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10분 (4/22)

4장. 10분

이튿날이었다. 따스한 봄날의 교정은 로망이 펼쳐지는 곳이었다. 연인들이 잔디밭과 벤치에 앉아 속삭이는 말을 주고받는 분위기는 발가락 사이가 간지러운 기분이 들 정도였다.

한차례 뜨겁게 강의가 펼쳐졌던 강의실에서 문이 열리자 수업을 듣던 학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그사이에 승현은 눈동자를 빠르게 굴리며 목표하는 사람을 찾았다. 맹수가 목표물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것 같았다. 쌍꺼풀이 진 눈꺼풀을 깜박거리지조차 않고 그의 눈동자가 휙휙 굴렀다. 곧 은우를 찾아낸 승현이 그를 크게 불렀다.

“은우 형!”

“…어……?”

다시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오리라 기대했던 은우는 어제오늘 줄곧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한승현은 다른 사람과 다르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정말 달랐다.

어제의 승현은 분명 상처받은 얼굴을 했는데, 지금 눈앞에 나타난 그는 평소와 똑같이 웃는 얼굴을 하고 자신의 앞에 당당하고 근사한 미소로 서 있었다.

“형, 놀랐어요?”

은우가 자신의 등장에 많이 놀란 얼굴을 했다. 자신이 나타날 줄 예상하지 못한 듯 경직된 표정이었다.

“너…….”

승현이 넉살 좋은 얼굴을 하고 은우에게 다가갔다.

“형, 오늘은 꼭 같이 밥 먹어요!”

알게 모르게 은우는 점점 승현에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해맑고 순수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조금은… 친숙하게 받아들이면서 경계가 허물어지려고 했다. 그래서 날이 선 경계의 빛이 조금씩 사라진 은우는 한층 부드럽게 풀린 낯빛을 만들었다.

한 발, 승현에게 용기를 내서 다가섰다.

가볍게 내디딘 한 발에는 어제 그렇게 못되게 굴었던 데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은우는 그를 대하는 방법을 아직 몰라 여전히 퉁명스러운 어조가 튀어나와 버렸다.

“너 수업은 또 어쩌고 여기 왜 왔어?”

“그냥 형이 보고 싶어서, 오늘은 땡땡이를 좀 쳐 봤죠. 오늘 날씨 봤어요? 날씨가 너무 좋잖아요? 우리를 위한 날씨 같고 막 그래요. 그렇죠?”

같잖게 낭만적인 면도 있어서 은우는 옅게 웃었다.

“넌 맨날 땡땡이 아니야?”

“아, 그런가? 그러니까 형, 같이 밥 먹고 또 커피 마시고, 길도 걷고… 그러면 좋겠는데, 아! 걸을 때 손잡아 주면 더 좋고.”

“……치- 애냐?”

은우는 티가 나지 않게 잇새로 바람 소리를 내며 밉지 않게 승현을 나무랐다. 속마음으로는 승현을 못 말리겠다는 미묘한 미소를 지었지만, 은우는 그 어떠한 것도 그에게 내색할 수 없었다.

“어? 승현이 왔네.”

이제 은우의 동기들 중에서 승현의 존재를 모르는 이가 없어서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어, 어…. 승현아, 적당히 해. 너무 당기면 안 당겨지는 거야. 이렇게 밀기도 해야지.”

그가 손짓으로 밀어내는 시늉을 하며 농담처럼 말했더니, 은우가 무슨 소리 하는 거냐며 도끼눈을 뜨며 쏘아봤다. 승현은 그에게 웃음을 보이며 답했다.

“그런데요. 은우 형은 밀면 계속, 영원히 밀릴 거 같아서요. 저 지구 끝까지.”

“하긴 그렇기는 하겠다. 아무튼 대단하다, 대단해.”

“가만… 지구는 둥그니까 결국 다시 돌아오나요?”

“뭐? 하하- 그래! 맞다! 결국 돌아오겠네.”

그는 혀를 내두르며 은우와 승현을 스쳐 지나가더니 갑자기 생각난 듯이 뒤를 슬그머니 돌아보았다. 그리고 은우에게 손을 휘적휘적 흔들더니 큰 소리를 냈다.

“그럼, 은우야, 간다. 조별 발표 자료 조사해서 보자.”

“응, 연락할게.”

은우는 키에 비해 작고 가는 손을 그에게 맞춰 흔들었다.

“아아, 나도 형이랑 연락하고 싶다.”

승현은 은우의 핸드폰 번호는 뒷조사하면서 외우고 있었지만, 역시 이 또한 내색하지 않았다. 조금은 은우에게 기대하는 눈빛으로 눈동자를 반짝거리며 응시했는데, 은우는 너무나도 쉽게 그 눈빛을 무시했다.

“형… 무시하지 말구요. 누구는… 연락도 하지 못해서 이렇게 땡땡이치고 와야 하는데….”

“땡땡이 안 치면 되잖아.”

“아아, 치사하게…. 치이.”

투정 부리는 듯 칭얼거리는 승현의 그 목소리는 굵직한 남자의 형태로 어울리지 않게 애교를 부리며 울렸다. 은우가 아연실색하며 자신을 올려다보았다.

