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011. 명예욕이 강한 사람에게는 명예로 다가가면 된다.
나는 수리야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미 결과가 뻔한 선거가 아니겠습니까? 그럼 선거가 끝난 다음에 언제 찾아뵐까요? 이미 리레이 씨를 통해서 아시겠지만, 중국 본토의 자동차 회사는 이곳 태국의 자동차 부품 기업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중국은 이제 자동차 산업을 시작하는 단계라서 태국의 자동차 부품 기업 특히 Summit 같은 대기업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그냥 단순히 하는 말은 아니었다.
실제 류오린이 투자하는 기업 중의 지리라는 오토바이 회사가 있었다. 그 회사는 최근 교도소가 운영하던 자동차 회사를 인수해서 어떻게든 자동차를 만들어 보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할 말은 아닌 것 같네. 어쨌든 선거를 앞두고 찾아와서 좋은 말을 해준 사람을 그냥 돌려보내는 것은 멀리서 찾아온 사람에 예의가 아니지. 자네 말대로 선거가 압승으로 끝나면 축하파티에 자네를 초대하지. 리레이 자네도 파티에 함께 오게.”
“감사합니다.”
나와 리레이는 수리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수리아의 말을 통해서 타이락타이당도 어느 정도 선거결과를 예상하고 파티까지 잡아놓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수리아의 초대로 축하파티에 참석할 수만 있다면 나로서는 좋은 기회였다.
다음 선거 때까지 태국을 이끌고 나갈 주요한 인물을 모두 만날 기회였다.
수리아는 리레이의 말을 통해 생각했던 것과는 달랐다.
다른 사람들도 직접 만나보면 좀 더 충실한 보고서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수리아를 만나고 나오며 나는 리레이에게 감사 인사를 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파티에 초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야말로 놀랐습니다. 왕 웬준 씨에게 듣던 것과는 많이 다른 분 같습니다?”
리레이가 나를 보며 말했다.
그는 나를 다시 봤다는 듯 놀란 표정이었다.
아마 내가 순간적으로 꾸며낸 이야기가 리레이로서는 조금 의외였던 것 같았다.
예를 들어 내가 순간적으로 꾸며낸 Summit 와 중국 자동차 기업에 관한 이야기 같은 것들이었다.
조금 전 리레이에게 듣기 전까지 수리아라는 인물도 그가 Summit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 들은 이야기를 이용해서 수리아의 호감을 사는 데 성공한 것이다.
“서로 도움이 되면 좋은 일이지요. 리레이씨도 지리 쪽과 연락을 해 보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지리는 정부의 자동차 제조 허가가 나지 않아서 고민하고 있지만 나름 탄탄한 회사입니다. 지리는 스쿠터 판매로 엄청난 돈을 벌어서 자금 사정은 넉넉하죠.”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운영하고 계시는 회사에 자금 사정은 어떻습니까??”
“자금 사정은 갑자기 왜?”
리레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당황한 듯했다.
“제가 이곳에 도착해보니 탁신에 대한 국민적인 기대가 큰 것 같더군요. 보통 이런 경우 선거가 끝난 이후에 주식시장이 급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욱이 탁신 같은 유능하다고 국민이 생각하는 사람이 지도자가 될 경우가 큰 경우에는요.”
투자 정보였다.
내가 리레이에게 주는 일종의 관시에 대한 대가였다.
리레이가 그 정보를 이용하느냐 아니냐는 상관없었다.
나로서는 리레이에게 오늘 만남에 대한 빚을 갚는 목적이었다.
내 예상대로 선거가 끝나면 태국의 증시는 분명 오른다.
리레이가 주식을 사든 아니든 리레이는 내가 투자 정보를 준 사실을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다음부터는 내가 하는 말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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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락타이당은 총선에서 압승했다.
CIA의 정보대로 그리고 내 예상대로였다.
일요일 축하파티에 참석할 때쯤에 예상의석 수는 252석이었다.
개표가 다 끝난 것이 아니고 접전인 곳도 있어 실제 의석수는 바뀔 수도 있었다.
하지만 최소 245석 이상은 확실했다.
이런 결과는 타이 총선 역사상 손에 꼽을 압승이었다.
창당 2년 만에 집권당이 되는 성과였다.
나와 리레이는 총선 축하파티장에 참석했다.
리레이가 한 사람을 가르치며 말했다.
“저 사람도 왔네요.”
리레이가 가리킨 사람은 60세 정도의 안경 낀 사내였다.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노련한 정치인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노 티안통(Sanoh Thienthong)입니다. 태국의 킹메이커라고 불리는 사내죠.”
“킹메이커요?”
“선거 때마다 연립정권을 만들어 내는 핵심적인 인물입니다. 총리 두 명이 저 사람이 만들었죠. 본인은 자신의 지역 외에는 별로 인기가 없지만, 지역 기반은 확실하죠. 총리가 될 수는 없지만, 총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인물이죠. 저 인간이 온 것을 보니 대세가 넘어온 것이 확실합니다. 개표결과 의석수가 절반을 넘지 못하더라도 집권에는 별문제 없겠네요.”
“따르는 의원이 많나 보죠?”
“이번에도 그가 이끄는 당의 당선자가 30명이 넘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몇 명 다른 당 사람이 보이네요. 자신들 당의 축하파티장도 있을 텐데 참석한 것을 보니···. 다른 소수 정당과 연정 수준이 아니라 아예 합당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탁신은 이제 돈과 권력을 다 가지게 된 셈이었다.
