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001. 죽은 사람은 더는 말을 하지 못한다.
2000년 12월 네 번째 주 크리스마스이브.
나는 점심때까지 침대에 누워있었다.
어젯밤까지 늦게까지 술을 마셔서 그런지 아직 몸이 피곤했다.
침대에 누워있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보분석 요원이기는 하지만 CIA 요원인 내가 이렇게 풀어져 있어도 되나?
내가 CIA에 정식으로 근무한 지 3년 차였다.
어느 직장이든 3년 정도면 일이 익숙해질 시기였다.
어느 설문 조사에 의하면 이직이 가장 고민되는 시기가 직장 3년 차라고 한다.
이건 직장에 들어온 지 3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일에 익숙해지고 이직을 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이기도 했지만 이른바 3년 차에 닥쳐오는 위기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제같이 바에서 만난 여자에게서 3년 차에 겪는 위기를 겪는 7가지 이유를 들었다.
그게 바로 내 이야기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일곱 가지란 우선할 일이 없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하고 있다는 자괴감을 느끼고, 점점 조직에서 도태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일을 못 하게 하거나, 일이 너무 많아서 뭘 해야 할지 집중을 할 수 없고, 상사에게서 위법, 탈법한 지시를 받거나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들이었다.
이 중 상당수가 내 이야기 같았다.
지난 6개월 동안 나는 홍콩에 있는 투자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당연히 내가 CIA라는 사실은 회사 내에서 누구도 모른다.
이전에는 2년 동안 워싱턴 CIA 본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때는 이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일단 매일매일 다양한 형태로 들어오는 정보를 읽고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말 그대로 잡생각을 할 시간이 없었다.
그런데 홍콩에서 지나다 보니 온갖 생각이 들었다.
일단 워싱턴에 있을 때보다 할 일이 없었다.
일주일이나 두 주일에 한 번 아시아 특히 남중국해 인근 국가들에 대한 정치 경제 보고서를 쓰면 요원으로서의 내 할 일이 끝이었다.
물론 그 국가를 방문해야 하는 일도 있어서 일정 자체가 여유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CIA 정보분석실에서 일할 때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업무량이 적었다.
이렇다 보니 내가 중요하지 않은 일을 생각이 들었다.
다른 조직과 마찬가지로 CIA는 중요하지 않은 일을 맡은 요원이 위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워싱턴에 있을 때는 비록 손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적었지만, 백악관에 들어가서 대통령 앞에서 보고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여기서는 보고서를 써도 누가 보는지 혹은 읽기나 하는지 의심스러웠다.
당연히 CIA에서 내가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보스가 워낙 거물이고 그가 내게 홍콩에서 보내는 시간을 충분히 보상하겠다는 약속을 믿고 버티는 것이었다.
다른 문제는 홍콩에 위장 근무하는 동안 일을 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물론 보고서도 쓰고 보스가 지시한 일도 하기는 하지만 정작 내가 근무하는 회사에서 나는 철저한 것 외톨이였다.
고객이 지급하는 수수료로 먹고사는 회사인데 정작 나는 사실상 고객이 없었다.
지금 근무하고 있는 회사에서는 내게 아무런 일도 맡기지 않았다.
또 다른 고민이라면 보스가 지시하는 일이 아무리 봐도 편법을 넘어서 위법, 탈법한 일로 보인다는 부분이었다.
그럼 CIA가 법을 지키면서 일을 하는 줄 알았냐고?
나는 바보가 아니다.
CIA가 보이스카우트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당장 CIA에 관해 다룬 책이나 영상물만 봐도 CIA와 준법과는 약간 거리가 있었다.
문제는 내가 저지르고 있는 위법 행위가 CIA를 위해서가 아니라 아무래도 보스의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서인 것 같다는 부분이었다.
처음에는 CIA 작전 일부로 생각했지만 6개월이 지난 지금은 아무래도 아니라는 결론이었다.
그나마 나는 내가 하는 일을 어떻게 할 줄 몰라서 겪는 어려움은 없었다.
