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 보스전
야심한 새벽의 도로는 제법 한산할 줄 알았는데 도심지로 들어서니 그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밝은 빛과 쌩쌩 달리는 차들이 가득한 것을 보니 은우는 딴 세상 같다는 생각을 조금 하게 되었다. 이 시간에 밖에 나와 본 적이 없었으니 신기했다.
“이 시간에도 차들이 많구나.”
“당연하죠. 그나마 여긴 없는 거예요. 소위 말하는 힙한 곳에 가면 바글바글해요.”
“정말?”
“안 가 봤어요? 아… 이 시간에 밖에 있어 본 적이 없다고 했지.”
혼잣말처럼 승현은 자문자답했다.
“…한번 구경하고 싶다.”
우스갯소리로 웃으며 승현이 되물었다.
“구경만?”
쑥스러운 듯 은우가 눈을 깜박이며 대답했다.
“나는 할 줄 아는 게 없어…. 그래서… 음, 구경만 해도 좋을 거 같아.”
“나중에 데려가 줄게요. 형의 모든 첫 경험은 나랑. 맞죠?”
“어……?”
은우의 얼굴이 신호등이 초록 불에서 빨간불로 순식간에 바뀌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빨갛게 변했다. 창밖에 던진 시선을 떼고 바닥으로 숙인 채 부끄러워하는 사이 차는 어느새 도심지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갔고, 익숙한 고급 주택가가 드러났다.
으리으리한 집은 흔히 저택이라고 부를 만한 집들이 즐비한 동네에 있었다. 이 집은 어느 기업의 사장님, 저기는 유명한 연예인의 집, 저쪽은 무슨 국회의원…. 한 집 건너는 어느 판사 출신의… 등등 이름만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듯한 유명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실 은우네 집이 가장 크고 제일 유명하긴 했다.
은우네 집에서 조금만 더 올라가면 승현의 집이었다. 그래서 엄밀하게 따지면 승현과 은우는 이웃 주민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조금 더 올라가면의 기준은 차를 타고 올라가는 기준이었다.
은우를 태운 승현의 차가 어마어마하게 큰 집 앞에 멈춰 섰다. 잠시 은우는 으리으리한 집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태워다 줘서 고맙다고 말할 뻔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 고마워야 할 일이 아니었기에.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휴우…….”
은우는 떨리는 숨을 진정시킨 채 차 문을 열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
승현을 향해 가볍게 말했다. 무덤덤하게 차 문을 쿵 닫고 은우는 대문으로 걸어가 벨을 꾹 눌렀다. 누구냐고 묻는 소리도, 기다리는 것도 없이 벨이 울리길 기다렸다는 듯이 철문이 대포 소리를 내며 열렸다.
차를 주차한 것도 아닌 채 승현은 시동을 다급하게 끄고 차 문만 잠근 채 큰 보폭으로 은우의 뒤를 따랐다.
“형… 잠깐만… 기다려요!”
은우가 조심히 철문을 닫으려고 하는 틈을 비집고 승현이 따라 안으로 들어왔다.
“어? 야, 너 뭐야….”
은우가 승현을 보며 놀란 소리를 냈는데, 승현은 은우의 손을 획 잡고 집 안으로 성큼 걸어 이동했다.
“야, 너 무슨 짓이야?”
소리를 낮춘 은우가 눈치를 보며 대문 근처에 달린 감시 카메라를 힐끔 올려다보며 승현의 손을 빼내려 당겼다. 하지만 승현은 벗어나려는 자신의 손을 더욱더 단단히 쥐더니 오히려 손가락 사이로 겹쳐 깍지를 단단하게 걸었다. 그의 힘을 이길 수 없는 은우는 또다시 끌려가는 모양새였다.
고풍스럽고 웅장하게 큰 집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승현의 눈빛이 진지하게 빛났다. 최종 보스를, 마왕의 던전을 앞둔 용사의 기분이 이런 걸까. 승현은 진지하게 목소리를 냈다.
“그거 알아?”
“……뭐를?”
“소문에 말이야. 너한테 손대면 삼대가 망한다는데….”
“…….”
은우는 처음 듣는 이야기지만, 아버지를 떠올리면… 가능한 이야기였다.
“오늘 그거 시험해 볼까? 먼저 맞는 매가 안 아프다니까, 화끈하게.”
“뭐…? 미, 쳤어? 너 우리 아빠… 누군지 몰라?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 빨리 가.”
조곤조곤 말한 은우는 다른 의미로 식은땀이 맺혔다. 말 그대로 은우도 아빠가 무서웠다. 그런데 승현은 자신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집으로 걸어갔다.
“야… 승현아….”
