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008. 모든 장미는 가시가 있다.
사람은 약해 보이는 사람에게 잔인한 법이다.
특히 나처럼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에게는 말할 것도 없었다.
거액의 투자금을 가지고 들어온 내가 실적이 나빠지자 뒤에서는 별의별 말이 다 돌았다.
그중에는 내가 CIA 지시 때문에 자주 출장을 가는 것에 대한 소문도 있었다.
어이가 없는 소문이었다.
내 투자자가 중년의 여성이고 내가 손해를 볼 때마다 그 여성을 찾아가서 봉사한다는 그런 소문이었다.
나로서는 참을 수 없는 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다른 사람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굉장히 신경을 쓰면서 살아왔었다.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공부를 하면서도 동양계에 대한 선입견을 깨기 위해 교외 활동은 물론이고 운동부에도 열심히 참가했었다.
주변의 시선을 신경을 쓰는 내가 지난 반년 동안 류오린에서 내가 팀원들과 굳이 친하게 지내지 않은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단지 비밀을 지키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에디 미첼과 거래하는 이상 형편없는 수익률을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친하게 지내봐야 받을 대접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부터는 달라질 생각이었다.
그리고 오늘은 그 시작이었다.
‘나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주지.’
나는 사무실 분위기를 즐기며 폐장 시간을 기다렸다.
오늘 밤에 팀원에게 술이라도 사면서 본격적으로 나설 생각이었다.
블랙베리로 메일이 오기 전까지의 계획은 그랬다.
익숙한 메일에는 오늘 밤 당장 태국으로 가라는 지시가 내려와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팀장실로 향했다.
왕 웬준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며칠 결근하고 출근한 첫날 출장을 가겠다고 하는 말을 들은 이후의 표정이었다.
아마 오전 대화가 아니었다면 욕이 튀어나왔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투자회사가 실적이 전부라지만··· 자네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
왕 웬준의 말에 나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심했다.
왕 웬준으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실적을 내기는 했지만, 이틀 전 그가 나를 휴가가 아니라 출장 처리해 준 것은 배려였다.
그런데 내가 바로 복귀 당일 바로 또 휴가를 신청한다니 어이도 없고 화도 날 것이다.
나도 이러고 싶지는 않았다.
‘무슨 임무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내려오는 거야?’
이번 지시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내용과 방식이었다.
지금까지는 이런 식으로 촉박하게 내려온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어느 정도 여유를 두고 특정 사안에 대한 조사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었다.
조사 내용도 어떤 국가 경제 전망이나 특정 기업이나 인물에 대한 것들이었다.
자료도 공개된 자료는 내가 구해야 하는 때도 있었지만 무인 오피스라고 불리는 특정 장소에서 가면 CIA에서 보낸 비밀자료가 있었다.
내 일은 그렇게 CIA에서 전달받은 자료나 공개된 자료를 분석하는 일이었다.
물론 이런 일을 출근해서는 할 수 없었기 때문에 회사에 결근해야만 했었다.
이번 지시는 이런 과거의 조사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었고 사전 준비 또는 자료를 전달해 주는 일도 없었다.
심지어 시일도 촉박해서 다음 주 중까지 홍콩의 특정한 장소, CIA 무인 오피스라고 추측되는 곳에 분석한 정보를 보내라는 지시였다.
어이가 없는 지시였고 화가 나는 일이지만 명령을 어길 수 없었다.
CIA 같은 기관에서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곧 반역이었다.
내가 아무리 현장 요원이 아니라 정보분석 요원이지만 처우는 다를 바가 없었다.
명령 거부는 내 목숨을 노리는 암살자를 초대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명령을 따라야 하는 나로서는 왕 웬준이 허가를 해주지 않더라도 태국 방콕에 가야 했다.
“이유라도 들어보세. 도대체 갑자기 휴가를 달라는 이유가 뭔가?”
왕 웬준이 물었다.
그는 여전히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태국 방콕에 가보려고 합니다.”
나는 왕 웬준의 태도에서 허락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국?”
왕 웬준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태국은 갑자기 왜?”
“당연히 투자를 위한 조사를 위해서죠.”
사실과는 다른 이유였지만 조사를 하다 보면 투자 정보를 얻을 수도 있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이렇게 갑자기?”
왕 웬준은 여전히 내 설명을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이번 주 토요일 태국에서 총선이 열리는 것을 팀장님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런데?”
“지인을 통해서 알아보니 그 선거결과에서 이변이 나올 것 같다더군요.”
“예상외의 결과? 탁신이 이기겠지.”
탁신은 태국의 억만장자이자 정치인이었다.
2년 전 정당을 창당한 이후 태국 총선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제가 듣기로는 이기는 정도가 아니라 절반을 넘을 수도 있다고 합니다.”
왕 웬준이 놀란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태국 총선에서 단일 정당이 절반을 넘는다고?”
“현지 분위기는 그렇다고 합니다.”
태국은 최근에 단일 정당이 절반을 넘어 다수당이 된 적이 없었다.
당장 직전 태국 정부도 7개 정당이 연합한 정부였다.