나는 나름대로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이나 보스가 지시한 일을 잘 해내는 편이었다.
물론 보스가 지시한 일은 특별한 능력이 필요한 일이 아니기는 했지만···.
홍콩에서 보낸 지난 6개월 동안 술을 많이 마시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동안 마셔도 긴장해서 그런지 별로 취하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어제 바에서 만난 여자에게서 직장 3년 차의 고민을 듣고 꽤 많은 술을 마셨다.
술이 약한 편이 아니었지만 오랜만에 술을 취하도록 마셔서 그런지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 손을 뻗어 리모컨 잡고 TV를 켰다.
TV에서는 경제뉴스를 주로 다루는 블룸버그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미국에 있을 때는 주로 CNN을 봤다.
하지만 홍콩에 온 이후로 내 TV는 블룸버그에 고정되어 있었다.
투자회사에서 일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서였다.
나는 같이 일하는 다른 직원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경제적 마인드가 부족했다.
작년 6월 처음 입사할 때만 해도 같은 사건을 보더라도 다른 직원들이 돈이 될지 안 될지를 먼저 생각한다면 나는 그 사건이 가져올 정치 외교적 영향을 먼저 생각하고는 했었다.
지금은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내가 내린 결론은 정치와 경제가 그렇게 동떨어진 분야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정치만큼 삶과 경제에 영향을 주는 일이 없었다.
무심히 방송을 보던 나는 뉴스 하나에 몸이 굳어졌다.
“허!”
앓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어두운 경제 전망하는 패널의 분석 하단에 한 사람의 사고 소식이 하단에 자막으로 나오고 있었다.
에디 미첼!
도이치뱅크의 투자 부분 책임자인 에디 미첼.
그가 마이애미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는 뉴스였다.
블룸버그에 이런 식의 부고 기사가 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고와 사망 소식이 나온다는 것은 그 죽임이 경제나 관련된 기업의 주가에 영향을 줄 정도라는 의미였다.
그런 점에서 에디 미첼의 사망은 블룸버그가 다룰 만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에디 미첼은 뉴욕 메릴 린치에서 일하다가 도이치뱅크로 이직한 지 단 5년 만에 도이치뱅크를 유럽 최고의 투자 은행으로 만든 투자은행가였다.
미국과 유럽 투자업계에서는 이미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자신을 스스로 ‘신’이라고 자처하면서 40살까지 1억 불을 모으지 못하면 실패한 인생이라고 공공연히 이야기하고 다닐 정도로 자신만만했다.
그의 죽음은 금융권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히 중요한 뉴스라고 할 수 있었다.
에디 미첼의 죽음은 다른 사람보다 나에게 더 중요했다.
그는 홍콩 투자회사에서 일하는 나의 투자자이자 신원보증인이기도 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홍콩 투자회사는 명목상의 직장일 뿐 나를 실제 고용한 사람은 에디 미첼이었다.
한마디로 나의 보스였다.
에디 미첼이 보스라고 해도 나는 에디 미첼의 사망 소식에도 별다른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보스라고 하지만 그와 나의 인간적인 유대는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겪은 에디 미첼은 인간적으로는 좋아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홍콩으로 오기 전에 나는 에디 미첼을 몇 번 만났다.
실제 만난 것은 뉴스나 내가 만나기 전 조사했던 것보다 훨씬 거만하고 불쾌한 인물이었다.
심지어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지금 있는 홍콩으로 보낸 사람이기도 했다.
덕분에 내가 계획했던 인생 계획을 상당한 부분 연기하거나 변경해야만 했다.
정보분석 요원인 나에게 홍콩 투자회사에서 CIA라는 사실을 숨긴 채 근무하라는 명령을 처음 들었을 때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당시에는 상당히 황당하고 기분이 나빴지만, 지금은 그런 악감정은 남아 있지 않았다.
적어도 어제 만난 여자에게서 직장 3년 차의 비애를 듣고 전에는 말이다···.
