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Knight
한여름의 태양이 눈부셨다. 아침부터 기운이 좋은 태양을 느끼며 은우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현관문을 나오기만 했는데 벌써 더위가 느껴졌다. 끈적끈적한 여름의 습기가 사라지는 것이, 여름은 곧 끝 무렵이었다.
여름의 햇빛에 피부가 탈 것 같았는데 밖으로 나가는 일이 좀처럼 없는 은우는 그을림 하나 없이 하얀 피부가 매끈했다. 혹시나 하는 불안한 손길로 주머니에 약통이 있는지 재차 확인했다.
은우는 승현을 피하기 위해 조심히 이른 아침부터 대문을 열었다.
“은우 형.”
주머니에 손을 어정쩡하게 넣어 약통이 있는 걸 확인한 은우가 문 앞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
오늘도 역시 승현이 귀신같이 알고 집 앞에 서 있었다.
“은우 형, 오늘 일요일인데 뭐해요?”
어느새 승현이 다가오며 말했다.
“뭐 하긴…. 도서관 가는데?”
“일요일인데? 나랑 놀아 줘요.”
“나 바빠. 졸업 논문 주제 찾아야 해.”
은우는 눈을 깜박거리며 승현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강하게 내리쬐는 햇빛에 눈을 찡그리며 은우는 손으로 햇빛을 차단했다.
“아, 형 .잠깐만요.”
가만히 은우를 바라보던 승현은 몸을 획 돌려 차로 향했다. 뭐를 하는지 은우가 발꿈치를 들어 살폈다. 차 안에서 승현은 무언가를 꼼지락거리며 꺼내더니 다시 자신에게 다가왔다. 그리고 은우의 귀에 안경 발을 걸어 주었다. 승현이 그의 비싼 선글라스를 씌워 준 것이다.
“오, 좀 귀여운데?”
승현은 감탄했다.
“뭐야…….”
승현이 씌어 준 선글라스가 어색해서 손으로 매만진 은우가 승현에게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선글라스인데, 형 눈부셔하는 거 같으니까. 내가 기꺼이 형에게 줄게요. 이 정도야 형에게 줄 수도 있지.”
“너는?”
“나는 여기 또 있지! 준비성이 철저하니까.”
승현은 가슴 포켓에 꽂아 놓은 다른 선글라스를 멋지게 꺼내 착용했다. 그 순간 은우가 소리를 내 웃었다.
“풉.”
“뭐야. 왜 웃어요, 형?”
이상하게 승현이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물었다.
“아니…. 너가 학교에 처음 나타났을 때 생각나서…. 그때 연예인 몰골 하고 나타난 거 진짜 웃겼는데.”
“그게 웃겼다고요? 나 진짜 그런 말 처음 듣네.”
열변을 토하는 승현을 보며 고개를 끄덕끄덕한 은우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그때 내 필살 기법이 안 먹혀서 엄청 당황했다구요. 그때 생각하면 또 당황스럽네. 그렇게 안 꼬셔지던 사람은 형이 처음이었다구요.”
“으으… 너 대사 너무 이상해. 그런 근자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아니, 형. 이상하다니요. 그런 말 또 처음 듣네! 진짜 이렇게 황당할 수가! 거기다 근자감이라니요. 참 나!”
“너 말도 이상하고, 느끼하고 막 다 그래.”
“뭐라고요? 느끼? 허- 형이 느끼한 대사를 모르네.”
승현은 은우의 앞을 가로막으며 인상을 팍 쓰며 목청을 가다듬더니 연기를 했다.
“음…. 그러니까 느끼한 대사라면, ‘날 이렇게 수치스럽게 한 사람은 너가 처음이야. 끌려.’ 이런 거지.”
은우는 양손으로 자신의 양 팔뚝을 슥슥 문지르더니 진저리를 피웠다.
“으으- 하지 마…. 소름 돋으려고 하잖아. 목까지 닭살이 돋으려고 해.”
은우는 웃는 얼굴로 예리하게 응시했다. 그러면서 슬쩍 승현을 지나쳤다. 승현은 따라오면서도 옆에서 종알종알 떠들고 있었고, 은우는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게 승현의 차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도서관을 간다는 은우를 태운 차는 시원하게 뻗은 도로를 달렸다.
학교로 향하는 내내 두 사람의 웃음은 끊어지지 않았다. 한번 맛 들인 승현은 또 생각났다면서 느끼한 대사를 내뱉었고, 은우는 칠색 팔색 하면서 그만하라고 서로 투덕거림이 있었다.
학교에 도착하자 은우는 차에서 내리며 승현에게 말했다.
“나 학교 늦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승현은 따라 내렸다.
“오늘은 같이 가요. 나도 형 옆에서 공부해야지.”
“…너 따라오지 마. 공부도 안 할 거면서. 놀러 가자고 해놓은 주제에 무슨….”
“무슨 소리. 그건 농담이었고. 오늘은 형 따라서 공부하려고 책도 가져왔다고요.”
승현은 정말이라는 듯 뒷좌석에서 가방과 책을 꺼냈다. 그동안 공부를 얼마나 안 했으면 책을 한 번 펴 봤을까 말까 한 새 책이 손에 들려 있었다. 은우가 그걸 보면서 놀리는 억양을 했다.
“아…. 맞다 너 학고라고 했지?”
“그건 부러워하지 마요. 한… 올 F 맞으면 그렇게 돼요. 1학기 내내 형만 쫓아다녀서….”
승현은 은우의 책임이다, 라고 말하는 건 아니었지만 은우는 조금 미안한 얼굴을 했다. 그렇지만 승현은 상처받은 얼굴을 하지도 않았고, 대수롭지 않은 태도를 보여 오히려 은우는 멍하게 승현을 보다가 눈만 깜박거렸다.
“자, 오늘부터 빡세게 공부해 봅시다. 가요, 형.”
승현은 멋들어지게 쓴 선글라스의 브리지를 가운뎃손가락으로 추켜세웠다. 막 기울어져 가는 여름날의 태양은 여전히 창창하고 맹렬했다.
✻ ✻ ✻
도서관의 건물은 그늘이 지고 바람이 숭숭 통해서 그런지 시원했다. 은우는 사 년 동안 도서관의 터줏대감으로서 늘 가던 자리인 열람실로 향했다. 승현은 몇 번 따라왔다고 어색한 것도 없이 따라왔다.
도서관의 열람실엔 책장이 분야별로 구분되어 책이 꽂혀 있었다. 그리고 열람실 안쪽에는 스터디 그룹처럼 소규모로 모여서 조별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방이 마련되어 있었다.
은우는 늘 열람실에 앉았지만, 오늘은 특별히 공부하겠다고 따라온 승현을 위해 비어 있는 방으로 향했다.
방학이라 아무도 쓰지 않는 방 중 은우는 제일 작은 4인실로 들어가 블라인드를 내렸다. 이게 이곳을 사용하는 암묵적인 룰이었다.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으면 사람이 있다는 뜻이고, 블라인드가 올라가 있으면 사람이 없는 방이라는 뜻이었다. 방에 들어오는 승현은 빙 둘러보며 말했다.