다른 당에 약속할 수 있는 것이 많았다.
파티장을 둘러보던 내 눈에 한 사람이 들어왔다.
파티장에 참석한 사람 중에서도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
정치인이라기보다는 학자에 더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저 사람은 누굽니까?”
“졍 대인이군요. 대단한 사람이죠. 타이 락 타이의 창립회원으로 타이락타이당의 실질적인 이인자입니다. 이번 타이 락 타이의 경제공약이 다 저 사람의 작품입니다. 이른바 탁시노믹스의 설계자죠.”
리레이의 대답에 나는 조금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달랐기 때문이다.
“그래요? 제가 조사한 바로는 탁시노믹스 설계자는 경영학 교수 출신인 솜키드 아닌가요?”
내가 알기로는 탁시노믹스의 설계자는 솜키드였다. 그런데 갑자기 갑자기 듣지도 보지도 못한 졍 대인이라는 사람이 탁시노믹스의 설계자라니 나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였다.
“태국식 이름은 솜키드지만 중국 이름이 졍한광(曾漢光, Zeng Hanguang)입니다. 듣기로는 청 가경제때 태국에 온 집안 출신이라고 하더군요. 그런데도 집안에서는 예전 전통대로 엄격한 교육을 한다고 합니다. 정말 대단하죠. 그래서 그런지 졍 대인의 형님도 몇 년 전에 장관을 하셨을 정도로 형제분 열 분 모두가 대단히 뛰어나신 분입니다. 태국의 사마 가문이라고 할 수 있죠. 사마 가문은 아시죠? 삼국지에 나오는 그 사마중달의 가문 말입니다.”
리레이는 처음 생각보다 중국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것 같았다.
“알고 있습니다. 그럼 저분도 화교라는 이야기군요.”
리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는 초조우 화교시죠. 이리 오시죠. 제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리레이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나를 그에게 끌고 갔다.
“리레이 아닌가? 여기는 웬일인가?”
상대는 리레이를 반갑게 맞았다.
“어제 수니아 대인에게서 초대를 받았습니다. 이제라도 이런 자리에 빠질 수가 있나요.”
“진작에 이쪽에 줄을 섰어야지 내가 뭐라고 했나. 우리가 이긴다고 하지 않았나.”
특이한 것은 그의 말투에서 어딘지 모르게 중국어 발음 특유의 악센트가 들린다는 점이었다.
가경제때라면 족히 19세기 초이니 족히 태국에 이주한 것이 이백 년 전이었다.
그런데 그런 집안의 사람이 중국어 악센트를 쓰다니···.
당장 어제 만난 수리아만 해도 중국어 악센트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특이한 것을 떠나서 무서운 일이었다.
솜키드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이쪽은?”
나는 그에게 다가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홍콩 투자회사에서 일하는 에드릭 손이라고 합니다. 솜키드 교수님을 뵙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오면서 태국에 대한 자료를 읽었다.
그중에는 솜키드 교수에 관한 내용도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태국 신정부의 경제정책 설계자였기 때문이었다.
태국에 투자하는 이상 그의 경제정책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했다.
솜키드 교수는 태국만이 아니라 미국에서도 꽤 알려진 인물이었다.
단순히 탁시노믹스의 설계자가 아니었다.
바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마케팅 교수인 필립 코틀러의 제자였다.
총애받은 학생으로 코틀러가 함께 마케팅 책을 같이 쓴 적도 있을 정도였다.
“교수를 그만둔 지 꽤 됐는데 아직 나를 교수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군.”
솜키드 교수는 이미 자신이 교수가 아니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집안 배경을 생각하면 솜키드는 관료라기보다는 중세중국의 학자에 가까웠다.
전공은 유학이 아니라는 점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세 중국의 학자들이 관직을 자신의 학문을 치국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솜키드 교수도 자신의 마케팅 지식을 이용해 태국의 경제정책 뼈대를 세운 것이었다.
그런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교수라는 호칭을 싫어할 리가 없었다.
“3년 전에 필립 코틀러 교수님과 쓰신 “The Marketing of Nations: A Strategic Approach to Building National Wealth”를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특히 마케팅 정책을 통해서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국가 정책도 그에 맞춰야 한다는 부분이 감명이 깊더군요. 이번 선거 공약으로 내세운 경제정책도 결국 이런 생각을 실천하기 위한 정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까?”
탁시노믹스가 겉으로는 서민층의 인기 영합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철저한 마케팅 관점에서 만들어진 정책이었다.
겉으로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철저히 실용성을 중시하는 정책이었다.
“내 책을 읽었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나 보군.”
솜키드가 반색하며 말했다.
“자신의 이론을 정책으로 옮길 기회를 얻게 되는 것···. 학자의 꿈 아니겠습니까?”
솜키드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셈이지. 자네는 내 정책이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당연히 성공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솜키드 교수 입가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말이라도 고맙군.”
미소를 지으며 보던 고개를 끄덕이던 솜키드에게 다른 사람이 다가왔다.
그러자 솜키드 교수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런 나는 이만 가봐야 할 것 같군. 그럼 다음에 다시 보세.”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우리는 인사를 하고 솜키드에게서 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