은우가 그를 불러 세웠다. 승현은 은우를 이끌며 앞서 몇 걸음 걷더니… 멈추어 몸을 돌려 돌아봤다.
“당장 네가 어떻게 할지 모르겠는데…. 아까, 나한테 아프다고, 빼 달라고 하면서 매달렸던 거 기억나지?”
“……어?”
은우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승현의 성기가 깊게 박혀, 돌처럼 팽팽해져 찢어질 듯했던 아픔이 살아났다.
“알파가 오메가한테 ‘노팅’ 했다는 건데….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지?”
“…….”
노팅……. 은우가 아랫배를 내려다보며 살살 쓰다듬었다. 아주 높은 확률로… 임신 가능성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발정기가 아니었는데 불구하고 노팅이 이루어졌다.
알파의 노팅은… 그만큼 무섭다. 오메가로서 교육을 받을 때도 노팅은 임신의 확률을 극악으로 높이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노팅의 종류가 다양하다고 했지만, 그렇게 아프게 올 줄은…. 그런 그와 몇 시간을 섹스를, 셀 수 없을 만큼 그의 정액을…. 은우는 허리가 풀릴수록 승현에게 의지하고 말았다.
승현이 생긋 웃는 미소를 은우에게 보냈다. 은우의 얼굴이 푸르죽죽해져 시체처럼 창백해지기 시작하는 모습은 핏기가 사라졌다고 보여 주고 있었다.
“나는 처음부터 허락 맡을 생각이야. 물론 ‘노팅’ 하리라는 건 예상외지만, 어떻게 해서든 나는 정식으로 교제 허락을 받아낼 생각이고.”
승현의 얼굴과 음성에는 초조함과 불안함 따위는 눈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이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그, 그렇게 임신이 쉬, 운 줄 알아? 가, 갑자기… 무슨….”
그게 노팅이었다니, 은우는 배워서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충격적인 아픔이라고 떠올렸다.
“그런지 아닌지는 잘 생각해 보고, 하지만 확실한 건….”
못된 웃음이 이어지며 승현이 은우에게 귀엣말했다.
“난 말이야…. 오늘 이 일까지 염두에 둔 거야, 물론 노팅은 아니었는데. 어쨌든… 나는 회장님께 허락 맡을 생각이었으니까, 아무 생각 말고 나한테 기대. 설마 때려죽이겠어?”
“…….”
“헐, 여기서 형이 그렇게 무서운 표정을 지으면 내가 좀 무섭잖아? 설마… 맞아 죽을까?”
은우의 긴장을 풀어 주려고 했다. 승현은 히죽 웃으며 창백한 은우의 볼을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지켜 주고, 다 막아 줄 테니까.”
은우는 말문이 막혔다. 그는, 한승현은… 폭군 같은 야만이었지만, 의외로 의지가 되는 남자였다.
포근하고 안락한 집의 현관문에 다다랐다. 은우와 승현에게는 지금 지옥문이 따로 없었다.
✻ ✻ ✻
승현은 은우가 사는 광활한 저택의 규모를 처음 접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돌계단을 지나쳐 기나긴 정원의 분수까지 스쳤다. 현관문에 점점 다가가자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굳게 닫힌 문은 열기 무서울 정도로 중압감이 느껴졌다. 승현은 문 앞에서 아주 잠깐 심호흡을 하며 현관문에 손을 뻗었다.
늦은 밤, 아니 이제 새벽이 되었는데 집 안은 대낮인 것처럼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승현은 제집인 양 현관문 안으로 몸을 밀어 넣고 꽉 잡은 은우의 긴장을 풀어 주려 했다.
“긴장하지 마요, 은우 형. 겁나거든 내 뒤에 숨어 있어.”
작은 손이 긴장으로 차갑게 굳어 있었다. 현관을 통과하니 간유리가 끼워진 중문이 있었다. 넓은 양문형으로 되어 있는 중문에서 저택의 규모가 느껴졌다.
거실인 홀로 이어지는 복도를 걸었다. 다시 거실로 이어지는 문이 있어 손잡이를 잡고 돌렸다. 거실로 가까워질수록 은우가 더욱더 굳어져 갔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축구를 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할 정도로 크고 넓은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중앙의 커다란 소파에는 심각한 표정으로 근엄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변 회장님이 앉아 있었다. 승현은 TV에서나 보던 일품 그룹 회장님을 처음 실물로 영접했다.
과연, 최종 보스였다.
변 회장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오라에 당당하던 승현도 저절로 움츠러들 정도였다.
