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장. 알파의 ‘기억’ (7/22)

7장. 알파의 ‘기억’

굳은 얼굴로 2층 계단을 올라간 은우는 조용히 방문을 닫고 침대로 거의 기어가듯 올라갔다. 그동안의 설움을 토하는 울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흐, 읍… 흑…….”

침대에 덩그러니 앉아 울던 은우는 소리가 새어 나갈까 봐 몸을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차분히 생각하면 승현이 한 말은 틀린 것이 없이 모두 맞았다.

저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약을 오남용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또 모든 사람들을 겁을 내어 사람들과 가까워지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약을 먹지 않으면 불안해서 집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었다. 약을 꼭 먹지 않으면, 자신 몸에서 오메가의 페로몬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그 냄새는 역겨울 게 분명했다. ‘그날’ 이후 습관이 되어 불안할 때마다 야금야금 먹던 약이었다.

불안한 기분에 스스로 점차 강력한 억제 효과를 위한 약을 먹기 시작했다. 그게 습관적으로 그리고 강박적인 스스로의 통제로 인해 지난 몇 년 동안 먹는 약의 정도가 심해졌다.

분명 처음에는 정량대로 하루에 세 알이었다가 어느새 다섯 알, 또 여덟 알, 열 알…. 지금은 못해도 열다섯 알 가까이 먹고 있었다. 스스로도 느꼈다. 슬슬 몸에 축적되어 부담되고 있다는 것도 느꼈다.

분명 자신도 자각하고는 있었다. 조금 자제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는 있었지만, 먹지 않으면 안 된다고… 자기 스스로를 엄격하게 다그쳤다.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울던 은우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설마 지금도?”

지금도 자신에게서 오메가의 페로몬 냄새가 나는 게 아닐까 겁이 났다. 차에서 약을 먹은 걸 까맣게 잊은 은우는 승현이 먹지 못하게 던져 버린 것만 떠올렸다.

“…야, 약이…….”

다시 정신 나간 사람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우는 얼굴로 침대 옆 서랍을 열었다. 서랍을 가득 채운 것은 동그랗고 빨간 약이 포장된 은박지의 약이었다. 덜덜 떠는 손으로 은우는 은박지에 싸인 알약을 툭, 눌러 꺼내 입에 넣었다. 침대 옆에는 항상 놓인 물을 컵에 따라 물과 함께 꿀꺽 삼켰다.

그제야 불안했던 얼굴에 아주 조금, 안도의 빛이 흐르더니 은우는 침대에 옆으로 누워 몸을 웅크렸다.

✻  ✻  ✻

은우가 그 일을 겪었던 건 한 칠 년 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은우가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열일곱 살 때의 일이었다.

그날은 어느 외국계 기업의 CEO가 도심 외곽에서 여는 가든파티에 초대를 받아 참석해야 하는 날이었다. 외국계 회사답게 CEO는 외국인이었고, 그 외국인의 나라 풍습은 가족 단위로 파티를 여는 경우가 많았다. 그 기업은 일품 그룹의 아주 중요한 파트너였다. 그래서 그 가든 파티에 참석해야 하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집에서도 어지간해서는 이런 행사와 모임 같은 곳에는 은우를 잘 참석시키지 않았다. 아니, 은우를 거의 집밖에 내보내지 않았지만 얼마나 중요한 일이라는 듯 부모님은 은우와 함께 가든 파티에 참석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은우는 페로몬 억제제를 정량대로 복용했고, 오남용하지 않았다. 하필 그날은 히트 사이클이라고 불리는 오메가 발정기 주기가 있던 날이라, 막 약을 먹고 달리는 차 안에서 은우는 차 시트에 기댔다. 따스한 햇볕이 쏟아지는 차는 나른해서 졸음이 쏟아져 졸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하암…….”

하품을 길게 하는 은우는 앳된 얼굴로 엄마의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느릿하게 눈을 깜박거렸다.

“…엄마, 졸려.”

엄마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자신을 닮아 손이 작은 은우의 손을 꼭 잡고 만지작거리며 신신당부했다.

“은우야, 곧 도착할 거야. 졸면 안 돼. 알지?”

“알았어, 엄마.”

“엄마 옆에서 떨어지지 말고. 알았지? 약은 챙겼고?”

말할 힘도 없이 나른하게 졸린 눈을 비비며 은우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다 주머니에 넣은 약통을 슬쩍 꺼내 엄마에게 보여 주었다.

