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009. 배 전체를 잃느니 닻을 버리는 것이 낫다.
왕 웬준에게서 출장허가를 받자마자 나는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옷가지만 챙기고 공항으로 갔다.
홍콩에서 태국 방콕까지 비행시간은 직항편 기준으로 3시간밖에 되지 않는다.
가깝다면 아주 가까운 곳이 홍콩에서 방콕이었다.
하지만 주식시장이 끝날 때 연락을 받은 나는 서둘러 공항으로 찾아가 비행기 표를 구해야만 했다.
홍콩 공항에서 다행히도 비행기 표를 구할 수 있었다.
그렇게 방콕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호텔 방에서 시내를 내려다보니 욕이 저절로 나왔다.
‘제기랄!’
지시를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것도 알고 투자를 하자면 오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사실도 알지만···.
기분이 엿 같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문득 에디 미첼이 살아 있을 때는 이런 일이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인간이 나름 막아준 건가?’
있을 때는 고마운 것을 몰랐는데 죽고 나니 아쉬운 것이 많은 사람이었다.
내년 기일에는 꽃이라도 보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침대로 향했다.
침대에 눕자마자 피곤이 밀려왔다.
생각해보니 어제저녁부터 잠을 한숨도 자지 못했다.
새벽부터 워낙 정신이 없어서 느끼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긴 하루가 지나고 있었다.
다음날 왕 웬준에게 받은 번호를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고 만났다.
“왕 웬준 씨에게서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리레이라고 합니다.”
왕 웬준의 소개로 만난 것은 리레이(李雷)라는 이름을 쓰는 29살의 남자였다.
리레이는 180㎝가 조금 안 되어 보이는 건장한 체격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태국 화교의 이미지와는 맞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대뜸 중국표준어로 자기를 소개했다.
이름도 대부분 태국어 이름을 쓴다는 태국 화교들과는 달리 중국어 이름을 사용했다.
“에드릭 손이라고 합니다. 왕 웬준 팀장님 밑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내가 영어로 대답하자 리레이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왕 웬준 씨에게 대충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선거 때문에 찾아오셨다고요?”
리레이는 이번에는 영어로 답했다.
“그렇습니다. 제가 들은 정보로는 내일 선거에서 탁신이 압승해 과반을 차지할 것 같다고 하더군요.”
내 말에 리레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과반이라니 믿을 수가 없네요. 태국의 정치 상황을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리레이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정보 출처를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리레이가 물었다.
“그건 조금 어렵습니다.”
알려주고 싶어도 나도 정보의 출처는 몰랐다.
나에게 급하게 지시가 내려온 것을 봐서는 CIA도 최근에 얻은 정보가 분명했다.
나에게 선거 예상을 보낸 것은 CIA였다.
당연히 정보의 출처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CIA가 직접 여론조사를 의뢰했을 리는 없으니 태국 어딘가에서 받은 정보이기는 할 것이다.
그것도 CIA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신뢰성이 높은 여론기관을 통해 나온 자료일 것이다.
대충 지금 태국의 정부나 정보기관 혹은 태국의 언론기관 같은 곳 정도가 유력한 정보 출처였다.
아시아나 아프리카에는 미국에서 잘 보일 기회를 찾는 관리나 기자는 많았다.
“이렇게 직접 방콕까지 찾아오신 것을 보니 손 선생은 그 정보 출처를 신뢰하고 계신다는 말이군요.”
리레이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99% 정도는 예상이 정확하리라 생각합니다.”
CIA가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나에게 보냈을 리가 없었다.
실제 총선과 같은 대규모 선거는 선거 직전에 거의 정확한 당락을 예상하는 것이 가능했다.
돈과 시간만 충분하다는 조건이라면 말이다.
리레이가 사과했다.
“의심하는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저도 탁신이 이번 총선에서 최대 의석을 얻을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과반까지는···.”
“아닙니다. 2년 전 생긴 신생 정당이 과반을 얻는다는 것은 예상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죠.”
나는 리레이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정보를 보내온 곳이 CIA가 아니었다면 나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나는 얼마 전까지 태국의 총선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지금이야 CIA의 지시도 지시였고 투자할 주요 국가 중 하나인 태국의 미래를 결정할 선거였기 때문에 관심을 가진 것뿐이었다.
“손 선생 말대로 탁신이 이번 총선에서 절반을 넘는다면 그건 도시가 아니라 시골 그것도 북부의 선거구를 거의 싹쓸이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곳 방콕만 해도 탁신의 바람이 그렇게 크지 않거든요.”
리레이가 말했다.
내가 얼핏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이야기였다.
“이곳 태국 내에서 탁신의 이미지가 굉장히 좋다고 하던데요?”
어제 지시를 받고 자료를 모아서 공항이나 방콕으로 오는 비행기 그리고 호텔에서 탁신에 대한 자료를 모아 읽었다.
탁신은 일반적으로 굉장히 유능한 기업가이자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었다.
부를 축적하는 과정도 컴퓨터 도매상으로 시작해서 통신회사 설립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정보화 시대인 21세기의 태국을 이끌고 나갈 정치인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다.
“물론 그렇습니다만···. 어차피 탁신이 어떻게 단기간에 그렇게 많은 재산을 모았겠으니까? 정치권과의 결탁하고 특혜를 받아낸 결과지요. 당장 탁신이 통신회사를 설립할 때 그 허가를 내준 장관이 탁신에게 친한 사이로 뇌물을 줬다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리레이는 탁신에 대해서 꽤 비판적인 생각하고 있었다.