역시 그룹의 회장님 정도가 되면 그 속내는 감추어야 하는 것이 맞는지 승현은 변 회장의 분위기와 속내를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어릴 적부터 이것저것 경험을 해준 탓에 어지간한 사람들의 속내 정도는 읽을 수 있지만, 변 회장은 파악하지 못했다. 다만 화가 났다는 건 읽을 수 있었다.
승현이 은우를 등 뒤로 감춰 보호한 채 입성했을 때부터 변 회장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승현은 천천히 시선을 옮겼다. 회장님 옆에는 은우의 어머니인 문화 재단의 이사장님과 그 옆으로 형으로 보이는 남자가 심각한 얼굴을 한 채 서 있었다.
은우가 왜소해서 다행이었다. 은우가 자신의 등 뒤로 감춰져서 다행이었다. 승현은 은우를 보호하며 천천히 다가갔다. 슬쩍 뒤를 돌아보며 곁눈질로 은우를 살폈는데, 은우는 마치 사형 선고를 앞둔 사형수처럼 고개를 들지 못한 채였다.
“결국 이렇게 죄지은 사람처럼 있을 거면서…. 뭘 알아서 한다구요?”
변 회장을 응시한 채 일부러 소리를 낸 승현은 은우에게 말했다. 흔들림 없는 눈으로 승현은 진작에 각오를 마친 눈빛이었다.
승현이 방금 소리를 내서 한 말에는 나름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눈앞에 둔 이 무시무시한 회장님을 향해 기선 제압을 할 심신이었다. 그것이 물론 얼마나 먹혔을지는 알 수 없었다.
“조용…히 해….”
은우가 승현의 등에 딱 붙어서 넓은 등에 대고 말했다. 공기를 타고 들리는 소리가 아니라, 등을 진동하는 파동으로 승현은 알아들었다. 씩 웃는 승현은 허리를 반듯하게 숙였다.
“안녕하세요.”
하지만 줄곧 가족들의 분위기는 가라앉아 부드러워지지 않아 승현의 얼굴도 조금씩 굳어졌다. 거기다 기선 제압을 할 생각이었는데 오히려 자신이 당한 기분이었다.
이곳에서 누구 하나 자신의 인사를 받아 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 정도로 냉담을 받을 줄은, 아니 투명 인간 취급하는 탓에 승현은 속으로 당황했다.
앞으로의 험난한 여정을 떠올리며 냉엄한 분위기에 사람 좋아 보이는 웃음을 지으려던 승현은 긴장하여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분위기만 봐서는 소문이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지금 당장 딱, 삼대가 망할 분위기 그 자체였다.
“아, 아빠…….”
승현의 등에 숨어 있던 은우가 빼꼼하게 나와 소리를 냈다. 떨리는 은우의 목소리가 기어갈 듯했다. 이렇게 큰일을 벌인 자신에게 아빠가 뭐라고 할지 은우는 감이 오지 않았다.
은우의 작은 목소리에 겨우 변 회장이 고개를 느릿하게 움직이며 무감정한 표정으로 힐끗 승현을 응시했다. 변 회장의 시선에 담긴 것은 무관용과 무관심이었다.
아무리 이것저것 많은 경험을 겪었다고 해도 갓 스무 살이 된 승현이 그 엄중한 중압감을 견디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 뒤로 주춤 물러나야 했다.
변 회장은 근엄하게 정윤과 은우의 어머니를 순차적으로 보더니 무겁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동요한 흔적이 하나도 없는 태연한 목소리였다.
“정윤이 놈하고, 은우 따라 들어와라…. 그리고 너도.”
마지막으로 변 회장은 냉철하게 시선을 승현에게 향하다 소파에서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안쪽으로 향했다.
정말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처럼 정윤과 은우, 그리고 승현은 움직였다. 로비를 지나 서재로 정윤이 앞서가고, 승현이 따라가는 모양새였다. 그리고 승현은 집에 들어와서 지금까지 은우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은 채 은우를 등 뒤로 감쌌다.
걷는 자세에서조차 변 회장의 위엄이 묻어났다. 변 회장은 그들을 데리고 서재로 향했다.
서재는 박물관에서 볼 법한 고풍스러운 풍의 가구로 채워져 있었다. 거실도 크고 넓었는데 서재도 만만찮게 넓어 유럽의 고성에서나 볼 법한 홀처럼 보였다.
어두운 갈색의 책상과 그 앞으로 10인은 넉넉하게 앉을 수 있을 어두운 갈색의 소파와 고급스러운 소파 테이블에는 먼지 하나 쌓이지 않게 반질반질해 보였다.
정윤은 소파의 한편에 자리를 잡고 앉으면서 승현을 향해 무거운 목소리로 손짓했다.
