해요. 형… 형이 너무 예뻐서… 그랬어요. 나중에 같이 의사 놀이 하면 좋겠다.”
“… 뭐, 뭐? 의사… 놀…이?”
어릴 때나 하는 의사 놀이?
은우는 말의 의미가 몰라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도대체 의미를 알 수 없어서 은우는 하자고도, 또 미쳤냐고도 못했다. 가만히 말의 의미를 생각하는 자신을 두고 승현은 분위기를 바꿨다.
“뭐, 간호사도 좋겠어요. 아무튼 그건 나중에 하고요. 그럼 형, 오늘 우리 밥 먹고 산책하고, 커피 마시고 영화 보는 거예요?”
승현은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하고 싶은 일을 나열했다.
“아니.”
“그럼 우리 오늘 뭐 해요? 좋은 거 하나?”
음흉한 빛을 내는 승현은 웃음을 감추지 않았지만 은우는 딱딱하게 말했다.
“너 빨리 가.”
“형… 나 여기 도착한 지 삼십 분 됐는데요? 거기다 지금 형 만난 지 오 분도 안 됐는데? 우리 아직 밥도 안 먹었는데, 근데 우리 오늘 뭐 먹을까요? 어제 먹은 데 가서 먹어요?”
은우는 사물함으로 향하더니 단호한 손짓으로 하얀 가운을 벗었다. 대형견이 따로 없는 승현은 졸졸 따라와 무해한 선량한 시민의 얼굴로 곁에 있었다.
사물함에 하얀 가운을 구겨지지 않게 걸어 두고 벗어 둔 카디건을 입은 은우는 무심하게 책을 몇 권 더 꺼내면서 몸을 돌려 승현을 돌아봤다.
“나 밥 안 먹을 거야. 배 안 고파.”
“…….”
설마 또 은우가 약을 먹었구나 싶어서 승현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밥 안 먹고 형, 우리 뭐 할까요? 커피? 산책?”
해맑은 목소리를 낸 승현이지만 워낙 큰 키의 울림통이 강해서 은우의 달팽이관을 흔들었다.
“나 도서관 갈 거야. 그러니까 그냥 너 가.”
“도서관에 뭐 있는데요?”
“도서관에 뭐가 있냐니? 무슨 소리야?”
“도서관에 왜 가냐구요.”
그의 말 또한 은우에게는 이상한 말이었다. 그가 던진 말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뭐…를 하다니? 공부하러 가지.”
“아아, 흠…. 그래요, 그럼 같이 가요.”
승현은 턱을 손가락으로 문대며 말했다. 은우는 멍하게 승현을 두고 눈만 깜박거리다가 제정신을 차리며 되받아쳤다.
“뭐?”
“아니, 형 도서관 간다면서요. 같이 가요.”
“너랑 왜 같이 가는데? 나 놀러 가는 거 아니고 공부하러 가는 거야.”
“방해 안 할게요. 옆에 가만히 앉아서 나도 공부하지 뭐.”
은우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오래 본 사이는 아니지만 승현의 성격을 지금까지 돌이켜본 결과, 안 된다고 해도 어떻게 해서든 따라올 거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말도 없이 몸을 돌려 실험실이 있는 건물을 빠져나가는데, 승현이 냅다 은우의 손을 잡고 앞지르기 시작했다.
“야, 뭐 하는 거야!”
“아니, 손잡고 가자구요.”
이제는 실소가 터지며 은우는 이제 승현에게 ‘왜’라는 말을 하지 않았더니 산책길에 오른 강아지가 신이 난다는 듯이 승현은 달려 나갔다.
승현은 은우의 손을 잡고 호기롭게 공학관 건물을 나왔는데,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근데 형, 도서관이 어디예요?”
은우의 입가에 웃음이 번진 채로 목소리만 까칠하게 흘러나온다.
“너… 진짜, 안 갈 거야?”