“여긴 되게 아늑하네요.”
“응, 여기는 학교에서 조별 과제 때문에 만들어 준 공간이야. 방학이라서 사람들이 거의 없어.”
드르륵, 블라인드 줄을 잡아 내린 은우는 아담한 4인용 책상에 자리를 앉아 가방에 챙겨온 것들을 꺼냈다. 노트며, 계산기며, 필통 등…. 은우의 꼼꼼한 성격답게 가지런히 놓았다. 노트 위에는 졸업 논문을 쓰기 위한 주제들을 적어 놓아 참고 서적 목록까지 꼼꼼하게 적혀 있었다.
“너 맞은편에 앉아.”
승현은 은우의 옆자리에 바짝 붙어 앉았다.
“싫어요. 형이랑 붙어 있을래.”
그러면서 승현은 정말 공부한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듯 빳빳한 새 책을 책상에 놓았다. 그동안 공부를 안 해서 새 책과 다름이 없었다.
은우와 정반대되는 승현은 책만 챙겨 왔을 뿐 그 어떤 필기도구며 노트도 챙겨 오지 않았다. 은우와 확연히 다른 성격이 드러나 있었다. 익숙하게 승현은 손을 뻗어 은우의 필통에서 볼펜 한 자루를 꺼냈다.
오랜만에 진지하게 공부하는 시간이었다. 창가로 들어오는 햇살은 사그라지기는커녕 맹렬했다. 정오에 가까워질수록 햇살이 무서울 정도로 뜨거웠다.
은우는 앉은자리에서 꼼짝도 없이 공부하는데, 은우에 비해 훨씬 집중력이 짧은 승현은 슬슬 허리도 아프고 좀 쑤시기 시작했다. 아니, 이걸 해야 하는 필요성을 못 느껴서 승현의 인내심이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승현은 꼭 누구 들으라는 듯이 힐끗거리면 한탄을 했다.
“아… 데이트하고 싶다.”
“조용히 공부나 해.”
“네-”
칼같이 답한 은우는 손을 뻗어 다른 책을 펴고 있었다. 은우 앞에는 여러 책이 펼쳐진 채로 복잡하고 어려운 내용이 가득 쓰여 있었다.
다시 시간이 지나자, 승현은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내가 이런 알 수 없는 글자랑 연애질하는 건 계획에 없는 일인데.”
승현은 종이를 착착 신경질적으로 넘기며 중얼거렸다.
“너 다음에도 또 학고 먹으면 퇴학이야, 알아?”
“엄마가 이사장님이라 괜찮은데.”
커다란 몸이 쭉 책상에 늘어지며 철퍼덕 엎어졌다.
“그럼 더 안 돼. 너… 학점 A 밑으로 떨어지면 결혼은 꿈도 꾸지 마.”
“하, 씨발.”
무거운 욕지거리를 내뱉는 승현의 눈빛이 순간적으로 형형한 빛을 내다가 사라졌다. 그러나 이제 공부에 관심이 떨어진 승현은 검은 건 글자요, 색깔 있는 건 그래프요, 하얀 건 여백이었다. 따분함을 온몸으로 뿜어내며 엉덩이를 가만히 있지 못하고 들썩거렸다.
“형… 그러지 말고…. 우리, 응? 캠핑 가요. 바다로! 아니면 여기 앞이라도 좀 걷자!”
“바쁜 거 안 보여? 안 돼. 곧 개강이 얼마 안 남았는데.”
“아니, 공부밖에 안 하는데 왜 바빠요?”
“그걸 말이라도 묻는 거야? 할 공부가 많아. 그리고 이제 공부 안 할 거면 너 나가. 방해되니까.”
매정한 은우가 다시 책에 코를 박았다. 은우가 왜 이렇게 공부에 사활을 거는지 승현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응원해 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과 안 놀아 주고 상대도 안 해주는 은우가 미웠다.
“그러지 말고, 형-”
드럼통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말하는 것처럼 울리는 목소리로 승현은 애교라는 것을 부려봤다.
“미친 거야?”
은우가 눈에 힘을 빡 주면서 승현을 바라봤다.
“쳇, 아…! 알았어요, 알았어…. 그럼 오늘 언제까지 할 거예요?”
“몰라, 오늘은 일단 주제 몇 개 추스르면… 저녁이나 돼야 할 거 같아.”
“뭐?”
저녁이나 돼야 한다는 말에 승현의 인상이 구겨졌다가 펴졌다.
순간 번뜩이는 눈을 한 승현은 곧장 음흉한 빛을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은우가 책에 집중하고 있어서 자신의 음흉한 미소 띤 얼굴을 확인하지 못한 게 다행이었다.
“아, 그래요…. 좋아요. 형이랑 있는데… 이걸로 데이트라 치지 뭐. 그럼 딱 붙어서 공부해야지-!”
아직 철없는 아이를 흉내 내며 승현은 심기일전으로 책을 다시 폈다. 공부하는 승현은 어딘가 묘했다. 책장을 빠르게 팔랑팔랑 앞뒤로 뒤적이며 무언가를 빠르게 찾고 있었다. 앞으로 넘겼던 책장은 뒤로 넘겼다가 다시 앞으로 넘겼고, 접어서 표시도 했다.
기이한 승현의 행동을 은우는 곁눈질로 바라봤지만 이상할 게 없어서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 버렸다. 그리고 은우가 다시 무섭게 책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다. 승현이 은우의 팔뚝을 가볍게 툭툭 치며 말했다.
“형, 형…….”
“응? 또 왜 그래.”
자꾸만 방해는 승현에게 화를 내지 않으려 꾹꾹 눌러 참는 은우가 짜증을 숨기며 승현에게 고개를 돌렸다. 승현은 은우의 앞으로 책을 슥 들이밀며 손가락으로 페이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형, 이거 알아요? 나, 이거 모르겠어요. 알려 줘요.”
은우의 표정이 사악, 풀어지면서 손가락을 따라 눈동자가 책으로 떨어졌다.
“뭔데? 내가 아는 거야…? 어…. 이거 수학이네?”
승현은 굉장히 뿌듯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은우는 자세히 문제를 들여다보려고 고개를 기울이며 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부드러운 아몬드 모양의 눈이 깜박거리며 중얼거렸다.
“이거… 간단한 미적분이네. 로그 함수랑….”
“대체 어딜 봐서 간단한 거예요?”
“잠깐 기다려 봐. 내용 좀 훑어볼게.”
은우는 책장을 몇 장 더 뒤적뒤적하면서 앞뒤 내용을 빠르게 훑어봤다. 자세한 건 모르지만, 경영학에서 배우는 그래프를 이용하는 데 써먹어야 할 것처럼 생겼기에 은우가 승현에게 향했다.
“뭐, 그래프 때문에 해야 하나 봐.”
“씨발, 좆같네. 이걸 왜 하는 거야. 고등학교 때 겨우 수학에서 벗어난다고 했더니만… 또 하게 생겼네.”
거친 욕설이 승현의 입에서 주절 나왔다. 의욕이 사라진 듯 승현은 책상에 철퍼덕 엎어졌다.
