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선량한 야만인
아버지인 변 회장과 형은 정윤은 삼 일 전부터 유럽으로 출장 중이었고, 엄마는 문화 재단으로 바빴다.
저녁 일곱 시가 되면 은우는 저녁을 먹었다. 똑같은 일상의 패턴대로 은우는 움직였다.
오늘도 가족들은 너무 바빠서 은우 혼자였다. 온 가족이 함께 식사를 먹을 때도 있지만, 워낙 바쁜 가족들은 얼굴 보기 참으로 힘들었다. 형은 형대로, 아버지는 또 아버지대로, 어머니도 어머니대로. 유일하게 이 집에서 식탁을 지킨 건 은우였다.
“잘 먹었습니다.”
푸짐하게 차려진 식탁이었지만, 조금씩 맛을 보던 은우는 반쯤 먹다 만 그릇을 두고 일어났다.
“아니, 오늘도 왜 남겼어? 맛이 없어? 라면이라도 끓여 줄까?”
집에서 주방일을 봐주는 아주머니가 자리를 일어나는 은우를 보며 총총걸음으로 식탁에 가까이 와 남겨진 음식들을 보며 속상해하는 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아주 맛있었어요. 근데 제가 별로 배가 안 고팠거든요.”
은우는 걱정해 주는 아주머니를 보며 환한 미소로 답하며 작은 접시에 담긴 젓갈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형이 아주 좋아할 거예요. 짜지도 않고 딱 맛있어요.”
“그럴까?”
“그럼요. 형 출장 갔다 오고 그날 바로 내어주면 게 눈 감추듯 먹으면서 밥 두 그릇도 먹을걸요?”
은우의 말에 아주머니는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힐끗 은우는 식당에 놓인 시계를 향해 곁눈질로 시간을 확인했다. 긴 바늘이 삼십 분을 향해 가는 것을 보았다. 천천히 식당을 나와 계단을 지나 2층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곰곰이 은우는 생각에 잠겼다.
승현이 정말 올까? 지금까지 봤을 때, 올 거 같은데….
확신이 서지 않았다. 미묘하게 선을 지키려는 승현의 모습이 뇌리에 남았다. 내적 갈등이 일었다가 은우는 고개를 세차고 빠르게 흔들어 생각을 털어내려 했다. 그 때문에 하루하루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아서, 개운해지고 싶어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맞아, 또 날 놀린 거겠지…. 그래… 그런 거야. 무슨… 에이.”
은우는 현실을 외면하며 요란스럽게 편안하게 잘 준비를 하더니 옷도 편안한 차림새로 갈아입었다. 그러다 켕기는 마음 때문에 시선이 시계로 향했다.
여덟 시 삼십 분.
신경 쓰지 말자.
그런데 오늘따라 시계로 시선이 더 자주 향했다. 왜 이렇게 시간이 느리고 더디게 흘러가는지, 괜히 초조해지기 시작하니 손톱을 물어뜯었다. 심장이 두근두근하며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그리고 문득 승현을 떠올렸다.
승현이라면, 승현이라면….
무조건 온다는 답이었다.
침대에서 내색하지 않으며 잘 준비를 했던 은우는 벌떡 일어나 창문으로 다가가 어두운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커다란 창문 너머로 넓게 펼쳐진 광경은 조경이 예쁘게 된 정원이었다.
“아, 바보… 멍청이….”
순간 은우는 자신을 향해 중얼거렸다. 집에서 대문까지 거리가 멀어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까먹고 있었다. 뭐든 조심하게 되는 몸짓으로 은우는 방문을 열고 1층으로 내려갔다. 다시 획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았다.
여덟 시 사십 분.
인터폰 앞에서 카메라를 확인하는 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하며 손을 뻗기를 여러 차례.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한 은우는 시계를 다시 힐끔거렸다.
여덟 시 사십오 분.
더럽게 시간이 더뎠다. 결국 인터폰의 카메라를 누르니 집 앞 광경이 뿌연 카메라에 잡혔다. 화면에는 인정하지 않으려 했던 승현의 모습이 있어서 은우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냈다.
“어…? 진짜… 왔네.”
카메라에 잡힌 화면으로 보이는 승현의 모습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시계를 보고 있었다.
「아홉 시 ‘땡’ 치면 벨 누를게요.」
아홉 시에 온다고 해서, 승현은 그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소리도 없는 화면 속에서 승현은 자꾸만 핸드폰의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면이 까맣게 꺼지면 은우는 화면을 켜고, 다시 꺼지면 켜는 행동을 반복했다.
“…바보 같아, 너.”
자신도 바보 같았는데, 화면 속의 승현도 바보 같아서 은우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화면 속의 승현을 바라보았다.
강아지처럼 발을 동동 구르며 시계만 십 초 간격으로 보는 승현은 벨을 누를 생각인 건지 인터폰 앞에서 떨어질 줄 모르고 있었다. 키 190을 훌쩍 넘기는 거구를 가진 체격으로 댕댕이 같은 면을 보여주는 승현이… 이제는 싫지 않게 되었다.