은우가 승현의 등 뒤로 몸을 숨긴 걸 정윤은 보았다. 오늘 시험 본 뒤 친구와 놀러 간다던 은우에게 연락도 없어서 걱정과 화가 나려던 게 가라앉았다.
적어도 은우가 자신이 아니라, 승현에게 기댔다는 사실에 정윤은 안심이 되었다. 이제야 은우가 앞으로 안정을 취할 수 있게 몸과 마음을 기댈 곳을 찾은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앉아. 그… 은우, 손은 안 놓을 거지?”
설핏 입꼬리를 올려 웃던 정윤은 승현과 눈이 마주쳤다. 은우는 자신의 이름이 불린 것만으로도 움찔하며 승현의 팔에 꼭 붙어서 몸을 숨겼다. 은우의 소심하고 여린 몸짓에 승현은 더욱더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잡았다.
변 회장은 천천히 책상 서랍에서 노란 서류 봉투를 꺼내더니 소파의 가장 위 좌석으로 다가와 느릿하게 앉았다. 그저 의자에 앉는 것만으로도 변 회장의 분위기가 너무 위압적이라서 승현은 침을 꼴깍 삼켰다.
다시 수십 초의 정적이 흐른 뒤 드디어 무거운 변 회장의 입이 열렸다.
“얘기해 봐. 어떻게 된 건지.”
낮고 단조로운 아버지의 목소리가 무섭게 다가와 은우는 뼈마디가 굳는 듯했다. 강하게 승현이 자신의 손을 잡아 주어 안심되었다.
승현은 옆에 앉은 은우가 소멸할 것처럼 움츠러들고 있다는 걸 느꼈다. 거기다 변 회장의 압박감은 농담이 아니었다.
보통 이런 일이 있을 때 가장 먼저 꺼내기 적당한 말로 ‘얘기해 봐’는 이상했다. 일반적으로 ‘무슨 일이냐’고 시작하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꼭 느낌이 나는 다 알고 있으니 사실대로 말해라, 하는 듯했다. 그런 기분을 승현은 받았다.
고개를 바싹 숙인 은우는 바들바들 떨면서 말도 못 하고 자신의 손만 쥐고 있었다.
늘 이런 식이었겠지. 승현은 그림이 그려졌다.
허구한 날 사고를 치고 혼날 일이 자신과 달라, 어쩌다가 혼날 일이 생기면 은우는 지금처럼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숙인 채….
승현은 예상보다 엄숙하고 엄격한 분위기에 당황했으면서도 떠는 은우를 등 뒤로 숨겨 변 회장의 무거운 시야에서 은우를 감춰 주었다. 승현의 예상 시나리오는 이것과 달랐다.
“아빠…….”
승현이 어떻게 무엇부터 말을 할까 생각하는 사이, 은우의 떠는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변 회장의 무덤덤한 반응에 은우가 자신의 등에 얼굴을 조금 더 밀착하며 가렸다. 승현은 몸을 살짝 앞으로 빼 은우를 가려 주었다.
은우는 이번에는 또 어떻게 혼이 날까. 겁을 내면서 천천히 입을 열어 말을 마저 하려고 했는데 승현이 말허리를 잘랐다.
“회장님, 제가 그랬습니다.”
승현은 잡은 손에서 전해지는 은우의 떨림을 느끼며 그를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은우에게 당당하게 말했다. 자신이 지켜 주겠다고, 자신이 모두 다 막아 주겠다고.
“은우 형은 싫다고, 저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먼저… 너무 형을 좋아해서, 싫다는 거 억지로… 만나 달라고, 좋아해 달라고 하루도 빠짐없이 쫓아다녔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상상한 것은 아니지만, 승현은 오늘 일을 꾸미면서 생각한 일이고, 각오한 일이었다.
은우의 손을 놓을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자신과 이어진 몸이었다. 허락하지 않아도 이제 은우는 자신밖에 품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한눈에 반한 은우가 질리지도 않고 여전히 좋았다.
“매일매일… 질리도록 은우 형만 쫓아다녔습니다. 제가 은우 형 정말 많이 좋아합니다, 회장님.”
변 회장은 표정의 변화 없이 말을 잠잠히 듣고 있었다. 승현의 강직한 말에 반응을 보이며 고개를 작게 끄덕이더니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변 회장의 시선과 승현의 시선이 허공에서 만났다. 아버지의 눈이 아닌 회장님의 눈이었다. 냉철한 대기업 총수가 가진 냉혹한 눈빛과 눈매였다.
승현은 어떻게 저런 사람에게서 은우가 나왔는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의외로 은우와 닮은 눈매를 가졌으면서 은우와 차원이 다른 느낌을 주었다.