분명 어제 승현을 밀어냈는데, 은우는 오늘 다시 승현과 함께… 캠퍼스를 걷고 있었다. 승현의 말대로 어느새 지구 끝까지 밀려났다가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로 되돌아온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 아직 형 연락처 못 받아요?”

“응, 안 돼!”

단호하게 승현을 두고 은우는 잽싸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승현도 자신을 지나치는 은우가 이제 익숙해졌다. 은우가 상처받지 않게 옆을 지키며 은우의 뒤를 졸졸 쫓았다.

두 사람의 일상적인 그림이었다. 은우가 한발 먼저 걸어 나가면 뒤로 댕댕이처럼 꼬리를 숨기고 승현이 쫓았다.

걸을 때마다 가는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은우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며 승현은 어젯밤 내내 생각했던 것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만나 온 변은우라는 사람을 차근차근 되짚어 봤다.

소문은 진작에 헛소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동시에 은우의 가시 돋친 행동과 모습들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야”, “싫어!”, “안 돼”…. 은우가 자신을 향해 모질게 대하고 못되게 굴던 말들은 결국 은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한 말이라 생각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물며 그 소문 때문이라도 더욱더 은우는 예의가 바르게 행동했다.

은우는 입으로는 싫다고 했음에도 혼자 밥을 먹기 싫다는 자신을 기다려 주었으며, 어느샌가 손을 잡아도 거칠게 뿌리치지 않았다.

다만 그를 둘러싼 소문 때문에 늘 은우는 매사가 조심스러웠고, 소극적이었으며, 모든 것에 신중하게 움직였다. 대재벌의 자제라고 하기에는 너무 약해 보여서 지켜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  ✻  ✻

은우에 대해 더 알고 싶었다. 승현은 혼자서 할 수 있는 범위를 넘은 영역은 결국 아버지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서재로 가 방문 앞에 서서 노크를 하려고 손을 들었는데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와 비서의 대화 내용이 흐릿하게 들려 도둑처럼 귀를 문에다가 바짝 댔다.

「우리가 리조트 개발을 놓치면 바로 일품은 갈아탈 게 분명해. 지금이야 우리가 그 칼자루를 쥐고 있으니….」

「맞습니다.」

「만약 우리가 계약을 놓친다면 일품이 어디와 손을 잡을 거 같은가?」

심각한 이야기가 오갔다. 승현은 입술을 오므리며 눈을 번뜩였다. 은우와 관련된 이야기는 모두 귀담아들었다. 그러나 더 이상 서재 안에서 소리가 새어 나오지 않았다. 목소리를 더욱 낮춘 모양이었다.

승현은 노크를 하며 자신을 밝혔다.

똑똑똑.

「아버지, 저 승현이에요.」

「들어와.」

서재 안에는 한 대표가 역시 비서실장과 있었다. 승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주고받았다. 철없는 갓 스무 살이 된 청년을 연기하며 승현이 물었다. 원래는 이걸 물을 생각이 아니었다. 그러나 방향을 바꾸었다.

「어쩐 일이냐?」

「아버지, 저 궁금한 거 있어요.」

「음? 뭔데.」

한 대표는 전부터 승현을 눈여겨 지켜보았다. 승현은 배포가 첫째 아들인 승겸과 완전 반대로 겁이 없었다.

「저번에 열었던 기업파티에서요, 만났던 일품의 둘째 형이요.」

「아아, 은우 군?」

「예, 그 형이요. 그… 회사 주식 일부분을 상속받았다고 했잖아요.」

한 대표는 그런 이야기를 했던가 살짝 고개를 기울였지만, 했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그건 왜 물어?」

「그게 가치가 얼마나 되죠?」

한 대표는 책상에 깍지를 낀 손을 올렸다.

「가만있어 보자, 그게… 아마, 밝혀진 지분만 하면 일품 그룹의 1.7% 정도 될 거다. 그의 형이 일품 그룹 전무 보유 가치가 1.4%였지? 아마도.」

돈이 많은 줄 알았지만 상상을 초월한 금액에 승현은 움찔했다. 그만 혀를 가볍게 깨물고 말았다.

「그건 아마, 밝혀진 게 그렇고…. 차명이나, 부동산, 현물 그런 거 제외하면 더 많겠지? 그건 왜?」

승현은 잠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그리고 히죽 웃었다.

「아버지 그 리조트 개발, 리스크 없이 하게 해드릴게요. 기다리세요.」

서재를 나온 승현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얼굴이었다.

✻  ✻  ✻

은우에게서 반 발짝 떨어진 승현은 그의 동그란 머리를 보며 처음 만난 호텔 연회장에서 들었던 소문을 떠올렸다.

오메가인 은우가 알파를 꼬신다, 앞에서 고고한 척을 하고 뒤로는 음란한 짓을 하고 다닌다 등등.

자신이 들은 이야기들 이외에 은우는 얼마나 많은 악담을 들었을까. 이 모든 것이 애초부터 말도 되지 않았다.

은우가 오메가라면…. 미안한 이야기지만… 은우는 오메가 실격이다.

거의 한 달 남짓 승현은 은우를 곁에서 억지로 만났음에도 은우는 오메가로서 호르몬에서 풍기는 페로몬의 향기가… 단 한 번도, 단 한 차례라도 나지 않았다.