“그래, 한 이십 분 정도면 도착할 거 같으니, 조금 자도 괜찮겠다, 은우야. 도착하면 깨워 줄 테니까.”

“응, 엄마.”

스르륵 엄마에게 기댄 채로 은우는 포근하게 잠깐 잠에 빠졌다.

가든 파티가 나타내는 분위기는 격식이 있지 않고 굉장히 편안한 분위기를 지향한다. 한적한 밭이 펼쳐진 정원에서 화목한 분위기로 파티는 무르익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친목을 다지고, 고고한 분위기의 상류 사회를 단편적으로나마 보여 주었다.

봄날의 햇살이 가득한 야외는 따스했다. 가족들 단위로 모여 두루두루 앉은 하얀 테이블에 화려한 꽃이 중앙에 장식되어 있었고, 자유롭게 사람들은 왔다 갔다 하며 가면 같은 얼굴을 한 채 인사를 주고받았다.

주로 일품 그룹의 변 회장에게 눈도장을 찍으려고 다가온 사람들이 줄줄이 줄을 섰다.

“안녕하세요. 회장님, 처음 뵙겠습니다.”

변 회장이 눈을 번뜩이며 환한 얼굴을 만들었다.

“아아, A&C의 한 대표님, 반갑습니다. 소식 들었습니다. 요즘 같은 불경기에 한 대표님의 안목이 아주 뛰어나다고요.”

“과찬이십니다. 회장님, 회장님에 비하면… 아직인걸요.”

은우의 아버지가 그룹의 회장님다운 미소로 한 대표와 허허, 웃으며 인사말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변 회장은 정윤과 은우를 소개했다.

“한 대표님, 이쪽은 우리 큰아들인 정윤이라고 합니다. 이제 대학 졸업을 앞두고 경영 수업을 받을 예정입니다. 아마, 다음 달에는 사교계 데뷔를 할 텐데… 그때 꼭 참석해 주세요.”

“아주 듬직한 아드님입니다, 회장님. 정윤 군, 잘 부탁하네.”

한 대표는 변 회장에게 칭찬을 늘어놓더니 정윤에게 손을 뻗었다.

“한 대표님, 잘 부탁드립니다.”

정윤은 공손하게 일어나 악수를 하며 허리를 숙였다. 변 회장은 그리고 은우를 향해 손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는 우리 둘째 아들 은우인데, 공부를 아주 많이 잘해서 내심 거는 기대가 큽니다. 한 대표님이 잘 봐주십시오.”

변 회장도 아버지라 자식 자랑을 안 할 수가 없는 듯했다. 한 대표는 역시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은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은우 군, 잘 부탁하네. 나도 올해 초등학교 졸업하는 둘째 아들놈이 있는데…. 은우 군처럼 공부도 잘하고, 의젓했으면 좋겠는데, 영…. 놀기 천재 같아서 말이야. 나중에 은우 군, 우리 둘째 아들놈 만나면 잘 가르쳐 주게.”

은우는 맑은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손을 맞잡으며 허리를 숙였다.

“반갑습니다, 한 대표님. 잘 부탁드립니다.”

변 회장은 은우까지 인사를 끝내자 한 대표에게 격식 있게 손을 뻗어 날카로운 눈빛으로 청했다.

“어떠십니까, 한 대표님, 잠시 저쪽에 가서 딱딱한 이야기라도 마저 나눠 보는 게…. 여기서 어려운 말을 하게 되면 아이들이 숨이 막혀 할 것 같지 않습니까?”

“예, 그러겠습니다. 회장님, 그럼 이쪽으로 가시죠.”

변 회장은 어머니와 정윤, 그리고 은우를 차근차근 빙 둘러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우는 아버지가 일어나는 모양을 따라 시선을 던졌다. 의자를 당겨 테이블에 바짝 앉은 은우는 차에서 잠깐 잤는데도 개운하지 않은 졸린 눈을 손등으로 비벼 멍하게 허공을 응시했다.

맛있어 보이는 음식들과 고즈넉한 분위기 있게 흐르는 클래식한 음악이 어우러졌다. 은우는 음식을 반쯤 비우고 물을 마시며 따분하고 지루함을 느껴 먹는 것을 멈추고 기지개를 켰다.

이번에는 은우의 어머니인 이사장님을 찾아온 다양한 각계의 사모님들이 다가왔다. 어쩔 수 없이 은우의 어머니도 자리를 떴고, 정윤도 훗날을 위해 이쪽의 친분을 쌓으려 자리를 일어났다.

“은우야, 금방 인사만 하고 올게.”

