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오메가의 억제제
다음 날이었다. ‘내일은 안 돼’. 안 된다고 말한 건 자신이었다. 제 입으로 그렇게 못을 박았다. 그런데 은우는 지금 그걸 조금 후회 중이었다. 오늘은 못 만나니 다시 내일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어제 그렇게 말한 과거의 저 자신이 깨닫지 못하고 안 된다고 한 것이… 왜 그랬을까 후회됐다.
내가 왜 그랬을까.
그렇지만 일곱 시부터 은우는 다시 옷장에서 옷을 꺼내 몸에 대 보면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초침이 더럽게 느리게 간다고 생각하며 느릿하게 움직이지 않는 시계를 보며 초조하게 시간을 보냈다.
그 모습은 마치, 처음 승현이 집 앞에서 기다리는 모습과 흡사했다. 은우는 보이지도 않는 것을 알면서도 방 창문의 커튼을 펄럭 들쳐 확인 창밖을 보다가 시계로 시간을 보았다. 그러다 다시 커튼을 열어젖혀 확인하고……. 바보처럼 똑같은 짓만 반복하기 시작했다.
여덟 시 오십팔 분.
은우는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이 분의 시간을 가만히 보낼 수가 없어서 방문을 나섰다. 그리고 천천히 대문 앞으로 갔다. 오늘은 안 된다고 했으니 승현은 안 왔을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자신은 약속을 어긴 적이 없었기에, 승현은 포기하고 안 왔으리라 예상했다.
문득 은우는 핸드폰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니 아홉 시였다.
역시… 승현은 오지 않았다.
벨을 누른 기색도 없어서 은우는 승현이 안 와서 실망한 얼굴로 바뀌었다. 그러다 혹시 모르는 생각에 대문을 살짝 열었다.
“어? 나왔다!”
은우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더니 승현이 어제도, 그제도… 그리고 오늘도 늘 똑같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 너… 왔어?”
속으로 은우는 환하게 웃으며 연기하는 톤으로 말했다. 안 온 줄 알았는데… 승현은 와 있었다.
“형, 진짜 나왔네요? 진짜 신기하다.”
“무, 뭐가… 신기해?”
“지금 내가 막 텔레파시를 쐈거든요.”
가끔 애늙은이 같은 면이 있는 승현에게 은우가 말했다.
“뭔 소리야?”
“뭐, 그건 그렇다 치고…. 형은 왜 나왔어요? 나 벨 안 눌렀는데. 저야 늘, 언제나 형이 보고 싶으니까 처량하게 집 앞에서 알짱거렸다고 치지만.”
“어…? 어, 나… 어, 그게…….”
마땅히 둘러댈 핑계나 이유를 생각하지 않은 은우는 괜히 정곡을 찔린 것 같아서 더듬거렸다. 눈을 굴리며 은우는 말을 더듬으며 머릿속에 퍼뜩 떠오른 거짓말을 술술 늘어놓았다.
“펴, 편의점에… 아, 아이스크림 사러….”
“뭐라고요? 형, 옷을 그렇게 차려입고요?”
승현은 푸핫- 웃으며 자신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어? 내 옷이 왜? 뭐가?”
“흐음…….”
누가 봐도 편의점에 갈 차림이라기보다 데이트에 어울릴 법한 차림새처럼 보여서 승현은 알 수 없는 콧소리를 내며 은우를 갸름한 눈으로 살폈다.
“외, 외출하고 드, 들어온 거야! 진짜야!”
“알았어요!”
“진짜라니까!”
점차 빨간 딸기처럼 변한 은우가 창피해서 버럭 화를 냈다. 거짓말이 입에서 거침없이 흘러나왔다.
“그래요. 그럼 형, 나도 같이 편의점 갈래요.”
“내, 내가 왜? 오늘은 안 된다고 했는데!”
은우가 획 고개와 몸을 반대로 돌리며 승현을 지나쳐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내가 아이스크림 사 줄게요,”
마치 은우의 말끝에서 귀엽게 ‘흥, 칫, 뿡’이라는 소리가 들린 착각에 승현은 코웃음이 지어졌다. 행복한 미소가 만개한 얼굴로 은우에게 따라붙었다.
“나, 나도 돈 있어.”
“그건 여기 사는 사람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죠. 사실 그렇잖아요. 돈은 나보다 형이 더 많죠.”
“…….”
어느새 승현과 은우는 나란히 걸었다.
은우는 승현의 보폭에 맞출 필요가 없었다. 언제나 승현은 자신의 속도에 맞추고 있었다. 그래서 한 번도 승현의 보폭에 맞춰 걸을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이렇게 우연히 형이랑 만나게 된 것이 좋아서 그래요.”
“…….”