“밥도 같이 못 먹고, 같이 걷지도 못했고, 커피도 못 마셨는데, 아직 아무것도 같이 한 게 없는데 어떻게 가요.”
“…밥 먹어 주면 갈 거야?”
“아니요.”
“야!”
버럭 소리치는 은우는 까칠하고 예민하게 짜증스러운 표정을 이제는 감추지 않았다.
그런데 은우도 어느새 승현이 많이 편해진 기분이어서 손에 쥔 전공 책을 꽉 쥐었다. 자신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갈팡질팡했다.
지금 승현과 이렇게 실랑이를 벌이는 것도 또 어디서 어떻게 이상한 소문이 퍼져 자신을 괴롭히게 될지 몰라서 신경질이 났다.
그때도 그랬었다. 자신의 책임은 하나도 없는데, 모두 자기 책임이 된 것 같아서 늘 억울했다. 은우는 왜소한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밥만 같이 먹어 주면, 하는 게 없잖아요.”
은우의 속도 모르고 새삼 능글맞은 승현은 능구렁이 백 마리를 배 속에 기르는 사람처럼 말했다.
입을 열면 헛소리가 나올 거 같아서 입을 다물었다. 자꾸 자신에게 들러붙는 승현이 짜증이 나고 싫었다. 아니, 위험했다. 겨우 찾은 일상이었는데, 그 때문에 망가뜨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승현의 팔을 뿌리치며 혼자 도서관으로 향했다.
콩콩, 쿵쿵. 신장과 체중에서 오는 발걸음 소리가 다르게 울렸다.
도서관을 향하는 은우는 끈덕지게 달라붙는 승현을 무시했다. 하지만 승현은 개의치 않은 듯 은우의 뒤만 졸졸 쫓았다.
중앙 도서관은 총 5층으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학교의 자랑거리가 되는 듯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축 건물이었다. 공학 계열의 도서는 4층에 비치되어 있어 은우는 익숙한 발길로 4층으로 향했다. 4층의 열람실의 기다란 책상에 자리를 잡는 모습은 늘 똑같은 일상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책상에 책을 올려놓고 가방을 놓자마자 은우는 가방에서 약부터 꺼내 먹었다.
시험 기간도 아닌 도서관의 열람실은 사람이 없이 텅텅 비어 있었다. 승현은 얌전히 은우 옆자리에 자리를 잡아 은우를 관찰했다. 약부터 먹는 은우를 보며 오늘도 대체 몇 알의 약을 먹었을까 가만히 그를 지켜보았다.
아직까지 은우에게 승현은 이렇다 할 행동을 취할 생각은 없었다. 지금은 탐색전 기간이라는 것이다.
적을 알아야, 공략법도 나오는 법이니.
은우의 옆모습을 나노 단위로 쪼개서 보고 있었다. 은우의 페로몬이 무슨 향기일까? 상상하면서.
끝내 은우는 자신을 무시하기로 한 건지 힐끗 쳐다도 안 보며 책상에 책과 노트를 펼쳐 놓고 눈을 책에 고정한 채였다.
말소리도 못 내고 조용히 숨을 죽인 승현은 할 것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지루해지려고 했다. 은우를 보고 있는 것은 지루하지 않았는데, 말도 못 하고 상대도 안 해주니 심심해졌다.
사각사각 연필이 노트 위를 지나가면서 소리가 났다. 은우는 옆에 계산기도 꺼내 툭툭 두드리며 심각한 듯 미간에 주름이 생겨서 승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미간을 풀어 줄 뻔했다.
“흠흠.”
목청을 가다듬은 승현은 은우가 당장 눈길도 주지 않는 책을 슬쩍 끌어와 펼쳤다. 저절로 인상이 구겨지는 내용들이 빼곡하게 그것도 영어로 온통 적혀 있었다. 물론 그것들을 세세하게 피곤하게 읽은 건 아니지만 외계어 같은 영어에 급격하게 피곤함을 느꼈다.
