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020. 성공하기 위해서는 옳은 일을 해야 한다.
리코는 내 말에 눈에 띄게 당황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그런 말을 하는 이유도 모르겠고요.”
“내가 소매치기를 당한 곳은 관공서가 밀집된 중심가입니다. 당시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호텔로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조금 이상하더군요. 거기 지나다니는 사람 중에서 상당수는 공무원일 텐데···. 거기서 경찰에서도 파악하고 있다는 소매치기 일당이 작업을 하고 칼을 뽑아 든다? 경찰의 허락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 아닙니까?”
“그게 무슨···!”
“보통 때라면 관공서가 밀집된 곳에서 소매치기하려면 경찰의 묵인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죠. 하지만 저는 앙겔로 패거리에게 제가 당한 일은 단순히 경찰의 허락을 받은 정도가 아니라 지시를 받고 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리코 씨가 직접 저를 찾아와 앙겔로의 치료비를 요구하신 것 아닙니까?”
리코가 말한 것처럼 앙겔로는 소매치기 조직의 핵심인 기계, 즉 기술자였다.
아무리 필리핀에 소매치기가 많다고 하지만 그 대부분은 사람들의 방심을 이용해서 가방을 낚아채는 수준이었다.
앙겔로 같은 전문적인 소매치기는 경찰의 감시망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앙겔로는 관공서가 밀집된 지역에서 대놓고 소매치기를 하고 걸리자마자 바로 칼을 꺼내 들었다.
경찰이 관리할 수 없을 정도의 상황이거나 소매치기들의 행동 뒤에 공권력 그중에서도 경찰이 개입되어 있다는 의미였다.
“상상력이 풍부하시네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겠네요. 제가 온 것은 어디까지나 고객의 안전을 위해서···”
“500달러가 많으면 많은 돈이지만 소매치기 일당의 불만을 없애기에는 큰돈이 아니죠. 앙겔로 일당이 만약 저를 찾아왔다면 더 많은 돈을 뜯어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말한 것처럼 오성급 호텔에서 이런 방에 묵는 사람에게는 한 끼 식사비에 불과한 돈이니까요.”
“하하···.’
내 말에 리코가 웃으며 말했다.
“투자회사 일한다더니 소설을 쓰는 것이 더 적성에 맞겠네요. 도대체 경찰이 뭐하러 소매치기 따위에게 그런 지시를 내리겠습니까?”
“혼란이죠. 전쟁 시에는 적의 후방이나 보급창고에 사람을 보내서 불을 지르는 일이 있었죠. 치사하지만 효과적인 일이죠.”
당연히 적들이 노리는 것은 현 대통령의 실질적인 권력 기반인 공무원들이었다.
지금 마닐라 시내에는 에스트라다에 대한 반대 시위가 점점 확산하고 있었다.
아무리 정국이 혼란스럽다고 해도 공무원들에게 그건 남의 일이었다.
하지만 공무원들 본인이 직접 소매치기를 당하면 이대로 혼란이 진행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 화살은 이 모든 일의 근원인 에스트라다 대통령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필리핀은 겨우 10여 년 전 이른바 피플 파워라고 불리는 시위로 마르코스 정권을 무너트린 경험이 있는 국가였다.
그때의 주역 중 상당수가 여전히 시민단체나 정치권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물론 외신에서는 이런 시위를 통한 정권 붕괴 가능성도 작게 보고 있었다.
마르코스와는 다르게 에스트라다는 2년 전 비교적 공정한 선거를 통해 당선되어 정통성이 확고했다.
더구나 30%가 넘는 확고한 지지세력이 있다는 이유였다.
그렇지만 정작 내가 마닐라에서 며칠 머물면서 느낀 생각은 조금 달랐다.
외신이 보는 것처럼 그렇게 안심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필리핀에 오기 전에도 나는 에스트라다를 탄핵하는 과정에 무언가 음모가 숨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에스트라다는 필리핀의 국민배우였다.