은우는 승현과 나란히 걸어 예정에도 없던 편의점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괜히 천천히 걸었을 뿐만 아니라 제법 집에서 먼 쪽의 편의점으로 방향을 틀었다. 순진한 얼굴을 한 승현은 그동안 못내 이루지 못한 같이 걷는 소원을 이루었다며 콧노래를 흥얼거릴 뿐 자신의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근데, 형, 여기 꽤 먼 편의점인데 왜 여기까지 왔어요?”
“어…? 이, 내가 먹고 싶은 아, 아이스크림이 여기밖에… 안… 팔아.”
세상에 그런 아이스크림이 어디 있겠냐마는. 은우는 입에서 거침없이 거짓말이 양심의 가책도 없이 술술 나왔다.
입에 침도 안 발랐는데.
승현은 편의점에 도착하자마자 아이스크림을 보관하는 냉동고 앞에 서서 유리창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흐음… 그럼 뭐 먹을까요?”
다행히 승현은 그런 되지도 않는 변명이 통한 듯 보였다. 사실 줄곧 식욕이 없는 은우는 딱히 먹고 싶은 것이 없었을뿐더러 계획에도 없는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것이 그리 원하는 일은 아니었지만… 승현에게 연기한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손에 잡히는 아무거나 집어 들었다. 그런데 그냥 잡힌 아이스크림이 하필 멜론 맛 아이크림이었다.
“어? 나도 그럼 형 따라서 먹어야지.”
승현은 부스럭거리며 손에 집었던 초콜릿 맛 아이스크림을 내려놓고 은우가 집은 아이스크림을 찾아 뒤적거리더니 따라서 집었다.
은우와 승현은 똑같은 초록색으로 된 네모난 막대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고 나란히 걸었다. 승현은 아까부터 계속 웃음을 감추지 못하였기에 은우가 이상해서 물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싱글벙글이야?”
“오늘 운이 좋잖아요.”
“무슨 운?”
“오늘 형이 안 만나준다고 해서, 형이 나오기를 기다렸더니…. 나왔잖아요. 오늘 헛걸음할까 봐 조금 걱정했는데, 그랬는데 또…. 딱 운 좋게 형이 무려!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며 나왔으니까. 운이 너무 좋잖아요. 꼭 로또 맞은 기분이 이런 걸까요?”
승현이 눈치를 챈 건지, 일부러 비꼬는 듯했지만 은우는 알지 못했다. 대신 한심스럽게 승현을 향해 은우는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다가 정면을 응시하며 말했다.
“기분 좋은 건 알겠는데, 너나 나나 로또 맞는 기분은 모를걸.”
“…에이, 형. 그러지 마십시다.”
오늘도 이렇게 십 분의 데이트는 성공적이었다.
✻ ✻ ✻
생각보다 십 분이라는 시간엔 할 수 있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체감하는 시간이 조금씩 더 짧아지고 있어서 아쉽다고 느낄 때였다. 그렇게 며칠이 더 지났다.
두 사람은 대문을 사이에 두고 기다렸다. 은우는 대문 안에서 서서 아홉 시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갖은 핑계로 아홉 시가 되기 바로 전에 대문을 열었다. 그건 늘 승현에게 로또 맞는 기분을 들게 했다. 은우는 그것이 조금은 기분이 좋았다. 저로 하여금 승현이 기뻐한다는 것이.
승현에게는 벨을 누르기도 전에 은우가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늘 승현은 웃으며 은우를 기다렸다. 그 덕분에 은우는 언제고 먼저 와서 기다리는 승현과 만났다.
승현에게 허락한 시간은 딱 십 분. 그리고 은우는 오늘 조금, 특별하게 용기를 내어 승현에게 한발 다가가 보려고 했다.
“어? 형 오늘은 십 분이나 일찍 나왔네요. 혹시, 나 보고 싶어서?”
“무, 무슨 소리야…! 아냐, 그… 그런 거! 그런 말 할 거면 십 분 있…다가 나온다!”
말도 하기 전에 은우는 벌써 들통난 감정 때문에 보이지 않게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에이, 형… 또 또 그런 무서운 짓 하지 않기!”
은우가 다시 들어가려고 하자 승현이 다급하게 은우의 손을 잡아 세웠다. 두 사람의 발전은 거기까지 진행되었다. 손 정도는… 흠칫하긴 해도 은우는 뿌리치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그렇다고 해주면 좋잖아요. 형은 너무 솔직해서… 좀 상처받았네요.”
“무, 뭐가…. 근데 넌 왜 이렇게 일찍 와 있어?”
“저야… 뭐, 늘 형 바라기니까. 혹시나 오늘은 형이 변덕을 부려 일찍 나오면 더 볼 수 있는 거니까 오늘은 삼십 분 일찍 왔어요. 봐 봐요. 오늘 같은 날을 위한 준비성이랄까. 유비무환이죠.”