세월의 역경을 이겨낸 그 눈빛은 자신의 가슴과 머리를 열어 훤히 들여다보며 읽어내고 있는 눈빛이었다. 속내를 들키지 않으려고 했는데, 연륜을 이기지 못해서 그에게 드러내고 말았다. 더 이상 들키지 않으려 눈을 피해 버렸다.
변 회장은 냉철한 표정과 어조를 가지고 단조롭게 감정 변화라고는 없이 승현을 쳐다보았다.
“안다. 이미 진작에 비서실을 통해 보고받았다.”
갓 스무 살이 된 어린 사내에게 향하는 변 회장의 말은 지나치다고 생각이 들 정도로 상당한 위압감을 가지고 있었다.
변 회장은 눈살을 꿈틀거리며 승현을 똑똑히 보았다.
A&C의 한 대표가… 호랑이 새끼를 키울 줄이야.
분명 이제 막 스무 살의 어린 나이의 패기라고 해도 그룹의 총수인 자신의 기백에 주눅이 들지 않는 것에 묘한 흥미가 생겼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채였다. 혈기만 믿고 덤볐다가는 큰코다칠 테니, 지금 한 번은 꺾어 주어도 괜찮겠다 싶었다.
“보고에 요즘 은우에게 자주 들러붙는 이가 있다고 하더구나.”
승현과 은우는 조금 놀란 눈을 해서 서로 마주쳤다. 변 회장의 ‘보고’를 받았다는 말에 두 사람은 둘 다 입을 다물었다.
‘보고’라는 것은… 사적인 경계가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부모가 자식의 이런 일을 두고 ‘보고’라고 하지 않는다. 이럴 때는 일반적으로 ‘알림’이 조금 더 맞을 것이다. 그런데 은우의 아버지는 ‘보고’라고 했다.
두 사람은 변 회장이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변 회장의 말은 계속되었다.
“그게 A&C 그룹의 둘째 아들 한승현 군, 이라고 하더구나.”
“…….”
승현은 입을 다물었다. 변 회장은 더욱더 승현의 기를 단숨에 꺾어 버리게 압박하며 한심하다는 말투로 말했다.
“네가 우리 은우 뒷조사를 좀 했더구나. 어린놈이 돈 좀 있다고 돈의 힘을 믿어 돈을 좀 썼어. 그래서 네가 돈을 이용했듯이, 나는 힘을 좀 이용해 봤다.”
은우는 선뜻 아버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말을 하지 못했다. 뒷조사라는 말은 처음 들어서 슬쩍 눈짓으로 승현의 옆얼굴을 살피다가 다시 정윤을 살폈다. 형의 눈과 마주쳤다.
정윤은 어느새 회사의 전무 자리에 있었다. 정윤은 자신만 알아볼 수 있게 어깨를 들썩하며 본인 자신도 당황하며 모르는 일이라고,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제스처를 보였다.
고요한 서재를 단 몇 마디로 제압한 변 회장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회장님의 미소는 분위기를 온화하게 만드는 미소가 아니었다. 시의적절하게 알맞은 타이밍에 나왔다. 얼굴에 드러나는 표정, 눈빛 하나하나가 모두 계산된 연출이었다. 회장님의 미소는 무기였다. 숨도 쉬지 못할 만큼 압도적인 공기를 만들어냈다.
“너희 두 사람이 나는 그저 어린애들이나 겪는… 지나가는 봄바람인 줄 알았지….”
나긋하고 평화로운 변 회장의 목소리였지만, 뿜어내는 공기와 분위기는 전혀 그러하지 않았다. 살을 베고 찢어 속을 드러내게 했다. 그는 천천히 미소 띤 얼굴로 서재에 들어오자마자 찾은 서류 봉투를 열었다. 그리고 내용물을 꺼내 테이블 위로 툭 던졌다.
촤라락, 유광으로 반짝 빛이 나는 사진 십여 장이 먼지 한 톨 없는 테이블 위로 미끄러져 펼쳐졌다. 거기에 찍힌 사진은 모두 승현과 은우가 만나는 사진들이었다.
처음 승현의 손에 이끌려 두 사람은 카페에서 에스프레소를 마셨던 날. 도서관에서 공부하는데 책에 낙서해서 투닥투닥 싸운 날. 비가 오는 날 멋지게 차려입은 승현이 같이 우산 쓰자고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고 우산을 씌어 주었던 날.
그리고… 드라이브 가자고 승현의 차를 탄 은우가 승현에게 트라우마를 드러냈던 날까지… 모두 찍혀 있었다.
변 회장을 제외하고 그곳에 있던 세 사람은 말을 잃었다. 이곳에서 변 회장만 여유로운 태도를 보이며 예리함을 관철했다.