만약에, 정말로 만약에, 은우가 오메가가 아니라고 한다면 차라리 인정할 정도였다.

그런 오메가의 페로몬을 이용해 은우가 누군가를 꼬신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꼬시기는커녕 누가 꼬셔도 절대 넘어갈 타입도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섹스에 관한 지식은 일절 은우는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 아예 경험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승현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포근한 햇살을 맞으며 은우에게 살며시 말을 걸었다.

“형, 나 궁금한 거 있는데 물어봐도 돼요?”

“안 된다고 해도 물어볼 거 아니야?”

“어…. 어떻게 알았지?”

“……뭔데.”

씩, 승현은 웃으면서 은우에게 바짝 다가갔다.

“형은 왜 형 친구들에게 일품 그룹 차남이라고 말 안 했어요?”

“어?”

은우는 걷던 걸음이 멈추며 승현을 올려다봤다. 승현이 그런 걸 물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내 친구들이 다 알거든요. 나 A&C 집안인 거. 근데 형은 형 친구들도 모르는 거 같아서요. 그냥 신기해서?”

은우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조심히 말했다.

“…너는… A&C라는 재벌로 태어나서 좋아?”

“음, 딱히 나쁜 건 없잖아요?”

“그렇지, 나쁠 건 없지만… 또 좋은 건 없지.”

“…….”

은우는 다시 캠퍼스를 걸으며 조곤조곤 말했다.

“나는 그냥…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 내가 재벌 집에서 태어나지 않았으면 이런 일은 안 겪지 않았을까 싶어서.”

이번에는 승현이 말을 하지 못했다. 은우의 아주 작은 속마음을 엿보았다. 재벌로 태어난 오메가의 상성은 최악인 것을 승현도 알고 있었다.

흔히 재벌가의 자제라면 365일 기사 딸린 차를 타고 다녔을 테지만 은우는 어쩌다가 간혹 운전기사를 대동하고 다녔던 것을 떠올려 진중한 목소리로 승현은 은우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서 형은 평범하게 살고 싶어서 기사 딸린 차도 안 끌고 다니는 거예요?”

은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자신을 비아냥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재벌이라서 나쁘다고 해놓고, 그럴 땐 재벌이라서 좋네…. 사람 참 간사해.”

“그럴 때가 언제인데요?”

일부러 승현은 물었다. 은우는 우울한 미소만 보이더니 말을 하지 않았다.

재벌이면서 보통의 삶을 사는 은우에게 경호가 붙는다는 것은 조금 특별한 날에만 그랬다. 아마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이 발현되는 날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승현은 이 기세를 몰아 은우가 먹는 그 빨간약의 정체도 확인하고 싶었다. 은우가 먹는 그 빨간 약의 정체를 승현은 알아냈다. 오메가들이 먹는 호르몬 억제제였다. 그 종류는 수십 종에 달할 정도로 종류는 다양했다.

그리고 은우가 먹는 그 빨간 동그란 약은 오메가들이 먹는 약 중에서도 가장 독하다고 알려진 것이었다. 그로 인해 부작용도 무시 못 한다고 했다. 알파인 승현으로서는 그것을 이해할 수는 있어도 공감하지는 못했다. 오메가가 아닌 이상 알 수 없는 미지였다.

약의 부작용은 은우가 간혹 보이던 모습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었다.

식욕부진, 졸음, 어지럼증 등등, 그리고 주의 사항에는 복용에 주의하라는 표기까지 쓰여 있었다.

그러한 약들은 하루에 먹을 수 있는 약의 상한선이 있는데, 이걸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은우는 그 상한선을 지키지 않는다는 걸 알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승현은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내며 휘적휘적 긴 다리와 긴 팔을 이용해 은우의 길을 막으며 들뜬 목소리로 호감과 호기심을 표했다.

“그럼 형은 직접 운전 안 해요? 그럼 차가 없는 건 아닐 텐데…! 저는 운전하는 거 좋아하거든요.”

승현은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이었지만 은우는 표정이 굳어지며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형?”

그 순간 승현은 말실수를 한 줄 알고 눈치를 살피며 은우를 불렀다.

“…….”

은우는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이 없었다. 자신의 일상이 승현 때문에 서서히 무너지며 억울하게 자격지심까지 느끼게 했다. 평온하던 자신의 일상에 이상한 알파 하나가 꼬여 들었다. 그런데 알파로 태어난 그가 부러웠다. 숙인 고개를 들지 못해 더욱 아래로 숙였다.

눈앞에 나타난 알파로 인해 자신의 불우한 오메가의 삶이 도드라졌다. 태어나고 보니 오메가였다. 은우는 자신이 직접 선택할 수 있는 것이었으면 알파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욕심내지 않고, 적어도 베타로 태어나게 해달라고 했을 텐데…. 오메가로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건 아닌데….

자신의 의지와 선택권도 없이 불가항력에 의해 태어난 오메가는 하필 천만다행인 건지, 최악인 건지. 재벌 집에 태어났다. 그렇게 태어나게 한 신을 원망할 수도, 감사하다 여길 수도 없었다.

