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스파이, 슈퍼리치 되다-21화 (22/270)

서몽

# 021. 학교 밖으로 비밀을 가지고 나가지 마라.

나는 리안을 보며 말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 같아.”

“그건 또 무슨 말이야?”

“여기 홍콩 사람들 대부분은 열 평도 안되는 집에서 살아가잖아. 그런데 더 피크에 저택이 있고 시내에 빌딩을 몇 채나 가지고 있는 사람의 배부른 투정이라니···.”

내 말에 리안이 말했다.

“부동산을 많이 가지면 많이 가질수록 부동산에 대한 걱정도 큰 법이야. 너도 이제 투자금 점점 늘어나면 나와 비슷한 걱정을 하게 될걸.”

“그럴지도 모르지. 어쨌든 네 집은 네가 알아서 하고··· 다시 일 이야기를 하자.”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너도 봤으니 알겠지만, 지난주에 투자금 중에서 육백만 불은 나스닥에 나머지 칠백오십만 불은 태국에 투자해 놓은 상태야.”

“알아.”

“그중에서 나스닥은 그냥 놔두고 수요일에 태국 쪽은 정리해줘.”

“나스닥은 안 팔고? 한주도 안돼서 5% 이상 올랐던데?”

“조금 더 놔두려고···. 지금 미국의 월 가나 영국 런던의 더 시티에서는 월말 연준 회의에서 추가 금리 인하가 된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더라고. 한 주 정도는 더 오를 것 같아.”

“그렇게 할게. 태국증시를 정리한 돈은 어디에 투자할 건데?”

리안이 물었다.

“필리핀 사정을 봐가면서 상황이 내가 생각한 것처럼 흘러가면 거기에 투자할 생각이야.”

리안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필리핀? 필리핀에 간다고 했을 때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너무 위험한 것 아니야?”

“그냥 투자하겠다는 것은 아니야. 말 그대로 상황이 내 생각대로 돌아가면 투자하겠다는 이야기야.”

“지난번 통화했을 때는 탄핵이 기각될 것 같다면? 나도 좀 알아보니 탄핵이 기각된다고 해도 나라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그렇게 나아질 것 같지 않던데?”

필리핀이 정상적인 국가라면 탄핵이 기각되면 증시가 오르는 것이 정상이었다.

투자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불확실성이었다.

탄핵 기각은 그 불확실성이 제거되는 계기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대통령이 수천만 불을 횡령하는 나라가 정상적인 나라는 아니었다.

“가보니 개판이기는 하더군. 대놓고 소매치기가 떼를 지어 돌아다니고 말이야.”

내 말에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하는 말이야. 오히려 탄핵이 된다면 모르겠지만···.”

나는 리안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탄핵이 기각된다고 에스트라다가 대통령직을 유지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지.”

리안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무슨 말이야?”

“확실한 일이 아니라서 지금 말하기는 어렵고···. 만약 내 생각과 다르게 흘러가면 그냥 뭐···.”

“뭔 말인지···.”

리안이 다시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좀 답답하네.”

“나도 아직 확신할 수는 없어서 그래. 그냥 감에 가까운 생각이라서···.”

“뭐 같이 일하다 보면 좀 바뀌겠지.”

“정 안되면 홍콩증시에 투자할 생각이야. 최근 홍콩증시가 별로 안 좋았잖아. 오를 때가 된 것 같아. 큰 이익은 없겠지만 적어도 손해는 보지 않을 것 같아.”

“홍콩이 오를 때가 됐다는 생각은 나도 비슷해. 그럼 내일 하고 모레 태국증시 투자금 정리하고 기다렸다가 필리핀에 대해 투자를 하거나 홍콩에 투자한다는 말이지.”

리안의 말에 나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투자금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그럼 이제 이야기는 끝난 건가?”

리안이 말했다.

“혹시 원유 선물에 대해서 좀 알아?”

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원유 선물? 무슨 대박 정보라도 있어?”

순간 리안의 눈이 반짝였다.

원유 선물은 기회만 잘 잡으면 대박을 낼 수 있는 거래였다.