아홉 시가 되기 전 십 분의 시간은 누구에게는 아주 느린 시간이었고, 누구에게는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8:59에서 9:00로 바뀌는 순간.
띵동-
벨 소리에 은우가 화들짝 놀랐다. 너무 화면을 집중해서 보고 있었던 은우가 시계를 바라봤다. 어느새 약속한 아홉 시가 되었다.
“흠, 흠.”
헛기침하며 은우는 평소와 자신은 전혀 다르지 않다는 자기 암시를 걸며 차분하고 도도한 자세로 현관문을 나섰다. 저택이라 불리는 큰 집을 빠르게 걸어 높고 무거운 대문을 열었다. 육중한 철문은 쉽게 열렸고, 그 너머에는 승현이 있었다.
“…….”
철문을 빼꼼하게 연 은우는 나오다가 그만 멈칫하고 말았다. 승현의 모습이 카메라에 잡힌 모습과 너무 달랐다. 저화질 속의 승현을 제대로 담지 못한 것이었다. 은우는 무례하고 실례인 걸 알면서도 승현을 위아래로 길게 훑어보며 소리를 냈다.
“어디 갔다 왔…어? 옷이… 왜 이래?”
“오늘의 컨셉은 배우 스타일입니다. 어때요?”
“으, 응…. 그러네. 배, 배우 같네.”
승현은 때깔 좋은 멋진 슈트로 한껏 멋을 뽐내며 서 있었다. 보통 승현의 나이에는 슈트를 입는다는 것은 교복 같은 느낌인 데다가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가 꼭 아버지의 양복을 빌려 입은 것처럼 어색한 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승현은 제 몸에 꼭 맞는 옷차림새였다.
정말로 은우는 승현의 모습이 어디서 많이 본 느낌이었다. 아주 잠깐 생각하던 은우는 불이 번쩍하며 켜지며 생각이 떠올랐다.
딱 그 말대로였다. 권위적인 배우들의 영화 시상식에서 볼 법했다. 그것도 몹시도 화려한.
“형, 어때요? 나 좀 멋지죠? 오늘 은우 형 정식으로 만나는 날인데 멋지게 차려입어야죠. 기념비적이며 역사적인 날인데.”
다시 한번 은우는 그를 천천히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다 시선이 우연히 자신을 내려다보게 되었다. 막 자려고 편하게 차려입은 얇은 후드 티셔츠에 품이 넓은 바지 차림. 승현과 너무 비교되어 은우는 민망해졌다.
너무 편하게 있다가 나온 거 같아서 은우는 소매 끝을 살짝 잡아당겨 소매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숨기며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근데 형, 아까 낮에도 귀여웠지만… 이렇게 오늘 밤엔 유난히 더 귀엽고 사랑스럽네요.”
승현도 은우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능구렁이처럼 말하자 은우는 더 뒤로 움찔 물러났다.
“뭐…? 그, 그런 말… 하, 할 거면 가.”
금방 창피해져서 은우는 철문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아, 그런 것도 싫어요? 그럼 그 말은 취소. 없던 거로 해요. 형, 못 들은 거예요.”
하지만 은우는 얄짤없었다. 퍼뜩 승현은 시계를 황급하게 보았다. 그리고 놀란 목소리로 손사래를 치면서 말하였다.
“아아! 형! 아직 십 분 안 지났어요! 아직… 팔 분 더 남았다구요!”
“알…았어.”
은우는 속으로 그가 귀엽다고 느꼈다. 무덤덤하게 약속은 지킨다는 어투로 말한 은우는 속마음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이미 저 자신은… 속마음을 숨기는 데 탁월했다. 몸을 틀어 똑바르게 한 은우는 자신보다 월등히 큰 승현을 향해 태연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그럼 그 남은 칠 분 동안 뭐 할 거야?”
“그냥 이렇게 있으려구요.”
“뭐?”
“사실 형한테 오늘 제가 형을 얼마나 좋아하고 사랑하는지 구구절절 읊으려고 했는데, 형이 아주 짤 없이 들어가 버리려고 하는 통에… 계획이 없어져 버렸어요.”
승현은 가벼운 한숨과 함께 어깨를 으쓱했다.
“거기다 아까 가만히 생각해 봤는데… 십 분 동안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구요. 아까 너무 급한 마음에 시간을 짧게 얘기했다니까요. 지금 엄청나게 후회 중이에요. 한 이십 분은 달라고 할걸! 이라고, 지금까지도 후회 중이에요.”
푸훗, 은우가 이제는 참지 못하고 손을 가린 소매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러니까 형, 선심 써서 시간 내일부터 이십 분으로 늘려 주면 안 돼요?”
“뭐? 절대 안 돼.”
“또 뭘… 절대까지. 그렇지만 와- 은우 형.”
승현은 큰 눈을 끔벅끔벅하며 멍하게 은우를 보며 중얼거렸다.
“나요, 형 웃는 거 처음 봤어요. 아니… 저를 향해서 웃는 거 처음이에요. 알아요?”
“……뭐…? 그, 그랬었나?”