“응. 알았어, 형. 갔다 와.”

은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덩그러니 테이블에 혼자 남겨져 꼭 어미 잃은 강아지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무엇보다 혼자 덩그러니 있으려니 심심했던 탓에 은우는 조심히 자리를 일어났다.

이런 파티는 아주 어렸을 때 이후 처음이라, 모든 게 어려웠다.

징- 징-

핸드폰의 진동 알림이 울렸다. 은우는 무심하게 알림을 껐다. 벌써 약 먹을 시간이었다. 주머니에서 약을 꺼내 먹으려던 은우는 손을 멈췄다. 이곳으로 출발하기 전에 먹었던 기억을 상기시킨 은우는 약통을 꺼내지 않았다. 그것이 벌써 몇 시간 전이었지만, 은우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약을 안 먹은 것도 아니니까 말이다.

거기다 이렇게 알파라 많은 이곳에서 오메가라는 티를 내면서까지 약을 먹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이쪽 사람들이 던지는 오메가의 시선이 불합리했으니까. 약을 먹을 때 먹더라도 숨어서 남몰래 먹고 싶었다.

은우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보다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정윤이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고 이동했다.

은우는 정윤의 뒤에서 잠시 기다렸다가 대화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되는 것을 보고 정윤의 팔꿈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조심히 목소리를 냈다.

“…형, 여기 산책해도 돼?”

바람처럼 부드러운 로 톤의 목소리가 나긋하게 정윤을 불렀다. 이야기를 주고받던 정윤은 뒤를 돌아봤다.

“어? 은우야, 산책…? 응, 괜찮아. 근데 너무 멀리 가지 말고, 아까 물어보니까 저기 나무들 보이지? 저쪽으로 가면 체리 나무 밭이 있대. 한창 제철이라니까 가서 따 먹어도 되나 봐.”

“응.”

정윤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체리 밭을 알려 주었고, 정윤보다 키가 작은 은우는 발꿈치를 살짝 들어 손끝을 따라 가리키는 곳을 확인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웃음으로 은우는 몸을 돌렸다.

“잘 익은 거로 따 올게.”

덥지도 춥지도 않은 딱 좋은 봄 날씨는 따스했다. 복작복작한 가든의 사람들을 헤치며 은우는 조심스럽게 지나가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체리 밭에서 체리를 많이 딸 생각에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은우가 처음 보는 정윤의 나이 또래로 보이는 사내 둘을 스쳐 지나갈 때였다. 순간적으로 후각을 자극하는 진한 향기는 알파의 페로몬이었다. 발걸음이 멈추고, 몸이 그 자리에 우뚝 굳었다. 정윤이 알려 준 체리 밭에 가려던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

지금 은우가 맡은 향기는 처음 맡아 보는 알파의 페로몬이었다. 몸이 굳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어렸던 은우는… 뒤편에서 들린 말소리에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는 것이 무서워졌다.

“…야, 오메가 아니야?”

“……맞는데?”

낯선 남자가, 킁킁거리며 자신을 향해 냄새를 맡았다. 역겹고 소름이 끼쳐 소름이 돋았다. 누군지도 모르는 사내가 끔찍한 톤을 만들어냈다.

“꼬셔 볼까 봐, 이런 냄새 나는 거면, 발정기 아니야?”

“그러게. 근데… 냄새가, 와…….”

“어때? 꼬셔서 가서 좆물이나 한번 빼자. 부르면 오지 않겠어?”

“찬성.”

방금까지 나른하고 지루하던 은우는 정신이 바짝 들면서 늘어진 몸에 긴장이 몸 곳곳으로 퍼졌다.

“야, 거기.”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본능을 자극하는 진한 알파의 페로몬 향기가 났다.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페로몬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오메가를 부르며 찾는 향기였다.

은우는 심장이 쿵쾅쿵쾅 뛰며 점점 스스로도 통제되지 않을 정도로 몸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반응하는 것은 공포였다. 고개를 빠르게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그 정체를 파악하려고 했지만, 숱하게 모인 알파들 사이에 숨어 버린 그들을 특정해내기는 불가능이었다.

“…아…….”

탄성을 내지른 입술이 겨우 움직였다. 발이 떨어지지 않으면서 손이 덜덜 떨렸다. 어디서 흘러드는 향기는 몸의 제어를 야금야금 앗아 가고 있었다. 본능적으로 그 페로몬의 향기에 몸과 정신을 놓을 뻔한 이성을 채찍질해서 몸을 움직여 내달렸다.

