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몽
# 022. 물결에 몸을 맡겨라.
회사에 출근하자 리안이 나에게 다가왔다.
“어제 유가 폭등한 것 확인했어?”
리안의 목소리에는 흥분이 그대로 드러났다.
“꽤 올랐더군.”
나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려 10%나 폭등했는데 왜 이런 표정이야?”
솔직히 말해서 그저 그랬다.
증거금을 제외한 순수한 투자금은 10만 불이었다.
레버리지를 10배나 썼지만 10% 올랐다고 해도 수익은 비용을 제외하면 10만 불도 이하였다.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이곳 홍콩에서 가장 연봉을 받는 팀원 연봉과 비슷한 금액이었다.
그렇지만 그다지 기쁘지는 않았다.
최근 몇 주 사이 투자로 매주 몇백만 불을 벌다 보니 돈의 액수에 무감각해지고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투자금은 고객의 돈일 뿐 내 돈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내가 관리하는 돈은 따지고 보면 내 돈이 아닌 것도 아니었다.
법적으로 이 돈을 투자한 회사 AAM은 내가 대표이자 유일한 주주였다.
에디 미첼이 살아 있을 때야 이런 법적인 관계는 형식적이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몇 주 동안 내 마음대로 투자를 하다 보니 욕심이 생기고 있었다.
지금 추세라면 굳이 중간에 끼인 회사들을 파산시키지 않더라도 도이치뱅크에서 빌린 이천만 불을 갚은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10만 불도 안 되는 돈을 번 것보다 OPEC의 결정에 대한 내 예측이 적중했다는 사실이 더 기뻤다.
그리고 그런 기쁨은 어제 발표가 났을 때의 일이었다.
지금은 지나간 감정이었다.
“많이 올랐네.”
“네가 유가가 며칠 사이에 10%나 오른다는 것 무슨 의미인지 모르나 본데···. 원유 선물 시장에서 10%가 오르면 거래가 일시 중단될 만큼 엄청난 일이야.”
“고마워. 그러니까 그만 팔아줘.”
“벌써 판다고?”
“네 말대로 10%면 오를 만큼 오른 거잖아.”
“그렇게는 한데 더 오를지도 모르니 조금 더 가격을 지켜보지?”
“됐어. 그냥 팔아. 기다려 봐야 얼마나 더 오르겠어. OPEC이 원유생산 감산한다고 세계 경기가 살아나는 것도 아니잖아. OPEC 회원국들이 감산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이 어디 있어. 그놈들은 서로 배신하기 바쁜 놈들인데···.”
아무리 공급을 줄인다고 해도 수요가 그보다 줄면 가격은 내려가게 마련이었다.
그리고 공급자들의 담합은 수요가 줄어들면 깨지게 마련이었다.
“뭐, 그렇게 이야기한다면야···.”
리안의 목소리에서는 나에 대한 원망이 조금 섞여 있었다.
자신으로서는 대박이라고 생각한 투자였는데 내가 자신과는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에 대해 섭섭해하는 것으로 보였다.
“수익률만 보면 100%에 가까운 수익률이지만 레버리지를 써서 그런 거잖아. 상승률만 보면 겨우 10%잖아.”
“겨우 10%라니? 10%라고 해도 며칠 사이에 10%가 오른 것인데···.”
리안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투자 명세 봤지?”
나는 리안을 보며 말을 이었다.
“보면 알겠지만 3주 남짓한 시간에 투자 수익률 10%가 넘은 투자가 벌써 3개야. 작년 연말에 대만 자취안 지수에서 10% 올 초에 나스닥 지수에서 13.1% 그리고 다시 대만에서 11.1%···.”
“아···.”
리안은 내가 이야기하는 수익률에 자신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나랑 일하려면 또다시 10% 상승률을 기록하는 것 불가능한 일도 아니야.”
“숫자로 볼 때랑 이렇게 당사자에게 말로 들을 때랑 느낌이 완전 다르네. 그래 내가 졌다!”
리안이 졌다는 표시로 손바닥을 위쪽으로 해서 두 손을 어깨높이로 들어 올렸다.
“그러니 잘 보이라고···.”
“투자의 천재님. 이제 어디에 투자할까요?”
리안이 물었다.
