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18화 (19/270)

서몽

# 018. 아는 것은 힘이다.

말은 태연하게 하고 있지만 나도 조금 겁이 났다.

이런 대치는 필리핀의 마닐라 중심가를 걷다가 소매치기를 당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처음 가방을 들고 달아나려던 칼을 든 소매치기는 제압했다.

하지만, 어느 사이에 나타난 두 명의 소매치기 일당이 칼을 들고 나에게 덤벼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치 혼란으로 마닐라 치안이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대로에 인접한 골목에서 소매치기 일당이 대놓고 칼을 들고 위협할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심지어 지금은 대낮이었다.

그나마 총을 든 소매치기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제압한 사람을 해치겠다는 말이야?”

제압된 소매치기에게서 겁에 질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조금 전까지 기가 소리를 지르던 모습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Tactical Pen이 목에 조금씩 박히자 그제야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 같았다.

“칼을 든 세 명을 상대로 펜 하나 가지고 싸우다 보면 상대에게 상처를 입힐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미국에서 목에 칼에 찔린 사람을 봤는데 말이야. 설사 살아나도 산 것이 아니더라고···. 말도 못 하고 음식도 먹지 못해서 튜브를 연결해서 음식을 먹는 데 저렇게 살아야 하는 생각이 들더라니까···. 나는 깔끔하게 처리해 줄 테니 너는 너무 큰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는 거야?”

제압된 소매치기가 말했다.

확연히 겁에 질린 음성이었다.

“네 일당을 뒤로 물려. 아니면 나도 어쩔 수 없이 손에 힘을 줄 수밖에 없으니까.”

내가 말했다.

“모두 뒤로 물러나!”

제압된 소매치기가 말했다.

그의 지시에 칼을 들고 위협하던 일당들이 한참 뒤로 물러섰다.

“그럼 다시는 보지 말자고···.”

나는 여전히 소매치기의 제압한 상태로 목에서 펜을 떼어냈다.

“이 새끼! 다음에 보면···.”

이제 살아났다고 생각했는지 소매치기가 소리를 치며 고개를 돌리려고 했다.

나는 몸을 구부려 오른손에 쥐고 있던 Tactical Pen을 잡고 있던 소매치기의 오른쪽 무릎에 내리꽂았다.

“악!”

“형님!”

소리치는 일당들을 뒤로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골목을 빠져나왔다.

골목을 빠져나오자마자 나는 택시를 잡아타고 호텔 이름을 불렀다.

택시에서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여전히 오른손에는 Tactical Pen이 꼭 쥐여 있었다.

“젠장! 별일을 다 당하네.”

그렇지 않아도 위장 임무를 하던 중에 지시를 받고 작전까지 하는 상황이었다.

그 작전 중에 이런 일까지 겪으니 내가 현장 요원이라도 된 기분이었다.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도착하자마자 호텔을 직원을 불렀다.

내 요청에 30 중반의 여성 직원이 나를 찾아왔다.

사라 펠리시아노라는 이름표가 가슴에 붙어있었다.

“고객 대응팀의 팀장입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북유럽 엑센트가 느껴지는 영어로 물었다.

나는 그녀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시내에서 소매치기 일당과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중 하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도망치기는 했는데···. 그 상처를 입은 자가 소매치기 일당의 두목인 것으로 보입니다. 자칫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내 설명에 호텔 직원은 조금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미국 대사관에 연락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대사관이요?”

나는 대사관이라는 말에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대사관 직원을 불렀다가는 자칫 내 정체가 발각이 날 수도 있었다.

미국 관리들이 나에 대해 아는 사람이 되도록 적을수록 좋았다.

그게 아니더라도 웃기지 않은가?

소매치기 때문에 대사관에 도움을 청하니 정보기관의 요원이라니···.

본부에서 알게 되면 CIA에서 내 경력은 끝난다고 봐야 했다.

“말씀하신 대로라면 소매치기 일당이 지갑을 소매치기하려다가 걸리자 바로 칼을 뽑아 들었다고요?”

“맞습니다.”

“아시겠지만 필리핀은 총기 소지가 허용된 국가입니다. 물론 미국보다 총기를 구매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만 말씀하신 대로 흉포한 놈들이라면···. 고객님의 생각처럼 무슨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곳 필리핀 사람들은 은근히 자존심이 강합니다.”

정보분석 요원이라는 하지만 나도 초반에는 특수훈련은 받았다.

칼 정도라면 맞서거나 이번처럼 기회를 봐서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총이라면 문제가 달랐다.

수십 년간 현장 경험이 있는 전문가도 아이가 쏜 총에도 죽을 수가 있었다.

눈먼 총에 맞을 수도 있었다.

“대사관에 연락하는 것은 좀 그렇네요. 대사관에 연락하면 필리핀을 떠나라고 권할 텐데···.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닙니다. 필리핀에 며칠 더 머물면서 할 일이 있습니다.”

내가 호텔 직원을 보며 말했다.

호텔 직원은 잠시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호텔 직원이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저도 필리핀, 아니 적어도 마닐라를 떠나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호텔에서는 안전을 보장할 수 있습니다만 외출할 때는 어떤 일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자들이 저를 기다렸다가 보복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가능성은 작습니다. 그렇지만 말씀하신 것처럼 일당의 두목으로 보이는 자를 다치게 했다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택시를 타고 오셨다니 이 호텔에서 묵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질 수도 있고요. 이곳 마닐라의 택시기사분들 중에는 조금 질이 나쁜 분들이 있습니다.”

진심이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떠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면요?”

“경찰을 부르는 것은 원하지 않으시는 것이죠?”

“예.”

해외 작전 중에 가장 피해야 할 일이 바로 경찰과의 접촉이었다.