“삼십 분? 그렇게나?”
제법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은우가 되물었다.
“그럼요. 늘 일찍 와서 기다리죠. 어느 날은 한 시간도 일찍 오고, 어느 날은 이십 분, 어느 날은 뭐 사십 분…. 가끔 형이 밉게 말하는 날은 십 분….”
“뭘… 그렇게 일찍 와.”
“뭐, 형이 보고 싶으니까. 오늘처럼 일찍 나와서 조금이라도 더 오래 만나면 좋으니까.”
사실 승현이 이렇게 오래전부터 와서 기다리는지 은우는 처음 알았다. 그에 대한 감정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하니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지… 마.”
“기다리는 건 제 마음이니까요.”
역시 승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런데요. 형, 그건 있어요. 한 번이라도 거짓말이라도 좋으니까 ‘보고 싶어서’라고 해줘도 좋았을 텐데. 그런 욕심.”
“…….”
선량한 얼굴을 가진 승현을 은우는 조금씩 믿기 시작했다. 승현이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승현은 자신을 향해 일부러 알파의 페로몬을 뿌려 대지도 않았다. 그라면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과 안심이 있었다.
하지만 은우는 그에게 속내를 내비치는 게 무서웠다. 승현을 대하고 그와 웃으며 사소한 대화를 주고받을 때마다 귓가 어딘가에서 울리는 소리가 났다.
사람들의 수군거리며 조롱 섞인 비아냥 소리가 귓가에서 윙윙거렸다. 동시에 공포가 되어 살아나는 그날의 기억이, 그날의 몸을 짓누르는 ‘알파’의 힘과 페로몬의 향기가 자신을 꽁꽁 묶어 승현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
“나, 나는 정말… 저, 저녁 먹고 소, 소화가 잘… 안 돼서 사, 산책하려고 한 거야!”
승현은 묘한 웃음을 빙긋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알았어. 미리 말해 줬으니까. 나중에 한번 써먹어 줘요.”
“…….”
그리고 우리는 아직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다.
“오늘 형… 그동안 나 확실하게 약속도 잘 지켰으니까, 마일리지 적립한 거 써도 돼요?”
“무슨 마일리지? 마일리지가 있어?”
“다른 말로 포인트라고도 하는데, 나 그동안 형한테 마일리지 적립 안 해놨어요?”
“뭐? 무슨 소리야?”
“이거 법적 분쟁 감이네.”
승현은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는 소리로 말했다.
“형 안 귀찮게 굴고 그랬는데? 그거 있잖아요. 선행 마일리지. 진짜… 이럴 줄 알았어. 나중에 참 잘했어요. 도장이라도 받아야 하나 보다.”
은우는 기분이 풀어지면서 나긋하게 말했다.
“정말… 넌 별 이상한 소리를 다 해.”
“은우 형, 오늘은 그러니까 보너스 좀 주면 안 돼요?”
승현이 선한 웃음으로 말했다. 그 웃음은… 은우에게 이제 믿음직스럽게 다가왔다. 신뢰의 미소였다.
“……뭐… 하려고?”
입꼬리를 씩 끌어 올리며 승현은 큰 눈까지 휘어 접었다. 승현에게도 도박 같은 일이었다. 대뜸 은우가 안 된다고 할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의외로 안 된다고 하는 것보다 뭐 하려고 하냐는 은우의 말에서 확실히 변한 은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늘은 형이랑 조금 드라이브 가고 싶어졌거든요.”
손을 아래로 내리고 꼼지락거리는 은우의 모양새는 망설이고 있는 듯했다. 불과 한 달 전이었으면 고민할 것도 없이 당연히 안 된다고 까칠하게 대했을 법하지만, 승현은 은우가 고민한다는 것에 속으로 웃으며 덧붙였다.
“그래 봤자 왕복 이십 분!”
승현은 크고 긴 손가락을 앞에 내밀어 브이자 표시를 내보여 주었다.
“음- 음-”
어쩌지? 고민했다.
“형 싫으면 안 가도 되고요. 억지로 갈 필요는 없어요. 그거 아니면 오늘은 십 분 동안 제 얘기 좀 들어 줘요. 나 오늘 형한테 오늘 하루 종일 형이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말하는 거 들어 줘요,”
“…아, 알았어. 정말 이십 분…만이다.”
결국 승낙하고야 마는 은우를 승현이 에스코트하며 차에 태웠다. 승현의 엉덩이에 꼬리가 있었으면 딱 맞을 듯했다. 그는 신난 강아지가 프로펠러처럼 꼬리를 미친 듯이 흔드는 것처럼 후다닥 뛰어 운전석으로 향했다. 은우를 태운 차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근데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은우가 빠르게 풍경을 보다 승현에게 물었다.