“여, 여기를… 나가야, 해….”

은우는 빠르게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헤치며 가족을 찾았다. 저쪽에 화기애애하게 사모님들과 대화를 주고받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엄마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처음, 처음으로 나, 알파 향기 맡았어…. 엄마.

어느 누가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알파에 반응해 버리는 자신을 보면 자연의 이치라는 걸 알면서도 부모님이 탐탁지 않을 거로 생각했다.

“어… 엄마! 나… 나, 먼저 집에… 가, 가도 되죠? 여, 여기… 심심해. 그리고 갑자기… 하, 할 일이 생각났어요.”

예의 따위를 지킬 겨를이 없었다. 은우가 대화하는 사이에 끼어들며 엄마에게 창백한 얼굴로 더듬거리며 말했다. 사색이 된 은우는 긴장으로 떨고 있었다.

“어머, 은우…야? 괜찮니?”

심심하다고, 할 일이 생각났다고 하는 은우를 보며 엄마는 낌새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채고 되물었다. 은우는 이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지 알고 있어서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다. 이대로 돌아가면 되리라 생각해서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으, 응…. 엄마,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심, 심하기도 하, 하고… 피, 피곤해서 할… 일도 있고….”

“정말 괜찮은 거야?”

“그, 그럼요. 그럼… 엄마, 먼저 갈게요.”

엄마가 걱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은우는 엄마를 걱정시킬 수 없었다. 티가 나지 않게 주먹을 쥐다가 펴며 아주 예의 바르게 주위의 사모님들에게 인사를 하고 다급하게 자리를 벗어났다. 은우는 형의 도움을 받고 싶어서 방금까지 형이 있던 자리를 둘러봤는데, 거기에는 이미 형이 없었다.

“아, 어떡하지…….”

겁을 잔뜩 집어먹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하아…….”

점차 어디에서 풍겨오는 알파의 페로몬이 강해져 자신을 끌어당겨 버티는 탓에 식은땀이 흘렀다. 본능을 일깨우는 페로몬이 뿜어내는 향기는 지독했다. 몇 번이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휘청이며 은우는 주차장 쪽으로 향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하늘거리며 지금 자신의 마음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까지 기억도 못 하고 있던 주머니 속 약의 존재를 떠올리며 떠는 손길로 주머니에서 약을 꺼냈다. 약통에 담긴 하얀 알약을 한 알 꺼내 입에 넣었다. 물이 있을 리가 만무한 상황이라 은우는 그냥 맨입에 찡긋하며 약을 그냥 꿀꺽 삼켰다. 그때가 처음으로 알약을 물 없이 먹을 수 있게 된 일이었다.

“콜록, 콜록….”

미끈하게 코팅된 알약이 스무드 하게 식도를 넘어갔지만, 목구멍에 걸린 느낌은 썩 유쾌하지 않아 잔기침을 몇 번 했다. 불길하고 다급한 발걸음에 은우는 건물을 통과해 주차장으로 향하는 문손잡이를 잡았다. 긴장으로 굳어졌던 몸이 드디어 주차장이라는 안도감에 휩싸여 작은 숨을 몰아 내쉬었다.

“후우…….”

안도감도 잠시, 등 뒤에서 낯선 사람의 존재감이 훅 들어왔다.

“씨발! 조막만 한 새끼가, 쥐새끼처럼 도망 다녀? 겨우 따라잡았네.”

거칠게 은우의 팔뚝을 잡은 사내는 다른 손을 이용해 은우의 남은 손을 잡았다.

“하, 하지 마!”

헉 소리와 함께 숨을 들이켠 은우가 소리쳤다. 시야가 팽글팽글 돌며 어지러웠다. 낯선 사내의 땀이 배어난 손바닥이 다시 자신의 입을 막았다.

“으읍!”

발버둥을 치는 은우는 심장이 쿵쾅거렸다. 두려움이라는 한기가 엄습했다. 주차장과 거리가 멀어지는 그림에 은우의 눈빛에는 희망을 잃은 빛이 서렸다. 공포에 흔들리는 동공으로 사위가 흐려졌다.

눈물샘이 찌릿하며 자극받자 눈물이 눈에 글썽거렸다. 머리는 소리를 치고 있는데 너무 무서워서 목에서 어떤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확실히… 오메가 맞네. 그것도 품질이 아주 좋아.”

