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016. 때로는 여유가 필요하다.
‘이제 직접 매매 하는 일에서 벗어난 것인가?’
다른 직원이었다면 단순히 성과급을 나눠준다는 말로 설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리안은 돈으로 넘어올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 돈으로 넘어올 사람에게 투자금을 맡길 수 없으므로 리안을 파트너로 선택한 것이다.
알아본 바로는 리안은 대대로 홍콩 갑부였던 집안의 막내아들이었다.
홍콩이 반환되기 전 다른 가족들이 캐나다에 이민하면서 현금성 자산은 대부분 가지고 떠났다. 그렇지만 부동산은 너무 가격이 내려가 팔지 못했다.
그렇게 홍콩에 남은 집안 부동산 대부분은 홍콩에 남은 리안의 소유가 되었다.
어떤 직원은 그렇게 남은 부동산이 수백만 달러라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몇천만 달러라는 사람도 있었다.
돈보다 자존심을 우선한다는 평가는 비슷했다.
그런 리안에게 매매를 맡기기 위해 어제부터 그를 조사하고 설득할 계획을 세웠다.
나에 대한 미안함, 자존심, 그리고 야심을 모두 이용하는 계획이었다.
이런 것을 생각하면 설득에 성공한 지금 기뻐해야 하지만 정작 나는 전혀 기쁘지 않았다.
리안의 말대로 이건 리안이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었다.
리안에게 유리한 조건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조사를 하고 아침부터 불러서 설득하는 말 그대로 쇼를 했다.
이런 행동을 한 것에 대한 자괴감이 몰려왔다.
내가 얻는 이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리안을 통해 매매하면 더 높은 수익률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사실이고 직접 매매 하는 것이 귀찮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렇지만 그것뿐이라면 리안에게 굳이 매매를 맡길 필요는 없었다.
매매타이밍을 잡는데 서툰 지금도 나름 만족할 만한 수익률을 얻고 있었다.
더구나 같은 수익률이라면 리안과 성과급을 나눠야 하므로 수익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그런데도 내가 리안에게 이런 제안을 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Fuckxxx CIA!’
어제 메일을 통해서 새로운 지시가 내려왔다.
필리핀 대통령의 탄핵 상황을 되도록 빨리 조사하라는 재촉이었다.
그것도 되도록 필리핀에 가서 조사하라는 지시였다.
일단 메일로 이런 식의 지시는 곤란하다는 항의를 해두었지만 들어줄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들어줄 리가 없었다.
CIA는 오랜 역사만큼 관료주의가 팽배한 정보기관이었다.
특히 내가 근무하는 동아시아는 상대적으로 CIA의 관심 대상에서 벗어나 있었고 그만큼 경직되어 있었다.
앞으로 이런 식의 갑작스러운 지시가 언제 내려올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투자로 인한 이익과 정보수집 중에 무엇이 우선인지는 말하나 마나였다.
나는 투자회사의 직원이기 이전에 CIA의 직원이었다.
어느 것이 우선이 돼야 하느냐는 분명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때려치우고 싶었다.
하지만 현장 요원에 가까워진 지금에 와서는 섣불리 내릴 수 없는 결론이었다.
요원끼리 CIA를 ‘회사’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진짜 회사는 아니었다.
죽어서야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대로 그만둘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내가 리안과 팀을 만든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개별임무에 우선하는 기본적인 지시는 최대한 현 상태를 유지하라는 지시였다.
현 상태는 당연히 류오린에 근무하는 것이고 그러자면 팀장인 왕 웬준의 눈에 벗어나서는 안 된다.
그런 점에서 리안과 파트너가 되는 것은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리안은 매매타이밍을 잡는데 뛰어났고 이번 터키 일로 나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성과에 대한 욕심도 있었다.
부유하게 자랐기 때문에 다른 팀원들보다 나를 속이거나 배신할 가능성이 적었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면서도···.
기분이 X 같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점점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라는 말이야···.’
처음 CIA를 지원했던 이유 같은 것은 기억에도 멀어진 느낌이었다.
한동안 내 제안에 기뻐하던 리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왕 웬준 팀장님이 우리가 마음대로 팀을 이루는 것을 허락할까?”