“그냥… 오늘은 형이랑 이렇게 있고 싶었어요.”
“별…걸 다…….”
다시 고개를 돌린 은우는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크고 화려한 대도시의 풍경이 보였다. 잠들지 않는 도시라는 말이 딱 어울릴 법한 풍경이었다. 멍하게 응시하던 배경이 어느새 한적한 풍경으로 바뀌자 한참을 간 것 같다는 생각이 은우는 들었다.
두 사람은 대화 한 마디 나누지 않았다. 은우는 이제 창밖의 풍경은 도심의 불빛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야…….”
승현을 부른 은우는 놀란 눈으로 시계를 보니 약속한 이십 분이 어느새 풀쩍 지난 것을 확인했다.
“야, 이십 분… 지났어….”
“…….”
옆에서 보는 승현의 눈이 진지하게 빛이 났다. 그의 눈빛은 아주 새까만 검은색이었다. 빛을 99% 흡수한다는 벤타블랙과 같아 보였다. 은우가 소심하게 겁을 먹으며 말했는데, 승현은 차를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조금씩 영문도 모르는 일이 벌어지는 거 같아서 은우는 불안한 얼굴로 더듬거리며 물었다.
“…집…에 가는 거… 맞지?”
“……형.”
“어? 왜, 왜 불러?”
그동안 댕댕이 같았던 승현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진한 남자의 목소리가 은우의 전신을 흔들어서 은우는 당황으로 반응했다. 승현은 그 자신의 풍채를 울림통으로 쓰는 목소리였다.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하자 은우는 점점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자신이 원치 않는 형태로 되어 가고 있었다. 다시 고슴도치가 몸을 둥글게 말아 가시를 드러냈다.
“형, 아직도 나… 별로예요? 나는 아직 형한테 그렇게 믿음이 가지 않는 사람인가?”
“…차 세워 줘.”
속도를 늦추지 않는 차는 멈추지 않았다. 계속 앞으로 달리기만 했다. 은우의 눈에는 그는 돌아갈 기미가 없어 보였다.
눈을 깜박거리는 은우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머리가 핑핑 돌기 시작했다. 승현이 자신에게 지금 무슨 짓을 꾸민 건가. 바보처럼 또다시 사람에게 속아 버렸다. 승현에게 속아 넘어가 버렸다. 그의 손아귀에 넘어간 것이었다.
“…차 세워.”
멈추지 않는 차는 직진으로 달렸다. 은우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손을 더듬거리며 손잡이에 뻗었다. 줄어들지 않는 속도는 생각하지 않았다.
“안 세우면 그냥 뛰어내릴 거야.”
은우는 협박을 했다. 눈앞이 깜깜해지며 아무렇지 않게 차 문을 열어 뛰어내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승현이 운전석의 복잡해 보이는 버튼을 조작하자 철컥 소리가 나며 차 문에 록이 걸리는 둔탁한 쇳소리가 울렸다. 이제 차는 멈추지 않으면 열리지 않을 것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철컥하며 쇠가 걸리는 소리에 움찔 놀란 은우는 화를 내며 소리쳤다. 그를 믿은 건 자신이었다, 이 사소한 일로 인해 일어난 모든 비난과 조롱은 자신이 짊어져야 할 것이다.
“…….”
은우는 씩씩 거친 숨소리로 화를 내고 있는데 승현은 정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속도를 늦추기는커녕 액셀러레이터를 더 발로 꾹 밟으며 말했다.
“은우 형… 나-”
징- 징-
하필 좋지 못한 소리가 울렸다. 승현은 말문이 막혔다. 은우는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그 진동 소리는 승현도 알고 있는 소리였다. 은우가 먹는 오메가 억제제. 분명 오늘도 몇 알의 약을 먹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지만, 은우는 틈만 나면 먹어 대고 있었다.
승현은 힐끗 곁눈질로 은우를 살폈다. 은우는 멍한 눈과 얼이 나간 얼굴로 변했다. 화를 내던 얼굴이 순식간에 다른 얼굴을 했다.
몸에 꼭 지니고 다니는 약통을 꺼내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린 은우가 이빨 빠진 호랑이처럼 나약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무, 물…. 물 없지?”
승현은 왜인지 모르게 화가 났다. 은우의 반응이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지 알 수 없어서 은우의 반응을 모른 척하며 시크하게 되받아쳤다.
“물 없어요. 왜요?”
“빨리 차 좀 세워 줘. 아니면 아무런 편의점 앞에 내려 줘.”
신경질적으로 예민하게 구는 은우가 긴장과 걱정으로 숨을 떨었다. 은우는 손에 쥔 약통에서 혈색을 연상시키는 동그란 약을 바들바들 떠는 손으로 꺼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되자 그날의 기억이 점점 선명해져 눈에 띄게 떨기 시작했다.
