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0장. 마법 (22/22)

20장. 마법

승현은 오랜 시간 정성과 계획을 들여 은우의 오메가의 페로몬을 불러일으킨 날, 그의 몸에서 페로몬의 향기를 피워내게 했던 날. 정말로 은우의 배 속에 승현의 아이가 생겨 버렸다.

오메가의 임신 기간은 베타인 여성의 임신 기간인 열 달보다 조금 더 길어 일 년의 시간이 걸린다.

은우의 마지막 졸업 고사를 앞둔 12월의 어느 날, 묘한 몸의 변화에 혹시나 불현듯 스치는 불안감에 은우는 확인해 봤던 임신테스트기의 빨간 두 줄을 봤다. 은우가 임신을 확인한 것은 결혼식을 약 두어 달이 채 되지 않던 어느 날이었다.

“승현아… 어떡하지?”

심각한 은우의 말에 승현은 덩달아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무슨 일인데?

“……있지. 나… 임신했어.”

순차적으로 승현의 눈코입이 크게 확장되더니 큰 소리를 냈다.

“…뭐라고요?!”

“어떡해?”

울 듯한 은우와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좌불안석인 승현은 갑자기 큰 소리를 내면서 웃기 시작했다.

“아하하하!”

“난 심각한데 넌 왜 웃어!”

서러운 은우가 승현을 향해 소리를 내질렀더니 승현의 얼굴은 환희와 벅찬 얼굴을 했다.

“야… 난 심각해. 진지하게 생각해.”

“뭐가 그렇게 심각해요. 어차피 두 달 정도 뒤면 결혼할 건데 뭐! 와- 형, 나 지금 너무 좋거든요! 그동안 뿌린 씨의 결과가….”

은우는 철없는 그를 노려봤다. 승현은 벌렁거리는 심장으로 은우를 꽉 안으며 귀에 낮게 속삭였다.

“…그동안 싸지른 정액이 얼마인데.”

그러면서 승현은 살살 은우의 아랫배를 더듬거리며 기쁨의 얼굴을 감추지 않았다.

“야……!”

그러다 승현은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이 눈을 깜박이며 은우를 멍하게 응시했다.

“아… 형, 잠깐만…….”

“또 왜…….”

뾰로통한 은우가 배를 쓰다듬는 승현의 손목을 가볍게 움켜잡으며 대답했는데 승현은 은우의 입술에 뽀뽀를 쏟아부으며 심각하게 말했다.

“아직, 여기 있는 우리 애…. 사람처럼 생긴 거 아니잖아요. 배 속의 아기, 그렇죠? 형… 아직…. 세포 단계잖아. 그렇지?”

“음, 음…. 아마 뭐… 그…렇지? 근데 왜?”

“사람처럼 생기기 전에 우리 섹스 많이 해놔야겠다!”

“…뭐? 갑자기 화제가 왜… 이상하게 튀는 거야?”

“아, 잠깐 이럴 시간이 없어…. 하루가 아깝네….”

“왜 그래…. 너 미쳤어?”

“아니, 형. 잘 생각해 봐요! 형 아기 낳을 때까지 형이랑 섹스를 못 하잖아!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너는 정말…….”

은우 자신을 매번 경악하게 하는 승현의 발상에 혀를 내둘렀다. 뭘 어떻게 해야 저런 생각만 골라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뜸 승현은 당장 그 실천을 하겠다는 듯이 은우의 엉덩이를 붙잡고 주물럭거리며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은우는 반항하며 밀어내기 무섭게 승현은 돌진했다.

다음 날이 되어도 승현은 배 속의 아이는 세포라며, 우겼다. 또 다음 날이 되어도…….

하루가 멀다고 세포 덩어리라 우기는 승현은 은우를 녹여 먹는 데 선수가 되어 있었다. 그런 승현을 보며 은우는 그의 밑에 깔려 끙끙대면서도 아무래도 좋아하는 사람을 잘못 고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도 변함없는 일상을, 은우는 승현과 매일 붙어먹는 일상을 보냈다.

✻  ✻  ✻

도서관으로 직행하는 은우를 꼬박꼬박 승현은 데려다주고 데리러 오고 귀찮을 법도 했지만, 하루도 거의 거르지 않았다.

빨간 신호에 대기하며 핸들에 손을 올린 채 승현은 조수석에 앉은 은우를 향해 싱글벙글한 얼굴을 했다.

“우리 딸기, 이따가 뭐 먹고 싶어요?”

“아… 미친 거야? 딸기가 뭐야?

“우리 아기 태명. 내가 지었어요. 찰떡이죠.”

승현은 은우의 페로몬이 딸기 향을 닮아서 딸기라고 지었다고 말은 하지 못했다.

“형은 태명으로 딸기가 싫어요?”

“……그럼 좋겠어?”

승현은 그러다 은우의 향기가 새콤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럼 상큼이는 어때요?”

“진짜 싫어.”

“그럼 그냥 딸기.”

“…….”

한숨을 푹 내쉬는 은우를 향한 승현의 얼굴은 웃는 얼굴이었다. 빨간불에서 파란불로 바뀐 신호에 승현은 평소보다 더욱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이것도 모두 배 속의 딸기를 위한 길이었다.

“그럼 형은 뭐 먹고 싶었어요? 이따가 점심 한 시쯤에 데리러 갈 테니까 같이 밥 먹어요. 우리 딸기 먹고 싶은 거 사 줘야지.”

“…….”

갑자기 골이 아파지는 감각에 은우가 손을 들어 손바닥을 이마에 얹었다. 그러다 썩은 미소를 은우가 지으며 승현을 힐끗 노려보더니 까칠하게 응수했다.