“어디기는 어디야. 당연히 필리핀이지.”
“정말 필리핀에 투자하려고?”
리안이 물었다.
“월요일에 말했잖아. 내 예상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투자한다고···.”
“너도 오늘 출근하기 전에 뉴스 봤을 것 아니야. 지금 필리핀은 말 그대로 무정부 상태라고···.”
“금방 또 의심하네.”
“미안···. 이 투자금에 대해서는 네가 결정하면 나는 따라야지. 정확히 무슨 주식을 사야 하는 거야? 필리핀은 너도 알다시피 대만과는 달리 뉴욕 증시에 상장된 필리핀 관련된 ETF가 없어.”
지금까지 나는 각각의 주식시장에 투자한다고는 했지만 실제로는 뉴욕 주식시장에 상장된 ETF, 그중에서도 블랙록(BlackRock)의 iShares에 투자에 투자한 것이었다.
상장 지수 펀드(Exchange Traded Fund)라고 불리는 ETF는 각 나라 주식시장의 추세를 따라가게 만들어진 상품일 뿐이었다.
ETF를 만들어서 시장에 상장시키는 대표적인 기업은 블랙록(BlackRock)은 iShares라는 서비스하고 있지만 모든 주식시장에 대한 상품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필리핀은 아직 없었다.
필리핀 주식에 투자하려면 직접 필리핀 기업들의 주식을 사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리안과 팀을 이룬 이유였다.
내가 무슨 수로 이름도 생소한 필리핀 기업의 주식을 하나하나 적정 주가와 주가 흐름을 보고 사들인다는 말인가?
주식은 사들이는 것에서 일이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나중에 팔아야 하는데 이건 더 번거로운 일이었다.
“필리핀의 라존이라고 알아?”
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필리핀 항만을 완전히 장악한 가문이잖아.”
“맞아. 라존 가문이 지배하는 회사를 중심으로 필리핀 대기업들 주식들을 구매해줘. 되도록 최근에 주가가 많이 내려간 기업이면 좋겠지.”
“에스트라다가 견디지 못하고 쫓겨날 거로 생각하는 거야?”
“기득권층들이 완전히 등을 돌린 것 같더라고···. 밝혀진 혼외자들만 8명이나 나온 사실에 분노하는 가톨릭 신자들도 많고 말이야.”
필리핀은 가톨릭 신자가 절대다수인 국가였다.
10여 년 전 마르코스 정권을 무너트린 시위와 마찬가지로 이번 시위도 EDSA 대성당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가톨릭의 지지 여부가 큰 영향을 준다는 의미였다.
“알았어!”
리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본격적으로 모니터에 거래 창을 띄우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나도 본격적으로 시작해 볼까!”
그는 전후좌우 합쳐서 여섯 개가 넘는 창에 하나에만 몇 개나 되는 종목을 띄웠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로서는 보기만 해도 눈이 돌아가는 모습이었다.
‘나는 시장의 흐름을 읽잖아. 그런 나와 돈을 나눠 먹으려면 저 정도는 해야지.’
나는 내 자리로 돌아왔다.
내 모니터들은 전부 현재 홍콩증시 시황과 종목들이 보였다.
나는 반년 동안 모니터에 나오는 기업 중 하나도 매매해 본 적이 없었다.
###
필리핀 시위가 점점 커지자 군의 참모총장인 안젤로 레예스가 전격적으로 에스트라다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사퇴를 거부하며 대통령 궁에서 버티던 에스트라다도 경찰과 군이라는 양대 공권력을 잃은 상태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에스트라다는 대통령 궁에서 쫓겨나 하야했다.
어떤 이들은 민중의 승리라며 축하했고 다른 이들에게는 사실상의 쿠데타라며 비난했다.
평가는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투자자들에게는 필리핀의 불확실성이 제거된 것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주 필리핀 주식시장은 무섭게 상승하기 시작했다.
필리핀 주가가 10% 이상 오르자 리안에게서 급하게 연락이 왔다.
“이거 너무 많이 오른 것 같은데? 어떻게 할래?”
“조금 더 오르지 않을까?”
내 생각대로 이번 에스트라다 사퇴에 필리핀 집권층이 있다며 조금 더 오를 것 같았다.