“아니… 됐어…. 물 필요 없어. 물 없이도 먹을 수 있어. 빨리 집에나 내려 줘.”
애써 은우는 승현에게 태연한 척하며 입속으로 동그란 알약을 집어넣으려고 했다. 잠시 승현은 손을 뻗어 은우의 행동을 억제하며 물었다.
“저번부터 묻고 싶었어요. 형, 어디 아파요? 이 약… 꼭 먹어야 해요?”
“손 놔!”
“이 약을 그렇게 많이 먹어야 하는 거예요? 걱정되잖아. 참을 수 있으면 참아 봐요.”
은우는 씩씩거리면서 승현의 손을 뿌리쳤다. 귀에 승현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가 자신에 대해 걱정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승현의 손길과 말을 고집스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튕겨냈다.
은우는 아무것도, 승현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이 굴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승현이 화가 나서 신경질적으로 그의 손에 들린 동그란 빨간 약을 빼앗아 창문으로 던져 버렸다.
“야! 너… 무, 무슨 짓이야!”
은우의 얼굴이 걷잡을 수 없이 창백하게 떴다. 히스테릭하게 소리를 빽 지른 은우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승현은 단단히 은우의 약을 모른 척하며 차분하게 말했다. 하지만 승현의 숨소리도 거칠게 씩씩거리고 있었다.
“왜요. 형, 이거 무슨 약인데요? 어디 아파요?”
승현이 그 약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의심스럽지만, 지금 은우는 거기까지 깊게 생각하지 못한 듯했다. 거칠게 분노하는 은우의 숨이 씩씩거리며 자신을 사납게 노려보았다.
“말 걸지 마. 빨리 차 세워.”
그러면서 은우는 이제 승현을 완전히 무시하기로 했다. 그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여비로 가득 채워 둔 약을 툭툭 털어 한 알 꺼냈다.
“형! 기분 나쁘게 생긴 약 먹지 말고요. 응? 조금만, 참아 봐요. 난 형이 지금 먹는 게 뭔지 몰라. 엄청 위험해 보인단 말이에요.”
이번에도 승현은 홧김에 은우의 손에서 입으로 들어가려는 약을 빼앗아 창문으로 던져 버렸다.
“…하, 하지 마….”
알림이 울렸는데 약을 먹지 못했다는 두려움에 은우의 얼굴은 어느새 하얗게 질린 표정이 되었다.
승현은 은우의 나약해진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가서 물 사 올 테니까, 그냥 맨입에 약 삼키지 말아요. 이거 제법 큰 알약인데, 큰일 나…. 기다려요. 편의점 저기 있다. 가서 물 사 올 테니까….”
붉어진 눈가를 손등으로 훔치며 은우는 다시 단단한 갑옷 속으로 숨었다.
“됐어, 필요 없어. 그냥 내려 줘.”
단단히 화가 났다는 은우의 목소리는 처음 승현과 학교에서 대면했을 때와 다를 바 없는 예민하고 까칠한 목소리였다.
“은우 형…….”
“너한테서 내 이름 듣고 싶지 않아. 부르지 마. 빨리 차 세워.”
자신에게 뻗으려는 승현의 손을 놀란 얼굴로 피했다. 이제 모든 것이 싫어졌다.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승현을 이제 믿었는데…. 은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배신감에 떨었다. 덜덜 떠는 눈동자로 은우는 다시 약을 삼키려 했다.
“형… 그렇게 약 먹지 말아요. 기다리라니까? 기다려, 가서 물 사 올게. 그러니까….”
“됐다고. 물 없이도 먹을 수 있어. 그러니까 차나 빨리 세워.”
“미안해요. 난 이 약이 이렇게 형에게 중요한 건지 몰랐어요. 내가 미안해.”
까칠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은우는 덜덜 떠는 손으로 방금 꺼낸 약을 뒤로 다시 한 알의 약을 꺼내려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승현이 그 약을 뺏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약을 빼앗았을 때 이렇게 예민하고 심각하게 반응할 줄 몰랐다. 눈에 보이는 도로변의 편의점 앞에 거칠게 차를 세웠다. 그리고 순식간에 차에서 뛰어내린 승현은 편의점으로 뛰어갔다.