“야, 그 딸기인지 달기인지, 아직 손톱만 하겠다. 아니, 아직 손톱보다 작겠네!”

“아, 그래요? 아직도 세포 단계인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승현은 가까워지는 학교를 확인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도 형, 점심 같이 먹어요. 연락 안 하면 안 먹을 거 같으니까… 한, 이따가 한 시쯤 돼서 연락할게.”

고개를 끄덕이며 은우는 차에서 내렸다.

“맞다, 은우 형. 대학원은 어떻게 할 거예요?”

은우가 허리를 숙여 승현과 눈을 마주쳤다.

“음… 아무래도. 아기 낳을 때까지 뒤로 미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괜찮다면, 난 형 대학원 가는 거 좋아요.”

“왜?”

승현은 듬직한 얼굴로 웃었다.

“내가 형 응원한다고 했잖아요. 신약 개발, 그거 멋있다고. 난 형이 하고 싶다는 거 다 해줄 거거든요.”

“아-”

수줍고 예쁜 미소로 은우가 웃었다. 그러다 은우도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몇 초의 정적 뒤로 물었다.

“맞다, 승현아…….”

“음? 왜요?”

“그게… 나, 유학 가고 싶어.”

은우가 말하기 고민한 이유는 돈이 없어서 아니었다. 현실적으로 결혼을 앞두고 유학이라니, 하지만 승현은 놀라거나 싫다거나 하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유학……. 가면 되겠네. 가자, 형. 형 유학 가는 데 나도 따라가야지. 나도 대학교 거기서 졸업하고. 가는 김에 놀러도 가고.”

“잘 생각해 봐. 농담 아니고.”

“생각할 것도 없어요. 난 형 따라갈 거라서.”

“승현아.”

“오히려 형이 내 생각 더 많이 해줄 거 아니까, 난 괜찮아요. 형 유학 가는 거 찬성. 단, 우리 결혼 후에요.”

은우는 생각해 보니, 승현의 실행력을 잊고 있었다. 아버지 앞에서 결혼식을 앞당기던 패기며, 만남을 허락해 달라고 조르던 모습이 생각났다.

“은우 형, 얼른 들어가요.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승현은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은우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학교를 빠져나갔다. 은우를 도서관에 데려다주고 줄곧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하루가 멀다고 생기는 각종 모임이 승현을 매일매일 바쁘게 움직여야 소화가 될 만큼 있었다.

그리고 내일은 결혼을 앞두고 승현을 일품 그룹의 일가친척들에게 소개하는 작은, 아마 작지는 않을 식사 자리가 마련되었다. 변 회장이 특히 자신을 마음에 들어 했기에, 승현은 승현 나름대로 목에 힘주어 준비했다.

“어, 벌써… 시간이….”

승현은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문득 시간을 보다가 은우를 데리러 가야 하는 시간임을 확인했다. 뭘 먹을지 고민하며 승현은 차 키를 빙글빙글 돌리며 주차된 차로 향했다.

띠리링- 띠리링-

승현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리며 전화가 왔다고 알렸다. 주머니를 뒤적이며 승현은 내심 은우가 빨리 오라고 연락하는 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발신자의 이름을 봤다.

하지만 기대와 달라 다소 실망한 승현의 얼굴은 시무룩해졌다. 맥빠진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네, 형.”

-승현이니?

전화를 건 사람은 정윤이었다.

“네, 저예요. 정윤이 형.”

-지금 어디야?

“어… 지금 은우 형 데리러 가서 점심 먹으러 가려구요.”

-그럼 이따가 가고, 잠깐 회사에 좀 들러.

“……음, 무슨 일이에요?”

승현의 말투는 그렇지 않았지만, 굴러가는 승현의 눈동자는 너무나도 귀찮다는 빛을 띠고 있었다. 최대한 안 가려는 핑계를 댈 궁리를 하려 뇌가 꿈틀꿈틀 움직였다.

-귀찮아하는 거 다 티 나. 은우가 부르면 냉큼 군소리도 없이 올 텐데, 내가 부르니까 머리 쓴다 이거지? 내가 해준 뒷수습이 얼마큼인데….

귀신같이 정윤이 정곡을 찔려 승현은 보이지도 않았지만,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무슨 소리예요, 형! 그런 거 전혀 아닙니다!”

-내가 이따가 오후에 미팅이 있어서 지금 시간이 아니면 시간이 없어서 그래. 은우 일이야.

“네, 지금 가요.”

갑자기 돌변한 승현은 목소리에 정윤은 실소를 터트렸다. 우스갯소리로 승현의 태도와 목소리의 돌변을 지적하며 나무랐다.

-야, 이렇게까지 사람이 돌변하는 건 좀 아니지 않냐?

“아아,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형!”

-아니긴. 다 티 나, 인마…! 그래서 지금 오면 얼마나 걸리냐?

“하하하, 다 티 났어요…? 지금 바로 가면 한 이십 분 정도 걸릴 거 같습니다.”

-그래, 내가 로비에 미리 말해 놓을 테니까. 올라와.

“네.”

승현은 은우 일이라니까 걱정이 되었다.

혹시나 은우가 이 결혼 못 하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아니면 이제 와서 은우를 결혼 못 시키겠다거나… 하면 어쩌지.

그런 걱정이 슬금슬금 승현의 마음을 지배했다.

하등 쓸모없는 고민과 걱정으로 승현은 가장 비싼 땅에 세워진 일품 그룹의 본사로 향했다.

70층으로 지어진 건물은 위용이 대단했다. 차를 끌고 회사 부지로 들어가는 순간 안전요원에 의해 보안상이라는 이유로 몇 번의 신분 확인을 거치고 난 뒤에야 건물로 진입이 허용됐다.