“그런데 간단한 수식이잖아.”
늘 뭐든 강해 보이는 승현이 유달리 투덜거리고 어리게 보여서 은우가 미소 지은 얼굴로 위로했다.
“형한테는 간단해 보여도 문과는 어려워요. 수학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뇌에서 지웠다고요.”
시커먼 승현의 속내를 은우로서는 알 수 없었다. 모르겠다고 하는 승현을 도와 은우는 책을 살펴보며 말했다.
“…잠깐만, 기다려 봐. 살펴보고. 음-”
앞장부터 내용을 자세히 훑어보며 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알겠다는 듯이 승현에게 조곤조곤 설명하기 시작했다.
“얼추 알겠다. 자, 봐봐. 승현아, 이거 적분 기호잖아. 알지?”
“음… 모르겠는데?”
“장난하지 말고.”
시치미를 뚝 떼며 대답한 승현을 은우는 심각한 눈빛과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몰라?”
“그게 적분 기호예요?”
승현의 대답에 은우가 더욱 심각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응, 장난치지 말고.”
“장난 아니고. 머릿속에서 지웠다니까요?”
이제 정말 참담한 얼굴을 한 은우가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싶다가 자신의 노트를 두세 장 획획 넘겼다. 승현의 앞에 넘긴 노트를 들이대면서 작고 예쁜 손가락에 샤프를 꽉 쥐고 꼼지락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았어. 그럼, 잘 봐. 모르는 거 있으면 바로 얘기하고. 이거 심각하네. 적분이 뭐냐면….”
승현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며 은우는 노트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면서 최대한 쉽게 설명하기 위해 열심히 눈을 굴려 가며 입술을 움직였다.
그런데 승현은 은우의 필사적인 설명은 듣지도 않고 은우의 얼굴을, 특히 입술만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불량스럽게도 승현은 책상에 엎드렸던 몸을 살짝 일으키더니 팔꿈치로 머리를 지지해 괴고 앉아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승현이 슬슬 은우에게 더욱 밀착하자 은우는 저도 모르게 점점 구석으로 몰리고 있었다.
“…알아들었어?”
은우는 중간중간 승현이 이해했는지 확인하려고 고개를 들었는데, 눈앞에 있는 승현의 얼굴은 한눈에도 설명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게 아니라, 한 귀로 듣고 콧구멍으로 새어 나온 얼굴이었다.
“야, 내 말 들었어?”
“아- 그런 거 하나도 모르겠고. 형이 존나 예쁜 건 알아들었어요.”
“뭐, 뭐라는 거야. 모르겠다고 나한테 물어봐 놓고 설명하는데 안 보면 어쩌자고!”
“내가 이딴 거에 대해서 알고 싶은 마음은 없고, 형에 대해서는 알고 싶은 게 많죠…. 아, 늘 형이 예뻤지만, 오늘따라 너무 예쁘네.”
씩 웃는 얼굴이 크게 보였다. 은우는 언제 승현이 이렇게 가까이 밀착하게 된 건지 끔벅 그의 수작에 또 넘어가고 말았다. 은우가 창가와 승현 사이에 자신이 끼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은 감이 있었다.
승현은 손을 슬쩍 은우에게 뻗으며 더욱 밀착하더니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형, 우리 오늘은 선생님 놀이 할까요?”
“뭐?”
승현은 은우를 당겨서 자신의 무릎 위로 앉혔다.
“야, 뭐… 뭐야.”
은우의 허리에 팔을 감고, 승현은 귓가에 끈적하게 속삭였다.
“형은 선생님 하고, 나는 학생 하고. 어때요? 이런 금단의 관계 꼭 해보고 싶었다고요. 이럴 줄 알았으면 교복 입고 올걸. 아직 교복 안 버렸는데.”
“야…….”
은우가 몸을 일으키려는데 승현은 당연하게도 놓아주지 않으며 음흉하게 속삭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선생님, 나 그 밑에 문제도 전혀 모르겠거든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으니까 그것도 알려 줘요.”
이 순간 승현은 눈알 빠지게 책을 뒤적거려 문제를 찾은 보람을 여기서 느꼈다.
“야, 그 전에, 이것 좀…. 야… 아앗!”
승현은 은우의 귓불을 살살 빨기 시작했다.
“하, 하지 마…. 너 고, 공부한다며.”
“공부하는 거죠. 모르겠으니까 선생님한테 질문했지. 학생의 기본은 질문이니까. 빨리 설명해 줘야 내가 손을 놓아주는데.”
“그… 그만해.”
목과 몸이 움츠러드는 은우가 승현을 피하는데, 승현은 은우의 목덜미에도 입술을 내려 혀로 할짝대며 빨기 시작했다. 승현은 가벼운 옷차림의 은우가 좋았다. 옷 위로 만져지는 피부의 촉감이 베일에 싸인 보물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얇은 은우의 허리를 쓰다듬고 무릎에 닿는 은우의 엉덩이도 조물떡조물떡 주무르기 시작했다.
“야! 야…….”
“선생님… 그래서 저 1은 어디에다가 대입하는 건가요? 밑에다가?”
천연덕스럽게 말하며 승현은 엉덩이를 공략하면서 노골적으로 말했다. 마치 성행위를 묻는 것 같아서 묘한 자극이 있었다.
“…아니면 위에다가?”
은우의 턱을 돌려 붉은 입술에 승현은 혀로 훔치며 이어서 말했다.
“어디다 대입해 줄까요? 솔직한 심정으로는 난 둘 다 삽입하고 싶은데….”
“그… 그만해.”
은우가 눈을 질끈 감으며 승현의 손을 움켜잡았다. 승현을 이길 수 없을 거 같아서 그의 손에 농락당하고 말았다.
✻ ✻ ✻
두 그룹의 총수들은 승현과 은우의 결혼을 바탕으로 협의한 사실을 가지고 준비를 착실하게 해나갔다. 그룹의 주식을 사들여 경영 지배력을 한층 강화하며 몸집을 불려 나갔다. 계획대로 차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드디어… 두 아버지들은 시의적절한 때라고 판단했다.
두 사람의 결혼 발표가 세간에 떠들썩하게 흘러나왔다. 그리고 회심의 선방을 날린 지 만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은우 형, 타요.”
오늘도 어김없이 승현은 은우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승현은 은우의 새 학기 시간표도 줄줄이 외우고 있었고. 거기에 맞춰서 자신의 시간표도 짰다.
“학교 태워다 줄게요.”
은우가 승현을 피해 몸을 돌렸다.
“싫어… 친구들이 본단 말이야.”
은우가 승현을 무시하고 지나쳐 몇 걸음 걸었을 때, 승현은 큰 보폭으로 다가가 은우의 작은 손을 잡았다.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승현이 은우를 조수석으로 끌고 가 차에 태웠다.
“뭐 어때요. 그리고 당분간 내가 태워다 줄고 데리고 올 테니까, 그렇게 해요. 뭐, 지금까지 그랬으니까.”
다정한 손길로 은우에게 안전벨트까지 손수 꼼꼼하게 채워 주고 승현이 말했다. 부루퉁한 입술을 삐죽이는 은우의 얼굴을 보다가 은우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승현은 운전석으로 몸을 틀었다.