정치인으로 그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배우로서 그를 좋아하는 필리핀인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지난 2년 동안에 대한 에스트라다의 혼외자들이 하나둘씩 밝혀지면서 상당수 국민이 그에게 등을 돌렸다.
가톨릭교도가 절대다수인 필리핀에서는 치명적인 스캔들이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현재 밝혀진 불륜 상대만 10명에 가까웠고 혼외자만 8명이었다.
물론 에스트라다가 부인에게만 충실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 필리핀인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혼외자가 늘고 그들의 신상이 발겨지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더구나 너무 수도 많았다.
배우로서 무려 40년 동안 숨겨왔던 에스트라다의 난잡한 사생활이 단 2년 만에 다 공개된 것이다.
여기에 누군가에게서 에스트라다가 비밀계좌를 가지고 있고 그 계좌 중 하나에는 무려 33억 페소가 들어있다는 제보가 나왔다.
내부자거나 고위직이 아니면 알아낼 수 없는 정보였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에스트라다를 끌어내리기 위한 음모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음모를 꾸민 자들이었다.
탄핵이 기각된다고 거기에서 포기하고 끝날 리가 없었다.
“경찰 수뇌부가 에스트라다에게서 등을 돌린 것입니까?”
내 말에 리코가 화를 내며 등을 돌렸다.
“아까부터 무슨 헛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요.”
리코가 방을 나간 후 나는 짐을 정리했다.
알아볼 것은 다 알아봤다.
더는 필리핀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아니 혹시라도 리코가 돌아가서 경찰 쪽에 내가 한 말이라도 전하면 위험에 빠질 수도 있었다.
나는 체크아웃하기 전 호텔에 있는 ATM에서 오천 달러를 찾아 봉투에 넣었다.
사라 펠리시아노를 만나 그녀에게 봉투를 건네주었다.
“리코 씨에게 이 봉투를 전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나와 일을 할 생각이 있으면 아까 전해 준 명함으로 연락하라고도 이야기해주십시오.”
“예.”
나는 곧장 호텔에서 불러준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했다.
‘언제 연락할까? 이틀, 사흘, 일주일?’
필리핀에 경찰과 연줄이 있는 쓸만한 정보원을 구하는데 오천 달러는 큰 금액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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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으로 돌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텅 빈 아파트였다.
필리핀에 주말 내내 있을 예정이었기 때문에 아무런 약속도 없었다.
홍콩에 오고 주말 내내 이렇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그냥 집에서 쉬기로 했다.
주말 내내 식사 때만 밖에 나가서 해결하면서 그렇게 보냈다.
리코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었다.
월요일.
정상적으로 출근했다.
리안이 반갑게 나를 맞았다.
“한다는 일은 잘됐어?”
“뭐 대충···. 지금 연락을 기다리는 중이야.”
내 대답에 리안이 조금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대답이 그래? 무슨 연락인데?”
대답이 성의가 없다고 생각한 듯했다.
“그건 연락이 오면 이야기하기로 하고···.”
나는 손을 들어 리안의 말을 잘랐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잖아. 회의실로 가서 이번 주 투자에 관해서나 이야기하자.”
“···. 알았어.”
우리는 회사에 있는 작은 회의실로 향했다.
“내 투자 명세는 봤지?”
“봤어. 정말 놀랍더군···.”
리안이 대단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30%가 넘는 줄은 알았지만···. 본격적으로 네가 종목을 선택하기 시작한 것은 구백만 달러 정도 아니야?”
리안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러면 수익률이 50% 넘는 것 아니야?”
“그 정도 되겠지. 지난주에 투자한 나스닥과 태국증시 상승세로 보면 조금 더 오를 테고···.”
내가 대답했다.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대답하는 것 아니야? 혹시 다른 고객들 돈을 받을 생각은 없어? 그 정도 수익률이라면 다들 너에게 돈을 싸 들고 올 텐데···. 내가 소개해줄까?”
“아니 별로···. 아직은 다른 투자금을 받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해. 펀드도 아니고 단순 투자금이라면 매번 투자할 때마다 설득해야 하잖아.”