승현은 차에서 내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로비에 들어서자 까만 정장을 차려입고 위압감을 내뿜는 경호 요원들이 승현을 힐끗거렸다. 승현이 남들보다 체격이 남다르고 풍기는 분위기가 남다르다고 하더라도 아직 스무 살이었다.

당당하게 로비를 가로질러 안내 데스크로 간 승현이 직원에게 말했다.

“변정윤 전무님 찾아왔는데요.”

딱 봐도 어린 승현이 그룹의 전무를 찾아왔다는 것에 이상한 눈초리를 보내는 보안 직원들을 뒤로 데스크에 앉은 안내 여직원은 환하게 웃으며 응대했다. 그녀의 미소가 다소 기계 같은 친절함이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한승현입니다.”

“네, 확인 감사합니다. 전무님께 연락받았습니다. 실례지만, 신분증을 맡아 놓아도 되겠습니까?”

이런 보안 정도는 어느 기업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승현은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냈다. 아무리 정윤의 지시라 하여도 보안에 작은 허용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으레 당연한 일로 승현은 데스크에 신분증을 제출하자 데스크 안내 직원은 친절하게 응대하면서 말했다.

“61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그녀가 신분증을 맡아 놓는 대신 방문자 증을 건네주었다. 아마 이 출입증이 있어야 엘리베이터도 움직일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

로비에 오가는 직원들의 목에는 신분증을 나타내는 아이디 카드가 달랑달랑 흔들렸다. 다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점심을 먹으러 가는 직원들과 이미 먹고 들어오는 직원들이 어지럽게 로비에 뒤섞였다.

승현은 방문자 증을 목에 걸지 않고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엘리베이터에 탑승했다. 여직원이 안내한 61층에 내리니 아무것도 없는 휑한 공간에 엘리베이터와 마주한 기다란 데스크가 놓여 있었다. 데스크에는 남녀로 구성된 직원이 네다섯 명 앉아 있었다.

시큰둥하게 승현은 그들에게 방문자 증을 보여 주며 말했다.

“변정윤 전문님 찾아왔습니다.”

과한 친절함을 담아 남직원이 말했다.

“오른쪽 끝 방에 가시면 됩니다.”

아마 고층부터는 임원들 방으로 구성되어 있는 건지 빼곡한 유리문이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열되어 있었다.

승현은 알았다는 고갯짓을 보이며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방에 붙은 무슨 무슨 팀의 이사, 상무… 하는 등의 이름들이 어지럽게 걸려 있었다. 승현은 어렵지 않게 정윤의 방을 찾을 수 있었다. 유리문 앞에서 노크를 콩콩했더니, 안에서 정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와요.”

승현은 손잡이를 밀고 들어갔다. 유리문의 슝 밀리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방 안에서 불어오는 미풍이 얼굴에 닿았다.

“형, 저 왔어요.”

승현이 들어갔을 때까지도 정윤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책상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아, 승현이 왔구나.”

승현의 등장에 겨우 정윤은 책상에서 고개를 들었다. 그러다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 앞에 놓인 8인용으로 놓인 가죽 소파로 손짓을 했다.

“잠깐 앉아.”

“네.”

승현은 손짓에 따라 소파에 앉아 주변을 신기하게 빙빙 둘러봤다.

“점심은? 아직 안 먹었지?”

정윤이 기계적인 안부를 묻기에 승현은 대답했다.

“아직이죠. 은우 형도 아직 안 먹었을 건데…. 은우 형 데리고 점심 먹는다고 했잖아요, 형. 제가 부르지 않으면 밥 먹는 거 까먹고 있을 건데.”

괜히 승현은 초조한 듯 시계를 보았다. 정윤은 그를 보며 푸핫, 웃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너는 여전하구나. 그래, 그럼 커피나 한잔하자.”

그러더니 정윤은 익숙하게 책상 상단에 놓인 전화기에서 호출 버튼을 눌러 커피를 가져다달라고 부탁했다.

방금 엘리베이터에 나오자마자 본 그 데스크 직원들에게 연결되었으리라 승현은 예상했다. 그 데스크 직원들은 임원들의 스케줄 관리와 손님들이 찾아왔을 때 응접을 위해 배치된 직원들일 것이라 짐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은 남자 직원이었고, 승현은 역시 그가 데스크에 있던 직원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가 소파 테이블에 커피를 내려놓고 나갔다.

정작 정윤은 승현을 불러 놓고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자, 승현은 그 순간 오면서 떠올린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에 스쳤다. 그러면서 정윤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형,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

괜히 뜸을 들이는 정윤은 어떻게 말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아 얼굴이 굳어지며 입을 열기가 망설여졌다. 멋쩍은 웃음을 보이다가 커피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움직였다.

“……흠. 그게… 막상 이야기하려니, 되게 떨리네.”

정윤의 무거운 분위기에 덩달아 승현은 긴장되어 소리를 내는 정윤의 입술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너한테는… 얘기해 줘야 하지 않을까, 계속 고민했거든.”

정윤은 무겁게 떼어내는 입술을 겨우 축이며 말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오지 않아서 몇 번 헛기침해 목청을 가다듬었다.

정윤은 아버지에게 은우에게 있었던 이야기를 승현에게 해줘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아버지의 입장은 과거의 이야기로 질질 끌려다닐 수 없다 했다. 그건 정윤도 동감했기에 반대 입장을 고수하는 아버지에게 따랐다.

그래서 정윤도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승현도 은우의 소문을 알고 있으리라. 만약 그게 승현이 진실에 대해 의구심을 품게 되면, 본의 아니게 승현을 속이게 된 것이 될까… 정윤은 한참을 고민했었다.