하이… 드…로…포….
역시 공학과다운 학술 용어로 인해 금세 흥미를 잃어 승현은 그림만 살펴보며 책장을 넘겼다. 그러다 은우의 눈치를 힐끗 살폈는데 은우는 완전히 책에 집중하며 파고들어 시선이 책과 노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승현은 소리 없이 웃으며 슬그머니 은우의 필통에 손을 뻗어 볼펜 한 자루를 꺼냈다. 얼마나 은우가 집중하는지,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 건지 보이지도 않는 듯했다. 은우의 책이었지만 승현은 또각, 볼펜심을 빼 책에 살포시 엎드렸다.
화학식을 도식화해 놓은 그림을 보며 문과 출신인 승현은 ‘carbon’이 뭔지 모르고, 관심도 없었다. 다만 동그란 것이 두 개가 철썩 붙어 있는 것이 마음에 들어 펜촉을 슥슥 움직여 낙서를 남겼다.
꽤나 흡족한 얼굴을 하고 슬쩍 은우의 팔꿈치를 툭툭 건드려 그를 불러 자신이 낙서한 것을 보여 주며 소리 없이 웃었다.
“……야.”
은우는 아주 조그맣게 소리를 내며 인상을 썼다. 그러면서 눈에 힘을 주며 승현에게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승현은 입 모양을 읽더니 책에 추가로 메모를 끄적이며 적었다.
이건 형, 이건 나. 이건 팔다리,
붙어 있어서 우리 뽀뽀하고 있는 거
그려 넣어 봤어요
유치한 초딩도 아니고, 승현이 한 짓은 딱 그 수준이었다. 은우의 고운 미간에 주름이 다시 깊게 패더니 신경질적으로 혀를 찼다. 승현의 행동에 다시 입 모양만 뻐끔뻐끔하며 말했다.
‘내 책에 낙서하지 말라고. 진짜 싫어.’
진짜 싫어하는 표정으로 은우는 승현이 낙서한 것을 지우려고 했지만, 볼펜이라 지워지지 않아서 짜증을 부렸다. 괜히 손가락으로 낙서 된 페이지를 벅벅 문지르는 손길이 화난 모양이었다.
하지만 승현은 이제껏 은우의 손가락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없었던 걸 떠올리며 가만히 그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응시했다.
은우는 손가락이 예뻤다. 남자인 은우에게 미안한 말이긴 했지만, 남자치고 손이 작았다. 거기다 어느 여자들보다 예쁜 손이었다. 승현은 책을 꾹꾹 문지르는 은우의 손을 보며 다소 불온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저 예쁜 손이, 자신의 페니스를 움켜쥐고 만진다면…….
큼, 순식간에 뜨거워진 숨을 뿜어낸 뒤 황급히 은우의 손가락에서 신경을 떼어내며 은우의 책에 다시 낙서했다.
형 좀 귀여운 거 알아요?
더 사랑할 거 같아.
쓱 메모를 보며 은우는 당황하며 승현에게서 책들을 모조리 빼앗았다.
‘야, 진짜 이게 뭐 하는 거야!’
소리가 없이 입 모양만 나는 탓에 화를 내는 위협도 위력도 느끼지 않는 승현은 어깨만 으쓱했다.
‘낙서 진짜 싫어, 하지 마.’
화를 내던 은우의 표정이 조금 정말 싫어해서 슬퍼하는 표정으로 바뀌자 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이제 안 그럴게요.’
“휴우…….”
사나운 눈빛으로 승현을 노려보던 은우가 기분을 풀고 참고 서적을 찾으러 자리에서 일어나자 승현도 따라서 일어났다.