크고 무거운 승현이 차 안으로 엉덩이부터 들이밀며 들어오자 차가 한 번 출렁거렸다. 사이드 미러를 곁눈질로 확인한 승현은 창피해하는 은우에게 말했다. 은우가 왜 창피해하는지 알고 있어서 그것에 대한 별말은 하지 않았다.
“학교 앞에 기자들 쫙 깔렸을 거예요.”
승현은 통행인을 살피며 핸들을 가볍게 쥐었다. 사실 승현도 변 회장 앞에서 패기 좋게 말하긴 했어도 이렇게 크게 일을 키울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변 회장은 역시 승현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큰 사람이었다.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말이다.
“형… 학교 친구들한테도 말 안 했을 텐데….”
“응.”
은우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지금도 거리를 두는 학교 친구들인데, 자신이 일품 그룹의 재벌가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 친구들이 가까워지지 않고 더욱 거리를 둘까 봐 일품 그룹의 자제라는 사실을 숨겼다. 그런데 자신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제 터진 기사는 대서특필이었다.
우리 둘의 결혼 기사가 각종 신문 페이지를 장식하고, 심지어 어디서 파파라치 사진까지 찍혀서 연예 주간지에 실렸다.
연예 주간지답게 승현과 은우가 어떻게 처음 만났고, 어디서 만나 호감이 싹텄는지… 그런 소설 같은 세세한 기사가 실렸다. 아마, 두 기업의 비서실에서 협의하에 작성된 소설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각종 포털 사이트의 메인에 장식과 검색어가 하루 종일 걸려 있었다. 경제지는 대문짝만하게 소식을 전하면서 앞으로의 경제 동향을 전문가들이 설명하는 기사들로 채워졌다.
두 사람의 결혼으로 인해 주식 시장에 어떤 영향이 미칠지 메인 뉴스에서는 빠삭하게 꿰고 있는 전문가가 초청되어 인터뷰했었다.
두 사람은 우리의 결혼이 사회 기사 1면에 나올 정도의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일품 그룹이 무리하게 추진하던 리조트 개발 사업은 무리한 탓에 이제 망한다, 변 회장의 안목이 떨어졌다, 위기의 일품이다, 라며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늘 하한가를 치던 주식은 한순간에 대반전을 이루었다.
“형… 괜찮아요?”
조수석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는 은우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승현은 힐끗 은우를 보고 손을 뻗어 작은 손을 감싸 쥐며 말했다.
“……아니, 조금 안 괜찮아.”
그래도 은우는 자신이 기댈 수 있는 남자인 승현의 손을 맞잡아 깍지를 끼었다. 커다란 손바닥이 손에 다 잡히지 않았지만 승현의 손은 자신의 손을 완전히 가리고 덮을 정도였다. 승현도 은우의 손길을 느끼며 말했다.
“혹시나 힘들고 그러면 전화해요. 알았죠? 오늘 나 술 안 먹고 기다릴 테니까.”
“응…….”
은우가 풀이 죽은 얼굴로 승현을 응시하며 소리를 냈다.
“맞다, 너 오늘 친구들 만난다고 했지? 너도 바쁘겠다. 갑자기 결혼 발표 나서.”
“네…. 근데, 어릴 때부터… 불알친구들이라서…. 그래도 난 괜찮으니까. 형이 내 걱정 해주는 거 너무 좋다. 매일 나 걱정하고 나 생각해 줘요.”
승현은 편안해진 웃음이 지어졌다. 생각해 보니 그때 연회장에서 못된 친구들이 아니었으면 승현은 은우에 대해 알지 못했으리라.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은우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지나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날은 인사가 너무 힘들었기에.
다 그 개망나니 친구들 덕분에 은우와 이렇게 된 거로 생각하자, 인생에 도움이 안 될 줄만 알았던 친구 놈들이 도움이 되기도 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기사가 속보로 터지고 나서 승현의 핸드폰은 불이 났다. 사회 활동을 하지 않는 은우와 달리 인맥이 넓은 승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기사를 보고 연락해 온 사람들 중에서는 승현의 불알친구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일 먼저 승현에게 기사가 사실인지 확인하는 그들에게만큼은 승현은 만나서 해명하고, 있었던 이야기를 하겠다고 했더니 당장 날짜를 정해 승현을 불러냈다.
은우를 안전하게 학교에 내려다 준 승현은 친구들과 만나기 위해 오후에 복잡한 시내로 향했다. 평범한 주점은 돈이 많은, 소위 재벌 집 자제들이 갈 곳과 머리가 멀어 보이는 곳이었다.
거기는 아직 승현과 친구들이 고등학생이었을 때부터 대학생인척하며 다녔던 술집이었다. 여전히 그 버릇들이 남아 있는 친구들은 으레 그곳으로 약속 장소를 잡았다.
바글바글한 손님들과 TV 소리, 그리고 최신 유행가가 흘러나와 서로 뒤엉켜 시끄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그 소리에 신경을 쓰지 않은 듯 서로 목청을 높여 말을 주고받았다.
이미 안주와 술을 시켜서 한잔 걸치고 있는 승현의 어릴 때부터 친구들인 전민과 시종, 그리고 선우가 맑은 소주잔을 부딪치며 승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야! 여기.”
누구 못지않게 큰 소리를 낸 시종은 문으로 들어오는 승현을 보고 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승현은 시종을 확인하고 그곳으로 발길을 옮겼다. 안락감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는 딱딱한 의자에 승현이 엉덩이를 대기도 전에 전민이 입을 열었다.
“야, 너 진짜야? 그거 진짜야? 너 장가가?”
승현은 배가 고픈지 테이블에 안주로 나와 있는 곰장어를 젓가락으로 집어 서너 점을 한 번에 입속으로 나르며 대답했다.
“어? 어.”
늘 조용하던 선우가 놀라운 듯 술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정말… 그 일품…. 그 사람이랑?”
“그래, 결정된 건 한참 전인데 아버지랑 회장님이 절대 함구하라고 해서, 말 못 했다. 미안하다.”
승현은 진지하게 말하는데 조롱에 가까운 썩은 웃음을 짓는 전민은 승현을 비아냥댔다.
“괜찮냐?”
“뭐가?”
그때 연회장에서도 전민은 은우를 얕잡아 보았던 탓에 무리도 아니라고 승현은 생각했다.
이런 일은 앞으로 많을 거라고 각오한 바였다. 심지어, 혈육이자 친형인 승겸도 은우를 향해 그런 시선을 가지고 있었으니, 친구인 전민은 오죽하랴. 승현은 그저 웃어넘기려고 했다. 이미 은우가 그런 것이 아닌 것도 알고 있고, 이제 소문 같은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띵동, 띵동…. 여기저기서 호출 벨을 눌러 점원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시종도 꾹 호출 벨을 누르더니 크게 소리쳤다.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시고, 소주잔도 하나 주세요.”
대학생으로 보이는 알바는 이리저리 바쁘게 불러 대는 손님들의 응대를 최대한 친절하게 접대하고 있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그는 정신없는 와중에 한 번 더 체크하더니 소주잔과 소주병을 테이블에 가져다주었다.
