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3화 (14/270)

서몽

# 013. 다툼이 외로움보다 낫다.

나는 자리로 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와 AAM 사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보안대비가 된 컴퓨터에서 메일을 확인했다.

왕 웬준과의 대화는 썩 유쾌하지 않았다.

이런 기분에 본부에서 온 메일을 읽어야 하는 상황에 화가 나기도 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이건···.”

메일 내용은 내가 생각했던 것처럼 새로운 임무는 아니었다.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메일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나에게는 유리한 내용이었다.

지금까지 썼던 동아시아 경제 동향 보고서를 직접 무인 오피스에 전달할 필요가 없다는 지시였다.

대신 지시한 메일 계정에 임시저장 형태로 올려놓으라는 지시였다.

잘된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보고서를 CIA 무인 오피스에 가져다 놓을 때마다 마음 졸이고는 했다.

무인 오피스를 방문할 때마다 내가 마치 진짜 현장 요원이라도 된 것 같았다.

같은 CIA의 요원이라고는 하지만 현장 요원과 나 같은 정보분석 요원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첩보 기관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CIA에서 두 부서는 확실히 구분되고 같이 일하는 때도 거의 없었다.

이렇다 보니 현장 요원들은 정보분석 요원들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정보분석 요원 중에는 그런 현장 요원들의 무시를 기분 나빠하면서도 은근히 그들을 부러워하는 요원들이 많았다.

정보분석 요원들이 스스로 CIA의 두뇌니 하는 소리를 하고는 한다.

그렇지만 우리도 다 알고 있었다.

CIA에서 가장 중요한 요원은 전체 CIA에서 20%가 안 되는 작전 요원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서 처음 보고서를 무인오피스에 가져다 놓을 때는 기분이 좋았다.

내가 무슨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런 내 생각이 달라진 것은 11월 초였다.

우연히 신문에서 러시아에서 체포된 CIA 요원이 20년 형을 받았다는 기사를 본 이후였다.

내가 있는 곳이 홍콩이지만 홍콩은 1997년부터 중국 일부였다.

더구나 내가 일하고 있는 류오린에는 왕 웬준처럼 본토 출신이 많았다.

내가 CIA의 요원이라는 사실을 회사의 누군가 알게 되면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잡히고 난 후에는 끝이었다.

정보분석 요원이고 중국의 정보를 염탐할 목적이 아니라고 주장해봐야 그때 누가 내 말을 믿어 주겠는가?

아니 중국 정부에 체포되는 경우는 차라리 나았다.

내가 무슨 중요한 정보를 빼돌린 것도 아니니 감옥에서 그리 오래 살지는 않을 것이다.

진짜 걱정하는 것은 정식으로 체포되는 것이 아니었다.

최근 들어서 나는 에디 미첼의 사고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 비행기 추락 소식들 들었을 때는 에디 미첼이 죽고 나면 발생할 일들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해가 가지 않는 의혹이 있었다.

에디 미첼은 성격은 나쁘지만, 굉장히 유능하고 자기 안전을 철저히 챙기는 인물이었다.

비행기가 추락할 확률은 0.00001%였다.

심지어 비행기 추락했을 때 생존율은 95%다.

최고급 개인 제트기가 사고로 추락할 가능성은 대형 여객기가 추락할 확률보다 낮았다.

에디 미첼은 이런 극악한 확률을 뚫고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이미 말한 것처럼 에디 미첼은 오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인물이었다.

그런 성격 때문에 업계에 적도 많았다.

도이치뱅크 같은 거대 투자 은행을 이끄는 일은 남들의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에디 미첼이 사업적으로 엮인 적들이 비행기 사고를 유발해서 그를 암살했을 가능성은 작았다.

만약 에디 미첼의 사망이 사고로 죽은 것이 아니라면?

죽음은 CIA와의 관계 때문일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지시는 나로서는 반가운 일이었다.

특정 메일 계정에 임시로 저장하기만 한다면 발각될 위험이 낮아진다.

암호화해서 저장해야 해서 회사에서는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어차피 지금도 회사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를 고민하게 만드는 것은 두 번째 지시였다.

이건 도대체 뭔 소리야?

‘예정된 기간까지 현재 상태를 유지하라. 팀원들과 되도록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라.’

예정된 기간이란 내가 류오린에 온 지 2년이 되는 내년 6월까지를 의미했다.

하지만 나머지는 이해할 수 없는 지시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의도가 의심되는 지시였다.

현재 상태의 개념은 너무나 광범위했다.

류오린에 계속 근무하기만 하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보고서까지 포함하는 의미인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가진 투자금이라도 그때까지 보존하라는 의미인지?

두 번째 지시는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나중에 추가 지시가 내려오면 그때 의도를 생각해야 할 것 같았다.

복잡한 마음에 메일을 읽던 나는 마지막 부분에서 숨이 탁 막히는 것 같았다.

‘팀장이자 내 담당관인 존 베비스가 곧 CIA를 그만둘 예정이라니?’

그럼 어떻게 되는 거야?

팀장인 존 베비스는 변호사 출신이었다.

예전 클린턴 정부 선거에 참여한 공을 인정받아 CIA에 들어온 인물이었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고 CIA 들어온 인물이었다.

공화당으로 정권이 교체되면서 CIA에서 물러나는 것 같았다.

존 베비스의 메일에는 자신의 후임이 누군지 혹은 언제 오는지도 적혀 있지 않았다.

적혀 있는 것이라고는 메일 주소에 보고서를 남기면 같은 형식으로 지시가 내려온다는 것뿐이었다.

‘지시가 내려오기는 내려오는 거야?’

나를 홍콩으로 보낸 존 베비스와 에디 미첼이 모두 사라졌다.