고개를 끄덕이는 승현은 은우를 따라 한답시고 손가락으로 미간에 주름을 인위적으로 만들며 답했다.
“이렇게 여기 주름 잡히고 맨날 도끼눈만 했죠.”
은우는 잠시 기억을 되짚어 봤다.
승현이 앞에서 웃은 적이 없었던가를 떠올려 봤는데…. 그런데 자신의 기억에도 늘 승현에게는 화내는 모습이었다는 것밖에 머릿속의 기억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얼굴에서 어색하게 웃음이 사라지고 있었다. 그에게 웃음을 드러낸다는 것이 조금은 헤픈 사람처럼 보일까, 뒤늦은 걱정이 되었다.
은우를 보며 넋이 나간 사람처럼 승현은 은우를 눈도 깜박거리는 것조차 잊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이 응시했다.
그리고 괜히 승현의 시선에 안절부절못하는 건 은우였다. 눈을 도대체 어디에다 고정해야 할지 몰랐다. 이제 그만하자고 하려고 은우는 입술을 움찔거리는데 승현이 먼저 선수 쳤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뭐?”
“아홉 시 십 분이에요.”
승현은 칼같이 핸드폰의 화면에 떠오른 시간을 은우에게 보여 주면서 말했다.
“아, 아… 응.”
“이거 되게 아쉽네…. 감칠맛 나서 죽겠어요. 그래도 내일 있으니까, 참을 수 있어요. 내일 올게요.”
“어? 어, 어… 응….”
“형 나 되게 착하죠? 십 분 칼같이 지키고…. 그럼 갈게요. 내일 봐요.”
“어… 어, 응…. 그래, 잘 가.”
승현은 뒤돌아서 자신이 몰고 온 차로 향하더니 몸을 실었다. 그리고 승현은 미련도 없는 사람처럼 천천히 사라졌다.
오히려 미련이 남은 건, 은우였다.
은우가 물끄러미 멀어지는 차의 뒤꽁무니를 보다가 고개를 돌려 집으로 들어갔다. 백미러로 은우의 모습을 관찰하던 승현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서늘한 미소였다.
✻ ✻ ✻
그렇게 시작된 십 분의 데이트라고 하기에는 너무 짧은, 그냥 만남이었다. 다음 날에도 어김없이 승현은 저녁 아홉 시에 벨을 눌렀다. 다만 은우는 그 아홉 시의 시각의 개념이 아직 확립되지 않아 아까부터 편안한 자세로 책을 보고 있었다.
똑똑-
은우는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다. 아까 분명 일곱 시 반이었는데 보고 있는 책에 너무 빠져든 탓에 승현을 만나러 준비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시선을 책에서 떼지 않은 채 은우는 노크 소리에 반응했다.
“네.”
“은우 학생. 누가 찾아왔는데?”
집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빼꼼하게 열더니 말했다.
“네? 누가요?”
퍼뜩 시계를 돌아본 은우의 얼굴은 놀라 사색이 되었다. 시침의 바늘은 정확하게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아…! 네, 지금 나갈게요.”
손에 들린 책을 대충 테이블 위에 놓고 아주머니를 지나쳐 방을 나섰다. 은우의 빠른 발걸음이 달려 대문으로 향했다. 대문에 다다른 은우는 육중한 철문을 열려고 했는데, 잠시 자신의 상태를 내려다보며 확인했다.
분명 준비하려 했는데 어제와 다를 바 없이… 너무 편안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미 돌아가 옷을 갈아입기에는 더욱 늦어질 것이 자명해 하는 수 없이 은우는 대문을 열었다.
“형, 왔어요?”
승현이 해맑은 얼굴로 자신을 반겼다. 은우는 승현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위축되었다. 승현은 오늘도 단단히 꾸미고 온 모양이었다.
반대로 자신은 편안한 차림이어서 팔뚝을 들어 접으며 다른 팔뚝을 살살 문질렀다. 하얀 티셔츠에 하늘색 카디건을 걸친 자신과 비교가 되었다.
은우는 말로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내일부터는 옷을 좀 차려입어야겠다는 생각을 속으로 했다.
“그래서 오늘은 뭐 할 거야?”
속마음 때문에 그런지 은우는 오늘도 여전히 승현에게 까칠하게 말했다.
“오늘도 형, 그냥 가만히 있어요.”
계속 자신의 옷차림에 신경 쓰느라 예민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응? 왜? 뭐를 하려고?”
“아무것도요…. 아무리 생각해서 아이디어를 쥐어짜내도 십 분 동안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딱 하나 빼고.”
“딱 하나? 그게 뭔데?”
조금 호기심이 생겨 은우는 물었는데 승현은 손사래를 치며 답하기를 거부했다.
“말 안 할래요. 형이 분명 싫어할 테니까. 죽일 듯이 노려볼 게 뻔해.”
“그렇게 말하니까 더 궁금하잖아. 뭔데? 내가 싫어하는 건지 네가 어떻게 알아?”
“해줄 것도 아닌데 들어서 뭐 해요?”
승현은 슬쩍 은우를 떠보는 말투였다. 그러자 은우가 눈을 흘겨보며 말했다.
