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3화 (4/270)

서몽

# 003. 어떤 일을 잘하느냐보다 어떻게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주식투자로 수익을 내라!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었다.

며칠 전에 이런 일이 생겼다면 에디 미첼에게 전화하거나 담당자인 존 베비스에게 전화를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에디 미첼은 죽었고 지금 상황에서 이런 일로 담당자에게 전화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에디 미첼의 사고로 정신이 없을 것이다.

더구나 말이 담당자지 실제 존 베비스가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아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는 전적으로 보스인 에디 미첼의 지시만을 받았다.

담당자가 하는 일이라고는 내가 에디 미첼에게 보내면서 함께 CIA에 보낸 보고서를 처리하는 정도였다.

문제는 이 상황에서 류오린에서 해고당한다면 CIA에서 나는 완전히 무능력자라는 낙인이 찍힐 수 있다는 부분이었다.

CIA에서 잠입을 시켰는데 일을 못 해서 해고당했다?

알려지면 조직 전체에 비웃음을 살 일이었다.

나는 하버드 대학에서 풋볼 쿼터백으로 꽤 유명했었다.

물론 하버드가 전미 풋볼 리그에 가입되지 않아 아이비리그 대학끼리만 경기했지만 나는 전승으로 하버드 크림슨을 우승으로 이끈 쿼터백이었다.

대학을 졸업했을 때는 드래프트 제안도 받았다.

하버드라는 간판을 생각하면 아마 프로팀에서 주전 쿼터백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런 제안을 거부하고 CIA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아들였다.

나는 CIA를 통해 미국 국무부에 들어가는 계획을 잡고 있었다.

궁극적으로는 미국 주류사회에서 성공하려는 것이 내 인생 계획이었다.

그 과정에는 아버지를 쫓아낸 한국에 대한 복수도 있었지만 그건 내가 성공하면 자연적으로 따라올 부수적인 일이었다.

이대로 돌아가도 CIA에서 쫓겨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CIA에 남더라도 평생 어두운 사무실에서 매일 산더미 같은 보고서를 읽고 요약하는 일이나 하다가 퇴직하게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썩느니 차라리 CIA를 그만두는 게 나았다.

하지만 CIA는 내가 그만두고 싶다고 마음대로 그만둘 수 있는 일반 기업이 아니었다.

특히 나 같은 경우는 CIA를 통해 나는 로즈 장학금을 받고 옥스퍼드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했다.

다른 요원들보다 의무 복무 기간이 길었다.

얼마나 오래 CIA에서 희망이 없는 생활을 해야 할지 몰랐다.

여기에 더해서 이대로 돌아가면 홍콩에서의 생활도 끝이었다.

어차피 에디 미첼의 죽음으로 실적을 내는 일이 불가능하다면 지금의 여유라도 즐겨야 하지 않겠는가?

결국, 현재로서는 본부에서 새로운 방침이 내려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류오린에서 살아남아야 했다.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

그동안 왕 웬준은 나에게 나름 호의적이었다.

나를 통해서 나름의 실적을 올린 덕분이었다.

바로 내 거래를 통해 벌어들인 매매수수료가 그대로 왕 웬준의 실적이었다.

내 덕을 가장 많이 본 왕 웬준이 저 정도라면 다른 간부들의 반응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단지 실적의 문제가 아니었다.

‘에디 미첼의 죽음 때문에 잃어버린 기회 때문이겠지.’

내가 일하는 류오린은 창업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신생 투자회사였다.

홍콩과 중국의 합작기업이었다.

중국 주요 투자자들의 신원이나 정확한 자금출처는 불분명했다.

명의는 국영기업들이지만 실제로 국영기업이 자금의 주인이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회사의 주요 업무는 해외, 특히 동남아 지역의 화교 자금을 모집해서 중국에 투자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외에도 다른 투자회사처럼 주식이나 채권 거래는 물론이고 인수합병이나 직접투자도 시도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창 발전하고 있는 중국에 대한 투자와는 달리 다른 부분에 대한 투자는 지지부진했다.