탁신만 뇌물을 통해서 통신회사를 세운 것이 아니라 뇌물을 준 것은 다른 통신회사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건 태국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시아의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인도 대만 한국 필리핀을 비롯한 거의 모든 아시아 국가는 물론이고 남미 아프리카도 마찬가지였다.
몇몇 선진국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나라에서 마찬가지였다.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고 빠르게 성장할 것이 확실했던 통신회사는 정경유착을 통해서 세워지고 운영되었다.
“탁신이 어떻게 재산을 모았는지 이곳 방콕의 상류층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의의 투사 흉내를 내면서 서민들을 위한 정치인 흉내를 내니 어이가 없을 뿐이지요.”
별로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만약 중상류층과 서민들, 도시와 지방 사이에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지는 것은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상류층 사이에서 탁신에 대한 여론을 생각했던 것보다 좋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다른 이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화교들 사이에서 여론은 어떻습니까?”
“비슷합니다. 아시겠지만 이곳 방콕의 상류층 다수가 화교들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탁신은 졸부일 뿐이죠. 그들 중에는 탁신의 벼락부자 흉내를 거슬려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탁신은 이곳 태국에서는 맨바닥에서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지만 사실 그의 조부 때부터 장사로 꽤 성공한 집안이었다.
탁신의 아버지는 고향에서 의원까지 했던 나름대로는 성공한 화교였다.
물론 탁신이 자수성가했다는 말도 아주 많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탁신의 집안이 부유했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탁신은 태국 내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중 하나였다.
태국의 억만장자들이 대부분 최소한 조부 때부터 재산을 물려받은 집안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탁신은 벼락부자가 맞았다.
나는 리레이의 얼굴을 보며 입을 열었다.
“리레이씨도 탁신에 대해서 별로 좋게 생각하시지 않는 것 같군요.”
리레이가 약간은 흥분할 정도로 탁신을 비판하는 것은 약간은 이상한 일이었다.
리레이라는 중국 이름을 쓰는 것을 봐서는 그는 탁신에게 불만이 있다는 전통적인 태국 화교 출신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불만이 있다기보다는···.”
리레이가 말을 얼버무렸다.
“하기 어려운 이야기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비밀도 아니니 이야기하죠. 본토에서 태국에 온 것은 채 4년이 안 됩니다. 태국 지사에서 근무하다가 지금은 외환위기 때 싸게 나온 회사를 인수해서 운영하고 있죠. 나는 정당하게 돈을 주고 산 것인데··· 이 탁신이라는 자는 나 같은 투자자를 무슨 침략자 취급하니···. 까놓고 탁신 본인도 화교 출신이면서 이게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
탁신은 외환위기 때 태국에 들어온 외국 자본에 대해서 대단히 부정적이었다.
정부가 국부를 외국인에게 팔아넘겼다는 것인데 이런 주장은 외환위기 과정에서 상실감을 느낀 태국인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다.
탁신이 주로 거론하는 사람이 바로 외국의 압력에도 끝까지 버텨서 위기를 넘긴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였다.
태국도 그렇게 넘길 수 있었는데 정치인의 무능으로 양보해서 피해를 봤다는 것이 탁신의 주장이었다.
결과론적인 주장이기는 했다.
아무도 태국이 말레이시아처럼 버텼을 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탁신에게는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근거가 있었다.
외환위기 과정에서 큰 타격을 입은 다른 기업들과는 달리 탁신의 기업은 이 외환위기를 잘 넘겼다.
탁신이 이런 모습을 보여줬기 때문에 그의 주장에 공감하는 태국인들이 많았다.
물론 탁신의 공격 대상은 정치인들과 IMF 미국과 금융기관이기는 했다. 하지만 리레이가 그런 태국의 위기를 통해 재산을 모았다면 탁신의 말에 불쾌감을 가지는 것도 일리가 있었다.
“정작 본인도 경제위기로 어려워진 경쟁사들을 인수해서 덩치를 키웠으면서 본인은 되고 외국인은 안된다니···.”
계속해서 불만을 이야기하는 리레이를 보며 나는 조금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왕 웬준 팀장은 소개해 줘도 어디서 이런 사람을 소개해 준 거야?’
생생한 목소리를 듣는 것은 좋지만 리레이가 과연 그런 이야기를 듣기에 좋은 사람인지 하는 의문이었다.
겨우 4년 전에 왔다면 태국인이라고 보기도 어려웠고 너무 한쪽에 치우친 사람인 것 같았다.
탁신의 압승이 확실하다면 리레이 같은 탁신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보다는 오히려 탁신과 가까운 사람이 필요해 보였다.
이런 내 생각을 읽은 듯 한창 이야기하던 리레이가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았다.
“너무 내 이야기만 떠들었네. 여기서 탁신에 관해 이야기한 것은 잊어버리세요. 헛소리는 여기까지 하고 그만 일어나죠. 대충 약속 시각이 된 것 같으니 갈 곳이 있습니다.”
“약속 시각이라니요?”
갑작스러운 약속 시각이라는 말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탁신이 압승한다는 소식을 듣고 태국까지 왔으면 탁신 쪽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 할 것 같았는데 아닌가요?”
나는 또다시 당황했다.
‘지금까지 탁신에 대한 비판을 늘어놓았던 사람이 탁신 쪽 사람을 만나러 가자니···.’
“탁신을 싫어하는 것 아니었나요?”
내 말에 리레이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요? 그럴 리가요. 이제 총리가 될 사람인데 그쪽과 잘 지내야죠. 장사꾼에게 좋은 사람은 내게 돈을 벌어주는 사람이죠.”
리레이는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이었다.
포기해야 할 때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