“뭘 하려는 거야? …거기다 말하려고 했는데 말 안 하는 게 더 나쁜 거 알지?”
“아, 그런가?”
머리를 긁적이는 승현은 능구렁이처럼 웃었다. 그러더니 자신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오며 무해한 눈동자로 응시했다.
“그럼… 은우 형, 하나 약속해요. 절대 화내지 않기, 약속!”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승현을 은우는 이상해서 눈을 갸름하게 떴다. 그가 내민 손가락에 손가락을 걸어 약속하면 안 될 거 같았다.
뭔가…….
은우는 새침한 반응을 보였다. 묘한 밀고 당기기가 둘 사이에 흘렀다.
“이상하니까 그냥 안 들을래.”
“그거 봐요. 안 듣는 게 좋겠죠?”
“…….”
이렇게 하면 승현이 제풀에 못 이겨 말할 줄 알았는데, 승현의 반응은 오히려 말 안 하게 해서 다행이라는 말투였다. 그가 말을 해주지 않을 거 같아서 은우가 더 답답하다는 듯이 결국 궁금증을 못 이기고 말했다.
“아- 알았어…. 화 안 낼게. 뭔데? 그 십 분 동안 할 수 있는 하나가?”
하지만 그에게 물은 은우는 반 발짝 뒤로 물러섰다. 이상하게 승현과 거리가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죽 웃는 승현은 능청맞은 태도를 보였다.
“……키스요.”
“…….”
잘못 들은 줄 알고 은우는 눈꺼풀을 파닥파닥하다가 점점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얼굴을 굳혔다.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얼굴은 이제 점점 구겨지기 시작했다. 이내 곧 화를 낼 것 같은 분위기로 바뀌자 승현은 순진하게 웃으며 선수를 쳤다.
“그거 봐요! 분명 형, 화내지 않기로 약속했어요. 그렇죠? 난 말 안 하려고 했는데, 형이 말하라고 시킨 거예요. 맞죠?”
“아… 아……!”
은우가 다소 상기된 눈으로 깜빡거리다 말을 잃어 가는 와중에 승현은 순진하고 댕댕이 같은 얼굴로 말했다.
“아, 벌써 십 분 됐다. 그럼 형, 내일 봐요.”
순식간에 승현은 몸을 돌려 자신이 타고 온 차로 향했다. 누가 말릴 새도 없이 승현은 차를 몰고 유유히 사라지면서 창밖에 손을 내밀어 흔들었다.
멍하게 은우는 조금 충격적인 얼굴을 하다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터덜터덜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지나 방으로 들어갔다. 굳은 얼굴은 내내 펴질 줄 모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마음의 동요가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다. 아까부터 굳은 얼굴을 펴질 줄 모르고 있었으며 관절의 뼈마디가 엉성한 로봇처럼 굳어 뻣뻣한 움직임으로 은우는 침대에 가서 누웠다.
승현이 내뱉었던 말이 자꾸만 되살아나며 귓전에 흔적을 남겼다.
「키스요.」
눈을 꾹 감고, 은우는 생각하지 않으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었다. 그리고 늘 약에 취해 있는 은우는 어느새… 스르륵, 잠이 들었다.
✻ ✻ ✻
꿈을 꾸었다.
현실인지 꿈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생생한 꿈이었는데 은우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잠이 들었던 꿈속의 은우는 잠에서 깨어났다. 조금씩 정신을 차려 보니 등에서 느껴지는 포근함에 기분이 좋았다가 뜨거워진 몸의 열감을 느낄 수 있었다.
번쩍 눈을 떠 보니 자신은 옷이 하나씩 벗겨지고 있었는데, 그 손길은 크고 뜨거운 승현의 손길이었다. 그 손길을 말릴 새도 없이 나는 순식간에 전라가 되었다. 창피한 기분 속에서 묘한 희열을 맛보았다.
금단의 열기였다.
그 꿈속에서 시간 감각도 잊은 나는 어제인지 며칠 전인지, 혹은 첫 만남 때인지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승현은 멋지게 입고 온 슈트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웃는 선량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언젠가 나를 감아쥐었던 야만인의 손이 천천히 느긋하게 나의 몸을 만지기 시작했다.
그가 닿는 손끝마다 열이 올라 거부하지도, 거절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더욱 만져 줬으면 싶은 음란한 생각이 들었다.
꿈속의 승현은 나의 그런 생각을 쉽게 읽은 건지, 일그러지는 입술로 고른 치아를 보이게 웃더니 목에서 넥타이를 풀어 나의 양손을 단단히 결박했다. 그리고 진득한 손길로 젖꼭지를 희롱하더니 그의 도톰한 입술이 나의 피부 위로 내려앉았다. 살결에 입을 맞추고, 승현은 반응하는 젖꼭지를 핥고 빨았다.
어느새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달아오른 나는 꿈속에서 숨을 헐떡이며 그에게 매달려 안겨들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승현은 커다란 페니스를 꺼내더니 나의 입에 물려 주었다.