태어난 재벌 집은 그렇고 그런 재벌도 아닌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집안이었다. 오메가여서 최악인 상황이었고, 오메가여서 최상의 상황이었다. 집안의 재력은 오메가인 자신을 지켜주기 충분했으면서 동시에 재벌의 오메가로서는 멸시와 괄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집안에서 미운 오리 새끼처럼 때로는 온실 속의 예쁜 화초처럼, 곱게 탑 안에 갇혀 사는 공주님처럼 지냈다. 오메가로 완벽하게 발현되기 전까지는 은우는 오메가였어도 멋진 꿈을 꾸었지만, 그건 정말 꿈에 불과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사회 활동은 금지였고, 어떤 것도 선택할 수조차 없었다.

초중고 입학을 앞두고 언제나 집안의 비서실장님과 변호사가 학교로 찾아가, 협상이 이미 끝난 상태로 은우는 학교에 입학했다. 그만큼 일품이라는 거대 그룹이 가지는 입김은 엄청났다.

그로 인해 은우에겐 초중고 학창 시절을 보내면서 수련회, 수학여행 같은 일은 그림의 떡이었다. 친구들과 밤새 수다를 떨고, 늦은 밤 베개 싸움을 하고 또 귀신 이야기를 한다든가 선생님 몰래 가져온 게임기를 같이 한다든가, 그도 아니면 성(性)에 눈이 일찍 뜬 친구들이 몰래 야동을 돌려본다든가 하는 일은 소설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당연히 학교 측에서도 은우는 고운 화실의 꽃처럼 다루었다. 격한 운동을 하지 말라는 건 아니었지만 어느새 체육 시간에 거친 운동을 하는 거면 자연스럽게 은우는 뒤로 빠지게 되었다. 선생님에게 항의를 해봤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이런 일은 대학교를 들어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엠티는 딴 세상 이야기고, 신입생의 술자리는 당연히 참석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모든 자리에 불참하는 은우를 고깝게 보던 선배들이 있었지만, 거기에는 자신의 의지는 없었다.

어느 날 은우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 놓은 그날, 아버지인 변 회장의 감시는 지금보다 더욱더 철두철미해졌다.

그렇게 되자 은우도 아주 작은 반항심도 생겼고, 자신의 이 내성적인 성격을 고쳐 보고 싶어서 처음으로 대외적인 활동을 하려고 동아리에 들어갔다.

밴드부 활동이었는데, 처음에는 절대 안 된다고 노기충천했던 아버지는 학교도 등교하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에게 빌고 또 빌어서 딱 일 년만 하겠다고 빌었다. 형인 정윤까지 나서서 설득시켜 준 덕분에 겨우 일 년이라는 시간을 허락받고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늦은 밤까지는 동아리 활동을 하지 못했지만, 그때 은우는 처음으로 하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무대에 서 본다는 경험으로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을 많이 고칠 수 있었고, 은우는 자신감도 얻었으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설 수 있는 강단도 그때 생기게 되었다.

은우가 스무 살이 되고 나서 맨 처음 하고 싶어 계획했던 일은 운전을 배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여러 곳을 드라이브로 여행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용기를 내서 스무 살이 된 은우는 운전을 배우고 싶다고 했는데, 돌아온 아버지의 답변은 절대 안 된다는 말이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은우는 운전대를 이 손으로 잡아 본 적이 없었다.

스물네 살이 된 지금도 집에서는 자신을 꽁꽁 감춰 놓고 불면 날아갈까, 만지면 깨질까 취급 주의 표시를 부착해 놓은 귀중품처럼 다루었지만, 가끔은… 아주 하찮은 오메가라서 멸시하는 것이 아닌가 헷갈릴 때가 있었다.

승현이 아주 가볍게 물은 ‘운전 안 해?’의 의미에는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은우의 속에 숨겨져 있었다.

“은우 형… 내가 뭐 또 잘못했어요? 미안해요.”

승현이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그런 거 없어.”

은우는 전공 책을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관절의 손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은우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새삼 알파로 태어난 승현이 부러워지자 자신의 처지가 처량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응, 운, 전… 안 해.”

못 해.

못 하는 것이지만, 은우는 자신이 안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해야 아주 조금이라도 덜 억울할 것 같았다. 점점 은우는 화가 났다. 시선을 사선으로 내리깔고 어깨를 웅크렸더니 왜소한 몸이 더 작아졌다. 빠르게 승현을 피해 발걸음을 옮겼다. 승현은 잘못한 게 없다는 걸 알았지만, 또 자신의 이 비뚤어진 못난 마음을 그에게 못되게 쏟아낼 것 같았다.

은우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며 승현은 순간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말실수를 한 것 같아서 미안한 얼굴을 했다.

“형, 그럼 나하고 드라이브 안 갈래요?”

“안 가.”

“에이, 형. 그러지 말구요.”

은우는 그렇게 생각하지 말아야지 하면서 승현이 부러웠다. 저렇게 해맑고… 또… 자신이 가지지 못한 모든 걸 가지고 있었다.

“너 볼일 다 봤으면 빨리 가.”

딱딱한 말투가 흘러나왔다.

“볼일 다 안 봤죠. 형이랑 밥도 못 먹었고… 이제 추가까지 됐네. 드라이브도 못 했는데요?”