시종은 경쾌하게 소주병 뚜껑을 돌려 따더니 새로 나온 승현의 잔에 술을 쫄쫄쫄 채웠다. 자연스럽게 승현은 술을 받고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 나 오늘 술은 패스.”
“뭐냐? 갑자기 빼는 건.”
“아아, 이따가 데리러 가야 할지도 몰라서.”
“누구?”
양념이 자극적으로 발린 곰장어를 입에 넣고 꾹꾹 씹으며 승현은 묻는 시종을 향해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리 은우 형.”
“미친놈.”
전민은 소주를 턱 마시더니 테이블에 내려놓고 승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전민의 눈빛에 담긴 건 승현에 대한 조롱에 가까운 눈빛이었다. 아니, 전민은 은우에 대한 조롱에 더 가까웠다.
“그거… 야, 결혼 잘 생각해 봐. 소문이 좆같이 썩었는데, 너 우리가 얘기했잖아…. 설마 너 일품에 팔려 가는 거냐?”
가만히 듣자 듣자 하니까 승현은 인상을 구기며 마주 보고 앉은 전민을 노려봤다. 은우에 대한 소문은, 은우의 의지와 행동과 관계없이 사람들에게서 퍼져 나갔다.
“우리 은우 형 그런 사람 아니야.”
“뭐가 아니야? 너도 조심해. 앞에서 안 그런 척하고 뒤에서 뒷구멍으로 뭘 하고 다니는 줄 알고?”
승현은 승겸이 은우에 대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던 때와 달랐다. 그때와 다르다고 느꼈다. 그래서 승현은 쌍꺼풀이 진 커다란 눈을 부릅뜨며 전민을 포함한 친구들을 보며 으르렁거리는 말을 내뱉었다.
“너네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은우 형 가지고 농담 따먹는 소리 들리면 다 대가리 조지는 수가 있어.”
승현이 풍채에서 풍기는 위압적인 분위기로 손에 쥔 장난감 같은 젓가락을 쾅 찍으며 내려놓았다. 이들에게 승현은 행동력이나 체격으로 보나 그들의 리더 같은 인물이었다.
아주 잠시 주변의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쳐다봤다가 원상 복귀 되었다. 하지만 전민은 비아냥을 멈추지 않았다.
“저 새끼 완전히 낚였네.”
승현은 앉은 테이블을 밑에서 발끝으로 치자 쾅, 테이블에 놓인 것들이 들썩하며 위로 튀어 올라갔다가 제자리로 내려왔다. 무게감이 없는 소주잔과 소주병 같은 것들이 우르르 쏟아지며 바닥에 떨어져 커다란 파열음이 났다. 쇠젓가락도 바닥에 뒹굴어 이번에는 주점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승현이 앉은 테이블에 집중되었다.
술 마시다가 싸움이 벌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듯 무심하게 알바생 몇 명은 기계적으로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다가와 깨져 버린 술잔과 술병을 쓸었다.
승현은 얼마나 화가 나는지 커다란 손을 꽉 쥐어 부들부들 떨었다. 결국 시종과 선우가 승현과 전민을 뜯어말렸다.
“야, 승현아…. 너가 참아…. 그만해!”
“그래, 너네 둘 다 그만해.”
하지만 전민은 술에 취한 건지 풀린 눈으로 승현을 노려보면서 손가락질을 하며 말을 멈추지 않았다.
“뭘 그만해! 내가 저 새끼 지금 구해 주는 거야.”
승현은 지금 당장 사람을 찔러 죽일 수 있지 않을까 할 정도로 화가 난 눈으로 전민을 응시했다. 승현은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주변을 획획 둘러봤지만 보이는 거라곤 초록색 소주병이 전부였다.
욱하는 마음에 커다란 손으로 소주병을 우악스럽게 겁을 주려는 듯 움켜잡자 시종과 선우가 필사적으로 되어 말렸다.
“승현아, 야! 이 미친놈아. 진정해, 진정…. 이렇게 한다고 될 일이 아니잖아. 그러지 말고 차분하게…. 야, 그거 내려놓고.”
“놔라, 씨발. 저 새끼 조져 놔야….”
“그러지 말고, 그 일품 그 사람이랑… 우리 정식으로 소개해 줘. 너랑 결혼한다는데, 불알친구들인 우리가 서먹서먹해서 괜찮겠냐.”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목청이 진동하는 승현의 목소리가 맹수처럼 울리며 선우와 시종에게 향했다. 시종이 덧붙였다.
“그러지 말고. 어쨌든 승현아, 너 결혼한다는데 우리도 축하해 주려고 이렇게 모였잖아. 너가 우리보다 먼저 사교계도 나가고, 결혼도 먼저 하는데…. 그러니까 우리도 정식으로 소개받게 해줘. 혹시… 오해가 있으면 풀면 좋잖아. 전민이도 오해하는 게 있다면 풀어 주고 좋잖아.”
승현은 차가운 조소로 비아냥거리며 그들을 빙 둘러봤다.
“뭔 헛소리야? 오해? 뭘 해야 오해가 생기는데? 씨발, 은우 형이 뭘 했는데 오해? 저 새끼가 뭔데 왜 은우 형이 나서서 오해를 풀어 줘야 해?”
그 순간 그들은 아무도 말을 하지 못했다. 그만큼 그들도 은우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이제 승현이 크게 윽박질렀다.
“그러니까 내가 묻잖아! 은우 형이 뭘 했냐고!”
친구들은 시선을 모두 피했다.
“풀 오해도 없어. 그냥 너 박전민 개새끼, 이리 와! 넌 오늘 좀 처맞아야겠다.”
화난 승현이 눈알이 뒤집힐 듯이 덤벼들 기세로 자리에서 일어나 전민에게 위협적으로 다가가려 움찔했다.
징- 징-
그 순간 승현의 핸드폰이 엉망이 된 테이블 위에서 소리와 진동으로 요동치고 있었다.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알림에 일제히 친구들의 시선이 날아가 박혔다.
환한 빛을 내는 핸드폰 화면에는 은우의 번호와 이름이 찍혀 있었다.
화면을 힐끗 보던 전민은 비아냥거리는 것을 멈추지 않은 채 썩은 조소를 날리자 승현은 거침없이 손에 든 소주병을 전민에게 날렸다. 날아간 소주병이 경쾌한 소리로 전민의 이마에 부딪혀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소주병이 깨졌으면 덜 아팠을 텐데 깨지지 않은 소주병은 바닥에 떨어져 다시 파열음이 났고, 전민은 악 소리를 내며 양손으로 이마를 부여잡고 눈물이 찔끔 나는지 세게 문지르며 승현을 노려봤다.
“뭘 꼬나봐, 이 새끼야. 넌 은우 형 때문에 산목숨인 줄 알아. 확, 눈알을…!”
전민은 아픔에 술이 깬 건지 멍이 들어 퍼렇게 되는 이마를 벅벅 문질렀다. 승현은 전화를 들어 받으려다가 일부러 친구들 보란 듯이 스피커폰으로 받았다.