에디 미첼은 이런 류오린의 약점을 보완해 줄 가장 중요한 파트너였다.

그에게는 미국 월가의 투자은행들은 물론이고 세계 최대 은행 중 하나인 도이치뱅크의 인맥이 있었다.

그런 인맥은 신생 투자회사인 류오린의 한계를 뛰어넘는 데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그런 중요한 인물이 죽었으니 허탈감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 허탈감을 화풀이할 대상이 바로 나인 셈이었다.

사무실을 나온 즉시 나는 블랙베리를 통해 메일을 확인했다.

여전히 미국의 CIA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본부나 외부의 도움 없이 내 능력으로 살아남아야 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나는 즉시 류오린을 나왔다. 근처에 있는 걸어서 같은 블록에 있는 다른 건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 사무실을 향했다.

사무실에는 AAM(Asia Asset Management)이라는 명패만 덩그러니 있었다.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이곳은 명목상으로는 내가 근무하는 류오린에 이천만 불을 투자한 회사의 본사였다.

빈 사무실이었다.

명목상으로는 직원이 2명 있지만, 평소에 실제로 근무하는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홍콩에 흔히 있는 중간지주회사(Intermediate Holding Company)로 에디 미첼이 자금출처를 감추기 위해서 세운 이름뿐인 투자회사였다.

명목상의 AAM의 최대 주주이자 유일한 주주, 즉 바로 내가 이 회사의 소유주였다.

나는 사무실 입구에 쌓인 신문들을 집어 들고 안으로 들어섰다.

텅 빈 사무실로 들어가 금고를 열어 서류를 꺼냈다.

류오린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실적을 내야 하고 실적을 내려면 현재 상황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필요했다.

서류를 꺼내 텅 빈 사무실에 덩그러니 놓인 책상 위에 올려놓고 하나하나 다시 확인해 보았다.

서류는 총 5개 회사에 소유권과 투자에 관한 서류였다.

6개월 전 처음 류오린에 AAM의 이천만 달러가 투자되었다.

그 자금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영국과 바하마에 있는 회사들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도이치뱅크에 닿아 있었다.

그 회사들은 이름은 다르지만, 명목상으로는 내 소유였다.

이론상으로는 중간에 있는 회사 3개 중 하나만 파산시켜도 연결고리를 끓어진다..

그렇게 되면 남은 투자금 천만 불을 독식할 수 있는 구조였다.

세계적인 금융 전문가인 에디 미첼이 작업한 만큼, 이 관계가 드러날 가능성은 적었다.

차라리 지금 같아서는 내가 CIA의 요원이 아니라 진짜 에디 미첼의 심복이라서 이 돈을 독식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천만 불이라면 누군가의 양심을 사기에는 충분한 금액이었다.

CIA의 팀장인 존 베비스도 이 회사들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가 모르는 것은 이 자금을 가지고 에디 미첼과 내가 구체적으로 뭘 하느냐였지 자금 자체에 대해서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CIA 요원은 그만둔 다음에도 감시를 받는다.

그만둔 다음에 이런 거액이 갑자기 생긴다면 의심을 받고 조사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횡령은 마지막 선택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도이치뱅크에서 빌린 이천만 불의 상환일까지는 아직 일 년 반이 남았다.

그때 가서 이천만 불을 갚을 수 없을 희망이 같으면 바하마의 회사와 연결되는 런던의 회사를 폐쇄하면 그만이었다.

이 대출을 승인한 것은 에디 미첼이었다.

일 년 반 후에 에디 미첼에게 책임을 물을 방법 같은 것은 없었다.

회사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한 나는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바로 현재 자금 상황을 확인하는 절차였다.

나는 책상 위에 컴퓨터를 켜서 주식명세를 확인해 보았다.

팀장인 왕 웬준의 말대로 내 거래 실적은 형편없었다.