그렇게 시간이 어영부영 흘러 이제 두 사람의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말을 하기가 꺼려지긴 했지만, 승현이라면… 정윤은 믿고 있었다. 은우가 처한 상황을 더 좋게 해주리라는 생각을 했다. 자신들이 은우에게 해주지 못하는 걸 승현은 은우에게 해줄 수 있을 것이라.

승현의 눈매가 날카로웠다. 정윤의 분위기로 봐서는 그리 신나고, 좋은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휴우- 말하기 진짜 어렵네.”

정윤은 한숨을 푹 내쉬며 웃음을 보였다. 그의 웃음은 씁쓸한 미소였다.

“…그게, 은우가… 어릴 때, 그러니까 몇 년 전에 있던 일인데….”

그날의 기억은 정윤도 생경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위험한 일을 당할 뻔한 은우를 찾아 구해 준 게 자신이었으니, 심기일전을 하는 듯 심호흡을 했다.

“승현이 너도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은우가 좀… 사람들에게 안 좋게… 소문이 난 건 알지?”

정윤은 힐끗 승현의 얼굴을 살폈다.

그런데 승현의 표정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확고했다. 승현은 조용히 어색하게 웃는 정윤을 향해 말했다.

“형, 그거 제가 알아야 하는 건가요?”

“……어?”

그 질문에 아주 잠깐 정윤은 말문이 막혀 버렸다. 승현의 물음은 생각하지 못한 일이었다. 알아야 한다, 몰라야 한다. 그런 건 생각하지 못했다.

정윤에게 있어서 그 사실을 밝히느냐, 숨기느냐의 문제였었다. 눈꺼풀이 당황으로 깜박거리던 정윤은 승현의 그 한 마디에 어딘가 마음 한구석이 한결 가벼워진 마음이 되었다.

“음……. 나도 사실 잘 모르겠다. 알 수 없어서 지금까지 말을 못 했거든. 하지만 너라면 괜찮을 거 같았어. 은우가 정말 많이 힘들어했거든…. 그 일 때문에, 손에서 약을 놓지도 못했고 말이야.”

승현은 앞으로 기울였던 몸을 꼿꼿하게 세우며 웃었다.

“그럼 형, 저는 안 듣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음……. 솔직하게는 궁금하기도 하고 알고 싶기도 해요. 어렴풋이 들은 이야기는 저도 알고 있거든요. 하지만 거기에는 사실은 없고 소문만 있으니까요.”

“그런데? 왜 안 듣겠다는 거야?”

승현은 듬직한 얼굴로 듬직한 미소를 했다.

“제가 실제로 겪고 이 두 눈으로 본 은우 형은… 사실도 없고 소문도 없는 사람이거든요.”

찡긋 웃는 승현의 볼에 보조개가 오랜만에 깊게 파인 듯했다. 정윤은 뒤통수를 한 대 크게 얻어맞은 듯이 충격을 받은 얼굴로 승현을 바라봤다.

“그런데 은우 형이 힘들어했으니까…. 만약 저였다면, 제가 만약 은우 형의 입장이었다면… 그걸 다시는 누구에게도 알게 하고 싶지 않을 거 같아요.”

정윤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열 살 이상 어린 승현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마도 승현의 저런 면에서 아버지가 승현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게 아닐까 확신이 들었다.

“그렇구나, 내가 잘못 생각한 거구나.”

“아마도요…? 정윤 형, 그럼 저한테 빚지신 겁니다.”

승현은 이제 용건이 끝났다고 판단하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윤의 시선이 승현을 따라 움직였다.

“푸훗, 그래. 너한테 소문이 다 아니라고 해명하려고 했는데…. 상관없구나, 이미 너는.”

“네.”

정윤의 방을 나서려는 승현은 옷매무새를 다듬더니 샐쭉 웃으며 덧붙이는 말을 정윤에게 향했다.

“좆 까, 씨발이죠.”

“뭐……? 하하하—!”

거친 욕설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상쾌한 말이라서 오랜만에 정윤은 배를 부여잡고 치아를 고르게 보이며 웃었다. 그러다 눈물까지 맺혔는지 슬쩍 눈가를 닦으며 말했다.

“그 말… 나중에 은우한테 꼭 해줘라. 아주 좋아할 거다.”

“그럼요.”

이제 정윤도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책상으로 돌아가려 했다가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내일 아버지가 어깨 힘주고 자리 마련하신 거 보니까, 너 엄청 마음에 드신 모양이더라.”

“…….”

굳어진 승현의 얼굴을 보면서 정윤은 넥타이도 고쳐 매고 소매도 반듯하게 했다. 슬슬 회의에 들어갈 채비를 했다.

“근데 너 왜 또 똥 씹은 표정이냐?”

“휴… 사실 회장님께 정말 감사한데…….”

“아아, 은우 때문에?”

“네, 또 혼자 있으면…….”

승현은 말꼬리를 흐렸다.

처음 승현이 은우를 만났을 때 초라하게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가려지지 않는 은우의 미모와 분위기는 위태로웠고, 위험했는데…. 혼자 덩그러니 있었던 은우가 외로워 보였다.

회의 준비를 하며 정윤은 승현의 걱정에 대답했다.

“은우는 괜찮아. 의외로 강단이 있어서, 뭐 좀 힘들어하긴 해도… 지금까지도 그 맡은 소임을 묵묵하게 해냈으니까.”

“그래도 걱정이에요.”

정윤은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너보다 네 살이나 형이다. 자, 이제 그만 가자. 은우 점심 먹이러 간다며.”

승현은 당당하게 정윤에게 손을 뻗었다.

“아, 맞다. 그럼 정윤 형, 우리 딸기 맛있는 거 먹이게 협찬 좀 해줘요. 올해, 은우 형 꼬신다고 지출을 너무 많이 해서 아빠가 카드를 끊었거든요. 하필 요트 산 게 걸려 가지고.”