어지러운 시야 속에서 은우는 고개를 들어 소리가 나는 쪽을 향했다. 남자는 두 명이었는데 눈물 때문에 흐릿한 시야로 얼굴이 구분되지 않았다. 하지만 목소리에서 담긴 것은 서늘한 비웃음을 지은 채 그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은우는 발버둥을 쳤다. 결박된 손에서 벗어나려 노력했다. 토할 것 같아서 은우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머리와 몸을 지배하는 알파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등 뒤에서 결박한 남자는 흥분했는지 끈적하게 무어라 말했지만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살려 줘.

정신이 혼미해지며 은우의 시야가 뇌 속에 안개가 끼듯이 뿌옇게 변하고 있었다.

두 사람에게서 풍겨오는 알파의 페로몬에 몸이 늘어지기 시작했다. 알파의 페로몬에 반응하는 자신이 은우는 너무나 무서웠다. 반응하는 몸뚱이는 심장이 크게 뛰었다. 처음 맡은 알파의 페로몬은 공포이면서 두근거림이라는 것이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알파의 페로몬이구나. 이런 게 알파가 내뿜는 페로몬이구나. 알파의 향기…….

내가, 약을… 먹었어야… 했는데…….

후회는 상처가 되었다.

절망에 빠져 있을 때였다. 비상계단의 문이 벌컥 열리며 헐레벌떡 숨을 몰아쉬는 정윤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우야!”

은우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단정하고 반듯했던 정윤의 얼굴이 뛰어와서 숨이 찬 것도 모른 채 경악으로 물들었다.

“…아, 씨발.”

두 사내는 욕지거리를 하더니 도망가기 위해 늘어지는 은우를 정윤을 향해 내던지더니 비상계단을 타고 뛰어 올라갔다. 누구보다 재빠른 쥐새끼 같은 영악한 움직임을 보인 건 두 남자였다. 정윤은 불같은 분노를 느껴 그들을 쫓으려다가 바닥으로 쓰러지는 은우를 붙잡았다.

“은우야, 이게 무슨 일이야. 대체 저놈들 누군데, 왜…!”

“하아, 하아…. 으읏, 읍!”

답답한 상황에 벗어나 은우는 겨우 숨을 헉헉 쉬며 사시나무처럼 떠는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막 헛구역질이 올라올 것 같아서 입을 꽉 눌렀다.

충격을 받은 은우의 눈동자는 풀려서 초점이 흐려졌다. 손을 덜덜 떨면서 은우는 주머니에 넣어 둔 약통을 어렵사리 꺼냈다. 그만큼 힘이 풀리고 정신이 멍했다.

“은우야! 정신 좀 차려 봐!”

“…….”

어떠한 대답도 반응도 없는 은우는 기계 같은 움직임으로 약통에서 약을 꺼내 입술로 물었다. 물 없이 약을 삼키는 건 곤혹스러웠지만 지금 은우는 아무렇지 않았다. 목구멍에 걸리는 약의 불편함보다 몸에서 강제로 깨어나 피어나는 오메가의 페로몬을 억누르는 게 우선이었다.

“…형, 나 너무 무서웠어….”

충격으로 은우의 눈빛이 아직도 멍하게 흐렸다.

바닥에 주저앉은 은우를 바라보는 정윤도 제법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런 일을 겪은 어린 자신의 동생보다 몇 살 더 먹은 정윤은 정신을 다잡았다.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어. 괜찮아, 형이… 찾아서 갚아 줄게.”

“…아, 아빠가… 알면… 어, 어떡하지…?”

은우는 꼭 옷에 알파의 페로몬이 묻은 거 같았다. 입고 싶지 않았다. 정윤이 은우의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은우의 재킷을 벗겼다. 은우가 형인 정윤인 걸 알면서도 손길에 흠칫 움츠러들었다.

“괜찮아, 괜찮아…….”

정윤은 차분하게 은우를 안심시키며 위로했다.

오늘을 위해 특별히 맞춤 제작한 비싼 슈트였지만, 정윤은 거침없이 은우의 재킷을 바닥에 던져 버렸다. 당장 마음 같아서는 은우의 옷도 전부 벗겨서 버리고 싶었지만 지금 여벌의 옷이 없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정윤은 급한 마음에 자신의 재킷을 벗어 은우의 어깨에 걸치면서 입혀 주었다.

마른 은우의 상체가 안쓰러웠다. 오메가로서 형질이 발현되자 그 기점으로부터 은우는 부쩍 먹는 양도 줄고 체중이 감소했다. 몸에 맞지 않는 약을 먹는 걸 알았지만 자신이 말릴 방법이 없었다. 약의 작용으로 야위어만 가는 은우는 나날이 갈수록 왜소해져 자신의 옷은 너무 컸다. 어깨에 걸친 옷을 단단히 여미어 주며 정윤은 은우를 일으켜 세웠다.