-스, 승현…아…. 어, 어디…야?
의기양양하게 받은 전화 너머에서 은우는 떨면서 울먹이는 소리로 말했다. 누가 들어도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승현뿐만 아니라, 시종과 선우는 놀란 얼굴로 승현의 핸드폰에 시선이 고정됐다. 그리고, 아파서 이마를 문지르던 전민도 손이 느려지더니 전화기에 신경을 집중했다.
“형, 무슨 일이에요?”
불같이 화내던 승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갑자기 심각한 모드가 발동했다.
-어…? 그게 아, 아니라, 학,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이, 이상한 사람이 있어. 그래서… 그래서 나가려고, 해, 했거든? 근데 자, 자꾸… 쫓아와서, 무, 무서워서.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 있었는데, 어떡…하지?
“뭘 어떡해! 걱정하지 말고 지금 갈 테니까, 어디 숨어 있어!”
은우가 처음 자신과 만났을 때도 심각하게 경계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었다. 지금도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은우가 겪었을 이상한 일들을 혼자서 이겨냈던 것들이었다.
혼자서 견뎠을 그 시간을 떠올리며 승현은 혀를 찼다. 그렇게 똑똑한 은우는 바보처럼 자신에게 그 방법을 묻고 있었다.
금방 간다는 말이 은우가 전화기 너머로 울면서 말했다.
-응… 그, 급하게 여기… 시, 실험실에 숨었는데, 승현아…. 전화 끊지 마… 안 돼.
“안 끊어요.”
전화기 너머로 훌쩍이는 은우는 옅게 안도하는 목소리를 냈다.
-…응, 다행이다.
승현은 전화기를 꼭 손에 쥔 채 뒤를 돌아 술집을 나갔다. 친구들에게는 인사 한마디도 없었다.
그제야 남은 친구 세 사람은 조금은 어리벙벙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형, 울지 말고. 나 지금 차 탔고, 날아가려고 시동 켰어요.”
-……응.
전화기 너머로 훌쩍이는 은우의 목소리를 들으며 승현은 차를 몰았다. 날아간다고 하는 표현이 맞은 정도였다. 과속 따위는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해가 이제 짧아진 저녁은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은우의 학교가 보였다.
“형, 나 학교 도착했어요.”
-응… 응. 나 아직 실험실에 있어….
승현은 차를 대충 세워 두고 긴 다리를 크게 벌려 뛰어 은우가 숨어 있다고 하는 실험실로 향했다.
“아직 밖에 있어요? 이상한 사람. 아주 조져 버리게.”
-……모르겠어. 소리는 안 나.
은우는 울음이 점점 사그라들어 차분해졌다. 승현은 실험실로 가는 길목에 마다 수상한 사람이 있나 없나 죽일 법한 눈으로 둘러보면서 갔지만, 그럴싸해 보이는 인물은 없었다.
거침없이 뛰던 승현은 흥분과 뒤섞여 숨을 헉헉 내뱉으며 실험실 앞에 서서 끊지 않은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나 도착. 문 두드린다!”
-응.
쾅쾅쾅. 승현은 실험실 문을 두드렸다. 소리가 나자 은우가 겨우 잠근 문을 열고 나왔다. 놀라서 운 자국이 고스란히 남은 은우의 눈이 충격이 가시지 않는 것 같았다.
“스, 승현아.”
은우는 승현을 끌어안았다. 요즘은 잘 기억도 나지 않았고, 악몽도 꾸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낯선 사람이 몰래 뒤에서 다가오던 기억, 입을 틀어막고, 강한 힘에 질질 비상계단 출입구로 끌려갔던… 그 끔찍한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정말 소문이 그렇게 좋지 못하게 난 자신에게 못된 마음을 먹고 접근해 오는 사람들이 없던 것도 아니었다.
“어디 있어, 그 새끼? 누군지 알아요?”
파르르 떠는 은우의 등을 승현은 쓰다듬어 주었다. 오돌오돌 떠는 은우의 몸은 한기가 스며드는 것처럼 가라앉지 않은 채로 자신에게 매달려 있었다.
“모… 몰라. 빨리 집에 가자…. 집에, 가고 싶어. 승현아.”
얼굴이 창백한 은우가 다리를 휘청거리며, 멍한 눈으로 습관적으로 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냈다. 텅 비어 버린 약통을 보며 은우가 망연자실한 탄식을 내뱉었다.
“아…….”
승현은 은우의 손을 덮었다. 분명 승현은 요즘 들어 은우에게 하루에 최대 열 알의 약만 허락했다.
은우 스스로도 오남용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은우도 승현의 제안에 따랐다.
조금씩, 조금씩… 승현은 은우가 먹는 약의 개수를 줄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그동안 충분히 잘 지켜졌다. 하루에도 수십 알을 먹던 것이 이제는 어느새 하루에 다섯 개, 여섯 개까지 줄었다.
그런데 은우가 바들바들 떨면서 꺼낸 약통에는 약이 한 알도 남지 않았다. 불안감을 느끼는 은우는 더욱 사시나무 떨듯이 떨었다.
“아……. 어떡…해…. 야, 약이… 없어….”
“괜찮아. 형, 내가 있잖아.”
“야… 약이.”
아직 은우를 둘러싼 주변의 시선들은 하나도 좋아지지 않았다. 승현은 은우를 꼭 안아 주면서 달랬다.
“괜찮아요. 괜찮아….”
은우를 토닥토닥 달래 주는 승현은 그가 차분해지며 진정되기를 기다렸고, 은우는 자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어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씩 차분해지는 은우를 데리고 승현은 천천히 건물을 빠져나왔다. 은우는 승현을 보자 긴장했던 몸이 풀리면서 힘도 같이 풀리는지 쓰러지려는 걸 몇 번 하며 휘청였다. 그럴 때마다 승현은 단단하게 은우를 잡아 주었다.
“쫓아왔다던 사람 누군지는 모르고요? 그… 형 안 좋게 말하고 다니는 사람인가? 이번에 뉴스 났다고 해서….”
“모르겠어…. 근데, 처, 처음 본… 사람이었어…. 계속 쫓아와서….”
은우를 데리고 건물 밖으로 나온 승현이 엉망으로 세워 둔 차로 향하려 몇 발자국을 걸었을 때였다. 승현과 은우 뒤로 사람 그림자가 진하게 다가왔다.
“…저, 안녕하세요.”
“히이익!”
가뜩이나 놀란 은우가 더욱 놀라 기겁하며 어깨가 흠칫하며 승현에게 안겨 들었다.
승현은 은우를 감싸 보호하면서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낯선 남자가 서 있었다. 그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며 은우를 힐끗 보며 살짝 조소를 띤 얼굴로 별일 아니라는 듯 쾌활하게 목을 울렸다.
“…연예 잡지 ‘위캔드스타’라는 곳에서 나온 차중석 기자입니다.”
“기자?”
승현은 차가운 억양으로 되물었다. 은우가 겨우 진정시킨 가슴이 다시 놀라서 떨었다. 은우는 자신을 쫓아온 사람이 그 기자라는 것을 알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승현에게 말했다.