정윤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딸기?”

“아아, 제가 지었어요. 태명.”

“풉, 하하하—! 아, 오늘 나 너무 웃는데? 미치겠다. 그거 은우가 좋아해?”

정윤은 책상에 양손을 짚으며 어깨를 들썩이게 할 정도로 웃었다.

“아, 완전 싫어했어요.”

정윤은 웃음이 비집고 흘러나와 억지로 입술을 깨물어 참았다. 하지만 일그러지는 입술은 웃긴다는 듯이 딸기라고 몇 번 중얼거리다가 주머니에서 카드를 하나 꺼내 승현의 손에 쥐여 주었다.

카드를 받은 승현은 히죽 웃으며 정윤의 방을 나섰다.

“그럼 정윤 형, 가 볼게요.”

당당한 발걸음으로 일품 그룹 전무실을 나온 승현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시계를 보니 약속한 시에서 조금 넘은 시간이라서 핸드폰을 꺼냈다.

✻  ✻  ✻

한눈에도 휘황찬란한 세단이 주차장에 쭉 즐비해 있었다. 도심에 있는 5성급 호텔의 모습은 변함없이 한결같았다. 그건 은우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장면이었다.

“후우…….”

은우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자신을 태운 차량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곳으로 향했다. 꼭 마치 지옥의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창틀에 팔꿈치를 괴고 시큰둥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는 은우는 심리적 안정감을 위해 주머니에 넣어 둔 약통을 만지작만지작거렸다.

오지 않았으면 가까워지지 않았으면… 바라던 곳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주차장까지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다.

“기사님, 저 금방 나올게요. 몇 시간 안 걸릴 거 같으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예.”

뒷좌석 창틀에 팔을 괴고 있던 은우는 옷매무새를 정돈하기 위해 주머니에서 손을 뺐다. 아이를 임신한 이후로 약을 끊은 은우는 약통을 채웠던 피 같은 붉은 원형의 약은 텅텅 비어 있었다.

“후우…….”

오늘도 중요한 행사가 있었다. 무슨 행사였는지 은우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모 기업의 창립 4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였던 걸로 기억했다.

죽기보다 싫은 행사에 은우는 참석했다. 오늘 아버지는 승현과 정윤을 데리고 집안 행사에 참석했고, 어머니는 승현의 어머니와 함께 이 주 전에 미국으로 여행 겸 경매 행사에 참석하러 떠났다. 결국, 또 남은 건 자신뿐이었다.

“도착했습니다.”

“감사합니다.”

호텔 로비에서 제복을 갖춰 입은 벨보이가 차 문을 열어 주자 눈부셔 눈이 멀게 할 것처럼 플래시가 연신 반짝거리며 터졌다.

세간의 화제를 일으킨 장본인이라는 이유로 더 많은 카메라의 셔터가 집중포화로 쏟아졌다. 은우는 굳은 얼굴로 차에서 내렸다.

불빛이 터지는 플래시에 반짝 빛이 날 정도로 고운 빛을 내는 검은 슈트를 차려입은 은우는 줄곧 굳어 딱딱한 얼굴로 빠른 걸음으로 호텔 안으로 향했다.

“여기 좀 봐 주세요!”

“여기요!”

“오른쪽 좀 봐 주세요!”

사방팔방에서 카메라를 한 번 봐 달라고 외치는 기자들을 무시한 채 꼿꼿하게 정면만 응시한 채 은우는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탄식이 들렸지만 은우는 개의치 않았다.

호텔의 두꺼운 유리문 안은 다른 세계였다. 그곳에 발을 들이자마자 미리 와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은우에게 쏠렸다. 최대한 존재감을 지운다고 지웠지만, 귀신같이 사람들은 자신을 발견하자 다시 수군대기 시작했다.

은우는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흐리멍덩한 눈으로 그들을 지나쳤다. 가볍게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길 생각도 없이 연회가 준비된 홀 안으로 들어갔다.

호텔 내부에 위치한 연회장은 규모에 걸맞게 화려했다. 다소 시대 뒤떨어진 얼음으로 조각해 만든 백조 한 쌍이 우아하게 있었지만, 조명과 사람들의 열기에 조금씩 녹아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녹고 있었다.

홀 한쪽 면에는 연회를 즐기는 사람들이 지루해하지 않게 케이터링이 준비되어 있었고, 높은 샹들리에는 먼지 하나 쌓이지 않았다는 듯이 영롱한 빛을 내고 있었다.

조용히 벽에 스며들 것처럼 은우는 존재감을 지웠다. 그것이 은우의 특기였다. 하지만 감춰진다고 감춰질 인물이 아니었다.

여전히 선이 가는 은우를 힐끗 보는 사람들과 대놓고 노골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은우는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그 둘 다 거북스러운 시선을 오롯이 견디는 은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이 반짝거렸다. 은우는 예전처럼 눈에 힘을 풀고 초점을 흐릿하게 하며 멍하게 한 점을 만들어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하필 결혼을 앞둔 시점이라 사람들의 시선이 유달리 뜨거웠다. 그들의 비아냥이 살을 벨 듯한 공간에 혼자 외롭게 있었다.

다갈색의 머리카락이 숙인 얼굴 앞으로 쏟아졌지만 은우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려던 손을 움찔하며 멈췄다. 이대로 사람들의 시선이 머리카락으로 가려진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귓가에 흐릿하게 들리는 악의적인 소문들이 점점 원하지 않게 선명해졌다. 듣고 싶지 않았지만, 시작과 달리 청각은 차단이 불가능했다.

“쟤, 일품 그룹 둘째 아니야?”

“어디……?”

