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012. 현명한 사람은 상황에 자신을 맞춘다.
솜키드 교수가 사라지고 리레이가 나를 돌아보았다.
“어제도 느꼈지만, 순발력이 뛰어나신데요. 도대체 졍 대인의 책은 언제 읽으셨습니까?”
리레이가 말했다.
“오는 동안 조사 좀 했습니다. 그리고 솜키드 교수 책은 제목만 알고 있을 뿐 실제 읽어 보지는 않았습니다.”
내 말에 리레이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안 읽어 보셨다고요? 그런데 조금 전에는 어떻게?”
“책 제목만 봐도 내용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죠.”
“그야 그렇지만···. 책 내용에 대해 질문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리레이는 약간 나를 질책하는 어투였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솜키드 교수 책은 읽어 보지 않았지만. 솜키드 교수의 지도교수인 필립 코틀러 교수의 마케팅 책은 읽었습니다. 여기에 탁시노믹스 내용도 알고 있습니다. 책 내용을 질문했어도 대답하는 게 그렇게 어려웠을 것 같지는 않네요. 저는 오히려 리레이 씨에게 많이 놀랐습니다.”
“저에게 놀라다니요?”
리레이가 되물었다.
“왕 웬준 씨가 아무나 소개할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은 알았지만, 솜키드 교수 같은 차기 정권의 핵심 구성원까지 알고 있고 저에게 소개할 줄은 몰랐네요. 대단하시네요.”
“그냥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것뿐입니다. 어르신들이 살려고 노력하는 저를 좋게 봐주고 계십니다.”
“그게 더 대단한 거죠. 실세가 될 수리야 대인이나 솜키드 교수님 같은 실세들과 친분을 가지고 있으니···. 앞으로 리레이씨 사업은 말 그대로 성장할 일만 남은 것 같네요.”
“말이라도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는 오히려 이번에 에드릭 손 씨를 만난 것이 행운인 것 같은데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저도 태국에서 리레이 씨를 만난 것이 행운인 것 같습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조금 전 만남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탁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특히 솜키드 교수가 중국 화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느끼는 점이 많았다.
어제 만난 수리아도 그렇고 솜키드 교수도 그렇고 태국의 최상류층이면서 동시에 태국 화교의 중심인물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탁신의 최측근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본인들도 능력이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전통적인 화교 명문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전통적인 화교 가문에서 정치지도자와 함께하는 것은 단순히 본인 의사만이 아니었다.
가문의 선택인 경우가 많았다.
현재로서는 탁신과 태국 화교 지도층과의 사이가 나쁠 것이라는 왕 웬준의 말은 사실이 아닌 것 같았다.
물론 앞으로는 달라질 수도 있었지만 적어도 현재는 탁신과 태국 화교 사이는 나쁘지 않아 보였다.
‘생각보다 기반도 탄탄하고 오래 갈 수도 있겠는데?’
축하파티에 오기 전까지 나는 탁신의 정권이 오래가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선거에서 이런 선심성 정책으로 바람을 일으키고 집권하는 경우가 아주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런 경우는 선거 전에 국민에게 약속했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경우 일이 년을 버티지 못하고 지지율이 폭락하게 된다.
그런데 화교 주요 가문들의 지지를 받는다면···.
예상보다 훨씬 오래 지지율을 유지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리레이가 사람들에게 나를 소개해주겠다는 말을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이들이 특별한 일이 없다면 4년 동안 태국을 이끌어갈 사람들이었다.
내가 단순히 투자회사의 직원이라면 천금 같은 기회일 것이다.
하지만 이 이상 고위층에 접근하는 것은 위험했다.
내 진짜 신분을 생각하면 너무 위험한 일이었다.
괜히 누군가 내 뒷조사라도 하게 되는 일은 피해야 했다.
나는 파티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분위기를 살폈다.
꽤 시간을 흐르는 동안에도 파티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탁신은 나타나지 않았다.
참석하지 않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파티에 참석하지 못할 정도로 급한 일이 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존재감을 과시하기 위한 행동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파티 분위기를 보니 솜키드 교수조차 탁신이 오지 않는 이유를 모르는 것 같았다.
나는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리레이에게 양해를 구하고 파티를 빠져나왔다.
탁신이 오지도 않는 파티에 더 남아 있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파티를 나와 택시를 잡아타고 그대로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에서 며칠 동안의 성과를 정리했다.
탁신을 보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지만 태국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대충 다 모았다.
나는 월요일 홍콩으로 돌아오자마자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CIA의 무인 오피스에서 가져다 놓았다.
지시를 다 이행하고 나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안심하고 있던 나는 무심코 블랙베리의 메일을 확인했다.
팀장이자 담당관이 존 베비스에게서 또 하나의 메일이 와 있었다.
지시를 받고 태국에서 바로 돌아왔는데 벌써 메일이 와 있다니 뭐 이런 일이 있다는 말인가?
짜증이 목까지 올라왔다.
그래도 본부에서 보낸 메시지를 읽지 않을 수는 없었다.
메시지는 간단했다.
메일에 적힌 지시대로 따르라는 것이었다.
나는 잠시 주위를 살폈다.
다들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내가 메일을 확인하기 위해 보안장치와 프로그램이 깔린 AAM의 사무실로 가야만 했다.
내가 막 일어나려는 순간 옆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에드릭!”
옆에 있던 동료인 리안이었다.
“어디를 또 나가려는 거야?”
“잠시 일이 있어서 왜?”