간섭이 없다고 홀가분하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파견 나온 CIA 요원에게 상사가 없다는 것은 나를 지켜줄 보호막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너무나 충격적인 내용에 나는 잠시 멍하니 내 앞에 놓인 다른 모니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모니터에는 각종 시세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종잡을 수 없는 증시 시세가 바로 앞으로 내 인생을 암시하는 듯했다.

나는 여전히 생각이 복잡한 상태로 회사로 돌아왔다.

문득 동료들과 원만하게 지내라는 지시를 떠올랐다.

굳이 지킬 필요가 없는 지시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제 혼자라는 생각에 외로움이 밀려왔다.

정확히는 의지할 곳이 없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다른 팀원들을 돌아보았다.

다른 직원들은 고객과 전화 통화를 하지 않을 때는 차트를 분석하거나 기업 재무제표를 분석하고 있었다.

그중 가장 많은 직원이 하는 일이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모니터를 통해 주로 살피는 것은 흔히 말하는 주가지수나 개별 기업의 5일 평균선이니 20일 평균선이니 60일 평균선이니 120일 평균선이니 하는 것들이었다.

이른바 차트 모양을 보며 주가의 추세를 살피는 것이었다.

나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지금까지 차트보다는 출판물이나 인터넷을 통해 얻은 자료를 읽은 일이 일과의 대부분이었다.

어릴 때부터 활자 중독이었기 때문에 이런 일 자체는 별로 어렵지 않았다.

옆자리에 앉은 리안에게 말을 걸었다.

리안은 이미 말했던 것처럼 왕 웬준 팀장에게서 온 연락을 알려주고는 하는 바로 그 직원이었다.

“나는 차트를 봐도 잘 모르겠던데 어때?”

리안은 내 질문에 잠시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금까지 회사에서 내가 꼭 필요한 말 외에 리안에게 먼저 말을 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리안에게 말을 건 것은 그가 단지 옆자리에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나이도 같아서 팀 내에서는 말을 걸기에 가장 편한 직원이 리안이었다.

“대만 자취안 지수에 투자했다면서?”

잠시 당황하던 리안이 말했다.

“맞아. 지난주에 투자했지.”

“나도 오늘 투자했는데 여기 보면 대만 자취안 지수가 계속 오르고 있잖아. 지금 추세를 봐서는 다음다음 주까지는 계속 오를 것 같아. 다음다음 주 초쯤에 팔았다가 고점을 찍고 내려오면 다시 살 생각이야. 그러다가 다시 고점을 찍는 쌍봉이 만들어 지면 팔 생각이야.”

“···.”

멍한 내 표정을 보던 리안이 무언가 생각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네가 반년 동안 차트를 분석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네. 너 솔직히 차트에 대해 전혀 모르는 거야?”

“나도 이런저런 평균선에 대해 모르는 것은 아니야. 반년이 넘게 일하다 보니 대충은 알아들을 수 있고···. 하지만 전문적으로 배운 적은 없어.”

“너도 대단하네. 투자회사에 일하는 사람이 차트를 전혀 공부하지 않는다니···.”

“지금도 굳이 배울 생각이 없어. 나는 투자자를 설득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내 말에 리안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럼 지금까지 샀던 회사들 주식은 무슨 근거를 가지고 매매했던 거야?”

“당연히 고용주의 지시를 받고 산 거지.”

리안을 비롯한 팀원들도 내가 류오린의 직원이라기보다는 이천만 불 투자자의 대리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이 도이치뱅크의 에디 미첼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최근 거래는 뭔데? 회사 주식이 아니라 지수 ETF에 투자하기 시작한 것도 고용주 지시야?”

리안이 물었다.

“최근 고객이 바빠져서 말이야. 내 고용주에게 내가 관리하는 돈은 큰돈이 아니거든···.”

“도대체 고용주가 누구기에 2000만 불이 큰돈이 아니라는 거야?”

“그건 당연히 비밀이지.”

내 고용주는 크게는 미국 정부 적게는 CIA였다.

미국 정부의 내년 예산은 1조 9천 7백억 달러 준정부 예산을 합치면 2조 달러가 넘었다. CIA만 해도 한 해에 최소 300억 달러를 쓰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런 규모를 가진 미국 정부나 CIA가 내가 투자하는 2000만 달러, 아니 1200만 달러에 신경을 쓸 리가 없었다.

에디 미첼의 사고로 더더욱 내가 조직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떨어졌다.

현재 CIA에서 내 존재를 신경을 쓰는 사람은 존 베비스가 유일했다.

그리고 그 존 베비스조차 그만둘 예정이었다.

“그 사람에게는 지금이 더 낫겠네. 도대체 지난 연말부터 오늘까지 2주 사이에 얼마나 번 거야?”

리안의 말에 나는 내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지난주 목요일 아침에 구매했던 대만 자취안 지수는 월요일 오전까지 무려 9%나 급등해 있었다.

“지금 정리하면 천이백이십만 불 정도 되겠네.”

천이백이십만 불이라는 말에 리안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분명 지난 12월에 천만 달러까지 떨어졌다고 들었는데 그사이에 이백이십만 불이나 번 거야? 아무리 연준 금리 인하로 주가가 급등했다고는 하지만 대단하네. 그럼 지금까지 수익률이 22%가 넘는 것인가?”

정확하게는 내가 본격적으로 거래를 시작하기 전에 구백만 불까지 떨어졌었으니 35%가 조금 넘는 수익률이었다.

대단한 수익률이기는 했지만, 단기간에 이 정도 버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른 일도 그렇지만 성공하기도 어렵지만, 그 성공을 유지하는 것은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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