“지금은 아무런 걱정도 하지 마, 은우야. 형이 다 막아 줄게.”

엄마가 자신에게 은우가 걱정된다며 은우를 찾아보라고 했는데. 정윤은 빨리 은우를 찾을걸, 더 빨리 은우를 발견하지 못한 것이 후회였다.

은우에게 체리 밭을 알려 준 건 자신이었기에 제일 먼저 달려간 곳은 체리 밭이었다. 하지만 체리 밭 어디에도 은우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재빨리 주차장으로 주변을 살피는 것도 없이 내달렸다. 비상계단 출입구에서 들린 음흉한 웃음소리가 아니었다면 은우를 놓쳤을지도 몰랐다고 생각하니 정윤도 아찔해졌다.

비틀거리며 걷는 은우를 데리고 정윤은 세단이 즐비해 주차된 곳으로 향했다. 은우의 어깨를 감싸 지탱했다. 휘청거리는 은우의 얼굴은 아직도 핏기가 싸늘하게 사라져 숨 쉬는 송장처럼 보였다.

은우를 데리고 차에 다가간 정윤은 그를 뒷좌석에 앉혔다. 그리고 허리를 굽혀 뒷좌석에 앉은 은우를 보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집에 먼저 가 있어. 형은 엄마랑 아버지 모시고 갈게. 그리고… 옷은 싹 갖다 버리게 해. 일하시는 아주머니한테 버려 달라고 말하면 다 알아서 해주실 거니까.”

“…형, 무서워…. 같이… 가….”

더욱 움츠러드는 은우는 울음을 터트리며 정윤의 옷자락을 꽉 쥐고 말했다.

정윤은 어떻게 할까 잠시 생각했다. 아까 사라진 놈들을 잡고 싶기도 했지만, 눈앞의 은우가 진정이 되지 않아 보여 입술을 깨물었다가 말했다.

“그래… 알았어. 중간에 가다가… 백화점이라도 들러서 옷 새로 사 입자.”

결국 정윤은 은우의 옆자리에 올라탔다. 정윤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은우는 안도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정윤에게 꼭 붙어 있었다. 커다란 정윤의 손을 꽉 잡은 은우는 그곳을 떠나는데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정윤이 운전기사에게 무어라 말을 하는데 은우는 들리지 않았다. 부드러웠던 눈동자는 충격을 받아 흔들리는 것이 진정되지 않았다. 눈물이 바지 위로 툭툭 떨어지니 물기가 스며들어 바지의 색이 진해졌다.

빨리 몸을 씻고 싶었다. 몸에 묻은 알파의 페로몬을 씻어내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머리를 열어 뇌까지도 깨끗하게 씻고 싶었다. 처음 겪는 ‘알파’의 페로몬은 은우 저 자신을 흔든다는 사실을 배웠다.

은우의 운명은 이날을 기점으로 괴기해졌고, 모든 것이 파괴되었다. 오메가로 태어난 것도 서러운데, 은우는 억울한 일투성이였다. 들키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그 일은 결국 며칠이 지나지 않아 아버지에게 들키고 말았다. 억울하게도 피해를 본 것도 자신인데 혼이 나는 것도 자신이었다.

아버지에게 혼이 나며 바들바들 떨던 은우를 정윤이 막아서고 보호해 주었다.

“아버지도 아시잖아요. 은우는 잘못이 없어요.”

노기가 치밀어 오르는 아버지는 알면서도 처음으로 은우에게 큰소리를 냈다. 오메가인 은우를, 변 회장은 어릴 적부터 완벽하게 키웠는데…. 이런 일이 생겼을 줄은 변 회장도 몰랐다.

“왜 잘못이 없어! 약을 분명 제대로 챙겨 먹으라 하지 않았더냐! 은우 너는 특히 그런 헤프고 어설픈 빈틈은 보여서는 안 된다고 했다!”

화를 내는 아버지에게 은우는 할 말이 없었다. 아버지 앞에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인 은우는 가지런히 무릎 위에 올린 손을 세게 움켜쥐었다. 소리 죽인 울음이 끅, 흡끅 새어 나와 눈물을 흘렸다.

약을 제대로 먹지 않았다.

은우는 아버지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제가 약을 제대로 먹었다면… 그럴 일은 없었다고 생각했다. 바들바들 떨면서 은우는 숨고 싶었다. 그래서 정윤을 방패로 방어막으로 삼아 그의 뒤로 숨었다.