은우는 굵은 알약을 입에 넣고 익숙하면서도 익숙하지 않은 알약의 크기에 눈가를 찡긋 한 번 하며 침과 함께 삼켰다. 알약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며 잔기침이 몇 번 흘러나왔다. 약을 먹는다는 행위에 안심하는 표정을 지은 은우가 비어 버린 운전석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철컥-
더듬거리며 버튼을 하나 누르자 차에 걸렸던 잠금장치가 풀렸다. 이제 망설임도 없이 이 차에 있을 필요가 없는 은우는 차에서 내렸다. 듬성듬성 빠르게 쌩쌩 다니는 도로에 근접한 은우는 택시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헐레벌떡 물 한 병을 손에 들고 뛰던 승현은 이미 은우가 도로 한복판에서 택시를 잡아 뒷문을 열고 있는 것을 보고 재빠르게 다가갔다. 은우의 몸과 택시 사이로 파고들어 가로막아 택시 운전기사에게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기사님, 죄송합니다. 그냥 가세요.”
헉헉, 달리며 거친 숨을 내뱉은 승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은우가 단단히 화가 나서 소리칠 법했는데 조용한 것이 이상했다. 그러자 은우는 이미 다른 택시를 잡으려고 도로에서 손을 뻗고 있었다. 은우는 자신을 보려고도, 믿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승현이 은우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아당겼다.
“이거 놔! 이거 놓으라고! 나한테 아는 척하지 마.”
“은우 형…….”
나직하게 은우를 달랬지만 이미 은우는 흥분 상태가 되었다.
“……너 이거 무슨 짓이야!”
힘으로는 은우가 승현을 이길 수가 없어서 승현의 손을 풀려고 꼬집고 할퀴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저 승현의 손에 생채기만 일어났다.
“형… 어떻게 이래! 내가 물 사 온다고 기다리고 했잖아요!”
승현이 처음으로 은우에게 화를 냈다.
“뭐? 어떻게 이래? 너는 나한테 어떻게 이래! 이제 필요 없다고! 나, 나는….”
나는 믿었는데.
끝말을 삼켰다. 울분에 차올라서 같이 승현에게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믿었다. 승현이 지금까지 보여 준 모습이 낯설었지만 믿음이 갔다. 그런데 지금 그 믿음이 깨어진 거 같았다.
“나한테 너는 왜 이러는 건데! 아아- 너 별로냐고 물었지? 어! 그래, 너 정말 별로야. 이제 보니까 재수까지 없어! 답변이 됐어? 내 답변 받았으니까 이제 속 시원해?”
“형, 미안해…. 이러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은우가 흥분으로 생각나는 말을 막 내뱉었다.
“이제 네가 정말로 미안한지 아닌지 모르겠고, 다시는 아는 척하지 마! 나한테 너는 그냥 똥 밟은 정도로 치부해 버릴 테니까. 나한테… 손대는 것도 너무… 싫어! 너… 자꾸 다가오지 마!”
은우는 저도 모르게 울면서 소리쳤다. 그러더니 승현을 보는 것이 괴롭다는 듯 시선을 외면했다. 그가 떠는 손으로 손에 꽉 쥔 약통에서 약을 하나 더 꺼냈다.
이런 순간에도 은우는 자신보다 불길해 보이는 빨간 약에 의존하고 의지했다. 위급하고 다급한 순간에 처했을 때 조금은 자신에게 기대도 되지 않을까? 승현은 은우에게 자신이 그렇게 못 미더운 사람인 것에 화가 났다.
승현도 이번에는 지지 않고 화를 내며 은우의 손에서 약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약통 자체를 빼앗아 버렸다.
“야-!”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소리친 은우가 승현이 빼앗아 간 약통을 돌려받으려고 발버둥 쳤다. 하지만 승현은 은우의 버둥거리는 팔을 제압하며 은우를 꽉 안아 품에 가두며 속삭였다.
“조금은…….”
승현은 화가 가라앉지 않는 목소리였지만, 한없이 다감한 말투로 발버둥을 치는 은우의 뒷머리를 쓰다듬었다.
“조금은 나한테 기대도 되잖아…. 은우야.”
“…….”
“날 그렇게 못 믿겠어? 내가 지켜 줄 수 있게 해줘.”
흥분에 숨이 넘어갈 것처럼 헐떡이는 은우에게 향하는 승현의 목소리는 은우와 결이 다른 남자의 목소리였다.
“…울지 마. 그래, 차라리 내 앞에서 울어.”
“…….”
은우의 손이 움찔하며 발버둥 치던 움직임이 조금씩 차분해졌다. 작은 손이 승현의 허리춤에 얹을 듯 말 듯 망설여지고 있었다. 은우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렀다. 뒷머리를 쓰다듬는 승현의 손이 크고 따스했다.
“조금은… 너한테 듬직한 남자의 모습을 할 수 있게 기회를… 주라고.”
은우는 입술을 깨물었다. 승현이 나지막하게 말하는 말에 높고 단단하게 세운 자신의 성벽이 허물어지려고 했다.
“언제까지 숨어서만 살 거야, 언제까지….”
“…….”