“하긴 뭐···. 투자자가 어떤 놈들인데···. 수익률이 높을 때는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조금만 수익률이 안 높으면 이런저런 간섭을 해오지.”
이 정도면 터키에 투자할 때 고객이 누구였는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얼마나 괴롭혔으면···.
굉장히 낙천적으로 보이는 리안이 지금까지 저렇게 치를 떠는 것인지?
“지금처럼 내가 마음대로 투자할 수 있는 돈이 아닌 이상 고객을 받을 생각은 없어.”
지금 내가 관리하는 투자금은 법률적으로는 일종의 일임매매였다.
일임매매란 증권회사나 증권회사 직원이 투자자로부터 주식이나 채권 같은 금융투자를 할 때 매번 투자자의 허락을 받지 않고 위탁재산을 투자하는 거래를 의미한다.
당연히 기본적으로는 불법이다.
불법이라도 금융상품 거래는 상대방이 있는 거래이기 때문에 거래 자체를 되돌릴 수는 없다.
이런 일임매매로 이익이 났을 때는 당연히 그 이익은 고객이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금융거래에서 확실히 이익이 나는 경우란 거의 불가능하다.
거래로 손해가 났을 경우 투자자가 허락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면 회사는 그 임의매매에 대한 손해에 대한 배상을 해줘야 한다.
물론 상대가 임의매매를 허락했다는 것을 증권회사나 직원이 증명하면 손해 배상을 해줄 필요가 없다.
내 경우는 내 투자금을 나에게 맡긴 회사의 주인이 바로 나였다.
그 때문에 말이 일임매매지 사실상 내 회사의 투자금을 내가 투자하는 셈이었다.
그렇지만 내가 추가로 고객을 받는다면 일임매매가 아닌 이상 매번 거래할 때마다 허락을 받아야 한다.
귀찮을 뿐 아니라 투자 정보가 새어나갈 수 있었다.
물론 일임매매의 허락을 받으면 된다지만 거액의 돈을 맡기는 투자자들이 이런 일임매매의 속성을 모를 리가 없었다.
사실상 일임매매로 돈을 맡긴다고 해도 일임매매에 대한 증거를 남길 리가 없었다.
일임매매의 증거가 없는 이상 법적으로는 내가 그들의 돈을 투자해서 수백억을 벌어줬다고 해도 한 번의 투자실패로 몇십억을 손해 보면 그 몇십억을 고객에게 배상해줘야 한다.
설사 일임매매에 대한 증거를 받는다고 해도 이곳은 그들의 앞마당인 홍콩이었다.
아무리 증거가 확실해도 내가 법정 투쟁으로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정말 투자금은 절대 안 받아? 내 투자금도?”
리안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안 받아.”
나는 단번에 리안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런데 네 재산 대부분 부동산에 묶여 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렇기는 하지. 지금은 너무 가격이 내려가서 팔 수도 없어.”
지금 홍콩의 부동산 가격은 97년 홍콩 반환 이전의 절반에서 삼 분의 일 수준이었다.
“잘 가지고 있어. 이제 몇 년 안에 중국에서 사람들이 몰려오면 지금보다 몇 배는 오를 테니까.”
홍콩에서 재테크에 관심이 있는 부자들 대부분은 몇 년 안에 홍콩 부동산 가격이 폭등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중국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어느 정도 중국 경제가 자리가 잡히면 중국 본토인 중 상당수가 본토보다 조금은 자유로운 홍콩에 집을 살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나도 계속 가지고는 있는데···. 지금도 사 년을 기다렸는데 앞으로 최소 사오 년은 더 기다려야 하니···.”
리안이 답답하다는 듯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런 리안의 모습을 보며 나도 고개를 저었다.
리안이 고개를 젓는 이유와는 다른 이유였다.
리안은 홍콩 시내에만 여러 채의 집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리안이 사는 집은 홍콩 중앙에 있는 더 피크(The Peak)에 있었다.
절반 이상 내려갔다고는 하지만 지금 사는 곳은 가격만 수백만 달러인 저택이었다.
가진 자의 투정으로밖에 생각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