오랜 군부 독재 영향으로 정치인들이 선거 때마다 이해관계에 따라서 이합집산하는 것이 태국 정치의 특징이었다.
“자네 말대로라면 보통 일은 아니긴 하군. 탁신이라면 태국 최대 통신회사의 주인인데 거기에 의회 과반을 넘겨 총리가 되면···.”
선거 여파를 생각하는지 왕 웬준이 말을 흐렸다.
“탁신은 창업하고 단 십 년 만에 태국 최고 억만장자가 될 정도로 능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탁신이 총리가 되면 태국 기업들의 주가가 요동칠 수도 있겠죠. 정말 정보대로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입니다.”
태국은 그렇지 않아도 부패가 심하고 정경유착이 심한 나라였다.
기업 대부분이 정경유착을 통해 성공했고 그게 일상이 된 나라였다.
당장 탁신이 무슨 수로 십 년 만에 태국 최고 억만장자 중 하나가 되겠는가?
빠르게 성장하는 통신회사는 정경유착을 통해 키운 것이다.
탁신이 총리가 되면 자신이 세운 통신회사는 물론이고 친한 기업들에 막대한 특혜를 줄 것이 불 보듯이 뻔했다.
“이건 우리 류오린과도 무관한 문제가 아니군. 탁신이 화교라고는 하지만 태국의 전통적인 화교와는 또 다른 인물이라서···.”
류오린의 해외 화교 자금을 끌어들여 중국에 투자하는 창구였다.
류오린으로서는 태국 화교 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탁신의 총선 압승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였다.
태국 화교 기업도 중국에 많은 투자를 했다.
중국에 직접 투자한 외자기업 중에서 최초가 바로 태국의 정따기업이었다.
이번에 총선 압승이 예상되는 탁신은 다른 태국의 거대 기업을 이끄는 가문들처럼 화교 출신이었다.
“맞습니다. 이전에도 태국 총리 중에서 화교 출신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억만장자는 탁신이 처음이죠.”
탁신 이전에도 화교 출신 총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화교 출신으로 태국에서 총리가 된 사람만 10명이 넘었다.
그렇지만 전통적인 화교 억만장자 가문들은 정치인을 후원했지만, 직접적인 정치참여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간단한 일이 아니야. 내가 듣기로는 탁신은 욕심이 많은 인물이야. 그런 자가 태국 화교의 주도권을 잡으면 위험해···.”
태국 화교인구는 700만으로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와 함께 화교가 가장 많은 3개국 중 하나였다.
동남아 많은 국가처럼 태국 경제에서 화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700만 정도 되는 화교가 세운 기업만 20만 개 이상으로 경제의 반 이상을 지배하고 있었다.
태국에서 가장 돈이 많은 억만장자 10명 중에서 대부분이 화교 출신이었다.
하지만 태국의 화교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와는 자국 내에서 처우가 달랐다.
태국의 화교는 광둥 출신이 80%인데 그 중의 다수는 초우산(潮汕)출신이었다.
초우산 화교는 왕실 화교라고 불릴 정도로 왕실과 가까웠다.
문제는 이전까지 태국 화교를 막후 지배하던 가문 중 상당수가 지난 외환위기 때 큰 타격을 입었다는 것이었다.
태국 10대 기업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외환위기의 영향을 비껴간 것은 탁신이 운영하는 통신회사였다.
외환위기의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이 탁신에게 유능한 경영자이자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가져다주었다.
그 이미지가 총선에서 압승을 예상하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것이 CIA가 얻은 정보였다.
나에게 그 정보가 사실인지 확인하라는 것이 내가 받은 지시였다.
“그래서 제가 태국에 가려는 것입니다. 기사만 봐서는 현지 분위기를 알 수가 없죠. 현지에 가서 직접 느껴봐야 앞으로 태국에 대한 투자 방향을 정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내 태국 출장이 투자를 위한 목적이라고 왕 웬준을 설득했다.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피터 린치를 비롯한 전설적인 투자자들의 공통되는 투자 격언은 ‘잘 아는 것에 투자하라’라는 말이었다.
그런 점에서 어차피 류오린에서 투자하는 동안에는 미국이나 유럽의 국가들보다는 류오린이 있는 홍콩 주변 국가들이 내 주요 투자처가 될 수밖에 없었다.
태국은 주요 투자처가 될 가능성이 컸다.
상사의 지시가 아니더라도 지금처럼 급격한 변화가 생기는 시점에 태국을 가보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좋아. 그런 생각이라면 이번에도 출장으로 처리해 주지.”
왕 웬준이 말을 멈추고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태국에 갔다 와서 보고서를 작성해서 제출하게.”
왕 웬준이 마침내 허락했다.
“알겠습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CIA에 보고서를 제출해야만 했다.
CIA에 제출할 보고서를 적당히 바꿔서 제출하면 그만이었다.
왕 웬준은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가더니 메모지를 꺼내 뭔가를 적었다.
그는 그 메모지를 나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내일 그 사람에게 전화해보게. 도움이 될 거야.”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