“전주에 필리핀의 주가가 안 좋기는 했지만, 연말부터 그 전전주까지는 주가가 꽤 올랐었어. 이 정도면 작년 3월 수준이야.”
리안의 말에 나는 필리핀 주가 차트를 띄워 살펴보았다.
그의 말대로 필리핀의 주가는 탄핵이 진행되는 과정에도 별로 나쁘지 않았었다.
그래도 내 예감은 아직은 더 상승할 것 같았다.
“조금은 더 오를 것 같은데···. 그럼 많이 오른 주식부터 처리하자. 나머지는 내일까지 좀 기다려 보자.”
“알았어. 어차피 결정을 내리는 것은 에드릭 너고 원래 계획도 내일까지는 기다려 보이는 것이었을까.”
“그렇게 하자. 내일은 다 처분하고 수요일에 편한 마음으로 쉬어야지.”
수요일은 중화권 최대의 명절인 춘절(春節)이었다.
중국 증권시장은 아예 지난주부터 2주간 폐장한다.
“지금 우리만 출근한 것 알고 있지?”
현재 우리 팀에서 출근한 사람은 사실상 나와 리안 둘뿐이었다.
중국 투자를 전문으로 하는 우리가 속한 팀은 팀원들이 대부분 홍콩인과 중국인이었다. 이들에게도 당연히 춘절은 가장 큰 명절이다.
중국인 직원들은 이미 본토로 떠난 상태였다.
나와도 주요 투자처는 물론이고 주식시장까지 폐장하는 상황에서는 할 일도 적었다.
다만 필리핀 시장에 투자한 나와 리안 둘만 나와서 근무를 하는 상황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필리핀 주식을 모두 팔아치웠다.
우리가 주식을 판 이후에도 필리핀 시장은 조금씩이나마 상승하고 있었다.
리안은 마치 피아니스트가 피아노를 치는 것처럼 키보드를 치며 하나하나 주식을 매도해 나갔다.
리안이 마지막 주식을 매도한 것을 확인한 나는 의자를 당겨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수고했어.”
“단순히 사고판 것뿐인데 뭐···. 단순 작업이지.”
주식 매매가 단순한 작업이라면 사람들이 증권사나 투자회사에 증권매매를 맡길 이유가 없었다.
실제 금융계에서 뛰어난 수익률을 얻는 사람들 대부분이 이런 초 단위에 승부에서도 누구보다 강했다.
“손만 보면 투자자 직원이 아니라 피아니스트라고 착각하겠는데?”
“실제 피아노 배운 것이 많이 도움이 돼.”
리안이 말했다.
“그래?”
“뉴욕 회사 중에는 피아노 전공자를 우대한다고 하더군. 초 단위 싸움에서 유리한 점이 많다고 말이야.”
리안의 말은 나로서는 조금 황당한 이야기였다.
피아노와 주식거래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분야가 도움이 된다니···.
“면접에서 손가락 길이를 보는 회사도 생기겠다.”
“어딘가에는 있을지도 모르지. 얼마 전 조사를 보니 오른손 약지가 중지보다 긴 트레이더가 다른 사람보다 수익률이 10% 이상 높다고 하더라고···.”
“농담이지?”
“농담이겠냐? 실제로 나온 조사야. 런던에 있는 금융회사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나온 실제 결과야.”
리안의 말에 나도 모르게 오른손 약지를 바라보았다.
내 약지는 중지보다 짧았다.
나는 리안의 오른손에 내 손을 가져다 대보았다.
리안의 손과 비교해도 손가락 길이 자체도 리안보다 짧은 것 같았다.
살아오면서 손가락 길이가 짧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평균적으로 내 손가락은 그리 짧은 편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리안은 내가 조금 전 피아니스트라고 생각했을 만큼 꽤 긴 편이었다.
리안의 약지도 중지에 비하면 짧다는 사실이 묘한 위안이 되었다.
“손가락 짧네. 그래서 트레이드를 못 하나?”
리안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손가락 길다고 그게 전부가 아니네요. 이 사람아! 중요한 것은 손가락보다 머리야!”
“꼭 손가락 짧은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더니 그런 사람이 여기도 있었네. 피아노를 쳐봐 손가락 긴 것이 다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테니까.”