“투자금으로 원유 선물에 투자하는 것은 때는 아닌 것 같기는 한데···. 리안 네가 원유 선물에 대해서 잘 알면 해 볼 만한 투자가 있거든···.”

“무슨 정보인데?”

“빈에서 수요일에 OPEC 석유장관 회의가 열릴 예정이라는 소식을 알고 있어?”

“들은 것 같아? 그런데 별다른 내용 없는 것 아니야?”

“그 회의에서 감산을 논의한다는 이야기가 있어.”

“원유 가격 꽤 올랐잖아.”

아시아 경제위기로 10달러까지 내려갔던 원유 가격은 텍사스 선물 기준으로 27달러까지 올라간 상태였다.

OPEC을 주도하는 중동 원유 가격은 25달러 선이었다.

가격이 오른 상황에서 감산이라는 것은 조금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였다.

보통 생산량 감산은 가격이 내려갈 때 하는 결정이었다.

“요즘 분위기가 안 좋잖아. 기술주 붕괴로 세계 경기도 최악이고 이제 봄이고···. 가격이 내려갈 것 같으니 미리 못을 박는 거지.”

이른바 선수를 쳐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는 이야기였다.

“네 말대로 경기도 안 좋은데 OPEC이 감산한다면 미국이 가만있겠어?”

“과연 그럴까? 이번에 취임하는 대통령이 누군지 잊은 거야.”

“부시?”

“부시가 석유업계 출신이잖아. 측근 중에도 그쪽 인물들이 많고···. 아마 선거자금도 그쪽에서 많이 조달했을걸···. 미국은 아무리 대통령이나 의원이라고 해도 선거자금을 주는 지지자를 무시할 수가 없어.”

“그래서 미국 정부도 어쩔 수 없을 거다?”

“내 생각은 그래.”

내 말에 리안이 잠시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눈을 뜬 리안이 입을 열었다.

“좀 근거가 부족하지만 아주 말이 안 되는 소리는 아니네. 투자라는 것이 확실한 것은 없지. 예언자도 아니고···.”

“그렇기는 하지. 어때 할 수 있겠어?”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원유 선물이라면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야. 회사를 통해서 하면 될 거야. 그런데 관리하는 투자금이 아니면 무슨 돈으로 투자하려고?”

“내가 회사에서 받은 보너스 대부분이 계좌에 남아 있거든 그중 일부를 투자해보려고···. 십만 불 정도?”

“뭐 그 정도라면 큰 부담이 없지. 레버리지는 얼마나 할 건데?”

“10배 정도는 괜찮나?”

“그 정도면 뭐···. 증거금은 따로 필요한 것 알지.”

리안이 말했다.

나는 그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경험이 없다고 선물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고 생각해? 네 옆에서만 반년 넘게 근무한 사람이야.”

성과급으로 원유 선물에 투자하는 것은 나로서는 소소한 일탈이었다.

17일 수요일 에스트라다 필리핀 대통령에 대한 탄핵은 기각되었고 필리핀은 대규모 군중 시위로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18일 필리핀에서 연락이 왔다.

리코였다.

그리고 그날 OPEC의 감산 조치로 시카고상품거래소(CME)에서 텍사스 원유 선물 가격은 10% 이상 폭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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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아침에 출근하던 도중에 필리핀에서 기다렸던 전화가 걸려왔다.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됩니까?”

필리핀에서 내가 만났던 전직 형사 리코였다.

내 생각보다 훨씬 늦은 연락이었다.

“돈을 돌려보내셨더군요.”

화요일 리코는 내가 전해준 오천 불을 내 계좌로 입금했었다.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이었다.

“그때는 함께 일을 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마음을 바뀐 이유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나중에 필리핀을 갔을 때 만나서 물어보든가 하면 되는 일이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내 추측이 맞느냐 하는 것이었다.

“마음을 바꾸셨다면 이제 그때 제 질문에 대답하실 수 있으시겠네요. 제 생각이 맞습니까?”