“팀장님이 아까부터 몇 번 너를 찾으셨어. 기다리시고 있는 것 같으니 팀장실에 가봐.”
나는 메일을 확인할 시간도 없이 왕 웬준 팀장실로 향했다.
왕 웬준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좀 늦었군. 거기 앉게.”
나는 며칠 전처럼 팀장실 소파에 앉았다.
가방에서 보고서를 꺼내 들었다.
“보고서를 출력하느라 늦었습니다.”
당연히 바로 지어낸 핑계였다.
왕 웬준은 손을 들어 보고서를 받았다. 그리고 보고서를 그대로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보고서는 나중에 읽고···. 태국 선거결과는 자네가 예상했던 그대로 나왔더군. 태국에 가보니 거기 분위기는 어떻든가?”
왕 웬준이 물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번에 선거에서 이긴 탁신의 정당은 기반이 생각했던 것보다 탄탄한 것 같습니다. 태국 국민의 지지도 지지지만···. 현재까지는 태국의 정치인들은 물론이고 화교 엘리트들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내가 말했다.
내 말을 들은 왕 웬준이 손으로 탁자를 몇 번 툭툭 치며 생각에 잠겼다.
며칠 전 왕 웬준은 탁신이 태국 화교들과는 다른 인물이라는 점을 이야기했었다.
자기 생각과는 다른 내 대답에 대해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보고서를 읽으면 나올 테고···. 결론적으로 자네는 탁신이 정부를 구성하면 안정적일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탁신이 지금 반부패혐의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혐의가 확정되면 탁신이 총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해지는 것 아닌가? 당선도 취소될 테니 말이야.”
왕 웬준이 말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왜 그렇게 생각하나? 듣자니 증거가 꽤 확실하다고 하던데?”
“만약 탁신의 타이락타이당이 500석 중에서 200석 이하를 얻었다면 그럴 수도 있겠죠. 탁신을 새로운 정부에서 제외하는 조건으로 지금 여당인 민주당에서 연정을 제안했겠죠. 하지만 탁신의 타이락타이당은 의회 절반을 차지한 상태입니다. 더구나 제가 태국에 있을 때 상황을 보니 군소정당 몇 개도 타이락타이당에 흡수될 것 같더군요. 그렇게 되면 탁신의 당선이 취소되더라도 타이락타이당에서 총리가 나오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어떤 판사가 탁신에게 유죄를 선고할 수 있겠습니까?”
왕 웬준의 말대로 지난달에 탁신에 대한 반부패 수사가 시작된 것은 사실이었다.
선거가 시작되기 직전이었기 때문에 누가 봐도 의도적인 수사였다.
왕 웬준의 질문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타이락타이당이 오랜 역사를 가진 당이라면 탁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그를 대신할 수가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타이락타이당은 탁신의 카리스마로 그가 사람들을 모아서 창당한 당이었다.
당내에서 탁신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탁신을 대체할 사람이 없었다.
“탁신이 총리가 되는 것은 결국 시간문제입니다.”
내가 다시 한번 강조했다.
“역시 그렇군.”
왕 웬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본 것이네. 내가 얻은 정보에 의하면 탁신이 창당파티에 끝까지 참석하지 않았다더군.”
“그랬군요. 저는 중간에 나와서 몰랐습니다.”
어쩌면 왕 웬준의 말대로 탁신이 파티에 참석하지 않은 이유가 부패혐의로 조사를 받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내가 파티에 참석해 본 느낌으로는 참석자 중에서 탁신을 대체할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
정권의 이인자라는 솜키드 교수 아니 졍한광은 정치가라기보다는 학자이자 경제관료였다.
유능한 관료는 될 수 있지만, 일인자가 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일인자 특유의 카리스마가 부족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자네 생각은 무엇인가?”
왕 웬준이 물었다.
나는 잠시 왕 웬준이 말하는 결론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무슨 말씀인지? 결론이라면?”
“탁신의 정부가 안정적이건 아니건 그건 우리가 알 바가 아니지.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돈이 되느냐 아니냐가 아니겠나?”
“아···. 무슨 말씀인지 알아들었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누가 되든 태국의 경제는 앞으로 꾸준히 상승할 것 같습니다. 증시도 마찬가지겠지요.”
“오늘 보니 태국증시를 보니 상승세로 시작했던데···. 이 상승세가 얼마나 갈 것 같나?”
전부터 느꼈지만 왕 웬준의 질문은 너무나 노골적이고 대답하기 곤란했다.
내가 무슨 예언자도 태국증시의 상승세가 얼마나 갈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렇게 물어보시면···.”
태국 경제가 꾸준히 성장한다고 해서 증시도 계속 성장하는 것은 아니었다.
대세 상승장이라고 해도 단기적으로는 상승과 하락을 반복할 수 있는 것이 증시였다.
“정확한 대답을 하라는 것이 아니네. 그냥 자네 생각을 말해달라는 것이야. 자네라면 지금 태국증시에 투자하겠나?”
더 부담스러운 소리였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대답을 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저도 지금 당장은 잘 모르겠고 앞으로 하루 이틀 태국 주가가 상승한다면··· 내일이나 모레 정도에 대만에 투자한 자금을 절반 정도 태국에 투자해 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좋아! 내가 듣고 싶었던 대답이 바로 그런 대답이네.”
왕 웬준이 크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왕 웬준을 보며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왕 웬준이 내 투자를 따라 한다고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이용당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한동안은 참아야 하겠지만 일정한 선을 넘으면 뭔가 조처해야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