“승현아…. 저, 저 사람이야.”
승현의 눈빛이 무감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기자는 도리어 은우를 나무라며 어이없고 허탈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저 누가 보면 나쁜 짓이라도 할 줄 알겠어요. 그렇게 기겁하고 소리치며 도망가실 줄은…. 인터뷰를 좀 하려고 했는데, 워낙 보안도 철저하신 분이신 거 아시잖아요. 접근하기가 쉽지 않은 터라… 이렇게 학교까지 찾아왔습니다. 인터뷰 좀 해주시죠.”
그는 외려 은우를 향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하더니 어깨에 짊어진 가방인지 주머니에서인지 핸드폰을 꺼내 녹음 기능을 켰다.
“모든 보도 자료는 회사에서 나갔을 건데요?”
승현은 차분하게 대응했다.
“아아, 그렇게 짜인 각본 말고요. 아까 건물로 뛰어가실 때 붙잡고 싶었는데….”
그는 상당히 비열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실제 두 분의 인터뷰를 하고 싶었거든요. 뭐 정말… 어떻게 만나셨는지, 항간의 소문에 의하면….”
그가 은우를 보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았다. 입꼬리가 올라간 미소로 말을 줄이더니 승현에게 파묻은 고개를 들지 않은 은우에게 손에 쥔 핸드폰을 들이밀었다. 승현과 은우는 인터뷰하겠다고 하지 않았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질문을 던졌다.
“어제오늘 떠들썩한 세간의 화제가 된 주인공이 되셨는데, 그 심정이 어떠십니까?”
은우는 어깨를 파르르 떨렸고, 승현은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아까부터 쌓인 분노가 지금 빵- 하고 터질 것만 같았지만, 은우 앞에서 그런 거친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거기다 자신이 기자에게 달려들어 때릴 듯이 움찔하는 걸 은우가 필사적으로 잡고 말렸다.
은우도 승현도 어릴 때부터 교육을 받았다.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 것, 특히 기자들에게는 어떤 것도 함부로 말하지 말 것. 또 어떤 일이 되었든 변호사와 상의할 것.
승현은 딱 한 대만 때릴까? 기자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은우가 자신에게만 들리게 말했다.
“그냥… 가자…. 응?”
은우는 눈길 한 번, 시선 한 번 기자에게 던지지 않았다. 참을 수 없이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불길처럼 분노가 타올라 승현이 주먹을 꽉 쥐어 웃고 있는 기자의 얼굴로 뻗으려고 하는 걸 은우가 떠는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잡은 은우의 손은 놀란 감정이 진정되지 않아서 파리하게 떨면서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은우는 다행히 생각했던 것처럼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조금은 안도했다. 결국 승현은 자신을 데리고 기자를 외면하더니 자리를 떠났다.
“어? 어…? 아니, 한 말씀만 해주세요.”
기자는 어깨에 짊어진 가방을 추켜올리더니 핸드폰의 녹음 기능이 제대로 켜져 있는지 확인하며 승현와 은우를 따라갔다.
승현은 귀찮으면서도 불안해 떠는 은우 때문에 성격대로 기자를 때리지도 못해 짜증스러운 듯 기자를 노려봤다. 은우를 등 뒤로 감추며 고개를 쳐들어 기자에게 말했다.
“잡지사의 차중석 기자님이라고 하셨죠?”
기자는 인터뷰를 딸 수 있겠다는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거렸다.
“네.”
기대와 무색하게 승현은 사무적이고 딱딱한 말투를 했다.
“모든 저희의 공식 입장과 답변은 변호사를 통해 이루어질 겁니다. 질문이 있다면 먼저 질문지를 작성하여 연락해 주시면 서면 인터뷰는 해드리겠습니다. 또한 그 외 모든 인터뷰는 그룹 홍보실에 정식으로 요청하셔야 한다는 걸 모르셨습니까? 정말 기자 맞으세요? 그리고 오늘 이 일은 정식으로 귀사와 기자님께 직접 책임을 묻겠습니다. 사건 예고도 없이 기자님이 하신 건 사생활 침해라는 엄연히 불법 행위입니다.”
말을 쏘아붙이던 승현은 다시 몸을 돌려 은우를 잡아끌었다. 어린애들이라고 얕잡아 보았던 기자는 그 자리에 발이 얼어붙어서 멀뚱멀뚱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을 지켜보다가 핸드폰의 녹음 기능을 껐다.
기자가 쫓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자 그제야 은우는 한시름 놓았는지 승현을 따라가며 뒤를 힐끗거리다 말했다.
“벼, 별…일 아니었네…. 친…구들하고 노는데… 부, 불러서… 미안.”
은우는 돌이켜보면 늘 이런 일이 있으면 정윤에게 전화했는데, 오늘은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이 승현이었다. 잡아 주는 승현의 손을 움찔하며 은우는 힘주어 잡았다. 놀란 가슴이 조금씩 진정되고 있었다.
“아니, 나한테 연락해서 잘했어요. 그리고 나한테 먼저 연락해 줘서 기뻤죠.”
미약하게 손끝의 떨림이 남은 은우의 손을 승현은 진정시켜 주었다. 아직 화가 나지만 은우에게 티를 내지 않으려 했다.
“형, 나는 이런 일 당한 형한테 미안한데… 조금은 기뻤어요. 위기의 순간에 나를 떠올려 주었다는 게….”
“……뭐?”
“내가 그… 뭐지? 그런, 수호천사? 맞아, 그런 거 된 거 같아서 좀 좋은데?”
은우는 말없이 고개를 푹 숙였다. 승현은 갑자기 혀를 차며 신경질적으로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저 씨발 새끼 한 대만 때릴걸…. 벌써 후회된다.”
“…그러지 마. 수호천사가, 입이 거칠어.”
“왜 수호천사가 착한 말만 한다고 생각하는 거 편견이에요, 형. 나 같은 수호천사도 있는 법이죠. 좀 와일드한 맛이 있는 천사라고 합시다.”
이 상황에 농담을 던져 주는 승현 덕분에 은우는 긴장이 풀렸다. 은우가 승현의 큰 보폭을 빠르게 따르며 쫓았다.
“내일부터는 매일 내가 형 데려다주고 데리고 와야겠어.”
“……응.”
은우는 작은 대답을 했다. 이미 승현은 매일 그렇게 했지만, 그의 말뜻에 담긴 뜻이 따뜻해서 미소가 지어졌다.
“그러다가 꼴리면 차에서 섹스도 좀 하고. 큰 차 샀는데 한번 써 봅시다, 우리.”
승현은 은우를 차에 태우면서 능글맞은 아저씨 같은 소리를 했다.
“야……!”
꼭 잘 나가다가 승현은 한 번씩 저런 소리를 했다.
“왜- 형 집에서는 하지 말라면서요. 저번에 엄청 스릴 있지 않았어요? 차에서 불편한 자세가 막 더 꼴렸죠?”
“아, 아니야!”
운전석에 앉은 승현은 차에 핸들을 쥐며 힐끗 은우를 보았다.