지난주 리코를 만났을 때 나는 그에게 앙겔로 일당의 행동이 경찰의 지시였는지를 물었었다.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이 있기는 하더군요.”

“어느 정도 선에서 나온 말인지는 모르시고요?”

관공서가 밀집된 거리에서의 소매치기는 중앙 공무원을 적으로 돌릴 수 있는 행동이었다.

필리핀 같은 사회에서 공무원의 힘은 막강했다.

앙겔로가 바보가 아닌 이상 중앙 공무원들을 대상으로 소매치기하는 일의 위험성을 모를 리 없었다.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지시를 내린 경찰 윗선을 확인하지 않을 리 없었다.

필리핀은 사형제도는 없었다.

하지만 대신 경찰에게 총을 맞을 수는 있었다.

“꽤 높은 윗선인 것 같습니다.”

구체적인 계급이나 직책이 없다는 것은 경찰 수뇌부에서 내려온 지시라는 의미였다.

저 정도 말한다는 것은 리코 본인도 따로 알아봤다는 의미였다.

“그럼 성당에 모인 사람들에 대한 통제권을 상실했다는 말인데···. 혹시 다른 정보는 없습니까?”

나에게 전화를 했을 때는 리코도 따로 정보를 알아봤을 것이다.

거래를 거절했다가 연락하는 상황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전화할 사람이었다면 내가 처음부터 제안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쪽도 넘어갔다는 말이 있습니다.”

경찰 외에 다른 쪽이라면 군밖에 없었다.

“오늘 보니 기사에서 본 내용과는 다르군요. 하긴 뭐 지금 상황에서 ···.”

오늘 군 참모총장인 안젤로 레예스는 공개적으로 에스트라다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선언했다.

리코의 정보대로라면 말과는 달리 안젤로 레예스가 말을 갈아탔다는 의미였다.

“알겠습니다. 약속했던 보수는 보내 드리겠습니다. 아··· 그리고 혹시 돈이 있으면 라존(Razon) 가문 회사 주식을 사두면 아마 꽤 오를 겁니다. 어느 선에서 누가 어떤 일을 벌이든 그 중심에 있는 것은 결국 아로요 부통령일 테니까요. 그리고 라존 가문은 아로요 가문의 최측근이죠.”

“···.”

“일이 정리되면 다시 보죠.”

나는 전화를 끊었다.

내가 전화로 라존(Razon) 가문의 이름을 이야기한 것은 주식을 사두면 오를 것이라는 의미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는 내가 필리핀에서 돌아가는 사정을 알고 있으니 나중에도 속일 생각을 하지 말라는 의미였다.

라존(Razon) 가문은 이른바 필리핀의 10대 기업 중 하나를 이끄는 가문으로 가문을 이끄는 엔리케 라존 주니어(Enrique Razon Jr)는 부통령인 아로요의 측근이었다.

아로요 부통령은 이번 에스트라다 반대 진영의 핵심인물로 만약 에스트라다가 물러나게 되면 대통령이 될 사람이었다.

나는 이번 에스트라다에 탄핵과 반대시위가 단순히 에스트라다의 부패에 대해 분노한 국민의 분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친서민적인 정책을 추구하는 에스트라다에 대한 기득권층의 사실상 쿠데타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배후에 미국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고 있었다.

아로요 대통령 집안은 미국과 꽤 가까웠다.

정확하게는 아로요 대통령의 아버지인 마스파갈 전 대통령 시절부터였다.

마스파갈 전 대통령은 미국에서 외교관 생활로 공직을 시작해서 대통령이 된 사람이었다.

나는 CIA 본부에서 교육을 받던 시절 마스파갈이 대통령이 되는 과정에 미국 정보기관 즉 CIA가 개입된 정황을 암시하는 문서를 본 적이 있었다.

라존 가문은 다른 필리핀 10대 가문이 스페인계나 화교계인 것에 비해 유일하게 미국계였다.

내가 에스트라다가 쫓겨날 것이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바로 이번 시위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생각이 맞는지는 CIA의 최말단인 나로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단지 추측에 불과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추측에 기꺼이 돈을 걸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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