그리고 그 일이 있고 난 뒤 근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은우는 그때의 기억이 고스란히 상처로 남아 있었다.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다.

똑똑.

“……네.”

힘이 없는 목소리로 은우는 방의 출입을 허락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정윤이었다.

“은우야, 어때. 좀 괜찮아?”

“…응, 괜찮아. 형, 무슨 일이야?”

정윤은 하루 종일 잠만 자는 은우가 걱정되었다. 듣기로는 은우가 원래 먹던 오메가 약도 바꿨다고 들었다. 그 뒤로 은우는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잠에 빠져 있었고, 먹는 양도 확 줄었다는 것도 알았다.

은우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슬쩍 다가가 침대에 걸터앉아 은우와 마주 보았다. 흐릿하게 웃는 은우는 얼굴에 졸음이 가득했다.

“…약 먹었니?”

걱정되어 정윤이 물었는데 은우가 하품을 하면서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랬더니… 졸리네.”

정윤은 잠시 시간의 텀을 두었다가 조심히 말했다.

“그게… 은우야. 아버지가 그… 그때 그 두 사람을 찾았어.”

“……어?”

은우의 얼굴이 급격하게 굳어지면서 다시 창백한 낯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정윤은 은우의 반응을 보며 말을 머릿속으로 골랐다.

“아버지가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은우는 고개를 푹 숙이며 몸을 덮은 이불을 꽉 쥐었다. 주먹을 꽉 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정윤의 말을 가만히 경청했다.

정윤의 말에 의하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모 종합병원 병원장의 아들이었고, 다른 사람은 유명한 2선 국회의원의 아들이라고 했다. 은우는 무릎을 세워 얼굴을 파묻었다.

“…은우야, 어떻게 하고 싶어?”

정윤이 조용히 물었다. 은우는 눈물을 흘리는 얼굴을 들어 올렸다.

“형…….”

그리고 정윤에게 안겼다. 정윤은 작은 한숨을 쉬며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들썩이는 어깨가 흔들려 은우는 정윤에게 설움을 토했다.

“나, 나… 형, 용서하고 싶지 않아.”

“그래.”

“…….”

“그래, 복수해 줄게.”

고개를 끄덕인 은우는 정윤의 그 짧은 말에 마음 한구석의 상처가 나는 듯했다.

은우는 두 사람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고 했다. 정윤은 은우에게 약속했다. 복수를 해주겠다고.

꼬리를 잡히지 않을 방법을 생각해낸 정윤은 아버지에게 의견을 내었다. 정윤의 의견을 받아들인 변 회장은 참지 않고 손을 썼다. 활용할 수 있는 모든 재원을 이용했다.

계책은 정윤이 냈다. 정윤은 먼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병원 기록을 샅샅이 뒤졌다. 오진과 의료 사고가 없는 병원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리스트를 뽑아 정윤은 소송을 걸어 종합병원의 자격을 정지시키는 데까지 몰고 갔다.

결국 병원은 폐업하여 사라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의료 사고 책임을 물어 병원장은 징역을 살게 되었다.

국회의원은 비리와 뇌물 수수 혐의를 꾸몄다. 공직자의 부정부패를 찾아 여론을 몰아 조작하여 종국에는 의원직을 박탈시켰다. 정윤과 변 회장은 일부러 공론화를 주도하여 며칠 내내 메인 뉴스의 가장 중요한 소식으로 전하게 해서 높았던 명예를 땅으로 실추시켰다. 끝내 의원직 상실과 함께 징역살이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거기서부터 문제였을까……. 슬금슬금 소문이 이상하게 나기 시작했다.

그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일품 그룹의 둘째 아들을 덮치려고 했다, 라는 사실이 점점 변질되더니, 어느 순간 소문은 엉망으로 바뀌었다. 은우가 그 두 사람을 오메가의 페로몬을 이용해 꼬셨다…로 변질되었다. 더욱 그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바뀌며 악질적인 이야기로 변했다.

은우가 두 사람을 원래 노리던 것이 아니고, 그 둘을 이용해 모 연예인을 꼬시려고 했다가 실패하자 그 두 사람과 차마 입에 담지 못할 그런 관계를 즐기고 난 뒤 함정에 빠트려 버렸다… 등등 다양하게 여러 버전으로 이야기가 기이하게 변했다.

“일품의 둘째 소문 못 들었어요?”

“무슨 소문?”