그걸 꿈속에서 나는 열심히 빨았다. 꿈속에서조차 입에 다 담기지 않아서 숨이 찼다. 기분 좋아 보이는 그가 눈가를 찡긋하며 나를 내려다보는 그를 나는 음란하게 성기를 입에 물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나는 그에게 맞춰 음란하게 허리를 흔들고 엉덩이를 내보이고 있었다. 현실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위였는데 그 안에서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에게 엉덩이를 벌렸다. 이윽고 승현의 커다란 페니스가 단단하게 커진 것을 입속에서 빼내더니 거칠게 엉덩이 사이로, 구멍의 입구로 쑤셔 넣었다. 곧바로 허리가 붕 뜨며, 쾌락의 신음을 질렀다.
그의 단단한 페니스가 하복부를 압박하는 것을 느꼈다. 생경하게 몸을 꿰뚫는 아픔을 느껴야 하는데, 아픔이 느껴지지 않는 희열뿐이었다. 신기하기도 했고 기분이 좋았다.
아아, 꿈이 아닌가.
꿈이었는데 꿈이 아닌 것 같았다. 지금 배 속에 느껴지는 감각과 압박감은 실제라고 말하고 있었다. 승현이 쉬지 않고 한 번씩 페니스를 배 속 깊은 곳에 밀어 넣을 때마다 흥분에 젖어 더 애원하는 나의 모습이 꿈속에서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는 나를 유린했고, 나를 덮쳐 매달려 울게 한 그는 선량한 야만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가 진득하게 신음으로 귓가에 저급한 음담패설을 하면 할수록 음탕한 내 모습은 더욱 달아올라 앙앙 신음했다. 승현은 나의 비명과 신음 소리가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그는 더욱 천박하고 모멸감을 느낄게 할 정도로 나의 몸을 가져갔다.
그가 골반을 쳐올릴 때마다 흥분에 덜덜 떨며 더 해달라고 애원하는 내가 있었다. 이성을 잃어 본능에 침잠된 오메가의 성질이 나왔다. 그는 처참하리만치 음탕한 모습으로 나를 무너뜨려 가져갔다.
결국 꿈속에서 나는 그에게 매달려 그가 허락한 사정을 하고 그의 몸에 반응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 끝이 아니라는 듯이 몸을 지배한 야만인의 계속된 행위에 나는 기뻐하며 좋아한다는 말 따위를 내뱉었다.
그가 묶어 결박한 손목은 행위가 끝날 때까지도 풀어주지 않았다. 꿈속의 영원에서 그에게 속박되었다.
“하아……!”
이제 정말 현실에 깨어난 은우가 눈을 번쩍 떴다. 이마에는 식은땀이 잔뜩 배어 나왔다. 몽롱한 정신을 느낄 새도 없이 은우는 하복부에서부터 사타구니까지 젖어 드는 감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왜인지 목소리가 열에 잠겨 쉰 목소리로 떨면서 중얼거렸다.
“…방금… 꿈…….”
꿈속에서 승현의 밑에 깔려, 양손이 결박된 채 아주 거칠게 섹스하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사정을 몇 번이나 했다. 그보다, 이상한 점은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얼얼한 감각은 처음 느껴 보는 감각이었다.
섹스를 해본 적이 없어서, 이 감각이 대체 무슨 감각인지 모르지만, 그건 분명 성관계를 가지면 이런 느낌이겠다고 생각이 될 정도였다.
꿈 때문에 은우는 마치 승현의 성기가 배 속을 가득 채웠다가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파들파들 떠는 손목을 들어 눈앞에서 앞뒤로 돌려 보았다. 똑같이 그날과 강제로 묶인 손목인데, 오늘은 다른 감각이었다. 역겨운 느낌이 없었다. 오히려 방금 꾼 꿈이 잊히지 않고 더욱더 뇌리에 남았다.
승현이라 괜찮은 건가?
모두 꿈 때문이었다. 몸의 열기가 식지 않고 가득했다.
“… 미, 미쳤…어, 미쳤어…. 내가 지금… 무슨 꿈을….”
뇌리에 남은 영상은 사라지지 않고 더욱 선명해졌다. 은우는 꿈 때문에 놀란 얼굴로 몸을 일으켜 앉았다. 포근한 침대의 시트가 몸을 따라 흘러내렸고, 은우는 시계를 힐끗거렸다. 밤 열두 시였다.
왜, 어째서…. 나는 승현을 상대로…….
제멋대로 머리가 승현과 꿈속에서 섹스하는 꿈을 꾸더니 사정했다는 것에 놀라울 따름이었다. 거기다 실제 같은 감각은 이곳에 승현이 있었던 것만 같았다. 엉덩이와 은밀한 부근이 꿰뚫어지는 기분은 뜨거웠다. 꿈에서 깨어난 은우는 지금도 현실감이 없어서 무의식적으로 아랫배로 손을 뻗어 살살 매만졌다.
“…끙…….”
곤란한데. 꿈을 꿀 정도라면 꿈에서 나온 행위들을 자신도 조금은 기대를 하는 건가.