“저기 바닥 보고 있는 사람, 곧 결혼한다고 하지 않았어?”

“아아, 저기.”

누군지도 모를 남녀 한 쌍이 손가락질을 하며 비웃음으로 자신을 위아래로 훑었다. 겉으로 표출하는 승현과 달리 은우는 속으로 삼키려고 눈을 꾹 감았다.

“결혼은 어떻게 한대?”

“그러니까, 꼬셔서 넘어간 그 사람도 불쌍하다. 그게 누구였지?”

“A&C 그룹의 둘째라고 하던데….”

“아마, 일품이라는 거대한 힘과 돈만 보고 결혼하는 거겠지. 조금 불쌍하다, 불쌍해. 쯧쯧.”

그들의 혀 차는 소리가 상당히 거슬리게 은우의 귀에 날아와 박혔다. 그 순간 아마, 평생 자신에 대한 소문은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다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 대한 악담은 어느새 나뿐만 아니라 승현을 향한 비아냥으로 같이 변질되어 은우는 혀를 잘근잘근 깨물었다.

“아, 맞다. 기억났다. 그, A&C 그룹 둘째 내년에 이제 스물한 살이 된다는데.”

“뭐? 정말?”

놀란 새된 소리가 주변에서 웅성웅성 뭉게구름처럼 퍼져 나갔다.

“새파랗게 어린놈이랑…. 좋겠네. 근데 저 사람 소문에는 더 잘된 거 아니야?”

큭큭, 비웃는 소리마저 들렸다. 노골적인 비웃음이 들렸다.

은우가 숙였던 고개를 슬쩍 들었더니 비웃음을 짓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그 사람은 황급히 시선을 떼며 고개를 돌려 자신에게서 멀어졌다. 하지만 힐끗거리는 눈초리는 멈추지 않은 채 자신을 관찰하고 살펴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잠깐 정신을 차렸을 뿐인데 은우의 귓가에 들린 말소리들은 가슴을 후벼 파는 듯 날아와 꽂혔다. 예쁜 얼굴을 가진 은우의 매끈한 눈썹이 일그러졌다가 펴졌다.

자신에 대한 소문은 그렇다 치더라도, 승현에 대한 조롱은 참을 수가 없었다.

“…후우…….”

화가 났지만, 은우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가능했다면 은우는 이곳에 오고 싶지 않았다.

하필, 아버지는 왜… 오늘 같은 날….

왜소한 어깨가 더욱더 움츠러들었다. 점점 은우 자신과 승현에 대한 소문이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악랄해졌다.

차분하게 숨을 고르게 은우는 내쉬었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생각해 보면 웃긴 일이었다.

은우는 자신에 대한 평판이 최악으로 치닫고, 자신 때문에 일품 그룹의 기업 이미지를 깎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였다. 회사의 주가는 결혼 발표 이후 연일 상승세를 타고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그 말은 그저 저들에게 자신은 하나의 유흥거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대꾸할 기운도 없어져 무기력하게 벽에 뒷짐을 지고 기대섰다.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 은우는 발끝을 세워 툭툭 차며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 덩그러니 놓여 오점처럼 은우는 외로이 있었다. 은우도 누군가와 인사를 환하게 주고받으며 준비한 음식들을 품평하고…. 그런 일은 꿈같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티가 나지 않게 고개를 저은 은우는 빨리 준비된 식순만 끝나면 재빨리 나갈 궁리를 하느라 물조차 입에 대지 않았다.

은우는 지은 죄도 없는데 죄인처럼 고개를 앞으로 숙였다. 다갈색의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하늘거리며 앞으로 쏟아졌다. 매끈한 이마에 수놓아진 머리카락을 습관적으로 쓸어넘기는 은우의 예쁜 손가락에 가는 머리카락이 감겼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는지, 그 손길 한 번에 꽤 많은 사람들이 노골적으로 쳐다봤다.

은우는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엄지손가락으로 만졌다. 승현과 이걸 하네 마네 하면서 맞춘 반지를 떠올리니 웃음이 났지만,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허공에 한 점을 만들어 멍하게 은우는 쳐다봤다.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게 쏟아져 곧 은우의 얼굴이 사라질 것만 같았지만 한두 번도 아니고 익숙했다.

또각, 또각…….

은우의 귓가에 구둣발 소리가 나며 자신에게 가까워지고 있다고 울렸지만, 은우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낯선 남자 두 명이 다가와서 매너 가득한 웃음과 몸짓으로 인사를 하며 손바닥을 앞으로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안녕하세요.”

멍했던 은우의 정신이 한순간에 깨지며 은우는 말을 걸어온 남자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그가 멋진 웃음을 지으며 은우에게 손과 얼굴을 향했다.

“이번에 결혼하신다고,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주고받는 은우의 얼굴은 굳은 채 미소조차 보이지 않았다. 은우가 내민 손을 잡지 않자 그는 민망한 듯 멋쩍은 웃음으로 손을 도로 집어넣고 자리를 떠났다.

스쳐 지나가는 그를 힐끗 흘겨보며 은우는 벽으로 스며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벽에 몸을 기댔다. 방금 말을 건 저 사람도 일부러 자신에게 말을 건 것이 확실해졌다. 스쳐 지나가는 말과 비웃음이 선명하게 귀를 파고들었다.

“같잖은 게, 되게 도도한 척 구네.”

“아서라, 저 얼굴로. 집안으로 콧대가 높아져서…. 닳고, 닳은 거 다 아는데.”

“그러니까, 좀 꼬셔 볼까 했더니만….”

음탕한 소리가 귀에 들렸다. 눈을 감았다 뜨는 은우는 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싶었다. 다리가 후들후들거렸다.