“그게…….”

어떻게든 변해 버린 소문의 결론은 일품 그룹의 둘째는 입에 차마 담을 수 없을 만큼 문란하다, 라는 것이었다. 아마 일품이라는 그룹의 가치를 훼손시키고, 질투가 나는 사람들이, 특히 라이벌 기업의 사람들이 더더욱 그런 악성 루머를 주도적으로 퍼트려 변질시킨 것이리라.

당연히 변 회장은 불같이 화를 내서 그 소문을 내는 사람을 찾으려고 했다. 하지만 동시다발적으로 상류층 사람들이 두세 명만 모이면 이 사건을 입으로 옮기고 퍼트리는 탓에 묻히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이 살을 덧붙이고 왜곡시켜 퍼 날랐다.

이건 회장님도 어쩌지 못했다. 믿을 만한 건 시간이 약이라는 것뿐이었는데, 왜인지 시간이 지나도 은우에 대한 소문은 사그라지지 않았고 노골적으로 변해만 갔다.

이렇다 보니 회장님은 눈에 보이고 통제할 수 있는 은우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은우의 행동 감시와 생활 반경을 하나하나 통제했고, 뒷조사를 하는 것에도 가차 없었다.

아버지의 엄격한 통제로 인해 은우에게 그나마 있던 교우 관계가 모조리 끊어졌다. 친구들의 사소한 연락도 모두 비서나 집안의 집사를 통해서만 가능했다.

그러니까 친구들과 사소한 전화를 한다고 치면 직접적으로 통화는 못 하고, 비서를 통해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물론 메시지나 SNS도 모두 그랬다. 사춘기 소년들의 민감한 시기에 이런 일이 생기다 보니, 친구들은 모두 은우에게 연락하기를 꺼렸다. 그래서 결국 은우는 혼자가 되었다.

집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허락을 맡아야 했고, 심지어 편의점도 가는 데 허락을 구해야 했다. 대문을 넘는 순간 경호원이 늘 항상 곁에 있어 모든 생활과 활동을 아버지에게 보고했다. 하나부터 열까지 혼자서 결정할 수 있는 건 없어졌다.

유일하게 자신의 의지로, 생각대로 결정할 수 있는 사항은 지금 밥을 먹을까? 말까? 아니면 지금 잠을 잘까? 말까? 하는 것들뿐이었다.

정윤이 자신을 대신하여 그 사람들에게 복수해 주었는데 마음의 상처가 낫지 않았다. 문득문득 그때 맡았던 알파의 페로몬이 떠올라 소름이 돋을 때면 피부를 칼로 도려내고 싶다는 충동을 느끼는 날이 많아졌다.

하루는 은우는 활활 타는 불길을 점차 가까이하고 있었다. 그들의 페로몬 향기를 잊을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았다. 알파는 싫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닿는 것도 싫었다.

특히 알파들이 페로몬을 뿌려 대며 집적거리는 건 혐오 그 자체였다.

“은우야, 거기서 뭐……! 은우야!”

정윤은 은우를 찾으러 왔다가 은우가 울면서 불길에 손을 뻗는 모습을 보며 사색이 되어 은우를 뜯어말렸다. 그 순간 정윤은 은우가 자살하려는 줄 알고 화들짝 놀랐다.

이때 이후로 은우는 정신과 치료와 상담 치료를 병행하여 이제 그런 짓을 하지 않게 되었지만,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변한 것은 돌이킬 수 없었다. 그나마 그 두 사람에게 일의 대가를 치르게 했다는 사실은 아주 작은 위안이 되었을 뿐이었다.

변 회장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는 소문이 이제 정말로 진정시킬 수 없다는 걸 깨닫고, 진상을 밝힌다는 것이 헛수고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명을 하면 할수록 이야기는 더 괴기해졌기에.

은우는 아니라고 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은우에게 날아드는 것은 조롱과 노골적으로 바라보는 음탕한 시선과 음담패설들이었다. 억울해도 해명조차 할 수 없이 입을 다물어야 했다.

그래서 자신이 열여덟 살이 되어 경영권을 포기한다 했을 때 아버지는 아쉬워했어도 의외로 쉽게 허락했을 뿐만 아니라, 어딘가 편안해 보이는 안색을 보였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그 일이 일어난 뒤 경영권을 포기하고, 이 년이 지나 대학에 진학한 뒤에야 조금씩 아버지의 통제와 영향권을 정윤에게 풀어달라고 조르고 졸라서 조금씩 자유를 만끽하기 시작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