은우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자신과 너무 달라서… 승현이 부러웠다.

“그러지 말고…. 은우 형, 가요. 내가 좋은 데 알고 있으니까. 기분 풀어 줄게요.”

승현은 짓궂은 아이처럼 은우의 손목을 억세게 잡았다. 은우의 손을 잡으려고 했는데, 작은 손이 완전히 덮인 건지 가느다란 손목을 잡게 되었다.

은우는 자신의 평화로운 일상에 돌을 던져 평화를 깨뜨리는 그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잡은 손에 강압적인 힘이 들어가 성큼성큼 걸어 학교 주차장 쪽으로 향해 자신은 끌려가고 있었다. 선량한 얼굴을 한 그는… 자신의 안전을 위협하는 야만인이었다.

날카롭게 은우는 소리쳤다.

“야!”

빽, 목청이 갈라지면서 히스테릭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의 힘에 무기력함을 느끼며 끌려가는 은우의 인상이 험악하게 찌푸려졌다. 손을 빼내려고 해도 승현의 힘이 더 센 것이 문제였다.

하지만 승현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제 이 정도는 은우에게 괜찮다고 여겼다.

“그럼 내가 집에 데려다줄게요. 어차피 같은 동네니까… 편하게 타고 가요.”

은우는 팔을 이리저리 비틀어 빼내려 하는데 승현은 더욱더 꽉 잡았다. 맥없이 질질 끌려가는 듯한 모양새는 그리 좋은 모양새가 아니어서 화가 난 은우의 표정이 예민해졌다.

“……이거… 놔, 좀!”

잔뜩 짜증과 화가 담긴 은우는 사나운 고양이처럼 발톱을 드러내고 자신의 영역을 침범한 승현에게 적의를 드러냈다. 승현은 기어이 자기가 몰고 온 차 앞까지 끌고 와서야 자신의 손을 놓아주었다.

“너 왜 자꾸 귀찮게 내 앞에서 알짱거려? 분명 어제 말했지? 거슬린다고. 진짜 너 귀찮거든? 똑바로 다시 말해 줄게. 다시 너 안 보고 싶으니까 아는 척도 하지 말고, 내 앞에 안 나타났으면 좋겠어. 너 정말 마음에 안 들고, 정말 싫어. 꼴도 보기 싫고, 너 그림자도 보기 싫고, 이렇게 네 멋대로인 것도 싫어, 그냥 네가 다 싫어.”

마음 같아서는 한 대 주먹으로 갈겼으면 싶었지만, 승현에게는 먹히지도 않겠지. 앞뒤 생각 없이 은우는 숨 쉴 틈도 없이 승현에게 쏘아붙였다. 말이 맞는지도 안 맞는지도 몰랐다. 얼굴이 빨갛게 된 은우는 몸을 돌렸다. 승현이 매번 자신을 향해 좋아한다느니 사랑한다느니 따위의 말을 할 때마다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었다.

은우는 아무것도 몰랐다.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아 본 적도, 한 적도 없었다.

승현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사실이라면 은우가 지금 그에게 뱉은 말은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 말이겠지…. 하지만 은우는 후회 없는 얼굴로 홀연히 그곳에 승현을 버려두고 빠져나갔다.

승현에게 강제로 붙잡혀 버린 손목이 뻐근해서 조물조물 문지르며 풀어 주는 은우의 얼굴빛은 이제 하얗게 질려 굳어 있었다. 승현의 힘도, 승현이 내뱉는 말도, 웃는 얼굴도 모두 은우는 겁이 났다.

승현은 멀어지는 은우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의뭉스럽게 바라보았다.

“쳇.”

어느새 승현의 얼굴은 은우에게 향했던 선량한 얼굴이 아니었다. 가장 포악한 야만인의 얼굴을 하더니 입맛을 다시며 혀를 찼다.

키가 그래도 175 정도 되면서도, 키 160 정도에 어울릴 법한 작은 손과 똑같이 얇은 손목을 가진 은우를 아주 잠깐 취했던 손을 움켜쥐었다가 폈다. 말랑한 손목과 손이 느껴졌다. 승현의 모습은 위협적으로 비쳤다.

이쯤이면 은우의 철옹성 같은 방벽이 무너졌으리라, 경계를 푼 은우의 눈빛으로 마음의 문을 열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은우는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안에 숨어 있었다.

결국 또 판단 미스였다. 조급했던 자신의 실수였다. 은우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승현은 점으로 멀어지는 은우를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하늘거리며 춤추는 은우의 머리카락이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선하게 그려졌다.

대체 은우에게 무슨 일이 있었기에, 고작 이 정도로 이만큼이나 예민하게 구는 걸까. 승현은 처음부터 다시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이쯤이면 포기가 될 법도 한데, 승현은 포기는커녕 점점 더 안달이 났다.

✻  ✻  ✻

또다시 며칠이 지났다. 은우에게 있어 다행하게도 그날 이후 승현은 얼굴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다행?

그리고 다시 일주일이 지났다. 매일같이 찾아오던 승현에게 모질게 대했던 것이 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달 남짓 승현과 함께하는 동안… 변한 건 은우 자신이었다.