올해 4월 닷컴버블이 꺼지고 기술주 중심으로 거래하는 경우 수익이 나쁜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내 거래 실적은 수익률도 나쁘지만, 더 나쁜 것은 거래 내용이었다.

몇몇 예외를 제외하면 오를 주식은 팔고 내려갈 주식은 사는 전형적인 망하는 투자자의 패턴이었다.

그렇게 날린 투자금이 천만 불이었다.

그나마 천만 불이라도 남아 있는 것은 내려갈 주식을 사들인 이후에 곧바로 팔아치워 손해를 최소화했기 때문이다.

몇몇 예외적인 거래에서는 흔히 말하는 대박을 터트렸다.

누가 봐도 망할 것으로 생각한 주식이 의외로 급등해서 오히려 큰 이익을 얻은 것이다.

의도적인 대박이 아니라 우연이었다.

어차피 반년간 주식 매매 중 내가 결정한 거래는 하나도 없었다.

거래를 결정한 것은 에디 미첼이었고 거래 목적은 에디 미첼의 실적 세탁이었다.

쉽게 말해서 에디 미첼이 처분하지 못한 기술주를 내가 약간의 프리미엄을 주고 비싸게 사들여서 곧바로 시장가격으로 파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받은 이천만 불이었다.

에디 미첼은 도이치뱅크의 투자 부분 사장이 될 예정이었다.

실적 관리가 이 거래의 목적이자 CIA 요원인 내가 홍콩까지 와서 투자회사에 근무하는 이유였다.

에디 미첼로서는 이런 거래는 당연히 아무리 측근이라도 맡길 수 없었다.

나중에 약점이 되고 어디서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에디 미첼이 선택한 사람이 나였다.

나는 CIA의 요원이었다.

나는 에디 미첼의 약점을 알더라도 폭로할 수 없었다.

비밀유지의무가 있으므로 폭로 자체가 훨씬 더 큰 범죄였다.

명목상 에디 미첼과 나의 상사인 존 베비스 CIA 팀장은 정확한 내용은 몰랐다.

하지만 우리가 하는 일이 불법에 가까운 일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존 베비스 팀장은 이런 작전을 묵인했다.

이유는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다.

에디 미첼이 도이치뱅크의 투자 부분 대표가 되고 더 나아가 유럽 금융을 장악하게 된다면?

그때의 이점은 말 그대로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천문학적인 이익이었다.

테러단체들은 물론이고 더 나아가 동맹국과 적국의 자금 흐름을 손바닥처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에디 미첼과 같은 거물이 자신에게 필요하다면서 요원의 파견을 요청했다면 존 베비스 팀장은 별다른 질문을 하지 않고 파견을 허락했을 것이다.

에디 미첼은 나를 만났을 때 내 야망을 그대로 꿰뚫어 보았다.

그는 파견 제안을 하면서 CIA에서 임무가 끝나는 2년 후에 내가 CIA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을 도와준다는 약속을 했었다.

막대한 금전적 이익은 부수적인 조건이었다.

물론 에디 미첼이 사고로 갑자기 사망한 이상···.

그의 약속은 이뤄질 수 없었다.

내게 남은 것은 반 토막이 난 실적으로 위기에 빠진 직장과 상환해야 할 이천만 불의 투자금이었다.

무엇보다 빼 아픈 것은 잃어버린 시간과 기회였다.

사람들이 CIA라는 이름을 들었을 때 흔히 생각하는 이미지는 직접 총을 쏘고 잠입하고 사람을 잡거나 암살하는 스파이의 모습이었다.

실제 CIA는 그보다 훨씬 방대한 조직이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스파이는 CIA 전체 직원 중에서 10%~15%인 2000명이 조금 넘는 숫자였다.

그런데도 CIA에서 스파이라고 불리는 작전국 요원이 최정예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작전국 요원들은 다른 CIA 직원보다 10% 이상 높은 월급을 받고 승진도 훨씬 빠르다.

정보국도 주요 부서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작전국 요원들보다는 승진이 늦었다.

한마디로 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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