승현은 재빨리 열람실 밖으로 나가 입구에 붙어 있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왔다. 오늘같이 날씨 좋고 햇살 좋은 날 도서관이 웬 말인가. 도서관에 처박혀 있는 것은 스무 살 인생에 처음이었다. 상상도 못 한 일에 허탈한 웃음이 지어졌다. 데이트는커녕 이런 삼백 원짜리 자판기 커피나 마실 줄은…. 자기 자신이 어이가 없어져서 허탈한 웃음이 지어졌다.
이미 양손에 커피를 들고 자리에 돌아오니 벌써 은우는 책상에 앉아서 가는 머리카락을 가볍게 움켜쥐고 계산기와 씨름을 하는 중이었다.
“이거 좀 마시고 쉬면서 해요.”
커피를 건네는 승현은 작은 목소리로 은우를 불렀다. 은우는 퍼뜩 말소리에 놀라 조용히 하라고 눈짓을 주었지만 승현은 당당하게 커피를 마시면서 되받아쳤다.
“다들 데이트하러 가서 여기에 사람이 없어요. 우리밖에.”
“…….”
“자요. 이거 마시고 쉬엄쉬엄해요.”
커다란 승현의 손에 미니어처 사이즈 같은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가만히 은우는 그의 호의에 커피를 받아 들었다. 호로록, 승현은 달달한 자판기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은우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은우는 입맛이 떨어지는 탓에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책상 한구석에 밀었다. 대신 은우는 가방에서 약을 하나 꺼내더니 입속을 밀어 넣었다.
그 순간 승현은 손을 뻗어 은우의 약을 빼앗을 뻔하다가 참았다. 얼굴이 험악하게 구겨지며 눈살을 찌푸린 승현의 얼굴은 지금까지 은우에게 보여 주었던 댕댕이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었지만 은우는 발견하지 못했다. 그저 다시 책에 빠져들었고, 승현은 열중하는 은우를 보며 생각했다.
분명 약을 습관적으로 먹는 거 같지?
그건 어느새 버릇처럼 굳어져 은우도 자기가 먹었는지도 간혹 모르는 것으로 보였다. 그에 승현은 이제 아예 책상에 팔을 괴고 은우를 뚫어지게 관찰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둔한 사람이라도 이렇게 노골적으로 뚫어지게 쳐다보면 알아차리기 마련인데 예민한 은우가 모를 리가 없었다. 공부를 하다 손에 쥔 샤프를 내려놓으며 승현을 향해 입 모양으로 말했다.
‘후우… 왜, 무슨 할 말 있어?’
승현은 어깨를 으쓱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할 말 없는데요. 형 공부해요. 나 되게 조용히 하고 있었는데.”
“너 공부한다며, 무슨 공부 하는데? 아무것도 안 하잖아. 지금, 그리고 내 책 그만 팔베개로 쓰고 이리 내놔. 공부 안 할 거면 집 가든가!”
“저 지금 공부 중 맞아요. 그것도 지금까지 살면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해 본 적이 없다니까요. 작년 수능 칠 때도 이렇게까지 공부 안 했는데.”
은우는 낑낑대며 승현의 팔 밑에 깔린 제 책을 힘겹게 빼내더니 화를 삭이며 사나운 눈을 부릅 치켜뜨며 말했다.
“그래? 그럼 너는 지금 무슨 공부 하는데? 내 눈에는 아무것도 안 하는 걸로 보이는데.”
“지금 변은우에 관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죠. 이건,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공부네요.”
아, 능구렁이가 백 마리가 아니었다. 한… 백만 마리가 승현의 배 속에 살고 있다고 은우는 느꼈다. 이런 대사를 들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해서 팔에 소름이 돋았다.
“…무, 뭐라는 거야. 미쳤어?”
꼬르륵.
은우는 결국 참지 못하고 조금 소리를 높였는데, 하필 그 타이밍에 승현의 배 속에서 꼬르륵 배고프다는 소리가 났다. 승현은 양손으로 배를 움켜잡았다.
“아, 형…. 나 배고파요.”
“…정말…….”
가지가지 한다.