“그 봄바람의 장난이 지나쳤어… 아주.”
승현도 이렇게까지 예상을 벗어날 줄은 몰랐다. 상상을 초월한 변 회장의 철저함에 승현도 갈피를 잃었다. 변 회장이 뿜어내는 위암감에 처음으로 승현도 눈동자가 흔들렸다. 중년에게서 느껴지는 중후함과 무거움은 배짱 좋은 승현조차 주눅이 들게 했다.
“A&C 그룹 둘째 아드님이 이렇게까지 앞뒤 생각 없이 무분별하게 달려들 줄 몰랐지.”
은우는 진작에 아버지의 위압감을 못 이겨 다시 승현의 팔에 기대다시피 하며 몸을 숨겼다. 콕 집어서 말하는 회장님 때문에 입술을 꾹꾹 짓이긴 승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제 승현에게 고정되었던 변 회장의 시선이 떨어져 은우에게 이동했다. 엄격한 아버지의 목소리가 은우에게 파고들었다.
“은우, 너는 할 말이 없는 거냐?”
“아, 아빠…. 그게요.”
은우는 곧 눈물을 흘려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떨었다. 하지만 변 회장은 은우를 향해 질책하는 말을 했다.
“얼마나 그동안 헤프게 행실을 하고 다닌 게냐.”
혼을 내는 목소리는 호통을 치며 흥분해서 높아지고 빨라져야 하는데, 변 회장의 목소리는 또한 남달랐다. 더욱 낮아지고 느려지는 변 회장의 힐난에 그 공포가 배가되었다.
“은우 네가 그렇게 칠칠하지 못하게 돌아다니니, 이런 되먹지도 못한 날파리가 주위에 꼬이는 게 아니냐.”
“…….”
은우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누가 들으면 혼을 내는 것 같지 않게 아버지의 목소리는 무겁고 차분하게 진중했지만, 분명 말에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
승현은 눈가가 움찔했다. 자신을 두고 날파리 취급을 하는 일품 그룹 회장님은… 자신은 그저 보잘것없는 존재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변명이 있으면 어디 해봐.”
아버지의 말에 은우는 움찔했다. 고개를 들어 아버지와 눈도 못 마주치고 말도 못 했지만… 은우는 후회는 하지 않았다. 승현이 내민 손을 잡은 건 자신이었다. 어느 정도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걸 어렴풋이 그 손을 잡을 때부터 느꼈다. 그래서 은우도 각오했던 일이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아 승현의 뒤로 숨었다.
“은우 형은… 잘못 없습니다. 제가 했습니다.”
은우를 향해 나긋하게 몰아붙이던 변 회장의 시선이 이제 그 사이에 끼어든 승현에게 향했다.
“형은 싫다고 했는데 제가 억지로 끌고 갔습니다. 그러니까….”
승현은 주눅 들지 않으려 큰 눈에 힘을 주었고, 그리고 다른 한 손에 주먹을 꽉 쥐었다. 날파리 취급을 당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지만 승현은 변 회장의 위압감을 어떻게든 견뎠다.
은우의 손을 잡은 채 승현은 뒷말을 하지 못했다. 하고 싶지 않았던 것도 있었다.
지금 상황에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해야 합당한 상황인 건 알고 있었지만, 승현은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저 스스로 죄송할 일이 없는데 죄송하다고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은우를 함정에 빠트려 조금은 강제적으로 취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죄송하다는 말을 입에 담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자네에게 말하라고 한 적 없다. 네 대답은 됐다. 지금은 은우에게 묻고 있으니까.”
그러나 승현은 또다시 변 회장과의 기 싸움에서 눌려 버렸다. 변 회장의 반응은 또 예측하지 못한 말이었다.
“아… 아빠…….”
우물쭈물 은우는 입술을 옴짝달싹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승현이 꼬셨다 한들 따라나서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저 자신은 승현과 함께하길 원했다. 그래서 승현이 내민 손 뒤에 꾸며진 함정 속으로 어떻게 보면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그 결과는 지금과 같이 모든 것을 그에게 내주었다. 그것도 아주 격렬하게 말이다. 은우는 처음 겪는 쾌락이었고, 떨림이자 흥분이었다. 꿈속에서만 취했던 자신의 선량한 야만인이 실제가 되어 나의 몸속을 휘저어 놓았다.
아버지의 책망하는 소리는 무섭게 귓가에 파고들었다.
“나는 네게 실망이다. 난 네가 똑똑하고 사리 분별할 줄 아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철없는 애처럼 굴지는 몰랐구나. 내가 너를 잘못 본 것이냐?”
“그러니까… 아빠….”
