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015. 춤을 추기 위해서는 두 사람이 필요하다.
“천만 불이면 작은 자금도 아닌데 그걸로 보름 조금 넘는 동안 35%를 얻다니 정말 대단하네. 아무리 중간에 연준이 금리 인하해서 전 세계 증시가 전반적인 상승세였다지만 35% 수익률은 어렵지. 나라도 너에게 계속 투자를 맡길 거야.”
리안이 말했다.
“그건 그런데 말이야. 리안 네가 도움을 좀 줬으면 하는데···.”
내 말에 리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삼백오십만 불을 벌어들인 사람에게 내가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는데···. 이번 터키 투자처럼 손해나 끼치지 않으면 다행이지.”
“터키 문제는 그만 잊으라니까. 내가 지금까지는 꽤 괜찮은 투자 수익률을 얻고 있지만···. 아무리 투자금이라도 한 곳에 모두 투자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크잖아.”
나는 리안에게 터키를 신경 쓰지 말라고 이야기했다.
물론 내심 리안이 터키 투자를 만류해서 내게 손해를 끼친 것에 관해 부담을 느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게 리안을 설득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지.”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괜찮았지만 한 곳에 모든 자금을 투자하는 것은 자칫 폭락의 위험이 있어서 걱정되더라고···. 월요일에 터키 증시에 투자할까 했던 것도 그런 이유고···. 투자금 절반을 빼서 위험을 분산하려고 해 볼까 했었던 거야.”
투자회사에서는 헤지로 위험을 대비하고 포트폴리오를 구성해서 여러 종목에 투자한다.
이건 자본시장에서 많은 사람이 알거지가 되면서 나온 교훈이 바탕이 된 것이었다.
추세매매의 아버지로 불리며 20세기 초 억만장자가 된 제시 리버모어는 한순간의 투자실패로 모든 재산을 잃었다.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해야 했다.
그만큼 한 곳에 모두 투자하는 것은 위험부담이 큰 투자 방법이었다.
9번을 이기다가 1번 져도 모든 것을 잃기 때문이다.
리안도 내 말이 이해가 가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서 내가 뭘 도와줬으면 하는데?”
“투자금 중 절반은 지금처럼 아시아 증시를 중심으로 투자하고 나머지 절반은 위험 분산 차원에서 미국이나 유럽 쪽에 투자해볼까 생각하고 있어.”
“좋은 생각이네. 미국이나 유럽 쪽과 아시아 증시가 같이 움직이는 경향이 있지만 몇 년 전 아시아 경제위기를 생각하면 아시아 한 곳에 투자하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그게 위험부담이 적지.”
세계화 시대였다.
그건 증시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증시가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는 동조화 현상은 꽤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렇지만 항상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맞아. 몇 년 전 아시아 경제위기 때 미국이나 유럽의 증시가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잖아. 그런 아시아 경제위기 같은 돌발적인 상황이 바로 위험분산이 필요한 이유고 말이야.”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마라’
분산투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말이었다.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이유가 뭐겠는가?
바로 한 바구니가 담았다가 모든 달걀이 한 번에 깨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주식을 분산투자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야. 나도 비슷한 경우를 당해 봐서 알지.”
리안이 말했다.
“해외투자팀에 있을 때 했던 터키 투자를 이야기하는 거야?”
내가 물었다.
“뭐, 그렇지.”
리안이 대답했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알아보니 터키 투자는 실패라고 보기도 어려운 것 아니야? 투자를 정리할 때 터키 투자로만 200%가 넘는 수익률을 얻은 상태였다고 하던데?”
터키 증시가 작년에 달러 기준으로 50% 정도 폭락해서 선진국은 물론이고 신흥국 기준으로도 많이 떨어진 것은 사실이었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나라 중에서 터키보다 더 많은 하락 폭을 기록한 국가는 인도네시아나 태국 정도였다.
하지만 리안이 처음 해외투자팀에서 터키에 본격적으로 투자를 시작한 것은 1999년 초였다.