“후우…….”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넣어 둔 약통을 매만지며 떨리는 숨을 가다듬었다. 아이가 생기고 난 뒤 약을 먹지 못하지만, 지금 은우는 너무 간절하게 위안을 주는 억제제를 떠올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승현이 너무 보고 싶었다. 설움에 붉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울컥한 감정에 눈가가 따끔거렸다. 눈시울이 빨갛게 되려고 하자 눈꺼풀을 파닥파닥 빠르게 깜박거렸다.

“하아…….”

은우는 목이 몸속으로 들어갈 정도로 움츠러들었다. 사람들의 노골적인 시선과 대화는 더욱 은우의 마음에 상처를 냈다. 다시 듣고 싶지 않은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가 났다.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소리에… 사람들의 웅성거림도 커졌다.

또 누굴까. 또 누가 와서 나에 대해 모르면서 비아냥을 하고, 조롱을 할까….

한숨조차 사람들의 눈에 띄게 하고 싶지 않아 남몰래 쉬며 은우는 볼 안쪽 살을 깨물었다. 커다란 구두가 자신의 앞에 멈춰 섰다. 은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뭐야, 여기 있는지 몰랐잖아요. 한참 찾았네.”

사내의 굵은 목소리가, 익숙한 목소리는…. 온몸을 울림통으로 내서 낮게 진동하는 목소리가 머리맡에서 울렸다.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는 승현의 목소리였다.

“……어?”

은우가 번뜩 고개를 들어 올려 눈을 깜박거렸다. 씩 웃는 승현의 볼에 보조개가 패었다. 승현과 시선이 마주치자 승현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형, 많이 기다렸어요?”

승현은 이곳에 도착하고 나서 왜소한 은우가 한쪽에서 주눅 든 모습으로 있는 걸 발견했다. 은우가 왜 그렇게 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승현은 단지 은우의 앞에 섰을 뿐인데 사람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오늘, 너… 가족 모임….”

“아아, 정윤 형이 저에게 빚을 좀 진 게 있거든요. 그래서 형의 도움을 좀 받았죠.”

승현은 얄궂게 웃었다. 슬쩍 은우 옆으로 몸을 돌려 은우처럼 벽에 기대 나란히 섰더니 사람들이 은우를 쳐다보는 눈빛들이 얼마나 노골적이고 더러운지 승현은 눈에 보였다.

힐끗거리며 쳐다보는 시선들, 비아냥 섞인 조고, 쳐다보며 수군거리는 엿 같은 대화 소리… 등등.

승현은 지금까지 이걸 몇 번이나 은우 혼자서 견뎠을까, 그가 안쓰러웠다.

“흐음…. 와, 형… 대단하다. 원래 좀 대단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유달리 형이 어른 같아 보여요. 이걸 견뎠다니.”

“……응? 뭘?”

“사람들 눈이요.”

“응? 아…….”

은우는 다시 고개를 바닥으로 향한 채 벽 한구석에 서 있을 뿐이었다. 승현이 나타난 이후 사람들의 호기심 서린 눈이 번뜩였다.

은우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그렇다고 하지만, 승현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자신 때문에 그렇게 안 좋게 엮이게 된 것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해. 나 때문에… 너까지 나쁘게 됐다.”

“우리 가서 시비 털까요? 나 싸움 좀 잘하는데.”

농담 섞인 말에 은우는 한결 긴장이 풀려서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야, 그러지… 마.”

은우는 승현의 소매 끝을 다급하게 잡았다. 정말 승현이라면 그럴 수 있을 거 같아서 은우는 미약하게 떠는 손에 힘을 주었다.

“쳇, 아쉽다. 알았어요. 형이 그러니까, 그럼 나도 같이 참아 볼게.”

승현은 가만히 은우 옆에 섰다. 실제로 사람들은 괜히 은우와 승현의 앞을 지나가면서 말을 주고받으며 구경했다. 그건 상당히 화가 나는 행위였다. 그들이 지나가면서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기분을 느끼던 승현은 은우를 따라 벽에 기댔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은우가 늘 이런 기분이었겠구나, 승현도 처음 느꼈다.

“자, 간접 체험 끝.”

“응?”

“형, 여기 와서 뭐 좀 먹었어요? 아… 먹었을 리가 없지….”

주변에 준비된 음식들을 쭉 훑어보면서 승현이 소리를 냈다.

“나 아무것도 안 먹고 와서 배고파요.”

“나, 나는… 아니, 안 먹을래.”

승현은 은우와 첫 만남을 떠올렸다.

“하긴, 형은 나 처음 만났던 그때도 안 먹고 있었지.”

당당하게 승현은 은우의 손을 덥석 잡고 샐쭉 웃었다.

“우리 딸기를 위해, 저기 양고기 스테이크 있다. 스테이크 먹어요. 나 배고파.”

은우를 질질 끌고 승현은 연회 홀을 가로질렀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두 사람에게 날아가 꽂혔다.

은우는 얼굴이 화끈거리며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이리저리 배회했다.

“야… 승현아…….”

야만인은 사람들의 시선이 없는 듯 굴었다. 오히려 즐기고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셰프가 하얀 접시에 양고기를 썰어 가지런히 올려 승현에게 건네주었다. 승현은 은색의 포크로 붉은 기가 감돌게 잘 구워진 양고기를 찍었다. 고기 한 점을 승현은 은우에게 내밀며 씩 웃었다.

“아- 해봐요. 내가 먹여 줄게.”

“무, 뭐 하는 거야…. 난, 안 먹을래…. 배고프다며…. 너 먹어.”

사람의 시선이 너무 따가워서 은우는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다시 구석의 벽으로 가려는 은우를 승현이 잡아 몸을 돌려세웠다.