스스로 거기까지 뻗쳐 나간 생각에 놀라 은우는 좌절감에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계속 머릿속에 떨쳐 버리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잔상처럼 남겼던 행위들이 더욱 선명해졌다. 꿈속에서 승현이 애무했던 몸 구석구석의 촉감이 살아나면서 뜨거워졌다.
“아, 미쳤…어…….”
그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점점 더 색을 입고 선명해지는 감각 때문에 은우는 처음 느껴 보는 흥분에 젖었다.
그리고 차오르는 쾌락은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고, 할 리도 없는, 해본 적도 없는 짓을 은우로 하여금 하게 만들었다.
은우가 풀썩 촉감이 좋은 침대에 옆으로 기울어지며 쓰러졌다. 몸을 작게 웅크린 은우는 미약하게 떠는 손가락을 들어 가슴에 대어 옷 위에서 빳빳하게 솟은 젖꼭지를 매만졌다. 꿈의 영향은 대단했다.
“으으, 읏…….”
옷감의 거친 촉감 때문에 몇 배로 찌릿한 감각에 휩싸였다. 그리고 조금씩 뜨거워지는 손길로 은우는 그것만으로 부족하다고 우는 몸을 달래려 긴장된 마른침을 삼키며 망설였다. 하지만 달아오른 몸은 도덕적인 사고를 밀어내고 마비시켜 이성을 짓밟아 누르고 있었다.
그 순간 은우는 약을 먹어야지, 늘 부적처럼 들고 다니던 약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손을 뻗으면 침대 옆의 작은 탁자가 있었지만 말이다.
뜨거운 행위였던 꿈속의 장면이 머릿속에 떠다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이성보다 본성이 지배한 머리가 몸에 명령을 내렸다. 그 명령에 순순히 따르며 바지를 살짝 내렸다. 어느새 젖꼭지를 만지던 손은 옷 속 사이로 들어가 단단해진 젖꼭지를 손끝으로 비비고 있었고, 다른 손은 사타구니 사이로 파고들었다.
“하아, 하응…. 아, 안 돼…. 그만…해야….”
멈출 수가 없었다. 이불에 고개를 묻은 채 신음하는 은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꿈속의 다감하면서도 거칠었던 나의 선량한 야만인에 의해 젖어 버린 구멍에 조심스럽게 중지를 뻗었다. 꽉 닫힌 입구를 손끝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 아… 아으!”
소름이 돋을 정도로 손끝에 닿은 입구는 따뜻했다. 그리고 달아오른 입구가 움찔거리며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었다. 은우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저 꿈속에서 승현이 자신을 향해 혀로 핥고 손가락으로 젖꼭지를 만지던 것을 흉내를 내고 있었다. 그의 커다란 흉기 같았던 성기가 이 좁고 좁은 문을 열고 무자비하게 파고들어 갔던 꿈이 떠올렸다.
“그, 그러…니까… 여, 여기에……. 하아, 읏!”
은우가 승현의 뜨거운 행위를 떠올리며 입구를 손가락으로 문질렀지만, 몸은 이 정도로도 부족하다고 좁은 애널은 움찔거리며 아우성치고 있었다.
“아- 하지만… 여기는…. 하아, 하아, 어떡하지……. 으읏!”
겁이 나서 은우는 뜨거운 숨을 내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살살 문지르던 중지에 힘을 주어 세우고는 구멍에 조금씩 밀어 넣었다.
“아… 아…….”
소름이 돋았다. 몸이 채워지는 감각이 있었다. 손가락 한 마디뿐이었지만, 무언가 상당히 크게 저 자신에게 다가왔다. 겨우 손톱만큼의 손가락 끝이 애널의 입구에 걸쳐 있는 것만으로도 은우는 금방 절정을 느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내 몸을 내가 만진다는 그것도, 미지의 영역을 만진다는 것이 겁이 났다. 공포와 두려움을 느끼며 손가락을 깊게 넣지 못하고 그저 입구만 문지르기 시작했다.
겨우 고작 손가락의 한 마디 정도 가지고 승현이 꿈속에서 행했던 행위를 떠올리며 구멍에 넣었다가 빼며 간지럽게 비볐다.
“스… 승현…아…. 으읏, 하아… 승현아….”
허리가 파르르 떨면서 은우는 저도 모르게 승현을 애타게 불렀다.
스스로도 미친 것처럼 젖꼭지를 문지르는 손길에서는 아찔함을 느껴 놓을 수가 없었다. 눈을 살며시 감은 은우는 이불에 얼굴을 파묻었다. 구멍을 괴롭히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꿈속의 환상이 만들어낸 승현이 거칠고 자극적으로 자신의 몸을 가지는 생각을 하며, 은우는 세운 손가락을 빠르게 삽입했다가 빼며 제 몸을 자극했다.
“아흣…! 읏… 응! 아아….”
작은 미성의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다 은우는 조금 더 손가락을 깊게 넣어 보았는데, 그게 너무 달콤한 쾌락이자 쾌감이었다.
순간적으로 자신의 얇은 손가락이 승현의 성기가 되었다가, 승현의 손가락으로 변했다. 상상 속의 승현의 성기로 둔한 손가락은 다시 구멍에 얕게 파고들었다 빼며 자극했다.