그리고 1999년 터키 증시는 폭등세였던 세계 거의 모든 증시 중에서도 가장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터키 종합지수 자체는 무려 550%나 올랐고 달러 기준으로도 300%에 가까운 성장률이었다.
2000년 상반기 터키 증시는 전 세계적인 기술주 폭락과 터키의 정치 불안이 겹쳐 다른 나라보다 더 하락 폭이 컸다.
그래도 처음 투자 시점을 생각하면 배 이상을 벌어들인 투자였다.
절대 실패라고 할 수 없는 투자였다.
“고객들은 예전에 내가 얼마나 벌어줬는지는 기억을 하지 않더라고···. 손해가 난 것만 생각하지.”
리안이 말했다.
아무래도 투자실패 자체보다는 투자 손해를 본 이후 고객들의 태도가 돌변한 것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은 것 같았다.
리안의 표정을 보며 나는 터키 이야기를 여기서 더 하는 것은 득보다 실이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정도면 그에게 부담을 주고 내 제안을 받아들이게 하는 데는 이미 성공한 셈이었다.
“네 잘못이 아니면 잊어버려. 어쨌든 내가 도와달라고 하는 이유는 간단해. 내가 분산투자를 하려고 하는데 내 능력에 벅차더라고 특히 매매타이밍 같은 것 말이야. 그래서 네게 도움을 받으려고 하는 거야.”
“투자 종목에 대해서 의논하자는 거야?”
“그건 아니야. 그렇게 되면 이번처럼 내 생각과는 다르게 리안 네가 부담을 가질 수도 있잖아.”
리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투자에 대해서 의논하자는 것도 아니면 뭘 도와달라는 거야?”
“나중에는 투자 종목에 대한 의논도 해주면 좋겠지만 당장 필요한 것은 조금 기술적인 문제야.”
“기술적인 문제라니?”
리안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투자 종목은 내가 정할 생각이야.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종목 선택은 그럭저럭하는데 매매타이밍을 잡는 데는 경험이 부족하잖아. 이번 대만 투자만 해도 너라면 고점에 팔아서 오십만 불 정도는 더 벌었을 거야.”
“그건 그런데···.”
내가 지난 몇 주 동안 높은 수익률을 올리기는 했지만, 실제 주식 매매타이밍을 잡는 것은 여전히 서툴렀다.
무엇보다 지난 반년 동안 에디 미첼의 지시를 받으면 주식을 사고 지시를 받아서 주식을 파는 것에 너무 익숙해졌다.
이런 매매습관이 몸에 굳다 보니 아무래도 매매수익률에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어제 오후 계산해 보니 내가 만약 저점에서 주식을 사서 고점에 주식을 팔았다면 지금보다 훨씬 높은 수익률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지금도 수익률이 낮지는 않지만 어딘지 손해를 보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직접 투자하자니 그건 나름대로 귀찮은 일이었다.
특히 해외 주식은 밤에 장이 개장되는 경우가 많은데 지난번 나스닥에 투자하기 위해서 하룻밤을 새우는 일 같은 것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하물며 다우나 나스닥 그리고 런던 주식시장은 매매할 적절할 시점을 잡는 것이 더 어렵더라고···.”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거기는 말 그대로 전 세계 투자 전문가들이 다 모이는 곳이잖아.”
가격변화를 예상해서 주식거래 타이밍을 잡는 것은 경험과 감각이 모두 필요한 일이었다.
나는 매매 경험도 부족했고 직접 해 보니 감각도 조금 모자란 것 같았다.
노력하고 시간을 투자하면 다른 사람 정도는 될 것 같기는 했다.
그렇지만 잘하는 사람이 바로 옆에 있는데 뭐하러 그런 고생을 하겠는가?
“리안 네가 그런 매매타이밍을 잡는데 류오린에서도 손에 꼽히는 실력자라며?”
“내가 잘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손에 꼽히는 실력자라고는 좀···.”
“뭘···.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손에 꼽힌다기보다는 다른 사람 만큼은 하지.”