이상하게 매일 좋든 싫든 마주친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되자 스스로 초조해지기까지 했다.

매일 승현이 강의실 앞에서 기다리던 것을 아는 동기들은 하나같이 승현이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이 이상해서 은우에게 물었다.

“뭐야, 오늘도 승현이 안 왔네?”

“둘이 설마 싸운 거야?”

은우는 더듬거리며 대충 얼버무렸다.

“응? 아, 아니… 싸우…기는… 모, 몰라. 바쁜가 보지 뭐. 나도… 오, 왜 안 왔는지.”

속마음은 조금 아쉽다고 해야 하나, 그립다고 해야 하나.

은우는 그런 생각이 들다가 고개를 빠르게 내저어 속마음을 부정했다.

행여나 정말로 이제 자신에게 찾아오지 않을까?

승현이 신경 쓰여서 은우는 예민해졌다. 불안함과 초조함이 같이 일었다. 두 번 다시 찾지 않을까 봐…. 이유 없는 공포감을 느꼈다.

승현을 향해 날카롭고 아픈 말을 내뱉으며 밀어냈던 날이 선 말은 도리어 자신에게 비수가 되어 날아와 꽂히더니 상처를 냈다. 아린 마음이 영 편치 못했다.

오늘은 올까? 아니면 내일은 올까? 매일 찾아왔던 승현이 자신에게 발걸음을 끊은 지 이 주일째였다. 이 주일이 지나는 동안 은우는 그날 자신이 너무 못되게 말했나?

후회가 되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렇지 않아.

은우는 자기 자신을 다독거렸다. 그를 그렇게라도 밀어내지 않았다면 분명…. 그에게 보기 좋게 휘둘렸을 거로 생각했다. 습관적으로 은우는 옆에 놔둔 가방에서 약통을 꺼내 달깍, 약을 꺼내 입속으로 넣었다.

“후우…….”

생수병을 꺼내 약과 함께 삼킨 입에서 길게 한숨이 나왔다. 머리가 복잡했다. 머릿속에 복잡하게 얽힌 승현의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자신의 마음 한구석에서 울리는 감정이 낯설었다.

그건 승현이 보고 싶다는 감정이었다.

미쳤지, 내가. 무슨 생각을.

은우가 자기 자신을 책망하는데, 그 감정은 고개를 숙이기는커녕 더욱 커졌다.

「너 정말 싫고, 귀찮고, 다시는 안 봤으면 좋겠어.」

자신이 못되게 내뱉은 말이 귓가에 울렸다. 작은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은우는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속으로 합리화를 했다. 불편한 마음으로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제 삼 일이라는 기간이 더 지나갈 때였다.

은우는 고개를 들어 시계를 힐끗거렸다. 넓은 강의실에 앉아 책상에 턱을 괴고 있던 은우는 땅이 꺼지기를 바라는 듯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일상적인 루틴인 것처럼 가방을 뒤적이며 약통을 찾았다.

학교 오기 전, 집에서 먹었다는 기억은 사라져 나지 않았다. 가방 속의 잡다한 것들을 뒤적이며 조그마한 하얀 약통이 손에 잡혔다. 딸깍, 붉은 피를 연상시키는 원형의 알약을 꺼내 입술로 물었다.

물을 어디에다가 두었더라.

승현이 자신의 앞에서 사라진 지 꼬박 열 손가락을 다 접고도 모자란 날이 지났다. 이렇게 떨어져 있고 보니 이미 승현에 대한 은우의 마음은 보고 싶다는 감정으로 변한 채였다. 그럼에도 승현은 나타나지 않았다. 붉은 손자국을 남긴 흔적은 사라졌는데 마음은 변해 버렸다.

마음만 변한 채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일상으로 돌아왔다.

가방 안에 넣어 둔 생수병을 꺼내 입술로 문 약과 함께 목 뒤로 삼켰다. 자신의 마음도 같이 씻어 삼키려고 했다. 문득 책상 위에 펼쳐 놓은 전공 책에 눈길을 주었다.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업이 될 것 같지 않은데.

약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며 은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승현 때문에 심란하다고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책과 함께 짐을 빠르게 정리하고 강의실을 나서는데 동기인 명진이 놀란 소리로 은우에게 말을 걸었다.

“헐, 뭐야. 변은우, 설마 땡땡이?”

“응…? 응…. 오늘은 좀 피곤해서.”

“너가? 살다가 너가 땡땡이를 치는 걸 볼 줄은 몰랐다.”

“……뭐래, 그럼 내일 봐.”

은우는 흐릿한 미소로 놀리는 그를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며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적막한 복도를 걸으며 오늘도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 대한 합리화를 시작했다. 지금 당장 은우는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

하필 제일 졸린 수업이라 버틴다고 버텨질 과목이 아니야.

약 때문에…. 그렇게 자기 자신에게 끊임없이 말했다. 마음속으로 승현을 생각할 틈을 만들지 않으려 했다. 하루 종일 입에 약을 달고 사는 탓에 가뜩이나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조금 더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고 채찍질했다.

계단을 내려가기 직전 은우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약 먹은 시간을 체크해서 다시 네 시간 뒤에 울리게 조정했다. 이미 습관처럼 시도 때도 없이 먹는 약 때문에 알림은 무용지물이었지만, 그럼에도 은우는 그 일말의 불안도 용납하지 않았다.