그만큼 지난 6개월 동안의 홍콩에서의 생활은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첩보 수집이라고 해봐야 비밀 임무를 통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공개된 정보를 수집하는 것에 불과했다.
여유시간도 많았고 업무에 대한 압박도 없었다.
내가 CIA라는 사실을 감추며 근무했던 곳은 워싱턴에 있는 연구소였다.
기본적으로 요구하는 조건이 까다로운 만큼 연구소의 초임 연봉이 6만 불로 나쁘지는 않았다.
일반적인 CIA 초임 연봉인 4만에서 6만 불보다 많거나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홍콩에서는 투자회사에 근무하면서 받는 연봉이 꽤 괜찮아··· 아니 몇 배나 많았다.
무엇보다 세계적인 관광지인 홍콩이 아닌가?
볼 것도 많고 놀 곳도 많고 미녀도 많은 도시였다.
미국인이라고는 하지만 한국 이민 2세인 나로서는 음식도 입맛에 맞았다.
뭐 요즘 미국에서도 중국 요리나 태국 요리를 먹는 일이 어렵지 않지만···.
어두운 골방에서 근무하는 다른 정보분석 요원들이 다 부러워할 근무 환경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퇴직할 때까지 여기서 꿀을 빨고 싶은 심정이었다.
에디 미첼은 내가 이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후원자였다.
그런 그가 사고로 죽은 것이다.
어차피 그와는 거래 관계였고 이미 말했던 것처럼 불쾌한 인간이기 때문에 슬픔이나 안타까움 같은 감정은 생기지 않았다.
문제는 에디 미첼의 죽음이 가져올 내 상태의 변화였다.
다른 사람들처럼 내가 가장 싫어하는 상황은 앞날에 대한 불확실함이었다.
지금은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뭔가 변화를 주기에 좋은 시점이 아니었다.
몇 년 동안 계속되었던 기술주 중심의 주식시장 호황이 끝나고 미국의 클린턴 민주당 정부가 부시 공화당 정부로 교체되었다.
이런 시기에는 말 그대로 납작 엎드려서 상황이 확실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최선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지?”
나는 즉시 미국에 있는 담당자인 존 베비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담당자는 일 년 전 내가 일 년 전 CIA 셔먼 켄트 정보 학교에 다니던 시절 교관이기도 했다.
그리고 나를 발탁해서 에디 미첼에게 데려간 사람이기도 했다.
-에디 미첼의 사고 때문이라면 일단 대기하게. 지금 단순 비행기 사고인지 아니면 다른 개입이 있었는지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고 있네. 내가 자네까지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
내가 말을 채 꺼내기도 전에 팀장이 말했다.
“예!”
나는 짧게 대답했다.
평소와는 달리 담당자가 길게 이야기하는 것은 내 입을 막으려는 목적인 것 같았다.
-미국에서 만나서 테러와 관련이 있을 수도 있는 중요한 정보를 전해주기를 한 상황에서 난 사고야. 그래서 나는 물론이고 본부 전체가 초긴장 상태네. 미국 내에서 항공기에 대한 테러가 일어난 것일 수도 있으니 말이야. 대기하게.
“예!”
나는 처음과 같은 대답을 했다.
그대로 전화가 끊어졌다.
전화를 끊고서야 지금은 전화하기에 좋은 시점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디 미첼은 내 홍콩 생활의 후견인이자 보스이기 이전에 CIA가 가진 가장 큰 정보자산 중 하나였다.
설사 비행기 추락이 테러가 아니더라도 그런 중요한 정보자산을 잃은 상황이었다.
특히 담당자인 존 베비스는 에디 미첼과 따로 사적인 친분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그가 말단 요원인 내 상황 같은 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나는 지시대로 연락을 기다리며 대기했다.
크리스마스 연휴가 끝나고 월요일인 26일에는 정상적으로 출근도 했다.
무슨 일인지 팀장인 왕 웬준도 출근을 하지 않았다.
26일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변화가 생긴 것은 27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