리안의 말에 나는 문득 예전 피아노를 배우던 생각이 났다.
별로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나는 말을 돌렸다.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그만하고 돈이야기나 하자. 수익률이 얼마냐?”
“잠시만···.”
리안은 몸을 돌려 수익을 합산했다.
“15%가 조금 안 되네. 처음 계획대로 오늘 다 팔았어야 했어. 어제 판 주식 중에서 꽤 많이 올랐어.”
리안이 말했다.
15%는 나로서도 역대 최고급 수익률이었다.
모든 것이 잘 되고 있었다.
“됐어. 그 정도면···.”
나는 리안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필리핀 주가지수가 13% 정도 올랐는데 2% 추가 수익률이면 많은 거지. 손가락 짧은 내가 했으면 아마 13% 수익률도 얻지 못했을 거야.”
“손가락 짧은 사람의 자학개그인가? 어쨌든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네.”
리안이 내 대답에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음 투자처를 생각해 이미 생각해 놓았겠지. 다음 투자할 곳은 어디야?”
리안은 의욕에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
아쉽다고는 하지만 15%의 수익률이었다.
나도 저런 기분이 어떤 기분인지 알 수 있었다.
투자할 때 가장 재미를 느낄 때가 바로 일이 생각대로 되고 이익을 얻을 때가 아닌가?
“마땅히 투자할 곳이 없어서···.”
내 투자 방법은 무언가 변화가 있을 때 그 유불리를 따져서 투자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춘절은 동아시아 최대 명절이었다.
대부분의 정치 경제 일정이 잠시 멈추는 기간이었다.
“춘절 끝나고 생각해도 늦는 것은 아니지.”
리안이 상황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리안의 말을 들으며 동아시아 주요국의 증시와 기사를 확인했다.
“그냥 여기에 넣어놓자. 싱가포르.”
“싱가포르는 갑자기 왜?”
“오늘 보니 동아시아 증시 중에서 싱가포르 증시가 가장 적게 올랐네. 춘절 끝나고 말레이시아 부총리가 싱가포르를 방문한다는 소식도 있고···. 이익은 없더라도 손해는 보지 않을 것 같아.”
“싱가포르는 호재가 없어서 별로 주가가 오를 것 같지는 않은데···.”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던 리안이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큰 손해는 보지 않을 것 같으니 투자해도 손해는 없겠지. 투자는 어떻게 할까? 필리핀처럼 직접 싱가포르 주식시장에 투자하려면 지금부터 좀 바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은데?”
“됐어. 그걸 언제 싱가포르 기업들을 조사해서 개별 기업의 주식을 매입해. 너도 지난주부터 필리핀 기업을 하나하나 분석해서 매매하느라고 수고했으니 이번에는 그냥 밤에 뉴욕에 상장된 싱가포르 증시 ETF를 사는 것으로 하자.”
“이거 고맙네. 내 수고를 걱정해주고. 나야 나쁠 것이 없지. 그렇게 할게. 그리고···.”
리안이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내가 물었다.
“너 내일 뭐 할 거야?”
“글쎄. 아마 집에서 쉬지 않을까? 요즘은 바빠서 연락이 좀 뜸했더니 알던 사람들이 다 내일 약속이 있다고 하더라고···.”
홍콩에 와서 여자들을 만나기는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대부분 나도 진지하게 사귈 생각은 없었고 상대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상대가 너무 진지하게 다가와서 내가 먼저 거리를 둔 경우도 많았다.
홍콩에서 누구를 진지하게 만날 상황은 아니었다.
“그럼 내일 춘절 파티에 오는 것은 어때? 예전부터 알던 대인 한 분이 파티를 여는데 너도 참석하면 꽤 도움이 될 거야. 여기 홍콩에서 이름이 알려진 분들이 꽤 오거든···.”
좋은 기회였다.
홍콩은 중국에 반환될 때만 해도 금방이라도 망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중국의 성장으로 오히려 점점 더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리안이 참석하는 파티라면 홍콩은 물론이고 중국 본토에서 온 유력인사를 만날 기회였다.
“알았어. 고마워.”
인맥이 중요하지 않은 나라는 없었다.
그렇지만 중화권은 인맥의 중요성이 다른 모든 것을 뛰어넘을 수 있는 곳이었다.