결국 은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또 하필 꼼짝 않고 약만 먹은 탓에 은우는 잠깐 다리에 힘이 풀려 몸을 휘청거렸다.
역시, 밥도 안 먹고 약을 먹는 게 아니었는데, 약을 몇 개 먹었지?
빠르게 생각했는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승현이 금방 놀란 얼굴로 동물 같은 반사 신경을 이용해 은우를 부축했다.
“형! 왜 그래요?”
“별거 아니야. 괜찮아.”
쯧, 승현은 속으로 혀를 찼다.
분명 은우가 먹은 약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은우는 끝내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다. 오히려 은우는 자신의 팔을 뿌리치더니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책상 위를 빠르게 정리했다.
은우도 책을 덮고 꺼내 온 책장에 꽂으며 곰곰이 생각했다. 개수는 기억하지 못해도 짧은 시간 약을 많이 먹은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알파’인 승현 앞에서는 더욱이 내색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창백한 얼굴에 어딘가 식은땀도 나는 것 같았다.
승현이 곁에 있으니 더 긴장되는 기분이었다. 후다닥 가방에 필통을 넣고 노트를 넣었다.
이제 약을 그만 적당히 먹어야 하는 걸 아는데 멈추지 못했다. 괜히 승현이 곁에 있으니 불안해졌다.
혹시, 나… 설마, 오메가 냄새 나는 거 아니야?
불안함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커졌다. 은우는 미약하게 떠는 손으로 가방과 주머니를 더듬거려 빨간 알약이 담긴 약통을 꺼냈다.
“형!”
승현은 창백해지는 은우의 얼굴을 보며 놀란 표정으로 은우를 끌어안았다. 은우의 표정도 멍했다가 자신을 끌어안는 승현 때문에 화들짝 놀랐다.
“야…! 너, 뭐 하는 짓이야, 이거 안 놔?”
“형, 진짜 미안한데… 잠깐만요.”
“잠깐이고 나발이고, 이거 놓으라고.”
“알고 있거든요? 정말 잠깐만… 나 걱정돼서 그래요.”
무서워져 은우는 발버둥을 쳤다. 저 깊은 기억 속에 담긴 음산한 웃음소리가 떠올라 은우는 입술이 덜덜 떨렸다.
승현은 뼈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마른 은우의 등을 꽉 안으며 최대한 안정감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형, 싫어하는 거 아는데, 불구하고… 잠깐만요.”
“싫, 어….”
“알아요. 근데, 형… 방금… 도서실에 와서 그… 약, 그 정체가 뭔지도 모르는 그거, 벌써 세 개 먹은 거 알아요? 그거 그렇게 많이 먹어도 괜찮은 거예요?”
“…….”
은우는 흠칫하더니… 발버둥이 멎었다. 그제야 은우도 오늘 자신이 먹은 약의 개수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승현이 말해 줘서….
“형, 뭔지 모르지만… 잠깐 참을 수 있으면 참아 봐요.”
“…이제 알았으니까 이거 놔.”
차분해진 은우의 목소리가 나긋하게 울려 승현은 천천히 그를 놓아주었다.
“형, 미안해요. 싫어하는 거 아는데… 미안. 이렇게 안 하면 형이 그 약 먹을 거 같았어요.”
“…….”
은우는 말도 없이 자리를 정리했다.
승현이 미안해할 것도 아니었는데, 그가 미안해하는 것도 듣고 싶지 않았다. 이기적인 것일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이 갈팡질팡한 마음이 싫었다. 승현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하다가도 다시 꽉 빗장을 걸어 잠가 버리는 것이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오락가락했다.
냉랭해진 분위기로 열람실을 나왔다. 은우가 한 발 내디뎌 걸을 때마다 은우의 가는 다갈색의 머리카락이 하늘거리며 흔들렸다.