“그래서 우리 둘이 힘을 합치자는 말이야. 내가 종목을 선택하고 리안 네가 직접 매매를 하는 거지.”
“지금 네가 지시하면 내가 너를 대신해서 매매하라는 말이야?”
리안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단순히 내 심부름을 하라는 말이 아니야.”
“그럼 뭔데?”
“우리가 정식으로 팀을 이뤄서 내가 위임받은 투자금에 대한 운용을 함께 하자는 말이지. 아까 말한 것처럼 나중에는 투자 종목도 같이 의논해서 정했으면 하지만 그건 당장은 네가 부담을 느낄 것 같아서 일단 처음에는 분업하자는 말이지.”
“그건···.”
리안이 내 제안에 조금 흔들리는 듯했다.
나는 흔들리는 리안의 마음에 쐐기를 박기 위해 조건을 하나 더 내걸었다.
“너도 내가 지난 반년 동안 받은 성과급은 알고 있지. 우리가 팀을 이루면 그 성과급도 당연히 절반씩 나눌 생각이야.”
리안의 표정이 바뀌었다.
지난 내가 류오린에서 받은 성과급은 꽤 큰 금액이었다.
거래할 때마다 손해를 보기는 했지만, 매번 거의 투자금 전액을 매매에 이용했기 때문에 류오린이 받은 매매수수료도 만만치 않은 금액이었다.
그 매매수수료 중 일부는 류오린과 처음 계약할 때의 조항에 따라 나에게 지급되고 있었다.
“팀으로 낸 실적도 반으로 나눈다는 말이야?”
리안은 성과급보다는 오히려 실적에 더 관심을 가지는 듯 보였다.
“반으로 나눌 필요조차 없지. 실적은 팀으로 평가받는 것인데 그중 반은 당연히 네 몫이지. 팀이잖아.”
“그럼 좋아. 그렇지 않아도 몇 주 동안 나도 네가 선택하는 투자 종목에 관심이 있었어. 팀을 이루면 네가 어디에 투자하고 무슨 이유로 그런 투자를 하는지 가장 먼저 들을 수 있는 거지?”
‘부잣집 도련님이라서 그런가? 돈보다는 다른 곳에 관심이 더 많네.’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럼 우리 팀을 이루는 거다?”
나는 다시 한번 확인했다.
“그래. 나도 좋아.”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리 말하지만 나는 리안 네가 지금 관리하는 고객들에는 관심이 없어. 거기서 나온 실적이나 수익은 리안 네가 여전히 관리해도 괜찮아. 우리가 팀을 이뤄서 하는 거래를 우선한다는 약속만 한다면 말이야.”
“잠시만···.”
리안이 내 손목을 잡았다.
“그런 조건이라면 네가 너무 손해 아니야? 나에게만 유리한 조건인 것 같은데?”
겉으로 보기에는 당연히 내가 손해를 보는 조건이었다.
투자하는데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것이 투자 종목과 시기를 정하는 일이었다.
내가 그 모든 것을 하고 리안은 단지 실제 매매만 하면서 실적과 그 보수를 반으로 나누는 셈이다.
물론 실제 이익을 리안과 반으로 나누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대여금 이천만 불 원금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이천만 불을 빼면 이익이 나면 나는 만큼 다 내 돈이나 마찬가지였다.
‘뭐, 정 수틀리면 에디 미첼이 빌린 이천만 불도 갚을 생각이 없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굳이 내가 투자해서 번 돈을 도이치뱅크에 갚을 이유가 뭐라는 말인가?
에디 미첼이 나에게 떠넘긴 손실은 에디 미첼 개인의 실적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올해 뉴욕 증시에 상장하기 전에 실적을 높이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에디 미첼이 나를 통해 실적을 조작해서 도이치뱅크가 상장 후에 얻는 이익에 비하면 이천만 불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하지 않겠다는 거야?”
“당연히 하지. 누가 이런 제안을 거절하겠어.”
리안이 두 손으로 내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