“생각해 보면 형은 속으로 생각하는 거하고 말하는 거하고 반대로 나와요. 아니라고 해놓고… 그때 차에서 섹스할 때 엄청나게 싸던데.”
“진짜… 창피해.”
은우가 수치심에 빨갛게 되어 승현을 노려보면서 귀를 틀어막았다.
“하, 하지 마! 입 좀… 다물어…! 다, 다음부터 너 안 부를 거야!”
“어때요? 가분 좀 풀렸어요?”
하지만 승현은 은우의 귀에 손을 잡아떼며 말했다.
“난 형이 너무 좋아요. 특히 섹스할 때 야해서 더 좋아…. 평소에는 안 그런데 반전 있는 남자. 박아 달라고 우는 형도 좋고, 좋아서 더 해달라고 하는 것도 좋고.”
익숙해질 법도 했지만, 여전히 은우는 익숙해지지 않아서 승현의 음담패설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아, 아…….”
“그렇지만, 무엇보다…! 형이 좋아한다고 해줄 때가 제일 좋아요.”
“…….”
지금까지 은우가 들은 승현의 말 중에서 제일 정상적인 말이었다. 귀를 틀어막으려던 은우가 멀뚱하게 승현을 쳐다봤다.
손가락이 할 말이 가득해 보이게 꼼지락거리며 승현을 힐끗거렸다. 결코 오늘 있었던 일 때문에 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승현이 좋다고 해서 해주려고 한 것도 아니었다.
은우도… 승현이 좋았다.
“그, 그런… 건… 자주 마, 말해 줄 수 있어……. 사, 사랑해.”
내성적이고 소심한 은우가 얼마나 많은 용기를 쥐어짜냈는지… 얼굴이 딸기가 되어 갔다.
“나도.”
승현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은우는 승현의 차를 타고, 승현이 옆에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 안도가 되는지 몰랐다. 긴장이 한순간에 팍 풀렸다.
순간적으로 입속으로 털어 넣은 알약이 체내로 흡수되었다. 몇 알을 먹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몸이 이기지 못할 정도로 먹은 약 때문에 은우는 스르륵 잠들어 버렸다. 아마, 승현이 있다는 사실이….
✻ ✻ ✻
“형, 다 왔어요. 일어나 봐.”
집 앞에 도착해 승현이 아무리 은우를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다.
“…….”
새근새근 숨소리만 미약하게 흘러나왔다
“은우야…. 일 초 내로 안 일어나면, 잡아먹는다!”
“…….”
“진짜인데…….”
승현은 정신을 잃은 듯 잠들어 버린 은우를 보며 걱정이 되는 한편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은우는 자신 앞에서는 긴장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까칠하고 예민하게 경계하던 은우의 모습은 이제 사라져 버렸다. 가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다가 승현은 일어나지 못하는 은우를 양팔로 들어 올렸다.
은우를 안은 채 승현은 집으로 들어갔다. 자신을 반긴 건 정윤이었다.
“어휴, 뭐야…. 둘이 또… 설마 은우 기절할 만큼?”
웃는 얼굴로 정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농담처럼 말했다. 승현은 은우의 부모님이 안 계신 것을 확인하고 핏- 서슬 퍼렇게 웃으며 말했다.
“차라리 그런 거였으면 억울하지도 않을 거 같아요.”
정윤은 은우가 얼마나 놀란 일이 있었는지 몰랐으니, 하지만 승현의 말에 정윤은 다른 일이 있었다는 것에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승현을 따라 은우의 방으로 향했다. 승현이 기절해서 잠든 은우를 침대에 눕히는 모습을 보며 정윤은 물었다.
“왜, 무슨 일이야?”
딱딱한 얼굴을 한 승현은 은우에게 꼼꼼하게 이불까지 덮어 주며 정윤에게 몸을 돌렸다. 정윤은 승현의 모습에서 그런 종류의 농담이 아닌 것을 감지했다.
“오늘 저 친구들하고 약속이 있었는데… 아까 은우 형한테 전화가 왔어요. 도서관에서 공부하는데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었다고, 그런데 그 사람이 쫓아왔다고 하더라구요.”
“뭐? 그래서?”
미동도 없이 약 기운을 못 이겨 잠든 은우를 내려다보는 승현은 형형한 눈빛으로 정윤에게 말했다.
“그래서 미친 듯이 은우 형에게 달려갔거든요. 도착해서 보니까 은우 형은 학교 실험실에 숨어 있지, 그놈은 안 보이지. 그래서 은우 형 데리고 나왔는데, 알고 봤더니 기자였더라구요.”
“기자?”
정윤도 매서운 눈을 하며 팔짱을 끼우며 은우를 보며 되물었다.
“근데 왜 은우가 기절한 건데.”
“아시잖아요. 은우 형… 약.”
“아…….”
그제야 정윤도 어떻게 된 건지 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은우의 문제도 알고 있었다. 다만 자신이 그것을 끊게 할 방법이 없었다. 다행히 승현과 만나면서 억제제를 복용하는 횟수가 줄어들긴 했어도, 여전히 은우는 많은 약을 손에 쥐고 먹고 있었다.
“너 덕분에 약도 줄었는데….”
“그건 다행이죠. 요즘 은우 형한테 최대 열 알만 먹자고 조절해 주었는데, 그걸 그 새끼… 아니, 그 기자 때문에 조절하던 약을 한꺼번에 다 먹었나 봐요. 어떻게 줄였는데…. 아마 몸에 부담이 왔겠죠. 병원으로 가려고 했는데 기자들 때문에….”
“그래, 병원으로 갔으면 더 큰일 났을 거야. 판단 잘했어.”
승현은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며 수긍했다. 어제 세간을 떠들썩하게 떠든 화제의 인물이 병원에 기절하여 실려 왔다. 그것만큼, 기자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없었다.
“가뜩이나 은우 형, 제일 독한 약 먹는데.”
“…그래, 승현아…. 잘했어, 내가 박사님한테 연락해서 집으로 오시라고 할게.”
정윤은 상황을 파악하고 뒷수습을 하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승현은 정윤에게 궁금했던 점을 물었다.
“근데 정윤 형, 은우 형 말에는 이런 일이… 종종 있었다는데 왜 은우 형에게 경호원 안 붙여요?”
정윤은 시원시원하게 답해 주었다.
“왜 없었겠어. 고등학교 때까지는 아버지가 붙여 놨었지, 그게 눈에 띄기 십상인 데다가, 은우가 남의 눈에 띄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대학 들어갈 때 나한테 울며불며 매달려서 부탁했어. 아주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안 놔주더라. 고등학생 때까지는 있었어. 그것도 비서까지.”
제법 듬직한 승현의 어깨를 툭 치며 정윤은 방을 나서며 말했다.
“…그런 일 있으면 원래 나한테 먼저 전화했었는데, 이제 너한테 전화한 거 보면, 꽤나 의지가 되나 봐?”
“그럼요! 제가 좀… 의지가 되는 듬직한 남자죠. 그런데요, 형. 아까 그 씹새… 아니, 그 기자 한 대도 못 치고 온 게 너무 화나거든요.”
정윤은 핏-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눈빛을 던지며 방문을 닫고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