어느새 더욱 젖은 구멍이 벌름거리며 열을 더욱더 내뿜고 있었고 몸을 더 웅크린 채 무아지경으로 자신의 몸을 달구고 있었다.
“하아…. 하아….”
눈을 한 번 꾹 감았다 뜨며 은우는 꿈에서가 아니라, 실제로 사정을 했다. 구멍에서 오메가의 점액질이 손끝을 따라 녹아 흘렀다. 그리고 오메가의 페니스에서도 말간 체액이 흘렀다는 것을 느꼈다.
남자 오메가들은 성기가 발달하지 않는다. 생식기의 기능은 없기 때문에, 십 대가 되어 2차 성징이 되어도 고환이나 성기는 어릴 때 그 상태였다.
은우는 뜨거웠던 몸이 식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깨달은 얼굴로 사색이 되었다.
지금 은우는 태어나서 처음 자위를 했다. 그것도… 승현을 상대로 말이다.
✻ ✻ ✻
다음 날 하루 종일 은우는 시계를 힐끗거렸다. 간밤에 벌인 짓 때문이겠지만 은우는 들러붙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오후 한 시.
금방 시간이 지나지 않았을까? 은우는 저도 모르게 시계로 시선이 향했다.
오후 한 시 이십 분.
고작 이십 분밖에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실망감에 은우는 한참 시간이 흘렀다고 생각되어 시계로 힐끗거렸다.
두 시.
아직 아홉 시가 되려면 일곱 시간이나 남았다.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멍한 정신으로 은우는 다시 문득 시계를 확인했더니 이제 겨우 다섯 시였다.
“후우…….”
묘하게 아홉 시가 기다려졌다.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 봐도, 어느새 나의 눈길은 시계로 향해 떨어질 줄 몰랐다.
초침이 원래 저렇게 느리게 움직였던가?
가는 머리카락을 헝클이던 은우는 다시 시계를 확인했다.
여섯 시였다. 이제 겨우.
넓은 방을 이리저리 배회한 은우는 슬그머니 옷 방으로 향했다.
“아니… 그동안 너무 추레한 모습만 보인 거… 같으니까. 나도 뭐… 옷 잘 입을 수 있지….”
또 스스로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옷이 걸린 옷방 문을 열었다.
옷방 사방에 둘린 옷장에는 종류별로 옷이 걸려 있었다. 옷방 중앙에는 커다란 유리 장식장으로 된 시계 진열장은 꼭 백화점 판매대에서 볼 법한 모양새였다.
은우는 옷장 근처로 다가가 걸려 있는 옷가지를 몇 개 꺼냈다. 몸과 어깨에 대어 거울로 살펴보는 은우는 고개를 기울였다.
“이걸 여기에 입으면 이상한가…? 모르겠으니까 입어 봐야지.”
감이 잡히지 않아서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이리저리 몸을 돌린 채 은우는 중얼거렸다.
“…이건, 너무… 꾸민 티가 나는 거 같은데?”
그리고 거침없이 훌렁훌렁 벗어 바닥에 툭 내던졌다. 그리고 걸려 있는 다른 옷을 꺼내 입고는 또다시 거울 앞에 서서 이리저리 몸을 돌려 봤다.
“아니… 음, 이건 너무 성의 없는 거 같지…? 에이, 다시….”
훌렁훌렁. 옷을 벗어 선택받지 못한 옷들을 바닥에 쌓아 뒀다.
너무 꾸미지 않은 것 같으면서, 또 너무 성의 없는 것 같지 않은 옷을 찾으며 고민하는 은우의 눈빛은 상당히 진지했다. 그리고 이 정도면 괜찮겠다 생각되어 고른 옷을 입고 다시 거울 앞에 섰다.
“아… 이건… 평소랑 똑같잖아…….”
그렇게 벗었다 입었다… 두 시간을 했는데 은우는 마음에 쏙 드는 옷을 고르지 못했다. 그다지 옷 입는 것에 욕심도 관심도 없어서, 평소 사서 입는 옷이 거기서 거기였다.
결국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옷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바닥에는 이미 꺼내 놓은 옷이 한 보따리가 되었지만 은우는 지금 입은 옷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들어.”
미간이 찌푸려진 은우는 옷을 다시 벗으려고 할 때, 시계로 시선이 향했다. 시계의 시침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홉 시로 거침없이 향하고 있었다.
“아, 벌써…….”
은우는 중얼거리다가 후다닥 뛰쳐나갔다. 전에는 느긋하고 기다리지 않았다는 걸음이 이제는 빨라져 있었다. 2층 계단을 통통 뛰며 뛰어나가는데, 거실에는 은우 아버지와 일품 그룹의 비서실장이 있었다.
“어? 실장님, 안녕하세요.”
은우는 달려가는 것을 멈추고 비서실장에게 인사를 건넸다. 실장님은 심각한 이야기를 주고받는 건지 얼굴이 굳어 있었고, 은우의 인사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대신 은우의 아버지인 변 회장은 미심쩍은 눈으로 은우를 힐끗거리며 위아래로 살피더니 물었다.