리안의 말대로였다.
그가 내 제안을 승낙한 이상 왕 웬준 팀장에게 허락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왕 웬준 팀장도 어쩔 수 없을걸. 너는 우리 팀에서 가장 왕 웬준 팀장에게 발언권이 큰 직원이 누구라고 생각해?”
나는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글쎄···.”
고개를 갸우뚱하던 리안이 입을 열었다.
“그게 우리라는 말이야?”
“지난 반년 동안만 계산하면 네가 우리 팀에서 수익률이 가장 높은 팀원이잖아, 아니야···?”
“그렇기는 하지만 나와 다른 직원들 수익률은 아주 큰 차이가 할 수는 없어.”
“왕 웬준 팀장이 이끄는 아시아팀은 말로는 아시아 지역 투자에 중점을 두는 팀이지. 하지만 실제로는 나나 리안 너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중국에 대한 직접투자를 주선하거나 상하이 증시에 투자하는 일을 하고 있잖아.”
내가 말했다.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왜?”
“다른 팀원들도 대부분이 작년에 40%에서 50% 이상의 수익률을 얻기는 했지. 하지만 이건 그들이 대단히 뛰어난 능력을 지녔기 때문이 아니잖아. 까놓고 작년 상하이 증시는 외국인만 투자가 가능한 B 클래스 주식도 50%에 가까운 상승률을 기록했어. 시장 수익률과 비슷한 수익률을 보이는 것을 누가 못해.”
물론 말처럼 시장 수익률로 비슷한 수익률을 올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중국처럼 급성장하는 증시에서는 종목 한두 개만 잘 선택하면 몹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리안에게는 말을 하지 않았지만, 거래 특성상 수익률이 나쁠 수밖에 없는 내가 이 팀에 소속된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였다.
거래할 때마다 손해만 보는 내가 있더라도 팀 전체 수익률이 높으므로 큰 부담이 없었다.
유럽이나 미국의 기술주를 거래해야 했던 류오린 규정에 따르면 해외투자팀에 소속되어야 했다.
내가 해외투자팀에 소속되는 것을 거부한 것도 한 가지 이유였다.
미국이나 유럽 증시에 투자하는 해외투자팀은 밤에 일하고 낮에 자야 하는데 생각만 해도 피곤했기 때문이었다.
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뭐 나는 나쁘지 않았어. 그 덕분에 우리 팀은 사실 얼마 전까지는 별다른 실적 부담이 없는 팀 중의 하나였잖아.”
터키 증시의 폭락으로 스트레스를 받던 리안이었다.
그가 국외팀에서 우리 팀으로 옮긴 이유가 바로 실적 부담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시절도 다 지나고 있다는 것은 너도 느끼고 있잖아. 리안 너도 내가 지난 연말에 왕 웬준 팀장에게 불려가서 실적에 대한 압박을 받은 것을 알고 있지. 그게 왜 그렇겠어. 왕 웬준 팀장도 아는 거지. 중국에서 꿀 빨던 시절이 끝나간다는 것을···.”
문제가 생긴 것은 지난 연말부터였다.
다른 해외 주가 하락에도 나 홀로 상승하던 중국 증시가 흔들리고 있었다.
“하긴 그렇겠네. 내가 들으니 왕 웬준 팀장이 아시아투자팀을 맡게 된 이유도 바로 팀장으로서 쉽게 실적을 쌓을 수 있다는 이유라고 들었어. 그가 본토 출신이어서 중국에 인맥이 있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바로 그런 인맥을 가진 왕 웬준 팀장에서 류오린에서 실적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라더군.”
리안이 말했다.
“그런 점에서 리안 너나 내가 함께 요구하면 왕 웬준 팀장은 거부할 수 없다니까. 리안 너는 중국 투자 비중이 절반 정도밖에 안 되면서도 다른 직원들보다 나은 실적을 올리는 직원이고 나도 뭐··· 최근에는 나름 왕 웬준 팀장에게는 말이 먹힐 실적이 있으니까.”