“언제까지, 고슴도치처럼 가시 박힌 옷을 두르고 살 거야. 아무도 곁에 두지 않고, 혼자….”
눈을 꾹 감은 은우는 울음으로 깨문 입술이 떨렸다.
“힘들면, 정말 힘들면… 나한테 기대 줘, 응? 이제 그래도 되잖아.”
승현은 은우의 흥분이 가라앉은 걸 확인하고 살포시 힘을 주어 안은 은우를 놓아주었다. 눈물을 흘리는 은우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롭게 빛나며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승현은 은우의 볼에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쳐 닦으며 말했다.
“아주 조금 내가 들어갈 수 있게 틈을 만들어 줬으면 좋겠어, 응?”
그리고 힘있게 은우에게서 빼앗은 작은 약통을 꽉 쥐더니 저 멀리 던져 버렸다.
“아…! 너… 무슨……. 아, 안 돼.”
은우는 경악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떨어지는 약통을 허공에서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홀린 사람처럼 승현의 팔을 풀더니 약통이 떨어졌을 곳을 예측하여 향해 걸어갔다. 이제 은우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이제 약 말고, 그만……!”
“안 돼…. 약이….”
승현은 흐느적거리는 은우를 잡아 세웠다. 은우는 시선을 자신에게 주지도 않고 바닥에 떨어져 사라진 약통을 찾으려고 두리번거렸다.
“형… 몸에 부담이 가잖아요. 맨날 식욕도 없어서 밥도 못 먹고, 잠은 쏟아져서 넘어지려고 하고! 하루에 대체 몇 개씩 먹는 거예요! 대체! 난 그런 형 보고 싶지 않다구요!”
은우의 어깨를 잡아 아프지 않게 흔들며 승현은 멍한 은우의 정신을 깨웠다.
“내가 본 것만 해도 하루에 못해도 여섯, 일곱 알씩 먹는 거면…. 그럼 내가 안 볼 때도 먹는다고 한다면 대체…!”
“너, 너, 너! 이거 놔…. 네가 뭘 알아! 뭘 아냐고! 너 따위가 뭘 아는데. 나에 대해…!”
결국 은우의 입에서 거친 쇳소리가 흘러나왔다. 뾰족한 고슴도치가 가시를 바짝 세워 몸을 웅크려 방어했다.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은우는 승현이 내던진 약을 주우려고 붙잡은 그의 팔을 뿌리쳤다. 이쯤 떨어졌겠지. 은우는 약통이 떨어졌을 법한 곳으로 달려가 훌쩍거리며 바닥에 엎드려 손바닥으로 더듬거렸다. 거의 바닥에 기어 다니는 모습이 처량했다.
“은우… 형!”
은우가 비참하게 보일 정도로 그 알약에 얽매이는 모습을 보며 승현은 그를 불렀다. 은우를 감싼 소문들이 형태가 되어 은우를 짓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엎드려 바닥을 기는 은우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뭐라고…. 뭘 할 수 있을까.
승현은 은우를 그 모든 것에서 해방시켜 주고 싶었다.
“흐읍…….”
은우는 결국 약을 찾지 못했다. 쭈그려 앉아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엉엉 울었다.
“……형.”
승현은 이렇게 민감하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바들바들 떠는 은우에게 다가간 승현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은우는 키가 170이 넘었어도 가벼워 쉽게 들렸다.
“놔.”
냉랭한 목소리가 울음소리에 잠겼다. 당장 승현이 꼴도 보기 싫어져서 빨갛게 충혈된 눈을 억세게 소매로 닦은 은우는 승현을 등졌다.
“…미안해요, 형.”
승현은 은우를 등 뒤에서 꽉 끌어안았다.
“이거 놓으라고, 나 화났으니까. 너하고 더는 상종하고 싶지 않아. 네가 뭔데…. 네가 나에 대해 뭘 아는데….”
“나는 절대, 안 놓을 거야.”
“…….”
“맞아요. 형, 나 형에 대해 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까 나는 형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니까 놓으라고.”
은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떨림은 어깨로 이동하더니 어깨도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은우는 눈을 꾹 감았다.
“싫어. 내가 모르니까… 형. 제발 내가 형을 더 알 수 있게 해줘요.”
“…….”
은우의 떨림은 울음으로 나타났다. 승현의 팔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비틀었지만, 여전히 승현의 힘을 이길 수 없어서 울음 섞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제발… 놔줘…. 싫단… 말이야.”
하지만 승현은 더욱더 세게 몸을 밀착해 안았다. 등 뒤로 승현의 넓은 가슴과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그의 가슴은 자신을 완전히 덮을 정도로 완전히 감싸 안았다. 은우는 발버둥 쳐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았다. 조금씩 격양되었던 감정과 울음이 그의 품 안에서 가라앉았다.