“너는 이 밤중에 어딜 가는 거냐?”
은우는 아버지의 물음에 눈동자를 굴리며 뒷머리를 작게 긁적거리며 웃으며 답하였다.
“아… 그냥, 집 앞이요. 십 분이면 돼요, 아빠.”
“……십 분?”
“네에,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세요.”
뭐가 급한 사람처럼 은우는 얼굴에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현관문으로 달려 나갔다.
예리한 눈으로 은우의 아버지인 변 회장이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은우가 뛰쳐나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복도 끝에서 ‘쾅’ 닫히는 현관문 소리를 들으며 시선을 떼지 않은 변 회장님은 무서운 눈초리로 지그시 바라보면서 비서실장에게 말을 걸었다.
“…저 녀석 뒤를 좀 알아보라고 한 건 어떻게 됐어?”
“예, 회장님……. 그게, 은우 군 옆에 요즘 A&C 그룹의 둘째 아들이 포착되었습니다. 아무래도…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하지 않았나…. 조만간 보고서 올리겠습니다.”
“불순한 의도?”
“아직 정확하게 경위 파악 중입니다. 자금을 써서 은우 군에 대해 조사를 했던 모양입니다.”
“…A&C 둘째 아들이라….”
그 순간 변 회장의 눈빛이 희번덕댔다.
“한 대표 리조트 건은 어떻게 됐어?”
“예, 아직 이렇다 할 반응은 없습니다.”
“그럼… 음, 그렇군. 둘째 아들이라…. 처음부터 다시 알아봐. 다만 이번에는 상세하게, 그거랑 같이 보고서 올려.”
“은우… 군을 다시… 말입니까?”
“그래, 요즘 저 녀석… 이상해. 그것도 아주….”
“……예, 회장님.”
✻ ✻ ✻
은우는 정원을 가로지르며 대문 앞에서 서서 숨을 가다듬었다. 최대한 뛰어왔다는 모양새를 지웠지만,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삐죽삐죽 움찔거리는 입술을 주체하지 못했다.
“흠흠…….”
차분하게 평소처럼 도도한 자세로 대문을 열고 나가자 아니나 다를까, 승현은 늘 똑같은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형, 일 분 지각!”
“미안, 아빠가… 말 시켜서.”
승현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일품 그룹의 변 회장님의 존재를 은우 입으로 확인한 탓에 놀란 얼굴을 했다.
“헉…! 회장님 안에 계시는구나….”
우리나라 사람이면 그 이름 석 자 모르는 사람도 없었고,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 사람이 일품 그룹의 회장님이면서 은우의 아버지였다.
“어? 어… 응.”
“근데, 형. 오늘 뛰어왔어요?”
“어? 아, 아니…. 아닌데? 왜?”
슬쩍 승현은 은우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려 손을 뻗었다.
“아니… 형, 이마에 땀이….”
은우는 겨우 잊고 있던 꿈이 떠올라 화악, 얼굴에 피가 쏠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 아니야…. 괜찮아.”
은우는 승현의 손길을 피하며 황급하게 자신의 손으로 이마의 땀을 훔쳤다.
잘생긴 얼굴로 옅은 미소를 짓던 승현은 손길을 거두었다. 그리고 지그시 은우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정말 가만히 그 자리에 서서 바라만 보았다.
지그시 승현은 그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보기에도 확실히 달라진 은우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은우는 오늘따라 자신의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이리저리 배회하며 눈동자가 흔들렸다. 은우의 변화에 씩 미소를 지었다.
“은우 형……. 그거 알아요?”
“무, 뭐가?”
“지금 이십 분 지났어요.”
“뭐? 벌써?”
흡, 은우는 당황해서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렸다. ‘벌써’라는 말을 내뱉을 생각은 없었는데, 허술하게도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렸다. 은우가 잘못을 저지른 입술을 못살게 괴롭히듯 깨물었다.
지루한 광고 보기 같았던 십 분의 시간이… 벌써, 은우 자신에게도 아침의 십 분으로 바뀌어 있었다.
“흐음… 벌써…….”
승현은 눈을 가늘게 뜨고 보조개가 흐릿하게 보이게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형도 되게 짧게 느껴졌나 보다, 그렇죠?”
능구렁이를 배양하는 사람답게 승현이 말했다.
“아, 아니야!”
은우는 빨갛게 홍조를 띤 얼굴로 빽 큰 소리를 쳤다.
“오, 오늘… 십 분 초과…했으니까. 내, 내일은 안 돼!”
더 이상 은우는 안 될 거 같았다. 그에게 이렇게 변해 버린 속마음을 들킬 것만 같았다. 꿈에서 전라가 되어 발가벗겨졌던 지금은 자신의 속마음이 낱낱이 까 보일 것 같았다.
황급히 대문 뒤로 쏙 들어가 은우는 숨어 버렸다. 왜인지 모르게 심장이 뛰어 가슴을 쓸어내렸다. 승현의 말대로 순식간에 흘러가 버린 이십 분의 시간이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