“어울리지도 않게 겸손한 척은···. 최근 에드릭 네 실적은 그냥 말이 먹힐 정도가 아니지. 그냥 종목 하나가 운 좋게 잡아서 올린 것도 아니고 계속 증시를 바꿔가면서 올린 실적이잖아. 이 정도면 운이 아니라 실력이야.”
리안이 말했다.
“어쨌든 우리가 가서 말하면 왕 웬준 팀장도 거부할 수 없을 거야.”
내가 말하자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네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럼 지금 바로 가자.”
“지금 바로?”
리안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래.”
“조금 빠르지 않을까?”
리안은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
“오늘 처리해야 할 일이 많아. 투자 방향에 대해서 할 말도 있고 내가 따로 할 일도 있고 말이야.”
잠시 내 제안을 생각하던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좋다면 생각하면 그렇게 하자. 어차피 네 제안으로 내가 손해 볼 것도 없는데···.”
리안이 받아들이자 우리는 왕 웬준 팀장 사무실로 향했다.
노크하고 사무실에 들어갔다.
자기 자리에 앉아서 무언가를 하고 있던 왕 웬준 팀장이 고개를 들어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사무실에 함께 찾아온 사람이 나와 리안이라는 사실에 놀란 표정이었다.
우리 둘은 최근 팀 내에서 가장 중요한 직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리안은 나와 함께 팀에 가장 최근에 합류한 팀원이었다.
그런데도 팀에서 중국 투자 비중이 작으면서도 다른 직원들과 비슷하거나 높은 수익률을 가진 팀원이었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매수수료 수입에는 도움이 되지만 수익률로는 팀의 실적을 깎아 먹는 팀원이었다.
하지만 최근 몇 주 사이 잠깐 사이에 상황이 변했다.
회사에 높은 매매수익률을 가져다주는 것과 동시에 높은 수익률도 가져다 팀원이 된 것이다.
왕 웬준 팀장이 실적이 가장 필요할 때 그 실적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직원인 것이다.
“자네 둘이 함께 내 사무실을 찾다니···. 무슨 일인가?”
왕 웬준 팀장이 물었다.
나는 왕 웬준 팀장에게 조금 전 우리가 한 결정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자네 둘이 에드릭 자네가 혼자 관리하던 투자금을 같이 관리하기로 했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내가 대답했다.
왕 웬준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왕 웬준은 내가 관리하는 자금이 도이치뱅크의 자금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도이치뱅크의 직원이 아닌 리안을 자금 운용에 끼워 넣었다.
그로서는 내 결정이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에드릭, 자네 투자자도 허락한 일인가?”
“현재 투자자께서는 제게 모든 거래를 일임하신 상태입니다.”
내가 대답했다.
“자네가 받는 보너스가 반으로 줄어든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
“예. 알고 있습니다.”
내 대답에 왕 웬준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젓더니 입을 열었다.
“좋네. 자네가 전권을 가진 투자금이니···. 투자금 운용을 어떻게 하느냐는 자네가 결정할 일이지.”
내가 생각했던 대로 왕 웬준이 허락했다.
“그리고 추가로 요청이 있습니다.”
“뭔가?”
“오늘 오후부터 며칠간 필리핀으로 출장을 갔으면 합니다.”
왕 웬준 팀장이 받아들이자마자 나는 필리핀 출장을 요청했다.
“필리핀으로 또 출장을 간다고?”
왕 웬준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에드릭···.”
필리핀 출장 요청에 반응한 것은 리안도 마찬가지였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가서 해줄게.”
나는 일단 손을 들어 리안을 진정시키고 왕 웬준 팀장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예. 이제 직접적인 매매는 여기 리안이 맡고 저는 직접 발로 뛰며 조사하려고 합니다.”
“알았네.”
왕 웬준 팀장은 마지못한 태도로 허락했다.
투자회사에서 실적이 가장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투자 수익률이 어느 정도일 때 이야기였다.
내 최근 몇 주간 수익률은 왕 웬준이 내 행동에 불만을 느끼더라도 불만을 잠재울 만큼 높았다.
직접 가서 조사해서 투자해야겠다는데 뭐라고 할 것인가?
상사를 설득하는 가장 좋은 방법?
바로 그 상사에게 갑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