은우가 결국은 눈물을 글썽거리더니 툭 아래로 떨어뜨렸다. 떨어진 눈물은 맞잡은 승현의 손등 위로 추락했다. 손등에 닿은 촉촉한 물이 은우의 눈물이라고 생각한 승현은 고개를 숙인 은우를 힐끔 보다가 변 회장에게 시선을 던졌다.
“회장님.”
철부지 애인인 줄만 알았던 승현의 목소리가 진중한 남자의 목소리로 흔들림 없이 말하자 은우가 고개를 들어 반응했다. 승현의 목소리에 담긴 힘에 의해 변 회장도, 그리고 정윤도 시선이 고정되었다.
“회장님께서 저를 날파리 취급하셔도 괜찮습니다. 돼먹지 못한 놈, 하겠습니다.”
은우를 등 뒤로 감춰 보호하며 흐트러짐과 흔들림 없는 눈빛과 목소리로 말했다. 승현은 변 회장에게 어떤 꼼수도 통하지 않겠다는 걸 깨달았다.
“은우 형은 잘못 없습니다. 형은… 안 된다고, 싫다고 했습니다. 그걸 제가 너무 좋아서 만나 달라고, 안 만나 주면 죽을 거 같다고…. 그러다 형이 너무 좋아서, 너무 좋아져서 정말…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거 같아서… 어떻게든 제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철이 없는 짓이라는 거다.”
변 회장은 그제야 인상을 찡그리며 거칠게 혀를 차며 말했다. 하지만 승현은 기죽지 않았다. 승현은 회장님의 호통에 눈 깜짝하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이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그래도… 회장님께 죄송합니다. 후회는 전혀 없습니다.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회장님께 죄송합니다.”
“아, 아빠…. 나, 나도 승현이가 좋, 아서…. 그래서 따라갔…어요.”
소심하게 움츠러든 은우가 떠는 목소리로 힘겹게 말했다. 하지만 변 회장 앞에서는 약해 휘청이는 몸을 지탱하려 승현의 팔에 기댔다.
“…….”
깊은 생각에 잠긴 것 같은 변 회장은 말이 없었다. 고요한 침묵도 변 회장의 계산이 깔려 있었다.
몇 분의 시간이 지났을까, 마치 영겁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이제 차분히 변 회장이 입을 열며 승현에게 향했다.
“앞으로 그래서 자네는 어떻게 하고 싶은가?”
승현은 순간 변 회장과 눈을 마주치며 번뜩였다.
과연 변 회장은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을 한 걸까. 무엇을 염두에 둔 것일까.
“저는 무서워서 도망가는 은우 형… 도망가지 못하게 잡아 놓고, 제 사람 만들었습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승현은 긴장된 침을 삼키었다. 이 말을 자신의 입으로 내뱉을 줄 꿈에도 몰랐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드라마에서나 흔히 볼 법한 대사였지만, 효과적이고 지금 상황에 찰떡인 표현이었다. 승현이 결의의 손짓으로 주먹을 꽉 쥐어 변 회장에게 자신의 결심을 보여 주었다.
“고작 A&C 그룹이 책임져 봤자… 그 정도는 너 따위가 아니어도 우리가 책임질 수 있다. 자네는, 우리 은우와 연애 놀이가 하고 싶은 건가? 뭘 하고 싶은 건가?”
어린 승현의 패기가 가소롭다는 듯이 짓누르는 변 회장의 비웃음이 차가웠다.
“…….”
승현은 대꾸도 못 하고 한순간에 파사삭, 가루가 되도록 갈렸다.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변 회장의 말이 너무 맞는 말이라서 할 말을 잃었다. 각오한 결의가 한순간에 작아지려고 했다.
“아빠… 나 승현이가 좋았어요. 나한테… 처음 다가와… 준 사람이야. 의심 없이, 나한테… 그래서 내 의지로 내가… 따라갔어요. 아빠 말대로 똑바로 처신하고… 그랬으면 안 갔을 건데, 그냥 그렇게 하고 싶었어. 승현이… 손잡고 따라간 거 후회 안 해요.”
이번에는 은우가 겨우 고개를 들어 창백한 얼굴에 식은땀을 이마에서 한 방울 흘리며 근엄한 아버지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지금까지 혼이 날 때는 한 번도 아버지의 얼굴을 올려다본 적이 없었다. 늘 은우는 정윤의 뒤에 숨어 있었다.
“이렇게 네가 무르게 행동하니까! 결국 이번에도 이상한 것들이 꼬이지 않느냐!”