언제 먹은 약 기운이 번지는 건지 모르게 은우는 발을 내딛는 것도 나른해서 걷기조차 힘들었다. 나른한 몸으로 하품을 수도 없이 오 초마다 쏟아냈고, 그때마다 몸이 녹아 바닥으로 흘러내릴 것 같은 기분은 아찔했다.

당장 쓰러져 길바닥에서 잠을 자라고 해도 잘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이 경험은 겪어 보지 못하면 알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었다.

“하암…….”

손등으로 입가를 가리며 작은 동그라미를 그려 하품을 한 은우는 축축 처져 늘어지는 발걸음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집으로 가서 쉰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려 반응이 느려지는 몸뚱이는 눈꺼풀의 반응도 느려졌다. 툭툭, 흔들리듯 걷는 은우의 몸이 무거웠다.

학교 주차장으로 발길을 옮기면서 다시 하품을 연거푸 세 번을 하니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손가락으로 눈가를 슥슥 문대 닦으며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그런데 마치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이 커다란 경적이 울렸다.

빵-!

갑작스럽게 들릴 줄은 몰랐던 탓에 순간적으로 은우는 몽롱했던 정신이 깨어나며 몰려오던 잠도 순식간에 깨어졌다. 은우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기다려 마지않던 승현이 이 주 만에 모습을 드러낸 채 서 있었다.

“어?”

승현은 등 뒤에서 누가 몰래 납치해 가도 모를 표정으로 걷는 은우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나른한 고양이가 무방비하게 경계도 없이 길을 배회하면 위험하다는 걸 모르는 듯했다. 운전석 차 문에 등을 기대고 서서 창문 속으로 손을 뻗어 운전대의 클랙슨을 힘주어 한 번 더 눌러 큰 ‘빵-!’ 소리를 울렸다.

“너…….”

은우의 눈이 점차 커졌다. 얼굴에 아주 조금의 반가움과 보고 싶었다는 감정이 피어나며 여태껏 스스로 합리화했던 방벽을 무너뜨렸다. 애써 무표정하고 차분한 발걸음으로 느릿하고 가볍게 승현에게 향했다.

우습게도, 그동안의 몸에 밴 습관이 몸을 그렇게 움직이게 했다.

깜박거리는 눈이 오랜만에 만난 승현을 응시했다. 여전히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에 커다란 강아지처럼 무해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은우 형, 나 안 보고 싶었어요?”

“…….”

보고 싶었는데, 제 속도 모르고 싱글벙글 웃는 얼굴을 한 승현을 보며 은우는 볼 안쪽 살을 가볍게 어금니로 물어 짓이겼다. 보고 싶었다고 말할 용기는 없어서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기만 했다.

“음, 내 질문이 어려운가?”

넉살 좋은 승현은 은우에게서 대답이 없자 자문했다.

여전히 은우는 우물쭈물하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보고 싶었다? 이건 절대 말할 수 없었다.

왜 이제 나타났어? 나타나지 말라고 했던 건 자신이었다.

왜 다시 내 앞에 나타났어? 또 시비 거는 것도 아니고….

아니면….

그때는 화내서 미안해.

입술만 꾹꾹 씹으며 은우는 멍한 생각에 빠졌다.

“은우 형? 나 앞에 두고 무슨 생각 해요?”

골똘하게 생각에 잠긴 은우를 보던 승현은 작은 그의 얼굴 앞에 손바닥을 흔들어 보였다.

“어? 어…. 아니, 아니야, 아무것도.”

“흐음, 그날 나한테 그렇게 화내 놓고 미안했어요?”

“응……? 어? 아, 어…. 그게… 미안.”

승현은 순진한 얼굴을 자신에게 보여 주었는데 은우는 그의 눈동자를 마주치지 못해서 눈동자를 굴리며 시선을 피하기만 했다. 개미가 기어갈 듯 조용한 목소리로 사과하는 은우의 얼굴은 창피함으로 발그레해졌다.

“푸하하….”

사심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다는 얼굴을 한 승현은 크게 웃었다. 밝은 빛으로 빛나는 승현을 쳐다보는 자신을 향해 승현은 반짝거리며 진지한 얼굴로 거절하기 힘든 부탁을 했다.

“정말 미안하면, 그럼… 나한테는 되게 사소한 부탁 하나 들어줘요.”

“뭐……?”

“미안하다면서요. 그러니까 매일 하루에 나랑 십 분만 만나 줘요.”

“내가…! 왜…….”

은우에게서 고슴도치처럼 온몸을 뒤덮는 가시가 튀어나오려다가 목소리가 작아졌다. 금방 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한 일이 떠올라 뾰족한 가시는 사라졌다.

“너무 늦은 시간은 형이 싫어할 거니까 한… 아홉 시 어때요? 아홉 시에 정확하게 벨 누를 테니까 십 분만 만나 줘요.”

“내 말 듣긴 했어? 내가 왜… 너를 만나?”

몸을 웅크린 고슴도치는 방어하는 법밖에 몰랐다.

“내가 집 앞으로 갈게요.”

“야! 그러니까 내가 왜 너를 만나냐고!”