승현은 은우를 놓칠세라 황급히 은우를 따라 열람실을 나섰다. 승현의 얼굴도 은우와 똑같이 이제는 단단히 화가 난 표정을 지었다. 앞질러 가 버리려는 은우의 팔을 뒤에서 잡아 돌려세웠다.
“형, 내가 잘못한 거 알겠고, 미안한 건 미안한 건데. 왜 쓰러질 뻔한 거예요? 어디 아파요? 걱정되잖아요!”
“그런 거 아니야.”
은우는 승현의 시선을 피했다. 피곤이 묻어 있는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근데 왜…….”
모든 것이 다 피곤해졌다. 은우는 화낼 상대는 승현이 아니었는데, 승현에게 괜히 분풀이를 하는 듯이 소리를 쳤다.
“네가 신경 쓸 일 아니잖아. 왜 참견이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층으로 이루어진 도서관이 쩌렁쩌렁 울리게 소리친 승현 때문에 건물에 메아리가 울렸다. 환청이 남는 것처럼 잔상으로 은우의 귓전을 파고들어 달팽이관을 뒤흔들었다.
화르르, 불에 타는 것같이 은우의 양 볼이 순식간에 타올랐다. 창피해져서 반박하는 말도 못 하고 서둘러 몸을 돌려 계단을 뛰어 내려가 건물 밖으로 나가 버렸다.
승현은 은우의 뒤를 쫓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아, 형… 뭔데요. 왜 공부하다 말고 나가는 건데요?”
“…배, 고프다며….”
금방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화를 낸 것은 어디 갔냐는 듯이 대형견이 꼬리를 흔들며 살살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럼 형, 밥도 먹고 커피도 마셔 주는 거예요? 산책은? 영화는? 술도 먹어 주나?”
“그딴 건… 없어. 이제 밥 먹고 너 가, 나 정말 공부해야 해.”
승현은 시무룩하게 귀가 축 늘어진 강아지처럼 응시했다.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안 돼요?”
“어, 안 돼.”
“왜 안 돼요?”
은우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그에게 더 이상 휘말려서는 안 된다고, 더 이상 휩쓸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 자신의 뒤에 따라붙는 그 수많은… 소문들을 떠올렸다.
“너 귀찮아, 예전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이제야 말하게 돼서 미안해. 줄곧 너 거슬렸어. 그러니까 다시는 안 봤으면 좋겠어.”
은우는 그를 완벽하게 밀어내고 거부했다. 그가 지금까지 한 번도 상처받은 얼굴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 승현은 조금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결국 은우는 못 본 척하며 승현을 등졌다. 그리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핸드폰을 꺼냈다.
약을 너무 많이 먹었어.
익숙하게 은우는 핸드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정윤 형, 응, 나… 약을, 너무 많이 먹었어. 응응… 알았어.”
은우의 보호막은 정윤이었다. 그가 아니었다.
등 뒤에 버려둔 승현이 신경 쓰였지만 은우는 끝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 승현은 다시 쫓아오지 않을 것이다. 이걸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앞으로 승현은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겠다고, 나는 다시 아무 일도 없던 일상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은……!”
뒤를 돌아 가 버리는 은우를 잡으려다 승현은 손을 거두었다. 잠깐 은우의 주변으로 은우를 둘러싼 그 수많은 소문들이 보이는 듯했다. 그날 연회장에서 보았단 사람들의 조롱 섞인 시선들이, 비아냥거리는 웃음이 은우를 휘감고 따라 다니며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었다.
하나같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이었는데, 자신을 등지고 사라지는 은우의 뒷모습에 왜소하고 초라해 보였다. 반짝거려야 할 은우가 한없이 초라해 보였다. 은우의 뒤로 무성한 소문들이 꼬리를 길게 달고 은우의 어깨에 매달려 있었다. 그 개 같은 소문과 시선들 사이에서 은우를 꺼내 주고 싶었다.
이제는 은우에 대한 호기심이라고 치기에는 어느새 은우에게 완전히 빠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