변 회장은 이번에는 정말 참지 않고 버럭 소리쳤다. 은우가 흠칫하며 움츠러드는 것을 정윤이 확인하며 아버지를 말리려 엉덩이를 들썩거렸는데 승현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은우 형 좋아하는 거 저 후회 안 하고, 앞으로도 계속 좋아할 겁니다.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쫓아다녔습니다. 그런데도 매일매일 형이 좋아졌습니다. 지금도… 너무 좋습니다. 그래서 후회 안 할 겁니다. 회장님, 회장님께서 후회하라고 하셔도 안 합니다. 그러니까 허락해 주세요.”
“…….”
이번에는 확실히 변 회장의 눈초리가 유순해졌다. 가늘게 눈을 뜨며 변 회장은 승현의 패기를 봤다. 변 회장은 일부러 은우와 승현에게 나무라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너무 무모해. 생각들이 없어….”
변 회장은 생각이 깊어지는 건지 소파의 팔걸이에 팔을 괴고 이마를 꾹꾹 지압하며 승현과 은우를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이제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은 정윤은 엉덩이를 들썩이며 차분하게 정리했다.
“아버지, 오늘은 그만하시죠…. 은우 좀 쉬게 해야 할 거 같아요. 어제 시험 본다고 분명 밤새웠을 건데….”
정윤은 말꼬리를 늘이면서 슬쩍 은우에게 눈짓을 주며 승현에게 향했다.
“은우는 방으로 올라가고, 승현… 군 맞지? 너는 늦었으니까 일단 집으로 돌아가. 내일 다시 부를 테니 내일마저 이야기하자.”
늘 자신의 편인 정윤이 이 자리를 벗어나게 해주려는 것을 파악하고 은우는 고개를 아버지를 향해 꾸벅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승현과 잡은 손을 움찔했다. 그런데 승현은 눈치가 없는 건지 꼼짝도 없이 망부석처럼 앉아 있었다. 은우는 꼼짝도 하지 않는 승현이 당황스러워 눈을 깜박거렸다. 정윤이 일부러 피하라고 만들어 준 기회였는데.
“회장님, 저는 허락하실 때까지 여기 있을 겁니다.”
승현은 패기로 물든 억양으로 말했다. 승현에게는 이제 물러설 곳이 없었다.
겨우 자리를 정리해 주던 정윤은 어이가 없어서 승현을 보았다. 변 회장도 이제 흥미를 드러내며 승현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내일 다시 찾아오라고 하시면, 내일 은우 형이랑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승현에게는 이제 다시 변 회장과 제2차전이라고 알렸다. 1차전은 변 회장에게 보기 좋게 패했다. 그러니 지금 2차전은 이겨야 했다. 변 회장에게 지지 않겠다는 단단한 눈빛을 보였다.
변 회장의 눈빛이 반짝거렸다. 곧게 뻗은 승현의 시선이 마음에 들었다. 아까부터 묘한 미소가 피어오르는 걸 죽인 채로 어떠한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변 회장은 몸을 소파 등받이에 기대며 어린놈의 패기와 기 싸움을 벌였다. 승현도 변 회장이 뿜어내는 위압감을 받아냈다.
묘한 신경전과 줄다리기 같은 것이 이어질 듯 허공에서 시선이 엉켰다. 그러다 변 회장은 승현의 배포를 속으로 높이 평가하며 핏- 웃는 소리를 냈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느낌의 부드러운 말투였다.
“이대로 헤어지면 다시는 은우 형과 못 만나게 할 것 같아서요. 그러니까 허락하실 때까지 형 곁에서 붙어 있을 겁니다.”
승현은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이라는 듯 쉬지 않고 내뱉었다. 즉, 허락해 달라는 협박성이 담겨 있었다.
“그게… 다인가?”
하지만 변 회장은 오히려 깔끔한 되물음을 던졌다.
“예.”
미묘하게 바뀐 변 회장의 분위기에 승현은 대답을 하고 입을 다물었다. 말 한마디 잘못하면 그대로 아웃이라, 절박한 심경이었다.
끊어지지 않을 분위기가 이어졌다. 다시 말을 끼어든 건 정윤이었다.
“아버지, 일단 내일 마저 이야기해요…. 정말 은우 얼굴 꼴이 말이 아니에요.”
변 회장은 승현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이 없었다. 정윤은 얼른 승현에게 눈길을 던지며 말했다.
“일단, 자네 말은 알았으니까 올라가요. 은우는 방으로 가고, 게스트 룸 하나 준비해 줘.”
정윤은 빠르게 상황을 수습하기 시작했다. 은우에게 슬쩍 눈짓으로 이제 정말 피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은우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형의 눈짓을 받은 은우가 이제 승현의 손을 힘있게 당겼다. 이제 버티지 말고 일어나라는 신호였는데 승현도 자신의 신호를 읽었는지 쉽게 몸을 일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