결국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려는 승현을 향해 은우는 뾰족한 송곳처럼 찌를 듯이 소리쳤다.

이내 승현은 한 번도 지금까지 보여 주지 않았던 진지한 사내의 얼굴을 보여 주었다. 승현이 보여 주는 얼굴은 은우 자신과 전혀 다른 느낌을 가진 남자의 빛이었다.

“나, 은우 형… 형이 너무 좋은데…….”

참, 꾸준히… 승현은 자신을 향해 좋아한다고 표현했다.

승현 때문에 변해 버린 자신이 있었다. 눈앞에서 보이지 않았던 열흘 동안의 시간이 은우 자신이 변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그의 마음을 받아 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대신 변해 버린 속마음만큼 은우의 얼굴은 승현을 대하던 표정과 달리 미묘하게 움찔거렸다.

줄곧 승현에 대한 생각과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변한 것이 얼굴에 드러나 버리지 않았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

대답이 없는 은우에게 승현은 소년 같은 순수한 매력을 발산하며 조곤조곤 말하였다.

“나도 어떻게 해야 형이 나를 안 싫어하고 받아 줄지 모르겠단 말이에요. 형, 나 혼자 형 좋아하는 거 맞는데. 조금만, 나한테 기회를 줬으면 좋겠어서요.”

“…….”

“내가 형보다 어린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형에 비하면 훨씬 철없기도 하고. 그렇지만 나도 형한테 근사하고 멋진 남자라고 선보이고 싶어요. 이렇게 내가 이만큼이나 믿음직스럽고, 듬직하고, 이만큼이나 남자다운 사내다! 이런 모습이요.”

은우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승현은 보았다. 늘 그를 하나라도 빼놓지 않고 관찰하고 지켜보기 때문에 그 작은 미묘한 변화를 감지했다.

“그러니까, 음…. 조금만 이성적으로 생각해 봐요. 형, 뜨거운 커피를 불어서 식혀 먹을 수 있는 시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함께 마주 보고 밥을 먹을 수 있는 시간도 아니잖아요. 하루에 딱 십 분이요.”

“…….”

무언가를 하기에 가장 애매한 시간이었다.

십 분, 영화 보기 전 십 분의 광고 타임은 십 년 같은 시간, 버스를 기다리는 십 분의 시간은 열 시간 같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며 십 분만 더 자겠다고 외치는 십 분은 십 초보다 더 짧은 시간이었다.

그 정의 내리기 애매한 십 분의 시간,

승현은 그 십 분의 시간을 자신에게 달라고 하고 있었다. 은우는 한쪽 어깨에 매달린 가방 끝을 움켜잡았다. 차라리 삼십 분의 시간을 달라고 했으면 딱 잘라 거절했을 텐데, 너무 애매해서 은우는 거절도, 응낙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십 분 동안 뭐 할 건데?”

“그냥… 지금은 아무 생각 안 나요. 생각해 보구요. 그럼 만나 주는 거예요?”

“시… 싫다면?”

“딱 한 달만……. 형, 이제 그 뒤로도 형이 나 싫다고, 역시 저는 아닌 거 같다면, 꼴 보기도 싫다면, 그때는… 슬프겠지만 안 귀찮게 할게요. 그때는 형 놓을게요.”

그렇게 말하는 승현의 목소리와 얼굴이 진지했다. 근 한 달 전에 안 귀찮게 하겠다고 했던 때와 다른 진지한 남자의 얼굴을 했다. 그의 진지한 눈빛을 보자 은우는 또 망설여졌다.

승현처럼 앞뒤 생각 없이 자신도 ‘예스나 노’를 외치고 싶었지만, 이것저것 생각해야 할 것이 많았다.

한 달의 시간, 단순히 계산해서 삼십 일로 친다면 삼백 분의 시간이었다. 다 합쳐도 하루도 아니고, 고작 다섯 시간의 만남.

고작 다섯 시간…. 그 다섯 시간으로 무엇을 하겠어.

“……그래, 알았어.”

은우의 입술이 움직여 허락이 떨어졌다. 그러자 승현은 마치 전투에서 이긴 전쟁 영웅처럼 주먹을 불끈 쥐더니 환희에 찬 얼굴로 우렁찬 목소리를 냈다.

“그럼 오늘 저녁 아홉 시에 딱 집 앞으로 갈게요! 알았죠? 일 초도 안 늦을 테니까!”

승현의 목소리가 들떠서 가라앉지 않았다. 은우가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승현을 보며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형, 저는 이제 십 분 동안 뭘 해야 하는지 머리 좀 굴려서 생각하고, 준비해야 하니까…! 오늘은 밥 같이 못 먹겠네! 형은 편안하게 하고 나와요, 난 멋있는 차림 할 테니까. 무슨 타입이 좋아요? 상남자? 젠틀? 기생오라비? 연예인? 뭐든… 아! 생각났다. 그럼 형, 갈게요!”

“어?”

승현이 후다닥 차에 올라타는 모습을 보며 오히려 당황해서 소리를 은우가 내었다.

“형, 이따가 만나요.”

승현은 은우가 가까이 오지 말라는 선을 넘지 않았다. 승현의 이런 모습은… 다른 알파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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