“에이, 형. 그러지 말고 한 입만 먹어 봐요.”

“너 진짜…….”

승현의 고집은 은우도 알고 있었다. 야만인의 강요에 은우는 못 이겨 체념의 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리 줘. 내가 먹을게.”

은우가 손을 뻗어 포크를 빼앗으려고 했지만, 승현은 은우의 손이 닿지 않게 높이 들어 버렸다.

“싫어요. 내가 먹여 줄게요. 빨리, 아- 해봐요.”

사람들은 아닌 척하면서 승현와 은우를 쳐다보고 있었다. 은우는 그들의 시선을 크게 느끼게 되자 부담이 되었다. 이런 일은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어서, 은우는 어떻게 해야 할지 눈을 파닥파닥 감았다가 뜨는데 키 큰 승현은 허리를 숙여 자신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그럼 내가 입으로 먹여 줄까요?”

“…….”

화악, 은우의 얼굴에 갑자기 피가 쏠리며 터질 듯이 빨갛게 되었다.

“아, 형…. 볼 빨갛게 된 더 딸기 같아요. 그러니까… 아- 하면 된다니까.”

창피한 은우의 얼굴은 울상이었지만 승현은 웃었다. 느릿하게 은우는 결국 입술을 주춤주춤 벌렸다. 작게 썰린 고기를 승현은 자신의 입속에 쏙 넣어 주었다.

오물오물 고기를 씹는 은우는 타이어를 씹는 건지 고기를 씹는 건지 아무 맛도 느낄 수가 없었다. 미간에 주름이 잡힌 은우는 승현을 날카롭게 쏘아봤다.

사람들은 수군대면서 놀란 눈치로 두 사람을 지켜보며 다시 수군댔다.

“형, 어때요? 맛있어요?”

“……아니, 맛없어.”

“아, 그래요? 그럼 나는 안 먹어야지, 다른 거.”

승현은 얄밉게 접시를 내려놓으며 다른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그러면 은우 형, 저거 먹어 볼까요?”

“아… 아니, 야….”

은우가 뒤로 물러나기도 전에 승현은 은우의 손을 잡고 끌고 갔다.

또 한차례 두 사람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먹어 보라며 먹여 주겠다는 승현과 안 먹겠다고 버티는 은우는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승현의 손에 끌려 이것저것 몇 가지 요리를 입에 채워 넣게 됐다.

은우는 그래도 망나니 같고 난폭한 야만인 같아도 승현이 곁에 있어서 조금은 굳어 있던 얼굴이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은우는 승현의 소매를 손가락으로 잡고 졸졸 따라다니고 있었다.

“오늘 이렇게 입은 형 보니까 색다르네.”

“왜, 어떤데?”

“시크하고 도도해 보이잖아요. 섹시가 흐르게. 내 색시.”

“…….”

미약하게 입꼬리가 떨렸다. 중년 아저씨처럼 말하는 승현은 분명 자신의 기분을 좋게 풀어 주려고 하는 걸 알았지만 은우는 웃음이 새어 나오려고 해서 곤란했다.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웃음을 보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안면 근육이 굳어져 웃음과 상충 작용으로 입꼬리만 떨렸다.

은우의 모습이 사람들의 눈에도 신기하게 비쳤는지 슬금슬금 호기심과 다소 호의적인 눈빛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두 분… 결혼하신다고…. 맞죠?”

딱딱하고 경직된 목소리로 은우가 높낮이가 일정하게 내뱉었다.

“…안녕하세요.”

“축하합니다.”

주춤하며 은우는 승현의 뒤로 숨어 몸을 반쯤 가렸다. 그저 습관적으로 몸을 숨기기 급급했던 은우는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은우의 눈에는 지금 다가온 사람도 다른 사람들처럼 조소와 비아냥을 담은 얼굴처럼 보였다.

가벼운 인사를 승현과 주고받은 사람은 가볍게 지나쳤다. 은우는 다시 가슴을 후벼 파듯 들려올 악의적인 말을 듣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그 때 승현의 커다란 손이 자신의 손을 잡았다.

“형, 잘못한 거 없어요.”

“어……? 응…….”

은우는 자신의 머리를 한 대 세게 대리는 듯한 승현의 말에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봤다.

“그러니까 숨지 말아요.”

“그렇지만…….”

“괜찮아요. 형, 이럴 때는… 이렇게 하면 돼요.”

“……어떻게?”

“따라 해 봐요. 좆 까, 씨발.”

나지막한 욕설에 은우의 아몬드 모양의 눈꺼풀이 깜박거렸다.

“뭐?”

당당하게 승현은 은우에게 다시 속삭였다. 순전히 선량한 야만인 같은 승현 때문에 결국 은우의 얼굴에서 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사람들에게 처음 보이는 은우의 환한 미소는 부드러운 결을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 미소는 승현의 것이었다.

“원래 지 좆 달린 대로 놀면 돼요.”

이상하게 승현이 자신에게 내뱉은 그 말들이 마법처럼 다가왔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하찮게 느껴졌다. 처음 느껴 보는 자기 위안을 승현이 해주는 저급한 욕에서 받았다.

은우가 주변을 둘러보니 실제로 그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갑자기 그것들이 너무 신기했다. 늘 저런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살았구나.

줄곧 이곳에서 굳어 있던 은우의 얼굴이 풀어졌다. 눈매가 휘어지고 입술이 서서히 말려 올라가더니 빛나는 환한 미소가 번졌다.

그건 누구에게도 보여 준 적도 없었고, 누구도 본 적 없는…. 은우의 미소는 이제 누구도 가질 수 없게 된 승현만의 것이었다.

은우는 이제 마법처럼 괜찮아졌다.

<선량한 야만인(Salvaje)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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