경찰서에 기록이 남는 것은 두고두고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그럼 며칠간 경호원을 고용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보복 가능성은 작지만···. 혹시 모를 일을 예방하기에는 좋은 방법입니다.”

“경호원 한 명 고용한다고 해서 그런 자들을 막을 수 있을까요?”

경호원 한 명으로 막을 수 있는 자들이라면 나 혼자서도 막을 수 있었다.

경호원이 있다고 총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호텔과 거래가 있는 경호원 중에 전직 경찰 출신인 분이 있습니다. 조금 비싸지만, 아직 경찰에 인맥도 있어서 소매치기 일당들이 뜨내기가 아니라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경찰 출신 경호원을 고용해 만약의 사태를 막으라는 이야기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 경호원에게 연락해 주십시오.”

필리핀에서 조사할 것이 남은 나는 사라 펠리시아노라는 호텔 직원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한 시간 정도 기다리시면 객실로 올려보내겠습니다.”

직원이 나간 후 호텔 방에서 경호원을 기다리는 동안 홍콩에 있는 리안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내가 물었다.

-그냥 조사 잘 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탄핵이 정말로 되면 주가에 큰 영향을 줄 재료잖아.

“그렇기는 하지. 조사는 어느 정도 끝났어.”

신문과 방송 그리고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대화를 들었다.

-그래 필리핀의 대통령인 에스트라다 탄핵을 당할 것 같아?

리안이 물었다.

“아직 뭐 그렇지···. 이제 시작이잖아. 연말부터 필리핀 상원에서는 에스트라다에 탄핵이 시작되었으니 이제 보름 정도잖아.”

가장 최근에 대통령 탄핵이 진행되었던 나라는 바로 미국이었다.

이른바 르윈스키 스캔들로 시작된 클린턴의 특검 조사는 몇 년 동안 진행되었다.

필리핀의 경우는 결론이 나는데 그 정도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겠지만 법적인 절차만 보면 보름 안에 결정이 날 문제는 아니었다.

-탄핵 가능성은 어때? 대부분의 미국이나 유럽 언론들은 에스트라다 탄핵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을 텐데···.

“홍콩 언론에도 나왔겠지만 일단 에스트라다가 부정을 저지른 것은 확실한 것 같아. 에스트라다 비밀계좌가 여럿 발견되었고 그중 하나의 계좌에서 무려 33억 페소, 달러로는 6천만 불이 있는 것이 밝혀졌어. 아무리 에스트라다가 필리핀의 국민배우였다고 해도 이 정도 액수의 비밀계좌는 말이 안 되는 일이지.”

배우로서 그가 벌어들인 수입일 가능성도 작지만 설사 배우일 때 번 돈이라고 해도 비밀계좌를 통해 관리한다는 것은 불법이었다.

하지만 이런 의심스러운 거액의 계좌가 발견된 사실이 탄핵의 결정적인 증거는 될 수 없었다.

적어도 이곳 필리핀에서는 그랬다.

-필리핀에서 그 정도 혐의만으로 탄핵이 되겠어?

리안이 말했다.

그의 말대로였다.

에스트라다는 2년 전 대통령 출마자 중에서 압도적인 표 차로 당선되었다.

그를 지지한 사람은 투표에 참여한 필리핀 유권자 중에서 30%가 넘었다.

차점자가 겨우 10%대의 득표율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압도적인 표 차였다.

필리핀의 국민배우로서 인기나 오랜 시장으로서의 경력이 이런 인기의 바탕이었다.

더구나 이 계좌의 돈이 정말 에스트라다의 것이 확실하고 그 자금을 누가 입금했는지 밝히려면 탄핵이 진행되고 있는 상원의 허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상원에는 친정부 성향의 에스트라다를 지지하는 의원들이 상당수였다.

더구나 계좌에 대한 공개는 설사 에스트라다를 반대하는 의원들도 꺼리는 일이었다.

이곳 필리핀의 유력 정치인 중에서 저런 계좌를 가지지 않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외 언론의 생각이었다.

“네 말대로 아마 대부분의 이곳 정치인들이 계좌 명세가 공개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 분위기야. 상원에서 근소한 표 차로 계좌에 대한 조사가 부결될 것 같아.”

내가 대답했다.

-뭐 그럼 끝났네. 그게 가장 결정적인 증거인데···. 탄핵이 계속 진행되더라도 헛짓이지. 상황이 그러면 너도 필리핀에서 할 일은 다 끝난 것 아니야?

“아직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 그것만 더 조사하고 돌아가려고···.”

-바로 돌아오는 것 아니야? 다음 주 투자에 관해서 물어볼 것이 있는데?

“다음 주 초 정도면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일이 남았다는데 어쩔 수 없지. 일단 그렇게 알고 있을게.

“그럼 자세한 이야기는 돌아가서 이야기하자.”

나는 전화를 끊었다.

이미 리안에게 다음 주에 예정된 계좌에 대한 조사에 대한 상원 투표가 부결되면 에스트라다에 대한 탄핵은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법적인 절차만 따지면 그 후에도 한동안 탄핵이 진행되겠지만 형식적인 행위일 뿐이었다.

지금 필리핀 분위기로 봐서는 탄핵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이제 이런 사실을 정리해서 보고서를 써서 저장하고 홍콩으로 돌아가면 간단했다.

심지어 소매치기 일당을 만나고 호텔 직원의 경고를 받은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경호원을 고용하면서까지 필리핀에 남으려고 하는 것은 이게 끝이 아니라는 예감 때문이었다.

아니 소매치기 일당을 만나고 더욱 일이 끝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더 확실해졌다.

소매치기 일당을 만난 일이 내가 필리핀에 남는 데 결정적인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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