“이제… 형, 진정됐어요?”
“아니.”
냉랭하고 싸늘하게 대답하는 은우의 목소리는 울음 때문에 떨리고 있었다.
“미안해요. 형.”
승현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하늘거리는 은우의 얇은 머리카락이 턱 아래를 간지럽혔다. 새하얀 목덜미가 자신의 시야에 잡혔다. 척추로 이어지는 목뼈의 가시돌기가 도드라져 보였다. 이 목선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오늘도 자신은 또 실패하고 말았다. 공략법이 잘못되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쌓아 온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음을 은우가 내뿜는 분위기에서 느꼈다.
“…그러니까 형…. 나 싫어하지 말아요. 응? 내가 다 잘못했어.”
은우가 점점 진정하더니 이성적인 모습으로 돌아왔다. 대신 첫 만남 때처럼 가시 돋친 억양은 변함이 없었다.
“싫어, 놔. 너하고 이제 다시는 말도 섞고 싶지 않아, 너도 똑같아. 다른 사람들이랑….”
“형… 제발.”
승현은 더욱 꽉 끌어안으며 매달렸다.
“너는 다를 줄 알았어. 다른 사람처럼 너는 안 그럴 줄 알았어. 근데… 결국 너도 그들하고 똑같은 사람이었어. 조금이라도 믿었던 내가 바보였어.”
은우는 상처받은 목소리였다.
“은우 형… 미안해요. 응?”
“…지금까지 나 가지고 노니까 재밌었어?”
“그런 거 아니잖아요, 아닌 거 알잖아요, 형. 나 정말… 형 너무 좋아하는데…. 형은 매일 아파 보였단 말이에요.”
“…….”
미안하다, 잘못했다. 승현은 자꾸 속삭였다.
“미안해요. 형… 나는 형이 그 약 때문에 힘들어하는 거 보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그랬어. 근데 내가 잘못한 거였어. 그러니까… 미안해요. 그러니까 내가 데려다줄게요.”
“…너 도움 필요 없어, 나 혼자 갈 거야. 걸어서 가더라도 혼자서 갈 거야.”
“이제 안 그럴게. 진짜… 내가 다 잘못했어요. 형, 고집부리지 말구요.”
승현은 은우의 손에 차가운 물을 사 온 생수를 쥐여 줬다.
은우는 그 생수를 찌그러뜨릴 정도로 쥐며 바들바들 떨었다. 마음 같아서는 매정하게 쥐여 준 생수를 승현에게 던지려고 했다. 그런데 은우는 던지지 못하고 손에 꽉 쥐고 있었다.
이제 승현에 대한 마음이… 너무도 안에서 커져 버렸다.
소리도 없이 우는 은우를 승현은 차에 태웠다.
승현은 무거운 한숨을 쉬며 은우가 다시 차에서 뛰쳐나가지 않게 재차 나가지 말라고, 데려다준다고 거듭 약속을 하고 운전석으로 돌아왔다. 단단히 화난 은우를 승현은 눈치를 힐끗 살폈다.
은우는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 보여 승현은 어떤 말도 꺼내지 못했다.
은우는 화를 억누르지 못해 안전벨트를 꾸깃꾸깃하게 움켜쥐고 자신을 외면해 고개를 창밖으로 향한 채였다. 아직도 울고 있는 은우의 얼굴이 차 창문에 비쳐 보였다. 유리 창문에 흐릿하게 비친 은우의 얼굴은 화난 표정으로 굳어 있었다.
씩씩거리는 거친 숨소리가 잦아들었다. 서로 말없이 생각만 깊어졌다. 은우는 은우대로, 승현은 승현대로 말이다.
가장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점점 익숙한 도로와 건물의 풍경이 펼쳐진 장소로 은우를 태운 승현의 차량이 진입했다.
은우는 익숙한 동네의 풍경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은우의 집 앞에 다다른 차는 느릿하게 움직였다.
은우는 망설임도 없이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리고 천천히 차가 멈춰 서는 것을 느끼며 차갑고 낮은 목소리로 승현에게 통보했다.
“이제 십 분… 동안 만나는 거 없어. 다시 나한테 찾아오지 마.”
이제 그와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애들 장난도 끝이었다.
“…혀…….”
승현의 말을 듣기도 전에 은우는 싸늘한 냉기를 풍기며 재빠르게 차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뒤도 돌아보지도 않은 은우는 두꺼운 요새 같은 저택의 철문 뒤로 숨었다.
“휴우…….”
은우의 모습을 눈으로 좇은 승현은 한숨부터 내쉬며 핸들에 몸과 이마를 기대며 중얼거렸다.
“쳇, 이제 좀 열리나 했는데…….”
내뱉은 승현의 목소리가 조금은 음산했다.
“너무 성급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